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2016년 까티나 축제_청정에 이르는 길은 험하지 않다. (20161106.경주)

담마마-마까 2022. 3. 23. 09:00

https://youtu.be/JkBGgPlsfGY

* 청정에 이르는 길은 험하지 않다. (20161106.경주 까티나축제)

 

프린트물 한번 펴보십시오. 「청정에 이르는 길은 험하지 않다」 하고 적어놓았습니다.

험하지는 않는데 힘들죠? 테라와다 불교의 길을 따르는 스님이든 아니면 재가자든 참 힘듭니다. 그냥 때 되면 보시금 내고 나면 알아서 축원해주고 알아서 절을 다해주면 참 좋은데, 이거는 뭐 오늘도 계를 신청해놓았다가 못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 못 오면 계를 안 줍니다.

계를 주는 것도 한 번에 그냥 딱 줘버리면 좋은데, 세 사람 주고 또 세 사람 주고 세 사람 주고 이렇게 하니까, 그 법을 설하는 스님들도 힘들고 받는 사람도 힘들고. 의식 부분도 그렇게, 기도도 하지 마라 그러지, 점도 보지 마라 그러지, 오로지 수행만 하고 또 선한 행위들을 하라고 그러는데 그게 마음대로 쉽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쉬운 것은 아니죠? 테라와다 불자의 길을 가는 것은!

기복적인 것에 빠지지도 않고, 또 수행하고 공덕 쌓으면서 선한 일들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건 틀림없는데, 그런데 여기서 험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뭐냐면 결과가 즉시 눈에 보인다는 거라.

그건 여러분들도 경험해봤을 겁니다. 수행을 해 보면 결과는 즉시 나타나게 됩니다. 다른 수행하고는 다르게 불교적인 수행은 금방 내 눈에 드러나지게 됩니다.

'어? 내가 모르는 걸 알았네!' 또 여러 가지 마음이 자꾸 바뀌는 그런 경험들을 하다 보면, 공덕을 쌓을 때도 공덕이 나중에 나한테 뻥튀기가 돼가지고 돌아오든 어쨌든 간에 그건 차후 문제고.

 

할 때 내 마음이 좀 더 선해지고 또 그런 마음들이 점점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마음들이 없어지면서 평온한 마음들이 들면 들수록 훨씬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이 있다는 걸 압니다. 그거는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누구든지 똑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거라. 똑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을 거 같으면 그거는 험하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거라.

그래서 여기 제목으로 적어놓은 게 「청정에 이르는 길은 험하지 않다」 하고 적어놓았습니다.

 

그것도 부처님이 가르쳐준대로 그냥 쭉 따라가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참 인간이 간사해서 그렇게 잘 못합니다. 여러분만 못하는 것이 아니고, 남방불교에 있는 테라와다 불자들도 그 길을 못 따라갑니다. 오히려 수행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열의가 훨씬 뛰어날지도 모릅니다.

단지 테라와다 사상이 물들어 있는 것이, 그쪽은 역사가 오래 돼왔기 때문에 훨씬 많이 물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방향에 많이 길들여져서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한다는 것뿐인 것이지, 수행적인 측면만으로 봤을 때는 여러분들이 더 열심히 할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권에 있는 불교도라고 해서 꼭 그냥 수행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끝나듯이 수행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든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든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뭐겠어요?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것!

쉽게 말하면 오늘 같이 까티나 행사 있다 할 것 같으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까티나 행사에 동참을 하는 거라. 그래서 공덕을 쌓고.

그러고 나서 그걸 조금 뻥튀기 할려고 그럽니다. '내가 이 공덕 쌓은 것으로 인해서 내가 천상에 태어나기를' 하든지,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 '이 공덕으로 인해서 내가 닙바나에 이르기를' 그렇게 서원을 세우기도 하고, 아니면 '이 공덕으로 인해서 집안에 아픈 분이 좀 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하는 개인적인 바램을 가지기도 하고, 여러분들과 별반 차이나는 거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단지 좀 더 그런 사상들에 젖어있기 때문에 좀 더 용이하게 그런 행사들이나 그런 테라와다 불교의식에 젖어있다는 것뿐입니다.

