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는 마음은 더러워져 있다. (20160929)

담마마-마까 2022. 3. 8. 09:00

https://youtu.be/msllWu4ZtSo

*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는 마음은 더러워져 있다. (20160929)

 

오늘은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는 마음은 더러워져 있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경전 게송 먼저 들려드릴게요. 숫따니빠따(Suttanipāta)에 보면 나와 있는 구절입니다.

 

사람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교재하거나 사이좋게 지내거나 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서는 자신의 어떤 이익을 보는 목적이 없는 친구는 좀처럼 없다.

인간은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고 더러워져 있다.

그래서 성자는 혼자서 생활을 한다.

코뿔소의 뿔과 같이 혼자서 살아간다.

하는 게송입니다.

 

이 게송에서는 보면 누구든지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성자는 그런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혼자 고독하게 살아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자들은 혼자서 살아가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는데, 그런 성자가 되기 전에 일반인들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상황인데 자기 자신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라. 모순적이라는 거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되는데,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나 이런 것들을 생각을 하면서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나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계속 부딪친다는 거라. 나와 다른 사람들이 계속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부딪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어떠한 경우든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있을까?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혜택을 받지 않고, 그런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사람들 아니면 다른 자연적인 조건과 더불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본인에게 그런 조건이 부딪쳤을 때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고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하는 얘깁니다.

서로 의견을 나누다가도 저 사람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마음에 진심이 일어나든지 합니다. '어, 왜 저 사람은 나하고 다른 저런 생각을 할까?' 하고 화가 확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럼 미워하게 되고 아니면 그러한 말을 하게 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마음들을 그냥 품고 '아, 저 사람은 나하고 다르다' 하고 생각을 해버린다든지 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 중심적으로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는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더러워져 있다 하는 뜻입니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것은.

 

혼자 있을 때는 모릅니다. 그게 자신밖에 생각 안 하는 건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는 건지, 혼자 수행을 할 때는 전혀 그런 것들을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을 여러 명이 같이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혼자 하는 겁니다. 혼자 좌선하고, 혼자 경행하고. 크게 부딪칠 일이 있기 전에는 그냥 혼자 수행을 하는 겁니다. 혼자 수행을 할 때는 성자와 같은 그런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 탐진치가 없이 고요하게 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는데, 그 수행에서 벗어나고 나면은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할 때라든지 일상생활을 할 때는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마음은 항상 더러워진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에서는 항상 탐·진·치가 일어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이 얘기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누구든지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게송에서는.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뭐로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죠? 육근을 통해서 대상을 접하고 그걸 느끼고 알기 때문에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밖에 있는 겁니다. 밖에 대상들을 내가 인식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눈을 예를 들면 눈이라고 하는 것은 밖에 있는 대상들을 보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밖에 있는 것을 볼 때 내가 보는 것과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밖에 있는 대상을 눈으로 인식할 때 뭐로 인식합니까? 비쳐지는 파동으로 인식을 하게 됩니다. 파동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변화를 인식을 하는데 한번으로 인식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계속 쌓여가지고 축적돼가지고 '무엇이다' 하면서 자기의 인식체제와 결합을 해가지고 뭔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회장님이면 '회장님이다' 하고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회장님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그냥 '나이드신 남자분이다' 하고 인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인식체제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밖에 대상을 보는 것은 각각 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너는 왜 회장님이라고 인식하지 않느냐?” 얘기할 것 같으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중심적인 것은 자기만의 세계인 것이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할 수는 없는 것인데 동일하게 다들 적용을 할려고 합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자기중심적으로만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아, 너는 그렇게 인식할 수도 있다' 하고 이해를 하고 받아들여 버리면은 전혀 문제가 없어져버립니다. 실제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런 거기 때문에.

