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분노라는 병 <성냄을 대하는 불교도의 특징> (20161020)

담마마-마까 2022. 3. 19. 09:00

https://youtu.be/Dbm8WBHPCRU

* 분노라는 병 <성냄을 대하는 불교도의 특징> (20161020)

 

오늘은 「분노라는 병」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어제 그제 병원에 치료할 일이 있어서 갔는데 병원 안에서 환자하고 의사하고 대판 싸우고 있었어요. 밖에까지 소리가 다 들리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보니까 왜 그렇게 치료해도 안 낫느냐고 하는 얘기를 아마 환자가 하는 거 같고, 의사는 나는 치료를 정당하게 했으니까 안 낫는 거는 더디게 낫는 것이지 그게 안 낫는 것은 아니다 하면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걸 보면서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참, 저 사람은 병이 낫기가 힘들겠구나’ 마음에 분노가 항상 있는 상태에서 마음에 병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는 육체적인 병을 낫기가 참 힘이 듭니다.

 

여러분 수행할 때도 아마 그런 것을 느낄 겁니다. 호흡이 고르지 못할 경우에는 배를 관찰하더라도 배에서 느낌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불룩불룩 튀어오르기도 하고, 이쪽으로 뭔가 팽만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아니면 뭔가 기어가는 느낌들도 있기도 하고 그럴 겁니다.

그런 것들 수행초기에 일어났을 때 부분들을 보면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속으로 일어나는 분노, 분노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을 때는 호흡을 고요하게 하든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들을 고요하게 잠재우고 나서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만들고 나서 다시 호흡을 관찰해야만이 정상적으로 호흡을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게 호흡이 불규칙해서나 아니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라는 것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반응들이 일어나고 느낌들이 있다는 것들을 갖다가, 뭔가 새로운 것들을 본다고 이해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단지 그것은 현상일 뿐이니까 그 현상을 대상으로만 보고 놓아버려라" 하는 얘기를 해도, 대부분 사람들은 새로운 것들을 보면 그게 그냥 재미가 있어가지고 그걸 계속할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계속 호흡이 균일하게 되지 못하고 마음에서 뭔가 집착하는 것들이 일어나고, 또 내가 뭔가 이걸 알았다 하는 그런 자만심들도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분노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두 가지가 원인이 돼서 분노들은 일어납니다. 보통 보면.

첫 번째가 마나(māna)라고 하는 것, ''라고 하는 것들이 개입됐을 때,

그다음에 상요자나(saṁyojana)라고 하는 것, 뭔가에 결박돼서 집착하는 것들이 있을 때, 그럴 때 항상 분노들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분노들은 육체적으도로 영향을 미칠 뿐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거기에 딱 묶여버리고나면 그것이 오히려 더 큰 병이 된다는 것을 자꾸 그것을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주석서에는 보면 그렇게 애기합니다.

분노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생겨나는 암덩어리'라고 생각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암덩어리는 어떤 경우든지 빨리 그걸 발견해서 잘라내버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암덩어리가 몸 전체를 다 파괴를 해버리게 됩니다.

어떻게 잘라내게 될까? 암이 있으면 암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면 바로 그걸 잘라내야 됩니다. 의학적으로는 그러는 게 맞습니다.

 

시계가 이 앞에 있으니까 시계 예를 들면, 시계가 째깍째깍째깍 가고 있습니다. 그럼 만약에 이 시계가 1분 후에 터지는 시한폭탄이라고 할 것 같으면 째깍째깍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즉시에 이걸 빨리 잘라내야만이 이 폭탄이 터지지를 않게 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분노들이 그런 여러분을 죽이는 시한폭탄과 같고 여러분을 죽이는 암덩어리와 같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반드시 빨리 발견을 해서 그것을 제거를 해야만이 되는 것이지 그것을 그대로 두어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비유를 경전에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아주 나쁜 사람이 자신의 사지를 잘라낸다고 하더라도 화를 일으켜서는 안된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 또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나를 죽일려고 온 몸을 자르고 해서 생명을 해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화를 일으키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참 그러기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런 비유를 들어놨을까?

