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지식과 지혜의 차이 (20160804)

담마마-마까 2022. 2. 27. 10:18

https://youtu.be/Z2J-dv2il_0

* 지식과 지혜의 차이 (20160804)

 

오늘은 「지식과 지혜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은 참 잘 안 바뀌어요. 어제 스님들하고 대화하면서도 그런 걸 참 많이 느꼈는데, 누가 ‘누가 싫다’ 할 것 같으면, 우리 생각에는 잘못한 것 참회할 것 같으면 받아주고, 그냥 생각 하나 싹 돌려버리면 그냥 괜찮아질 건데 그걸 못하는 거라. 여러분도 누가 싫으면 그 인식하는 것이 잘 안 바뀌죠? 그 사람이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바뀐다든지 좋아진다든지 이렇게 해야 될 건데, 그렇지는 못합니다.

 

그럼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어린아이들은 누군가가 되게 미웠다가도 사탕 하나 주면 금방 좋아하는 걸로 바뀌어버립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뭔가를 알고 있는 지식적인 것들이 여러분들의 생존욕구나 여러분들의 자아를 더 강화시켜 준다고 하는 것이라면, 진리하고는 정반대방향으로 가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만 계속적으로 더 증가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지식적인 것을 계속 뭔가를 습득해야 되는 거라?

한번 보십시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뭔가 인식하는 것을 바꾸는 것이 진짜 힘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이들고 나면 쟤 생각 안 바껴. 그러니까 니가 포기해.”

 

만약에 여러분이 듣는 부처님의 가르침 그것도 혹시 잘못해서 여러분들이 지식적으로 그걸 축적해두는 것은 아닌가?

만약에 지식적으로 축적해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틀림없이 왜곡돼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식하는 기능은 어떠한 경우든지 성자의 반열에 오르기 전에는 자기 방식대로 그걸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설혹 진리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거라. 그러니 만날 진리 가지고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는 거라.

 

진리 가지고는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진리 가지고 다퉈. 왜? 인식하는 체계가 각각이 다르기 때문에! 만약에 사실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당연히 여러분들이 왜곡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왜 왜곡해서 인식들을 하게 될까? 그게 바로 생존욕구 때문입니다.

 

살려고 하는 것 때문에 뭔가를 배우게 됩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이불 꿰매는 그런 것들이 있다, 이불 꿰매는 것들을 배워가지고 그걸 가지고 직업으로 삼아서 그걸 가지고 먹고 살려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없을 거 같으면 굳이 이불 꿰매는 걸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뛰어나게 그걸 배워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라는 것은 꼭 지금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남들보다도 조금 더 고급적인 언어를 사용할려고 하는 거고, 남들보다도 차별되는 언어들을 사용을 할려고 하게 됩니다. 뭔가를 배워가지고.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내야 되기 때문에!

생존욕구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오히려 사실은 왜곡되고 깨달음하고는 정반대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계속 괴로움이 다가올 수밖에 없는 거라.

 

살아가는 것이 괴롭다고 하면 자신들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이것을 내가 인식하는 것으로써 지식적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이것을 지혜로써 알고 있는 것인가?

지혜로써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문제가 풀려나가야 될 것이고 오히려 괴로움은 줄어들어가야 되는 것이고,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오히려 괴로움이 더 증가하고 문제들은 더 꼬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충돌하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게 지식과 지혜의 차이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칭호를 「붓다(Buddha)」라는 칭호를 씁니다.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룬 분이다」 그래서 그 앞에다가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스로 완전하게 깨달은 분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또 부처님에 대해서 다른 칭호를 쓰는 것이 「따타가따(tathāgata)」 라고 하는 용어를 씁니다. 「여래(如來)」 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래(如來)의 의미는 다른 거보다는 이렇게 보면 됩니다. "스스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시고 그것을 남들에게 있는 그대로 전해서 남들이 또 깨달음에 이르도록 만드시는 분이다. 그래서 잘 오신 분이다. 또한 잘 설하시는 분이다" 라는 그런 뜻입니다.

 

"따타가따(tathāgata)가 설하는 것들에 대한 조건"을 중부경전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지식적인 것들이 적고, 지혜롭게 뭔가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 부분이 많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그냥 지식적인 것으로써만 계속 축적돼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이 부분이 적을 겁니다.

한번 예를 들어볼게요. 여러분들의 경우를 한번 비춰보십시오.

 

말을 할 때 시기를 가늠해서 말을 하고, 의미가 있는 말을 하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말을 한다.

