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행복하다는 것은 마음의 성장이다. (20161201)

담마마-마까 2022. 3. 27. 09:00

https://youtu.be/enKym5-lBTo

* 행복하다는 것은 마음의 성장이다. (20161201)

 

오늘은 「행복하다는 것은 마음의 성장이다.」 하는 부분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가끔씩 운동한다고 온천천에 내려가다 보면 싸우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습니다. 싸우는 거 보면 지나가는 소리 들어보면 별 거 아닌데, 서로 인정 안 해주는 것 때문에 싸우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내가 이겼는데 왜 너는 내가 이겼다고 인정 안 해주느냐?" 하는 것 가지고 싸우고, 아니면 "너는 왜 나를 무시하느냐?" 하는 것 가지고 싸우는 그런 모습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가끔씩 스님들이나 재가법사들도 그것 때문에 좀 다툼이 있는 것들을 봅니다. "나는 스님인데 왜 스님 대우를 안 해주느냐?" 아니면 "나는 법사인데 왜 법사에 맞는 대우를 안 해주느냐?" 하는 것 가지고 싸우기도 하고, 또 가끔은 스님이 시내를 가다 보면 이제는 이 승복이 테라와다 스님들 승복인 줄은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옛날하고는 틀리게. 그런데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피 대상이 됩니다. 멀리 떨어질려고 하고 아니면 이상하게 마음을 품고 차별을 할려고 합니다. 사탄 지탄 같이 보는 그런 시선들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별짓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행복해지지 않는데 왜 자꾸 차별하고 구별할려고 하는가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삶은 대부분 그렇죠? 10원 모았으면 20원 모을려고 하고, 부장되었으면 그다음에 과장입니까? 과장이 먼저라, 부장이 먼저라? (수행자 대답 : 과장이 먼저입니다.) 그럼 과장이 됐으면 부장이 될려고 하고. 이렇게 될려고 합니다. 그렇게 높아지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위에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들 합니다. 그 부분 한 부분은 높아졌다고 치더라도 다른 부분이 비교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도 높다고는 얘기 못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의 것이 높아질 것 같으면 다른 것들도 다 높아졌다고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서로를 구별할려고 하는 것들이 대부분 살아가는데 어찌 보면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원동력이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꼭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하는 얘깁니다. 조금 더 10원에서 20원이 모여질 거 같으면 그걸 가지고 조금 더 좋은데 쓰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조금 더 높은 지위나 명예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좀 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배려하는 마음들을 좀 더 가지면 좋은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게 그 부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조금 더 좋은 조건이 됐다 해가지고 사람이 행복해져야 되는데 그렇게 행복해지지 못하면서 그것만 올라간다는 것은 그것은 좀 생각해볼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10원 20원 모으고, 과장 부장 높아지고 하는 것보다도 더 우선시 해야 되는 것이 있는데 그 부분은 자꾸 빼먹고 다른 것들만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뭘 빼먹겠습니까? 마음의 성장입니다!

자기가 조금 더 좀 더 좋은 조건, 좀 더 높은 자리, 좀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갈 거 같으면 그와 더불어서 마음도 틀림없이 성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에 맞는 일들을 해나가고 또 그에 맞게끔 나뿐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더 넓어지게 됩니다.

이 자리에 다섯 살, 여섯 살 되는 아이가 두 명만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 법회 보기가 힘들어집니다. 아이는 굉장히 활동적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고 생각하는 것들에 따라서 막 움직입니다. 마음이 그마만큼 넓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마음은 생각하는 폭이 점점 좁아집니다. 나중에는 몸의 크기와 비례해서 마음이 좁아져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람들은 바로 죽음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마음을 조금 더 넓게 쓰고 하는 것들이 틀림없이 있어야 되는데, 사회적으로 살아갈 때도 마음하고는 관계없이 이렇게 살아가고 또 일상 생활할 때도 마음은 성장하면서 점점 더 협소하게 닫혀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좀 더 생각해 볼 부분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합니까? 마음이 성장되어 있는 사람은 조금 더 행복할 겁니다.

