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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타(samatha)'라고 하는 의미는 어떤 겁니까?
'고요하다' '맞다' '평온하다'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고요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많은 노력으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되는 것, 이것을 보통 '사마타'라고 얘기합니다.
마음이 대상에 집중함으로 인해서 그 대상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게 되고, 그래서 움직임이 없게 돼서 고요한 상태를 '사마타'라고 얘기합니다.
◈ '사마디(samādhi)'는 어떤 것을 사마디라고 하겠습니까?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대상에 모으는 방법'뿐 아니라, 그 '마음이 대상에 깊이 있게 모아진 상태'를 '사마디'라고 얘기합니다. 마음이 대상에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을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내 스스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기쁨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즐거움이라든지 아니면 하나의 대상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합니다. 이런 전체적인 것을 '사마디'라고 합니다.
사마타가 위빳사나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사마디라고 하는 집중이 위빳사나를 도와준다고 돼있습니다. '사마디'라고 하는 '대상에 집중된 상태', 그 상태가 위빳사나를, 그러니까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끔 만들어 준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사마디! 그 '집중된 상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오롯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된 상태도 있고, 그다음에 기쁨이 있는 상태가 있을 수도 있고, 즐거움이 있는 상태가 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상태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디는 아주 포괄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사마타 보다도 사마디라는 개념이 훨씬 광범위합니다.
그다음에 '사마디'하고 집중된 '에깍가따'하고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까 사마디는 여러 가지 상태를 나타내는데,
◈ '에깍까따(ekaggatā)'는 '그냥 집중된 상태'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마디'와 동의어로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있는 것들은 수행을 안 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쉽게 말하면 거기서 나를 볼 때 집중된 마음으로 탁 보지 않으면 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 마음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집중된 상태가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래서 '에깍가따'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요소(心所)' 중에서 '공통되는 일곱 가지 요소'로써 구분을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마디는 공통된 요소는 아닙니다.
'사마디'는 집중된 상태라고 하는 '에깍가따'를 포괄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지, 이것의 동의어는 아니라는 거라.
그러니까 대부분 사마타 수행을 하면 사마디가 계발되도록 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느냐면 오로지 집중만 합니다.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그러면 그것은 사마타 수행을 바르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그 사마디의 상태는 분명히 여러 가지 상태들이 있다는 거라. 그 상태에 따라서 마음이 달라져야 되는데, 오로지 모든 걸 집중만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안 된다는 거라.
사마타 수행을 하더라도 그래서 사마디를 계발하는 수행자라 할 거 같으면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틀려버렸다는 거라.
그래서 사마디하고 에깍가따라고 하는 집중된 마음의 상태하고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이 사마타 수행과 '자나'라고 하는 '선정' 하고 어떤 경우는 그것도 동의어로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분명히 다릅니다.
◈ '자나(jhāna)'라고 하는 것은 '지속적인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장애를 극복하고 얻어지는 상태'이고 그것을 '선정'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에 들뜬다든지, 감각적인 욕망이 있다든지, 의심을 하는 것이 있다든지, 아니면 화를 내는 것이 있다든지 이런 것들이 극복이 돼나가서 그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탁 들게 되는 것을 '자나'라고 그럽니다.
'사마타' 하고는 다르죠! '자나'라고 하는 것은 이런 다섯 가지 장애가 점차적으로 딱 중지된 것들을 '자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중지되지 않았을 거 같으면 '자나'가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 가끔씩 '스님 이것이 일선정에 해당이 안 됩니까?' 하고 얘기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일선정에 있는데도 앞에서 얘기한 들뜸이 있다든지 이런 것들이 다른 현상에서 나타난다고 할 것 같으면 선정에 들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타 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봐야 됩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마타하고 자나라고 하는 선정하고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그것을 구분시켜주지 못하면, 사마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가지고 자칫 잘못하면 "아! 당신 일선정에 들었다, 이선정에 들었다" 이렇게 잘못 판단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것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구분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선정'이라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생각으로 일으키는 말이 첫 번째로 정지돼버리고, 그다음에 몸으로 일어나는 것들이 정지가 되어나갑니다. 기쁨도 정지가 되어나가고, 즐거움도 정지가 되어나가고, 이런 상태가 자꾸 지속되어나가고. 그러고 나서는 의식조차도 정지되어버리고, 그다음에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조차도 정지되어 나가고, 이런 상태가 각각의 상태에 따라서 일선정이다, 이선정이다, 삼선정이다, 사선정이다 하고 구분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일선정의 구분은 어떻게 됩니까? 맨 처음에 사유하는 것들이 먼저 정지가 되고, 사유하는 것이 정지가 돼가지고 언어적으로 사유들이 다 끊어진 상태가 되어야 일선정에 든 것입니다. 그 상태가 안 됐을 거 같으면 거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선정에 속한 것이 아니고 사마타 수행을 하는 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마타와 사마디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되고, 또 사마디와 에깍가따라고 하는 것들도 구분을 할 줄 알아야 되고, 그다음에 사마타와 자나라고 하는 것들도 구분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여러분들은 어떻게 쓰냐면 '사마타'라 할 것 같으면 '마음집중' '삼매' 아니면 '선정' 이렇게 용어 구분 없이 그냥 하고 있다는 겁니다. 구분 없이 사용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어쨌든 사마타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사마디의 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삼매'를 계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마디라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감각적인 것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야 되고, 그래서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내 자신을 보호해야 됩니다. 욕망, 화내는 것 이런 것들은 감각적인 것에 들어갑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내 마음이 보호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되는 것이고,
그다음 '사마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뭡니까?
'사띠(sati)'와 '삼빠자나(sampajāna)'!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 있어야 만이 사마디를 지속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그러한 상태에 대해서, 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하고 '아! 참 잘하고 있다'하는 만족감이 있습니다.
또 하나가 장애들, 아까 얘기한 다섯 가지 장애들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
그러고 나서 일어나는 것이 네 가지 선정! 일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이라고 하는 것.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행위 자체입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행위 자체가 사마디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선정이라고 하는 것도 사마디의 하나의 형태인 것이고, 또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가는 것도 사마디의 하나의 형태인 것이고, 또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 감각적인 것들을 못 일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사마디의 하나의 형태이고, 항상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하고 만족하고 살도록 만드는 것도 사마디의 하나의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사마타 수행을 하더라도 사마디를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더라도 위빳사나 수행은 사마디 중에서 찰나삼매가 필요합니다.
카니까 사마디(khanika-samādhi). 찰나적으로 자꾸 알아차리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사마디를 계발하더라도 집중되고 그걸 변하지 않게끔 하는 사마타 수행으로 빠져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하나의 대상에서 어떤 현상도 발견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쭉 그 대상만 나타난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지금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구나 하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 「수행개념정리」 법문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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