 

아마 한국도 세월이 좀 많이 흐르고 나면은 테라와다의 사상이 한국민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들 것 같으면 그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현재 한국 테라와다불교에서도 그 사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자꾸 할려고 합니다. 집중수행 한다고 하더라도 특정하게 보시금을 정해놓지 말고 자율적으로 보시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일으키도록 하고, 안 일으키려고 하면 할 수 없는 거고, 그래서 뭘 하더라도 기둥 하나에 얼마, 불사를 하더라도 이렇게 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도록.

보시라고 하는 것은 할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그게 보시의 공덕이 되는 것이지 내가 100원을 했다 해가지고 이게 보시공덕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열 가지 바라밀도 꼭 마찬가집니다. 자기 스스로 자꾸 하고 실천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실천하면서 그것이 무르익어졌을 때 그것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바라밀이 완성돼야만이 내가 출가할 수 있는 거고, 내가 선정에 이를 수 있는 거고, 붓다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각각의 이루는 바라밀들은 각각 다 다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스스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 테라와다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래서 힘들어도 그 길을 자꾸 갈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그분들은 어떤 서원을 세우게 될까?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그와 같은 서원들을 세우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하고 나면은 내가 이것으로 인해서 이렇게 되기를.' 그런데 그 문장을 다 뒤집어봐도 여러분들 같이 큰 뜻을 가지는 서원들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나중에 게송 보면 그럴 겁니다.

'이와 같은 공덕으로 닙바나에 이르기를! 열반에 이르기를! 해탈에 이르기를! 도와 과에 이르기를!'

그 도와 과가 쉽게 뭐 그렇게 떨어지나? 그런데도 그렇게 큰 서원을 세우는데, 이 사람들은 그런 서원을 안 세운다는 거라. 아주 현실적인 것, 그래서 그 서원을 여기에 적어놓았습니다. 한번 읽어봅시다.

 

이 공덕에 의해 우리는 사후 천상에 태어나기를!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라고 하는 악취의 경지에 결코 빠지지 않기를!

만약 인간으로 윤회하는 경우는 부족함 없이 풍요롭기를!

그러나 풍족한 그 재물에 집착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 재물로 상가와 궁핍한 사람들에게 한없이 시주하는 마음이 되기를!

이와 같이 공덕을 쌓아, 바라밀을 완성하고, ··치를 근절하여,

모든 부처님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씀하신 해탈에 이르러

윤회의 괴로움을 넘을 수 있기를!

 

이 정도 수준입니다. 이걸 다 하는 경우도 있고, 이 중에 일부만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의 사상하고는 조금 떨어집니다. 엄밀하게 얘기할 것 같으면 이런 서원을 세워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꼴라당 천상에 태어날려고 내가 수행을 하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한국에서는 극락에 태어날려고 하기는 하죠? 그렇지만 그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다 하는 것은 테라와다 불자들이면 다 알기 때문에, 그것도 윤회의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태어날려고 서원을 세우지는 않는데도 그렇게들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사상하고 테라와다불교 각각의 나라의 지금 사상하고 맞지 않는 부분은 있습니다. 그런데 오죽했으면 이러겠어요? 여러분 앞에 아라한이 누구냐 하고 기억을 한번 떠올려보라, 아니면 성자가 누구냐 하고 기억을 떠올려보라, 할 것 같으면 별반 그렇게 여러명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편적으로 그냥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스님들이 있지만, 안 그래도 저스님 법문을 듣고 저스님이 가르침대로 수행해보겠다 하는 스님이 과연 몇 명이나 되요? 별로 없죠? 그거는 현실적인 거라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반인들은 차선책을 쓸 수밖에 없다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도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데, 내가 해가지고 뭐 얼마나 하겠나? 하는 현실 쪽을 택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윤회는 하겠지만, 좀 더 좋은 조건에 태어나서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끔 살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거라. 좀 더 좋은 조건일 거 같으면, 내가 바라밀을 쌓고 선근공덕을 쌓기에 좀 더 좋은 조건이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러한 서원들을 세우는 거라.

