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올바른 수행자란 (20170928)

담마마-마까 2022. 6. 17. 09:10

https://youtu.be/x_wxtRM88w8

* 올바른 수행자란 (20170928)

 

다음주는 추석이기 때문에 한주 쉬고 그다음주 목요일날 해제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12일이 되는거죠? 12일날.

(수행자 질문 :스님 그럼 한주 쉬는 날에는 게송 전화한통 안해도 됩니까?)

안 해도 됩니다. (수행자 대답 : 감사합니다.)

 

오늘은 프린트물 나간 거 있죠? 그게 21페이지로 되어 있습니다. 저번에 할려다가 경전을 좀 더 찾아봐야 되는 것이 있어가지고 마무리 해가지고 프린트물 내주는 겁니다.

수행을 통해서 예류과에 이르는 길과, 그렇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을 열심히 듣고, 그래서 거기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바르게 숙고하는 것으로 인해서 예류과에 이르는 길, 두 가지 길에 대한 것들을 쭉 적어놓았습니다.

우리 홈페이지에도 보면 "현상론이 정견이다" 하는 걸 하나 올려놓은 것이 있던데, 실제로 수행은 견해가 바로 서야만이 수행을 제대로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견해가 바로 서야만이 일상생활을 할 때 바르게 생활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법을 듣는 것들을 자주 해야 됩니다.

부처님도 "내가 법을 설할테니까 와서 들어라. 그래서 그것을 너희들이 숙고하라"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법을 듣고 나서 그것이 바른지 안 바른지에 대한 것들을 바르게 고찰하고 또 살펴봐가지고 '아, 이것이 바른 길이기 때문에 실천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 그렇게 했을 때 견해가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아, 내가 이 길을 따라야 되겠다', 아니면 '내가 아직은 부족하니까 조금 더 부처님 말씀을 더 배워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들이 일어날 수가 있게 됩니다.

 

실제로는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법을 듣고 바르게 숙고하는 것이지, 견해가 확립됐다고 해가지고 자기 견해를 내세우는 것이 바른 것은 아닙니다.

일간에서는 스님들 간에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정견은 어떤 견해도 가지지 않는 것, 어떤 주의·주장도 하지 않는 것, 그걸 차라리 정견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하는 얘기까지 하기도 합니다.

 

어떤 현상이든 변하고 그것들에 대한 어떤 것에도 특정할만한 주체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면 그 어떤 것에도 집착을 하지 않게끔 되는데, 그래서 그대로 흘러가도록 놔둬버려야 되는데, 그런데 대부분은 견해를 가진다고 하면,

그것이 정견이든 사견이든 간에 견해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그 견해에 집착을 하게끔 됩니다. 그렇게 집착을 하는 상태가 돼서 자기의 견해가 성립된다고 하는 것은 정견의 영역에는 속하지 못한다 하는 뜻입니다.

 

변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집착할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이미 흘러가버렸기 때문에! 이미 변해버렸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집착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것이 나의 생각이든 아니면 어떤 대상이든 그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있고 '아, 이것이 내 것이다' 하는 마음이 생겨나버릴 것 같으면 이미 그것은 정견의 영역에는 속하지 못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견해가 바르게 확립됐을 때 대상도 있는 그대로 관찰을 하게 됩니다. 대상은 실제 생겨난 것은 빠른 속도로 변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하는 것들을 볼려고 하지 않고 대상을 집착을 하게 되면, 대상이 변하지를 않게 됩니다. 또는 수행할 때 밖의 형태들에만 계속 마음을 두다 보면 실제적인 내용들은 멀리 도망을 가버리게 됩니다.

 

보통 우리가 수행자라고 얘기하면 '사마짜리야가 갖추어진 자들을 수행자라고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져 있을 때, 그래서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끄달려 들어가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로 있을 때 그사람을 '수행자'라고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을 하더라도 그것을 내가 들었을 때 그것으로 인해서 성냄이나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내가 말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모든 대상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게 되고 이런 상태가 됐을 때 그것을 '사마짜리야(samacariya)'라고 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또 생각하고 하는 것에서 탐·진·치가 끼여들 여지가 없이 행하게 되는 자를 그것을 '바른 수행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다가 보면 항상 외부적인 모습에 많이 치중을 하게 됩니다.

