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후회는 미덕이 아니라 자기 파괴이다. (20160513)

담마마-마까 2022. 3. 20. 09:10

* 후회는 미덕이 아니라 자기 파괴이다. (20160513)

 

부처님께서 사위성 근처의 기원정사에 머무시고 계실 때의 일화입니다.

 

앙굴리말라는 꼬살라 국왕의 상담역이었던 각가 대신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이 점을 쳐 보았는데, 이 아이는 장차 무자비한 살육자가 되어 나라를 망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왕은 「그는 혼자서 폭동을 일으키는가, 그렇지 않으면 패거리 집단을 만들어 일으키는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부친은 「완전히 혼자서 행동하는 인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늘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는 스승에 대한 예의로 이 정도의 대국에서 한사람 정도는 아무런 문제없다고 생각해서 「살려 두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기대를 담아 아들에게 「아힝사까」(생명을 해치지 않는 이라는 의미)라고 이름 붙여주며 학문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아힝사까는 매우 예의범절이 바르고 머리도 좋아서 학교의 선생님이 자기 자식과 같이 귀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동급생들의 질투를 사고, 질투한 학생들은 거짓말로 소문을 내어, 선생님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선생님은 자신이 부정한 짓을 하지 않고 그를 죽이려고 마음먹으며 아힝사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신에게 공양을 올리기 위해 1000명의 생명을 신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나 대신에 그것을 행하라. 그러면 너에게만 비밀스런 가르침을 전해주겠다.」 스승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듣는 아힝사까도 이 이야기는 거절했지만, 하지 않으면 가르침을 완성할 수 없다는 위협에 납득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산에 틀어박혀 살인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죽인 사람의 손가락을 한 개씩 모아 고리를 만들어 목에 걸쳤습니다. 앙굴리말라(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라는 의미)라는 별명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꼬살라 왕국을 위협하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앙굴리말라를 붙잡는 것을 왕의 군대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후에 999개의 손가락 목걸이를 가지고 있던 그는 부처님을 만나 출가해서 깨달음을 이룹니다.

 

이제야 완전하게 죄악으로부터 피한 그는 그 마음의 평안을 칭송하며 「사람은 죄를 범해도, 후에 그것을 선으로 가린다면, 구름으로부터 나오는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라는 게를 외쳤습니다.

 

불교는 범한 죄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후회할 때마다 죄의 무게는 배가합니다. 후회할 때마다, 범한 죄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재현됩니다. 「나쁜 일을 해버렸다, 해선 안 되는 것을 해버렸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계속 어두워지고 낙담해 버립니다. 마이너스 사고만이 증가합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파괴가 됩니다. 후회는 「분노」라고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후회하는 대신에 범한 죄가 묻히도록 더 많은 선행을 하는 것이 올바른 대처법입니다.

 

「반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성뿐이라면 원숭이도 할 수 있다」는 조크가 있듯이 반성하려면 「적극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라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불교 용어에는 「반성」이 아니라 「참회」입니다. 완전하게 깨달은 사람 이외에는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철저하게 비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면 자신이 우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므로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으로 「나는 올바르다, 완벽하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 행위는 비난받는 측의 죄보다 더 무거운 죄가 됩니다. 자애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고, 사람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비판은 필요하지만, 비난은 죄입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은 평소에 신경 쓸 정도의 죄를 범했던 적이 없어도, 비난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큰 죄가 되어버립니다.

 

우리 모두는 매일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에 무엇인가 나쁜 일을 반드시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생활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만한 태도가 없어지고, 겸허하게, 더욱 조심해서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잘못을 범할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긴장감이 없으면 어떤 인간이라도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겸허한 마음, 정직한 마음으로 「참회」를 하는 생활습관을 몸에 익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성만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것과 같이, 매일 「참회했기 때문에」라고 해서 날마다 이기적이고 방일하게 생활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전혀 속죄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지금 범한 잘못과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범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결의입니다. 「두 번 다시 어떠한 잘못도 범하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그 「결의」는 범한 죄의 나쁜 과보를 경감해 줍니다.

 

「악행은 후에 선행으로 가리면 된다.」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도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윤회하는 한 업은 결과를 내지 않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많은 선한 일을 했기 때문에 지은 죄가 없던 일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다만 행한 선행이 너무 커서 윤회하는 동안에 그쪽의 결과를 받고 있는 동안은 범한 죄의 과보가 나타날 차례가 없어질 가능성은 있습니다.

 

악행을 범한 사람은 참회를 하고, 왜 죄를 범했는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탐·진·치에 조종되어 죄를 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탐·진·치가 있는 한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지는 않아도, 다른 잘못은 범할 우려가 있다」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압니다. 그것을 알면 수행에 힘써서 탐·진·치를 진심으로 전부 없애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이 모든 선행 중에서 최고의 선행입니다. 수행을 완성하면 처음으로 「잘못을 범하지 않는 인간, 완전한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는 윤회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업이 아무리 기다리고 있어도 차례가 없습니다. 깨달음을 이루는 것만이 완전한 속죄가 됩니다.

 

● 이번 포인트

 

• 사람은 지은 잘못에 대해 후회가 아니라 참회(반성) 해야 합니다.

• 잘못을 범하는 인간이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 깨닫지 않는 이상 선한 일을 행해도 지은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 모든 죄의 원인은 탐·진·치입니다.

• 당신의 마음속의 탐·진·치가 당신의 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