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스승에 대한 예의 (20170309)

담마마-마까 2022. 4. 2. 09:00

https://youtu.be/mMozkjaFkWU

* 스승에 대한 예의 (20170309)

 

부처님이 지금 여기 옆에 있었으면 참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따라야 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주는 스승들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간혹 대승불교이든 아니면 테라와다 불교이든 스승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그런 것들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극히 조심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그래도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는 상수제자로 알려진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어떠한 경우도 불필요한 욕구들, 그다음에 불필요한 성냄들, 이러한 것들은 아예 익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시험해볼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사리뿟따 존자가 어떠한 조건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가 하는 것을 시험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탁발을 하러 가는 사리뿟따 존자를 누군가가 머리를 심하게 때립니다. 그럼 당연히 '누가 때렸나' 하면서 돌아보게 되는데, 사리뿟따 존자는 전혀 기색도 없이 그냥 가거든. 이때 그 사람이 덜컥 겁이 납니다. '아, 저렇게 화를 내지 않는 분은 성자인 것은 틀림없는데 성자에게 내가 해코지를 한 것은 나에겐 큰 화가 돌아온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도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많았습니다. 성자뿐 아니라 일반적인 수행자들에게도 화를 일으키게끔 하면은 그것은 자기에게 돌아온다 하는 관념들이 많았습니다.

사리뿟따 존자에게 얘기해서 “스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걱정하지 마라. 나는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누가 때렸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이지 누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사실은 마음에 불필요한 욕구를 일으키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뭔가를 가질려고 했을 때, 그리고 또 지나치게 내가 마음에 성냄이 있을 때, 그다음 또 하나가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혔을 때 그래서 그걸 확인해 볼려고 할 때, 또 어떨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에 딱 매달려가지고 그것들을 시험해 보거나 아니면 그것을 증명받을려고 할 때, 이럴 때는 불필요한 욕구들이 일어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화를 일으키지 않을까? 그것은 좋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시험해 볼려고 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이 마음에서 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남을, 누군가를 때릴 수가 없습니다.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성을 낼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때린다는 악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은 성내는 것도 악한 마음을 가지는 것들은 자기 자신이 행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다시 그 결과는 돌아오게끔 돼있는 겁니다. 정해진 이치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 거 같으면 이러한 필요하지 않는 것들은 일으키지 않게끔 되는데, 보통은 사람들이 감정에 좌우되기 때문에 그 감정에 따라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행하게끔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행한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이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 결과에 대한 것들만 자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온 것이 그 결과만 볼 거 같으면 '내가 조금 더 선한 인연들을 쌓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왔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아니면 '과거생에부터 공덕들을 많이 지었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것이 꼭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가까운 원인들을 찾아야 됩니다.

'아, 내가 지금 수행할려는 마음들이 일어났구나' 또는 '내가 좀 더 바른 법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아, 그래서 그런 선한 마음들이 일어났을 때 그때 내가 좋은 법을 찾아 듣고 수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생각들을 자꾸 일으켜야 됩니다.

가까운데서 원인들을 자꾸 찾을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먼데서 찾아서 자꾸 그것을 인과법으로써만 대비시킬려고 할 것 같으면 모든 것들은 그냥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것에 갇혀버릴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도 어떻게 보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어리석은 것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사리뿟따 존자 같은 경우에는 걸어가면서 뭔가가 누군가가 때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단지 알아차릴 뿐입니다.

맛을 보면 맛을 볼 때 그냥 그것을 알아차릴 경우에는 그것을 그냥 먹는 것만 알게 됩니다. 보는 것들을 보게 될 때 그냥 그것을 보게만 됐을 때, 단지 그것을 보는 것으로써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해서 맛있다, 맛이 없다, 또 좋다, 싫다 하는 그런 감정들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면은 당연히 육근이라고 하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마음은 오염되게끔 됩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형상과 눈에 보여지는 형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과 그러한 것들은 각각 다 분리돼 있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은 동요하지를 않습니다.

