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출가자가 갖추어야 될 조건들 (20170720)

담마마-마까 2022. 5. 5. 09:00

https://youtu.be/CSriITz6rsQ

* 출가자가 갖추어야 될 조건들 (20170720)

 

어제는 사와이 스님 비자 연장 때문에 하루 종일 좀 다녔어요. 어제 좀 덥기도 하고 햇볕에 좀 많이 타기도 했는데, 해마다 비자 연장하는 게 좀 힘들어져요. 작년까지는 기본적인 서식만 쓰고 결핵 검사 그것만 하고 나면 특별한 문제가 없었는데, 올해는 첨가된 게 뭐냐면 건물을 빌려가지고 사용하고 있다는 계약서, 또 한국에서 돈을 얼마나 썼는지 하는 수입지출서라고 그러나? 세금계산서 그것까지 첨부를 하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걸 하면서 조금 힘이 들더라고. 그걸 미리 준비해 놓은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자꾸 뭐 썼다 그러면 그거 가서 영수증 받아야 되고 저거 받아야 되고 이런 것을 하면서, 출가자에 대해서 출가한 스님들이 생각하는 기본적인 생각과 사회에서 생각하는 것이 많이 차이가 났구나 하는 걸 좀 느꼈습니다.

 

경전에 있는 것들을 먼저 얘기하겠습니다.

이거 29페이지 짜린데 나중에 필요하신 분은 복사를 해가십시요.

 

경전에는 출가자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을 해놓았습니다.

 

① “Upagato so samaṇaliṅgaṁ(우빠가또- 소- 사마나링강)”

"출가 사문은 조용하고 평온한 모습이어야 된다" 하는 것이 첫 번째 모습입니다.

 

② “Buddhādhippāye ṭhito(붓다-딥빠-예- 티또-)”

두 번째 모습은 "부처님의 소망에 들어맞는 모습이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원하는 모습이, 해탈을 바라는 거라든지 아니면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부처님이 원하는 소망하는 모습이어야 된다 하는 것이 두 번째고.

 

③ “Khīṇāsavehi so samaṇaṁ upagato(키-나-사웨-히 소- 사마낭 우빠가또-)”

세 번째가 "출가자의 모습은 번뇌가 소멸한 자(루진자), 아라한과 같은 모습이어야 된다." 그래서 번뇌가 있는 모습들이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④ “Aggaparisāṁ so upagato(악가빠리상- 소- 우빠가또-)”

네 번째는 고귀한 사람들, 여기서 고귀한 사람들은 성자들을 얘기합니다. "수다원부터 해서 아라한까지 이른 성자들의 모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런 고귀한 자의 모임에 들어갈 때 진정한 출가자 진정한 상가의 모습을 갖춰나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⑤ “Labhati so patimokkhuddesaṁ sotuṁ(라바띠 소- 빠띠목쿳데-상 소-뚱)”

다섯 번째가 "매달 두 번씩 포살일에 계율을 송출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출가한 무리들은 한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들을 얘기합니다. 거기에는 인제 갓 출가한 스님이나 나이 많은 스님들이나 여러 부류의 스님들이 있습니다. 범부중생과 마찬가지의 출가자들도 있고 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규제할 수 있는 것이 보름에 한 번씩 우뽀삿타라고 해서 빠띠목카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송출하는 곳에 가서 송출할 수 있어야 되고, 그리고 혼자서라도 혼자서 빠띠목카를 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⑥ “So aññe pabbājeti upasampādeti jinasāsanaṁ vaḍḍheti(소- 안녜- 빱바-제-띠 우빠삼빠-데-띠 지나사-사낭 왓데-띠)”

여섯 번째가 "일정한 법납에 이르면 다른 사람을 출가시켜서 구족계를 줄 수가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해야 된다." 그냥 나이만 먹고 계속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살 한살 먹어가면서 자기의 자격을 자꾸 갖추도록 해서 나중에는 10년이 지나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을 출가시켜서 여러 가지를 교육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는 자가 되어야 된다 하는 뜻입니다.

