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암 선고를 받는다면 (20170615)

담마마-마까 2022. 4. 26. 09:00

https://youtu.be/Z9xrj9EYflg

* 암 선고를 받는다면 (20170615)

 

오늘은 「암 선고」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암을 가지고 있습니까? 암은 어떤 거라요? 세포가 계속 늙고 병들고 하지 않고 계속 성장하기만 하는 거죠! 원래 세포 안에는 생노병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포의 본질은 태어났으면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원래 세포의 본질인데, 그 본질을 벗어나가지고 세포가 늙고 병들고 죽지 않고 계속 증식만 할 경우에는 그걸 암세포라고 그럽니다. 몸은 한정돼 있으니까 그 세포들이 계속 늘어나면 정상적인 세포들을 잠식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게 암덩어리로써 더 커지게 되고, 결국에는 생명을 잃는 상태가 됩니다.

 

어찌 보면 세포의 본질은 생로병사입니다.

여러분들이 생로병사를 겪듯이 세포의 본질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모든 형성된 것들 그런 것들은 사실은 생로병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현재 세포가 전부 다 이상이 없다 하고 단정내리기는 아마 힘들 겁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조금씩 그런 생로병사를 벗어난 세포들은 언제든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세포가 워낙 우리 몸속에 많고 또 많은 세포들이 생로병사로부터 사라지고 또 다른 세포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들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누가 암선고를 받았다 해가지고 병원에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가니까 그냥 체념한 듯이 있는 모습이 보이더라고. 보통 암선고를 받으면 처음에는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고, '어? 나에게 무슨 이런 일이?' 하면서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려고 합니다.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다 보면 '아, 그래도 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이라든지, '아이고, 내가 죽고 나면 우리 가족들은 어떡하나?' 하는 그런 생각들이 생겨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체념을 하는 경우들이 생겨납니다.

실제적으로는 죽음에 대해서 체념하는 것은 아니고, 일정 부분 내가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체념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가 찾아간 분이 아마 그런 상태에 있었던 것 같애요. 워낙 오래도록 투병을 하다가 보니까 이 병원 저 병원 옮기기도 했고, 암치료를 여러 차례 했지만 결국에는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그래도 스님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해가지고 부른 거라.

참 그래도 고마운 게 아직은 의식이 있을 때, 그렇게 스님을 불러주는 것에 대해서는 참 고맙더라고. 그래서 “밥은 먹었냐?” 하니까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눈물만 질질 흘리고 있는 모습을 봤는데.

 

여러분이 만약에 그러한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까? 상상 해봤어요? 어차피 여러분은 항상 그런 암에 대한 위험에 노출돼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그런 세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세포는 언제든지 생로병사를 겪게 돼있습니다. 그럼 병이 몸에 생길 수밖에 없고, 늙어갈 수밖에 없고, 어떤 경우에는 그 세포가 이상 현상을 일으킬 것 같으면 암이라는 것들이 생기든지, 아니면 다른 것들로 인해서 내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라. 그게 여러분들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몸이 망가져 가도 마음은 건강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단언하기는 아마 힘들지 싶습니다. 몸이 그렇게 해서 망가져가면 어떤 식으로든 이 의사, 저 의사 또 그걸 치료하는 방법들을 자꾸 찾아보고 또 그걸 알아보고 다니든지 그렇게 할 겁니다. 그동안에 마음이 망가지는 부분에 대한 것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몸이 망가진 것만 치료를 할려고 그러지.

 

치료하는 것은 스님도 아픈 부분들이 있어가지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보고 했는데, 별 신통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내린 결론은 "그건 의사의 몫이다. 치료를 잘해주든 못 해주든 그것은 의사의 몫이지, 환자인 나의 몫이 아니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환자인 나의 몫이라고 할 것 같으면 내가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지, 부산에서 안 되면 서울로 올라가서 치료할려고 그러고, 서울도 이 병원 안 되면 저 병원 갈려고 그러고, 그렇게 아마 할 겁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스님 같은 경우는 그것은 의사의 몫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나니까 마음이 굉장히 안정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나를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의사가 할 몫이면, 내가 지금 해야 되는 것은 지금 병을 낫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병이 생겼으니까 그것은 의사에게 맡기고 의사가 오라면 가고, 또 가라면 가고, 그게 내가 할 일인 것이고, 내가 할 일은 그리하더라도 신체가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체가 완전히 망가지는 그런 암 환자들 같은 경우에는 참 힘듭니다.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참 힘든 부분입니다. 그래도 어떡하나? 그걸 유지해야 되는데. 한번 물어본 적이 있어요.

