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자아의식(māna) (20170323)

담마마-마까 2022. 4. 11. 09:00

https://youtu.be/1w-aDqfD1g8

* 자아의식(māna) (20170323)

 

오늘은 저번에 얘기했듯이 마나(māna)에 대한 것, 자아의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연경아! 너는 네 값어치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수행자 대답 : 제 자신을 잘, 남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제 스스로가 제 자신을 거둘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평균 정도는 된다는 얘기네.

우리 선원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수행자 대답 : 비교할 수 없는 값어치죠!)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비교를 하잖아.

(수행자 질문 : 비교할 수 없는 값어치인데, 비교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요. 그러게 말이라.

 

보통 사람들은 '내가 가난하다', 아니면 '부자다', 아니면 '내가 이 정도인데 니까짓게' 하면서 서로 비교들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니면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해서 값어치를 매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값어치는 계속 변하죠? 계속 변하게 됩니다. 값어치가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데도 왜 사람들은 자꾸 비교를 할려고 그럴까? 뭣 때문에 그럴까?

 

살아가는 것들이 불안하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불안하기 때문에. 뭘 해도 사실은 만족할 수 없는 건데 뭔가 다 불안해. 이만큼 있어도 남보다 많다고 생각하는데도 뭔가 불안하고, 그 불안한 게 좀 없는 듯이 되다가도 또 뭔가 그것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를 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만약에 재산이 없다든지 명예가 없다든지 그렇게 하더라도 자식이 잘 돼있으면 거기다가 값어치를 부여 해주게 되는 거라. '나는 저거 때문에,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가 안 된다', 값어치가 그쪽으로 이동을 해버리게 되는 거라.

 

보통 그런 걸 얘기할 때 '마나(mān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뭔가 측정하고 비교하고 해서 자아의식이 거기에 딱 확립이 돼있는 것! 그런데 측정하고 비교하는 것들은 계속적으로 변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변하는 것에 따라서 그 값어치나 가치들도 더불어서 자꾸 변해가게 되는 것, 이런 것들을 얘기할 때 얘기합니다.

 

보통 우리는 보고 듣고 할 때 그냥 '보고, 듣고 했다'고 알지를 않습니다.

대부분은 보면 '나는 봤다' 그러고, '나는 들었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 것이 기분 나쁘면 안 볼려고 하게 되는 거고, 듣는 소리가 좋은 소리일 거 같으면 더 들을려고 하게 되는 거고, 본인은 생각을 안 하겠지만 거기에는 항상 보고 듣고 하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는 「나」라고 하는 것이 항상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거라.

 

「나」가 일어나니까 당연히 나에 대한 자아의식이 조금 전 같이 비교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좋은 것이 있으면 다른 것들에 대해서 비교를 하게 되는 거고, 싫은 것들이 있어도 그것들을 다른 것과 비교하게 되고.

비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다른 것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것들을 자기에게 빗대가지고 비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틀어서 '마나(māna)'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마나'의 어간이 되는 '만(mān)'이라는 것의 뜻에는 '측정한다'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교하고 측정하고 한다'는 뜻입니다.

스님들이 잘못을 범해서 참회하고 하는 것들을 얘기할 때 그걸 '마낫따(mānatt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마낫따'도 '훈계한다'는 뜻인데 거기에도 '만'이라고 하는 어간이 동등하게 쓰입니다. 쉽게 말하면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훈계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 이런 것들도 마나의 의미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게 마나라고 하는 건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의 값어치에 대해서 측정하려고 할까?

(수행자 대답 : 탐심이 작용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물론 마나라고 하는 것은 탐심의 영역에 속합니다. 탐심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탐심이라는 것들이 마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탐심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은 이 마나가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하지 않는 마음의 영역에 속하는데,