어차피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어가지고 있는 그대로 보고 해서 '보인다' 하고 알기 전에는 누구든지 자기인식체제 내에서 그걸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구든지 자기중심적이라는 거라.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은 그거 딱 하나인 것이지 둘이도 공통적으로 될 수 없다는 거라. 그러면 그렇게 이해를 하고 받아들여줘야 된다는 거라. 나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나는 이런 인식체제에 인해서 이해를 하는 것이고, 저사람은 저런 인식체제로 인해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그런 걸 얘기할 때가 있습니다. 스님은 똑같은 법문을 했는데, 들은 사람은 이렇게 얘기하고, 또 다른 사람은 요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한테 물어봅니다. “스님 어떤 것이 맞습니까?” 어떤 것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라. 그 사람은 그렇게 인식하고 저 사람은 또 저렇게 인식하는 것뿐입니다.

자기의 범위내에서 그것들을 알고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조금 더 열려버릴 것 같으면 적어도 현재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들은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라.

 

보통의 사람들이 싸움이 나고 다툼이 나는 것들은 그런 견해의 차이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의 중심적인 것들 견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다 맞는 것이 아닙니다. 다 자기중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자꾸 이해를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인식체계 내에서는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자기중심적인 세계를 만들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각각은 각각의 자기중심적인 세계를 만들 수밖에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살아가면 좋은 것은 없죠?

그것이 계속 굳어질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들도 계속 없어질 뿐 아니라 편협된 사고방식으로 자꾸 바뀌어져나가버리게 됩니다.

 

부처님이 그거에 대한 대안으로 얘기를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방법을 보통 여섯 가지로 분류를 해놓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식에서 좀 쉽게 얘기를 할 것 같으면,

첫 번째, 자기를 희생해가면서 남을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들.

대표적인 것을 예를 들어봅시다. 아나타삔디까 같은 경우는 자기 재산이 다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부처님과 상가를 위한 보시들 공양 올리는 것들은 계속적으로 해나갔습니다. 그런 하나의 부류가 있습니다. 지금 현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것들에 대한 생각을 가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그런 경우들. 그러다 보면 어느 정도 자기 것이나 자기에 대한 희생이 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첫 번째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까지는 안 하더라도 자기 범위 안에서 남들에 대해서 돌보는 것들을 하는 것.

봉사활동을 한다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이 선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회비를 낸다든지, 그런데 그거는 자기의 범위 내에서 하는 것들입니다. 그 범위를 결코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게 일반적으로 그래도 잘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하는 방식입니다. 두 번째 방식이.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의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기중심을 잡으면서 남에 대한 이해들과 배려들을 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의 자기중심적인 것은 확고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남에 대한 이해들이나 배려들을 조금씩 하고 있는 그런 경우들입니다.

 

아까 첫 번째 같은 경우에는 완전하게 남에 대한 배려들을 하는 경우들이고,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것들은 거의 내려놓은 상태들입니다. 완전하게 내려놓은 것은 아니라도 거의 내려놓고 남에 대한 배려들을 하는 경우들이고.

 

세 번째 같은 경우에는 그런 남에 대한 배려들은 거의 없이, 그냥 홀로 자기중심적으로 계속적으로 살아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얻은 것은 내가 쓰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는 경우들입니다. 그럼 조금이라도 나의 것이 손해를 입었으면 그것에 대해서 정당하게 어떠한 식으로든 받을려고 합니다. 내가 너에게 이러한 말을 했는데 네가 저러한 말을 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이 듣기 싫을 거 같으면 그 듣기 싫은 만큼 자기도 분명하게 뭔가를 해야 되는 겁니다. 아주 에고 중심적으로 바뀌어져버리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이 세 번째도 대부분 사람들이 이 같은 상황들로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보면 조그만한 양보도 없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문제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잘못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는데, 어쨌든 조금 문제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그래도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그냥 용인하고 있는 단계가 됩니다. 문제는 있어도 그래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회를 형성하는 사람들로써 구성을 지어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나머지 3개의 부류는 사회를 구성하는 데는 굉장히 문제가 많은 부류로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네 번째가 스스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뭔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남에게 그걸 시켜버린다든지.