“많이 아프십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예. 많이 아픕니다.” 그러더라고. “진통제를 쓰고 있느냐?” 물어보니까 진통제를 쓰고 있는데도 계속 자기가 아프다고 느낀다는 거라. 그래서 다시 물어봤어요.

“당신이 아픈 겁니까? 아픈 부위가 생겨난 겁니까?” 쉽게 대답을 못 해. 아프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판단합니까? '내가 아프다'고 생각하는 거라? '아픔이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거라? 대부분은 보면 '내가 아프다'고 한다는 거라.

 

적어도 세 가지는 경전에서는 버려라 하고 얘기합니다. "갈애, 유신견, 자아"

"이것은 빨리 버리면 빨리 버릴수록 해탈에 나아가기가 쉬워지고, 또 그것을 빨리 버려버리면 버릴수록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하고 경전에는 적어놓습니다.

그런데 보통 '내가 아프다' 하고 판단할 경우에는 이 세 가지가 다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견해도 가지고 있고, '내가 있다'고 생각도 하는 거고, 또 '아프지 않았으면, 오래 살았으면, 죽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갈애들도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런데 이 세 가지를 탁 떼고 생각을 해보면 실제로는 내가 아픈 것이 아니고, '아픔이 있다'는 겁니다. 아까 처음에 얘기했듯이 세포의 본질은 생로병사라고 했습니다. 생겨났으면 변화되고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겁니다.

아픔이라는 것의 그 성질도 꼭 마찬가집니다. 생겨났으면 변화되고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프다고 할 것 같으면 아픔이 사라지지 않는데, 그 아픔이 있으면 아픔이 생겨났다고 판단할 거 같으면, 적어도 그것을 관찰하면 그 본질이 생겨났다가 아픔이 조금 다른 형태로 변화되고 또 사라지는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럼 크게 그것에 영향을 받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 내가 아파가지고 아무 것도 못하는 상황이 되지는 않는다는 거라.

 

찾아갔던 암 선고를 받은 분도 위빳사나 수행을 한지 벌써 10년이 넘었던 분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아프다'고, 지금 '내가 아파 죽겠다'고만 하고 있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은 아예 뒷전이 돼있는 거라. 의식이 있는데도.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의식이 있고 할 때 그 아픔을 관찰하는 수행을 위빳사나 수행을 하십시요! 그 얼마나 좋습니까? 새로운 대상이 나타났는데 그 대상을 그냥 아프다고 치부해버리고 그걸 피할려고만 해가지고 어떻게 이때까지 수행을 했다고 할 수가 있느냐? 그걸 관찰하도록 해보십시요”

할려고 하는데도 중간중간에 자꾸 그걸 놓칠 뿐 아니라, 자신은 '아, 내가 아파서 도저히 못하겠다' 하는 자신감이 자꾸 떨어지더라는 거라. 떨어지더라도 자꾸 마음을 일으켜가지고 노력은 해야 됩니다.

 

그런데 많이 떨어져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도 아마 그럴 겁니다. 죽음의 과정들을 스님은 태국에 있을 때 참 많이 지켜봤습니다. 거기의 전통은 어떤 식으로든 아파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스님들을 초청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가족들이 지켜주는 것보다는 스님이 지켜주는 걸 더 원합니다.

실제로 내가 힘이 없으면, 대상을 관찰할 힘이 없으면 그 아픔을 관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에게도.

 

“설혹 본인이 인제는 죽음에 임박했다고 판단되가지고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하고, 그리고 인제 곧 숨이 끊어지겠다 하고 마음을 먹을 거 같으면, 지금 현재 본인의 상태에서는 그 아픔을 관찰한다든지 배를 관찰한다든지 하는 것은 힘이 들 것이다.

그 대신에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자애수행은 할 수 있다. 마지막까지 '아, 내가 고통이 없기를'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은 가질 수 있다는 거라. 아주 단순한 겁니다!

