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은 만들지 말아라. (20161006)

담마마-마까 2022. 3. 17. 09:00

https://youtu.be/sFPymMTIX3Y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은 만들지 말아라. (20161006)

 

오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은 만들지 말아라」 하는 얘기를 간단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일 많죠? 이러지도 못하겠고, 저러지도 못하겠고.

(수행자 질문 :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까?)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으니까 하는 얘기지.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고 그런 상태가 되는 경우를 얘기합니다.

탐·진·치가 없는 상태가 되어 있거나, 아니면 생존할려는 욕구가 사라져버리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전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나서 곤란한 상황에 빠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반드시 보면 거기에는 빠져나갈 돌파구가 있고, 또 그렇게 된 원인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가끔씩 우리 선원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참 선원을 계속 유지해야 되는지 하지 말아야 되는지 그럴 때가 있고, 또 어떤 일로 인해가지고 선원에 불사금을 모아놓은 걸 이걸 써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결정하지 못할 때도 있고, 우리 선원만 하더라도 그런 문제가 눈에 보여집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살아가면서 진짜 그런 일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부처님 당시 때 예를 한 번 들어볼게요.

사리뿟따 존자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다시피 부처님에게 있어서는 가장 뛰어난 제자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도 '아, 이번에는 법문 설하고 그다음에 수행지도하는 일 없이 조용하게 안거 좀 보내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 한번은 사리뿟따 존자가 조용하게 혼자 안거를 지낼려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안거를 지내게 됩니다. 물론 거기에 머무르고 있는 선원장 스님한테는 얘기하고 지내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사리뿟따 존자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냥 평범한 일반 스님이겠거니 하고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데, 안거가 끝나고 나서 사리뿟따 존자가 '아, 인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되겠다' 싶어가지고 부처님 있는 곳에 가까이 가서 부처님 따르는 제자들도 없이 인도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서 거기 갈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때사 선원장 스님이 다른 일반 대중들한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사실은 사리뿟따 존자가 삼개월 동안 여기 머물렀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사리뿟따 존자인 줄도 몰랐느냐?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마지막 떠나는 스님한테 공양 올리도록 하라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 말만 들어서는 참 좋은 얘깁니다. 그런데 그 스님의 의중에는 인제 떠나는 길이기 때문에 공양물을 받아도 그걸 가지고 이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공양물 받은 걸 여기 놔두고 가겠지. 자기 차지가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든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사람들이 공양물을 사리뿟따 존자한테 올릴려고 얼마나 마음을 먹었겠어? 바리바리 싸와서 사리뿟따 존자한테 공양물을 올리고 하니까, 사리뿟따 존자가 받았으면 괜찮은데 그걸 아예 받지를 않습니다. 인제는 내가 떠나는 길이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 하고 거절을 해버립니다.

그러니까 공양물을 가져온 사람들은 공양물을 못 올렸으니까 당연히 그냥 다시 가지고 가버립니다. 그러니 이 선원장 스님은 원래 계획하고 틀려져버리게 된 거라. 사리뿟따 존자가 받아야만이 가져가지 못하는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게 돼버리는 거라.

 

그때 사리뿟따 존자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리지 못한 것은 미안하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다음에 만약에 나를 청할 것 같으면 다음에 내가 여기 와서 머물도록 하겠다 하고 얘기를 하고 갑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대중들이 사리뿟따 존자가 떠나고 나서 사리뿟따 존자에게 청을 하러 다시 갑니다. “와서 우리에게 법을 좀 설해주고 좀 머물러주십시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가 다시 거기에 가서 법을 설하고 거기에서 머물면서 수행지도를 하게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리뿟따 존자를 따르게 되거든. 이 선원장 스님은 안중에도 없는 거라.

그러니까 이때는 선원장 스님의 마음에 어떤 마음이 일어나느냐면 사리뿟따 존자가 가야만이 내가 그래도 이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선원장 노릇을 할 건데, 사리뿟따 존자가 있으니까 그 노릇을 못하니까 빨리 사리뿟따 존자가 가기를 바라게 되는 거라.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를 쫓아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됩니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 이 사리뿟따 존자가 '아, 나로 인해서 저 스님한테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은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내가 여길 떠나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조용하게 떠나버리게 됩니다. 일반 대중들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압니다. '아, 선원장 스님이 싫어해갖고 사리뿟따 존자가 떠났구나' 하고.

