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청정의 길은 항상 열려있다 (20160901)

담마마-마까 2022. 3. 5. 09:00

https://youtu.be/uyZ0_HDC4ek

* 청정의 길은 항상 열려있다 (20160901)

 

「청정의 길은 항상 열려있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들 간에는 보통 뭐라고 인사해요? 그냥 도반이라는 인사하죠!

어떤 때는 좀 부끄러운 생각들 안 듭니까?

「도반」이면 "부처님이 가르친 도의 길을 같이 가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안 살 경우에는 좀 그러면 부끄러운 것들이 있을 겁니다.

 

가끔 스님들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보통 10년이 넘어되면 테라(thera)라는 장로라는 명칭을 붙입니다. 보통 20년 어떤 경우에는 30년이 되면 마하테라(Mahāthera)라는 그런 명칭을 붙입니다.

그런데 가끔씩은 스님들이 만약에 10년이 넘었는데도 테라라는 이름을 앞에 붙여가지고 그렇게 부르면 손사레를 치면서 “아이, 그렇게 부르지마! 나는 아직 테라라고 불리는 게 부끄럽다.” 그런 얘기들을 하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춰야만이 그 명칭을 불렀을 때도 부끄럽지가 않은데 그걸 갖추지 못하면 부끄러워하는 것들을 봅니다.

 

스님들은 10년이 넘어되면 화상의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고, 또 그런 계를 설할 수가 있고, 또 법을 설할 자격들도 자연스럽게 갖추게 되고, 이런 조건들이 그전부터 꾸준하게 공부를 해서 그러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을 때, 테라라고 불렸을 때는 크게 문제가 안 되는데, 그것이 안 되고 그냥 오로지 경전은 등한시하고 오로지 수행만 했다, 또는 불교의 기반적인 것들을 모르는 경우에는 또 테라라고 불리는 걸 부끄러워하는 그런 것들을 많이 봅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공양청을 가면 이 분은 공양청 오는 스님들한테 뭐라고 불렀느냐면 “스님들! 이리 와서 공양드십시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아라한들이여! 이리 와서 공양드십시요”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앞에 명칭을 아라한들이라고 자꾸 명칭을 붙이는 거라.

그러니까 아라한이 아닌 스님들이 들었을 때는 '아, 저분은 우리들을 아라한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 내가 아라한이 아닌데 아라한이라고 부르니까 좀 민망하다' 하는 경우들도 있고, 또는 아라한인 분들은 '저분이 우리가 아라한인 줄을 알고 있구나' 하고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이분이 스님들에게 공양청을 할 것 같으면 스님들이 안 가는 거라. 아라한이 아닌 사람들도 아라한이라 불리는 것이 미안해서 못가게 되고, 아라한이라 불리는 스님들도 아라한인 걸 눈치챘기 때문에 가는 것들을 꺼리게 되고, 그렇게 해서 아무도 안 가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수행하는 수행자들의 최종적인 목적은 아라한이 되는 겁니다. 열반을 체험해서 해탈에 이르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설혹 아라한이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아라한이라고 불릴 것 같으면 '아, 내가 아라한이 아닌데' 하면서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고, '아, 내가 아라한이 되도록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해야 되겠다' 해서 더 분발심을 일으켜야 된다" 하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테라라고 스님들을 부를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아, 나한테 테라라고 부르지마!”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아, 내가 이제 테라의 자격을 갖췄는가, 안 갖췄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 안 갖춰졌으면 빨리 테라의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되겠다 해서 더욱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노력해가지고 더 열심히 그러한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때 쓰는 용어가 '빠리깜마' 라고 얘기하는 빨리어 용어입니다.

 

'빠리깜마(parikamma)'는 그냥 일반적으로 노력을 의미하는 빨리어 단어하고는 다릅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일반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죽을동 살동 노력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진짜 모든 걸 다 바쳐서 그걸 위해 노력하는 것을 '빠리깜마'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도 제자들에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너희들이 출가해서 아니면 수행하는 것은 아라한이 되기 위한 것이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빠리깜마 진짜 죽을 만큼 노력을 해야 된다."

 

여러분들도 도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선원에 오면 도반에 맞는 행위들을 합니다. 법문도 듣고 공부도 하고 수행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을 하면서 도반에 맞는 행위들을 하는가?

