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집중수행 법문

2025 집중수행 5일차 - 도비도지견청정 (20250917. 오덕훈련원)

담마마-마까 2025. 9. 28. 19:42

 

* 2025 집중수행 5일차 - 도비도지견청정 (20250917. 오덕훈련원)

 

<2:30초 이후부터 법문이 설해집니다.>

 

이 시간에 법문할 내용이 도비도지견청정입니다.

도(道)의 길이면 계속 그 길로 따라가도록 해야 되고, 도가 아니고 비도(非道)이면 그거는 하면 안 되는 길이라. 따라가면 안 된다는 뜻이라. 근데 어떡하냐? 여러분들 수행 중에서 한참 많이들 나타나는 현상들이 비도라고 열 가지로 딱 규정을 해놔놨는데, 뭐에요 10가지가? (빛) 빛, 또? (삐띠, 수카) 응. 삐띠, 수카, 대표적인 것이 그런 거지.

이게 잘 나타나는 순서대로 할 것 같으면 빛, 그다음에 냐나라고 하는 지혜가 먼저 일어나집니다. 그다음에 삐띠, 그다음에 수카, 이런 식으로 보통 나타나집니다.

 

근데 칠각지 한번 봅시다. 칠각지는 뭐예요? 뭐 뭐가 있어요?

여기서는 사띠도 따라가서는 안 되는 비도의 영역에 올려놨거든.

칠각지에 처음이 사띠인데, 그리고 담마위짜야를 넘어서고 나면 그다음에 또 나오는 게 뭐예요? (위리야 삼보장가) 예. 위리야도 있고,

위리야도 보면은 여기 빡가하라고 하는 용어가 있거든요. 책려라는 뜻인데 채찍질해서 더 노력하게끔 만든다는 뜻인데, 어찌 보면 위리야 하고 비슷한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뭐 하여튼 기쁨도 있고, 그다음에 행복감도 있고, 그다음에 평안함도 있고, 이런 거의 칠각지에 있는 거 거의 대부분이 비슷하거나 똑같은 경우들이라.

 

칠각지에서는 이걸 개발하라고 그랬는데, 요 칠청정에서는 요건 따라가면 안 된다고 그러는 거라. 어디로 가야 돼? 왜 이렇게 됐을까? (좋은 거라고 집착하면서) 그렇지.

대부분 수행하다 보면은 이런 것들이 일어나지기는 하는데, 냉정하게 한번 봅시다.

여러분은 위빳사나 수행하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무상·고·무아가 일어나야 되죠. 그것이 주목적입니다. 그래서 무상한 성품을 보면은 ‘아, 이거 뭐 별거 아니네’. ‘집착할 것이 아니네’ 하고 이제 알게끔 되는데, 근데 요런 기쁨이 확 일어났다 그러면 대부분 어떻게 해요? ‘엄매, 좋은 거’ 하면서 그냥 집착을 하게 되는 거라. 이게 문제라.

 

기쁨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기쁨을 집착하는 마음이 문제가 되는 거라. 기쁨을 집착하면은 그냥 집착만 있으면 또 괜찮은데 그거 누가 기뻐하는 거라? 지가 기뻐하는 거라. ‘아, 내가 뭔가가 되었다’하고 생각을 하는 거라.

그런데 자아가 거기에 또 착 개입이 돼버리게 되고. 그래서 집착하는 것과 자아가 있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의 생각이나 견해가 딱 서가지고 요게 맞고 다른 건 틀렸다 하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 중에 요게 맞고 다른 건 다 틀렸어. 이래 버리는 거라.

 

오늘도 여기 신발 벗을려고 왔는데 스님 슬리퍼 놓는 자리를 탁 오늘 마련해 놓았더라고. 누가 마련해 놨어요? (제가 했습니다.)

저거 저 저러니까 저렇게 안 되는 거야. 공부를 못하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 거라. 이때까지 잘 해왔는데 뭐하러 해? 그게 뭐냐면 자기만의 견해들이 생겨나 버리면, 물론 스님을 존경하고 하는 마음은 좋은데, 존경하면 수행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건데, 간단한 건데 그냥 그걸 외부적으로 표출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런 게 문제가 됩니다.

