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2017년 우안거 입재_담마의 정통성 확립 (25600709.경주)

담마마-마까 2022. 5. 2. 09:00

https://youtu.be/AZv6VtVzf30

* 2017년 우안거 입재_담마의 정통성 확립 (25600709.경주)

 

편하게 앉으십시오. 제가 이어서 하겠습니다. 제가 잔소리꾼은 아닙니다 이. 해피스님에게는 만날 어린 스님들한테 잔소리만 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는데, 좀 더 분명하게 해야 되는 부분들이 있고, 또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하고 아직 어린 스님들한테는 올바르게 지도해줘야 되는 입장이 섞여서 있는 몫이기 때문에, 그래서 가끔씩 조금 심하게 어긋난다 싶은 것들은 지적을 해서 바로잡아 나가는 그런 것들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해피스님이 얘기했듯이 테라와다의 전통성은 결집에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1차결집 2차결집 쭉 진행돼왔던 것들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테라와다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도 1차결집 2차결집까지는 어느 곳에서도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결집 때 완성된 것이 경·율·론 삼장(三藏)이라는 것들입니다. 그게 테라와다의 전통성을 확립해주는 계기들을 만들게 됩니다.

 

가끔씩 어찌보면 해피스님이 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가끔씩 다시 되짚어주고 해피스님한테 다시 주지시키고 주지시키고 이렇게는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테라와다의 정통성이 같다 해서, 지금도 경장을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기본 텍스트가 6차결집본입니다. 논장도 마찬가지고 율장도 마찬가지고 기본 텍스트에 기본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있으면 6차결집본을 중심으로 해서 하지, 다른 본을 중심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테라와다 스님들이 모여서 거기에 대해서 인정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정통성이 확립된 것으로서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논장을 인정하지 않으면 정통성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고, 또 논장을 인정할 거 같으면 본인이 공부해나가고 가르치는 부분에서 또 상충하게 되고 이렇게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적으로는 부딪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전통성을 인정한다고 할 것 같으면 경율론 삼장에 대한 것들은 존중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단지 본인이 좀 더 공부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부분은 경장에 중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해피스님 입장을 이해해야 되는 것이지 스님이 논장을 부정하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패턴이 조금 요즘은 바뀌는 게 좀 보여집니다. 전에는 경장만 인용을 했는데 요즘은 율장까지 인용을 해. 그래서 경 율에 대한 게 (쪼금, 제가 공부가 쪼금 늘었습니다.) 조금 더 늘었다 하는 게 보여집니다.

 

그래서 그것은 스님들이 공부해나가는 과정이고, 방향이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쉽게 얘기해서 재가자들이 시시비비를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스님을 바른길로 지켜가지고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에서 어긋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당연히 안 되는 부분인데, 어긋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이 결제일이죠? 테라와다 전통에서 많이 한다고 하는. 그럼 어제 같은 경우에는 담마의 날입니다. 부처님이 처음 법을 설한 날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담마의 날이 생겼던 계기가 되는데, 담마는 변할 수 있는 겁니까? 변할 수 없는 거죠!

그러면 만약에 부처님이 설한 것이 무상 고 무아 라고 하는 삼법인에 대해서,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해서 도장을 콱 찍어놨다. 그런데 만약에 누군가 하나가 열반적정을 더 넣어가지고 사법인으로써 도장을 콱 찍었다, 이럴 것 같으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 하는 진위를 결정 내릴 수 있는 근거는 테라와다 전통성입니다. 전통성을 인정하는 상황에서 그것이 그 권위들을 인정받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부처님의 진리 자체를 왜곡하더라도 도리가 없어져버립니다.

여러분들 만약에 정부에서 어떤 사람에게 반드시 전달해야 되는 문서다 할 것 같으면 봉인을 뜯어보지 못하게 그 앞에다 도장을 탁 찍어놓습니다. 찍어가지고 그 사람에게 보냅니다. 그럼 만약에 다른 사람이 열어봤을 때는 그걸 열어봤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본인이 반드시 받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가게 되는 것이 그러한 공식적인 서류들이 하는 형식입니다.

 

법인이라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거기에다가 도장을 탁 찍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삼법인으로써 도장을 탁 찍어놨다 할 것 같으면 더 이상은 거기에 다른 것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걸 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이 삼법인이다 하고 공개가 됐을 거 같으면 이제 그것은 다시는 물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간혹 그런 얘기를 합니다. 밖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부처님이 만약에 보시게 되면 이건 내 말과 같다 하면서 도장을 탁 찍어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도장을 찍은 것과 같다, 진배없다 하고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테라와다의 전통으로써 인정을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부분들이 옛날에 참 많이 문젯거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뒤에 생겨난 사대교법이라고 하는 부분들이나, 아니면 부처님의 담마의 범위를 어디까지를 불설로써 인정을 할 것이냐? 하는 부분에 대한 것들이 참 많았었습니다.

