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다섯 가지 장애 (20150725. 서울탁발법회 법문교재)

담마마-마까 2021. 9. 25. 09:00

알아차릴 대상인 담마 안에는 고유한 특성과 순차적 특성과 보편적 특성이 있습니다.

이제 그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담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수행 중에 일어나는 다섯 가지 장애는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여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결과를 낸다고 부처님이 명언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sanditthiko(산딧티꼬) 눈앞에 결과가 나온다」「akāliko(아깔리꼬) 시기를 묻지 않는다」 요컨대 곧 결과가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시대라도 실천하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결과가 나오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인 종교는 「사후, 천국에 들어감」의 이야기 입니다. 불교는 「지금 여기서 깨달음에 이른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고 있지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결과를 내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그것은 왜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해탈하고 싶다는 마음이 진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탈에 이르고 싶다고 하는 진지한 의욕은 그렇게 간단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탈에 이르고 싶다고 하는 진지한 의욕은 현명한 자의 특권입니다. 부처님께서 「지혜에 의해 집착을 버려 해탈에 이른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으므로 지혜와 해탈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완성하면 깨달음에 이르지만, 지혜가 깨달음은 아닙니다.

지혜에는 2종류가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현상을 관찰하면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또한, 불교를 잘 배워 고찰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조하고, 또 타인의 삶에도 대조해서, 부처님이 말한 것은 진리인 것임에 틀림없다고 납득합니다. 그것도 지혜입니다. 납득한 현명한 자가 이론은 완벽해서 실천 실행해 보자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수행을 시작하면 머지않아 좋은 결과를 냅니다.

 

현재 수행하는 사람들이 부처님 당시나 먼 옛날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불법이 진리이다! 라는 납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도에게는 삼보에 대한 믿음과 불법이 진리인 것은 당연한 이야기라고 자신만만해야 합니다. 불교를 배우고, 이해하고, 납득하여, 해탈에 이르고 싶다고 하는 진정한 의욕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5가지의 장애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수행을 하려면 제일 먼저 나타나서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덮개)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 다섯 장애를 싫어하거나 없애려하지 말고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담마로 받아들여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들도 원인·결과라는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무상한 성품을 지닌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기억해 두어 장애가 나타나지 않게 조심합시다.

 

1. (kāmacchanda) 오욕락에 대한 미련, 감각적인 욕망, 특히 성적인 욕망.

2. (vyāpāda) 성냄·싫은 기분, 적의·라이벌 의식·이유없는 격렬한 성냄.

3. (thīna-midha) 나태함과 졸음인데, 나태함은 마음의 힘이 둔하여 약해지는 것, 행동하고 싶지 않음·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 졸음은 졸려서 최종적으로 자버리는 상태.

4. (uddhacca-kukkucca) 들뜸과 후회인데, 들뜸은 마음이 들뜨고, 초조해 하고 있고, 열이 오르고 있고, 집중력이 없어 혼란스럽고 흥분해 있는 상태. 후회는 자신이 한 것을 생각해서 「아! 왜 저런 일을 했을까? 해선 안 되는 것을 해 버렸네! 나는 나쁜 사람이다!」등을 생각하여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

5. (vicikicchā) 의심인데, 의심은 Yes/No가 확실치 않은 상태, 들어오는 정보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것. 불교에서 「의심」은 매우 무서운 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정보나 데이터를 조사하려고도 하지 않고, 머리로부터 생각하여 부정하는 일도 의심입니다. 또한 이해함이 없이 통채로 받아들이는 일도 의심입니다. 「의심」이 있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지혜가 자라지 않습니다.

 

「번뇌는 인간에게 원래 갖춰져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욕구가 있고, 성냄이 있고, 혼란스런 마음이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의심」에 굴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은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행을 실천해도 머리는 망상·사고로 가득합니다. 왜 한없이 망상이 맴도는 것일까요? 결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치 않기 때문입니다. 망상은 답이 나오면, 결론에 이르면, 종료하는 것입니다. 수행할 때에도 「이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자신에게 하기 쉽게 이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 자아가 없다고 말해도 자의식은 있겠지! 자의식은 자아는 아닌 것인가?」 등을 생각합니다. 마음이 보이는, 들리는, 느끼는 등으로 알아차려서 멈추지 않는 한, 수행은 능숙하게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전 재산도 버릴 수 있고, 가족도 버릴 수 있고, 사치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개념에 대한 집착은 버릴 수 없습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이 「의심」이라고 하는 마음의 누름돌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장애는 실제로 수행에서 마음이 좀 고요해지면 망상, 통증, 졸림, 싫증, 의심 등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담마로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것에서 법의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장애를 그냥 장애라고 생각하면 수행을 할 수가 없고, 이들이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볼 수 있어야 수행이 됩니다. 이런 장애들을 탐·진·치로 반응하지 않고 대상을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알아차릴 때 수행이 발전합니다. 수행의 기초는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알아차림으로 이겨내는 작업에서 다져집니다.