 

여러분은 그래도 이 자리에 와있는 것만 해도 과거생에 좀 더 좋은 조건들로, 좀 더 선근공덕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이 경도 내에 있을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만 해도 행복한 것이고, 여기에 모여서 이 정도의 시간을 낼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래도 선근공덕들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이것보다도 더 떨어지도록 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서 조금 더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 지금 내 마음의 상태에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자꾸 찾아야 됩니다.

 

그것이 꼭 수행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참 많이 있습니다. 간단한 걸 예를 들어볼까요?

내가 이후부터는 어느 누구든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겠다! 하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말은 쉽지만 굉장히 힘듭니다. 남을 비난할려는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나에게 악한 마음이 안 일어나게 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그런데 미워 죽겠는데 악한 마음이 안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일어날 때마다 자기를 자꾸 제어할려고 해야 됩니다.

제어할려면 자애수행을 하든지 뭘 하든지, 아니면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 '생각' 하면서 알아차리든지 뭘 하든지 간에, 생각을 다스려야 만이 지금 현재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 앞에서라도 비난하는 말을 안 하게 됩니다. 강제적으로라도 입술을 깨물든지 해서라도 안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일단 말하는 것은 안 하게끔 되니까 악한 말은 안 하는 형태가 되게 되는 거라. 그러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마음속에 품은 생각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악한 마음을 안 품은 상태로서 자꾸 만들어나가는 거라. 그래서 신구의 전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적어도 악한 말을 안 하는 상태가 되는 거라.

한 사람한테도 그렇게 힘드는데 모든 사람에게 그 어떤 비방 비난도 하지 않겠다 하고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다 보면 해집니다. 하다 보면! 마음을 단단하게 먹으면은 해집니다.

 

사띠 할 때도 처음에는 대상을 그냥 슬그머니 알아차리고 자연스럽게 알아차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띠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어려운 만큼 자기는 더 노력을 해야만이 그 대상을 좀 더 세밀하게 볼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면 할수록 힘들어집니다.

그래도 그 길을 굳건하게 가다가 보면 어느 순간에 자연스럽게 그것이 세밀하게 보여지고 그 성품들이 드러나지게 됩니다. 아, 무상한 것들이 드러나지고, 그다음에 불만족스러운 것들이 드러나지고, 그 속에서 「나」라고 할만한 것이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끔 되는 거라.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만이 그 상태에 이르르게 됩니다.

 

대상에 대해서 사띠할 때도 그와 같은데, 일반적으로 내가 어떠한 것들을 결정해가지고 어떤 사람도 비난하지 않겠다 할 것 같으면 그 정도 노력 안 하고 될 것 같아요? 안 됩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면 할수록 조금씩 조금씩 자기 자신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거라. 참 좋은 게, 그래도 우리가 테라와다 불자임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지금 즉시 그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아까 삼보예찬 두 번째에 「법의 예찬」 한번 보십시요.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한글로 한번 읽어보십시요. 같이 시작!

 

[즉시 확인할 수 있고, 결과 바로 나타나니,

와서 보라 초청하여, 닙바나로 인도되는 진리.

지혜로운 이 스스로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바로 그거라. 부처님 법이 좋은 게 그거라. 지금 즉시 내가 그걸 확인할 수 있고, 그것들은 나에게 유용하게 쓰여지고 있다는 거라. 또 그 길을 계속 가다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욕먹을 일이 없어. 다른 사람들이 나보고 참 잘 살아간다고 그러지, 저 사람 잘못 살아간다고 하는 법이 없다는 거라.

 

그런데 그 좋은 법을 왜 자꾸 놔두고 법 아닌 것들을 가지고 자꾸 그 길을 따라갈려고 하느냐는 거라. 명예가 높아질려고 한다든지, 무슨 토론 해가지고 그걸 자꾸 이기고 지고 하는 것들에 휩싸인다든지, 필요 없는 것들을 자꾸 따라갈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법이 좋으면 그 법을 따라가야 됩니다. 그마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따라가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 길을 따라갔던 사람들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지금 그 법은 동일하게 적용이 돼나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자꾸 많아지도록 돼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여러분들이 아, 이 법으로 인해서 부처님의 고마움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부처님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구분할 수 있고, 여러분들이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부분을 알아서 그것을 고쳐줍니다.