 

불설들도 쭉 여러분들이 내용을 보면 부처님이 직접 설하지 않고 사리뿟따 존자나 목갈라나 존자가 설한 것들도 다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그중에 부처님이 이거는 내가 얘기한 것과 다름없다 하고 인정을 해준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그런 인정조차도 없이 글로써 존재해가지고 경이나 율장에 존재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논장은 더더구나 말할 것도 없이.

 

런데 그럼 그걸 누가 도장을 찍었던 계기가 될까? 부처님은 이미 열반하시고 안 계신데? 그게 바로 결집입니다.

제1차 결집에 요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하고 도장을 탁 찍어준 게 부처님을 대신해서 도장을 찍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그런 결집입니다. 그게 1차결집 2차결집 3차결집 4차결집해서 6차결집까지 진행됨으로써 그 내용이 조금더 보완되고 수정되어 나간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만약에 테라와다의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테라와다 불자이다 할 것 같으면 그 전통성은 어떠한 경우든지 결집에 대한 것들을 인정하는 것으로 인해서 그 전통성을 확립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이것을 벗어나가지고는 테라와다 스님이 될 수가 없는 것이고, 재가자도 이것을 벗어나가지고는 테라와다 불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부처님의 담마라고 하는 본질들입니다. 그러니까 밖으로 드러나는 본질들은 그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게 있습니다. 또 자신이 좀 잘하는 것이 있고 하기 때문에 그 잘하는 부분에 대한 것들은 본인이 그것들은 가르치면 됩니다. 그것은 테라와다의 전통성이 확립되고 그것들이 서 있는 상태 내에서 그중에서 자신이 잘하는 것들을 가르치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랬을 경우에는 이것이 상충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테라와다의 전통성 안에서 나는 경장만 가르치겠다", 아니면 "나는 논장만 가르치겠다", 그거는 누가 탓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왜 스님은 먼저 경장부터 가르쳐야 되는데 왜 논장부터 가르치느냐?” 아니면 “스님은 왜 논장을 무시하고 경장을 가르치느냐?” 그것을 탓할 수 있는 것은 못 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피스님의 입장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고 또 그렇게 보는 것이 바른 방법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담마로 인해서 드러나진 겁니다. 그 담마의 정통성은 그런 식으로 결집을 통해서 그 정통성을 확립해나갔다 하는 것들을 분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1차결집 때부터 해가지고 그것을 부정하고 한 것들은 있지만, 그것이 큰 맥락을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인 담마는 어떻게 여러분들이 그 정통성을 확립을 해야 될까?

여러분들한테는 개인적으로 담마가 어떻게 와닿고 있어요? 각각의 담마는 뭐라? 그냥 이 가르침이 좋아서? 아니면 이 가르침대로 하다 보니까 조금 더 내가 잘살아가고, 잘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고 좀 더 바르게 살아가고 하기 때문에? 아니면 그 담마 따라서 실천하다 보니까 내가 조금 더 수행에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같이 보여서? 어떤 식으로든 본인의 담마는 본인에게 정통성이 확립돼있어야 됩니다.

 

정통성이 확립된다는 것은 아까와 같이 도장을 탁 찍는 겁니다. 그럼 다시 물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적어도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상태에까지는 도달을 해야만이 그게 초석이 되어서 테라와다 불자로서 시작을 하게끔 되는 겁니다.

