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완짜까 담마(vañcaka dhamma, 자기 기만) (20161124)

담마마-마까 2022. 3. 26. 09:00

https://youtu.be/l5eNIeKFM0g

* 완짜까 담마(vañcaka dhamma, 자기 기만) (20161124)

 

「완짜까 담마(vañcaka dhamma)」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완짜까 담마'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위, 자기기만'인데, 악(惡)을 선(善)이라고 하면서 속이는 것, 자기 자신도 거기에 깜빡 속아넘어가는 걸 얘기할 때 완짜까 담마라고 그럽니다.

 

좀 쉽게 얘기하면 아이가 만약에 공부를 안 했다, 아니면 점수를 작게 받아왔다. 그럼 아이에게 뭐라 하면서 두들겨 패면서 자기변명을 합니다. 다 너 때문에 그런다고. 그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다고. 그런 것들을 보통 얘기할 때 완짜까 담마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냥 뭐 자기가 있는 그대로 먹고 편한 대로 살다가 그냥 죽겠다 하는 사람은 이걸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고, 또 수행을 안 하는 사람들은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됩니다.

왜 그러냐하면 선이 악을 가장해서 나오는 법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선은 선으로써 드러나지는 것이지 그것이 악으로 가장해서 드러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악은 선으로 드러나서 가장해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이 드러날 때는 그것이 진짜 선인지 아니면 이게 악이 가장한 것인지 하는 걸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내가 일어나는 마음을 분명하게 관찰하면, 물론 아이를 위해서 한다는 선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거라. 실제로는 내가 아이에게 나쁜 말을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럴 때는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악한 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아, 이것은 완짜까 담마구나' 하고 자기 자신이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것들입니다.

 

수행을 어느 정도 하다 보면 더 빠지는 게 이런 것들입니다. 왜 그러냐면 적어도 선을 가장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선한 것들을 악으로 가장을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하고 있는 '까루나'라든지, 아니면 '소욕지족' 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욕심을 가지지 않는 '무욕의 삶'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선의 영역에 속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아, 그게 실제로는 선이 아니고 악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 빨리어 용어가 '완짜까 담마(vañcaka dhamma)'라고 하는 용어를 쓰게 됩니다.

 

수행하다 보면 그런 거 있죠? 수행을 잘하고 있는데, 아주 대상이 잘 관찰되고 할 때는 좋았는데 한참 동안 있어도 대상이 관찰 안 되고, 고요하기는 한데 그냥 좋아가지고 그냥 편안하게 있습니다. 본인은 거기에 속아버리는 거라.

대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게으름에 빠졌다는 생각을 안 하고, 그냥 고요하다는 것으로 착각을 해서 살아가버리게 되는 거라. 고요함에 빠졌을 거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영향을 안 받고 그냥 그 고요함 속에 머물르고 있어야 되는데, 게으름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고요할 때는 모르는데 외부에서 무슨 자극이 탁 가해지면 깜짝 놀란다든지 아니면 악한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게 된다는 거라. 실제로는 고요함에 빠져있는 선한 상태가 아니고 그걸 가장한 악의라고 하는 게으름에 빠져있는 상태가 됩니다.

수행이 어느 정도 잘 진행돼나가다가도 그렇게 빠지기도 하기 때문에 굉장히 경계를 해야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완짜까 담마는 여러분들이 좀 조심을 해야 되기 때문에 몇가지만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가 '빠라타까마타'라고 하는 것입니다.

몇년 전에 구서역에 스님이 가서 법문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구서역에서 범어사 무슨 그룹이 나와가지고 자원봉사 하면서 거기서 점심을 나눠주는 그런 거였어요. 밥을 지어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점심을 먹고 모이니까 “스님, 와서 그냥 밥만 나눠주기 뭐하니까 와서 부처님 말씀 좀 들려주십시요.” 하길래 나도 좋지 뭐. 나도 가서 밥한끼 얻어먹을 수 있고, 그러고 법문하고 지하철 타고 오면 되니까. 그래서 가서 법문을 했는데, 나중에 한참 지나다 보니까 이게 좀 변질되는 모습이 보여요.

어떤 거냐 하면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왜 날 안 알아주느냐는 거라. 나는 왜 안 알아주느냐는 거라. 그래서 그런 얘기를 푸념을 하는 소리를 좀 들었어요. 그리고 좀 있으니까 또 다른 스님들이 왜 범어사 신도들이 하는데 왜 테라와다 스님이 가서 법문을 하느냐 하면서 또 시비를 걸고 하는 걸 봤어요. 그래서 ‘아, 이거는 내가 계속할 자리가 아니구’나 해서 “이제는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하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첫 번째입니다. 남을 도와준다고 하는 좋은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거라. 또는 남이 도와주는 모습들을 보면서, 밖으로는 기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이 못마땅하고 불편해하는 마음들이 있었다는 거라.

