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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듣고 감동하는 것은 불선심소인가? (20170413)

담마마-마까 2022. 4. 13. 09:00

https://youtu.be/JFRvxnI0Wug

* 법을 듣고 감동하는 것은 불선심소인가? (20170413)

 

오늘은 「감동하는 일도 불선심소인가?」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법을 듣고 감동하는 것들이 많죠? 오늘 얘기하는 것은 세속적으로 맛있는 거 먹고 감동하고 뭐 벗꽃 보고 감동하고 하는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법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건 불선심소입니까? 법을 듣고 감동하는 것들은?

(수행자 대답 : 그건 선심소가 되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기뻐하는 것이라서...)

기뻐하는 것과 감동하는 것은 좀 차이가 나겠죠? 감동하는 것은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기쁨하고 감동하는 것은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왜 감동을 할까? 언젠가 몇년 전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와서 법문 듣고 수행하고를 잘 안 해가지고, 법문을 했는데 녹음을 안 한 적이 있습니다. 한 몇년간 그런 적이 있죠? 녹음을 해도 인터넷에 안 올리고 그렇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은 와가지고 그래도 수행이라도 할까 싶었는데, 그리해도 안 오고 저리해도 안 오고 마찬가지이긴 하대. 나중에 보니까. 지금도 사람들이 유튜브를 통해가지고 법을 많이 듣는다고 그럽니다. 그것들로 인해서 감동을 하긴 하는데, 그리해도 우리 선원이나 어디 가서 거기서 수행하고 있다는 소리는 그렇게 들리지를 않고 있습니다.

 

선심소가 일어났으면 틀림없이 뭔가 수행을 한다든지, 그것이라도 안되면 그 선원 유지하게 보시라도 할 건데, 전혀 그런 것들은 별로 안 보인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 다른 것도 아니고 감각적인 것들로 인해서 감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감동을 하는 건데, 왜 선심소가 일어나지 않는 걸까?

(수행자 대답 : 일어나는 사람들은 일어난다 아입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은 왜 일어날까 그럼?

(수행자 대답 : 그것도 전혀 안 일어나는 게 아니고 일어나는 사람에 따라서 선심소가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안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하겠죠. 다하는 게 아니고.)

 

그렇죠. 일어나는 사람들은 그렇게 법을 듣고 감동 받은 것들에 대해서 두 가지가 조건이 갖춰진 겁니다.

쉽게 말하면 이게 도의 길로 해탈로 가는데 유익하다고 판단을 하는 경우 그것은 감동하고는 또 다른 겁니다. 감동으로 인해서 그다음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앗타 히따(attha, hita)' 라고 해가지고 "이것들이 참으로 유익하다" 하고 판단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법을 다시 찬찬히 되새겨봄으로 인해서 그것들에 대한 이익들을 알고,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갈려고 실천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렇게 되게 됩니다.

 

그다음에 법을 듣고 감동하는 것이 선심소에 해당이 될려면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어지럽혀지지는 않아야 된다는 겁니다.

가끔씩 옛날 일들을 추억을 해보면 법문을 중간급 스님들이 법문을 해도 일반 재가자들은 되게 좋아합니다. 되게 잘했다고 “사두! 사두!” 하는데, 큰스님들은 그리해도 그냥 무덤덤하고 아주 법을 잘 설하는 분이 법을 설해도 그래도 덤덤하고, 그러니까 그 법을 설하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분들은. 마음은 항상 고요한 상태에서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자신이 취할 것들을 취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지럽히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법을 듣는 감동은 선심소에 해당이 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빠하나(pahāna)'라고 해가지고 효율성 부분입니다. 이것을 들음으로 인해서 나에게 얼마만큼 효율이 있느냐?

부처님이 법을 설할 때도 그랬죠! 법을 설해가지고 깨달음으로 이르게 하기 위해서 장소에 따라서 법을 설하는 것을 달리 했습니다. 또는 한사람을 위해서 법을 설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멀리까지 찾아가서 법을 설하기도 합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효율성에 해당이 됩니다.

이 법을 이렇게 설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법을 이해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들도 중요한 부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런 효율성이 조금 더 극대화되는 것으로서 법을 들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선심소에 해당이 됩니다.

아, 내가 지금 부족한 것이 이런 마음에 대한 분류들을 몰랐기 때문에 조금 더 수행에 대한 진척이 없었다 할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한 분류들을 들어서 감동을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는 효율성을 얻을 수가 있는 겁니다. 자신이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기 위해서 보충적인 역할로써 그 법을 듣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적어도 그런 세 가지 조건들을 갖추었을 때 법을 듣는 것들로 감동하는 것들은 그 뒤에 선심소가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더라도 어떠한 경우든지 감동하는 것은 선심소에 해당이 되지는 않습니다.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 법을 들었을 경우에는 감동을 안 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법을 들었을 경우에는 감동을 하게 됩니다.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거죠.