앉아서 좌선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어쩔 수 없이 한 시간 수행해야 되니까 한 시간 앉아있는 것, 외형은 그럴듯하게 보이는데 실제 내용은 실익이 없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한 시간 내내 앉아있는데, 어쩔 수 없이 앉아있는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하는 마음이 생겨나 있습니다. 그건 수행을 안 하겠다는 얘깁니다.

 

다음이 정해져 있을 거 같으면 다음에 대한 집착이 일어납니다. 좌선 한 시간 정해진 것은 시계로 정해놓은 것뿐입니다. 한 시간이 지나면 그냥 울리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일어나서 경행해야 될 시간이다 하고 알게 되는 것뿐입니다. 만약에 시계 울리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럼 계속 좌선을 해나가는 겁니다.

실제 내용에서 수행이 잘 되고 있을 때는 그런 외형적인 것에 크게 영향을 받지를 않게 됩니다. 그런데 수행이 안 될 때는 외형적인 것에 더욱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수행은 그렇게 진척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지금 수행하고 있을 때는 '수행자인가' 하는 것을 사마짜리야를 생각해서 자꾸 생각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수행을 해나가는데 대상에 대해서 싫고 좋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지,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는지, 과거나 미래로 가서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그 대상이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살펴서 그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가를 자꾸 봐야 됩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머물러 있을 거 같으면 어떤 것에도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대상을 보면 대상은 변하게 돼있습니다. 단지 내가 할 일은 그 변해가는 대상을 그것이 빠르게 변하는 것이든 천천히 변하는 것이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서 그렇게 사띠를 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사띠를 해나갈 때는 ', 내가 조금 더 분명하게 봐야되겠다.' 그렇지 않으면 ', 내가 조금 더 수행시간을 늘려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혜가 일어날 수 있는 근거는 이러한 세 가지가 갖추어졌을 때 지혜가 일어나고 법이 드러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단지 알아차림을 꾸준히 하고 있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알아차림이 바르게 꾸준하게 돼나갈 때는 반드시 노력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더욱 더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바른 견해가 어떤 대상도 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다는 그런 견해가 있을 때 바르게 알아차려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법을 드러날 수 있게끔 하는 역할들을 합니다. 실제로는 수행은 이겁니다. 그것만 해나가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먼저 대상을 자꾸 사띠하고 알아차리는 것들을 많이 하긴 하는데 가끔씩은 돌아봐야 됩니다. 그 사띠가 지금 바른 견해를 가지고 어떤 대상에도 집착함이 없이 사띠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돌아보아야 됩니다.

법을 듣는 것들이 부족하면 법을 자주 들어야 되는 것이고, 또는 대상에 대해서 무상하다는 것들을 보지 못할 거 같으면 자꾸 고찰해가지고 '아, 이것은 변해가는 것이지' 하는 마음을 자꾸 되새겨야 됩니다.

무상·고·무아에 대한 고찰들을 끊임없이 해나갈 때 그때 사띠는 바르게 다시 또 정립돼나가게 됩니다. 무조건 앉아서 사띠하면서 알아차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다 사띠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을 때 수행이 밖에 보여지는 것보다 실제적인 내용이 더 중요하게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일상생활에서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을 찾아서 생활을 합니다. 먹는 것도 맛있는 것을 먹을려고 그러고, 옷도 떨어지고 해어진 것보다는 반듯한 걸 입을려고 그럽니다. 집도 더럽고 작은 것보다는 깨끗하고 번듯한 걸 좋아합니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수행할려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런 감각적인 욕구로부터는 멀리 벗어나야 됩니다.

 

먹는 것들을 먼저 예를 들어보면은, 먹을 때 동일한 양을 하나의 사발에 넣어서 비벼먹어 보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씩 먹는 것보다는 맛이 덜할 수밖에 없습니다. 맛이 섞여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을 맛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또한 있습니다.

