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2017년 붓다의 날_진리를 보는 자가 여래를 보는 것이다 (25600507.경주)

담마마-마까 2022. 4. 21. 09:00

https://youtu.be/Jr_rTl3PAn4

* 붓다의 날_진리를 보는 자가 여래를 보는 것이다 (25600507.경주)

 

오늘은 2천 5백 몇년도죠? (수행자 대답 : 2560년)

2560년 붓다의 날입니다.

오늘부터 원칙적으로 할 것 같으면 2561년이 되는 거죠?

오늘이 부처님이 입멸하신 날이기 때문에 입멸하신 날을 기준으로 해서 불기가 시작이 됩니다. 원칙적으로 하면 오늘 이후부터는 2561년이 되는데, 요즘은 양력하고 음력하고 같이 쓰다보니까 1월달이 되면 그냥 그해는 다 불기를 똑같이 쓰는 실정입니다. 그러니까 올해 초에 2560년으로 시작됐으니까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올해 끝까지도 2560년도로 쓰기도 합니다.

 

오늘이 무슨 날이기 때문에 불기가 바뀌는 겁니까? 부처님 오신날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 성도도 하셨고, 또 부처님이 입멸도 하셨고,

또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성도해가지고 법을 깨달으시고 법을 전해주시고 한 것은 여러분들한테는 경사스러운 일인데, 또 부처님이 태어나신 것도 태어나셨기 때문에 여러분들한테 법을 전해줄 수 있는 조건이 됐으니까 경사스러운 날인데, 입멸하신 날은 뭐하는데 경사스러운 날이 될까?

 

부처님이 입멸하고 나면 전혀 여러분들에게는 영향을 미칠 조건이 안되게 됩니다. 그렇죠? 그래서 “부처님 나 살려주시오” 하더라도 부처님이 들을 수 있는 조건이 안 됩니다. 완전하게 열반을 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한테는 경사스러운 날이 아닐지 몰라도 부처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아주 경사스러운 날이죠.

나도 어떨 때는 아이고, 참 이 세상 빨리 좀 가벼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특히 출가한 스님들은 처자식이 없으니까 자기 할 일을 마쳤다 하고 생각이 들면 인제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더이상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하는 일이 어떨 때는 벅차고 할 때는 빨리 좀 시간이 흘렀으면 그래서 빨리 좀 입멸했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입멸하는 것이 그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축복스러운 날입니다.

왜 그러냐면, 그래서 부처님의 열반을 반열반이라고 그럽니다. '빠리 닙바나'라고 합니다. "반열반에 드셨다" 하고 얘기합니다. 인제 완전하게 이 몸으로부터도 해방이 돼버리니까. 마음으로는 이미 아라한을 얻으면서 해방이 되었는데, 아직 이 몸에 매여져 있는 상태에서는 벗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입멸한 날 열반한 날은 몸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봤을 때는 아주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어쨌든 부처님은 이제 다시는 이 세상에 오시지 않기 때문에 그날을 기해가지고 불교에서는 한 해가 시작이 되고, 또 한해가 끝나는 날로써 정해져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불교도들에게도 아주 영광스러운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주제를 「진리를 보는 자가 여래를 보는 것이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많이 들어 본 제목이죠? "진리를 보는 자가 여래를 보는 것이다" 하는 것은 경전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진리라는 것이 어떤 것이기에, 또 여래란 것이 어떤 의미이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걸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경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tathatā avitathatā anññathatā idapaccayatā [paccayasuttaṁ 조건경, SN12-20]

"따타따 아위따타따 아난냐타따 이다빳짜야따" 그렇게 얘기합니다.

'따타따(tathatā)' 라고 하는 '진리라고 하는 것' "결코 잘못되지 않는 것이다."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다. 진리 따라서 살아가면 결코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아위따타따(avitathatā)' 라고 하는 것은 그 "진리라고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쉽게 말하면 오늘이든지 아니면 2000년 전이든지 그것이 다른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가는 사람들도 이 길을 갔으면 반드시 그다음 사람들도 그 길을 가게끔 되는 거라. 결과가 똑같은 것들을 낼 수밖에 없는 거기 때문에, 그리고 그 진리는 변함이 없고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얘기하는 것이 '아난냐타따(anññathatā)' "다른 결과를 내지 않는다." 변함이 없고 다른 결과를 내지 않는다. 어쨌든 그 길을 가면 지혜의 길과 성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하는 겁니다.