 

며칠 전에 어느 분이 전화가 왔어요. 그분은 아마 어린아이가 있었던 모양이라. 어린아이니까 부모 입장에서는 만날 강압적으로 시키고 따라오도록 하니까, 어느 날 그 아이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는 거라.

“엄마는 화를 좀 안 냈으면 좋겠어. 화를 안 내면 나는 다 할 수 있을 거 같애” 그러더라는 거라. 그때 가슴이 찡해가지고 그 아이한테 그런 약속을 했다는 거라.

“앞으로 내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겠다”하고 아이하고 약속을 했다는 거라.

 

그렇게 아이하고 약속을 나한테 얘기하면서 쉽게 말하면, 좀 더 마음을 인제는 다시는 화를 안 내야지 하는 것을 더 다짐받기 위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라. 그 얘기를 들으면서 아, 그래도 저분은 아이로 인해가지고 부처님이 하지 말아야 될 것, 해야 될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은 이후로는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그렇게 노력을 할려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화가 날만한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그걸 참아내고, 어떨 때는 진짜 화를 내지 않기 위해서 그 상황을 모면해서 피해서까지라도 화를 내지는 안 했다, 하는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죽을 만큼 진짜 노력을 해야 됩니다. 화를 내지 않을려면. 그렇지 않으면 일상적으로는 대부분은 화를 내게끔 돼있다는 거라. 아이가 말을 안 듣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 나이 또래에는. 그럼 그걸 어머니한테 맞는 것으로서 끌어 당길려고 하다 보면 화를 낼 수밖에 없는데, 화를 안 내려고 하니까 미칠 지경이었어요. 그런데도 약속한 게 있으니까 화를 안 내려고 그렇게 부단하게 노력을 하고 있다는 얘길 하더라고.

적어도 여러분들이 도반이라 할 거 같으면 그러한 조건들을 자꾸 충족시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빠리깜마라고 하는 것은 죽을 만큼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죽을만큼 노력해야 되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경전에는 그렇게 나옵니다.

 

"다섯 가지 흐름을 끊어라." 또는 "네 가지 격류를 건너라." 하고 얘기합니다.

물의 경우를 보면 물이 이렇게 쭉 흘러갑니다. 물의 흐름을 자를 수가 있습니까? 끊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끊어질까? 물을 아무리 끊으려 해도 끊을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항상 새로운 것들이 계속 들어오게 돼있습니다.

끊는 방법은 다른 게 아닙니다. 흐름을 바꾸든지, 댐을 설치하든지 해서 일시적으로 끊을지는 몰라도, 그 댐은 차면 다시 또 넘치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계속 이어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 흐름을 끊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야만이 흐름이 끊어지는 거라.

 

여러분이 짓는 행위들이 어떠한 것이든 화를 내는 것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어리석음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어떤 견해를 가지는 것이든, 그런 것으로 인해서 흐름이 계속 이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 흐름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윤회를 해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윤회를 끊는 방법은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것들을 아예 없애버려야만 가능하다는 거라.

물이 없어야만이 그 강물은 흐르지 않게 된다는 거라.

업을 쌓을 일을 하지 않게 되면은 다시는 재생할 일이 없어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흐르는 물을 없앨려면 얼마만큼 노력해야 될까? 아마 부단하게 노력해야 될 겁니다. 자연적인 부분에서도 그걸 없앨려고 할 것 같으면 끊임없이 아마 노력을 해야 될 겁니다.

 

그걸 대처하는 방법으로 「5개의 흐름」 말고 「4가지의 격류」 라는 것들을 경전에서는 비유를 해놓았습니다.

격류는 아주 물의 흐름이 거칠기 때문에, 그 격류를 피해서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기도 하고 아니면 바다에 잘 가기도 하고 이런 격류들을 피해서 잘 바다에 흘러들어가면 적어도 그런 물로부터 또는 강의 위험으로부터는 피하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어차피 바닷물이 됐지만 거기에 강물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엄연히 거기에는 존재한다는 거라. 여러분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선행만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윤회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의미에서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 흐름을 죽을 만큼의 노력, 진짜 최상의 노력을 통해서 그 흐름을 끊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 흐름은 다섯 가지 중에 첫 번째가 뭐냐면 딴하 소--(taṇhā soṭā)라고 그럽니다. 갈애의 흐름이라는 뜻입니다.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들어오는 여섯 가지 색·성·향·미·촉·법 그것으로 인해서 갈애는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보이는 대상이 있으면 눈을 통해서 그 보이는 대상이 눈에 들어오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좋아라 하고 싫어한다는 거라.