어느 책에 스리랑카 스님이 쓴 책이었는데 그 책을 보니까 그러더라고. 치약, 양치질을 하는 건데 엄마가 일곱 살짜리 딸에게 “치약 가져와 양치질하게.”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일곱 살짜리가 뭐라고 그러느냐면 “내가 왜 그걸 해야 되는데?” 이렇게 얘길하는 거라.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을 거 같애요? “가져오라면 가져오지, 뭔 말이 많아?” 이렇게 얘기합니다. 애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엄마 입장에서는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고, 딸에게 그정도 시키는 거는 정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딸의 입장에서는 왜 내 것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엄마 것까지 가져가야 되느냐? 하는 걸 물어본 거라. 정당하게 물어본 건데, 내가 왜 그걸 해야 되느냐고 물어본 건데, 엄마는 그냥 윽박지르기 바쁜 거라. 하고 싶어 하지를 않기 때문에.

 

물론 여러 가지 변명들은 댈 수가 있습니다. “엄마 아빠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밥 해먹이고 하고 있는데, 너는 그 치솔 하나 가져오는 것도 못하느냐.” 그렇게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양치질하는 것은 자기가 가져오면 되는데, 왜 그걸 일곱 살짜리 딸에게 시킬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거라. 그런데도 우리는 그냥 무심코 그렇게 하고 있는 거라. 그것이 하기 싫다는 거라. 하기 싫어하는 마음, 자기가 할 수 있는 건데도 하기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경우들입니다.

 

그러면은 어떠한 경우들이든 자기 자신의 지위나 명예나 아니면 부나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누를려고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해야 되는데,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남을 낮추는 경우도 없고 자신을 높이는 경우도 없고 그래야 되는데, 그러한 마음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거라. 네 번째가 그런 것들입니다.

 

세 번째까지는 적어도 그런 것이 없는데 네 번째부터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의 것들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윽박지를려고 한다는 거라. 그런데 탁 마음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마음에는 게으름이 일어나고 있는 거라. 그걸 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경전에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법문을 했던 건데, 「분쟁이 없고 다툼이 없어지는 것 3가지」를 얘기하면서 첫 번째가 "먼저 본 사람들이 그것을 행하라" 하는 것들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청소가 이때까지는 돼있었는데 오늘 와보니까 청소가 안 되어있다. 그러면 청소가 안 되어있다 그럴 것 같으면, 자기가 먼저 그냥 청소를 해버리면 되는데, 청소를 안 하고 있다가 청소를 해야 될 사람이 안 한 것에 대해서 “너 오늘 왜 청소를 안 해놨어?” 이렇게 하게 된다는 거라. 자신에게 게으름이 일어났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해야 되는 것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것들을 윽박을 지르는 거라.

 

당연히 엄마이기 때문에 너는 이걸 해야 된다 하고. 자신의 지위와 뭐 어떤 것들을 이용해가지고 그것들을 자꾸 윽박지르려고 한다는 거라. 실제적으로 일곱 살짜리 애한테는 그렇게 얘기해서는 안 되는 거라. 자신의 양치질을 하기 위해서일 거 같으면 자신이 가져와야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아이가 양치질할 거 같으면 아이가 자기 것을 가져가서 양치질 하게끔 그거는 말을 해야 되는 것인데, 자기 것을 가져오라고 한다는 거라. 아마 여러분들도 비일비재한 부분일 겁니다.

 

다섯 번째는 자신이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사회가 해주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사회시스템이 잘못됐다는 거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취직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고, 사회가 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해서 사회를 바꾸기 위한 투쟁을 하게 됩니다.

스님도 옛날에 그런 것들 많이 해봤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그 이면에는 보면 자신의 행복을 사회에서 보장해주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직 역사가 이루어지고 나서 그렇게 부처님의 상가와 같이 완전하게 평등하게 화합되게 사회가 돌아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걸 바란다는 거라. 자신의 행복은 자신이 만들어야 되는데 사회가 만들어줘야 되는 것처럼 자꾸만 생각을 합니다. 아니면 다른 여러 가지 주변적인 환경탓으로만 자꾸 돌리려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게으름 피우는 것은 가끔 가끔 일어나는 것이지만, 주변의 탓으로 자꾸 돌리는 것은 그것은 굳어지면 문제가 심각해져버린다는 겁니다.

 

가끔씩 스님들 간에 그런 얘기를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이 환속을 하면 잘 살지 못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출가생활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사회하고는 정반대의 것들을 하면은 그것들에 대해서 적응을 못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받아먹고 존경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가 그렇지 못한 상황으로, 받아먹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노력해야 되는 것이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들에게 존경을 해야 되는 입장에 들어갈 것 같으면, 그것들을 적응을 못한다는 얘깁니다.