 

화를 일으키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되는 것이지 밖에 것들을 자꾸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분노를 일으키는 것을 밖에 것으로 자꾸 돌리다 보면 그 분노는 또 다른 형태로서 또 표출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시한폭탄이 터지듯이 그것은 또 터져버리고 또 다른 곳에서 시한 폭탄이 째깍째깍 돌아가고 하는 형태들을 계속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밖에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분노를 잠재우는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는 겁니다. 또한 나를 분노하게끔 만드는 원인은 되지 못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분노의 원인은 두 가지라고 얘기했습니다.

마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 나라고 하는 자기 견해에 매여있을 때!

나의 견해에 매여있지 않을 거 같으면 분노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요자나라고 하는 결박돼 있는 것들! 여러 가지 결박돼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것들에 매여있지 않을 거 같으면 분노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는 어떤 경우든지 나마는 나마로 보고, 루빠는 루빠로 본다." 몸의 현상은 분명하게 몸의 현상으로 보고, 마음의 현상은 마음의 현상으로서 분명하게 볼 줄 알 것 같으면 분노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신적인 현상으로서 뭔가 생각이 일어났다. 그럼 그 생각도 분명히 변하게 돼있습니다. 정신적인 현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을 것 같으면 그 알아차리는 즉시 그 현상은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육체적인 현상도 뭔가 배에서 뽈록뽈록 하고 있다, 그럼 그것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즉시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육체적인 현상을 육체적인 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보고, 정신적인 현상을 정신적인 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거기에는 분노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분노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불환과가 되기 전에는 다 제거하기가 힘이 듭니다. 대부분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분노의 종류를 열가지로 분류를 해놨습니다.

크게는 네 가지로 분류를 해놔놓고 또 자세하게는 열가지로 분류를 해놨습니다.

아주 미세한 것들은 그걸 분노라고 느끼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거라. 아까 수행에서 얘기하듯이 그런 것들이 분노의 일종인데도 분노라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미세한 것들은 알아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딱 하나만 알아차리고 있으면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대할 때 미소짓는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그것은 분노의 일종이다 생각을 하면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그 대상을 향해서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미소지을 수 있는 마음이 될 때 그럴 때는 분노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봤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든지, 아니면 분석하는 마음이 생기든지 그런 마음들은 일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 마음들도 전부다 분노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분노라는 생각을 항상 잊지말고 그것들을 잘 다스려야 됩니다. 그래서 항상 대상에 대해서 미소지을 수 있는 마음들이 자꾸 생겨나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됩니다.

 

밖에 대상을 향해서 분노를 일으켰을 때 좋은 점이 뭘까?

속은 좀 시원하겠지. 내가 화를 확 내고나면 속은 좀 시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분노가 가진 위험성입니다. 또는 밖에 대상을 향해서 내가 ‘아이고, 참아야지’ 하고 생각을 해버리면 그때는 참아질지 몰라도 또 다른 스트레스로서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밖의 것들은 하나의 대상으로서만 볼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에게는 분노가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일어나는 분노는 자기에게 도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가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받아야 되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일으킨 것은 내가 다시 받아야 됩니다. 업은 분명한 겁니다. 자기가 지은 것들은 분명하게 자기가 그 결과를 받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에 명심을 해야 되는 것은, 경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화내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불교도다 하고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매일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제어하는데 힘쓰지 않는다면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하고 경전에는 기록을 해놨습니다.