근데 대부분 어떻게 해요? 수행하는 사람들은 기쁨이 일어났으면 기쁨을 관찰하면 기쁨이 사르르르 변하면서 사라지게 되거든. 그렇게 하면 그 안에는 자아도 없고 견해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수행하다 보면은 갖가지 현상들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갖가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근데 그 현상들이 일어났으면 그 현상으로 인해서 무상 고 무아가 드러나지느냐, 아니냐로 가지고 판단을 하라는 거라. 무상 고 무아의 성품으로 보이지 않고 그냥 계속 있다, 그러면 그때의 그 대상은 비도에 들어가 버리는 거라. 내가 이거는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 아무리 좋은 사띠가 있어도. 지혜가 일어나도 마찬가지고. 그게 안 변하는 게 어디 있어? 사띠도 변하고 지혜도 변하고 뭐든지 다 변하는 영역에 속하는 건데, 지는 안 변하고 있을 것 같으면 그건 비도가 돼버리는 거라.

 

그런데 좋은 것들이 일어났으면 물론 뭐 설령 자기 마음에서는 ‘아, 내가 이제 한 소식했다’ 하는 마음도 들겠지만, 어쨌든 그 대상으로 인해가지고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이 안 된다 할 것 같으면 버려버려야 되는 거라. 비도이기 때문에 버려버리고 그냥 다른 거 찾아가는 게 훨씬 낫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예)

 

조금 전까지의 영역에서는 힘들게 힘들게 수행을 해 왔거든요. 힘들게 해 왔는데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것을 어느 정도 탁 이해하고 나면 이제는 수행이 좀 수월해져.

그래서 그 수월해지면서 일어나는 것이 조금 전에 말한 이 10가지 장애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열 가지 장애도 여러분들이 잘 타고 넘어가야 되지, 이렇게 보면 됩니다.

장애가 일어났으면 그것을 대상으로 해서 관찰했을 때, 그 대상이 변하는 성질이면 그냥 그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근데 그게 변하는 게 더 증폭될 때도 있을 거고, 사그라들 때도 있을 겁니다. 그거는 관계 없습니다. 특히 이 기쁨 같은 거는 그걸 관찰하면 더 증폭이 돼. 더 크게 막 일어나진다고. 그러면 그냥 편안하게 그냥 또 그걸 따라가면 돼. 그러다 보면은 언젠가는 지가 사르르르 또 사라지는 게 보여요. 그래서 그럴 경우에는 그건 도의 영역에 들어가 버립니다. 내가 따라가도 괜찮은 길.

 

그런데 대부분의 열 가지들이 일어나는 것들이 갑작스럽게 탁 일어납니다.

그냥 그전에 기쁨이 일어나는 것들은 무상한 성품을 이렇게 보니까 ‘어, 좋다’ 하고 마음속에서 탁 일으키는 건데, 지금 일어나는 것들은 지가 일으키는 게 아니고 불현듯이 탁 나타납니다. 불현듯이. 그래서 불현듯이 나타나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것에 그냥 끄달려 들어갈 가능성이 굉장히 큽니다.

그래서 참 이것들을 잘 조절해가지고 넘어가기가 참 힘이 들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현듯이 탁 나타나더라도 여러분이 딱 생각해야 되는 것이,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집착이 없어졌는가?’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르렀는가?’ ‘이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청정해졌는가?’ 하는 걸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그러면 그 현상이 불현듯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크게 바뀌고 하는 거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냥 도와 과에 이른 것 같지는 않다 할 것 같으면은 그냥 그걸 대상으로 삼아 버려야 되는 거라. 그때 일어난 것들을 대상으로, 편안하게 대상으로 삼아 버려야만이 요게 변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이 대상들은 내가 깨달음에 이르른 상태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단편적인 예로 수다원에 이르는 성자 이상들은 지금 말하는 열 가지 현상들은 아예 안 일어납니다. 가치가 없는 거기 때문에.

근데 수다원에 안 이르렀기 때문에 이게 일어난 거라. 쉽게 말하면. 그러면은 그걸 잘 극복해서 넘어가 버려야만이 그다음부터는 수행해가지고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이더라도 기쁨이 안 일어나는 상태가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수다원 이상이 돼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래서 이게 장애의 요인으로써 작용을 안 하고 계속적으로 그냥 수행을 해나가서 부처님이 말한 수행의 길로만 계속 고속도로를 타고 가게끔 되는 거라. 알겠죠? (예)

 

무상하다고 그럽니다. 왜 무상하다고 그러죠? 대상을 보니까 소멸하게 되면 무상하다고 그럽니다. 소멸하기 때문에 무상한 겁니다.