 

적어도 마음이 사라진 육체라고 하는 것은 아픔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아프다고 느끼지 않으면 아무리 매를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아프다고 느끼지를 않습니다. 육체가 아프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아픔을 느낄 수가 없는 겁니다. 단지 나는 뭔가가 부딪쳤다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그것이 지금 내가 탁발을 하고 나아가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나둬버리고 그냥 계속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 내가 할 것은 걸어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왼발 오른발 알아차리면서 걸어가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러한 사실을 스님들이 알고 나서, 아, 이렇게 하다가는 사람들이 성자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출가한 스님들을 해코지를 한다든지 아니면 비난을 한다든지 욕을 한다든지 이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견들이 분분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스승들에 대해서 얼마 정도의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지는 것은 있을지라도 또 한편으로는 또 다른 것이 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그냥 단지 그러한 스승들을 존경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부처님을 아무리 보고 있고 부처님이 행하는 것들을 따라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부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실천해서 확인하고 한 것들을 나도 마찬가지로 실천해서 확인 해야만이 나도 부처와 같은 길을 따라갈 수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우러러 보고 오늘 같이 탁발이 있을 때 공양물 올린다고 해가지고 내가 똑같은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스승은 단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따라가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고, 가까이에 있어서 자주 물어보고 해서 내가 의문나는 것들을 해소해주어야 할 대상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들을 찾을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부정하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자신하고 견해가 다른 것 또는 자신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생각들, 이런 것들을 자꾸 부정할려고 할 것 같으면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도 부처님이든 그 제자들은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다른 견해라고 해서 그것을 부정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테라와다를 한다고 해서 대승불교를 부정한다든지, 또는 대승불교에서 하는 수행법이 수승하다 해서 위빳사나 수행법이 하등의 수행법이라든지 이렇게 다른 사람이 하는 일들이나 견해에 대해서 부정하는 일은 하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부처님은 부처님께 출가할려고 또 부처님의 제자가 될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한번 더 신중히 생각해봐라. 네가 모시는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할 일들을 다 하라. 그래서 네가 법에 대한 확신이 들었을 때, 그때는 내가 따라야 되는 길이 이것뿐이다 할 때는 단지 너는 그 길을 따라가는 것뿐이다. 나의 길을 따라야 된다고 확신이 들면, 그냥 너의 길을 걸으면 되는 것이지, 네가 해야 할 일과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 부정하는 일은 네가 할 일이 아니다" 하고 분명하게 선언을 하셨습니다.

 

가끔씩 수행문답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이 보입니다.

자세하게 수행에서 일어난 것들을 얘기를 해야 바르게 수행문답을 할 수 있는데, 앞뒤를 다 잘라버리고 자신이 마음에 들었던 신기한 경험 하나만 탁 얘기를 합니다. 그럼 당연히 스님들은 “그러한 것들은 하나의 대상으로써 보고 그냥 놓아버리고 그냥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배를 관찰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이 자세하게 설명을 하지 않았다고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나는 왜 이렇게 신기한 경험을 했는데 스승님은 그것을 그렇게 크게 높이 사주지 않는가' 하고 마음을 가지고 합니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실제로 그러한 것들이 크게 높이 살만한 일이 못된다는 건 본인이 아는데, 지금 현재는 그게 마음에 씁쓸한 거라. 그것도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에 매달려 있는 것들입니다.

자신과 반대되는 것들에 대해서 부정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에는 끊임없이 성냄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자꾸 밀어낼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얘깁니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자꾸 부정할려고 하면 맨 처음 해를 입는 것이 자신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마음은 계속적으로 부정적인 것들로서 채워지게끔 됩니다. 그리고 하나가 해결됐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것들이 계속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자신이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경우든지 항상 주의깊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해야 됩니다.

말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또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해야 될 때와 장소와 여러 가지 상황들을 조심스럽게 살펴서 말을 해야 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하지 않고 "진리이기 때문에 나는 말을 한다." 아니면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바른 것이기 때문에 너는 나의 말을 들어야 된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끔 되면은 항상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말을 할 때는 말을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자신이 하는 것들을, 자신이 하는 행위들을 알지 못하고 했을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자신에게도 그 말을 했을 때 '아, 내가 그 말을 참 잘했구나' 그래서 자신이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져야 되는 것이고, 또 그 말을 듣는 사람도 '아, 저 말을 해줘서 나는 참 고맙다' 해서 그 사람도 행복해져야 되는 것이 말을 하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말을 알아차리지 않고 때와 장소와 그런 것들을 조심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러한 조건들을 자꾸 벗어나게끔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말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말을 할 때는 항상 알아차림과 조심성을 갖추고 말을 할 수 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런 조건들을 갖췄을 때 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입장들과 더불어서 그것이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는 방향으로 하게끔 됩니다.