좋아라 하는 것도 갈애이고, 싫어하는 것도 갈애의 일종입니다. 끊임없이 그러고 있다는 거라. 좋고 싫고! 음식을 보면 맛있고 맛없고! 듣는 소리가 아름답고 듣기 싫고 귀찮고! 그게 윤회를 만드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그러고 있다는 거라. 그 흐름을 끊으라는 거라.

 

그 흐름을 끊기 위해서 보면 보는 대로, 맛보면 맛보는 대로, 들리면 들리는 대로 자꾸 인식할려고 하라는 거라. 그렇게 인식을 해야만이 들리는 것으로 인해서 '아, 좋은 소리다' 아니면 '듣기 싫은 소리다' 하는 갈애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거라.

듣는다고만 자꾸 인식을 하라는 거라. 보인다고만 인식 하고, 맛본다고만 자꾸 인식을 하라는 거라. 그 어떤 것도 그렇게 자꾸 인식을 해야 되지, 그렇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서 좋고 싫음으로 빠져버리면 그것은 갈애의 흐름에 들게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맨 처음 얘기하는 것이 그런 "갈애의 흐름을 끊어라"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갈애는 태어나자마자 갈애는 항상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갈애가 단순하게 그런 감각적인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 같으면 단순한데, 그거 말고도 다른 두 종류가 더 있다는 거라. 살아가고 싶다 하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편해지고 싶다 하는 것

살아가고 싶기 때문에 나하고 친한 이들도 살아가게 되는 것들을 바라게 되고 그분들이 죽는 것들에 대해서 항상 좋고 싫음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나는 조금 더 건강해지고 싶고, 나는 조금 더 늙지 않게 되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될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게 되는 거라. 흐름하고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만히 있어도 그냥 떵떵거리고 놀고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거라.

이런 것들은 갈애의 종류다 하는 거라. 갈애의 흐름은 반드시 끊도록 하라는 거라.

 

감각적인 육근을 통한 것 그것뿐만 아니라, 태어났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도 언젠가는 죽고 그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을 경우에는 존재할려고 그럽니다. 자꾸 살려고 하게 됩니다.

또 열심히 노력해서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자꾸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것을 깜빡깜빡 잊고 아이고, 그리해도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 하고 자꾸 방일하게 살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생활하는 것들도 그냥 편하게만 자꾸 뭔가를 할려고 하게 되는 거라.

 

거기에 젖어 있으니까 또 사이클을 돌다가 수행하게 되면 편하게만 뭔가를 하게 되는 거라. 앉아있는 게 편하니까 경행 안 하고 앉아만 있을려고 하는 거라. 경행하는 것이 편할 거 같으면 또 경행만 계속하는 거라. 그걸 끊기 위해서 수행하면서도 계속 같은 패턴에 젖어들고 있다는 거라. 그 갈애의 흐름을 맨 먼저 끊어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딧티 소--(diṭṭhi sotā)라고 그럽니다. 견해의 흐름.

견해라는 것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 가지는 견해라고 하는 것은 전부 편견입니다.

스님도 요즘 목뼈 협착증이 있어가지고 여기 시술을 지금 두 번 받았습니다. 그전에는 이런 시술을 안 하고 목디스크나 협착증이 있으면 목디스크 수술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목디스크 수술을 안 하고 그냥 시술을 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여기에 '레이저아미' '씨아미' 하는 걸 탁 대어놓고 뼈를 그대로 비추어가지고 거기에다가 바늘을 폭 꽂아가지고 정확하게 그 부위에다가 약물을 투여하는 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국도 안 남고 금방 나옵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똑같은 건데도 디스크 수술을 했어요. 그래서 목에 기브스를 하고 움직이지 않도록 보름 이상 그렇게 하는 거라. 그런데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면서 앞에 거는 지금은 아예 쓰지를 않습니다. 지금 목디스크나 이 협착증들을 하는 시술도 또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이것도 쓰지를 않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들이 그와 같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별 쓸모없는 것이 될 것들을 계속 내세우고 주장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견해라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끊임없이 바뀌게 돼있습니다. 바뀌면 앞에 거는 폐기처분 하게 돼있습니다.

