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다섯 가지 종류의 마라(māra) (20161103)

담마마-마까 2022. 3. 21. 09:30

https://youtu.be/VlFHA21cq_Y

* 다섯 가지 종류의 마라(māra) (20161103)

 

오늘은 경전에 나오는 다섯 종류의 악마 마라(māra) 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스님이 참 잘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꺼내먹는 것을 잘 못합니다. 누가 차려놓고 꺼내먹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잘 못 꺼내 먹어요. 심지어 물이 있는 것도 꺼내먹는 것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한 1주일 2주일 정도 지나고 나서 냉장고를 열어보면 냉장고 속에 있는 것도 썩어있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못하는 거보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이해를 좀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가끔 그걸 보면서 그럽니다.

 

사람들이 사띠를 안 하고 저와 같이 음식물이 자연스럽게 썩듯이 썩어버린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빨리 썩는 것이 있고 좀 늦게 썩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속도의 차이인 것이지, 냉장고 안이라 해가지고 그게 썩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냉장고도 결코 안전한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해가지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안심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지금 생에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알아차리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건 썩어버리면 그건 아무짝에도 쓰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걸 놓치지 말고 또 그런 것들이 썩도록 가만히 두지 말고 계속적으로 알아차리라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음식물이 썩을려면 아무래도 많이 발효가 되고 그속에서 또 다른 변화들을 겪게 됩니다. 만약에 저 음식물이 느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땠을까? 점점 더 괴로움은 더 증가해갔을 겁니다. 누군가가 꺼내가지고 빨리 그걸 다른 조치를 취하든지 먹든지 해서 없애버려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 할 경우에는 그 음식물은 끊임없이 고통이 늘어날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 몸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 고통이 많다고 할 거 같으면 음식물이 썩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간단하게 비유를 해보면, 아파서 병원에 가서 입원을 해있을 거 같으면 점점 더 그 병이 치료가 되면서 고통이 감소해갑니다. 그래서 의사가 판단을 할 때 아, 이 병은 치료가 됐다, 그래서 고통이 없다 싶으면 “인제 퇴원하십시요”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을 설한 부처님이 봤을 때, 여러분들이 괴로움이 점점 더 증가한다고 할 것 같으면 뭐라고 하실까?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고 보지 않을까?

살아가면서 어떤 것에 인해서도 괴로움이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자꾸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의사가 퇴원해도 좋다고 하듯이 여러분들도 그 괴로움의 끝을 보고 "아, 더 이상 이러한 괴로움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가져오고 증가시켜 주는 요인들을 경전에서는 '마라(māra)' 라는 용어를 많이 씁니다.

꼭 사찰에 가면 마군(魔軍)이라 해가지고 아주 무섭게 생긴 신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만을 마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설했던 마라는 그 개념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그 첫 번째가 '칸다 마라(khandha mār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몸은 색·수·상·행·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칸다라고 그럽니다. 이 다섯 가지가 마라라는 거라. 괴로움을 가지고 오는 것들이라는 거라.

왜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요소가 괴로움을 가져오게 될까?

맛있는 것을 맛봤다, 느낌이 있습니다. 수(受)라고 하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맛있는 것을 맛봤다고 하면 될 건데, 맛있다고 할 거 같으면 더 먹고 싶어 하게 됩니다. 그것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먹고 싶은 것이 더 없게 될 거 같으면 괴로움이 있게 되는 거라.

뭔가 생각이 일어났는데 그 생각에 내가 의도하는 대로 됐으면 좋겠는데 의도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그럴 거 같으면 괴로움이 있게 되는 거라.

 

이와 같이 어떠한 대상이든 색·수·상·행·식은 집착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집착할 것 같으면 괴로움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라와 같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나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으로 인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지, 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도록 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잘 보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에서 집착하는 것들을 자꾸 버려버리도록 해야 됩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계속적으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없이.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에 집착을 하다 보면 숨은 느려지고 또 숨으로 인해서 몸에서는 상기 현상도 일어나고 마음에서는 괴로움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고. 붙잡고 매달리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괴로움은 일어나게 됩니다. 어떠한 대상도 붙잡지 말고 그냥 그대로 지켜보면서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칸다 마라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아라.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병이 생기는 거와 같이 괴로움은 생겨나고 괴로움은 더욱더 늘어나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낄레사 마라(kilesa māra)'라고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 사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 감정이 우리를 유혹하게 됩니다. 그 유혹에 끄달려 들어갈 것 같으면 지금은 달콤할지 몰라도 괴로움은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낄레사는 원래 번뇌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괴로움의 세계를 헤매고 다니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번뇌들은 대부분은 보면 감정에 인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인해서 감정이 일어나게 될 때, 그것은 자신에게 괴로움을 가져오게 됩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는 것들은 전부 감정의 무리에 속합니다. 거기에 자꾸 끄달려 들어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의 유혹에 넘어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기는 해야겠지만 그것에 끄달려 들어가는 순간에 나는 그것의 노예가 돼버리게 됩니다.