만약에 물러서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실제적으로는 큰 의미를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여러분들 스스로 한 번 돌아보십시오. 어떤 부분에서 테라와다 불교를 접하고 나서 그 담마로 해가지고 내가 물러섬이 없는 상태가 돼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열반에 이른다는 건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상태가 됐으니까, 아니면 선한 마음을 먹고 선한 것들을 행함으로 인해가지고 나에게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들을 받아들여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수행을 통해서 이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것이 실제적으로 본질이 아니고 그것들은 무상·고·무아의 성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본인이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본인에게는 본인의 담마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확립을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해본 분들은 이해를 할 겁니다. 새로운 하나의 경계, 새로운 하나의 지혜를 얻으면 뛸 듯이 기쁩니다. 왜 그럴까? 그것을 얻음으로 인해서 다시는 저 밑에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저 밑으로 내려갈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는 사마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사마타 수행에서 2선정에서 탁 벗어나서 3선정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분명하게 알았을 때, 쉬운 거 같아도 그게 쉬운 게 아닙니다. 그 방법을 알았을 때 뛸 듯이 기쁩니다. 그래서 3선정에 들고나서 자재하는 법은 모르지만 나오고 나서는 2선정을 다시 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물론 다음에 다시 3선정으로 갈 때는 초선정부터 빠른 시간으로 밟아 올라가야 되겠지만 그거는 오르는 계단일 뿐인 것이지 거기에 머물러야 될 이유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일상생활 살아가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고(苦)다 하고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그 괴로운 걸 왜 할려고 그래? 그것을 벗어나는 상태에 돼있든지, 아예 그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나있는 상태가 돼있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하게끔 됩니다. 그럼 어떠한 경우든지 나에게 고가 일어나지 않게끔 스스로 자꾸 만들어나가게 됩니다. 그것들이 힘들고 괴롭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하질 않게끔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하지 원하지 않는 것들을 하지는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내가 원하지 않아도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억지로든 뭐든 간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내가 빨리 이 괴로움에 대한 것들을 수행을 통해서 이해했다고 할 것 같으면, 살아있는 동안에 괴롭지 않은 상태를 스스로 만들어야 됩니다.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지,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밖에 대상들이나 안에서 일어나는 대상들에 대해서 마음이 요동치지 않게끔 해서 항상 평온한 우뻭카의 마음을 만들어나간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든지 기쁨을 느끼는 마음을 만들어낸다든지, 어떤 식으로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살아가는 마음의 상태들을 형성하게끔 됩니다.

 

무상한 것들을 이해를 했으면 그게 부처님의 담마를 따르는 겁니다.

무상하다고 알 것 같으면 적어도 그냥 '아, 변하고 있다' 하고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한 성품은 언제든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하고 변해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집착하고자 하는 마음들은 아예 생겨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집착하는 정도에 따라서 무상한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들이 더욱 더 많아진다 하고 수행에서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대상에 대한 집착, 대상에 머물려고 하는 욕망, 이런 것들이 있으면 있을수록 무상한 성품들이 빠르게 무상하다고 하는 것들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나오면 나올수록 빠르게 무상한 것들을 알게끔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어떠한 대상이든 집착하는 것들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아, 무상한 것들에 대한 것들을 나는 이해를 했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특정한 어떤 것들을 집착하는 법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만큼은 무상한 것들을 알고 있고, 부처님의 담마를 내가 스스로 탁 도장을 찍고 있는 겁니다.

 

삼법인에 대한 도장을 결집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일입니다. 담마는 본인에게 딱 새겨져야 됩니다. 그래서 담마를 배우기만 하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해가지고 그것을 지닌 자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담마다로(Dhammadharo)'라고 하는 '담마를 지닌 자'라고 하는 의미는 담마를 실천해서 그 담마가 자기 가슴에 탁 새겨진 것들을 얘기합니다. 삼법인이 여러분들에게 도장을 찍듯이 가슴에 탁 새겨져야 되는 겁니다.

 

붓다·담마(Buddhadhamma)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은 변함없는 진리를 얘기합니다. 그것들은 이런 안거기간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새겨지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안거가 좋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본인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끔 하고, 또 그렇게 본인이 미심쩍고 부족한 것들은 스스로 자꾸 새겨넣어서 그것들로 인해서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해제날이 되면은 부처님을 보면서 부처님이 고맙다는 것이 아니라 참 담마에 대해서 고마움을 부처님을 보고 절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담마의 본질은 그와 같습니다. 외형적인 부분에서 정통성을 확립도 해야 될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그 담마에 대한 정통성을 스스로 확립을 해나가게 될 때 그 담마는다음 세대로 전해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 선배들이 쭉 그렇게 해온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계속 전해져와가지고 그것이 바뀌고 변함없이 그대로 전달된 것들이 그런 담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결집본으로써 그것이 필사본으로 하는 것이든, 돌에 새기는 것이든 그런 외형적인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본인이 스스로에게 다음 사람에게 전할 수 있고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는 담마들이 새겨졌을 때 담마는 계속적으로 전해져나간다는 생각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안거는 스스로 다 잘 새겨서 여러분들 가슴에 담마가 한 개씩 두 개씩 새겨질 수 있도록 그렇게 기원을 하겠습니다.

합장하고,

"짯다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

항상 부처님 담마따라 살아가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고,

항상 담마따라 살아가는 불자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질의 응답>

Q 수행자 질문 : 우기 안거 기간에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집에서 공부하고 싶은데...

스님 답변 : 정확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재가자들은 안거 없습니다.