개별적인 것이 맛있는 경우들은 감각적인 욕구들이 더욱더 발달돼서 맛있고 맛없고 하는 것들을 더욱더 예민하게 구분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성향들이고, 비벼먹는 것들이 맛있다고 하는 것들은 그런 구별로부터 떠나서 지금 먹는 것 이것들에서 온갖 맛들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에 맛있다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비벼 먹는 양을 반으로 줄여보라고 할 것 같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불만을 터뜨립니다. “에게, 이거 먹고 어떻게 사느냐?”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하루에 적정한 식사량을 사실은 잘 모릅니다. 이만큼 먹고 살 수 있는지, 아니면 이것보다 더 먹는 것이 내가 살고 싶어하는 욕구나 감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욕구에 인해서 더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으로 인해서 오는 불안감으로 더 먹을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먹습니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은 보면 배가 부른 상태에서 꺼지게 됩니다. 배가 부르다고 인식한 순간은 이미 적정한 양을 넘어선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배가 부른데도 조금 더 먹습니다. 이게 일반적으로 먹는 양들입니다.

 

그래서 수행도 외형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듯이 일상생활에서도 내용이 실제로는 중요합니다.

먹는 것 하나도 가려서 먹을려고 하지 말고 적정한 양을 분명하게 알아서 먹는 것, 먹는 것이 내가 몸을 유지해서 수행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지 신나게 뛰어놀고 또 오래도록 건강을 유지해서 안 아프기 위한 도구로써 먹는 것은 아니다는 뜻입니다.

 

옷도 마찬가집니다. 떨어진 옷을 입고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옷은, 우리 몸이 약하기 때문에 벌레들이나 아니면 추위나 더위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능력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는 목적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설혹 오래된 낡은 옷이든 또는 그것이 값싼 옷이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매번 똑같은 옷을 입고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분이 좀 더 외형에 치우치지 않고 실제적으로 옷을 잘 입는 사람일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사회적인 것들에 자꾸 따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수행에는 치명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게 됩니다. 일어나는 대상은 어떤 것이든 집착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인데 일상생활에서 자꾸 훈련이 되지 않으면 수행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외형적인 것에 신경을 쓰고, 남에게 신경을 쓰고, 이런 역할들을 계속하다 보면 수행은 계속 외형적인 모습만 취할 뿐이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은 해탈을 목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 더 해탈에 용이하기 위해서 출가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출가를 했든 출가를 하지 않았든 수행을 할 때 과연 가정으로부터 떠난 수행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휴대폰을 옆에 두고 있습니다. 연결고리를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하다가도 그것이 울리면 그걸 받아야 됩니다.

또는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몇시에 일어나서 집에 가서 뭘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해탈에 이르는 조건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용어 그대로 할 것 같으면 "집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떠나야 됩니다. 수행하는 데는 휴대폰이 필요하지 않고, 몇 시에 내가 수행을 마치고 집에 가야 된다는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그런 것들로부터 자꾸 차단할려고 하는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번뇌로부터 멀어진다"고 그렇게 나옵니다.

집으로부터 떠나야 되고, 멀어지고 번뇌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

 

대상은 번뇌를 일으키게 하지는 않습니다. 번뇌를 일으키는 것은 내 자신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 대상은 그 대상으로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눈은 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보는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 어디에도 번뇌가 없습니다. 보고 내가 인식하면서 내가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지 눈이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뭔가 나쁜 소리를 했다, 그 나쁜 소리도 번뇌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소리는 나쁜 소리일 뿐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좋은 소리로 알아차리면 그거는 나쁜 소리가 되질 않습니다. 나를 경책하는 소리로 알아차릴 것 같으면 나쁜 소리가 되질 않습니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그 대상들은,

대상은 스스로는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됩니다.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번뇌를 일으킨다는 겁니다.

내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약해지고 또 뭔가에 끄달려가고 하게 되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해탈로 나아갈 때는, 번뇌를 일으키는 것의 장본인은 나라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번뇌가 일어나면 괴롭습니다. 마음은 항상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럼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더 큰 번뇌를 일으키든지, 아니면 또 다른 감각적인 것에 매달리든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해탈에 이르기 위한 조건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을 외형적인 모습으로 하지 말고 내용이 꽉찰 수 있는 수행들을 자꾸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내 자신이 수행자답게 되는 것이고 그런 수행자들은 반드시 해탈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