 

식물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유전자 조작하고 어떻게 해가지고 하면은 다른 색깔의 장미꽃이 피어진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일에 몰두할 뿐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감동을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경우에는 다른 색깔의 장미꽃이 피었으면 그냥 감동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 장미꽃에 대해서는 그것을 보고 감동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그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감동은 어떤 경우든지 주관적인 것이지 그게 보편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법을 설할 때 사람들이 감동하느냐? 기뻐하느냐? 그것은 법을 설하는 목적에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을 얼마만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가? 이 사람을 얼마만큼 빨리 해탈에 도달하게 만들어주느냐? 이 사람을 얼마나 좀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느냐? 그게 법을 설하는 목적이지 이 법을 설함으로 해서 저 사람이 감동을 받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서 감동을 받는 것으로 인해서 “아, 참 부처님 참 훌륭하다!” 하고 칭찬받기를 바라는 것은 전혀 없다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감동 받는 일들은 많이 생겨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중에 그런 분이 만약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혹시 내가 법을 듣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기 자신을 한번 돌아봐야 됩니다.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감동하는 것들이 자주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그때 감동이 일어났을 때의 자신의 마음을 한번 돌아보십시요.

 

··치가 그 속에 있는지, 없는지? 탐·진·치라는 것은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쉽게 자신에게 달라붙습니다. 그런데 탐·진·치가 아닌 것들은 쉽게 자신에게 달라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감동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탐·진·치가 조금 많이 일어나는 성향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법을 듣는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감동하는 것들이 잦긴 한데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다른 실천하는 부분으로 넘어가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어쩌면은 내가 스스로 법을 듣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을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반성을 해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도 예전에 큰스님들이 얘기했던 말 중에 "집착하는 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일어난다" 하는 얘기를 자꾸 되새기는 때가 있었습니다.

뭔가에 대해서 집착하면은 틀림없이 괴로움들이 일어납니다. 집착이 없으면 괴로움이 안 일어날 건데, 집착하는 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그것을 집착이 일어났다고 판단이 될 때 일어나는 가슴의 통증들을 보면 느낌들을 보면 괴로운 것들이 훨씬 많다는 거라. 따갑고 아프고 쓰리고 하는 것들이.

이거는 스스로 내가 체험하는 것들이지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것들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들을, 혹시라도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만들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들을 돌아볼 수가 있어야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실천하는 부분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법에 대한 집착을 하는 것들입니다.

아니면 법에 대해서 구분하고 판단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 선원에서는 삼귀의도 빨리어로 하고, 또 삼보예찬도 빨리어로 합니다. 인제는 익숙해져서 누구든지 "아라항 삼마삼붓도 바가와" 하면서 빨리어로 하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들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문제는 좀 심각해져버립니다.

'아라항'이라고 하면서 '아라한이라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냥 하나의 '게송에 대한 집착'입니다.

 

"진리를 보고 알지 못하는 것들로 인한 것들은 도로부터 벗어난다" 하고 얘기합니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당연히 그렇게 되니까 자기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지게 되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것들에 그냥 "맹목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들은 바로 계금취와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계금취에 대한 설명들을 할 때 그렇게 얘기합니다. 의식과 계율과 형식들에 대한 집착!

혹시 여러분들이 법을 듣는 것들이 그런데에 대한 집착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문제는 조금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법은 여러분들이 그걸 듣고 그것들을 이해하도록 해야 되는 겁니다.

법을 듣기만 하고 그것을 실천해서 그 법이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은 계속적으로 그 법에 얽매여버리게 됩니다. 법이라는 굴레는 생각보다도 여러분들을 강하게 얽어매게 됩니다.

가끔은 법을 잘 설하는 분이든 잘 설하지 못하는 분이든 그것들에 대해서 구분하지 않고 들을 필요도 있습니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구분하고 분별하고 하는 것들은 점점 더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점점 더 그런 구분하고 분별하는 것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법에 대한 집착입니다.

법을 잘 설하는 것들은 감동을 받고, 법을 설하지 못하면 감동을 받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불선심소를 자신도 모르게 쌓아가는 것들입니다. 불선심소가 강하게 일어나는 것들도 있지만, 이렇게 작고 미세하지만 자기 자신은 은연중에 불선심소를 만드는 부분들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러한 것들은 조심을 해야 되는 부분이다 하는 뜻입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법을 들었으면 먼저 판단을 해보십시요.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듣기 좋은 법이든 듣기 싫은 법이든, 아니면 잘 설한 법이든 잘 설하지 않는 법이든 그것과 관계없이 법을 듣는 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겁니다.

그게 첫 번째 목적입니다.

