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7 일상수행법문

게으름뱅이는 소와 같이 늙는다. (20170525)

담마마-마까 2022. 4. 24. 09:00

https://youtu.be/iWGu0ghVBMA

* 게으름뱅이는 소와 같이 늙는다. (20170525)

 

오늘은 「게으름뱅이는 소와 같이 늙는다」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정확한 구절은

배우는 것이 적은 사람은 소와 같이 늙는다.

고기는 증가하지만 지혜는 증가하지 않는다. 하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이 이 얘기를 한 것은 게으른 사람은 인간 취급을 안 했다는 얘기죠? 소 취급했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게으름 피우는 것은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좋은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게으름 안 피우고 사는 사람 있습니까?

 

보통은 본인들이 그것이 게으름인지 아닌지를 잘 모릅니다.

예를 들면 뭔가를 열심히 했다고 하면 사회에서는 참 잘했다 하고 얘기합니다.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그 일을 한 것들을 효율성을 잘 따집니다. 10시간에 할 수 있는걸 12시간에 했다 할 것 같으면 그건 게으름 피웠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사회에서는 아침에 출근했다가 퇴근하는 시간이 딱 정해져있습니다. 그 시간에 해야 할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대충하든 아니면 열심히 하든 하고 나면 자기 일과는 끝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부처님이 봤을 때는 게으름 피우고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들이 선한 건지, 악한 건지 구분을 못할 때 그럴 때도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누구든지 이것은 선한 것이고 이것은 악한 것이다 하는 것은 알고 있는데, 그것들을 그냥 생각 없이 행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누가 나이키 신발을 샀다, 그럼 자신도 그냥 나이키 신발을 삽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니면 누군가가 뭐를 했다, 그러면 본인도 그것을 그냥 하게 됩니다. 똑같은 입장이나 상황이 아닌데도 그것을 구별하고 생각하고 하는 부분 없이 그냥 일반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도 게으름 피우는 것들의 일종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물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들은 더더구나 게으름 피우고 있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봤을 때 게으름 피우지 않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게으름 피우지마라라고 부처님이 얘기했을 때는 그마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스님이 출가를 하고 나서 드는 생각이 뭐냐면, 가끔씩 그럽니다. '왜 내가 왜 출가했지?'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남들보다 좀 빠르게 해탈·열반에 이르고 싶어서 출가했다 하는 생각이 머리에 다시 들어오면 게으름 피우던 생각을 잊고 몸이 피곤하고 하더라도 다시 조금 더 마음을 가다듬기도 합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마음을 다잡아 주지 않으면 게으름 피우는 것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완전하게 아라한에 이르기 전에는 게으름 피우고자 하는 성질은 항상 있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아라한에 이르러서 해탈에 이르르기까지도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 되는 것이고, 해탈에 이르고 나서도 그다음에는 해탈한 사람이 나아갈 길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게으름 피우지 않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쉬어가면서 잠자가면서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그마만큼 불교에서는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들은 굉장히 터부시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본인이 가끔씩 마음속에서 게으름 피우는 것들이 일어나면은 이 게송을 자꾸 되뇌어 보시기 바랍니다.

배우는 것이 적은 사람은 소와 같이 늙는다.

고기는 증가하지만 지혜는 증가하지 않는다.

그걸 한마디로 줄이면 게으름뱅이는 소와 같이 늙는다.하는 뜻입니다. 게으름 피우면 소와 같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성장이나 아니면 지혜가 일어난다든지 하는 부분들은 전혀 없이 몸이 살찌고 또는 여러 가지 것들이 늘어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하고는 관계 없는 것들이고, 오히려 자신을 망치는 것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지혜가 성장할 수 있도록 자꾸 게으름 피우지 않는 방향으로 노력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빨리어 용어 중에 '삼마 와야마(sammā yāyāma)' 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삼마'는 올바르다는 뜻이죠. '와야마'는 정진한다,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 '올바르게 노력한다' 하는 건데, 그냥 일반적인 노력이 아니고 올바른 방향으로,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겁니다.

마음의 번뇌를 없애주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해탈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들입니다. 그 방향으로 노력을 해야만이 그것들이 바른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바른 노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는 뜻입니다.

 

선원에 모인 것도 조금 더 수행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계를 받은 것도 계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청정하게 되기 위해서 받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수행했으면 수행의 결과가 나와야 되는 것이고, 계를 받았으면 계를 반드시 지키는 노력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 계를 지켜서 지키는 동안에는 마음이 청정해지고 마음이 향상되어 나갑니다.