뭐 범어사 신도들이 하는데 테라와다 스님이 가서 하면 또 어때서? 뭐 그걸 왜 문제 삼을 이유가 없는 건데.

그래서 조심해야 되는 것이 항상 선한 일을 할 때 그 속에 숨어있는 것이 뭔가 하는 것들입니다. 그걸 자기 자신이 악한 마음이 드러나고, 자기 자신이 그 악한 마음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속아버릴 것 같으면 그게 굳어져버립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내가 선한 일을 할 때는 남들이 분명히 알아줘야 돼. 못 알아줄 거 같으면 화를 내는 거라. 그러니까 그냥 모르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아예 안 돼버리고, 어쨌든 선한 일을 하게 되면 드러날 수 있는 곳에만 자꾸 하게 되는 거라.

그게 첫 번째 부분입니다. '빠라타까마타'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수행을 쭉 하고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당연히 그것은 밖으로 드러나져야 됩니다. 그런데 아직 무르익기 전에는 그것이 드러나지지를 잘 않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아, 나 수행하고 왔으니까 피곤해. 니가 밥 해먹어.” 이래버린다는 거라.

자기가 선한 일을 한 것에 대해서 남들도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거라. “나 오늘 이거 했으니까, 좋은 일 했으니까 너희들이 이 부분은 양보를 하고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달라.”

선한 일 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그것을 알아줘야 되는 대용물로써 대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거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삐야-와디따(piya vādita)' 라고 그렇게 합니다. 애어(愛語)라고 보통 한자로 풀이를 합니다. 자애스러운 말, 남에게 해를 주지 않을려고 하는 말, 그리고 남을 도울려고 하는 말들, 그리고 항상 마음에는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뭔가를 말을 하고, 그리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그리고 상스러운 말들도 하지 않고, 이런 말들을 계속 생활화해 나가는 것.

그건 참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그렇게 하다 보면 미사여구가 자꾸 많아지게 됩니다. 좀 더 예쁜 말만 할려고 하게 됩니다. 실제로는 틀렸는데도 틀렸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마음에나 기분에 맞는 얘기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다 보니까,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나쁘게 말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럼 본인이 착각을 합니다. "난 항상 애어(愛語)만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인정해준다"고 착각을 해버리게 됩니다.

자신을 인정해준다고 착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 뒤부터는 애어(愛語)라고 하는 것이 그냥 듣기 좋은 소리로만 자꾸 흘러가 버리게 됩니다. 실제로는 틀린 것은 틀렸다고 얘기할 줄 알고, 또 그것이 쓸모없는 말 같으면 쓸모없다고 분명하게 얘기를 할 줄 알아야 되는데, 그런 말들은 아예 못하게 돼버린다는 거라. 애어가 바껴버리게 됐다는 거라. 그 자기 자신이 인정받고 있는 것들을 벗어버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애어만을 해야 됩니다. 삐야(piya)라고 하는 항상 상냥하고 자애롭고 하는 말들을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거는 의무사항인데, 의무사항을 함으로 인해서 자기자신이 '아 나는 참 좋은 사람이야' 하는 착각에 빠지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봐준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때는 항상 말을 하는 데만 자꾸 집중을 해야 됩니다.

하고 나서의 결과에 대해서 자꾸 기대하는 마음이 생겨나버릴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을 인정해주는 습관으로 자꾸 빠질 수가 있게 됩니다.

 

또 하나 나쁜 것은 뭐냐면 자신이 선한 말을 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그 결과가 돌아온다고 믿게 됩니다. 그거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거는 자연법칙이기 때문에 당연히 따라와지는 것인데, 자신이 그걸 믿어버림으로써 오는 병폐가 생겨납니다. 만약에 안 돌아오면, 그것이 아니고 다른 것들로 인해서 다른 결과가 온 것인데도 자신은 착각을 해버리게 된다는 거라.

“왜 나는 이렇게 너에게 좋은 말을 해줬는데, 너는 나에게 그거에 상응하는 것을 주지 않느냐?” 하고 얘길합니다.

 

원인·결과는 뚜렷한 것이지만 결과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관여할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그 법칙만 알고 결과가 반드시 온다고 생각하고 그걸 바라게 된다는 거라.