측정할려고 하는 것 그런 탐심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 것들이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그렇게 생각 안 할지 몰라도 대부분은 "「나」라고 하는 것들이 뭔가 있어야만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들을 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고 알고, 내 소유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못삽니다. 도저히 살 방법이 없습니다. 노숙인조차도 노숙인이라고 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것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게끔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면 그 근본적인 것들은 마나라고 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단계에서는 보면 수다원이나 불환과에 이르기까지도 마나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라한이 되어야만이 마나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지금 언제 죽어도 전혀 문제가 없고, 누가 나를 비난한다든지 누가 나를 때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내가 보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았다고 알기 때문에 들었다고 알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실재하는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자아가 없는 상태에서는 마나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아에 대한 의식은 자아가 있어야지만 일어나지게 되는데, 아라한은 애초부터 마나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인 「나」라고 하는 것 「앗따(attā)」라고 하는 것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마나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비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을 해도 '아, 내가 지금 선정에 이르렀구나' '아, 이 선정은 몇선정이구나' 하고 비교해봐야만이 그다음 선정으로 올라갈려고 하는 마음을 낼 수가 있습니다. '어, 나에게 인제 바른 견해가 섰구나' 섰는지 안 섰는지 비교하고 측정을 해볼 수 있어야만이 바른 견해가 섰는지를 압니다. ' 나에게는 인제 욕심이 없구나' 그전의 상태와 비교를 해봤기 때문에 나에게는 욕심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인제 욕심이 없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없애버린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남아있는 것이 마나(māna)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가지 장애 중에서 아홉 번째 장애를 마나(mān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의심하고 혼침·망상하고 그다음에 뭔가 조금 더 높은 경지에 이를려고 하고, 이런 것들을 다 없앤다고 하더라도 남아있는 게 마나라는 것입니다. 그마만큼 마나를 없앤다고 하는 것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거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은 그렇게 비교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값어치를 매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라.

사는 것들이 불안하고 그리고 나의 가치에 대한 자아의식이 없을 거 같으면 살아갈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어떻게 하면 이런 마나(māna)와 친해질 수 있을까?

스님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엷게 만들고 그리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분노를 수행대상으로 하죠? 고통이 있으면 고통을 수행대상으로 합니다. 분노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 이것도 불선심소입니다. 탐·진·치·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이런 4그룹들은 다 불선심소에 속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분노는 수행대상으로써만 볼 것 같으면 분노를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뭔가 욕심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탐욕이 일어난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탐욕을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뭔가 자아의식이 비교할려고 하는 것들이 일어났으면 그것들을 알아차리면 그것은 제거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일어난 자아의식-마나는 적어도 제거를 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탐·진·치는 감정의 물결들입니다. 그 감정의 물결 중에 하나가 이 마나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감정과 반대되는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보면은 적어도 마나는 약화시킬 수가 있다는 거라.

'내가 왜 쓸데없이 그걸 비교하지?' '내가 이런 것들이 없으면 어때서?' '그 대신에 나는 이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있는데?' 하고 생각할 거 같으면 마나로 인해서 피해를 입지는 않는다는 거라.

(수행자 질문 : 그냥 사띠로 알아차리면 하면 안됩니까?)

사띠로써 알아차림을 한다고 하더라도 마나라고 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존재해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약화시켜나가지 않으면 언제든지 조건만 맞으면 그 마나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이걸 약화시킬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이성적으로 먼저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라. 그게 마나를 다스리는 첫 번째입니다.

 

마나에는 세 종류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압니다.

자아의식이 생겨나면서 "나는 다른 사람보다도 다른 것보다도 우수하고, 아니면 못하고, 아니면 동일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했을 때고, 남을 중심적으로 했을 때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도 있고, 내보다도 뛰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고, 내하고 동일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각각에 대해서 이것도 마찬가지로 3가지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석서에는 이 마나를 9가지로 분류를 해놓기도 합니다.

 

어느 입장에서 볼 것이냐에 따라서 마나는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식의 마나가 일어날지 알 수 있습니까? 그거는 조건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조건에 의한 것이지, 마나를 안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마나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수행의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마나로 인해서 항상 불선한 마음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마나는 탐욕의 그룹에 속한다. 마나로 인해서 나중에는 분노가 일어나진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자! 한 번 더 보겠습니다. 마나와 어울리는 방법

 

첫 번째, 어떠한 경우도 이성을 유지한다 하는 것.

이성을 유지해야만이 사띠를 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가 돼있지 않으면은 사띠를 하더라도 그 사띠는 바른 사띠가 되지를 못합니다. 뭔가 탐욕에 인해서, 아니면 성냄에 인해서 사띠들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떨어져나와서 대상인 줄을 알고 그 대상을 알아차려야만이 바르게 사띠가 돼나갑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대부분 사띠들은 탐·진·치의 영역에서 사띠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비교해본다고 하더라도 그 비교가 예를 들어서 '아, 저 사람은 수행해서 이 정도 경지에 이르렀는데, 나는 그것에 이르지 못했다' 하고 비교해가지고 내가 더욱더 노력해서 그정도 경지에 갈려고 더욱더 노력하는 마음들을 일으키게 될 때는, 그 마나는 이성적으로 판단해가지고 그 마나를 수행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거라.