안거를 보내는 조건이 각 사원마다 조금 재가자들은 차이가 있습니다. 각 나라마다 차이가 있고, 대표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재가자들이 안거를 보내는 것을 인정하는 데들은 보면,

"재가자들이 안거 석달 동안 사원에 머무르고 있을 경우, 그래서 사원을 벗어나지 않는 경우, 벗어날 때도 그날 밤을 넘기지 않고 돌아오는 경우", 이럴 때 해당이 됩니다. 어쨌든 사원에 석달 동안 살고 있을 때 그때 안거를 인정해주는 곳이 대다수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럴 수 없죠? 안거 조건이 안됩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재가자들은 스님들이 보름에 한번씩 포살을 하는 것과 다르게, 일주일에 한번씩 재가자들 불재일이라고 명시가 돼있습니다. 그래서 그 불재일 날은 반드시 지키도록 얘기를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날을 정해가지고 그날은 와서 팔계를 지키고 그날 하루 동안은 적어도 사원에서 수행하고 법문 듣고 하고 나서 돌아가는 것. 그렇게 했을 경우에는 적어도 일주일을 넘기지 않고 돌아오게 됩니다. 율장의 규정에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일주일에 한번씩 오라는 것이 아니고, 일주일에 두번이든 세번이든 관계없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우뽀삿타를 본인이 정해가지고 그날 와서 하루동안 수행하면서 하루를 사원에서 보내고 가는 경우" 그럴 경우에 그것을 인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대신에 우뽀삿타는 각 나라별로 아니면 서양에서도 다르게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음력을 기준으로 하는 남방불교의 동남아시아 국가와 반면에 서양이나 미국 같은 경우에는 특정한 요일을 정합니다. 우리 사원은 토요일마다 우뽀삿타를 하겠다, 일요일마다 우뽀삿타를 하겠다, 그러니까 요일별로 기준합니다.

그거는 스님이 봤을 때는 그건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상충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본인이 스스로 정해서 이번 안거 석달 동안 쭉 따져보니까 매주 월요일이 좀 한가한 시간이다 그러면 그럼 월요일을 본인의 우뽀삿타날로 정해서 그날은 와서 청정하게 수행을 하고 가는 날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를 통틀어서 재가자들에게 안거를 인정해주는 것은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외는 인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개를 인정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재가자들에게 좀 더 안거를 보냈다고 해가지고 나이 한살 먹었다고 얘기해주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재가자들은 아무리 잘해봐야 법납이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게 여러분들에게는 좀 불만이 될 수도 있는데 그거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출가자의 구조 자체가 가정을 가지고 생활을 하는 구조가 아니고, 그 가정부터 벗어나서 홀로 수행하고 또 그렇게 홀로 수행하는 스님들끼리 사람들끼리 모여가지고 있는 곳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가생활과 병립해서 할 수 있는 상황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가자가 아무리 출가자와 진배없는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거를 현재의 상태에서 재가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안거로써 인정을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법납이 올라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여러분들이 불교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를 해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 있기 때문에, 사실은 오늘 같은 경우들이라 할 때는 원래 팔계를 해야 됩니다. 우뽀삿타날에 준해야 되고, 오늘 같은 날은 팔계를 지키고, 오늘이 무슨 요일입니까? 일요일이죠! 그럼 매주 일요일은 적어도 내가 팔계를 지키면서 불재일을 계속 성스럽게 보내게 됐을 때 그럴 때야만이 그래도 안거를 조금 난 것 같다 하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정도는 할 수 있도록 해야만이 안거의 본질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안거는 그냥 모여서 있는 것들이 안거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 안거 기간 동안 본인이 모자라고 또 좀 더 개발해야 되는 것들을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안거입니다. 그래서 좀 더 많은 법문을 듣고 좀 더 많은 수행을 하고 이런 시간들을 마련을 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들이 좋습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그걸 지금 자율성에 맡기고 있습니다. 만약에 부산이나 대구 같은 경우에는 안거 기간 석달 동안 한 번이라도 빠질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안거 끝나고 나서 수계식 계 받을 조건을 안 줍니다. 그쪽은 내가 직접 통제를 하기 때문에 아주 엄격하게 합니다.

그런데 교단은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하는데, 적어도 어차피 나중에 안거 끝나고 나면 계 받을 사람들 중 몇몇은 계 받으러 안 올 겁니다. 본인이 스스로 불재일은 지켜나가도록 반드시 해서 안거 기간동안 짬지게 보내도록 해야 됩니다.

 

스님이 좀 연배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신에 스님들은 안거를 보내기 전에는 아직은 법랍이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안거 마치고 나서 빠와라나(Pavāraṇā)라고 하는 자자(自恣)를 행하고 나면 안거 횟수가 탁 올라가게 됩니다. 다른 질문은?

자! 스님은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