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심소(쩨따시카), 수행용어

히리와 옷땁빠(hiri-ottappa, 부끄러움-두려움) (20140911)

담마마-마까 2021. 6. 1. 09:00

https://youtu.be/28AkzcWOyyQ

 

* 히리와 옷땁빠(hiri-ottappa, 부끄러움-두려움) (20140911)

 

보통 명절 지나고 오면 사람들 얼굴이 꾀죄죄하게 보이거든. 고생을 한 건지 아니면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보였는데, 이번에는 다들 얼굴이 괜찮아.

이번 추석 때는 스님들이 모여서 점심도 같이 먹고, 두 번이나 그렇게 했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얘기들도 좀 하고 그랬는데, 그때 나온 얘기 중에 “야! 우리가 사람들 간에 만나면 인사를 하는데, 인사하는 걸 하나 멋있는 걸 정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얘기가 나왔어요.

 

여러분들은 사람들 만나면 어떻게 해요? “안녕하세요?” 이렇게 하고, 안 그러면 불자들끼리는 “성불합시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또는 헤어질 때는 “또 봅시다” 이렇게들 얘기를 합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면 어떤 얘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수행합시다", "사띠합시다", "알아차리세요", 그것도 좀 이상할 것 같고.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한테도 "안녕하세요?" 하면 그것도 좀 이상하고, "다음에 또 봅시다" 언제 볼지도 모르는데 그것도 좀 이상한 거고, 특히 "성불합시다" 하는 것은 테라와다의 상식에서는 좀 맞지 않는 얘기고, 사실은 마땅한 게 별로 없어요.

그래서 그때 나온 얘기가 뭐냐하면 "이게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게 마지막 순간입니다" 하는 얘기가 나왔어요, “아! 그것 참 괜찮다. 그걸 잘 다듬어보면 되겠다” 하는 얘기가 나왔어요.

 

빨리어 경전에 그런 게 있습니다.

"삽방 빠하야 간답방" 이라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모든 것들은 버려버리고, 끊어버리고 가지않으면 안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sabbaṁ pahāya gamanīyaṁ)

모든 것들은 죽음으로 인해서 버려버리고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은 수행을 할 때도 지금 알아차리는 걸 버려버리고 다음 것들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고, 또 모든 순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집착하는 것이 없이 있는 그대로 지금 현재 순간순간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되게 됩니다.

빨리어 용어가 참 좋은 용어들이 많은데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보통 수행하는 분들이 수행을 하면서 열심히 대상을 관찰을 합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알고 있게 됩니다.

호흡을 관찰하면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근데 그것만 가지고는 별 수행에 진척이 없죠!

언제 진척이 있습니까?

대상을 인식을 잘하고 있으면은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마음도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다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인식하는 것들도 생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리고 그 생멸하는 것들이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대상이 일어났으면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 그 알아차리는 것도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것, 또 다른 인식하고 알아야 될 대상들이 금방금방 또 나타나는 거고,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계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그것,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생멸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인제는 별로 집착하는 것이 없어져버립니다.

일어난 대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조차도 별로 집착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 정도 되고 나면 인제는 수행하는 것이 조금 순일하게 되어나갑니다.

그래서 바른 견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려는 것이고.

 

적어도 그 정도 되면 견해가 바로 설뿐 아니라, 이제는 뭐 크게 스승도 별 필요 없고, 또 부처님 가르침 들여다보고 법문 듣고 하는 것도 그다지 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 해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한순간 그런 순간을 맛봤다고 해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고, 항상 그런 상태가 되도록 되야 되는 거지.

그게 가장 좋은 길인데, 그러니까 바른길에 들어서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삽바 빠하사 간답방" 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것들은 내가 알아차릴 대상이든, 아니면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이든 그 모든 것들은 그냥 버려두어버려야 된다는 거라. 끊어버려야 된다는 거라. 끊어버리고 두고 떠나가야 된다는 거라.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여러분들에게는 이 세상에선 딱 단 한 번의 기회밖엔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든 못 알아차리든 그 기회는 딱 한 번 밖에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거 지나고 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어.

 

그래서 스님들 간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딱 한 번뿐인 기횝니다" 하는 얘기를 적어도 스님들 간에는 하자 하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딱 한 번뿐입니다. 경각심을 상당히 일으켜줄 수 있는 말이다 하는 얘기를 하면서 그런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생애에서 대상을 알아차리든, 그 알아차리는 마음이 생멸하는 것들을 알든, 또는 아예 그것조차도 없이 흐리멍텅하게 살든, 딱 한 번뿐인 기회밖엔 없습니다.

