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지나치게 집중하지 말라. (20170216)

담마마-마까 2022. 3. 31. 09:00

https://youtu.be/MGxBlYrcr2M

* 지나치게 집중하지 말라. (20170216)

 

오늘은 모르는 학생이 하나 왔네? 어디 부산대? (수행자 대답 : 그냥 궁금해서 왔습니다.) 음. 그래요.

오늘은 「지나치게 집중하지 마라」 라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보통 수행을 어느 정도 좀 하다가 보면은 대부분 걸려 넘어지는 게 집중하는 것 때문에 걸려 넘어집니다. 지나치게 집중할려고 해서 걸려 넘어지고, 집중이 잘 되면 집중하는데 마음이 빠져가지고 노력하는 힘이 떨어져서 그것들이 변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서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집중을 왜 하죠? (수행자 대답 : 번뇌를 없애서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합니다) 당연히 그렇죠. 그럴려면 마음이 고요한 상태, 선한 마음의 상태가 되어야만이 번뇌 없이 깨끗한 상태가 되어서 거기에 집중을 하게 되죠.

그런데 보통 걸리는 것이 '집중하겠다' 하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욕심이 들어가 버린다는 거라. 거기에 먼저 걸려버리게 되는 거라. 또는 수행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보이면 그것들에 계속 하나의 대상에만 몰두하고 다른 것은 아예 무시해버립니다.

그 집중하다 보면 대상이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요? 게으른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서 집중하는 것이 안 되고, 또 거기에 걸려가지고 계속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집중을 지금 여러분들이 하는 이유는 물론 삼매를 개발하는 부분도 있겠지, 사마디를 견고하게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대상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으로 분명하게 먼저 구별하기 위해서 집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오면 배가 불러오는 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을 해서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은 다르고, 그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함께할 수 없다 하는 사실을 아는 상태로 먼저 바뀌기 위한 겁니다.

그래야만이 그다음 단계, 다음 단계들로 넘어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평상시 때 보면 여러분들은 집중을 하든 아니면 대상을 알아차리든, 먼저 판단부터 먼저 합니다. 여기 있는 물질적인 현상, 스님이든 대상을 보면 여러분들은 먼저 뭐가 보여요? '보인다'고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그냥 '스님' 하고 먼저 알아차립니다. 판단하는 게 먼저 됩니다.

 

경전에 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인도 당시에는 사람들이 밖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들어갈 때는 보통은 옷을 탈탈 털고 나서 당분간은 집 담벼락이나 문 같은데 옷을 걸어두고 집에 들어갑니다. 그러고 나서 그 옷에서 냄새들이나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가셔지고 나면 다시 가지고 들어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옷이라는 게 가볍기 때문에 바람이 불면 또 날려버립니다. 그러니까 담벼락에 걸어둔 옷들도 날려가지고 길에 나뒹구는 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스님이 그런 길가에 있는 옷을 봤어. 옛날에는 그런 옷들을 주워서 가사를 지어 입었습니다. 남이 버린 옷, 그리고 시체를 버릴 때 그냥 버릴 수가 없으니까 옷으로 싸가지고 천 같은 데 싸가지고 버리기 때문에 그러한 천들, 시체에서 얻은 천들 이런 걸 가지고 가사를 만들어 입었거든.

그래서 어느 스님이 그걸 집어가지고 가는데, 마침 그 집주인이 나와서 자기 담벼락에 옷이 없었는데 저쪽에 자기 옷을 주워가는 스님이 한 분 있으니까 “이 도둑놈아! 왜 남의 옷을 가져가느냐?” 하니까, 그 스님은 “나는 길가에 버려진 것이라서 주워왔다. 아, 이게 당신 것인 모양인데 그럼 가져가시오!” 하고 돌려주게 됐어요.

 

거기서는 문제가 끝났는데, 이 스님이 절에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한테 나 그런 일 있었다 하고 얘기하니까 다른 스님들이 놀리는 거라. 이 스님이 수행력이 높았기 때문에.

“그 옷이 어떤 색깔 옷이던가요? 아니면 비싼 옷이던가요? 아니면 어떻게 생긴 옷이던가요?” 하고 물어봤어요. 쉽게 말하면 혹시 당신 그거 비싸고 좋은 옷이라서 주워가지고 온 거 아니냐? 하고 놀린 거라. 그런데 이 스님은 단지 그렇게 얘기합니다. “길가에 나뒹굴고 버려진 옷이라서 나는 주웠을 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다른 스님들은 뭘 하느냐면 먼저 판단부터 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길에 동전이 떨어져 있다, 그러면 10원짜리 같으면 안 주울 거라. 그런데 10,000원짜리 같으면 그걸 주워. 먼저 판단부터 한다는 거라. 이것을 누군가가 흘려버렸다, 버렸다고 해서 이게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주인이 없으면 주워가지고 경찰서에 주든지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렇게 주울 때는 10원짜리든 10,000원짜리든 동일하게 해야 되는데 판단부터 먼저 해버리니까 10원짜리는 안 줍고 10,000원짜리는 줍는 거라.