과연 여러분들이 마음이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맑고 깨끗하게 돼나가고 있는가? 만약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법을 듣는 감동,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불선심소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자기 자신의 마음을 향상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가?

법은 여러분들을 고(苦)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겁니다. 얽매임으로부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만들어주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의문 나는 것들로부터 풀어주기 위한 것들입니다. 수행에서의 의문 나는 것들, 여러 가지 법에 대한 의문 나는 것들을 이런 것들로부터 풀어주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풀리면 마음은 한 단계 뛰어넘어가게 됩니다.

수행에서 한 단계 뛰어넘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을 익히고 듣고 하는 것에도 단계 단계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경전을 공부할 때도 법구경부터 먼저 공부하고 부처님 일대기 먼저 공부하고 이런 식으로 순서에 따라서 쭉 공부해나가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점점 더 향상된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이야만이 법을 들을 때의 바른 방법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그 법을 들은 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어, 감동하는 것은 불선심소라고 그러더라. 그러면 감동하는 것들이 왜 불선심소가 될까?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증명을 해야 됩니다. 스님의 방법대로 감동했을 때 가슴의 느낌들을 보면서 '아, 이게 기쁨의 느낌과는 틀리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아, 이것은 기쁨이 아니구나'. '내 주관적인 판단으로 인해서 좋고 싫은 것들에 따라서 끄달려 들어간 것이구나' 하고 분명하게 자신이 알게 됩니다. 그걸 스스로 입증할 줄 알아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법을 들을 때는 점점 더 입증하고 증명해나가는 것들이 되어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 법은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경우든지 이익을 주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익을 주는 것은 훌륭하게 법을 설하는 것이든, 아니면 보잘것없이 아니면 짧게 법을 설하는 것이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습니다. 짧은 거라 하더라도 이익을 얻을려면 한정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아무리 길고 훌륭한 법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 내용이 없으면 이익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설한 법에서 어긋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법은 여러분들에게 반드시 이익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여러분들이 이익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적어도 이러한 것들을 해나갈 때 법을 듣는 감동들은 기쁨으로 바뀌어서 그러한 것들이 불선심소가 되지 않게끔 만들어주게끔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 욕구에 인해서 일어나는 감동 이것들로써 법을 듣고 끝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계속 쳇바퀴 돌듯이 법을 듣는 데만 계속 집중하게 됩니다. 작년에 법을 들은 것들이나 지금 법을 들을 때의 마음이나 그것이 다른 것들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 법을 듣는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 법은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에게 지혜가 일어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지혜는 어떠한 경우든지 침착하지 않으면은 지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행을 할 때도 침착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구분하게 되고, 그것들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무상한 것들을 발견하고 그때의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고요하고 침착해져 있습니다. 지혜의 어디를 보더라도 흥분되고 그리고 감정에 휩싸여 있는 상태에서는 지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감동만 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지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법은 여러분들에게 지혜를 일으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들이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디테 담마 아낫따 하" 그렇게 얘기합니다. 다른 것으로부터 감동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감동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에게 감동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 감동은 여러분들이 법을 진짜 체험했을 때 일으키는 감동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항상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법을 듣는데 익숙해지도록 해야 되는 것이고, 또 수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법을 공부하고 법을 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혹시 불선심소가 은연중에 자리잡게 만드는 것들이라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경계하고 넘어가야 될 부분이다 하는 얘기를 끝으로 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질의 응답 >

Q 수행자 질문 : 스님, 법을 듣는데 있어서 스님들에 따라서 천차만별인데, 모든 법문을 그대로 분별심 없이 그냥 들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해나가는 가운데서도, 간혹 보면 법에 어긋나게 설하는 경우들도 있거든요.

스님 답변 : 그거는 듣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Q 수행자 질문 : 그럼 그 장소를 빠져나가야 됩니까?

스님 답변 : 단지 듣기만 하도록 하는 훈련이 돼있을 거 같으면 '들림' '들림' 하고 듣기만 해서 수행하는 방향으로 전환을 시켜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상태가 아니고 '아, 저거는 부처님 법과 틀린 것이다!' 하는 것들로 인해서 마음에 성냄이나 이런 것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서, 그것들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그 법을 듣는 것도 안 될 뿐 아니라 그러한 불선심소들도 계속적으로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당연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와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그 둘 중에 하나는 적어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지금 스님이 얘기하는 보잘것없는 법이나 아니면 감동을 주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는 것들만 가지고 얘기할 때를 얘기하는 겁니다. 삿된 법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삿된 법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은 내가 그것으로부터 스스로 방어를 해내든지 아니면 그 자리로부터 벗어나든지!

번뇌가 일어났을 때 하는 방법과 똑 마찬가집니다. 번뇌를 다스릴 수 있을 거 같으면 번뇌를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고, 다스릴 수 없으면 그 번뇌의 원인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