 

그것도 언제 고쳐줍니까? 지금 바로 즉시 고쳐줍니다.

"나는 이 병 고쳐줄테니까 20년만 내 따라 해보시오." 그런 의사 있으면 그 의사 따라가겠습니까? 그 의사 말 안 듣습니다. 20년 동안 어떻게 기다려가지고 그 병을 고칠거라? 그런데 "죽고 나서 여러분은 극락에 보내주겠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기간 동안 기다려서 그 말을 믿으라는 거라? 부처님은 그렇게 허무맹랑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라. 지금 즉시 여러분들에게 그 길을 보여주고 바꿔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위대한 의사다." 하고 그럽니다. 위대한 의사라는 것은 지금 즉시 처방을 내놔놓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만들어 주는 거라.

 

그 길을 따르면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해지고, 선한 마음을 가지게끔 되고, 좀 더 수행에서 진일보하게 되고, 그리고 도와 과에 이르는 것은 그것은 험한 길은 아니라는 거라. 열심히 노력하면 따라갈 수 있는 길이고, 하면 할수록 나에게 이익되는 길이지, 그래서 그 청정의 길은 험하지 않는 거라.

그 길은 해볼만하지 않겠어요? 지금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언제 해볼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다 보면은 해탈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그 길을 가는데 어떤 다른 것들을 제시하는 것도 없습니다. 여기 까티나 의식에 오지 못했다고 해서 그 길을 못 따라가는 것도 아닌 거고, 여러분들에게 스님과 같은 이 복장을 입어야 된다고 해서 그 길을 따라간다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것도 거기에는 제약조건이 없습니다.

그래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때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다음에 장소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다음에 어떤 조건도 달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법이라는 거라. 그 법을 여러분은 자꾸 따라가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흐름을 끊어버려라" 그럽니다.

여러분이 지금 따르고 있는 길 그 흐름들은 대부분은 부처님이 말한 것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게 돼있다는 거라. 그 흐름을 끊는 것은 여러분이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사띠를 해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될 때도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고, 내가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할려고 하더라도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리해야만이 그 흐름을 딱 끊을 수가 있습니다.

 

흐름이 하나가 끊어졌다고 느끼는 순간에 나는 그 흐름을 반대 방향으로 되돌릴 수가 있습니다. 윤회로부터 흐르는 그 방향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견해의 흐름들도 반대로 돌려버려야 되는 거고, 어리석어서 윤회하는 흐름도 반대로 돌려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내가 좀 더 부유롭게 되고 살고자 하고 하는 그런 흐름들도 반대로 돌려야 되는 거고, 내가 감각적인 욕망을 가지는 것들도 반대로 돌려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고 그냥 시키는 대로 육근(六根)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따라 할 것 같으면 그 흐름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부단하게 노력을 해서 그 흐름들을 반드시 돌려놓는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오늘은 스님들에게 까티나 가사와 여러 가지 공양물을 올리면서 좀 더 많은 선근공덕을 쌓는 날입니다.

부처님이 얘기했듯이 이것보다도 더 소중한 보시는 없습니다. 그런 보시를 한만큼 여러분들은 그 공덕을 반드시 가지고 그 공덕이 드러날 수 있게끔 해야 됩니다. 드러나지 않는 공덕은 지금 나에게는 있으나마나 한 겁니다. 촛불 이것은 불을 밝히기는 했는데 여길 밝히는 데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입니다. 저거는 켜놓으나 안 켜놓으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쌓은 공덕들 켜놓으나 안 켜놓으나 마찬가지가 되면 뭔 소용이 있겠어요? 불을 밝혔으면 그것들이 영향을 미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더 할 수 없는 공덕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들 것이 되도록 하고 그것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은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대로 그대로 자꾸 따라가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같은 날은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고, 그리고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스님들이 있고, 또 내가 그것을 따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지고 좋은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