 

수행에서도 판단을 먼저 해버리면 수행은 진척이 안 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고 있다.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거는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그걸 먼저 판단을 먼저 해버리면 불러오는데 어떻게 불러오는지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꺼질 때는 어떻게 꺼지는지를 구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구별한다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구별한다는 겁니다. 이 옷이 주인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버린 건지 아닌지 구별해야 되는데, 그거 구별 안 하고 먼저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온다고 판단을 하고, 배가 꺼진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불러오고 꺼지고만 계속 하게 되는 거라.

 

집중력은 그런 판단만 있어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집중을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어떤 걸 집중이라고 해요? 하나의 대상에 계속적으로 마음을 두어가지고 그것들을 알아차려나가는 겁니다.

집중이 필요합니다. 집중이 없으면 그걸 구별할 수 있는 능력들이 안 생겨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집중이 바른 상태에서 집중이 될 때도 있고 바르지 못한 상태에서 집중이 될 때도 있다는 겁니다. 맛있는 거 보면 막 집중해서 먹습니다. 게임하는 것을 보면 그거에 집중해서 게임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수행에서는 아무 이익이 없는 것들입니다.

선하지 않는 마음들이 일어났을 때 하는 집중들은 그것은 수행에서는 오히려 더 방해요소가 될 뿐입니다. 수행에서 뭔가 기쁨이 막 일어났다, 마음이 좋아서 막 하면 그걸 더 집중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면 그 집중하는 것으로 인해서 사마디는 깨져버립니다.

 

그런데 하기 싫은 것들이 있습니다. 대상이 재미도 없고, 하기도 싫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마 배를 관찰하는 것이 꼭 그와 같을 겁니다.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집중할 때 하는 것들은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바른 집중으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면은 싫어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싫어하는 마음이 우선시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럼 대상도 바르게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쉽게 얘기하면 좋고 싫은 마음을 떠나야만이 바른 집중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좋고 싫은 마음을 떠나는 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훈련들을 여러분들은 처음에는 조금 해나가야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배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다. 아니면 코끝을 관찰하고 있다. 그런데 불러오고 꺼지고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데, 자꾸 마음이 다른 데로 달아나고 있다, 왜 달아나고 있는가? 싫은 마음이 일어나서 달아나는 경우도 있을 거고, 아니면 내가 뭔가 좋아하는 것들이 소리라든지 뭔가 생각하는 것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마음이 끄달려 들어갑니다.

방해요소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훈련들을 해나가야 됩니다.

 

만약에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데,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계속적으로 집중하지 못하면, 뭐가 자기 자신을 그걸 방해를 하고 있는가를 판단해보라는 거라.

자꾸 소리에 끄달려 들어간다, 그럼 처음에 집중훈련 할 때는 귀 막고 해! 귀마개를 하든지. 눈을 뜨고 하면 뭔가 자꾸 보인다, 그러면 눈을 감고 하라는 거라.

생각이 자꾸 일어난다, 그러면 '망상' '망상' 해가지고 알아차리는 걸 자꾸 해가지고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구조를 만들든지, 아니면 생각이 일어나는 데는 뭔가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나 여러 가지 계획들이 있고 또 걱정들이 많다, 그거 다 해놔놓고 하라는 거라.

 

집중을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은 그걸 수행에서 "뺄셈의 훈련"이라고 그럽니다. 하나씩 하나씩 빼나가보라는 거라.

평상시에도 그것들이 부족하고 그것들이 과하다 싶으면 그것들을 안 하는 방향으로 자꾸 만들어라는 거라. 그래서 빼는 훈련들을 어느 정도 자꾸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빼는 훈련들이 어느 정도 되고 나면 수행에서 집중하기는 어느 정도 좀 수월해집니다.

 

그런데 집중하더라도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은 바른 집중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냥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보다는 대상이 변하는 것들을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걸 구별하는 것들입니다.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구별할려고 자꾸 하고,

또 들이쉬는 숨에서 하나로써 들이쉬어지는 것이 아니고 변하고 있다는 것으로써 구별할 수 있도록 하고,

그래서 그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에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더라도 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집중을 하는 것들을 할 것 같으면,

마음은 적어도 선하지 않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해나가는 것이 참 좋기는 한데,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이 원활하게 잘 되지를 못합니다. 그럴 때는 집중하는 것을 딱 멈춰야 됩니다.

 

그래서 집중하기 위해서 "뺄셈의 훈련" 말고 또 두 번째로 또 신경써야 되는 것들은 뭐냐면 "집중이 안 될 때 어디에다 대상을 둘 것이냐?" 하는 거라.