또는 '내 가족이 행복하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을 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 또 그런 여러 가지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사마타 수행 중에 하나 특히 자애수행을 한번 해보십시요.” 하고 얘길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라도 자애수행을 한다든지, 아니면 코끝에 호흡을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그것만 관찰한다든지, 다른 것들 일체 하지 않고. 그것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거라.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게끔 할 수 있는 길이 충분히 있는데도, 수행을 그렇게 오래도록 한 사람들도 참 그게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육체적인 부분은 여러분들이 감당할 부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사가 감당할 부분인 것이고,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그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들이 여러분들이 지금 당장 해야 될 일들이라는 거라. 몸과 마음에 대한 현상에 대한 것들을 알아차리기가 힘이 들 때는 적어도 마음만이라도 한 곳에 집중해서 선한 마음을 계속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자애수행 같은 것들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라도 해가지고 죽음을 맞았을 때는 그래도 수행한 보람이 있는 것이지, 남들과 똑같이 아프면 아픈대로, 또 누군가 위로해주면 감동받아가지고 눈물 흘리고, 그거 할 거 같으면 수행할 이유가 지금까지 뭐가 있었느냐는 거라.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되는 것이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마음을 먹기를 '이 병이 나를 진리에 이르게 해준다' 하는 확고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경전 곳곳에서 그렇게 암과 같은 그런 질병으로 아니면 다른 조건으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상태에서 깨달음에 이르렀던 분들이 참 많이 등장을 합니다.

본인이 '이 병에 걸린 것이 참 고맙다' 하는 마음을 적어도 가질 수 있게끔 하면 됩니다. 급하면 하게 됩니다. 급하면. 살아있을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더욱더 경각심을 일으키게 되고 그래서 좀 더 분발해서 수행을 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을 살려고 하는 의욕으로 돌리지 말고, 수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고 자꾸 판단을 해서 '아, 이제 나에게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열렸다' 하고 판단들을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언젠가는 이렇게 암이 아니라도, 다른 조건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분한테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도 곧 죽을 것입니다.” “스님은 오래도록 사셔야지요.” 내가 오래도록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는 거라? 죽음은 언제든지 여러분들 앞에 찾아올 수 있다는 거라. 그게 업에 의한 조건이든, 다른 사고에 의한 조건이든, 아니면 어떤 조건이라도 항상 내 곁에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분에게는 그 조건이 암이 조건이 된 것일 뿐인것이지 죽음은 언제든지 어떤 조건으로든 나에게 다가올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조건들은 나에게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하는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죽음을 맞았을 때 맨 처음 찾아오는 것이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죽음은 언제든지 나에게 찾아오는 거죠? 그건 확실한 거죠?

그러면 죽지 않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는 죽지 않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죽지 않을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좀 더 내가 행복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을 목표로 해야 됩니다.

 

지금 죽음에 대해서 불안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을 빨리 전환을 시켜줘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평온할 수 있는가? 불안하면 호흡을 관찰하든지, 부처님에 대해서 수행을 한다든지, 그래서 마음을 고요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되는 것이지, 그 불안감에 쌓여있어 가지고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는 거라.

누구든지 죽지 않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100프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을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불안감은 실제로는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차라리 내가 조금 더 고통스럽지 않고 평온할려고 할 것 같으면 의사한테 진통제를 하나 더 놔주라고 하든지, 좀 더 행복하고 평온하기 위한 길을 찾아야 되는 것이 바른 길이라는 거라. 그래서 거기에 휩싸일 필요는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후회로 인해서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아, 참 살아온 것들에 대해서 후회를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랬으면 좋았을걸, 저랬으면 좋았을 걸' 하면서.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면 후회는 망상입니다. 망상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후회는 마음에서 악한 심소에 들지, 선한 심소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왜 계속 내가 악한 마음을 내야 되는데? 후회하는 마음이 들 것 같으면 차라리 그만두고 지금 현재에 집중을 하라는 거라. 지금 통증이 일어났으면 통증에 집중을 해야 되는 거고, 지금 호흡이 관찰되어지면 호흡을 관찰하는데 지금에다가 집중을 해야 되는 것이지, 후회하는 것 그 망상에다가 집중을 해가지고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과거의 일들에 대해서 후회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바로잡아질 수 있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리고 세 번째가, 스님 주변에 그런 분들이 좀 있었습니다. 아프니까 먹는 것을 되게 가려서 먹습니다. 식단도 딱 짜여진 것대로, 그리고 유기농이나 아니면 자연 채식, 특히 스님들이 그런 것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몸을 고칠려고 하는 경우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공통적인 것이 뭔 줄 아세요? 굉장히 신경질적이라는 거라. 조금이라도 그것이 틀리면 금방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고 합니다. 그래서 속으로 그랬어요. '뭐하러 저렇게 성질내쌌고, 신경질을 부리고 그럴까? 차라리 그거 하지 말고 그냥 주는 대로 먹으면 오히려 마음은 더 편할 건데'