 

마음이 성장하는 것은 적어도 불교도일 거 같으면 이러한 단계들은 거치게끔 됩니다.

첫 번째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스승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을 지도해주고 인도해줄 스승은 부처님 한 분 뿐이다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리고 그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지니고 따를려고 하고 있느냐는 거라. 또 그 부처님 말씀들을 따르는 출가 제자들이 계속해서 여러분을 이끌어주는 또 다른 스승으로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확신할 수 있느냐는 거라.

삼보에 대한 확신들이 먼저 들어야만이 지금 살아가는 방향과 또 다르게 마음의 성장을 할 수 있는 길을 열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아, 내가 이 길을 따라가봐야 되겠다 해서, 위빳사나 수행도 하고 또 다른 바라밀들도 행하고 그렇게 따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아, 스스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무상한 성품들도 보게 되고, 그래서 아, 「나」라고 하는 것이 참 보잘것없는 것이구나, 「나」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고, 바라밀들을 행하면서 아, 이렇게 행함으로 인해서 내가 선한 마음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는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고.

 

이렇게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면 알게 되는 만큼 마음은 조금 더 행복한 쪽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탐욕이 일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보통 사람은 그 탐욕에 인해서 움직이지만, 이렇게 행복해지기 위한 순서를 밟아가는 사람은 그 탐욕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탐욕이 사라지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탐욕으로 인해서 뭔가를 가졌을 때보다도 훨씬 더 큰 행복을 그속에서 얻게 된다는 거라.

화가 일어났을 때 화를 다스려보면은 화를 다스렸을 때 일어나는 행복은 다른 어떤 것들, 뭔가 10원 20원 더 가질 때보다도 훨씬 더 큰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원 20원 가졌을 때의 행복은 그것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이 커지고 나에 대한 것들이 더 강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어지지만, 성냄을 제거했을 때 일어나는 행복은 나라고 하는 것들은 없을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하는 마음들은 더욱 더 커지게 된다는 거라.

 

행복은 마음의 성장에 따라서 좌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래도 이 세상에 살면서 참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이 성장을 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데 항상 제1선결 과제로써 택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것들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행복하게 되는 것은 마음의 성장에 따라 달리게 돼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경전에서 말하는 부분을 얘기하겠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jhāyiṁ)'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을 지금 하고 있는 대상에 통일하라.

마음을 통일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마타 방법으로 할 수가 있고, 위빳사나 방법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사마타 방법으로 할 것 같으면 적어도 하나의 대상에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서 선정을 개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집중하는 힘들이 커지면 그마만큼 알아차리는 힘들도 사띠의 힘들도 커지게끔 됩니다.

위빳사나 방법으로 할 것 같으면 대상에 대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파악을 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집착함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 대상을 끊임없이 집중함으로 인해가지고 일어나자마자부터 시작해가지고 마지막 사라질 때까지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내가 의지할 것들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좀 더 의지할 대상들이 내 스스로인 것을 분명하게 알아서 마음을 더욱더 키워나가는 쪽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필요 없는 것들이 하나씩 둘씩 떨어져나갑니다. 이때까지 뭔가 품었던, 내가 지금 잘하고 있나 못 하고 있는가 하는 의심들, 또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나는 것들, 그리고 내가 조금 더 뭔가 살려고 하고 조금 더 건강해지기를 바라고 있고 하는 그런 생존욕구들 이런 것들이 차례차례로 떨어져나가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 자신은 점점 더 성인의 경지로 이르르게 됩니다. 그래서 네 가지 성인의 부류를 통해서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이게 '자잉(jhāyiṁ)'입니다.

 

하나에 집중돼서 마음이 통일됨으로 인해서 어떤 방법으로는 사마디를 얻기도 하고, 어떤 방법으로는 해탈에 이르는 성자의 길에 들 수 있기도 합니다. 어떤 대상이든 그 대상을 자꾸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사마타적인 방법으로 알아차리든 위빳사나적인 방법으로 알아차리든 그 대상을 끊임없이 사라질 때까지 주시를 해줘야 됩니다. 마음은 살아있을 동안에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것이 죽는 법은 없습니다. 의식이 끊어지는 법은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항상 마음은 일어나게 됩니다.