굳어져버리기 때문에. 혹시 자신은 그러한 상황에 젖어있지는 않는가 하는 겁니다. 부모면 부모의 입장에서 자신의 입장에 딱 젖어있을 것 같으면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가끔씩 그래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들을 들어보면 그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자신은 끊임없이 그 부분에 대해서 자꾸 생각을 한다는 거라. 아, 내가 지금 출가자이기 때문에 출가자의 입장을 계속 내세워가지고 뭔가를 하는 것은 아닌가? 또는 내가 의사일 것 같으면 의사의 권위를 이용해서 뭔가를 자꾸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그 의사나 출가자라는 타이틀을 벗어버리고 나면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해야 되는 것이 기본적인 것인데, 그 부분을 자꾸 빼먹어버린다는 거라. 주변의 환경 탓 조건 탓을 자꾸 하다 보면 그런데 자꾸 익숙해져버리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마음도 그와 같이 성장을 해가야 되는 것인데, '나이 먹었고 경험이 많은 것'에 딱 고정돼버려 놓으면 마음이 성장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거기에서는 항상 탐··치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런 자기 것에 대한 것들을 반드시 찾을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주변의 환경 탓으로 자꾸 돌리다 보면 그러한 식으로 자꾸 빠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바람직한 것은 되지 못한다 하는 겁니다.

 

여섯 번째는 할 용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용기가 없기 때문에, 살아갈 용기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자살합니다. 아니면 삶 자체를 자포자기해버립니다. 그런데 꼭 극단적인 경우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술 먹는 사람들을 얘기를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 들어보면, 처음에는 조금만 먹고 말려고 했다는 거라. 그런데 하다가 보니까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술을 먹어버리게 됐다는 거라. 그런데 거기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돼. 술을 먹고 나서는 자기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를 또 모른다는 거라. 그냥 자기 자신을 포기해버리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뭔가를 자신이 행동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싶어하질 않게 되는 거라.

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그와 같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그냥 자신이 그게 선인지 악인지 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냥 막 행해버리게 된다는 거라.

좀 더 극단적으로 할 거 같으면 자기 자신을 포기해버리고 그냥 자살하게 돼버리는 거라. 요즘은 자살하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굉장히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그래도 여러분 어떠한 경우든지 호흡하고 있죠? 죽고 나면 호흡하는 것이 없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잠시라도 숨을 멈추고 한번 참아보라고. 그게 좋은 건가. 못 견딥니다.

육체는 죽고 나면 영원히 호흡하는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또는 육체가 죽고 나면 이 몸의 조직이 부패 돼버립니다. 굉장히 보기 싫습니다. 하루나 이틀 세수 안 하고 있어도 땟구정물이 주르르 흐릅니다. 보기 싫고 그런데, 그래도 이거는 육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정도인 것이지, 죽고 나면 이거 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부패하고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생기고 하게 됩니다. 그것이 좋느냐는 거라. 자신의 몸이 그렇게 되는 것이 좋느냐는 거라.

 

또 죽고 나면은 다른 것이 그냥 누군가 발견하지 못하고 버려져있으면 그건 아주 추악하게 바뀌어버립니다. 짐승들이 그걸 뜯어먹기도 할 거고, 해골과 뼈는 흩어지기도 할 거고, 그렇지 않고 누군가가 발견해가지고 화장을 한다 하더라도 자기하고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재가 자기하고 똑같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고 나면 그러한 것들로 바뀌는 것인데 그게 뭐 좋다고 그걸 자살을 통해서 그러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원하느냐는 거라.

그러한 것은 결코 자살을 용인하는 그러한 조건으로는 되지를 않습니다.

 

이 여섯 가지가 보통 살아가는 방법에서 과연 어떤 것이 바른 것들인가 하는 것들을 부처님이 잘 판단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한 번 스님이 정리를 해 본 것이 있습니다.