사라지고 나서 어떻게 돼요? 그게 딱 사라지고 나면 그다음 대상이 탁 일어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또 일어난 것들을 딱 보면은 또 싹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걸 갖다가 귀에 소리를, 예를 들어 귀를 소리를 잘 듣는 사람들은 귀에 파장같이 탕 탕 탕 탕 치는 듯이 들립니다. 쉽게 말하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이 탕 탕 탕 탕 하는 것처럼 들려요. 쉽게 말하면 무상한 성품이 무상한 물결로서 나는 알고 있게 되는 거라. 그런데 수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무상하게,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한 덩어리로 보여. 그냥 소리가 들린 거로 알고 인식을 하게끔 되는 거라.

 

그게 이제 수행을 잘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차이점이긴 한데, 그냥 소리가 들린다고만 인식하고 있을 것 같으면 절대 무상한 성품을 완전하게 안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스님이 자꾸 소리가 들릴 때, 들릴 때의 느낌을 자꾸 보라고 하는 거는 느낌은 어쨌든 조금은 차이가 있고 변하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근데 그냥 ‘소리 들림’이라고 해놔놓으면 들리는 것은 알지. 그리고 안 들리면 소리가 사라진 것은 아는데, 그럼 그러고 났으면 뭔데? 뭐 할 건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그냥 뭉텅이로 알고 있을 것 같으면, 소리 들리는 것이 사라지는 것들이 있으면은 대부분 두려움을 탁 느껴버리게 되는 거라. ‘무섭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하는 습관들을 조금씩 바꿔야 됩니다. 소리가 들리더라도 그게 변하고 있구나 하고 자꾸 느끼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변하는 것들은 지가 와서 일어나지고 그 자리에서 싹 사라지지, 내가 그걸 사라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 혼자서 왔다가 갔다가 왔다가 왔다가 하는 것들로 이해하게 되면 크게 신경을 안 씁니다. 그냥 그것 그냥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 거라. 그게 무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적어도 수행하면서 그렇게는 봐야 됩니다. 소리 들리는 것을 예로 들었지만.

 

흡을 한번 봅시다. 어떤 사람은 스님이 가르치는 게 "배를 관찰해도 되고 코를 관찰해도 된다." 그러니까 “그거는 마하시 방법이 아닙니다.” 하고 그럽니다. 하시는 무조건 배를 관찰해야 되거든.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배를 관찰해도 느낌으로서 변하는 성품을 관찰하게 되는 거고, 코를 관찰해도 코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변하는 성품들을 관찰할 것 같으면 똑같습니다. 무상한 성품인데. 호흡은 어쨌든 실제적으로는 코를 통해 들어와 가지고 배가 움직이는 거고. 그리고 다시 또 호흡은 코를 통해서 나가는 거기 때문에,

관찰의 위치를 여기(코)를 둘 것이냐, 여기(배)를 둘 것이냐 하는 차이뿐이지, 이것은 맞고 요것은 틀렸다는 그런 개념은 아니라는 거라.

 

그 대신에 코를 했을 때 주의해야 될 것은 뭐냐면, 코를 (관찰)하면 잘못하면 사람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그러면 그건 사마타에 빠져버리는 거라. 코의 위험성이 바로 그런 것들이라. 느낌이 변하는 걸 봐야 되는데 그게 안 보이니까 그냥 코가 숨을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있는 거라. 한 시간 동안 수행해도 편안하고 너무 좋습니다. 오히려 이게 내가 열반에 이르른 거 아닌가 할 정도로도 그냥 아주 좋습니다. 근데 그건 사마타에서 그런 상태에 이르른 것이지, 현상이 변하는 것으로 인해서 그것에 대한 집착이 떨어져 버려서 편안하고 고요하고, ‘아, 이게 열반인 것 같다’ 하고 느끼는 것하고는 틀리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착각을 하면 안 돼.

