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고띠까 스님 관련 게송_계행, 노력, 지혜, 마라(māra) (20170209)

담마마-마까 2022. 3. 29. 09:00

https://youtu.be/WdA1bebcQHo

* 고띠까 스님 관련 게송_계행, 노력, 지혜, 마라(māra) (20170209)

 

「··· 계행을 잘 갖추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그리하면 지혜를 얻게 되고,

지혜를 얻게 되면 마라도 그 자취를 알지 못한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 게송이 얘기된 게 고띠까 스님에 대해서 얘기를 한 것이기 때문에, 살생업이 첫 번째로 굉장히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어집니다.

살생업이 되는 조건은 여러분들이 알죠?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만이 살생업이 된다는 것. 그건 아마 기본적으로 알 겁니다. 죽일려고 하는 대상이 있어야 되는 거고, 그걸 또 내가 죽여야 되는 거고, 죽일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야 되는 거고, 실제 그 대상이 죽어야 되고 하는 그런 조건들이 다 맞아야만이 가능합니다.

 

계를 지키는 것은 몸과 말로써 지키는 것들입니다. 살생뿐 아니라 거짓말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런 것들을 보면 마음하고는 관계가 없는 부분입니다. 그대신에 몸과 말로 하는 것들이 항상 선한 것들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말을 하더라도 남을 해꼬지 하고 미워하는 말보다는 칭찬하고 또 선한 말들을 할려고 하고, 그리고 몸으로 행하는 것들도 자기 자신과 남을 해칠려고 하는 것보다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을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얘기해드렸던 살생업이 그런 다섯 가지 조건이 다 갖추어져야만이 살생이라고 하는 업이 되지만, 그런 조건이 안 갖춰지더라도 살생업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직접 죽이는 거는 살생업이 되겠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잘하는 것들이 뭐가 있느냐면 낚시할 때 미끼를 써가지고 그걸 낚아 올리는 것, 쉽게 말하면 덫을 놓는 것들 이런 것들도 살생업에 해당이 됩니다. 또는 어떤 다른 사람을 '저 사람이 잘못됐으면 좋겠다, 죽었으면 좋겠다' 하고 간절하게 원할 경우에 그 사람이 잘못돼가지고 만약에 죽었다, 그것도 살생업에 해당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옛날 주술가들은 그렇게 했거든. 옛날에 그런 것들 많았다고 그러죠. 지푸라기로 만들어 놔놓고 막 뭐를 꽂으면서 죽기를 바라고 해서 죽임을 당하도록 만들고 그런 것들도 살생업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됩니다. 특히 사람의 마음을 뺏어가지고 혼미한 상태를 만들어가지고 죽게끔 만드는 것 이런 것들도 살생업에 해당이 됩니다.

 

살생업이 꼭 앞에 얘기한 다섯 가지 조건만 갖추어지지 않으면 나는 살생은 저지르지 않았다 하고 단정짓기는 힘이 듭니다. 그런 것들도 조심을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살아있는 생명에 대해서는 동등하게 평등한 마음을 지니고 그리고 그 존재들은 다 살 가치들이 있고 또 나름대로 할 일들이 있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죽임을 당하기 싫어하듯이 그 어떤 살아있는 생명체들도 죽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 것들 살생을 포함한 몸과 말로 하는 것들이 선한 작용을 할 수 있도록 자꾸 만들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평상시에 몸과 말로 하는 것들이 그래도 본인이 생각에 선한 것들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렇게 해서 죽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는 잘 살았다' 하는 그런 마음이 들 정도는 됩니다. 수행을 할 때도 그러한 마음이 들어야만이 수행의 대상을 알아차리더라도 알아차림이 오래가집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금방 나쁜 생각이나 아니면 다른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조심을 하고,

 

그러고 나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압빠마데나' 끊임없이 노력을 하라. 여기서 압빠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냥 무조건 노력을 하라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 하는 그런 얘깁니다.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들은, 그래서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것들이라든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하면서도 먼저의 일을 모른다고 하는 것들은 꼭 마약에 취한 것과 같다하고 스님들은 얘기합니다.

마약에 취하면 자기가 뭘 했는지 어디로 갔는지조차도 모릅니다. 분명히 뭔가를 했지만. 그래서 그것은 마음을 굳게 먹고 내가 이것을 마약을 하지 않겠다 하고 열심히 노력 해야만이 마약을 하지 않고 맨정신으로 살아가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방일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뭘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방일한 거와 마찬가지라는 얘깁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가 하는 거라.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하고 있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고, 걷고 있으면 걷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밥을 먹고 있으면 밥을 먹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겁니다.

