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순간을 허무하게 보내지 마라. (20160908)

담마마-마까 2022. 3. 6. 09:00

https://youtu.be/vBm3y0k7cfU

* 순간을 허무하게 보내지 마라. (20160908)

 

오늘은 「순간을 허무하게 보내지 마라」 하는 걸 가지고 하겠습니다.

지금 수행할 때 명칭을 붙여서 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봐봐요. 거의 대부분입니까? 무르익기 전에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좋습니다.

 

명칭을 붙일 때 기본이 있죠?

첫 번째가, 그 대상의 내용을 가지고 명칭을 붙이면 안 됩니다!

만약에 내 눈에 선등님이 보였다, 그러면 명칭을 붙일 때 '선등님'이라고 명칭을 붙이면 그건 내용이 되는 거죠? 그럼 그거는 정확한 명칭이 되지 못합니다. 어떻게 붙여야 되요? '보인다' 라고 명칭을 붙여야 됩니다.

 

명칭을 붙이는 것은 대상에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겁니다.

그런데 명칭이 만약에 '꽃이다' 아니면 '무슨 색깔이다' '아름답다' '누구다' 이렇게 명칭을 붙이게 되면은 그것이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의 인식의 상태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천천히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순식간에 수·상·행·식이 탁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하자마자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머릿속에 그것을 사띠를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인다' '들린다' 하고 명칭을 붙였을 때는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자기가 인식한 것들이 무엇이다' 해서 그것을 인식할 거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아니면 밀쳐낼려는 마음이 생겨나게 돼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칭을 붙일 때는 항상 중요하게 생각을 해서 명칭을 붙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 대상의 내용이 명칭으로써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는 것을 분명히 염두에 둬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걷는다'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데, 또는 배가 불러오고 꺼진다 하고 할 때 '일어나고, 사라진다' 하고 명칭을 붙이는 것이 합당한 것인데, 그렇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명칭을 붙여서는 안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일상적인 행위를 할 때는 명칭을 붙이면서 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좌선 수행이나 경행 수행 할 때 여러분들이 자꾸 명칭 붙이는 게 틀려지는 이유가 뭐냐면 명칭 붙이는 게 느립니다.

두 번째는, 명칭을 항상 한템포 앞에 떨어뜨린다 생각하고 명칭을 짧게 붙이도록 그렇게 노력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럼 일상적일 때보다도 좌선하고 경행할 때는 느린 형태들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명칭이 실재하는 것과 거의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명칭이 좀 짧다 하고 느껴질 때가 오히려 명칭을 정확하게 붙이는 형태가 된다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배가 불러올 때 '일어남' '일어남' '일어남' 하면서 명칭을 붙이는데, 마지막 '일어남'까지 명칭을 붙이고 나면 이미 배는 끝나있는 상태입니다. 명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숨이 거기서 멈추고 잡아져야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숨이 전체적으로 느리게 됩니다. 느리게 되면 상기가 일어나게 되고 갖가지 안 좋은 현상들이 일어나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좌선하고 경행할 때는 명칭을 되도록이면 '짧게 한다' 하고 생각을 하고 붙이는 것이 합당하다 하고. 그렇게 명칭을 붙이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명칭을 붙이면서 알아차리는 것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지혜의 힘은 강해집니다. 마음이 그것으로 인해서 고요하고 깨끗해지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리할 것 같으면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 쉬워집니다. 그래서 명칭을 붙이는 게 정확하고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지혜가 일어날 가능성은 훨씬 더 커져버리게 됩니다.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 정도로 하면 됐고, 명칭을 붙이는 것은 이해가 됐을 거라고 봅니다.

 

경전에 보면 "카노 오마 우빳짜가(khaṇo vo mā upaccagā"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순간을 못 본체 하지 말아라." 하는 의미입니다.

보고도 못 본체한다는 거라. 그런데 보이면 보인다고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이지, 그걸 못 본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못 본체한다고 해가지고 안 보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 말은 어떤 의미냐면 이 순간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 하는 거라.

순간순간이 연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순간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항상 망상에 빠지든지 아니면 계획을 한다든지, 다른 방향으로 마음이 휩쓸려 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순간순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수행이 진척돼가지고 있는 분들은 순간순간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특히 명칭을 붙이지 않고도.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순간순간을 알아차릴 때는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도록 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마음이 굉장히 깨끗해지는 상태가 돼있다는 겁니다. 그럴 때는 자동으로 명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그때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순간순간을 알아차릴 때는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려고 하는 습관들을 자꾸 들이도록 하는 것이 돼야 됩니다.