그게 인제 진리라고 하는 것들을 정의할 때 보통 얘기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진리라고 얘기할 때 '따타따(tathatā)'라고 하는 단어를 썼는데, 부처님이 부처님 자신을 통칭할 때 뭐라고 부릅니까? '따타가따(tathāgata)' 그렇게 얘기하죠.

"따타가따' 라고 하는 것은 "따타따 : 진리를, 가따 : 있는 그대로 내보여주신 분"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이 자신을 스스로 통칭해서 부를 때는 3인칭 명사를 씁니다.

보통 우리 한글로 '여래(如來)'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여래는 이렇게 이렇게 얘기했다." 3인칭 명사를 씁니다.

보통은 보면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나의 주장은 이렇다." 하고 보통 얘기하는데, 부처님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전 전체를 뒤져보더라도 '앗따(attā)' 라고 하는, 부처님 자신이 '나'라고 통칭하는 경우는 2번인가 3번인가 밖에 등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경전 중에. 거의 대부분은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자신을 얘기할 때는 '여래'라는 명칭으로서 3인칭으로써 씁니다.

 

왜 그랬을까? 1인칭과 3인칭의 차이는 뭐냐면 3인칭은 제3자는 다 해당이 되는 겁니다. 제3자는 객관적일 수밖에 없고 제3자는 모든 것들이 다 해당이 되는 것들입니다.

여래가 체험한 것은 여래 혼자서 체험할 것 같으면, “나는 이렇게 체험했다. 내 말을 따라라”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데, 여래가 체험한 것은 여러분들도 체험할 수 있고, 여러분들도 그 길을 갈 수가 있고, 또 그와 같은 법을 설할려고 하더라도 그 부처님이 설한 법 이상을 다른 것들을 벗어나서 설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도 자신을 호칭 할 때 참 탁월하게 단어를 선택합니다. 부처님 자신을 호칭 부를 때 '여래'라는 호칭을 선택했습니다. 그마만큼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라고 하는 것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명칭 하나에도 부처님이 그런 마음이 간절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님 자신을 부를 때는 '여래'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래는 이 세상을 알아차렸다.

여래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졌다.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아차렸다.

여래는 그 원인을 끊어버렸다.

여래는 세상의 소멸을 알아차렸다.

여래는 세상의 소멸에 이르렀다.

여래는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차렸다.

여래는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완성했다.

 

사성제가 연상이 되죠? 고를 알았고, 고의 원인을 알았고, 고의 원인으로 가는 길을 알았고, 고의 소멸에 이르렀다 하는 겁니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각각의 '생명'을 의미하기도 하고, '둑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전을 그대로 직역을 해버릴 것 같으면 그때는 문구가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들을 앞뒤로 쭉 연결을 해보면 아, 부처님이 뭘 설명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썼는가 하는 것들이 드러나지기도 합니다.

부처님 자신은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하다 보니까 분명하게 그 진리를 깨달았다는 거라.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뭔지, 괴로움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는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다 알았다는 거라.

그래서 '둑카' 아니면 '나는 이렇게 이르렀다' 얘기하지 않고 그냥 보통 명사인 '세상'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여러분들도 모든 생명들도 똑같이 그렇게 고의 원인을 알고 고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 하는 걸 간접적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고 할 것 같으면 인정해야 될 것은 인정하고, 여러분들 죽는다는 것은 인정해야 되죠? 안 죽는다고 발버둥쳐봐야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은 오히려 더 괴로워지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괴로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걸 받아들이게 되면 받아들이고, 그러고 나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다, '아, 내가 그걸 받아들이고 나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니까 그 괴로운 것들도 사라져버리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분명하게 알아야만 된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모든 경우들을 그렇게 통해서 분명하게 아셨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다른 경전에 보면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알았다."하고 얘기합니다. 아라한의 특성을 보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안다' 하고 얘기합니다. '육문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분명하게 안다.' 눈을 통해서 뭔가를 보고 있다. 그러면 보는 것들로 인해가지고 그 대상이 사라지는 것, 보는 것들이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들의 소멸에까지 이르르게 된다 하는 겁니다.