 

앞에 계행을 지킴으로 인해서 몸과 말에서 항상 선한 마음들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나쁜 의도들을 자꾸 일으키지 않을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좀 더 좋은 의도를 일으키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그것을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단지 여기서 조심해야 되는 것들은 방일하지 않는 것들을 현재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긴 알아차리더라도 잘못되게 알아차리면 안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앞에 있는 부처님을 보고 있다. 여러분이 이 앞에 부처님을 보고 있다고 해봅시다, 부처님을 보고 있다, 그러면 지금 현재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볼 때 어떻게 보아야 됩니까? '보인다' 하고만 알아차려야 됩니다. '보인다' 하고만 알아차려야만이 되는데 대부분은 이것을 어떻게 봅니까?

보이고 나서는 그다음에는 '어 부처님이다' 하는 것이 보이고, 그다음에 '부처님이 어떻게 생겼다' 하는 것들도 보이고, 그것이 또 '나에게 어떤 감명을 준다' 하는 것들도 보이고 그렇게 합니다. 하나의 부처님을 보면서!

 

이렇게 알아차리면 올바르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보일 때는 보인다고만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대상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대상, 저것은 그냥 모양과 형태입니다. 물질적인 대상입니다. 저 대상을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겁니다. 나의 마음이 보는 겁니다. 내 몸이 저기 가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저기에 기울였기 때문에 저것을 보는 겁니다. 물질적인 대상이 있고 내가 본다는 마음이 있다 하는 것,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있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됐을 때 그것을 올바르게 본다"라고 얘길 하는 겁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대상과 정신적인 대상은 분명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같으면 적어도 올바르게 보고 있습니다. 그게 안 되면 어떻게 되요? '부처님' 하고 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보인다' 하고만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보이면 '보임' '보임' '보임', 들리면 '들림' '들림' '들림', 냄새맡으면 '냄새맡음' '냄새맡음' 하고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그렇게 알아차려야만이 그다음 작용으로써 인식과정들이 넘어가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계율을 지키고 또 방일하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먼저 그걸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대상과 대상을 보면서 그 대상에서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그걸 구분할 줄 모를 것 같으면 의미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그렇게 물질적인 대상인 부처님, 저 물질과 그다음에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면 저 대상을 볼 때 저 대상은 아마 끊임없이 바뀔 겁니다. 왜? 저것을 보는 마음은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럼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합니다. 저것을 보는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기 때문에 보여지는 대상도 끊임없이 바뀌어지게 됩니다.

 

그럼 부처님도 각각의 형태로서 갖가지 모습으로 자꾸 바뀌어지는 것들이 보여진다는 거라. 그것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그것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두려운 생각이 일어나고, 아, 변하고 있구나, 부처님을 보는 내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저 실재하는 저 대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보는 마음이 바뀌기 때문에 대상도 바뀐다는 걸 압니다.

끊임없이 바뀌어져 나가니까 그래서 거기서부터는 두려움이 일어나고, 그래서 마음에서는 지혜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만이 그다음 단계로써 지혜가 일어나진다는 겁니다.

그런 지혜가 일어나야만이 무상한 성품을 알 수가 있고, 그리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을 보고 그것을 행복하다고 얘기 못하기 때문에 괴롭다 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알게 되는 거고, 끊임없이 변하는데 내가 콘트롤 해가지고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는 사실을 알게끔 됩니다.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계속 사라짐만 있게 되고 그런 두려움들이 일어날 때 무상·고·무아의 성품들이 탁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지혜를 얻게끔 된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만약에 끊임없이 그렇게 변하는 것들로만 계속 보인다고 그럴 것 같으면 세상 참 살기 싫어질 겁니다. 무상한 것들을 보고 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지혜의 단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단계들을 전부 지나고 나면, 평온한 마음이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그 평온한 마음들은 대상을 보면은 본다고만 분명하게 알고 거기서 그쳐버립니다. 그쳐버리기 때문에 그 대상을 보는 마음도 평온해지고 그 대상도 평온해지게 됩니다. 또는 싫은 대상, 나에게 싫은 말하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들린다고만 분명하게 알고 거기서 그쳐버리기 때문에, 거기서 싫은 소리가 나에게는 싫은 소리로 들리는 것이 아니고 그냥 평온한 말로써 들려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평온한 마음을 항상 유지를 하게끔 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인제는 수행이 본격적인 궤도에 접어들은 상태에 들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평온한 것들이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 이렇게 좋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행복보다도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 길을 계속 가게끔 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나에게 지혜가 이루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경전에 보면 이런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되는 것들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 먼저 갖추어져야 되는 조건들>