내가 선한 말을 하고 사랑스러운 말을 했기 때문에 나를 인정해줘야 된다 하는 것과 똑같이 내가 선한 말을 했기 때문에 선한 결과가 온다고 반드시 믿어버리고 그것들이 반드시 와야만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그런 것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미사여구를 자꾸 쓰는 쪽으로 발달을 하게끔 됩니다.

 

수행에서도 말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이런 완짜까 담마라고 하는 자기기만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말을 할 동안에 말하는 것에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으면, 돌아올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그대로 귀를 통해서 듣기만 하게 됩니다.

말을 할 때도 말을 할 때는 입을 관찰하는 것이고, 들을 때는 귀를 관찰하는 것이지, 입과 귀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다른 마음이고, 하나의 마음이 사라지고 나서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걸 동일선상으로 놓을 수는 없다는 거라.

그래서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각각의 것은 각각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자꾸 이해할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아까 처음에 얘기했지만 '까루나(karuṇā)' 라고 하는 것. 괴로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심을 가지는 것.

누구나 가져야 될 선한 마음이지만 여기에도 함정들이 있습니다.

인도 갔을 때 그런 적이 있습니다. 차에 막 애들이 매달려가지고 1루피, 10루피 달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그게 불쌍해가지고 1루피라도 주면 가이드들이 보통 뭐라고 하느냐면 “주지 마라”고 그럽니다. 쟤들이 버릇이 돼가지고 계속 일 안 하고 그것만 바라고 살게 되고, 그 뒤에는 거대한 삥 뜯는 조직이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왜 그걸 생각을 해야 되는데?

 

가끔 교도소에 가서 법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법문을 하다 보면 아주 흉악범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히 시선이 내가 법문하는데 호감을 가지는 사람 쪽에 마음이 쏠립니다. 그럼 그 사람에게 말을 하듯이 찬찬하게 얘기를 해주게 됩니다. '아유, 저 사람이 이 힘든 상황을 빨리 벗어나기를' 하는 마음을 심어서.

그런데 좀처럼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주 흉악하게 생긴 사람한테는 마음이 가지질 않는 거라. 어느 순간 탁 깨달은 거라.

아, 이게 까루나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은 다 동일하게 괴로워하고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괴로워하고 있는데, 내 마음은 한쪽에 내가 마음이 쏠리고 내가 좋아하는 쪽의 사람들의 괴로움만 보여서 그것들을 없애줄려고 연민심을 일으키고만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다른 쪽은 나를 미워하고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 괴로워하더라도 나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려고 한다는 거라.

 

인도의 애들을 보더라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주지 마라” 하는 것은 구두쇠와 꼭 마찬가집니다. 어찌 보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데 그걸 못하게끔 마음에서 자꾸 제어를 하는 거라. '아, 쟤들은 그거 줘봐야 그걸 가지고 좋은데 쓸 수 없겠지', 아니면 '다른 어떤 조직이 있겠지', 그걸 왜 줘야 되는 사람이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건 받는 사람의 문제라.

나는 어떤 경우든지 이런 사람이든 저런 사람이든 내가 능력이 닿는 내에서는 연민심을 발휘하고 연민심의 행동들을 해야 되는 것들이라. 그런데도 그걸 어떤 다른 것들로 인해서 또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서 이게 편애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진정한 연민심이 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까루나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들이든지 대상에 대한 구별이 없어야 됩니다. 똑같이 잘못했는데도 큰 놈한테는 적게 뭐라 하고, 작은 놈한테는 더 심하게 뭐라 한다, 그것은 편애하는 것이지 그것은 까루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본인은 까루나라고 하면서도 그것은 가장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항상 조심을 해야 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압삣차따(appicchata)'라고 하는, '소욕'이라고 하는 겁니다.

특히 스님들에게 많이 일어납니다. 스님들은 가사와 바리때로써 살아가게 됩니다. 그외에는 가진 것들이 없도록 하라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떨 때 탁발을 나가보면 그렇습니다. 태종사에 있을 때 그랬는데 탁발을 나가보면 탁발을 받아오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진짜 빵 조그만 쪼가리 한쪼가리 받아오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 그날은 탁발을 받아왔으면 청식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못 받았으면 못 받은 대로 굶어야 되는 거고, 빵 한쪼가리면 빵 한쪼가리로 만족을 하고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적은 것으로 인해서도 만족을 할 줄 알아야 되는데, 마음에 어떤 마음이 드느냐면 '어, 내가 아무것도 안 먹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탁 생겨버립니다. 그러면 절에 들어와가지고 “탁발 아무것도 안 받았습니다. 공양 차려주십시오.” 이렇게 합니다. 자연스럽게 합니다. 그 사람들은 그게 틀린 건지 몰라.