 

그것이 안 될 때는 이 하나만 기억하면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말을 할 때 자애를 지니고 말을 하고 있는가? 내가 행복하고 다른 사람이 행복하고 내가 괴로움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이 괴로움을 받지 않는 마음들을 가지고 말을 하고 있는가?

자애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 말하는 습관들은 그것은 똑 방아쇠를 당기면 즉시 총알이 나가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 총알은 유용하게도 쓰이겠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적어도 내가 그것을 목표점을 분명하게 알고 당기는 줄을 알고 정확한 겨냥을 하고 말을 할 줄 알게 되면은 그것은 유용하게 쓰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말을 안 하고 살 수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랬을 때 사람과 교재하는 것들은 행복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여러분들이 지금 해야 될 것은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뿐이지, 그것들에 대해서 소유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모든 것들은 순간순간 변하게 돼있습니다. 물질적인 것도 변하게 돼있고 정신적인 것도 그것보다도 더 빠르게 변하게 돼있습니다. 한순간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면은 그것들에 대해서 자꾸 붙잡히고 매달리게 됩니다. 배가 불러오는 것들도 지금 현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계속적으로 배가 불러오는 것이 길어지고, 붙잡기 때문에 길어지게 되는 거고, 생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매달리게 되면 생각하는 것이 계속적으로 꼬리를 치게 됩니다.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것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신이 붙잡고 매달리고 해서 그대로 있어 줄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가끔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스님도 인제 좀 더 좋은 조건의 수행처를 만들어야 안 됩니까?”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조건이 되면 그런 것들을 만들면 좋겠죠. 그런데 그것에 매달리다 보면은 다른 것들을 놓쳐버립니다. 지금 내가 해야 될 것들을 놓쳐버린다는 겁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법을 전하고 수행을 지도하고 또 수행하게끔 해서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되는 것들을 자꾸 놓쳐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러한 집들이 나에게는 짐이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선원이 크게 지어지면 거기에 맞게끔 또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집니다. 법을 청하는 곳이 있으면 법을 전하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할 일들은 점점 더 많아집니다. 스님의 몸으로 지탱할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서게 될 때가 틀림없이 생겨나는 거라.

 

여러분들이 소유하고 있는 집, 여러분들의 가족이라고 하는 것도 그것이 집착의 대상이 돼버리면은 항상 문제가 생겨나버립니다. 그것은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용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나의 가까이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해야 될 일들을 하는 의무들이 생겨나는 것뿐입니다.

법을 청하는 곳이 있으면 법을 설해야 되는 것이 스님들의 의무이듯이, 여러분들은 가족이라는 것이 있으면 가족들에게 좀 더 나은 조건 좀 더 행복하게 되는 것들을 해야 될 의무들은 틀림없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것들은 의무인 것이지 그것들이 속박의 대상이 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수행의 대상도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순간에 머물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에 머물게 되고 그것들을 속박하고 집착하게끔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어떠한 대상이든 항상 변하고 있고 그것들이 변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들입니다. 그렇게 변하는 것들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들이 보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만족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해서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그 대상들에 대해서 그것이 설혹 숨이든 아니면 나의 몸이든 아니면 나의 마음이든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든 어떠한 것이든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떨어져 나가야 됩니다.

수행이 무르익으면 당연히 그렇게 돼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 여러분들의 것이라고 하는 것들, 가족들이라고 하는 것은 소유의 개념이나 집착의 개념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들이고 화합하고 해야 될 대상일 뿐입니다.

집이 오히려 짐이 되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어떠한 것들이든 지금의 순간으로 자꾸 한정할려고 해야 됩니다.

지금의 순간으로 보면은 마음에서는 분노나 욕구가 일어나질 않습니다.