그것을 낄레사 마라 라고 그럽니다. 번뇌라고 하는 감정 그것에 노예가 되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세 번째가 '상카라 마라(saṅkhāra mār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 형성된 것들을 볼 때 무상·고·무아로 보지 않으면 마라가 일어나서 괴로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떠한 것도 형성된 것들입니다. 모든 조건지워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열반의 상태에 이르기 전에는, 모든 것들은 조건지워지게 됩니다. 그런 조건지워진 모든 것들은 항상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지니게 돼있습니다. 변하게 돼있고, 그것들은 언젠가는 부서지게 돼있고, 그것들로 인해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것들은 없는 것이고, 그것들은 어떤 것도 나의 것이나 나의 소유가 될 수 없고 실체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에 매여버릴 것 같으면 재산이든 자식이든 이런 것도 모든 것들은 상카라의 영역에 속하는 건데, 그 상카라에 대해서 바르게 알아차리지 못할 때 그것들은 괴로움을 일으키게 됩니다. 자식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일어나고, 명예에 인해서 괴로움이 일어나고, 물질 재산에 인해서 괴로움이 일어날 때 아, 이것은 마라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마라는 물리쳐야 되는 것이지 내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내가 현재 쓸 수 있는, 사용되는 물건인 것뿐이지 그것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그것이 언제까지 내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들입니다. 모든 현상들은 그래서 무상·고·무아의 특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마라의 성품을 지닌 것들은 전부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삼법인의 성품으로 볼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맛쭈 마라(maccu mār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태어났으면 죽는 것은 틀림없는데 죽지 않을려고 하는 것.

자신이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그 견해도 바뀌게 돼있고 변하게 돼있는 것인데 그 견해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

죽음은 반드시 옵니다. 어떠한 것이든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돼있고 죽음으로 끝이 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피하려고 자꾸 하게 됩니다. 피할래야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나의 죽음도 마찬가지고, 주변의 죽음도 마찬가지고, 없어지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죽음이 오기 전에, 내 곁에서 다른 것들이 전부 다 사라지기 전에 그것들은 훌륭한 곳에 써야 되는 것이고, 깨달음에 이르도록 더욱 더 노력을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죽음을 파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항상 머릿속에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데와뿟따 마라(devaputta mār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천신들은 종류가 참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도와주는 천신들도 있지만, 여러분들을 방해하는 천신들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논을 샀으면 기뻐해줘야 되는데, 나는 배가 아프다 할 것 같으면 내 속에 그런 천신이 생겨나는 겁니다.

도와주지는 못하고 그것에 대해서 안 좋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수행을 지금 열심히 해야 되는데 나에게는 게으른 마음이 착 일어납니다. '그냥 이대로 살아도 좋다, 깨달음에 이르지 않아도 좋다' 데와뿟따 마라가 나에게서 착 생겨나버립니다.

지금 현재의 조건에 만족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라한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조그만한 성취에 자꾸 만족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만족할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어떠한 경우도 만족하지 말고 더욱더 노력을 해야 됩니다. 노력할려고 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될 때 나에게는 사돈이 논 사면 배가 아프듯이 데와뿟따 마라라고 하는 마라가 탁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경전에서는 이렇게 다섯 가지들을 통상적으로 마라의 영역에 속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실체가 있는 마라만 마라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자기 속에서 생겨나는 것들은 전부 마라(māra)의 영역에 속합니다. 수행을 방해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벗어나게 될 때, 알아차림을 놓치게 될 때 나에게는 항상 마라가 일어나게 됩니다.

 

더불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들, 진리에 대한 특성들도 간과해버리게 될 때 마라는 나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내 가까이 이런 마라가 많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괴로움은 더 많아집니다. 마라가 적으면 적을수록 괴로움은 사라져나가게 됩니다. 마라가 여러분들을 지배하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먼저 해야 되는 것이

", 내가 지금 이렇게 수행해 보니까 괴로움이 사라지고 있구나, 집착하는 것이 점점 없어지고 있구나" 하는 확신들이 들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괴로운 생각이 일어났을 때 '아, 이것이 마라가 생겨났는데 그 생각을 관찰하니까 생각이 사라져버린다', '아, 이게 수행이 이래서 좋구나' 하는 확신들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쓸데없는 일을 할 때, 나는 그것보다는 지금 나는 수행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까 마음은 청정해지고 가벼워지고 고요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수행을 더욱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들을 확신들을 가지게 됩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조그만 것부터 해서 확신들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수행을 지속해나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맨 먼저 해야 되는 것은 자꾸 확신이 들 수 있는 행위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왼발 오른발을 하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하든 보여지는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보고 듣고 하는 것이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좀 더 증장되고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들을 경험해서 확신들을 자꾸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돼나갈 때 그 사람은 수행의 단초를 끼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더욱 더 사띠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림만이 이러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마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사띠를 놓아서는 안된다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한 사띠는 끊임없이 이어져야 되는 것이고, 죽음에 이르는 직전까지도 그 사띠를 놓지 말아야 된다는 걸 분명하게 자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확신들이 들면 들수록 더욱더 모든 일들에 일상생활이든 집중수행이든 평상적인 생활이든 걷고 앉고 눕고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사띠할려고 하는 것들이 더욱더 강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사띠를 하게 되면 어떠한 것이든지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됩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보게 되고, 일어난 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끔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것도 집착함이 없고, 어떠한 망상이나 번뇌에 휩싸이는 것도 없이, 분명하게 마음은 청정해지고 알아차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확신이 드는 것과 더불어 사띠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수따(suta)라 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더욱더 많이 알려고 해야 합니다.