그러한 선원장 스님한테 “사리뿟따 존자를 다시 모셔오기 전에는 다시 이 선원으로 돌아오지 마십시오!” 하고 대중들이 얘기합니다. 쫓아가서 사리뿟따 존자한테 “아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스님, 제발 다시 돌아가서 좀 머물면서 법을 설해주십시요!” 이렇게 해도 사리뿟따 존자는 안 가는 거야.

 

그러니까 이 선원장 스님 입장에서는 다시 자기 선원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사리뿟따 존자를 모셔가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거라.

그 선원장 스님이 처음에 마음을 냈던 것은 참 거룩한 일인데, 그런데 그속에 숨겨져 있던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에 그 거룩한 것이 드러나지 못하고, 오히려 본인 스스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게 됩니다.

 

자따까 라는 경에 보면 그런 것이 나옵니다.

나무에 머무는 목신들 같은 경우에는 조용한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와서 거기에 머무르는 것도 싫고, 누가 와서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싫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못 머물게 하기 위해서 갖가지 방해들을 하게 됩니다.

이 자따까 경에도 그런 것이 나옵니다. 숲에 짐승들이 있으면서 서로 잡아먹고 다투고 하는 모습이 보기 싫으니까 '아, 저놈들 제발 좀 쫓아내버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조용하고 편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과거 전생의 부처님이 될 분인 보디삿타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에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 저렇게 서로 다투고 하는 짐승들을 쫓아내고 나면 조용하기는 할지 몰라도 당연히 그렇게 되면 다시 사람들이 이 숲에 들끓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숲은 다시 숲의 위치에 있지 못하고 그걸 개간한다든지 아니면 인간들이 사용하는 장소로 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오히려 더 살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쩌면은 네가 머무는 나무도 잘려버리고 네가 갈 곳이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신중하게 생각해라. 단지 지금 시끄럽게 떠들고 살생하고 하는 것이 싫다 해가지고 더 나쁜일이 되도록 만들지를 말아라 하고 했는데도, 지금 당장 나에게는 그게 싫은 거라. 그게 싫으니까 짐승들을 다 쫓아내버립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와서 그 숲을 파괴해서 그 목신은 갈 곳이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참 어찌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선원의 사정들이나 아니면 부처님이 설한 경전들을 보더라도 그럴 때는 그럴만한 이유들이 틀림없이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이 되게 돼있습니다.

뭘까? 그게?

남을 위해서, 남에게 이롭게 하는 일들을 할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될 때!

바꾸어 말하면 남을 이롭게 할려고 하는 일들은 나에게도 이로운 일들이 되게 됩니다. 또 다르게 얘기하면 다른 사람들을 인정할려고 하는 마음이 있게 될 때는 나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첫 단추부터 이것을 못하게 되는 거라. 다른 사람에게 이로움이 있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되고,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고. 결국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당연히 자신에게도 이로움이 없게 되는 거고, 자신도 인정받지 못하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되는 거라.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안 돌아가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포용해주는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가치가 있는 일이다" 하고 생각되는 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참 드물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참 인색한 마음들입니다. 자신에게 이익되는 것만 생각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이익되는 것이 곧 자신에게 이익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면 자신이 그거보다도 더 못하게 이류인간 삼류인간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원인은 그겁니다. 본인에게 그 문제가 원인이 있었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 좀 내가 손해 보는 것처럼 보여도 다른 사람에게 좀 더 이익이 있는 것이 있으면 내가 해주면 또 어때서! 또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인정하고 '아, 참 훌륭하다' 하는 마음이 있는다고 해가지고, 나에게 얼마만큼 피해가 온다고 그걸 못하느냐는 거라.

 

가끔씩 그런 경우들을 봅니다. 요즘 권력의 비리 같은 그런 것들을 보면 자신이 그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남용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실제로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닌데.

남의 집에서 소를 키워주는 목동이 아무리 소가 있다고 배부른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도 그 소는 자기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소를 지켜줌으로 인해서 나는 일정한 보수를 받는 것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데 본인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 소가 내 것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본인은 그것이 무지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겁니다.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무지한 것이지, 무지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런 무지에 빠지는 일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참 어리석은 겁니다.

본인의 것은 본인이 앞으로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공덕이 되고 여러분이 죽음 이후에도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여러분들 것이지,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 그것이 돈이 든 어떤 권력이든 그것이 내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내가 일시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들, 그것도 여러분들 것이 더더구나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나와 남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조화를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것이지 그 조화가 깨져버리면은 함께 더불어서 살기가 힘들어져 버리게 됩니다.