한번 들려줄 테니까 잘 듣고 기억을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살아가는 데는 항상 괴로움이 있다는 거라. 그걸 항상 인식을 하는 거라.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반드시 있다. 어떠한 경우든지 괴로움이 있으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반드시 있다는 거라. 그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팔정도의 실천이다 하는 겁니다.

바른말 하고 바른 생각하고 바른 행동하고 하는 것. 수행도 거기에 포함이 되는 것이고, 계를 지키는 것도 그러한 것들에 포함되는 거고,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것도 거기에 포함되는 것들입니다. 팔정도를 벗어나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끔씩 우울해진다든지 아니면 뭔가를 하기 싫어진다든지, 자기중심적이 됐을 때 '아, 내가 팔정도 중에 뭔가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자꾸 되돌아보라는 거라. 그럼 바꿔야 된다는 거라.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할 거 같으면.

 

세 번째,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무지하기 때문에, 그러한 무지한 상태로 죽으면 다음 세상에 반드시 태어난다는 거라.

지금 생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반드시 다음생을 받게 된다는 거라. 그걸 받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네 번째, 그러한 생도 또 마찬가지로 괴로움을 계속 받게 된다는 거라.

괴로움은 항상 나를 따라온다는 거라. 죽어도 괴로움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자살을 택하든 아니면 바른 방법으로 살아가든 어쨌든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때는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다섯 번째, 죽음의 순간의 마음 상태에서 다음생이 좌우 된다는 거라.

죽음의 순간의 마음 상태는 다음 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는 항상 죽음의 순간이 닥쳐온다는 거라.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죽음의 순간들이라는 거라.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고 언제 내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건 언제 나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걸 인식하지 않고 산다? 그거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의 의식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여섯 번째, 살아가는 것은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선한 일을 하든 악한 일을 하든 그것 또한 변화한다는 거라.

내가 선한 일을 했다고 해가지고 선한 과보가 지금 당장 나타나면 좋겠지만, 선한 결과도 바로 나타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거라. 악한 일을 했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덮여져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또 언젠가는 드러나게 돼있다는 거라. 무상한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선한 것들이 선한 결과를 내지 않는 법이 없고, 악한 것들이 악한 결과를 내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단지 무상한 성품 때문에 그것이 뒤바뀌기도 하고, 천천히 나타나기도 하고, 빨리 나타나기도 하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래서 살아가는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자꾸 인식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와 같기 때문에

 

일곱 번째는, 뭔가 내가 나쁜 것으로 시작을 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행위를 거듭하면 그 살아가는 것은 바뀌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나쁜 마음을 품었다 하더라도 '아, 내가 이래서는 안되지' 하고 선한 마음으로 바꾸어서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좋은 결과는 있게 된다는 거라. 나쁜 마음을 품었다고 해서 그 품은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멈춰버릴 것 같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를 않게 됩니다. 오히려 나쁜 마음을 품은 것들이 결과로써 나타나게 됩니다. 아무리 처음에 뭔가를 잘못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를 않는다고 해서 노력을 멈춰버렸을 경우에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선한 마음을 내서 끝까지 계속적으로 해나가면 그것은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버린다는 얘깁니다.

 

여덟 번째, 살아있는 동안에는 괴로움을 피할 방법은 없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든지 팔정도를 실천해 나가라 하는 겁니다.

팔정도를 벗어나서 생활해나갈려고 하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무지를 벗어나는 길도,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팔정도를 벗어나서 다른 길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것은 괴로움을 발견한 겁니다.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한 겁니다.

그러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뭡니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적어도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번뇌가 일어나질 않는다는 겁니다. 괴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갈애들입니다.

뭔가 좋은 걸 맛볼려고 하고, 더 살려고 하고, 게으름 피울려고 하고, 이런 갈애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근본적인 갈애들이 원인이 되어서 각각의 문제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알아차림 하나만 딱 지니고 있을 거 같으면 원천적으로 그 갈애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것을 걸 딱 한 마디로 할 거 같으면 바로 이겁니다.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그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여러분이 해야 되는 것도 그런 것들입니다. 2600년이 지난 일들이지만 그것은 과거나 미래나 변함없이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림을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알아차림이 유지가 되면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알아차림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엷어지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지게 됩니다. 그와 같이 됐을 때 성자들은 혼자서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더불어 살아가야 됩니다. 더불어 살아갈려면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번뇌로부터 오염되지 않아서,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는 상태에서 생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자꾸 택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실천하고 알아차림을 끊임없이 유지해나가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수행자 질문 : 스님, 이번에 지진이 일어나면서 지진을 느끼면서, 엄청난 두려움이나 불안감 같은 게 생길 때 어떻게 알아차려야 되는지요?