나쁜 짓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왜 저렇게 나쁜 짓을 할까?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경우에는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은 더욱 더 나쁜짓을 하지 않게끔 만들어나가는 이성쪽으로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성이 빠져버리고 나면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싫어! 나보다 더 수행 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시기·질투하고 비판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거라.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마나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할 것 같으면 그 마나를 자기 자신을 살릴 수 있는 방법으로써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그것이 이성적으로 판단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성적으로 판단해야만이 사띠도 바르게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자신의 마나로 자기 자신을 지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마나가 일어났을 때 쉽게 말해서 자아의식이 일어나서 비교해볼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났을 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 더 수행을 열심히 하기 위해서, 내가 조금 더 선한 공덕을 많이 쌓기 위해서 이용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마나가 자기 자신을 지켜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써 마나가 일어나는 것들을 잘 살펴야 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게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렇게 될 때는 자신보다도 더 수행을 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열등감이 일어나겠지만, 그 열등감으로 끝나지 않고 나도 그렇게 될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고, 진짜 자신과 같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을려고 하게 됩니다. 자신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경우에는 그것과 어울리지 않을려고 해야 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마나의 3종류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채찍하기 위한 도구로써 쓰일 경우에는 그 마나에 빠지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마나, 자아의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번뇌와 결합하도록 허용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항상 위험한 것은 다른 번뇌와 결합을 하는 겁니다. 마나가 왜 분노의 불선심소에 속하지 않고 탐욕의 불선심소에 속하느냐면, 마나 그 자체로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는 거라. 그런데 분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하더라도 굉장히 위험하다는 거라. 말과 행동으로써 드러나지는 것이기 때문에!

마나로 인해서 내가 다른 번뇌들이 결합하는 것들은 반드시 막아라는 거라.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애초부터 사띠를 해서 나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마나는 애초부터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마나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이러한 마나는 강해지면은 그것은 자기 자신의 성격으로써 바뀌어버립니다.

남들에 대해서 아만심, 자만심을 더 부리게 되는 성격이나, 아니면 남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 게으름 부리는 성격이나, 그런 성격으로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그 성격은 번뇌가 결합해서 그것이 자기 성격으로 형성이 돼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돼버린 상태라는 거라. 그대로 계속 두어버릴 것 같으면 그 번뇌는 자칫 잘못하면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애초부터 마나에 번뇌가 결합하는 것들을 끊어버릴 것 같으면 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하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 마나라고 하는 것도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나 자신이 자만심을 항상 가지고 있는다든지 항상 나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마음을 가진다든지 이런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번뇌하고 마나하고 결합하는 것들은 반드시 막아라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마나가 일어나면 그 마나가 일어나는 것들로 인해서 무상··무아를 알 수 있게끔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남하고 비교해보는 생각이 일어났다, '아, 생각이 일어났네' 하고 그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싹 사라져버린다. '아, 변하는구나' 하고 분명히 알도록 해야 됩니다.

무상·고·무아를 그속에서 알지 않으면 마나는 사라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무상·고·무아를 마나를 통해서 알았다고 해가지고 마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게 된다는 겁니다.

마나가 일어났으면 '아, 나에게 무상·고·무아를 알 수 있는 좋은 대상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애의 마음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는 자애의 힘이 크면 마나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자애의 힘이 약하게 될 때 마나는 항상 세력권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이 행복하고 좀 더 바르게 살아가고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자애의 마음을 자꾸 지녀야 됩니다. 자기 자신이 행복한데 비교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고 있는 것들이 올바르다고 알고 마음이 평온한 상태일 거 같으면 다른 것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거 크게 대수롭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비교하고 측정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마만큼 자애는 강력한 겁니다. 마나를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마나를 눌러주고 약화시켜줄 수는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마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단순하게 자아의식을 가지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자들은 아라한이 되는 분들은 어떠한 것들도 지금의 순간을 살아갑니다. 지금 현재 일어난 마음은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따라서 그 마음도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지금의 순간을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나라고 하는 것들을 일으킬 수가 없기 때문에 더불어서 마나는 일어나지를 않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송천님이 얘기했지만 지속적으로 계속 사띠가 이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마나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마나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 지금의 순간을 사띠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띠하는 것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알지 못하면 그 사띠 속에는 반드시 나라고 하는 것들이 존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면 마나는 일어난다는 거라. 그마만큼 마라는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끊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콘트롤하지 못할 정도가 돼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자! 오늘은 마나에 대한 것들을 얘기했습니다.