 

어찌 보면 참 간단한 일인데도 본인은 어떨 때는 이렇게 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하지도 못하는 상태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판단을 해야 됩니다.

내가 혹시 내 스스로 사는 의미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또 남이 누려야 될 권리나 살아갈 권리들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내 스스로 편해지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자꾸 추구하면서 남이 하는 것들은 용인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걸 자꾸 돌아봐야 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가 됩니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지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그러한 상태에 놓여있을 때 감정적인 것과 이해하는 것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나의 이익이나 아니면 나의 성냄이나 나의 어리석음에 인해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감정에 인한 겁니다. 탐·진·치가 일어나고 있는 상태에서 말하고 행하고 생각한 것들은 그것은 감정적인 것들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은 끊어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은 잘못된 길입니다.

 

오히려 이해하는 것들을 배워야 됩니다. 이해하는 것들은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되는 겁니다. 아이가 글을 배울 때도 하나하나 배워야만이 그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수행을 할 때도 수행을 통해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무상한 성품을 체험을 통해서 실천함으로 인해서 내가 이해를 하게 됩니다. 실천하고 배우게 될 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가만히 있는다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끊임없이 본인은 그런 이해하고 알려고 하는 것들이 자꾸 많아지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사마타 수행이든 위빳사나 수행이든 수행을 통해서!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하는 것을 배움을 통해서! 계율을 지키고 또 남들에 대한 배려를 하는 것들을 조금 더 인내하고 배우는 것들에 대해서! 이런 것들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이해하는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하는 것들이 이해하는 영역에 속하는 건지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건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들로부터 탈출하는 첫 번째 단추를 끼우게 됩니다.

 

그다음 단추는 제어불가능한 문()에 대한 것들을 제어할려고 해야 됩니다.

듣고 보고 냄새맡고 하는 이 문(門), 이것은 제어하지 않으면 그대로 그냥 튀어나옵니다. 불가능한 것들이 됩니다. 그러면 그냥 제어하지 못하면 그것이 그대로 그냥 튀어나오게 됩니다. 남이 분노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내가 마음에 분노로써 물들어버리게 됩니다. 예쁜 물건을 보면 나는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욕구가 일어나게 됩니다. 남들이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나에게는 원한심이나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쓸데없는 잡담들 막 하는 것들이 좋아서 그것으로 인해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리석은 것들이 점점 강해져버리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제어하지 못하면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육근의 문은 반드시 제어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제어하지 못한 것은 큰 독이 되는 겁니다. 그 독은 감정으로 자꾸 흐르게 만들지 이성적인 거나 이해하는 영역으로써 빠지지 않게 합니다. 반드시 그것은 제어를 하십시오.

듣고 보고 냄새맡고 하는 여러 가지 육근을 통한 것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나에게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꾸 제어를 해야 됩니다.

자신의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들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에 인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자꾸 택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그것이 어느 정도 되고 나면,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들을 버리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모든 것들은 「나」라고 하는 것들이 개입되기 때문에 문제가 커져버리게 됩니다. 나와 너의 것은 없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내가 분명하게 확인되지 못하면, 일상생활에서 나와 나의 것이라는 것이 계속적으로 튀어나오게 됩니다.

무상한 것이고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허무한 것인 줄은 뻔히 알고 있지만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나의 감정들이 더욱 더 증폭되는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돌아봐야 됩니다.

 

, 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고 말을 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은 없는가?

여러분들이 행하는 말, 여러분들이 행하는 행위,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들로 인해서 여러분의 장래가 결정돼버립니다.

말을 할 때는 생각없이 기관총 같이 그냥 말을 뱉어내서도 안 되는 거고, 행동할 때도 그것이 남에게 도움되고 이익되는 것들이 아니면 행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마음에서는 항상 선한 마음들, 자애의 마음들이 항상 일어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것을 여과없이 자꾸 뱉어내게 되면 「나」라고 하는 것들을 더욱더 강화시켜 준다는 것을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을 행할 때 이렇게 한번 마음을 먹어보십시요.

내가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가, 아닌가?

이해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다음에는

내가 이것을 행하는 것들이 를 가지고 행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돌아보시면 됩니다.

적어도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는 것들로부터는 벗어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태에 빠져서 허둥대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되길 바라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