지금의 순간에 한순간에 분노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분명하게 지금 순간에 알아차리면 그 분노는 사라져버립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더이상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나질 않습니다. 집착할 대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마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은 그 마음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집착할 대상이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마만큼 지금의 순간에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누군가를 비난할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비난하는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도 지금 순간에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그 비난할려고 하는 마음도 일순간에 사라져버립니다. 누군가를 해코지 할려는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을 지금 순간에 알아차리면 그 마음은 당연히 사라져버립니다.

그것이 만약 사라지지 않으면 여러분은 지금 순간에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만이 그다음 것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이루어지는 구조들을 알 수가 있는 거고, 그리고 그 구조들로 인해서 원인·결과들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는 거고, 원인·결과들을 알 수 있어야만이 지혜롭게 무상·고·무아로써 살펴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 나아갈 때 그 사람들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행위들을 하지를 않게 됩니다. 이것이 나에게 괴로움을 가져온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을 행하지를 않습니다.

 

왜 내가 스스로에게 괴로움을 받을 짓을 하느냐는 거라. 내가 성을 냈을 경우에는 내가 괴롭습니다. 성을 냈을 때 가슴의 느낌을 한번 보십시요. 얼마나 따갑고 아픈지. 왜 괴로움을 스스로 만드느냐는 거라.

남을 비난할 때 그 마음은 선한 마음으로 있든가? 자기 자신을 자랑할 때 그 마음은 선한 마음으로 있는가? 자기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들을 만들고 있다는 거라. 괴로움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면은 그 사람들은 더 이상 그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든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적대시한다든지, 또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살아가야 되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경우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 내가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자꾸 하도록 해야 되는 것이고, 지금 내가 하는 것들이 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서 그 길을 자꾸 갈려고 해야 되지, 주변적인 것들을 자꾸 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변적인 것을 할려고 하다 보면 자꾸 다른 것들에 의지하게끔 됩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들에 의지해서 그것을 해결 할려고 합니다. 의지할 대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바른 방향으로 해탈의 길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해탈의 방향으로 정해질 때는 삼보에 의지를 해야 되겠지만, 그 삼보도 해탈의 방향이 정해져서 그것들에 대해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면은, 단지 그 삼보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될 것이지, 그것들이 의지할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의지할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오히려 삼보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항상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악한 일들을 할려고 하지 말고 선한 일들을 힘써 행하라. 그래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들 불제자들이 따라야 될 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마음이 청정해지고 해탈로 나아가는 길로 자꾸 나아가야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삶은 여러분들이 태어났으면 그거에 따른 해야 할 일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 목표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금 현재 순간에 머물고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하면서, 성자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든 비난하고 미워하고 경시하고 할려고도 하지 말고, 또 그것을 존경의 대상으로만 볼려고 하지도 말고, 자꾸 부대껴서 그것으로부터 내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대상으로 삼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수행자 질문 : 삐띠에 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데요, 좌선 때는 별로 그런 일이 없고 특히 경행을 할 때 아주 간혹 한번씩 이걸 삐띠라 해야 될른지 그건 모르겠는데요, 몸에서 그러한 기쁨이 충만되게 일어나는 것만, 삐띠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줄 아는데 몸에서 일어나는 것 같아서, 그걸 어떻게 보면 되는지요?

스님 답변 : 몸과 마음은 서로 영향을 받습니다. 마음이 기쁨을 일으키면 몸도 그에 따라서 영향을 받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몸도 기쁨을 느끼게끔 되기 때문에 몸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한 현상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수행자 질문 : 그래도 마음은 고요한 것 같거든요.

스님 답변 :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돼있으면 몸도 더불어서 고요해지게 돼있습니다. 마음이 기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도 기쁨을 누리게끔 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이치입니다. 단지 그러한 몸의 기쁨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서 마음을 봤을 때는 마음이 고요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의 현상이 몸의 현상이든 마음의 현상이든 일어났을 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그 현상도 분명히 사라지는 것을 봤을 때 마음이 고요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몸도 고요해지게 됩니다. 그것은 그렇게 나아가는 순서이기 때문에 몸 스스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마음이 있어야만이 몸이 기쁨을 누릴 수가 있다는 걸 분명하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