 

실제 그렇습니다. ', 죽기 싫다' 하는 마음이 들 것 같으면 식습관들을 자꾸 그렇게 바꿀려고 합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인 것만 갖추어지면 됩니다. 그냥 밥 먹는 것을 현미로 한다든지 아니면 기본적인 것 소식을 한다든지, 그래서 먹으면서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맛있게 먹는다든지, 기본적인 것만 하면 되는데, 그 외에 다른 것들을 전부 다 할려고 하니까 그것은 어찌 보면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은 실제로는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또는 다른 민간적인 요법들을 자꾸 동원을 할려고 그럽니다. 증명된 것들이면 괜찮은데, 그렇다고 해서 그 민간요법이 잘못됐다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민간 요법에 너무 맹신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병을 고치는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 맹신해가지고도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시간을 보낼 바에야 차라리 고요하게 수행하는 것이 훨씬 이익입니다.

스님 주위에 그런 스님들이 몇몇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보면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식습관이라든지 하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 필요한 것이지 몸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에서 벗어난 부분에서는 사실은 불필요하다 하는 겁니다. 차라리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하는 시간이면, 얼마든지 다른 좋은 일들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런 시간들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지금 돌이켜 생각을 하면 스님도 모친이 아팠을 때 그런 적이 있습니다. 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무슨 야생 뿌리라든지 줄기라든지 이런 걸 캐가지고 좀 해드리라고 그러고, 또 남들이 민물장어가 좋다고 하기에 민물장어 사러 가기도 하고. 그런데 나중에 지나서 알고 보니까 실제로는 그게 의미가 없었더라는 거라. 의사 말은 그것들이 오히려 암세포들을 더 증식하는 결과들을 가져왔다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 자신도 그것을 보면서 아무리 부모님을 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필요한 부분들인데 지나치게 그것을 할려고 했구나 하는 그런 마음들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음식은 단지 기본적인 필요한 것들 외에는 그것이 설혹 병이 들었고, 암에 걸렸고 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것 이상은 사실은 의미가 없다 하는 겁니다. 그것을 항상 머리에 담아 명심을 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면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은데, 인제는 그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못한다 하는 것에서 오는 그런 초조감 입니다.

좀 휴일 때 나가서 낚시라도 하고 싶고 테니스라도 치고 싶고 아니면 영화라도 보고 싶고, 인제는 그것들을 아예 하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그런 초조감이나 낙담감,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한번 돌아보십시요. 사회적으로는 그게 어떤 활동들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대부분의 것들은 쾌락을 쫓는데 들어 있습니다. 수행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이때까지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따라서 살아왔으면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일 거 같으면 얼마나 좋은 조건이 돼있는 거라.

그런데도 그것들을 계속적으로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그런 불안이나 초조를 일으킨다는 것은 그건 참 어리석은 일이라는 거라. 쾌락을 쫓아가지고는 해탈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오히려 그런 조건이 지금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는 참으로 고마워해야 된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괜한 질투들을 하는 것.

나는 이렇게 병들어서 힘들어 있는데 다른 사람을 보면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거든. 그런 데서 오는 것들도 있습니다. 남들이 행복하면 좋잖아! 남들이 건강하면 좋잖아! 그런데 왜 그 생각은 안 하고 그러한 것들을 보기 싫어하게 될까? 자신에게 분노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는데 남들이 나와 같은 상황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도 그것도 분노입니다. 남과 나를 구별하는 것 자체는 어떠한 경우든지 분노의 일종입니다. 나에게 맞출려고 한다든지, 내가 남에게 맞출려고 한다든지 하는 것들도 전부 분노의 일종입니다.

