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마음에는 게으름이라는 병이 있다. (20160701)

담마마-마까 2022. 4. 1. 09:10

* 마음에는 게으름이라는 병이 있다. (20160701)

 

부처님께서는 완전하게 진리를 설하셨고, 누구라도 손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지도하셨으며,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누구라도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에는 맹목적이거나 미신적인 특색은 하나도 없고, 고행이나 특별한 종교적인 관습 등은 요구하고 있지도 않고, 사람들의 전통이나 관습 등에도 거슬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불교를 실천해 보려는 사람들의 수는 적습니다.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들은 매우 드뭅니다. 그것은 왜일까 하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문제가 일어나면 다른 대상, 다른 사람 탓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경전은 매우 쉽게 설해져 있으며, 어려운 부분도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천 수행하는 것이 어렵다거나 몇몇의 인간밖에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깨달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사념처경」의 마지막에 실천하여 성공하기 위해서 걸리는 시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명확하게 강조하고 싶기 때문에 처음은 7년 안에 성공한다고 말했습니다. 7년 안에 해탈의 목적에 이른다고 보증하는 것조차도 세상에서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러한 약속은 다른 종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과 동시대의 자이나교에서도 고행 하나만으로도 12년이 걸린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신을 믿는 다른 종교에서는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류의 최종 심판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단 7년이라도 정진한다면 해탈이라고 하는 목적에 이르는 것을 보증합니다. 경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7년도 걸리지 않는다, 6년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걸리는 시간을 줄여 갑니다. 차례로 줄여서 일주일간이라도 정진하면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종 목적에 도달한다는 말로 경전을 끝맺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경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또한 경전의 모르는 부분은 상세하게 주석서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주석서 중에 청정도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붓다고사 장로가 인도에서 스리랑카의 마하 위하라(대사)를 찾아와서 「싱할라어로 기록되어 있는 주석서를 빨리어로 번역한다면 온 세상의 불교도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하 위하라(대사)파의 장로들은 그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인도에서 온 붓다고사 장로가 어느 정도로 불교를 이해하고 있는지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서기 5세기 무렵의 시기에는 인도에서는 대승 불교의 여러 분파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전승된 청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이런 사상이나 교리가 섞이는 것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하 위하라의 장로들은 붓다고사 장로에게 상윳따 니까야의 게송을 하나 주어 주석을 쓰도록 명했습니다. 「청정도론」은 붓다고사 장로가 마하 위하라(대사)파에 제공한 자신의 논문인 것입니다. 그 청정도론의 수행 부분에 들어가면 사마디 수행, 위빳사나 수행과 관련된 정보가 총 망라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수행할 때는 그 텍스트에 쓰여 있는 것을 모두 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합니다. 수행 방법도 스스로 자신의 성격에 맞는 것을 결정할지, 스승이 선택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인지 「청정도론」에 쓰여 있습니다. 너무 자세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실천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었던 것은 옛날 사람들뿐이다」라는 체념에도 빠집니다.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고 주석서를 근거로 하면 수행은 우선 어려운 작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전을 근거로 해서 수행을 시작하면 주석서는 위없는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는 이유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가르침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시대에도 부처님께 직접 지도를 받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경전에서는 그것도 숨기지 않습니다.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었던 사람들의 경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낙캇따(Sunakkhatta)라는 릿차위(Licchavi)족 사람이 불교를 비난하며 환속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박가와곳따(Bhaggavagotta)라는 유행자가 부처님께 사실인지 아닌지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대로라면서 인정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낙캇따가 출가생활을 멈추고 불교를 비난하는 것은 릿차위족의 한사람으로서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의 잘못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 일화는 중부 경전의 24번째 빠띠까경(Patika Sutta)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생이 무능하기에,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에 공부할 수 없다」 「부모가 엄격했기에, 지금은 자신감이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등의 변명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선생이 무능해도 자신 스스로 힘써서 성공한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가 엄격했어도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갔어도, 좋은 환경조건의 부모 밑에서 자랐어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을 정리해서 결론을 내리면, 문제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환경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라는 것이 됩니다.

수행의 경우도 가르침이 나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가르침에 대해서 어떠한 접근을 하는가에 의해 결과가 바뀝니다. 전의 일화에 나온 수낙캇따는 초능력에 매료되어 출가했습니다. 부처님에게 초능력을 보여주길 바랐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본래 목적과 정반대이므로 그가 환속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를 배워도, 불교도가 되어도, 해탈에 이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부처님이 말씀하

신 원인을 고찰해 봅시다. 제일 처음 거론되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도, 수행해도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 사람도, 부처님께서는 「게으름 피우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게으름 피우는 자로 불리는 것은 누구라도 싫어합니다. 게으름 피운다고 말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과를 내지 않았으면 결국은 게으름 피우는 자가 됩니다.

 

게으름은 단순한 성격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에 있는 뿌리 깊은 본능의 하나입니다. 아무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사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행위입니다.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쳐서 안전을 확보하면 좋은데, 생명은 괴로움으로부터 괴로움으로 도망 다닙니다. 도망친 장소도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괴로움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정 없이 도망치는 처지가 됩니다. 윤회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오래 앉아 있으면 괴롭기 때문에 일어서지만, 다음에는 서 있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들이마시면 괴로워지기 때문에 토합니다. 그러나 토하면 또 괴로운 것으로 다시 들이마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들이마시거나 토하거나 합니다.