 

⑦ “Appamāṇesu so sikkhāpadesu samattakari(압빠마-네-수 소- 식카-빠데-수 사맛따까리)”

일곱 번째가 "수많은 배울 것들을 완전하게 갖출 수가 있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배울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계·정·혜라고 하는 여러 가지 배울 것들을 낱낱이 다 배울 수 있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⑧ “bhikkhu sikkhapako vaṁsadharo(빅쿠 식카빠꼬- 왕사다로-)”

여덟 번째가 "불교를 오래도록 수호할 수가 있어야 된다. 변함없이." 부처님 가르침은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거나 또는 첨가하거나 또는 빼거나 하는 것 없이 온전하게 그대로 보존하고 유지해서 다음 대에 물려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⑨ “Āsavakkhayaṁ pana appatvā, 'sukhisomhi'ti cittaṁ na uppadetabbaṁ

(아-사왁카양 빠나 압빠뜨와- 수키솜히띠 찟땅 나 웁빠데-땁방)”

아홉 번째가 "아직 번뇌가 완전하게 소멸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상상조차 해서도 안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아직 완전하게 번뇌로부터 벗어나지 않았으면 아, 이것으로써 만족하고 또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고 만족해서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경전에서 전하는 출가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원하는 출가자의 모습은 또 다른 것들입니다.

국회에서 그게 통과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성직자들도, 뭐라 그러지? 성직자들도 세금을 납부해야 된다 하는 그런 게 아마 지금은 통과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금을 납부한다 하는 것은 성직도 하나의 직업으로 본다는 얘깁니다. 직업으로 봤기 때문에 직업에 버금가는 것들을 성직자가 하는 것은 허용하겠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허용해야 세금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얘기할 것 같으면 성직자가 직업으로써 허용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수행자 대답 : 수입이 있어야 됩니다.) 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그 수입이 있어야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거니까.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소원을 빌 때 기도해준다든지 아니면 점을 봐준다든지 아니면 길흉사가 있을 거 같으면 그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든지 이런 것들이 종교인들 성직자가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지금 현재 불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종교의 성직자가 하고 있는 것들이 그러한 패턴들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정부나 일반인들이 봤을 때는 직업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세금을 내라 하는 그런 얘깁니다.

 

그런데 아까 처음에 서두에 얘기했지만 출가자의 모습에서는 그 어디에도 기도를 해주라든지 점을 봐주라든지 뭐 어떤 것들을 해라 하는 그런 얘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축생의 일이다" 해서 부처님은 터부시하고 있던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부분과 진짜 출가자들의 사이에는 괴리가 굉장히 많다 하는 그런 생각을 어제 스님의 비자 내는 것을 도와주면서, 그게 강화되면서 인제는 출가자들도 하나의 직업군으로 전락을 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도 직업으로 할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직업으로 하는 곳들은 굉장히 흥하고 있다는 겁니다. 세력이 강하다든지 많은 신도들이 따른다든지 아니면 재정적으로 부유하다든지 그렇게 되어나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종교를 비롯해서 성직자들은 그러한 모습을 취하지 마라 하고 하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인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는 바라문이라고 하는 계급이 성직자들이었습니다. 카스트 중에서 바라문 계급에 속하는 자들만 성직자로서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아주 폐쇄적인 것들이었죠. 그것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사문그룹이 생겨난 것이 각각의 사문그룹들이 생겨납니다. '사마나' 라는 뜻입니다.

 

원래의 '사마나(samaṇa)'라고 하는 의미 자체는 진리를 쫓아서 다닌다는, 유행한다는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여기에 진리가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거기 가서 그 진리를 들어서 제자가 되고, 또 저쪽에서 진리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쪽에 가서 진리를 듣고 제자가 되고, 이런 것들이 사마나의 원래의 본질입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육사외도라든지 인도의 신흥종교 각각의 것들이 전부 여기에 속하게 됩니다. 바라문을 제외한.

 

그래서 부처님 자신도 부처님 제자들을 부를 때 '사마나(samaṇa)'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도 부처님을 부를 때 '고따마 사마나라'고 이렇게 불렀습니다. 우리 불교 내에서는 '마하 사마나'라고 해가지고 '대사문'이라는 별칭을 또 주기도 하고, 그런 뜻입니다. 원래 사마나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아서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그 진리를 구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요? 각각에 따라서는 그 진리가 다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열반이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같은 경우에는 그걸 뭐라고 해요? (수행자 대답 : 천국에 가는 것) 천국에 가는 것 이런 것들이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또 다른 종교에는 다른 궁극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찾아다닌다고 하는 것들은 그 진리는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될까? 참 애매모호한 것들이 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것들을 부처님이 확립을 하게 됩니다.