첫 번째가 삼보에 대한 믿음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걸 따르는 제자들, 그 삼보에 대한 믿음들을 분명하게 자꾸 가질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것들이 일정하게 갖추어지지 않으면 이런 과정들을 겪더라도 퇴보해버린다는 겁니다. 또는 이런 과정을 겪다가도 퇴보를 하지 않더라도 더 이상 발전해나가지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여러분들이 항상 유념해야 되는 것은 힘이 있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건강해야 됩니다. 힘이 없으면 대상을 관찰할 상황이 못됩니다. 정신적으로도 힘이 없을 것 같으면 마음을 자기 자신이 콘트롤 하지 못하면 마음은 자꾸 벗어나버립니다. 정신적인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럼 수행 못해나갑니다. 몸도 수행할 수 있는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단 10분도 못 앉아있습니다. 힘이 들어서. 그래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수행을 지속해나가기는 참 힘이 듭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도록 그리고 힘이 있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힘이 없으면 다음 단계로 박차고 올라가지지 못합니다.

 

그다음에 또하나 갖추어야 되는 것이 정직한 것.

어떠한 경우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할 줄 알아야 됩니다. 아, 내가 잘하는 것이 뭐고 못하는 것이 뭐고, 또 내가 부족한 것들이 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을 드러낼 줄 알게 될 때, 그렇게 됐을 때 다른 사람들이 부족하고 하는 것들도 이해를 해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걸 용서해줄 줄 알고 서로 화합할 줄 아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설혹 아라한이 되더라도 부족한 것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되어도 부족한 것들이 있습니다. 안 해보고 접하지 않는 것들은 모르게 돼있고 부족하게 돼있습니다. 그것이 더더구나 수행하고 관계가 없는 것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더더구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스님이 됐으면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고, 성자가 됐으면 또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수행을 좀 더 열심히 한 사람들은 “너는 10년 너머 수행했으면서 이것도 안 되나” 하고 그것까지도 다 안다고 착각들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부처님과 똑같은 경지에 이르렀던 아라한들은 다 각자 불교를 하나씩 만들었을 거라. 그런데 왜 그분들은 부처님 아래에서 부처님 제자로서 만족했을까? 그것은 부처님이 갖출 수 있는 것들을 다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들이라. 그래서 누구든지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 자신도 부족하고 다른 사람도 부족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노력하는 것.

보통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라 그럴 거 같으면 배가 불러오면 불러오는데 따라서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만 계속합니다.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어떤 것이 실제 배가 일어나는 것들이고, 어떤 것이 실제 내가 배가 일어나는 것을 아는 마음이라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압니다. 어떤 것이 정신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물질적인 것인지도 모르게 그냥 압니다. 그건 노력이라고 하더라도 '아주 낮은 노력'에 해당이 됩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그런 원을 세웠습니다. "내 피와 살이 다 마르고 이 뱃가죽이 등에 붙고 하더라도 나는 이 자리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지 않겠다" 하는 굳은 결의를 가집니다. 그러고 나서 실제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을 합니다. 그걸 '노력'이라고 그럽니다.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끊임없이 노력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만이, 또는 수행하면서 내가 이번에는 앉아서 배를 관찰할 때 적어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은 분명하게 구분해서 보겠다 하는 마음을 탁 가질 때 그것을 보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지나치게 그것을 볼려고 의도를 가지는 것들은 수행에서 방해작용을 하지만, 처음에 결의를 세우는 것은 수행에서는 참 좋은 작용들을 합니다. 가끔씩 수행하기 전에 자애수행을 하면서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자애수행을 하고 나서 그 마음을 그대로 지닌 채 수행을 하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게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의는 그와 같습니다. 탁 그런 결의를 세우고 했을 때 배를 관찰하면 배를 알아차리는 것이 훨씬 많아집니다. 전에는 배가 불러오는 것이 동일하게 보였는데 첫 번째 불러오는 것과 두 번째 불러오는 것 세 번째 불러오는 것이 동일하게 보였는데, 그다음부터는 동일하지 않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직 물질적인 배가 불러오는 것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구분되지 않더라도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물질적인 것들이.