 

소욕이라는 것들이 확립돼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렇게 하질 않는다는 거라. 그냥 굶어버린다는 거라. 하루 굶는다고 해서 몸이 죽을 정도가 되지 않고 활동을 못할 정도가 아니다는 것은 틀림없이 아는데, 그것으로 인한 두려움들 때문에 밥을 먹어야 되는 상황에 빠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굶어도 괜찮다는 걸 분명하게 압니다.

 

여러분이 작게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큰 불편함이 없다 하고 알 정도가 될 것 같으면 참 좋겠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는 거라.

'어, 이후에 생길 건 어떡하나?' 아마 지금 여러분들이 국민연금, 뭐 각각의 보험들 을 넣는 것들은 그걸 대비해서 아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그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안감으로 따지면 여러분이 더 많지 스님이 더 많지는 않을 거라.

 

얼마 전에도 총무가 와서 “스님, 이대로 가다가 붓다의 길따라 문 닫습니다. 문 닫으면 어떡할 것입니까?” 당연히 그 마음이 생기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그게 걱정이 안 돼. 문을 닫으면 닫는 거지 그걸 지금 왜 걱정을 하고 있어야 되느냐는 거라. 지금 살고 있고, 또 인연이 안 되서 문을 닫을 때가 될 것 같으면 또 다른 집도 생기는 것이지 지금 내가 갈 곳이 없다고 해가지고 그걸 지금 걱정하고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라.

 

소욕지족이라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지금 현재 하고 있고 지금 현재 가지고 있고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로 인해서 불편함이 없고 그것들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 돼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항상 뭔가를 자꾸 대비하고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실제로는 악한 것들이 더 가질려고 하는 욕심들이 선한 것으로서 포장을 하고 드러낸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들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학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에 총무부장으로 있을 때 가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스님, 조계종에 절이 많은데 그중에 가장 허름한 거 하나만 우리 테라와다에 떼주십시요. 조계종에서 그거 없다고 해가지고 불편할 것도 없는 거고, 그리고 그렇게 가장 불편하고 안 좋은 절이면 누가 가 있으려고도 잘 안 하기 때문에 그냥 그거 하나 살짝이 떼주면 안됩니까? 안 된다는 거라. 우리는 그거 있으면 아주 유용하게 쓸 것인데. 내 것이라는 것, 조계종 것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줄 수가 없다는 이름으로 그렇게 합니다. 실제적으로는 그게 맞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여러분들도 여러분들 마음에는 그렇습니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면 '이것은 나의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둑이 와서 조그만 거 훔쳐가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돌려받을려고 하지 그 훔쳐 간 도둑에 대해서 이해하고 왜 훔쳐갔는지를 먼저 물어볼려고를 하지 않는다는 거라. 도둑이 잡혔으면 훔쳐간 물건을 받는 것에 국한해버리지 그 사람의 사정에 대한 거는 전혀 안중에 없다는 거라.

 

소욕지자들이 빠지기 쉬운 게 그런 것들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거기 때문에 내가 쓰는 것이지, 나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내 것이라고 착각할 것 같으면 소욕하는 마음도 사라질 뿐 아니라, 악이 선으로써 가장해서 드러나지게 됩니다. 아니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드러나지게 됩니다. 실제로는 그것은 조심해야 될 악한 마음이다 하는 것들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빠라눗따야따' 라고 하는 것. 타인을 걱정해준다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또 '앗타상락카따'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대는 것. 이런 것들도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있어야 자기 자신을 지킬 것인데 자기 자신은 원래 형성된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것들은 변하고 사라지게 돼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 이해하지 못할 거 같으면 자기 자신을 지킨다고 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고 하는 것들이, 뒤돌아서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한 것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조심을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아힝사(ahiṁsā)' 라고 하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 이것도 조심을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뭔가 한다고 하는 것, 그것은 있을 수가 없다. 지금 당장 동물 하나가 차에 치여서 다 죽어간다, 그럼 정의의 이름으로 이 동물을 안락사시킵니다. 실제로는 '힝사'라는 거라,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뭔가를 행한다고 하는 것들도 그것이 남을 죽이고 남의 권리를 빼앗고 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아힝사'의 영역에는 속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것들도 여러분들이 조심해야 될 것들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가 실제 수행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여러분들에게 악인데도 선으로 가장하고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그걸 빨리어로 '완짜까 담마'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마음을 잘 단속하고 지금 현재 일어난 마음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