 

사성제는 그래서 그냥 교리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수행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체험하게 될 때, 본인이 그것들을 이해하게 되고 '아, 나는 이것들을 알았다' 하고 확신을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여래를 보통 통칭할 때 첫 번째 하는 것들이 뭐냐면,

"여래는 세상을 모두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라 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sabbaṃ tathāgatena abhisambuddhaṁ, tasmā 'tathāgato'ti vuccati.

"삽방 따타가떼나 아비삼붓당, 따스마 따타가또 띠 웃짜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래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여래라고 불린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까?

보면 본다고 알아차려야 되는데, 뭔가 대상을 가지고 붙잡고 밀쳐낼려고 하기 때문에 그 대상이 그냥 보여지는 대상으로 되질 않습니다. 들리는 것도 들린다고만 분명히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데, 좋고 싫음으로 자꾸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게 될 때 진리를 보는 자가 되서 그 진리를 보는 자들은 여래를 보게끔 됩니다. 부처님에게 가장 큰 예경은 바로 진리를 보는 자가 될 때, 부처님에게 가장 큰 예경을 드리게 됩니다.

 

여래를 설명하는 첫 번째가 있는 그대로 세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여러분들도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아, 내가 또 이것으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났구나, 탐욕이 일어났구나, 그럴 것 같으면 빨리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대상은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일어났다가 자기 스스로 소멸하기도 하고 다른 조건으로 인해서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지, 그것을 접하는 내 마음이 그것들을 꼬아놓기도 하고 뒤틀어놓기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대상은 그냥 대상으로써만 바라보게 될 때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이 보여지게 됩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날 보니까 불두화도 피었고 저 앞에 조팝나무도 활짝 피었고, 되게 예쁘죠? (예) 꽃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느껴야 되는 것은 '저렇게 예쁜 꽃도 피었으면 지는구나' 하는 사실로써 받아들이게 될 때, 핀 것에 대해서 너무 그렇게 마음이 들뜨지도 않고 또 지는 꽃잎에 대해서도 그것으로 인해서 쓸쓸해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적어도 그냥 일상적인 생활에서라도 '아, 나도 저렇게 예쁜 꽃을 피워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줘야지' '좋은 향기를 내뿜어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야지' 하는 그런 생각이라도 일으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래도 첫 번째는 잘하는 사람이 됩니다.

 

무조건 그 꽃을 보고 '아, 예쁘다' 이렇게만 할 것 같으면, 고마 탁 가지 꺽어가지고 자기 집에 가져가려고 그런다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자꾸 볼려는 느낌들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꽃의 성품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하다는 성품을 가질 때 그 꽃이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알아차릴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슬프거나 들뜸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때가 룸비니 동산에서 그렇게 화려하게 꽃이 피었다고 그럽니다. 여기 마하보디 선원도 오늘 보니까 그렇게 꽃이 화창하게 피었습니다. 그냥 꽃동산에서 꽃놀이 하라고 피운 게 아닙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도구일 수도 있다는 걸 분명하게 생각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여래를 정의하는 두 번째 단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여래라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 지금 2600년이 지나도 바뀐 게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그 말씀이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이 변함없이 쭉 이어져왔습니다.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왜? 왜 그럴까? 진리를 알고 진리를 체험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한 것은 진리만 말한 것이지 여러분들한테 시험 합격하는 법을 가르친다든지 이런 세속적인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진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진리따라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들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당연히 부처님은 진리를 말한다는 거라. 당연히 진리를 말하니까 그 속에는 탐·진·치 없이 말을 하게 되는 거고, 다른 사람들도 '아, 저렇게 빨리 진리에 이르렀으면' 하는 마음으로써 말을 하게끔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속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가 있게 됩니다. 그냥 맨날 귀로 듣고 흘려버리고 재미로 들을 거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부처님 말씀을 접할 때는 그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진리다" 하는 생각입니다. 경전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스님을 통해서든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그속에서 자기 자신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진리 따라서 실천할려고 하는 노력들을 끊임없이 이어나가야 됩니다.

그것들을 하지 못하면 여래를 볼 수 있는 자격을 못 갖추게 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가끔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해야 될 때도 진리에 어긋나는 것들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말하는 조건들을 경전에서는 갖가지로써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실만을 말할려고 하는 것, 거짓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지 말을 할 때는 입에서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마음에서는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하도록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자기의 습성에 따라서 자꾸 나쁜 말을 하는 쪽으로 방향이 흘러가게끔 돼버립니다.