말을 하는 시기가 있는 거고, 또 그것에 어떤 의미 뜻들이 있어서 그것들이 전달이 될 수가 있어야 되는 거고, 또 말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게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생각하고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완전하게 말을 한다. 완전하게 알고 있다. 완전하지 않을 거 같으면 당연히 말을 하지 않는 거라.

그 완전하다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알고 경험하고 확인된 것들 '아, 이것은 사실이다' 했을 때 그 사실만을 얘기한다는 거라.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이나 아니면 여러 가지 지식적인 것들을 통합해가지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경우는 없다는 거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알고 경험한 것들입니다.

 

세 번째, 스스로 깨달아서 발견한 진리만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쉽게 말하면 진리가 아닌 것들은 말하지 않는다는 거라. 단지 진리에 관계된 것들은 남김없이 어떤 것이든 다 말을 한다는 거라. 이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고, 이게 선정에 드는 길이고, 이것이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고, 하는 것을 자신이 스스로 깨달았고 그것을 발견했다는 거라. "아, 이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이 길을 걸어가는 길이다" 하고 알고 있을 거 같으면 그걸 말한다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 자신이 완전하게 열반에 이를 때까지 아니면 목숨을 마칠 때까지 말하는 것이 그대로이다. 바뀌는 법이 없다는 거라.

여기서 이 말하고 아니면 십년 후에는 또 다르게 말을 하고 하는 법이 없다는 거라. 그냥 그대로 바뀌는 법이 없다는 거라. A라고 얘기했으면 다른 데 가서도 A라고 얘기하는 거고, 십년 후에도 A라고 얘기한다는 거라.

 

"말을 하는 데도 이와 같이 4 가지가 따타가따(tathāgata)의 조건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 말을 할 때는 그와 같이 한다 하는 뜻입니다.

 

4개 항목 중에서 여러분들은 몇개나 해당이 되는지 모르겠는데, 만약에 그렇게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지식적인 것들을 얘기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오히려 괴로움만 증가를 할 뿐이다는 거라.

여러분이 배워야 되는 것들은 진리인 것이고 사실인 것이지, 그것이 지식이 되어서는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그리해야만이 여러분들이 살아갈 때 살아가는 것들이 한결 수월해지고 아, 내가 이 가르침을 배운 보람이 있구나 하고 지금 현재에서 이익을 얻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처음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배우는 것들이 부처님 가르침도 배워야 되고, 뭔가를 듣기도 해야 되고, 그리하는데 단지 주의를 해야 되는 것은 이것을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알려고 해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의 인식체계나 자기의 감정을 넣어서 그것을 인식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은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으로서 인식체계가 바뀌어버릴 것 같으면, 거기에 맞게끔 생각이 고정화돼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하고 딱 고정돼버리는 거라.

 

지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와 같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지혜를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스님이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 법회를 갑니다. 그러면 스님이 서울에 뭐하러 가는 거죠? 그 법회에 법문을 하고 가고 수행 지도하러 가는 겁니다. 그런데 아침에 가니까 당연히 배가 고프니까 그리고 식사 때를 놓칠 수가 있으니까, 아침에 역에서 샌드위치나 밥 같은걸 사가지고 기차를 탄단 말이라. 그럼 그거 굉장히 맛있습니다. 그거 가지고 하루를 떼운다고. 그걸 먹고 나면 아주 맛있고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맛있고 좋다해서 기차에서 안 내릴 수 있습니까? 나는 기차에서 내려가지고 법을 설하러 가야 됩니다.

 

현세의 이익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지금 내가 바르게 법을 듣고 그것을 실천해가면, 샌드위치를 먹고 도시락을 먹는 거와 같이 지금 현재 이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익은 뭣 때문에 있는 거라? 마지막 종착점에 가서 법을 설하기 위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식을 얻고 많은 것들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이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 이익일 뿐인것이지 그것이 여러분들을 종착점에 데려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야 되는 것이지, 지혜가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현세의 이익에서 그냥 끝나버리는 겁니다.

 

그렇지만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현재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있도록 하고 여러분들의 패턴을 바꿔줄 수 있는 것들이 돼야 됩니다.

만날 부처님 가르침 듣고 뭔가 실천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 전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도 똑같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럼 그거는 잘못하고 있는 거라. 그거는 지식은 사실을 알기 위해서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뭔가를 배우고 있는 거라. 살아가기 위해서 뭔가를 알아차리고 있는 거라.

대상을 알아차릴 때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지혜가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걸 왜곡해 버릴 것 같으면 지혜는 드러나지 않게 되는 거고 그 사실은 왜곡돼버리게 됩니다.

 

지금 현재 이익이 있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일어나는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실제로 지혜는 사실인 것들 실재인 것들을 분명하게 아는 것들입니다. '아, 이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적인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내가 왜곡해서 알고 있는 지식이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가려낼 줄 아는 것들이 지혜라는 거라.