 

오히려 남이 건강할 것 같으면 참 축복해줄 수 있는 마음들을 가지고, 남이 행복해 할 것 같으면 '그래. 참 행복해라'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불안이나 분노들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참 그것은 옹졸하다는 거라. 건강하고 살아있을 때도 그 일이 용납이 안 되는 건데, 지금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그 분노를 일으킨다 해가지고 무슨 의미를 가진다고, 그것들로 인해서 분노를 일으키느냐는 거라.

 

그다음에 또 하나가 가족들에 대한 것들입니다.

'내가 죽고 나면 이 가족들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그런 것들, 또는 '내가 이렇게 병들어 있으니까 병원비가 참 많이 나오는데, 괜히 가족 친지들한테 피해를 입힌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의 일만 신경을 쓰면 됩니다. 가족 것까지 챙길만한 그런 여력이 못됩니다. 오히려 그런 분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을 것 같으면 그런 분들에게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만 있다고 하더라도 참 좋은 일입니다. 그걸 피해를 입힌다고 자꾸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아, 참 저분들이 있어서 나는 고맙다, 감사하다' 하는 그런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으킬 수 있으니까, 그게 얼마나 좋아요?!

 

또 살아있는 가족들도 마찬가집니다. 아직 그분이 살아있기 때문에 나는 같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이 아직 있기 때문에 내가 보시를 한다든지 아니면 봉사를 한다든지 내가 선업을 쌓을 일들을 계속적으로 만들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죽고 나면은 이제 나하고는 다른 차원의 사람이 돼버리는 거라. 죽고 나면은 나는 내가 그런 선업을 쌓을 기회를 아예 제공 받지 못하게 됩니다. 참 좋은 관계들로써 이루어져 나갈 수 있는 계기라는 생각들을 좀 해야 됩니다.

 

이런 것들이 보통 암선고를 받는 분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그런 현상들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명심해야 되는 것은, '지금의 조건은 나에게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이다' 하는 생각을 잊어버리지 말고 항상 대상들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들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래도 그러한 형태들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살아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는 마음을 잊지 않게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질의 응답 >

Q 수행자 질문 : 스님, 법문 중에서 자아와 유신견은 어떻게 차이가 있습니까?

스님 답변 : '유신견'은 자기가 견해를 가지는 것들입니다. 자기의 틀에 딱 묶여 있는 것들, 자기의 생각이나 견해들이나, '나'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 하는 것을 가지는 것들을 유신견이라고 합니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그것 말고 쉽게 말하면 내가 살고 싶어하는 욕구, 그다음에 '나'라고 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조건 따라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 조건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는 사실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든지 아니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든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아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자아가 있다'는 것은 내가 있다, 나의 것이 있다, 나의 영혼이 있다 하고 세 가지로 분류를 하게 됩니다.

 

Q 수행자 : 결국 유신견에 포함되는 것이 아닙니까?

스님 : 아닙니다. 쉽게 말해봅시다. 만약에 이것이 내 것이다 그럴 거 같으면

'자아가 없는 사람'은 이것이 설혹 깨진다고 하더라도, 이것 깨진 것에 대해서 서러워하거나 다른 조건들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것이 내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걸 왜 깼느냐고 합니다. 이런 것은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이고.

유신견은 이거하고는 다릅니다. 자기가 가진 견해를 얘기합니다. 견해가 깨지는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고, 그래서 유신견은 오히려 깨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든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와 나의 영혼,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침해를 받으면 항상 그것들이 마음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떨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자아'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그게 생존욕구라고 하는 겁니다. '생존욕구이고 이것도 내 것이다' 하는 판단들을 하게 됩니다.

이 '내 것이다' 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견해'하고는 분명하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수행자 : 견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사견이 결국은...

스님 : 그거는 유신견에 속하는 겁니다. 그거는 얼마든지 떨어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들을 떨어트리는 것은 참 그래서 힘이 든다 하고 얘기합니다. 죽고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잖아. 자.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