 

< 질의 응답 >

Q 수행자1 질문 : 스님, 예류도과에 이르면 유신견이 사라지는데, 그럼 유신견이 사라지면 우리가 보통 세속적으로 말하는 거친 마나는 사라질 거 아닙니까?

스님 답변 : 유신견 그거는 사라지지만 그거하고 「나」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는데?

유신견은 「나가 있다」는 그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지, "내가 실존한다"고 하는 것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Q 수행자 질문 : 존재의식은 가지고 있는 거네요?

스님 답변 : 그럼요 존재의식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유신견을 착각을 하면 안됩니다. 쉽게 말하면 자신의 견해가 바로 서가지고 "이 몸이 있다"는 착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리고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것들이 바른 것이라고 분명하게 견해를 가진다는 것이지, 나라고 하는 것들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Q 수행자 질문 : 그리고 수행을 하다 보면 몇번 경험을 한 건데요, 갑자기 머릿속이 빛으로 환해질려고 하다가 한 반 정도 환해질려고 하다가 또 다시 쓱 사라져버리는데 그때 그 기분이 참 묘하게 기침하려다 안 한 것처럼 뭔가 기분이 씁쓸한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요.

스님 : 환해질려면 완전히 환해지든지

Q 수행자 : 그러니까요. 그 중간쯤 되다가 머리 반쯤 하얘지다가 싹 사라져버리고...

스님 : 어떤 상태에서 머리가 그렇게 하얘지던가요?

Q 수행자 : 이렇게 하다가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진다는 느낌이 와서 머릿속이 빛으로 가득 차오른다는 느낌이 와서 바라보면, 한 반쪽 정도로 차오르다가 싹 사라져버리고, 채울려고 하는 의도가 생기니까 사라져버리는지 그거는 모르겠습니다.

스님 답변 : 그것은 수행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인 것 같아가지고...

Q 수행자 : 관계가 없는 겁니까?

스님 답변 : 예.

 

Q 수행자2 질문 : 관계가 있지 싶은데요. 제 생각으로는 물론 정확할란가는 모르는데요, 그런 빛이 나타나면은 관찰하는 대상을 빛으로 바로 옮기는 그런 것이 있다고...

스님 답변 : 그전에는 반드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태에서 그런 상태가 되더냐고 물어본 것이 뭐냐면, 쉽게 말하면 머릿속이 빛으로써 채워지는 느낌들이 일어나는 것들은 그전에 전조 상태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주 예리하게 마음이 뭔가 대상하고 탁탁 붙는 느낌이 있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조금씩 들뜨는 마음이 있다든지 뭔가 대상을 분명히 알아차리는 그런 것들이 있는 다음에...

그러니까 어떠한 경우든지 그러한 현상이 나타날 때는 그 전제조건이 있는데, 그 전제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머릿속이 환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수행하고 관계없이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봐야 되는 것이지, 수행하고 관계있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머리에 빛이 확 난다든지 이런 상태는 아니라는 뜻이라. 내 얘기는.

 

수행을 통해서 뭔가 대상을 통해서 무상한 성품이 확실하게 보일 때는 머리가 환해집니다. 그런데 환해지는 것이 환해지는 중간에 환해진 것이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환해지면 그냥 끝까지 환해지고 나서 그게 끝나버리게 되는 것이지, 그게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머리가 요만큼 있는데, 요 반만큼만 하얘지고 반은 하얘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있다가 이게 사라진다든지...

 

Q 수행자 : 서서히 차오르려는데 그걸 붙잡을려고 하니까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스님 : 그거는 그냥 수행에서 그런 욕심을 부린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대상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은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하나의 대상으로 봐야되는 것이지, 그전에 호흡을 관찰하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