수행을 해서 결과가 있어야만이 더욱더 수행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고 노력들도 일어나고 그리고 수행에서 '아, 이게 뭔가' 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경전에서는 "불만이 뭔지를 이해해야만이, 그 불만의 이해로 인해서 마음은 성장해나간다" 하고 얘기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들을 알아차린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수행이 성장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들이 굉장히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아, 나는 불만족스럽다, 괴롭다'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할 수 있으면 마음은 성장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호흡하는 것들이 이렇게 빠르게 변해나갈까 하는 것들을 더욱 더 알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해탈을 향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만의 이해가 마음의 성장을 가져올 뿐 아니라 불만의 이해가 해탈에 이르게 한다" 하고 경전에서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살아가는 것들이 만족하고 살아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자기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들이 옳은 것들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자신을 자꾸 돌아보아야 됩니다. '아, 내가 지금 부족한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돌아보고 아, 내가 성냄이 많다 할 것 같으면 '아, 이 성냄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성냄이 일어날 때마다 자꾸 자신을 관찰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냄이 어디에서 일어나는 건지, 밖에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건지, 내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는 건지를 분명하게 이해할 거 같으면 성냄이 일어날 때 관찰의 포인트를 어디에 두어야 될지를 알게 됩니다.

 

밖의 대상에 두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데로 자꾸 돌리게끔 됩니다. 그래서 성냄이 일어나지 않게 될 때 인제는 성냄이 떨어졌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성냄이 점점 더 줄어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아, 내가 조금 더 성장했네'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겁니다.

자신에게 '아, 이것은 불선한 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그 나쁜 부분에 대해서 나쁜 부분이 일어나지 않게끔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선한 일들을 합니다. 선한 일을 할 때 선한 마음으로 기분 좋게 공양을 올릴 거 같으면 선한 행위들을 하게끔 됩니다.

또는 마음에 자애를 가지고 모든 이들에게 자비의 마음으로 말을 하고 행동하고 할 것 같으면 참 자신도 마음이 참 좋습니다. 깨끗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내가 참 마음이 편안해지고, 내가 어떤 것으로 인해서도 남을 도울려고 한다든지, 자애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하게 되면 더욱더 그것을 하게끔 됩니다.

 

자꾸 할려고 노력을 할 때 보통 사람들이 잊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됐다" 하고 얘기하는 것들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열 가지 바라밀을 행한 것은 그 바라밀이 완성될 때까지 행했다는 의미입니다.

"적당하게 해서 이 정도에서 끝내야 되겠다" 하고 끝내는 법이 없습니다. 이생에서 다하지 않으면 다음생에서 또 하고 그다음생에서 하면서 계속적으로 그 바라밀을 완성할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0가지 바라밀도 3가지로 나누어서 거친 것부터 해서 아주 미세한 것까지 3가지 분류로 나누기 때문에 30가지 바라밀이다 하는 얘기까지 합니다.

자신이 행하는 선한 일들 그것들은 바라밀이 됩니다. 그 바라밀은 어느 범위까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살펴봐야 됩니다. 자신에게 이익되고 해야 될 일이다 할 거 같으면 더욱 더 그것들을 행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수행해서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수행하는 바라밀들 수행하는 선한 일들을 더욱 더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노력하는 마음들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더욱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노력하는 바라밀들도 더욱 더 일으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완성되어서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는 끊임없이 해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수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일상 생활하는 것들이나 아니면 앉아서 좌선하고 경행하고 하는 것들이, 내가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을 두지 않으면 알아차림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아직은 부족한 겁니다. 더욱더 노력해서 자연스럽게 모든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수행이 자연스럽게 될 때만이 수행은 진일보하고 수행은 가는 길이 보이게끔 됩니다. 선행도 자연스럽게 내가 행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아, 참 저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하고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억지로 할 것 같으면 수행에서도 장애가 있게 되는 것이고, 억지로 선행을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눈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러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는 끊임없이 행해나가야 됩니다.

 

말하는 것들을 할 때 말할 때 알아차림이 없이 행하게 된다든지, 들을 때 듣는 것들이 알아차림 없이 듣게 된다든지,

일상생활을 할 때 모든 행위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행하게 되도록 해야 되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이 이루어지게 될 때 조금 더 깊이 있게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아야 되겠다 싶어서, 앉아서 조금 더 시간을 늘리고 경행하는 시간 늘리고 해서 그것들이 한 단계 더 진일보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이 자연스럽게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들이고, 마음에서 어떠한 경우든지 악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선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될 때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늙어가는 것들이 추하지 않게끔,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당당하게 되게끔 할 수 있도록, 소와 같이 늙지 않도록 게으름 부려서는 안 되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도 부처님은 "게으름 부리는 것들을 경계하라" 하고 얘기했습니다. 소와 같이 늙어가지 않도록 일상에서든 수행에서든 자연스럽게 선행을 하고, 수행을 할 수 있는 상황들이 될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의 응답> 18:10~

[문답] : 수·상·행·식에서 수(느낌)와 신·수·심·법에서의 수(느낌)의 차이

 

Q 수행자 질문 : 배를 관찰할 때, 사대를 관찰하면 그때 보통 느낌을 관찰한다는데, 수·상·행·식에서 수(느낌)와 배를 관찰할 때의 느낌하고는 분명히 다른 건데, 같다고 착각하는 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스님 답변 : 그렇죠. 그 느낌은 접촉으로 인해서 인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느낌은 어떤 경우든지 정신적인 현상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그 느낌을 아는 것은 느낌만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어야만이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느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인 것이지 느낌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느낌은 어떠한 경우든지 '느낌만'을 얘기할 때는 '물질적인 것'들에 해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느낌이 있다고 아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구분할 수 있어야 됩니다.