물질적인 현상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갖가지 것들 다른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럼 그것도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데 일어나는 물질적인 현상들로써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현상이 각각 다르다는 걸 알게 될 것 같으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것이 좀 더 빨라지고 많으면 많아질수록 배가 불러오는 것이,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려고 하는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그것을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금방 망상이 일어난다든지 다리가 아프면 마음이 거기에 가 있습니다. 그러면 절대 배가 불러오는 것을 모릅니다. ', 이게 불러오는 것이 그냥 불러오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있고 대상이 있어야만이 이것을 아는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겪어야만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구분되게끔 됩니다.

 

이런 것들이 바르게 지혜를 얻기 위해서 먼저 갖추어져야 되는 조건들에 해당이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만이 거기에서는 지혜가 일어나게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못하면 어떠한 경우든지 지혜가 일어나지 않고 그냥 아는 지식적인 것들만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은 할 수가 있습니다. "대상을 볼 때 보기만 하여라. 그래서 '봄' '봄' 하라." 그런데 그거는 지식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어떤 과정을 겪어서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대상을 봤을 때 어떠한 상태에서든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들, 그다음 소멸의 현상들, 고요함의 상태들 이런 상태들을 경험해야만이 그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대상은 하나의 보는 현상으로만 그쳐버릴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스스로 본인은 압니다. '아, 내가 이 상태의 지혜에 도달했구나!'

 

가끔씩 사람들이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스님 나는 어디에 이르렀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자기 자신이 더 잘 알지. 자기가 이른 것은 자기가 압니다. 적어도 지혜의 단계에 도달하면 자신이 그 지혜의 어디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자신이 분명하게 압니다. 끊임없이 그것들을 계속적으로 반복하기 때문에. 그러고 나서 그다음 단계의 지혜에 도달하면 그것도 또 끊임없이 반복하게 되면 그 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상태에 있다가 그다음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내가 어느 상태에 도달했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것은 그 상태에 이르지 못했을 때 물어보게 됩니다. 지혜의 단계에 이르러서 성인의 단계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본인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아닐 경우에는, 부처님 당시에 큰 제자들 뿐아니라 지금의 큰 스승들도 마찬가지고 어느 누구에게 "너는 어느 상태에 이르렀다" 하고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거는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님의 능력이지 부처님 당시 때 가섭이나 목련존자의 능력도 안 되는 거라. 없는 거라 그런 것들은. 그 후대의 스승들은 더더구나 말할 필요 없이.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본인이 '아, 내가 여기의 상태에 이르렀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그런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끊임없이 앞에 것,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 반복해야 됩니다.

좀 더 계율을 확립을 해서 몸과 말이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자꾸 습관화들이고, 그리고 끊임없이 내가 현재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고, 그리고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들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도록 하는 4가지 훈련들을 끊임없이 또 반복하는 것, 내가 부처님에 대해서 믿음이 부족하다 할 것 같으면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더 깊게 만들고, 내가 남들에 대해서 자주 시시비비하고 비판하는 것들이 많다 할 것 같으면 그런 것들을 자꾸 제거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런 과정들을 끊임없이 계속 반복해야 됩니다.

반복하면서 현재는 현재에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자꾸 알아차릴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래서 본인이 어느 정도의 상태에 도달했다는 것, 지혜의 단계이든 성인의 단계이든 그 도달했다는 것들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그 사람은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집니다. 또한 집착하는 것들이 점점 더 단계가 올라갈수록 엷어져가는 것들을 인식하게 됩니다.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그것이 불교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경우들도 있는데도, 집착이 없을 경우에는 그것조차도 개의치 않게 됩니다. 그래서 꼭 집착이 없는 것들이 좋은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개인의 입장으로만 봤을 때는 그런 집착하는 것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점점 더 도와 과의 방향에서 해탈의 길로써 더 나아가는 걸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스스로 실재하는 것에 대해서 날조하는 것들이 없어져버립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더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끔 됩니다.

 

설혹 그분이 삼매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대상을 날조하게 됩니다.

