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혼은 망상의 부산물이다. (20160603)
무아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아마 이 말을 여러분들은 「실체가 없다」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럼 실재하는 이것은 뭐야?」라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일반적인 무아의 정의는 「변화하지 않는 상주하는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아는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이므로 어떻게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아의 이해가 바르지 못하면 불교 그 자체를 틀리게 이해해 버립니다.
우선 간단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알아봅시다. 모든 현상은 무상입니다. 무상=고=무아인 것입니다. 그 말은 무상을 이해하면 무아도 이해한 것이 됩니다. 무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왜 모든 현상에 대해 3가지의 용어를 사용했는지,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는 것인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하나의 용어만으로는 완전하게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붓다의 발견을 무지한 세계가 가볍게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무지한 사람을 압도할 목적이 아니라,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측면에서 완전하게 다 말할 목적으로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삼상을 말씀하셨습니다.
무상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알기 쉬운 단계입니다.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지식인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누구라도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고(괴로움)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괴로움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그러나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있다」고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에 무상만큼 간단하게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괴로움이란 모든 무상한 현상을 생명체의 입장에서 보면 발견하는 사실입니다.
무상이라는 것은 나도, 돌덩이도 무상입니다. 괴로움의 경우에는 「나에게는 괴로움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돌덩이도 괴로움이다」라고 말해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무아는 좀 더 어려운 개념입니다.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 종교가들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해서 생각해 낸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은 몸이 망가져도 결코 망가지는 일 없이 계속되는 영원불멸의 영혼·실체가 있다고 하는 개념입니다.
사실은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실재한다고 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증거가 없는 개념을 의심하지 않고 전제함으로 인해 많은 종교와 철학을 만들었습니다. 모두들 영혼이 무엇인지 여러 가지 논의를 했지만, 도대체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지, 있다면 그 증거는 무엇인지 조사했던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혼을 강하게 주장하게 되고 많은 이론이 나오고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에 반발해서 「영원한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한 무리의 사상가도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논점은 「신체는 물질로 되어 있다. 물질의 구성으로 감각기관이 나타난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하지만, 신체가 망가지면 감각기관도 망가져 그래서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유물론입니다. 부처님의 시대에도 유물론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상도 증거에 근거해서 도달한 결론이라기보다, 미신적으로 신앙하고 있는 영혼론에 대한 반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에 「영혼이 있다」라고 생각해 낸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속 살아가고 싶은데, 가부간의 대답이 없고, 죽어가는 것에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살아가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고 하는 기분을 언어로 만들면 영원·불사라고 하는 개념이 됩니다. 신체가 망가져도, 망가지지 않는 영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하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침착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영혼이 있다고 하는 망상 개념에 집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개념을 악하고 더러워진 감정으로 한층 더 발전시켰습니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불사되는 영혼이 있다고 말하면 자신은 우등생이라고 느끼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일부의 종교에서는 영혼은 인간에게만 있는, 다른 생명에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가르쳤습니다. 그 덕분에 동물들을 마음대로 괴롭힐 수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모두에게 불사의 영혼이 있다고 하면 또 마음에 들지 않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여러 가지 차별이 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주인도, 종업원도 있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있습니다. 또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나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후에 모두 평등하다고 말하면 납득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차별이 생깁니다. 그래서 영원히 행복하게 되는 영혼, 영원히 불행하게 되는 영혼 등의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폭력적으로 사람을 억제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는 사람의 관리는 할 수 없습니다. 특히 마음의 관리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은 모든 영혼을 창조하고, 지배하고, 관리하고, 최종적으로 심판을 행하는 절대자(우두머리)의 존재를 망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절대자에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최종적인 심판에서 유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마음이 넓은 사람들도 영혼론에 대해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생명에 영혼이 있다, 또는 삼라만상 모두에게 실체인 영혼이 있다 등으로 생각했습니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의 개념을 만들어 냈지만, 거기서 또 의문이 일어났습니다. 「왜 우리는 불이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세상 사람들은 영혼을 다양한 형태로 경험하는 것일까?」라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서 영혼은 마야(환상)를 인식한다, 영혼에 무명이 있다, 영혼은 더러워져 있다는 망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이 결함을 없애는 노력(수행)을 하지 않으면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혼론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선 영혼이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영혼이라고 하는 개념을 진리로서 설정할 수 없습니다. 영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개념일 뿐이기에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감정일 뿐입니다.
영혼이 영원불멸하고 절대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면 사람이 선행을 하든, 악행을 하든 영혼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있다고 한다면 이 사회에 그보다 더 위험한 개념은 없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행위에 의해 영혼이 더러워지거나 깨끗하게 되거나 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영혼은 별스런 것도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입고 있는 옷과 같습니다. 더러워지면 세탁해서 깨끗하게 만들고, 그렇게 반복해서 씻으면 헤져서 결국 버리게 되는 옷과 같습니다. 행위에 의해 깨끗해지거나 더러워진다면 결국은 영원불멸하는 영혼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논리대로라면 영혼도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절대 망가지지 않는 우수한 것이라면 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들은 사고하는 것, 감정이 있는 것, 신체가 변화하고 있는 것, 기분이 변화해 나가는 것, 생각이 변해가는 것 등은 아주 쉽게 증명할 수 있는데, 절대적 존재의 증명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포도 속에 씨라는 종자가 들어가 있듯이, 신체 속에 영혼이 들어가 있다면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이 주인이고, 우두머리이며, 신체가 고장나도 망가지지 않는, 수승한 것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나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태국 불교계에는 상가라자(승왕)가 계십니다. 태국 승려 중에서 누구보다 훌륭한 분이며, 태국 불교계의 상징인 존재입니다. 어느 누구도 승왕이 있는지 없는지 의문시하지 않습니다. 설혹 만날 수 없어도, 존재에 대해 부정하지 않습니다. 「발견은 매우 어렵지만,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 「존재한다는 증명은 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다」라는 것은 만담과 같습니다.