 

그거 지나면 여러분들은 아무런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딱 한 번뿐인 기회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더 노력하도록 해야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몸을 받고 태어난 값어치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에서 그러한 순간들을 자꾸 경험하고 그러한 순간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자꾸 해야됩니다. 대상만 무조건 알아차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대상으로 인해서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조차도 순간에 일어났다가 순간에 사라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 무아(無我)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걸 알지 못하면 견해가 서지를 못해. 그럼 또 바뀌고 또 바뀌고 하게 되는 거라. 그걸 명심하고, 딱 한 번뿐인 순간, 그 순간에는 내가 분명하게 무아를 체험한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수행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히리와 옷땁바(hiri-ottappa, 부끄러움-두려움)라고 하는 것들인데,

 

어떤 얘기가 나왔느냐면, 벌레가 다른 큰 벌레한테 잡아먹혀 가지고 죽었어. 근데 형체가 다 있는 게 아니고 일부가 떨어져나가고 해서 아주 보기 싫은 상태라. 그걸 보고 어느 스님이 그럽니다. “아! 나는 참 저거 보고 두려운 마음들이 일어난다” 하는 거라. 나도 언제 저렇게 죽음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나는 건지, 아니면 그 죽은 벌레가 아주 보기 싫으니까 혐오감이 일어나니까 그걸 피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두려움이 일어나는 건지, 두려움이 일어난다고 그러더라고.

그러면서 이런 두려움이 빨리어 용어에서 히리-옷땁빠에 해당이 되는 거냐고 물어보더라고. 해당이 되요, 안돼요?

(수행자 대답 : 그건 별로 해당이 안 될 것 같은데요)

왜 해당이 안 되는데요?

(수행자 : 부끄러움과... 뒤에 두려움은 옷땁바에는 해당이 되겠네요)

그게 사람들이 착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혐오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가지고 히리-옷땁빠로 연결을 지으면 안됩니다. 히리 옷땁빠(hiri-ottappa)는 아비담마에서 어디 영역에 속해요?

선심소에 속해요, 불선심소에 속해요?

(수행자 : 선심소에 속합니다.)

그럼 선심소에는 탐·진·치가 있어요, 없어요?

(수행자 : 그건 없지요.)

그럼 답은 딱 나오잖아. 히리 옷땁빠 라고 하는 것은,

·진이라고 하는 것들이 함께 공존하는 상태에서 일어나지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히리 옷땁빠의 영역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건 지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근데 그걸 자꾸 그 영역으로 착각을 해버리면 안된다 하는 거라.

 

수행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이 들까? 수행을 하다보면 '일어남' '사라짐' 하는데 요놈의 망상이 탁 일어났다. 그러면 번뇌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나는 굉장히 두려워해야 되는 거라. ‘아! 번뇌 일어나면 안되는데’ 하는 그런 마음을 탁 가져야 되는 거라.

그게 히리(hiri, 부끄러움) 입니다.

 

또는 내가 하는 행위들로 인해가지고 많은 영향들을 미칩니다. 그러면 내가 한마디 말을 할 때도 다른 사람들에게 굉장히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 아이들한테도 말을 할 때 말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그것이 내가 나쁜 마음으로써 말을 하게 되면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말을 할 때 그런 두려움이 있을 것 같으면 아! 내가 선한 마음이 항상 일어나도록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으로써 말을 하게끔 됩니다. 그게 나쁜 행위, 나쁜 말, 나쁜 마음을 가짐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나쁜 일들에 대한 두려움들입니다.

그게 옷땁빠(ottappa, 두려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정확한 것이지, 그렇지 않고 이것을 그냥 단순하게 부끄러워하는 것이나, 두려워하는 것으로 착각해버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뭐 나쁜 일들에 대해서, 나쁜 행위를 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들도 그 영역에 다 포함이 되어버린다는 거라.

나쁜 일을 했으면 물론 그 히리나 옷땁빠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은 거를 어떡할 거라? 그거는 히리-옷땁빠의 영역이 아니고 이미 그 행위에 대한 결과는 자기가 받아야 되는 것들이라.

그러면 지속적으로 히리-옷땁빠가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들을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 그런 번뇌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방어를 하게 됩니다. 그마만큼 내가 열심히 그걸 붙잡고 노력하고 있는 것들, 이게 히리-옷땁빠 라고 하는 겁니다.

그냥 단순히 죽은 벌레 아주 비참한 상태를 보고 내가 히리-옷땁빠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에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나는 두려워할 줄 알아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내가 하다가 망상부리지 않고, 조불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게 되는 거라. 뭔 일을 하더라도 그 일에 열심히 전심전력하게 된다는 거라.

또는 내가 하는 행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알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들이 항상 바른 것들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한다는 거라. 그렇게 마음을 딱 붙잡아 두고 있는 것들이 바로 히리-옷땁빠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고 그런 마음들을 가지게 될 때 그것들이 세상을 잘 이끌어나가는 두 개의 수레바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번뇌가 일어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가 있는 상태에서 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은 일어나는 즉시 정지를 해야됩니다. 번뇌가 일어나도 정지를 해야되고, 탐·진·치가 일어나도 정지를 해야됩니다. 그래서 번뇌를 가라앉히고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행하고 하는 버릇들을 자꾸 들이도록 해야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히리라고 하는 자기를 보호하는 역할들, 옷땁빠라고 하는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들이 자연스럽게 자기 몸에 베이게 됩니다. 그래서 '아! 그것이 참 진짜 좋은 선심소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간단하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