스님 답변 : 불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에 지진이 처음에 두번 크게 일어났을 때 그때 스님이 진주에서 법문을 하고 있었거든요. 법문을 하고 있는데 그 지진이 일어났었어요. 저녁 7시 시작해서 9시에 끝나는데, 딱 그 타임이 여덟시 몇분 그 시간대에 두번 있었어요.

처음에 한번 지진이 일어났을 때 지진이 일어난 줄은 분명하게 인식을 하는 상태에서 그대로 그냥 나는 법문을 했어요. 사람들이 놀래더라고. 놀래가지고 “엄마야!” “엄마야!” 하고 난리가 났어요. “엄마야!” “엄마야!” 하든 어쨌든 간에 나는 그냥 그대로 법문을 계속했어요. 한참 하니까 누군가 질문을 하더라고. “스님, 지진이 일어나는 거 몰랐습니까?” 모르긴 왜 몰라? 내가 알았지. 알아도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할 일을 그냥 법문을 하는 걸 계속한 거라.

그러고 나서 법문을 계속하는데 두 번째 지진이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법문을 하는데 중간에 막 뒤에 와가지고 나가면서 “스님, 빨리 나갑시다” 하는 거라. 법문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됐어요. 그래가지고 법문을 중단을 하고 밖으로 나온 상태가 됐습니다. 나왔는데, 나와가지고 안전한 곳으로 피했는데, 나는 지진이 일어나기 전이나 지진이 일어났을 때나 그 이후나 마음은 동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 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후에 스님이 법문한 내용은 하나도 기억을 못하는 거라. 두려움을 마음에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 법문이 들어갈 수가 없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자리를 피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거 뭐하고 있는 거라? 그 시간 동안에? 차라리 그러면 처음 지진이 일어났을 때 아예 피해가지고 안전한 지대에 가있든지. 그렇지도 못하면서 그 법문은 듣는다고 있으면서 두려움을 지닌 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아무런 이익이 없게 돼버리는 거라.

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꼭 그와 같습니다.

설혹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두려움이나 괴로움을 받을 것이 아니고 그걸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아, 이것을 지금 피할 상황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다음 행동을 하면 됩니다. 그냥 법문해도 괜찮겠다 싶으면 그냥 법문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아, 이것은 내가 피해야 되는 상황이다 싶으면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상태에서 그대로 피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게 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좌선 수행을 하고 있을 동안에 천둥번개가 치고 굉장한 비가 왔어요. 밤새 그렇게 했는데 사람들이 와서 부처님한테 “부처님, 밤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비온 줄 몰랐습니까?” 나는 전혀 몰랐다는 거라. 이미 안전한 지대에서 비가 오더라도 관계가 없이 수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 같으면 그거하고는 무관하게 부처님도 수행을 하시는 거라.

 

요즘 그런 것이 있다고 그럽니다. 특히 경주 같은 경우에 차 클락션 소리만 울리더라도 그냥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놀랜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거는 잘못된 것입니다. 인식체계가 이미 모든 것들은 지진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인식체제로서 바뀌어져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습관화돼 버리고나면 그것은 바꿀 수 있는 것이 참 힘들어져버립니다.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면 됩니다. 적어도 '저것은 소리다' 하고 알 것 같으면 소리로서 인식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이 '건물이 움직이는 것이다' 알 것 같으면 이것은 '움직임'이라고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고, 움직임이 강할 것 같으면 내가 피해야 되겠다고 판단이 들 것 같으면 피해버리면 되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진동소리든 아니면 그 빵빵거리는 울림이든 자동차 소리든 그것을 지진으로 착각을 하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이번에 진주에서의 경험에서도 그렇지만 적어도 알아차림을 유지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의 동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 그것을 다르게 오해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예.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