 

Q 수행자 : 그래서 배의 느낌은 감각적인 접촉이 될 것이고, 수·상·행·식 할 때의 수는 웨다나(느낌)로써 서로 차이가 있게 되죠?

스님 : 그런데 연관은 가지고 있습니다. 접촉이 없으면 느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Q 수행자 : 접촉을, 느낌이 오기 전에 접촉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스님 : 물론 그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Q 수행자 : 그럼 느낌이 일어날 때 아는 마음이 있어야 알아지는데, 수·상·행·식 할 때의 수는 접촉이 일어난 다음에 수를 얘기하고,

스님 : 그래서 수는 수 혼자서 일어날 수가 없고,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항상 수···식은 동시에 같이 일어난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Q 수행자 : 선등회장님이 얘기하는 것은 뭐냐면, 우리가 통상 수상행식 마음을 얘기할 때의 수와 우리가 수행할 때 느끼는 수와 차이가 있다?

스님 : 차이가 분명히 있죠! 오온에서의 수는 오온의 마음을 분리해가지고 수, 상, 행, 식으로써 구분해놓은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수행할 때 일어나는 느낌이라는 것, -느낌은 ···식이 다 통틀어져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느낌은 어떠한 경우든지 상, 행, 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 느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Q 수행자 : 그럼 수상행식 마음을 얘기할 때의 수상행식은 이론적으로 수상행식이지 실제로는 같이 일어난다는 얘기 아닙니까?

스님 : ···식은 같이 일어나죠.

• 수행자 : 같이 일어나는데, 그러면 수행할 때의 수도 수상행식이 같이 일어날 거 아닙니까?

스님 : 수가 그렇다고 해가지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공기가 팔을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팔을 실제적으로 쭉 문질러보면 여러 가지 느낌들이 사실은 있습니다. 이거는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난 거거든요.

그런데 접촉으로 인해서 느낌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없으면 이것은 내가 느낌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렇다고 느낌이 없다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느낌은 있게 돼있습니다.

 

Q 수행자 : 제 생각으로는 오식(五識)으로써의 신식(身識)을 배를 통해서 보는 것 아닙니까?

스님 : 아닙니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 말씀을 자꾸 오역하게 됩니다. 신식이라고 하는 것은 신식 혼자서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유식에서나 얘기하는 것이고, 대승불교에서나 얘기하는 것이지,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신식이라고 하는 것은 지혼자서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수·상·행이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신식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상·행은 뭘 조건으로 합니까? 접촉을 조건으로 하고, 접촉은 어떠한 경우든지 몸과 마음을 조건으로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연결되고 조건화돼서 일어나는 것이지 신식 지혼자서만, 여러분들이 신식이 있다, 그럼 만약에 느낌이 있다, 행·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 느낌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을 분리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을 그렇게 알면 그것은 부처님 말씀을 잘못 오역하게 됩니다.

그것은 수정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식이 있다, 식이 있다 하는 것은 내가 언제 너한테 그렇게 가르쳤느냐 하면서 부처님이 야단을 친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Q 수행자 : 예. 또 한가지는 이 오온을 관찰하는 것을 신·수·심·법의 신(身)-몸 관찰하는 영역으로 넣는 경우들도 있던데요?

스님 : 아닙니다! ···법 어디에든지 오온이 없이 그것을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만약에 몸을 관찰한다. 그럼 움직임을 관찰하는 겁니다.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오온이 없는 상태에서 움직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몸 하나도 움직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들, 느낌의 변화들, 오온 없이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몸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에서 뭔가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오온이 없는 상태 수상행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수심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오온으로써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온을 알아차리는 것이 몸에 대한 수행에만 해당 된다 하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부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사띠-알아차림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지만, 그것은 4가지 방법이 있다고 해서 신·수·심·법이라고 분명하게 정의를 내려놓았습니다.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몸과 마음의 영역입니다. 몸과 마음이 있어야만이 사띠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할 것 같으면 오온은 어떠한 경우든지 신수심법으로써 다 알아차리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Q 수행자 : 어떤 책에는 보니까 신·수·심·법의 수는 마음에서 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수고, 오온을 관찰하는 것은 몸의 영역이고 몸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렇게 분류를 해놓았던데...

스님 : 그렇게 보면 안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느낌은 좋고, 싫고, 무덤덤한 느낌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거는 느낌의 영역을 구분할 때 그렇게 3종류로 구분하기도 하고, 또 다른 종류로써 느낌을 구분하고 하기도 합니다. 그거는 '느낌을 구분하는 방법'인 것이지

 

그 구분하는 것을, 좋은 것을 아는 것은 느낌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이 일어난 것'을 분명하게 '마음으로 인식한 것'들입니다.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 겁니까? 그래서 느낌을 3종류로 구분한 것을 수의 영역에 속하고 뭐 어떻게 하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편의상 그렇게 구분해놓은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밖에 지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