하나의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는데 자꾸 싫은 마음이나 아니면 그것에 대해서 욕심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즉시 중단하고 마음의 상태를 봐야 됩니다.

마음이 뭔가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뭔가를 밀쳐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걸 보고 그러한 마음이 없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가 됐을 때 그때야만이 집중이 바른 집중이 되어나갑니다. 그래야만이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구별할 수가 있고, 들이쉬는 숨에도 여러 가지가 변하는 것들을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집중을 이렇게 해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대상에 대해서 먼저 판단을 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대상을 먼저 구별하는 훈련들부터 먼저 자꾸 해나가야 됩니다.

구별하고 나서 판단을 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판단부터 먼저 해버릴 것 같으면 항상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견해가, 그리고 과거로부터 익혀온 습관들이 먼저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들을 딱 방해를 해버리게 됩니다.

 

자! 그런데 그 두 가지를 통해서 어느 정도 집중하는 훈련들이 쭉 되어나갔다고 해봅시다. 그럼 계속 그렇게 대상을 집중하면 됩니까?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대상을 끊임없이 집중하고 있다. 집중을 하고 있으면 당연히 일어나는 것은 그다음에는 기쁨들이 일어나집니다. 마음이 좋아하는 것들이 일어나집니다.

그럼 다시 또 마음을 고요한 상태로서 만들어야 됩니다. 만들고 나서 집중하는 대상에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나는 기쁨의 현상이나 좋아하는 것들에 또 끄달려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또는 집중하는 것이 어느 정도 잘 되어가지고 선정에 들었다. 1선정 2선정 3선정에 들었다, 그럼 그 상태에 그대로 그냥 머물게 됩니다. 물론 수행에서 그것들을 끊임없이 훈련 해야 됩니다. 하나의 선정을 끊임없이 훈련해서 빠져나오는 상태를 알아야만이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빠져나오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딱 떨어질 때, 그때 그 선정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됩니다. '아, 이것도 완전한 것이 아니다' 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됩니다.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해서 마음은 청정하고 깨끗하게 돼있는 상태에서 그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는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그 선정에 계속 그대로 머물고 있다가 또 일상적으로 또 돌아오게 된다는 거라.

 

수행이 이렇게 잘 될 때도 집중만으로써만 끝낸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수행의 목적이 이러한 집중의 상태에서 사마디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집중에 얽매일 거 같으면 대상으로부터 빠져나오기도 힘들 뿐 아니라 그 대상에 올바르게 집중하는 것들도 선하지 않는 마음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잘하지 못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아, 집중이 목적이 아니다' 하는 생각을 반드시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데 두 가지에만 신경을 쓰면 됩니다.

내가 지금 해야 될 것은 "집중하는 힘"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알아차리는 힘과 알아차리는 힘을 끊임없이 해나갈 수 있는 "노력의 힘"만 있으면 된다 하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집중하고 그것들로 인해서 삼매를 일으키는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알아차리는 것과 그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을려고 하는 노력만 있으면 모든 것들은 해결된다 하는 마음을 항상 일으켜야 됩니다.

 

물론 노력의 힘이 지나칠 것 같으면 고요함으로 빠지는 것들이 적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는 힘은 반드시 생겨납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고요함이라고 하는 것은 집중하는 것으로 인해서 어느 정도 사마디가 형성되고 나야만이, 그것이 사마디가 찰나적인 것이든 깊은 것이든 간에 사마디가 어느 정도 형성되야만이 그다음에는 고요함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고요함만 너무 신경쓰다 보면 노력하는 힘들은 항상 떨어지게 됩니다. 고요함을 신경쓰다 보니까 자꾸 대상에 대해서 집중해서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 것들만 자꾸 찾을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순서가 바뀌어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그러한 노력이 있고 사띠가 있는 것들로 인해서 집중하는 힘들이 생겨나는 거고, 그 집중이 바른 집중이 되는 것을 자꾸 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인해서 바른 집중이 돼나갈 거 같으면 당연히 사마디가 형성되고, 그 사마디로 인해서 고요함들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해서 구별하는 것들을 반드시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불러오는 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고 구별할 수 있어야 되고, 배가 꺼질 때 꺼지는 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고 분명히 알아야 되는 거고.

보이는 것이 있을 때 보이는 것은 물질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보인다고 하는 정신적인 현상이 있다고 알아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들도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그다음에는 알아야 됩니다. 물질적인 대상에 가 있는 건지, 아니면 이 눈에 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걸 인식하는 마음에 가 있는 건지, 마음이 세 종류 중에 어디에 가 있는지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했을 때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분명하게 구별해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고 또 그것들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들이 자꾸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바른 집중도 되지 못하고 마음도 고요하게 되지 못하는 현상들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