생명의 마음 안에는 이 괴로움은 어떻게 안 되는 것이라는, 마음 놓일 수 없는 것이라는 마음이 존재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공부하는 것, 일하는 것, 청소, 세탁, 요리하는 것 등을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기 때문에 합니다. 「할 수 있으면 멈추고 싶다」라는 마음은 게으름 피우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멈추고 싶다는 기분에 따라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면 편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에 빠집니다.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해야 할 일, 공부 등을 멈추어

보면 일순간도 편해지지 않습니다. 긴 세월에 걸쳐 괴로움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됩

니다. 게으름 피우고 싶은 기분은 일관되게 있으므로 어떤 일도 방해를 합니다. 공부

를 해도 기대 그대로의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일을 해도 기대 그대로의 수입이 생

기지 않습니다.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사회를 발전시켜도 기대대로는 되지

않습니다.

 

사는 것은 괴로움이기에, 해탈에 이르는 것이 궁극의 행복이라고 이해해서 수행에 힘써 봐도 게으름 피우는 것이 방해를 합니다. 게으름 피우는 것에 지고 싶지 않아서 무모하게 해도, 무모하게 하는 것 자체도 게으름 피우는 것입니다. 결과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자체가 괴로운지 편한지가 아니라, 좋은 결과가 되는지 아닌지를 신경 쓰는 것입니다. 좋은 결과가 된다면 일이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포인트로부터 보면 무모하게 노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알 것입니다. 항상 상황을 관찰해서, 방법을 개선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능력도 필요합니다. 신앙으로, 맹신으로, 추측으로, 사물에 도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지혜의 완성입니다. 젊은 시절에 수행하는 편이 결과가 빠른 것이 당연합니다. 체력이 있는 젊은 사람에 비하면 나이 드신 분들은 게으름뱅이입니다. 체력이 필요한 일은 체력이 있을 때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가 필요한 일은 지혜가 있을 때 실천합니다. 이것은 「시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게으름 피우고 싶지 않은 사람은 시기라고 하는 조건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가족, 자식, 일 등의 책임이나 문제가 없는 젊을 때 실천한다면 바른 시기입니다. 시기를 어긋나는 것이 진짜 게으름 피우는 것입니다.

 

게으름뱅이에게는 또 다른 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변명」이라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알기 쉽게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게으름뱅이는 「너무 덥기 때문에 지금 일은 할 수 없다. 지금 너무 춥기 때문에 일은 할 수 없다. 지금 배가 고프기 때문에……. 지금 배가 부르니까……. 지금 오후이니까……. 지금 아침 일찍 이기 때문에 일은 할 수 없다」 등으로 말합니다. 결국 시기를 잃습니다.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투가 나빴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았다. 다들 놀고 있었기 때문에 나만 일하는 것은 바보스러워 멈추어 버렸다. 일 자체는 별일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기로 했다」 등의 변명도 있습니다. 시기를 어긋나기 위해서 변명을 찾는 사람은 생애의 시기를 어긋납니다. 사물은 자신의 희망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릴 수 없습니다. 봄은 꽃놀이하기 좋기 때문에 하는 일을 뒷전으로 하고 놀면 안 됩니다.

 

다른 비유로 생각합시다. 임산부에게 진통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그때 「오늘 친구와 식사하는 약속을 했으므로 출산은 내일로 하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으름뱅이의 머리에는 여러 가지 변명의 망상으로 가득합니다. 변명 그 자체가 망상입니다. 언제나 사람에게는 「지금 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실천해야하는 것이지 내일이 되면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배가 고프다면 지금 먹어야 하는 것이지, 모레 밥을 먹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 밥을 먹었기 때문에 지금 먹지 않아도 괜찮은 것도 아닙니다. 성립되지 않는 망상으로 머리를 쓰면 지적 능력과 이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망상에 빠지는 것은 정신병을 부르게 됩니다.

 

게으름뱅이 중에서도 가끔 재미있는 성격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코앞에 닥쳐서야 초조하고 무서워하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계속 게으름 피우며 놀고 있다가 시험이 코앞에 닥치면 철야하며 공부합니다. 순식간에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결과는 시험을 망치거나 시험 중 졸음이 와 창피를 당합니다.

 

부처님 시대에 사위성에 있던 무리들이 출가해서 명상지도를 받고 마을을 떠나 숲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만 수행하러 숲에 들어가지 않고 마을에 머물렀습니다. 숲에 들어온 비구들은 3개월이 지나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사위성으로 돌아가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시간을 내어 친절하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것을 본 그 비구가 「나도 하룻밤 만에 깨달아 부처님 마음에 들도록 하겠다.」라며 철야로 수행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경행 수행하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부러뜨려 버렸습니다. 그의 큰 고통소리에 동료 비구들이 모여 아침까지 치료를 했습니다. 아라한이 된 비구들에게는 어느 신도의 공양청 약속이 있었는데도 거기에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비구들에게도 폐를 끼치게 된 것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 아무리 노력해도 게으름뱅이는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appamadena sampadetha(압빠마데-나 삼빠데-타)」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하십시오)

 

● 이번 포인트

 

• 노력해도 성공에 이르는 사람은 적습니다.

• 수행해도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은 보기 드뭅니다.

• 성공에 이르지 않는 이유는 게으름 피우는 일입니다.

• 무모하게 노력하는 일도 게으름 피우는 일입니다.

• 게으름 피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