스님도 그런 것들을 여러번 경험해봤습니다. 삼매에 들었을 때 마음을 조정을 해서 뭔가 대상을 보는 것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깨어나서 보면 내가 스스로 날조하는 것들이라. 또는 수행의 상태에서 내가 집착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삼매에 집착하고 있는 상태를 나중에 깨어나고 나서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집착하지 않고 날조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그런데 딱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내 상태에서 분명하게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 지금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에 대해서 모르면 어때서? 모른다고 해가지고 내가 지금 날조하고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보고 듣고 하는 것들로 안 된다면 명칭을 붙여서라도 '보인다' 하고, '들린다' 하고 명칭을 붙여서 그것을 보고 거기서 그쳐버려야 됩니다. 강제로라도 그쳐버리고 다음 상태로 돌려버리면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대상을 여기, 여기, 여기, 대상을 돌아가면서 본다. 여기를 봤을 때 선등님인 줄 알고, 여기를 봤을 때 송천님인 줄 알고, 이렇게 보인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나는 날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봐야 되는 게 아니고 그냥 형태만 보여야 됩니다. 그럼 '보인다' 하고 분명히 보고 나서 그다음 대상을 봅니다. 대상이 다른 것은 압니다. 그래서 그다음 대상을 보면 '보인다' 하고 아는데, 이게 '보인다' 하고 알 때는 앞에 선등님은 아예 없습니다. 강제로라도 그렇게 만들어라는 거라.

그렇게 훈련을 하라는 거라. 들리는 것이 있으면 들리는 것들도 분명히 그렇게 강제로라도 그렇게 구분을 해서 자꾸 들리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들리는 상태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될 때 아, 들리는 것만 있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마만큼 실재하는 것들, 그리고 지금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한 겁니다.

 

그렇게 알아차려나갈 때 마라(māra)도 그 사람을 잡아가지 못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마라(māra)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온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도 마라입니다(khandha māra).

몸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 느낌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 인식하는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 어떠한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은 전부 마라입니다.

그럼 대상을 보면 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릴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를 않습니다. 물질적인 현상에 대해서 물질적인 현상이다 하고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그 물질적인 현상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괴로워지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상태가 지속된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오온이라고 하는 마라는 나를 알아차릴 방법이 없습니다. 오온이 마라로써 작용을 했을 때 내가 그 마라에게 들키게 되는 것이지, 오온으로써 오온을 내가 분명하게 집착함이 없이 오온으로써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는 그것은 마라가 안됩니다. 그냥 단지 나의 몸과 마음일 뿐입니다.

 

두 번째 번뇌나 감정에 휩싸일 때도 마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낄레사 마라(kilesa mār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번뇌가 일어나고 감정이 일어나고 하는 것들도 마라에 얽매여버립니다.

화 한번 확 일으켜 보십시오. 자기도 모르게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게 됩니다. 내가 마라한테 속아서 말을 그 마라가 나쁜말을 확 하게끔 만들었다는 거라. 자기 감정에 졌기 때문에. 자기한테 번뇌가 일어났기 때문에. 하고 나서는, 나쁜말을 하고 나서 나쁜 행위를 하고 나서는 후회합니다. 왜 마라한테 지고 나서 그러느냐는 거라.

 

번뇌라고 하는 것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든지 빨리 몰아내야 될 것들인 것이지 그것들을 내가 붙잡고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어떠한 것이든 그것은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일어난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냥 사라지도록 놔주어버려야 됩니다. 콘트롤이 안 될 거 같으면 적어도 붙잡지만 않을 거 같으면 그 감정은 사라져버립니다.

 

사라지도록은 만들어라는 거라. 싫은 마음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혀를 악물고라도 싫은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놔둬야만이 그다음 행위들을 하지 않게끔 됩니다.

아까 눈으로 하나씩 하나씩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나 번뇌들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그것을 볼 능력이 없으면 기다려서라도 그다음 행위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라는 거라. 그래야 마라에게 조복당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상카라 마라(saṅkhāra māra) 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들은 원인·결과로써 이루어집니다. 원인을 지었으면 당연히 결과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걸 못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여기 왔기 때문에 원인을 지었기 때문에 법문을 들을 수 있고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가 있는 겁니다. 내가 한 행위는 반드시 결과를 낳게끔 돼있지 결과가 없이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걸 결과 없기를 바란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들이라는 거라. 그리고 모든 대상들은 항상 변하게 돼있습니다. 붙잡고 있을려고 하더라도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붙잡고 있는 것들이 이미 마라에게 정복당한 겁니다.