 

경전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성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들을 확인하고 조사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성문을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 만약에 나쁜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테러를 할 수가 있고, 아니면 나쁜 현상들을 일으킬 수가 있게 됩니다. 만약에 그게 한 사람일 거 같으면 그것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잡아내기 쉬운데 그런 것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성안에는 굉장히 혼란스럽게 돼버린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그와 같이 여러분들도 순간순간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 알아차리지 못하면 적이 한 사람 성안으로 들어오고, 적이 여러 사람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 마음이 혼란해진다 하고 얘기합니다.

 

지금 순간을 못 본 채 해버리면은, 또는 내가 그것이 편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것들을 놓쳐버리게 될 것 같으면, 그것은 나중에 큰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수행을 해봤으면 그런 것들을 분명하게 알 겁니다. 사띠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놓쳤으면 '아, 놓쳤다'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알게 될 것 같으면 그 뒤부터는 다시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놓친 걸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현재 일어나는 대상이 사라져버리게 될 때! 실제로는 대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대상은 항상 거기에 있는데 마음은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거라. 그게 지금 이 경전에서 얘기하는 "못 본체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들을 못 본체 해버리기 때문에 거기에 마음이 그냥 달라붙어 있듯이 머물러버리게 됩니다. 항상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고요한 상태에 있다든지, 아니면 '아, 너무 좋다' 하는 마음에 계속적으로 간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잠에 빠져서 아예 대상 자체를 잃어버린다든지,

 

수행을 끝내고 나서 '아, 내가 또 대상을 놓치고 한시간 동안 멍한 상태에 있었구나.' 또는 '내가 잠에 빠져서 시간을 허비했구나' 하고 그때사 후회를 하게 되는 거라.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어떠한 대상이든지 즉시에 나타나게 돼있고 즉시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무상한 성품을 지니지 않는 대상은 없습니다. 그리고 대상이 여러분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없습니다. 삼매에 들더라도 반드시 대상은 있게 돼있습니다. 하물며 삼매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대상은 반드시 있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상을 자꾸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대상은 여러분들에게 항상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한번 따라 해보십시오. “대상은 하나뿐이다.” (“대상은 하나뿐이다.”)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뿐입니다. 하나 이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즉시 일어났다가 즉시 사라져버립니다.

숨을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배가 불러오는 것은 그때뿐입니다. 그 뒤에 다시 불러오는 것은 앞에 거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계속적으로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이 동일한 것처럼 느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대상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아가는 것이 딱 단 일분 뿐이라고 할 것 같으면 진짜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지금 나타난 대상은 여러분 생애에서 딱 한 번뿐입니다. 그것은 사라지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한 대상을 알아차리지 않고 보낸다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살아있지 않을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대상은 딱 한 번뿐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뭐든지 어떠한 대상이든지 그 나타난 대상이든지, 그 나타난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라고 하는 대상이든지 그것도 딱 한번 뿐이라는 생각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대상도 한 번뿐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한 번뿐이라는 겁니다. 반드시 다른 것입니다.

 

수행이 진척이 되면 될수록 다른 대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수행이 재미가 있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만 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이 재미있어지기 때문에 수행을 계속할 수가 있게 되는 거고, 사마디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에서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그 대상으로 인해서 기쁨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마디 수행에서 수행을 계속해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떠한 수행을 하더라도 불교적인 수행이라고 할 거 같으면 그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 굉장히 재미있고, 더 하고 싶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 상태가 되도록 자꾸 만들어가야 됩니다. 그럴려면 마음속에서 대상은 한 번뿐이다. 하는 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수행해라!” “대상을 알아차려라!” 할 것 같으면 다음에 할려고 자꾸 그럴까?

꼭 컴퓨터 게임하고 있는 애한테 “공부해라!” 할 거 같으면 “좀 있다 할게요!”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면,

지금 하고 있는 것과 지금 해야 할 일 두 가지를 다 할려고 그럽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그만 두어야만이 지금 해야 할 일들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게 되면 지금 해야 할 일은 아예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두 개를 다 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면 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만약에 국을 끓이는 것이라면 지금 국을 끓이는 것이 지금 사띠 해야 할 일이 아니고,

지금 해야 할 일은 사띠를 하고 있는 대상이 국을 끓이는 것이면 국을 끓일 때 팔을 뻗는 것이 대상에 되는 거고, 국자를 만지는 것이 대상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자꾸 사띠할려고 하면 그것은 대상이 한 번뿐이 아니고 연속하는 것으로서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자꾸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걸 동시에 두 가지를 다 한다? 그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수행이 진척되고 깨달음에 이르면 이를수록 계획하는 것이 적어지고 아예 없어져버린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 해야 할 것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계획하고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열심히 계획해놓았다 해가지고 그걸 다 나중에 할 수 있는 것은, 그건 차후의 일인 것이지, 그것이 된다고 보장을 누구든지 못한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그냥 알아차리는 것뿐이라는 거라.