 

수행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요소의 첫 번째는 탐욕(감각적 욕망)입니다.

 

예를 들어, 잘 해보려고 과욕을 부려서 자꾸만 호흡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려 드는 것은 현재의 대상에 대한 것이 될 테고, 호흡을 체크하다가 어제 먹은 맛있는 빵이 문득 생각나서 그 맛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것은 과거의 대상을 끌고 온 것일 테고, 그러다가 ‘그 빵집에 가서 내일은 어제 못 먹은 이런 저런 빵을 사와야지.’하고 있는 것은 수행 대상을 잊고 생각에 빠져 미래로 마음이 가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아! 이거 호흡을 놓쳤네!’ 하고 되도록 빨리 눈치채면 좋은데 이게 한없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흐를 수도 있습니다. 눈치챘을 때 바로 수행 대상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한순간 한순간 그렇게 탐욕이란 장애를 극복해 나가는 겁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미련은 부정관(Asubha-bhāvanā), 감각기관에 대한 관찰, 식사의 절제, 훌륭한 스승, 적절한 대화 등으로 다스리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집중력과 알아차림이 강하면 해결됩니다.

 

두 번째는 성냄(악의)입니다.

 

자꾸만 수행대상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다니는 자기 마음에 대해 특히 화가 납니다. 이런 ‘화’가 수행의 장애물입니다. 그런데 사실 화낼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이, 내 마음이 심하게 헤매다니는 것은 평소에 마음을 한곳에 머무르게 하는 훈련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리고 훈련을 하면 하는 만큼 길이 들게 돼 있기 때문에 조금도 낙담할 것이 없습니다. 자랑스러울 것도 없고 수치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헤매는 것을 지금 발견했으면 지금부터 꾸준히 열심히 하면 되는 겁니다.

 

수행의 길에서 한순간 노력한 것이라도 무의미하게 잃어버리는 법은 없습니다. 차곡차곡 마음의 힘으로 저장되는 것이니, 혹시 실망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폄하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마치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한 걸음도 헛걸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이 호흡에서 떠났음을 발견했다면, 발견한 것 자체가 참 잘한 겁니다. 거기서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서, 지금 들이쉬고 있는지 내쉬고 있는지 체크해보면 됩니다. 자꾸만 데려오다 보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예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성냄은 자애 수행, 기쁨에 대한 무량한 마음, 삼보에 대한 믿음, 평온함에 대한 집중, 업에 대한 숙고로 다스리면 됩니다.

 

이렇게 욕구와 성냄은 무언가에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제외됩니다. 욕구는 다만 가라앉히는 것만으로도 되지만, 성냄을 가라앉히려면 정반대의 마음인 자애를 마음에 만들면 간단하게 상쇄됩니다. 자비의 명상을 하면 좋습니다.

 

세 번째는 나태함과 졸음입니다.

 

평소에 별별 재미있는 것을 쫓아다니던 습관에 젖은 마음이 볼 때, 호흡이라는 대상은 지극히 무덤덤하고 평범한 대상입니다. 수행 초기에는 마음은 항상 불평합니다. ‘아~ 재미없어. 이걸 내가 왜 하고 있는 거지?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알람이 고장 났나....’ 호흡을 체크하고 있다 보면 자꾸만 호흡을 무시하고 마음이 도망갑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의 전부인데..... 마음이 정작 해야 하는 일거리에 태만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호흡을 놓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꾸벅꾸벅 좁니다.

태만한 중에 지금 태만하다고 발견하는 것, 졸던 중에 지금 졸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이 장애를 한순간 또 한순간 넘어가야 합니다. 앉으면 졸던 사람도 1년 만에 그걸 완전히 극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먹고 노력하면 되는 일입니다.