늙지 않을려고 하는 것, 죽지 않을려고 하는 것? 그렇게 될 방법이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되는 겁니다. 살아가는데 만족스럽지 못한 것? 그거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조건 따라서 일어나고 조건 따라서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나가 뭔가 있는 것처럼 자꾸 착각하게 만드는 것? 마라에게 다 얽매여버리는 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맛쭈마라(maccu māra) 라고 해가지고, 여러분들은 죽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다음 생이 있을 것 같아요? 아라한이 되지 않았으면 다음생이 있습니다.

그것도 받아들여야 됩니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되고 다음에 또 윤회해야 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됩니다.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윤회할려고 할 것 같으면 좀 더 선한 일들 착한 일들을 해야 됩니다.

못하고 나서 더 많은 걸 바란다? 그것은 잘못된 것들이라는 거라. 지금 내가 가진 것이 없다? 내가 더 노력하지 않았고, 과거에 지은 것들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불만만 자꾸 하고 있다? 또 다음생도 또 마찬가지로 돼버리는 거라.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본인이 윤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좀 더 좋은 조건을 만들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마라들, 데와뿟따마라(devaputta māra) 라고 해가지고 인간을 방해하고 수행하는 것들을 싫어해서 자꾸 방해하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도 마라에 속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의 마라로서 일어나면 좋은데 군대로서 일어나게 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이 마라가 됩니다. 자기 자신이. 군대가 되어버릴 것 같으면 내가 그 마라에게 이기지 못하고 내 자신이 마라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만 해치는 것이 아니고 남까지도 해치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마라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게송을 할 때 "마라도 보지 못하는 길"이라고 얘길 했습니다.

마라가 못 보게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요? 조금 전에 마라의 종류들을 얘기한 이런 다섯 가지들을 마라하고는 관계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라는 거라. 끊임없이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도와 과에 이르러라는 거라.

도와 과에 이르러도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마라에게 붙잡혀버립니다. 생존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빨리 아라한에 이르도록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자! 오늘은 여기서 그치도록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수행자 질문 : 육체적으로 아픈 고통이나 또는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고통이 있을 때에 ‘이것은 무상하다’, 이것이 사라지는 것을 못 보면서도 무상하다 하면 그 아픔이나 고통이 없어지는 경험들이 자주 있거든요. 그것은 잘못된 수행방법인가요?

스님 답변 : 꼭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쉽게 얘기하면 언 발에 오줌 누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지금 현재는 발이 따뜻해지게 되는데 그것은 또 얼게 됩니다. 오히려 더 나쁜 결과들이 올 수도 있는 거죠.

관념적으로 ‘아, 무상하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은 피할 수는 있는데 실제로 그것들이 소멸되는 상태는 아니었거든. 그러면 다음에는 다른 형태로서, 몸을 바꿔 다른 형태로서 또 나타나게 됩니다. 끊임없이. 그래서 그걸 지금 관찰해서 그것들이 분명하게 소멸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됩니다. 당장 발이 어는데 오줌이라도 싸가지고 녹여야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바른 방법은 되지 못한다는 거라.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하려는 노력하는데 있어서 스님 법문을 들을 때 '들림'으로서 들으면 그냥 소리가 들려서 사라지고 사라지고 해서 법문의 내용은 이해는 되는데, 그거는 구체적으로 기억하는데는 좀...

스님 답변 : 아직 힘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요. 필림이 이렇게 있습니다. 영화라고 하는 것은 필림, 필림, 각각의 필림이 연결돼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화를 볼 때 그것을 연결해서 봐지게 됩니다.

사띠 사띠 사띠가 간격이 좁으면 좁을수록 영화같이 순일하게 봐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띠가 있기는 있는데 간격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영화는 자꾸 끊어져버리게 됩니다. 소리가 분명하게 인식돼서 그게 저장이 되지 않으면 사띠의 간격이 넓은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사띠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도 지금 많이 발전하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는 해야 됩니다. 내가 알아차리는 것들이 끊어지더라도 알아차리는 것들이 분명하게 있다는 그 사실, 단 단지 아직은 부족하다는 마음을 더욱더 내야 됩니다.

 

수행자 질문 : 이해는 되는데 기억이, 다 듣고나서는 기억이 구체적으로 잘 떠올리지를 못하는 겁니다.

스님 답변 : 단지 그래서 사띠라고 하는 것은 기억하는 능력보다는 그거는 자동적으로 나중에 돼야 되는 것이지,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들이 연속되도록 해야 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연속되면은 당연히 그거는 자동적으로 영화같이 전부다 기억이 돼서 영상으로 저장되게끔 돼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