계획하고 있으면 계획하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한 번뿐이라고 생각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지금 하는 일과 지금 해야 될 일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여러분들이 알아차리는 것이 더욱더 예리하게 되어나가게 됩니다. 또 그렇게 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욱더 깨끗해지고 맑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계획을 세우고 판단하는 것들은 점점 더 짧아지게 됩니다. 그리 판단하고 계획하지 않아도 하는 일들은 순조롭게 잘 되어나가게 됩니다. 그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지 못할 거 같으면 다른 방법으로 마음을 좀 더 맑고 깨끗하게 그리고 지금 현재를 알아차리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집중하는 힘들을 키워주는 것!

집중하는 수행법으로 따로 집중하는 힘들을 키워줘도 되지만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집중하는 힘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순간순간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될 때, 지금 마음이 더러워져 있는가? 지금 마음이 뭘 하고 있는가?를 보게 되면은 집중하는 힘들은 크게 커나가게 됩니다. 뭘 하고 있는지를 보고 있을 거 같으면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면 빨리 대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지금 마음이 더러워져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쓰면 됩니다. 그러면 사띠하는 알아차리는 힘도 커지고 집중하는 힘도 동시에 커져나가게 되는 겁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게 안 되면 지금 그렇게 집중하는 방법을 써서 응용을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지금 마음이 뭘 하고 있는지? 지금 마음이 더러워져 있는지? 하는 걸 순간적으로 알아차릴 때 집중하는 힘들도 커지고 사띠를 해나가는데 순일하게 되어나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순간 여러분들에게 접하는 것은 육근을 통해서 대상이 접해집니다.

육근 중 어떤 것 딱 하나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귀면 귀, 눈이면 눈, 아니면 감촉이면 감촉, 그 하나만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가끔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눈으로 스님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합니다. 동시에 두 개를 다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 되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건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지금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뭔가 생각이 탁 떠올랐다, 그런데 호흡도 알아차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호흡을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망상이 일어난 것을 아는 것, 그럴 때는 망상을 무시해버립니다. 그냥 호흡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만약에 망상이 일어났는데 호흡하는 것은 아예 사라져버리고 망상만 일어났다 할 것 같으면 망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와 같습니다. 육근을 통해서 두 개다 접해질 때는 동시에 두 개가 다 접해진다고 하더라도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주가 될 것 같으면 보는 것은 아예 무시를 해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소리만 들을려고 해야 됩니다. 소리를 듣는데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져버리면 거기에 집중하는 힘이 강해지면은 당연히 보는 것은 아예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소리를 듣고 있는데 소리가 들리질 않고 스님이 보인다 할 것 같으면 보인다고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됩니다. 들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 어느 하나만 분명하게 한순간에 그것을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도 동시에 두 개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도 일평생에 딱 한 번뿐입니다.

 

그와 같이 육근이라고 하는 것은 성을 지키는, 성벽을 쌓아놓고 성문을 만들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 성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걸러지지 않고 할 거 같으면 성안은 혼란스러워지는 것과 같이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딱 하나! 하나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알아차리게 될 때 여러분들은 지금 현재를 쓸데없이 보내지는 않습니다.

 

살아가는 것은 여러분이 지금 언제까지 살 건지 하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거하고 마찬가지로 시간에 너무 구애받아버릴 거 같으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얼마나 살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시간에 구애를 받아서 내가 일 년 후에 그것을 하겠다? 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알아서? 거기에 너무 구애받지 말아라는 거라.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그렇게 하라.

그 얘기는 지금 현재 알아차리는 것은 반드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할 만한 것이 없고 변하는 대상이라는 거라. 무상한 성품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은 지금 현재에 머물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 순간을 자꾸 소중히 하게 될 때 순간을 허무하게 보내질 않게 됩니다.

그래서 "카노 오마 우빳짜가" 라고 그럽니다. 이 순간을 못 본체하고 지나치지 말아라. 이 순간은 여러분들에게 딱 한 번뿐인 순간이라는 거라. 그걸 못 본체 지나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방일한 것입니다.

항상 이 순간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오늘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