그래서 항상 말을 할 때도 내가 적어도 자애의 마음을 지닌 채 말을 하는 습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아예 말을 안 할려고 하는 습관들을 들이게 될 때 '아, 나도 인제는 조금씩 진리 따라서 말을 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인해서 이런 기쁨이 오는구나' 하는 것들을 이익들을 알 수 있게끔 되는 겁니다.

그게 두 번째 부분입니다.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하는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본인이 다 시험을 해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본인이 걸어가보지 않은 길은 어떠한 경우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진리는 체험이 되지 않으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본인이 직접 체험해보고 나서 그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가끔씩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하라고 자꾸 하는 사람들. 오늘 같은 경우를 볼까요? 어떤 사람은 오계를 받고 어떤 사람은 팔계를 받았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팔계를 받아야 마땅한 날인데 이 좋은 날에 나는 팔계를 받아 지키는 것이 힘들 거 같으니까 야, 너는 팔계 해, 자기는 오계받고.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권하는 것.

 

그것은 적어도 부처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 본인이 해보고 지킨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든지 진리 따라서 실천하든지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얘기해야 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은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겁니다.

적어도 여래는 그런 분이라는 뜻입니다. 본인이 직접 체험해보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지, 체험하지 않은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경전이라고 하는 부처님 말씀은 전부다 부처님이 직접적으로 체험해보고 나서 그것들을 말씀하신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들을 신뢰할 수 있고, 그 길을 따르면 '아, 나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바르게 도와 과의 길에 간다' 하는 걸 확신을 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받아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본인이 그 길로 인해서 해탈로 이르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탈의 길에 이르기를 바라면서 인도해주는 분이 바로 여래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이 세상에서 최상의 생명이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 이전에 "나는 깨달은 사람이다." 분명하게 선언한 사람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부처님 이후에 "나는 붓다다." 하고 선언을 해가지고 증명을 받은 사람 있습니까?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겁의 세상에서는 오직 부처님 한 분만이 붓다라고 스스로 선언을 했고 다른 사람들도 붓다라고 인정하신 유일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천상의 신도 범천도 그리고 어떤 스승들도 그러한 길을 가보지 못했고, 그 칭호를 받아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최상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존경받을 수 있고 가장 뛰어난 스승으로서, 가장 뛰어난 생명으로서 최상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게 여래라는 네 번째 의미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들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에 적어도 그렇게 해탈에 이르는 길, 열반에 이르는 길에는 모든 길을 다 알고 있는 오직 유일한 분이라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도 그분보다 더 뛰어난 생명이 될 수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말미에 한 얘기가 있습니다. 빨리어 그대로 들려 드리겠습니다.

yo dhammaṁ passati so maṁ passati,

yo maṁ passati so dhammaṁ passati.

"요 담망 빳사띠 소 망 빳사띠, 요 망 빳사띠 소 담망 빳사띠"

 

거기도 같은 말이 자꾸 반복되죠? 쉽게 말하면

"진리를 보는 자가 나를 보고, 나를 보는 것은 진리를 보는 것이다."

"여래에 대한 최상의 존경은 바로 진리를 보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여러분들은 오늘 같은 날은 최상의 예경을 드릴 수 있도록 자꾸 마음을 다져야 됩니다.

그냥 물질적인 예경, 또 정신적인 수행 이것만으로 최상의 예경을 드린다고 자꾸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올릴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예경을 드릴 수 있도록,

"진리를 보게 될 때 그 자만이 여래를 볼 수 있고 그러한 여래를 보는 자만이 부처님 여래에 대한 최상의 예경을 올리는 자다" 하고 항상 명심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했으면 그리고 그 여래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고, 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실천을 하게 됨으로 해서 그 분에 대한 최상의 예경을 올릴 수 있다 하는 걸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부처님 태어나시고, 성도하시고, 열반에 드신 아주 큰 세 가지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 붓다의 날 · 웨사카 뿌자 라고 하는 웨사카 축제의 날입니다.

그런 날에 기쁜 마음으로 물질적으로도 예경하고, 또 정신적인 수행으로도 예경하고, 또 그것을 실천하면서 여래를 볼 수 있는 자가 되도록 더욱 더 노력을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