 

의식은 반드시 수상행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수상행은 대상이 있어야만 일어나게 됩니다. 오온은 항상 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훈련들을 끊임없이 하면은 당연히 마음은 좀 더 선정이라고 하는 행복을 얻게 되고, 도와 과라고 하는 행복을 얻게 되고, 더 높은 행복들을 얻게 된다는 거라. 마음이 성장하면 이와 같이 행복은 따라오게 됩니다. 그것은 첫 번째 '자잉(jhāyiṁ)'이라고 하는 마음을 대상에 통일하는 훈련들을 자꾸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위라장(virajam)' 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다 하는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세상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출가자들도 세상과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더더구나 재가자는 세상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이 단어가 뜻하는 것은 "어떤 대상이든지 그 대상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을 끊어라" 하는 얘깁니다. 대상에 집착해버릴 것 같으면, 거기에 달라붙어 버릴 것 같으면 당연히 거기서 뭔가 다른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불협화음들이 탐진치로써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사물이든 사물에 의존하는 것들을 없애라" 하는 뜻입니다. 신발이 하나일 거 같으면 하나에 만족해서 그것에 의존해서 그냥 살아가는 것이지, 신발은 단지 발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써 쓰게 되는 것이지, 그 신발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신발이 닳아 못쓰게 될 것 같으면 또 다른 신발을 사지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일어난 대상들에 대해서 그것들에 의존하는 마음들이 생기면 그것에 달라붙게 됩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가벼워져야 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에 의존해서 그것들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배를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는 걸 관찰하고 있는데, 뭔가 생각이 일어났으면 마음은 이미 생각 쪽으로 가 있는데 계속 배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무거워지게 됩니다. 무거워지면 마음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일어나는 생각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고, 호흡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일어난 것들은 어떠한 것이든지 일어나는 것들로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대상에 대해서 의존하고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 대상이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알고 그냥 놔둬버려야 됩니다. 신발이 떨어져서 그거 버려버리면 버려진 신발에 대해서 아까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버려버려야 되는 겁니다. 대상이 사라졌으면 그냥 사라진 것이 또 좋은 대상들이 나타나길 바라는 것은 그것은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에 대해서 의존하는 것들을 가지지 말아라 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까따낏짱(katakiccaṁ)' 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이루어야 할 것들을 이루었습니까? 사람으로 태어났을 경우에는 틀림없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수행을 하고 있으면 반드시 도달해야 될 곳이 있습니다. 그 이루어야 할 것들을 반드시 이룰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목표에 도달하지 않을 뿐아니라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쁜 방법들을 쓰게끔 됩니다. 그런데 바른 목표일 거 같으면 설혹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내 자신은 행복합니다. 가는 길들이 행복한 것들로서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적어도 마음이 행복해질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고 행복하다는 것으로서 마음의 성장이 됐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어떤 것이든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는 훈련들을 하고, 그 대상들에 대해서 의존하는 것들 집착하는 것들을 버려버리고, 그리고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들을 분명히 설정해서 그것들을 한발한발 천천히 나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 그럴 때 '아, 내가 마음이 이만큼 성장했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에는 번뇌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가고 있는 길에서 다툼이 있고 불안할 때는 여러분들에게는 축복이 필요합니다. 그 축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삼보입니다.

나의 스승이 있구나. 또 그 스승의 가르침이 이렇구나. 그 가르침을 따르는 또 나를 인도해주는 분이 있구나 하는 것들이 자리에 확고하게 매김질 될 때 그분은 마음에서 내가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나는 좀 더 그 길을 가게 되고, 그것을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어떤 거보다도 마음이 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좀 더 내가 행복해지고 있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행복은 얻는 것이 아니라 도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도달되어지는 곳에서는 다시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행복해졌다가 똑같은 것으로 인해서 불행해지고 하는 것들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행복을 이룰려고 하지 말고, 행복에 도달하도록 자꾸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법구경, Dhp386)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