 

나태함과 졸음은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차림(Maran.ānussati), 환희심을 일으키는 대상을 회상함, 부처님을 따라 성인들이 가신 법의 길을 따라 가야함을 되새김, 분발심을 일으키면 됩니다. 또한 대상에 대해 부지런히 집중하고 있으면 졸음은 자연스럽게 물러갑니다. 졸음이 물러가면 머리가 칼날처럼 명쾌하고 주위가 빛나게 됩니다. 눈으로 보는 것 같은 빛이 아니라, 눈부신 것도 어슴푸레한 것도 아니지만 분명히 「밝다」는 것을 압니다. 물론 그 밝음도 올바르게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네 번째는 들뜸과 후회입니다.

 

너무 잘하려고 긴장해서 오히려 호흡을 자연 상태로 내버려두지 못하여서 수행 대상을 놓치는 것 같은 것이 들뜨는 장애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잘못했던 일 등을 그냥 반성하고 지금부터 잘하면 되는데, 지나간 자신의 잘못에 붙어서 자책하며 정작 지금 여기서 진행되고 있는 호흡을 놓치는 것이 후회입니다. 수행에서는 탐욕과 성냄의 좀 약한 상태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런 것을 느낄 때 ‘아 수행의 장애가 나타났구나!’하고 확인하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들뜸이 있을 때는 경전과 계율에 대한 독송, 차분하게 하나의 대상에만 몰두하면 제거가 됩니다. 또한 집중이 잘되면 들뜨기도 하는데 그것은 마음의 혼란이므로 주의해서 들뜨지 않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수행이 잘되지 않는다.」는 마음도 들뜨게 하므로 제거해야 합니다. 「잘되어가든 잘되지 않든, 다만 알아차림을 할 뿐」이라고 마음을 정합니다.

 

다섯 번째는 의심입니다.

 

‘이걸 수행이라고 하다니 내가 정말 바보 같다! 나는 불교도도 아닌데.. 난 안 할래.’라고 생각하거나, ‘수행법은 정말 단순하면서도 대단한 것 같은데 나 같은 사람이 이런 걸 해도 될까? 나한테는 너무 힘들다! 나는 여기 안 맞는 사람 아닐까? 이걸 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생각들이 다섯 번째의 수행 장애라고 합니다.

앞의 의심에 대해서는, 전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2천 6백 년 전부터, 또 지금도 닦고 있고, 그 사람들 모두 불교도도 아니었고, 바보도 아니었습니다. 다른 종교를 갖고 있더라도 종교는 종교대로 소중하게 지키면서 그와 무관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일이기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종교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에 관계 없이, 시대를 뛰어넘어 수행하는 바른 방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뒤의 의심인 ‘나는 자격이 안 되나 보다.’라는 생각은 자신을 실제보다 너무 낮추어 보는 착각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불교 이론을 조사하면서 확신이 생겨 이 수행을 한 사나흘 바짝 하면 되는 줄 아는 것도 착각입니다. 노력할 때 노력하면, 그 노력이 쌓여 누구나 되게 돼 있으니 포기는 너무 섣부른 것입니다.

 

의심은 삼보에 대한 믿음, 적절한 대화로 원인 결과에 대해 고찰함, 모든 현상을 삼법인에 비추어 지혜롭게 행함으로 제거됩니다. 일어난 마음은 제대로 결과를 내기 때문에 「역시 이 가르침은 올바르다.」 라고 확신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혐의나 불안, 의심도 날려버려야 합니다.

 

5가지 장애는 지혜를 약하게 하는 번뇌이기 때문에 그것이 제거되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나타납니다.

 

결국 다섯 가지 장애는 장애가 아니고 알아차릴 대상으로서 수행의 재료입니다. 수행자가 다섯 가지 장애를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진리를 볼 수 있는 힘이 쌓이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계속 장애가 수행자를 휩쓸어 버립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수행자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그런 현상에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리고, 그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즉시 몸으로 돌아와 가슴의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다가 느낌이 사라지면 다시 수행의 주 대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럴 때 수행자는 장애에서 알아차림의 힘을 키우고 장애를 극복하게 됩니다.

 

이 과정은 알아차림을 하려는 수행자에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힘과 참고 견디는 인내력을 키워줍니다. 이런 노력과 알아차림이 결국 고요한 마음 상태를 얻게 하고, 드디어 생멸하는 법의 성품을 보게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