대상을 있는 그대로만 볼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보면 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데, 형상을 알아차리는 거라.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려야 되는데 싫은 소리로써 들린다는 거라. 왜곡을 해버린다는 거라.

 

그러면 서울 올라갈 때 샌드위치나 밥을 먹지도 못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현세의 이익조차도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지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조차도 지혜롭게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혜로 전환시켜주지 못할 거 같으면 현세의 이익조차도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반드시 지식적인 것들로서 끝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을 지혜롭게 분명하게 돌려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지혜를 얻는 것들은 무엇 때문에 얻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할 줄 알아야 됩니다.

 

경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왜 괴로움이 일어나는지 발견하는 것이다."

 

저 사람 말을 들으면 나는 괴롭다는 거라, 듣기 싫어서. 왜 괴로우냐는 거라. 저 사람 말이 형편없어서 괴로운 것인지, 아니면 내 마음이 그것을 듣기 싫어서 내가 그것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저 사람이 싫다고 할 것 같으면 왜 저 사람이 싫은지, 그래서 저 사람이 싫은 것으로 인해서 내가 괴로움이 일어나면 보기 싫은 것 때문에 괴로움이 일어날 것 같으면 왜 괴로움이 일어나는 줄을 알아서 그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버릴려고 했을 때 그거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원수나 아군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지 다른 것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감옥에 딱 갇혀가지고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따르는 자의 자격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식이나 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다고 하는 것들도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능력들을 키울 때 그것들은 훌륭한 것들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그 지식을 많이 채우기 위해서 그걸 배운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냥 괴로움을 증가시켜주는 지식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그런 지혜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싫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전에는 싫은 사람인데, 인제는 지혜가 있어. 그럼 싫은 사람에게 뭘 어떻게 해야 돼?

여러분들이 이때까지 싫어한만큼 그사람한테 싹싹 용서를 빌어야 되는 거라.

 

아누룻다 존자가 그렇게 했다고 그럽니다. 아누룻다 존자는 신통으로써 뛰어난 스님입니다. 이생에서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신통으로써 살펴보니까, 내가 이렇게 깨달음을 이루고 신통까지 얻은 원인이 뭔가 하고 살펴보니까 과거생에서 어느 누군가가 자기에게 열심히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거든. 그래서 그 사람이 지금 어디 태어났는가를 보고 찾아갑니다. 가가지고 그 사람이 있는 데서 머물면서 법을 쭉 설해줍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작은아들을 출가를 시킵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그렇게 나옵니다. 작은아들이 아직 어린아이인데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이 아이가 출가와 동시에 출가하는 의식을 진행하는 동시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겠다 하고 보고 그 아이를 택했다고 그럽니다. 그 아이는 실제로 그렇게 출가하는 의식을 하는 도중에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빠른 시간내에 깨달음에 이르렀을 뿐만아니라 어린 나이에 깨달을 이룬 사람으로서 이름이 나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에게 얘기합니다. 당신의 아들은 인제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진 빚을 인제사 갚았다 전생에서 진 빚을. 그렇게 아누룻다 존자는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도움받은 사람들에게 뭔가 자신이 법에 맞는 도움들을 반드시 줘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불편하게 했고 원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법에 맞게끔 그 사람에게 반성하고 참회하는 시간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게 지혜있는 사람들입니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지혜가 생겨났으면 그에 따른 행위들이 반드시 따르게 됩니다. 말로만 만날 '지혜' '지혜' 말하지 말고, 실제 그렇게 드러나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지식적으로만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아무리 법을 설하고 하더라도 자신의 견해에 의해서 법을 설하게 되는 것이고, 사실을 전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항상 상대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면 적들이 생겨나는 거고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들도 생겨나게 된다는 거라. 계속 도돌이표 반복을 하게 된다는 거라.

 

지식으로 인해서 현세의 이익조차도 따먹지 못하는 자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만한 조건 자체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적어도 지식으로 인해서도 현세의 이익을 얻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러한 지식들이 발판이 되어서 바르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서 지혜가 열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혜가 열려서 지혜로운 자가 지어야 되는 행위들을 반드시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되는 것이지 내가 지금 신통이 열렸다, 아니면은 수행에서 삼매에 든다, 그런 지금 현세의 이익과 같은 열매들을 따먹는 것에 치중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지혜에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현세의 이익에서 일어나는 열매와 똑같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도와 과를 이루기 전에 일어나는 이익들은, 완전한 지혜가 열려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야 됩니다. '아, 이것도 내가 필요한 것들이고, 나에게 또 생겼네' 하고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