 

그 진리라는 것을 부처님이 뭐라고 잡았느냐면 '사마짜리야(samacariya)' "행하는 것들,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것들이, '사마' 청정한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라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말을 하더라도 그것들이 선한 말을 하게 되는 거고, 행위를 하게 되더라도 선한 행위를 하게 되는 거고, 의도를 내더라도 선한 의도를 내게 되는 것,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에서 탐심과 진심과 게으름 부리고 하는 어리석은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탐·진·치 없이 신구의 행위들을 하게 됐을 때, 그래서 선한 것들로 인해서 행위들을 하게 됐을 때 그 하는 행위들은 남들이 칭찬하게 되고, 또 청정하게 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걸 '사마짜리야(samacariy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말을 하고 행하고 또 생각하고 하는 것들이 선한 것들이 되고, 또 남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을 가져오게 될 때 그것들은 청정한 행위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사마나'라는 정의를 내릴 때 그런 용어를 씁니다.

"사마짜리야가 되는 자가 됐을 때를 '사마나'라고 한다."

신구의를 항상 청정히 해서 그것들로 인해서 변함없는 상태가 딱 되어있을 때, 내가 한 번은 말을 청정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에 다시 또 말을 하는 것이 청정하게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사마짜리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꾸준하게 노력해서 그에 버금가는 상태가 딱 돼있을 때, 그 계층에 딱 도달해 있을 때 그것을 '사마나'라고 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출가자와 재가자를 떠나가지고 누구든지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상태를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안거를 지금 지내고 있습니다.

안거 동안에는 어떤 경우든지 다른 곳에 다니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서 청정하게 수행하고 또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그러기 위한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고 하는 것들도 살아가면서 내가 신구의를 행하는 것들을 어떠한 경우든지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겁니다. 청정하게 되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선한 방향으로 나타나지지 않게 됩니다.

 

수행을 할 때도 마음이 청정하고 고요하게 돼있지 않을 거 같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원하는 것들 원하지 않는 것들을 취사선택하게 되는 거고, 하물며 대상도 그렇게 하는데 일어나는 대상에 대해서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변하는 성품으로 보지 못하고 그냥 고요하게 머물려고 자꾸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의 시작점도 신구의가 청정하게 되어야 되는 것이고, 수행의 마지막 끝점에 도달해서도 신구의가 청정하게 돼있는, 완전하게 청정하게 돼있는 상태가 바로 사마짜리야 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안거를 지냈으면 적어도 스스로 이러한 사마짜리야의 상태가 되도록 더욱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아까 출가의 얘기를 했습니다.

출가의 조건을 두 가지로 얘기하라 하면

 

첫 번째가 뭐냐면 "세속생활로부터 떠나는 것", 그걸 보통 일반적으로 "집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출가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세속에 머물러서도 안 되고, 세속의 일들을 해서도 안 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직업으로 하는 것들은 그것이 성스러운 사람들이 하는 것이든 아니면 일반인들이 하는 것이든 직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세속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출가자의 첫 번째 조건인 집으로부터 세속으로부터 떠난다는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게 됩니다.

출가자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이 세속적인 직업으로써 뭔가를 하는 것들은 출가자에게 맞지 않다 하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든 기도를 하는 것이든 아니면 부적을 써주는 것이든 어떠한 것이든 그러한 것들은 출가자의 첫 번째 정신에 맞지 않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조건이 "진리를 찾아서 떠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진리를 구하지 못할 것 같으면 출가한 의미를 반감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그 진리를 찾아서 좋은 스승이 있으면 좋은 스승 아래서 머무르고 했습니다. 거기서 머물러서 일정하게 배우고 나면 또 다른 스승을 찾아서 떠나서 거기에서 머물고 하는 겁니다.

 

지금도 테라와다 국가에서는 출가한 스님들에게 '비구수첩'이라고 하는 것을 나눠줍니다. 그 비구수첩에 보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한 것을 전부 기록하게끔 돼있습니다. 여기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서 머물고 진리를 배우고 머물면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에게 사인을 받아서 거기 기록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여기서 떠나서 경주 마하보디 선원에 간다고 할 것 같으면, 붓다의 길따라 선원 스님이 마하보디 선원으로 간다고 사인을 해주고, 마하보디 선원에 도착하면 마하보디 선원장이 이 스님은 마하보디 선원에 머문다 하는 것을 또 사인을 해줍니다.

그것만 보면 적어도 이 스님이 무슨 진리를 찾아서 무슨 공부를 하고 다녔다 하는 것이 눈에 선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게 출가자들이 해야 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리를 찾아 떠나는데 좋은 스님이 있고 좋은 스승이 있으면 그곳에서 머물러야 됩니다.

안거가 시작된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 밑에서 더욱더 노력해서 자신의 상태를 더욱더 갈고 닦고 그 진리를 찾도록 하는 것.