영혼이 있다고 믿으면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 강렬한 집착, 애착이 일어납니다. 「구원되는 영혼」과 「구원되지 않는 영혼」이라고 하는 개념이 일어나기 때문에 무서운 차별 의식이 일어납니다. 영원한 천국에 직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주 쉽게 테러 행위로 자폭할 수도 있습니다. 영혼이란 살아가고 싶고, 죽고 싶지 않고, 쾌락에 빠지고 싶은 사람들이 실현될 수 없는 거대한 망상으로 만들어 낸 개념이므로 해탈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그 거대 망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안 되면 안 됩니다. 이성에 근거해서 객관적으로 현실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교의 무아는 유물론자의 무아와는 다릅니다. 「나가 있습니까? 아니오. 없습니다. 무아입니다」라고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대답은 인연론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원인에 의해 나타나서, 원인이 바뀌면 사라져 버립니다. 원인에 의해 나타난 것에는 「자립」은 없습니다.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의 존재는 일시적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여러 가지 행위를 합니다.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쁜 결과가 있고, 좋은 행위를 하면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을 매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보거나 듣거나 하는 경우에 즐거워하거나 싫어하거나 합니다. 그것에 따라 마음에 욕구가 나타나거나 분노가 나타나거나 합니다. 욕구, 분노 등의 더러워진 마음으로 반응하면 더러워진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나쁜 결과가 됩니다. 원인으로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누구의 개입도 필요 없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집이 망가집니다. 누군가가 부술 필요는 없습니다.
인연론으로부터 보면 이 세상의 현상 중에서 비슷한 것, 동일한 것은 하나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생명은 개개인이 다릅니다. 그래서 도덕이 성립됩니다. 사람의 노력이 성립됩니다. 성장이 가능합니다. 해탈도 가능합니다. 영원한 지옥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비록 죄를 범해도 그 죄에 적절한 불행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연론은 진리· 사실일 뿐만 아니라 매우 공평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을 인연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성립되므로 인연을 아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생명에게 있어서 인연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고 심원한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주의 모든 것에 관한 인연은 몰라도, 자기 자신 생명의 시스템에 관한 인연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만으로도 해탈에 이르는 것이며, 모든 괴로움을 넘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생명에 관한 인연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과 달리 인간은 생명의 인연이 아니라, 주위의 일의 인연을 조사하여 현대 과학이 발달했습니다. 아직도 발견해야 할 인연이 많이 있기에 현대 과학은 성장해 갑니다. 물리의 인연의 법칙을 발견했기 때문에 비행기도 발명할 수 있었습니다.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로부터 먼 우주로 가는 일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분노에 의해, 악령의 힘에 의해 사람이 병든다고 생각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병이 드는 원인을 발견했기에 아주 쉽게 병을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로 해결하려는 자는 폐업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을 만지거나 조사하는 것은 수월하게 하지만 마음이란 무엇인지 조사하는 방법은 모릅니다. 그래서 사회를 발전시키는 여러 가지 발명품으로 세계는 넘쳐나고 있지만 사람의 정신적인 고민은 그대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민, 괴로움은 물질의 문제는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발견했습니다. 꽃을 보고 즐거워지는지 슬퍼지는지는 그 꽃을 보는 사람의 마음 나름입니다. 「1만원이나 받았다」 「받은 것은 단 1만원이다」……이 2개의 표현은 실재 1만원을 받고 나타나는 행복과 불행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또 한사람을 저급한 불만에 빠뜨린 범인은 1만 원이라는 돈이 아닙니다.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물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모두 알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과학으로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지만 불교에서는 확실히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인연론을 이해한 사람은 「나·나의 영혼」이란 이론은 아무 근거도 없는 무지한 사람들의 거대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압니다. 그것은 웃자고 하는 소리 이외의 무엇도 아니라고 압니다.
또한 사람들은 신체의 감각을 영혼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신체의 감각입니다. 즐거운 감각에 집착해서 괴로운 감각을 없애려고 합니다. 늙는 일도, 죽는 일도 싫은 것은 괴로운 감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감각은 격렬하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신체에 닿는 것에 의해 감각은 바뀝니다. 감각이 무상하지 않다면 대단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를 들어 혀에 각설탕 한 개를 두었다고 합시다. 달다고 하는 감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상이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혀로 다른 맛을 맛볼 수 없게 됩니다. 차라리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살아갑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감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감각에는 괴로움도 있고, 즐거움도 있고, 불고불락도 있고, 하나의 감각만 계속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감각은 인연에 의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감각이 나이며, 나의 영혼이며, 영원하다」라고 오해해서 집착하고 윤회하며 괴로워하지만, 이성이 있는 사람은 감각에 대한 집착을 모두 버려버려서 해탈에 이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의 말씀입니다.
● 이번 포인트
•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아(영혼)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 그들은 증명하지 않는 채 영혼에 대해 말합니다.
• 무상은 괴로움이며 무아입니다.
• 무아는 인연론입니다.
• 무아를 아는 사람은 해탈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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