법문을 통해서든 경전을 통해서든 아니면 도반들하고 법에 대해서 담론을 하는 것이든, 그런 것들로 인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할려고 해야 됩니다. 단편적으로 알아놓으면 자기가 하는 수행만 고집을 하게 되고 자기가 알고 있는 부처님 가르침만을 알게끔 됩니다. 서로 연결되는 고리라는 것들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삼법인과 사성제와 팔정도가 서로 연결돼있는 고리로써 한 덩어리로써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꾸 분리해버리게 됩니다.

그러한 지식은 더욱더 마라를 부르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경전을 공부하더라도 또는 법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견해나 그것에 만족하는 법이 없이 끊임없이 자꾸 듣고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을 '삼마 사와까' 라고 그럽니다. 부처님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그것들을 이해한 것에 따라서 경험하는 사람,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한 덩어리로써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경을 통해서 수행을 반조해볼 수가 있고, 수행에서 일어난 것들을 경전에서 다시 확인할 수가 있게 됩니다. 수행과 배움도 분리될 수 없듯이 그 배움도 낱낱이 분리될 수 있는 부류들은 없습니다.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은 스스로 아는 것들입니다. 스스로 알고 실제로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수행을 통해서 실제로 그것이 일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해보니까 '아,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들이 참으로 무상한 것이구나' 하고 분명하게 내가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은 그것을 끊임없이 알아차릴 때 나에게 일어나지는 것들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렇게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와서 그렇게 분명하게 자각하게 되는 것이지, 지혜는 내가 얻고자 해서 그걸 찾아서 다닌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자기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렇게 갖추어지고 나면 더욱더 수행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선한 일들을 선한 공덕들을 더욱 쌓을려고 하지 나쁜 일들을 하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히리와 옷땁빠가 일어나게 됩니다.

나쁜 일들을 하는 것들 그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줄 알게 되고 그것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실제로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들은 그러한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멀리하게 되고 그것들로 인해서 두려워하는 마음들을 가지게 돼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거라. 그러한 일을 하는 것들은 부끄러운 일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그 부끄러운 일들을 하지 않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불선한 일들을 안 하게 되고, 선한 일들을 자꾸 하게 되므로 인해가지고,

 

나에게는 계율이라고 하는 것들이 딱 확립이 되게 됩니다.

몸과 말로써 하는 것들이 확립이 되게 되고, 실제 수행을 통해서 마음으로 하는 것들도 불선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될 때, 그때 삼업을 통해서 선한 일들을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럴 때 생겨나는 것이 위리야라고 하는 노력하는 힘들입니다.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노력하게 됩니다. 내가 그만둔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좋은 것들이기 때문에 그 길을 계속적으로 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면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모든 것들을 방어를 하게 됩니다.

눈과 코와 귀와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전부다 그 문앞에서 차단을 하게 됩니다. 보면 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들으면 듣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지 들리는 것으로 인해서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고, 보이는 것으로 인해서 감각적인 쾌락으로 빠지지 않게 되는 겁니다.

 

감각기관들을 완벽하게 제어하게 될 때, 나는 스스로 식사를 조절하게 됩니다. 먹는 것들은 수행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먹는 것들만 조절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것들도 최소한으로 하게 됩니다. 이 몸을 유지해서 더욱더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을 하는 것이지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활용이 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더욱 더 생기있게 바뀌게 돼서 게으름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되게 됩니다.

 

당연히 게으름이 일어나지 않게 되니까 하나의 대상에 더욱더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마디가 분명하게 생겨나게 됩니다.

일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 정해놓은 그 선정들에 들게 되고, 그 선정의 힘들이 생겨남으로 인해서 외부에서 오는 자극들에 대해서 방어할 수 있는 힘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외부에서 오는 자극은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대상을 더욱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수행에서도 진행되는 방향이 있듯이 여러분들도 마라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마라들은 여러분들을 괴로움으로 이끄는 것이지, 그 반대인 즐거움으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즐거움인 닙바나로 이끄는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또는 나에게서 일어나는 번뇌들 감정들도, 또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 나의 가족 모든 물질적인 것 형성된 것들도, 그리고 살아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들도, 그리고 게으름 부릴려고 하는 마음들도 전부 마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들은 죽음을 향해 다가가게 돼있고,

그래서 더욱더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게으름 부리지 않는 마음들을 가지고,

조건지워진 것들은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번뇌는 분명하게 뿌리 뽑아야 되는것으로써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고,

몸과 마음은 수행을 위한 도구인 것이지

집착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괴로움의 소멸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서 「다섯 가지 종류의 마라」에 대한 얘기를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