여러분 견해는 안 바뀌었습니까? 아마 살아오면서 많이 바뀌어왔을 겁니다. 그런데 자기의 주장과 자기의 생각과 맞지 않다 해가지고, 왜 그것을 틀렸다고 그러고 그것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마음들을 가지게 되느냐는 거라. 견해를 가지지 않을 수는 없느냐는 거라.

모든 이들이 아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나도 불완전한 것이고, 그래서 항상 실수를 하게 돼있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들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이해를 할 거 같으면, 그것들로 인해서 다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얼마 전에도 스님들 간에 다툼이 있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봤을 때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뿐인데 주장이 서로 틀리니까 한발짝도 양보를 안 할려고 그러니까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서로 이해해라. 이해해가지고 절충점을 찾아라” 하고 얘기해도, 그 생각에 딱 매여있을 거 같으면 그말이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결국 다투다가 끝났어요.

그래서 스님이 “이렇게 다툼이 계속될 거 같으면 나는 교단 일에 어떤 일에도 참여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화해하기 전에는 나는 아무것도 안 한다.” 하고 선언을 했어요. 그제사 일이 커진 줄 알고 둘이서 화해를 하고.

조금 전까지 아니면 보름 전까지 한달 전까지 싸우던 견해는 그것이 지금 생각해보니까 틀려진 거라? 아니라는 거라. 조금만 바꾸어버릴 것 같으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건데도 자기들 견해를 내세우다 보면 부딪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런 견해는 어떠한 경우든지 완전하지 않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아라한이 됐을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또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잘 참조해서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들을 다시 한번 재고를 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낄레사 소--(kilesa sotā)라고 하는 번뇌의 흐름.

번뇌는 기본적인 것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무명과 갈애가 기본이 돼서 번뇌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알지 못해서 그러는 거라. 번뇌가 왜 일어나겠어? 화가 일어나는 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화라고 하는 번뇌가 일어나게 돼있는 거라. 욕심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거기에 탁 달라붙어 놔버리면 욕심이라는 번뇌가 일어나게 됩니다. 무명과 갈애가 기본이 돼서 그것이 각각의 번뇌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걸 경전에서는 1500가지니 아니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108번뇌니 하는 갖가지 번뇌들을 만들어 냅니다.

 

내가 조금 더 생존하고 싶고, 내가 조금 더 즐기고 싶고,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배척하고 싶고, 하는 그런 것들이 원인이 돼서 그것에 딱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런 집착으로 인해서 나는 견해들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견해들이 새로 번뇌들을 또 만들어내게 됩니다. 계속 사이클을 이루게 되는 거라.

번뇌는 어떠한 경우든지 말려야 되는 것이고, 제거해야 되는 것이지, 그 번뇌를 그대로 둔 채 윤회의 흐름을 끊을 수는 없다는 거라.

각각 일어나는 번뇌들, 자존심 성냄 질투 미워하는 것 이런 여러 가지 번뇌들은 그것들이 일어나는 즉시 반드시 알아차려야 됩니다. 안 일어나는 것이 좋지만 무명과 갈애가 있는 한은 안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무명과 갈애를 제거하기 전에는 그것은 언제든지 일어나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럼 일어나면 일어난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그것들이 사라지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분명하게 본 후에, 사라지는 것이 완전해졌을 때 그때 그러한 것들의 끝을 보게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화가 일어났으면 일어났을 때 시작점에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일어나는 상태와 진행되는 걸 분명하게 보면서 아, 화가 점점 더 강해지면 강해지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러고 나서 그것이 사라질 때 아, 화가 사라지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고, 화가 사라질 때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고 어떠한 형태로 나에게 드러나지는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고, 화가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탁 본 사람들은 화의 속성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먹이를 주지 않으면 화가 더 이상 진행이 안 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라지는 걸 분명하게 탁 본 사람들은 그 뒤로는 똑같은 것으로 인해서 먹이를 주지 않기 때문에 화가 일어났으면 화가 진행이 안 되는 거라. 사라짐의 끝을 분명하게 봤기 때문에.

 

수행에서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성품을 분명하게 보고 나서, 사라지는 성품을 본 자야만이, 그때야만이 열반을 체험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성품들은 분명하게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그 사라짐을 분명하게 봐서,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보고, 어떻게 하니까 사라진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때, 그러한 것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네 번째 둣짜릿따 소--(duccāritta sotā)고 그럽니다. 악행의 흐름을 끊어라.