 

그래서 실제적으로는 비구수첩에는 주소가 있을지 몰라도 출가한 스님들은 실제로는 주소가 없습니다. 지금 현재 머무는 곳이 있을 뿐인 것이지, 내가 영구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곳은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세속적으로 본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머물고 있는 지금의 주소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본적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단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있을 뿐입니다. 이곳은 언제 내가 떠나야 될지 모르는 곳들입니다. 또 다른 진리가 있으면 떠나가야 되는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자를 출가자라고 그러는데,

그런 출가자를 나타내는 단어가 '빱바지따(Pabbajita)'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보통 빱바지따라고 하는 것들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빠'라고 하는 것은 멀리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빱바지따 라고 하는 것은 "번뇌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를 의미할 때 빱바지따 라고 얘기합니다.

단지 그냥 출가한 자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번뇌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세속생활로부터 벗어나는 것, 세속생활에 해당되는 직업을 가지지 않는 것,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찾아서 이곳저곳 스승을 찾아다니는 것, 그러한 모든 것들은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겁니다. 번뇌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위한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제자들에게 출가했다는 그런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번뇌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부처님은 출가를 용인을 한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가자라는 용어를 쓸 때, 어떤 자에게 출가자라는 용어를 쓰느냐 하면, 유행하는 것 돌아다니는 것을 이제는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유행을 완료했다"는 의미로 쓸 때 이 '빱바지따'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마만큼 출가자는 어떠한 경우든지 세속적인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 현재 사회에서 바라는 성직자와 부처님이 요구하는 출가자는 굉장한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에서는 성직자에게 일반적으로 세속인들이 하지 않는 것들 기도하고 점을 쳐주고 하는 여러 가지들을 용인을 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용인할 수가 없는 실정이라는 뜻입니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왜 그렇게 출가자들에게 저렇게 혹독했을까?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게끔 했으면 오히려 불교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가끔 해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미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출가자들은 출가자의 본분에 맞는 길을 가야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가 부족하고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길을 가고 있는 스승 밑에서 그러한 길을 가고 있는 선원에서 수행을 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하게 배울 수 있는 길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출가자가 진정한 출가자의 길을 가고 있을 때 나는 그를 '브라흐마나(brahmana)'라고 부른다. 그러한 자를 '뛰어난 자, 우수한 자'라고 나는 부른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러한 자들은 비열한 자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물론 어제 그 스님의 비자를 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성직자가 많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 바뀐 것은 해가 가고 세월이 바뀌고 나면 바뀌는 기준은 또 바뀔 겁니다. 또 여러 가지로 바뀌기도 하고 또 더 요구하는 것들이 있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요구하는 출가자의 기준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여러분들에게, 재가자들에게 요구하는 기준도 바뀌는 부분이 없습니다. 아직은 출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출가자의 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들이 아니고 출가자와 버금가는 생활들을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신구의로부터 신구의를 청정하게 유지하는 것, 그래서 번뇌로부터 멀리 벗어나야 되는 것,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잘 이루어지게 됐을 때 뛰어나 자, 우수한 자가 되는 것, 그런 것들이 출가자를 비롯한 재가자들에게 요구하는 부처님의 조건입니다.

여러분은 그 조건에 맞는 자들이 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에 맞춰서 종교가 바뀌어서도 안 되지만, 여러분들도 그 기준에 따라서 자꾸 부합해서는 안 된다 하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요구하는 조건이 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찾아서 기준을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불교는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서 번뇌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하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의 응답>

Q 수행자 질문 : 스님, 저희들이 수행을 배울 때는 항상 숨을 관찰하면서 인중과 배의 느낌을 관찰하라고 강조하셨는데, 요새에 오시는 분들에게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가슴을 관찰하라든가 몸을 관찰하라든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A 스님 답변 : 그건 아니고, 그것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떨어뜨려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되는 것이 먼저 우선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바로 호흡을 관찰하려고 코끝이든 배든 그것을 관찰할려고 할 것 같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인위적으로 하게 됩니다.

인위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게 바로 할려고 하지 말고, 먼저 대상을 떨어뜨려서 몸과 마음이 편하게 되는 것들을 먼저 훈련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몸이 긴장돼있는 것들을 먼저 살펴보고, 그리고 마음이 고요하고 가볍게 돼있는가 하는 것들을 먼저 보고 나서 그것이 돼있고 나면, 그러고 나서는 마음이 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라는 거라. 마음이 호흡을 보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호흡을 그때 관찰하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그 호흡을 관찰할 때 명칭을 붙여서 '일어남' '사라짐' 한다든지, 배가 들이쉬고 내쉬고 한다든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한다든지,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바른 순서인 것이지, 처음부터 오는 사람에게 테크닉적으로 오자마자 그 사람이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바로 호흡부터 테크닉부터 가르치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들을 왜곡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