그마만큼 다른 것들보다 분노는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많이 주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업의 결과들을 받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제어할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무덤까지 가져간다고 할 것 같으면 뭘 가지고 가려고 하느냐는 거라. 재산이나 여러분의 자식을 무덤까지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런데 분노를 일으켜서 자신이 지은 행위는 무덤까지도 가져가고 다음 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물며 그런데, 일시적으로 일으키는 분노도 그와 같은데, 누굴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들을 일평생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극단적으로 얘기할 것 같으면 그다음생에 그대로 다시 또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견해로 인한 것들, 마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견해들 또는 '나'라고 하는 관념들이 생겨날 때 만들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분노를 일으킨다고 할 것 같으면 '나'라고 하는 생각들을 자꾸 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나'와 '나의 것'이 없는데 '나의 견해'라고 하는 것들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그런 '나'라고 하는 생각을 일으켰을지는 몰라도 그것들에 결박되지 않을 거 같으면 항상 그 사슬에서는 풀려날 수가 있습니다. 한번은 그 업의 결과를 받을지 몰라도 또 받을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평생 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에 딱 결박돼가지고 그것이 여러분들을 좌지우지하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업이 여러분들을 좌지우지하듯이 그 결박된 것들이 여러분들을 좌지우지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그 환자가 자기 자신이 낫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결박만 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화를 낼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조용하게 그다음엔 이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하는 것들을 생각할 수가 있고 또 다른 방법으로 의사와 상의를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성냄에 결박당해 놔놓으면 성냄이 자기 자신을 잡아먹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에 결박당하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인생을 파괴하는 행위다 하는 것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불교에 6차결집을 할 때 돌에다가 빨리어 삼장을 새겼습니다.

영구히 그것이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죠. 패엽경은 300년 400년이 지나고 나면 야자나무 잎은 자연적으로 소멸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대체할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돌에다가 그렇게 새기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나무에다가 대장경을 새기기도 하고 어떤 데는 동판에다가 그 글을 새기기도 합니다. 문자로 대장경을 거기에 새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경전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성냄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성냄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성냄도 오래도록 남아있을 거 같으면 돌에 새긴 문자와 같습니다.

성냄이 일어날 때 성냄을 알아차리면 즉각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 성냄을 좋아하고 그것들을 집착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겁니다.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반드시 재빨리 사라지게끔 돼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성냄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자꾸 알아차리는 훈련들을 할려고 해야 되고, 또한 그러한 알아차리는 것이 즉각적으로 사라지는 것들을 자꾸 경험하도록 해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성냄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성냄이 있듯이 다른 사람들도 성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성냄을 제거할려고도 해야 되겠지만, 다른 사람이 성내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용서를 해줄 줄 아는 마음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나도 언젠가는 성낼 수가 있기 때문에, 나도 불완전하다는 생각들을 항상 해야 되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들을 지녀야 됩니다.

그래서 실수 없이 성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없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왜 너는 이것에 대해서 성내느냐” 하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나도 똑같은 상황이 될 거 같으면 그와 같은 성냄이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럼 그것을 이해하고 '왜 저렇게 화를 냈을까' 하는 것들을 자꾸 받아들여 줄 줄 알아야만이 그 성냄을 잠재워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성내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 성내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 성내는 사람에 대해서도 자애의 마음을 지니는 것, 이것이 불교도의 특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사람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지니게 될 때, 그런 사람들이 부처님의 제자다 불교도다 하는 것입니다. 불교도의 기본적인 특징은 그것이다 하는 것들을 항상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해도 주변에는 자꾸만 성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성을 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자기 조건이 좋은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걸 분명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그것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야 됩니다. 그런 조건들로부터 자꾸 벗어날려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술 먹는 사람들이 옆에 많이 있을 것 같으면 매일 술을 먹게 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조그만 것에도 화를 내고 질투하고 의심하고 하는 사람이 많으면 나도 그와 같이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사람으로부터는 자꾸 벗어나라는 거라. 벗어나야 되는 것이지, 성내고 질투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 사람들을 배척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모든 사람들은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 서로를 인정할 것. 이해하고 용서하고 하는 서로 인정하는 마음을 가질 것.

 

두 번째는, 화내는 사태를 망상하지 말아라. '너는 이렇게 얘기하면 나는 반드시 화가 일어난다'는 망상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을 알아차리면 화는 일어나질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화난다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리 단정지어서 이런 것은 화를 내게 하는 것이다 하고 망상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성냄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성냄을 적게 하도록 하라는 거라. 오늘은 몇 번 성냄으로부터 벗어났다 하는 것을 자꾸 기록해서 그것들이 적게 되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게 될 때 성냄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얼굴에는 성냄보다는 미소짓는 얼굴들이 자꾸 되게끔 돼있습니다.

 

이 세 가지 원칙은 "성냄으로부터도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항상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분노는 마음의 병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시한폭탄을 장치해두고 여러분들의 마음에 암덩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