소소한 것, 사소한 허물도 짓지 않을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소소한 것이라도 하나를 지으면 또 다른 것들을 짓게 돼있고, 하나를 지은 것을 감출려고 하다 보면 또 다른 것들을 감추고 짓게 돼있습니다. 그게 악행의 흐름입니다.

작은 것도 짓지 않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작은 것들을 간단하게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 같으면, 경전에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 계 중에 무사와다(musāvāda)라고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것, 아주 작은 거라도 거짓말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들은 저지르지 못할 악행이 없다 하는 거라.

그래서 부모들은 애들이 어릴 때 조그만한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그 거짓말 용납을 안 할려고 하는 거라. 그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나중에는 진짜 큰 악행들을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되는 거라. 어른이 되어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사소한 거지만 그것을 안 할려고 해야 됩니다. 사소한 거지만 쓸데없는 말들을 안 할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사소한 거지만 남의 허물을 자꾸 비방할려고 해서도 안 되는 거고, 말 뿐아니라 행하고 그다음에 생각하는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사소한 것들도 저지르지 않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걸 악행의 흐름을 끊이 위해선 반드시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아윗자 소--(avijjhā sotā) 무명의 흐름입니다.

사실은 이게 진범입니다. 무명이 윤회를 만드는 진범, 진짜 범인입니다.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입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리석음-무명에 빠지게 됩니다. 현상들은 드러나지게 돼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드러나져 있고 펼쳐져 있는 것들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건 노력을 안 하는 것뿐입니다.

모든 현상은 부처님이 발견하기 전에도, 발견한 후에도 어떤 경우든지 이 세상에 드러나져 있습니다. 모든 것들은 변하고 무상하고 부서지게 돼있다는 것, 그건 누구든지 드러나 있는 겁니다. 그 드러난 걸 있는 그대로 자꾸 볼려고 해야 된다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은, 변하는 성품을 지닌 '나'라고 하는 것은 몸이든 마음이든 그것에 집착할만한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은, 누구든지 드러나 있다는 거라.

드러나 있는 것을 그대로, 수행을 통해서든지 경전을 통해서든지 어떠한 방법으로 그걸 체험하고 절실히 뼈저리게 알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무명의 흐름을 끊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게 진범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들은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런 무명을 따라서 오는 까마(kāma, 欲)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라. 분노도 까마고 싫어하는 것도 까마입니다. 대상을 붙잡을려고 하는 것도 까마고, 대상을 밀쳐버릴려고 하는 것도 까마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존재할려고 하는 욕구와 동반된 이러한 까마들은 반드시 제거하고 가까이 붙이지 않을려고 하라는 거라.

 

그래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떨어뜨려서 보라" 하고 얘기합니다.

'떨어트린다'는 것은 그 대상을 내가 조작하지도 않고, 붙잡지도 않고, 또 밀쳐내지도 않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전하라 하는 거라. 거기에 더 덧붙이지도 말고 빼지도 말아라는 거라. 수행도 꼭 마찬가집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붙잡거나 밀쳐내서는 안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생겨난 현상들은 변하게 돼있다. 무상한 것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러한 "무상한 것들을 분명하게 안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본 자만이, 열반을 체험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열반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자들이 아라한에 이르게 된다" 하는 겁니다.

 

출가한 스님들에게 '아라한'이라고 불렀을 때는 그러한 아라한이 되기 위한 길을 걸어가야 되는 거고, 여러분들이 '도반'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과 같은 도의 길을 가면서 부처님과 같은 동등한 반석에 오른 자들을 얘기합니다. 그럼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오르도록 여러분들 스스로가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같이 도반이라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수행자들을 또는 출가한 스님들을 아라한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한국에서도 “성불하십시요!” 할 때는 부처님이 되는 성품, 부처님이 획득한 덕성들 아홉 가지 성품들, 아라항 삼마삼붓도... 라고 하는 아홉 가지 성품들을 그대로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성품들을 지녔을 때 그분은 아라한이 되는 것이고, 그분은 성불했다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가 인사할 때 “도반님! 성불하십시요!” 하는 얘기들을 귀담아 듣고 그렇게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누구든지 수행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 청정의 길은 항상 누구에게든지 열려있다 하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