 

코를 하든 배를 하든 그거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데, 특히 이제 나이 든 사람들은 배가 명치 밑으로는 안 내려가지고 포인트가 자꾸 위로 올라와집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자꾸 오래 살려면 그걸 밑으로 내리라고 자꾸 하기는 하는데, 그게 내려진다고 내려지나 그게. 오히려 의도적으로 자꾸 하게 되지. 그냥 지 편한대로 하면 돼.

이쪽 배꼽 위에 한참 위에 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이 느낌이 강해지면 그거를 포인트로 하면 돼. 거기에다가 살며시 마음을 놓는다 생각하고 거기를 통해서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일어나는 느낌이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것들을 보면 돼.

 

그 대신에 요기(가슴)에는 하지 마. 여기에는 하면은 열명 중에 열명은 전부다 상기 돼버려. 왜 그러냐 하면 여기를 할 거 같으면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걸 따라가 버리게 되거든. 그러면 대부분 호흡을 지가 인위적으로 조정을 하게끔 돼. 길이를. 그래서 천천히 할 가능성이 거의 십중팔구입니다.

 

여기(가슴)를 해야 될 때는 ··치나 아니면 아까 10가지 가지 좋은 현상들이 일어났을 때 그 느낌들을 볼 때 여기를 집중을 하면 돼. 그래서 그러면 여기에 느낌들이 일어나는 것들이 보이고 그 느낌들이 이게 열감이든, 어떤 따가움이든, 뭐든 간에 그게 변하는 게 보여. 그래서 그거는 가능한데,

 

호흡을 여기를 (관찰)하면은 호흡을 따라가면서 상기가 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물론 안 되는 사람도 있겠지. 근데 여기 하는 사람 치고 안 되는 사람 한 번도 못 봤어. 그러니까 여기 하지 마 그냥. 하지 말고, 차라리 코를 보라고. 코에서 스치고 하면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의 느낌의 변화를 보도록 그렇게 하면은 바르게 위빳사나를 하는 현상이 됩니다.

그래서 대상은 그렇게 하면 되고.

 

근데 지금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면은 대부분은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애요? ‘음, 무상하다’ 하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냥 무상함을 갖다가 절실해 갖고 ‘아이고, 안 무상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고, ‘무상하네’ 하는 생각이 탁 일어납니다. 지금은 그런 단계입니다.

그런 단계에서는 절대 이 10가지 현상들이 안 일어나집니다.

생각이 일어나서 무상하고 변하고 있고, ‘아이고, 나라고 하는 것이 집착할 것이 없구나’ 하고 알 것 같으면은 그냥 거기서 그냥 끝나 버립니다.

 

조금 전의 단계에서는 분명히 무상한 성품을 봤는데, 그 무상한 성품이 쉽게 말하면 ‘거칠다’는 뜻이라. 거친 것이 자연스럽게 무상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으로서 무상하다고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반은 섞여 있기 때문에 거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럴 때는 생각하는 버릇들을 안 하는 게 좋아. ‘무상하네’ 하고 안다고 해가지고 뭐 상태가 달라지는 게 아니거든. 그러면 그냥 놔줘버리고, 무상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나는 그냥 호흡의 변화만 보겠다 하고 다시 마음을 편하게 먹고, 다시 호흡이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렇게 따라가 버려야 돼.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서 무상한 성품을 알아차리면은 대부분은 보면 한 시간 동안 쭉 앉아있어도 무상하게는 알게 되는데, 대부분은 한 시간 앉아있으면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아픔도 있게 되고 뭐도 있게 되고 그래야 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고 오히려 숨을 관찰하는 것이 점점 더 엷어지고 가늘어지고 희미해져 버립니다. 물론 본인은 그걸 따라갑니다. ‘어, 희미해지는구나’ 하고 알고 따라가집니다. 그래서 이게 희미해지는 게 변하는 게 보이긴 해요.

근데 그러고 나서는 그냥 그 상태만 계속 유지를 합니다. ‘희미하다’ 하고만 알고. 차라리 딱 멈춰버리면 멈췄다고 알면은, 마음이 뭔가 대상을 찾기 위해서 탁 일어나 가지고 다른 대상을 찾게끔 되는데, 그것도 아니고 대상은 있거든 호흡은.

 

그런데 그렇게 계속 보는 상태가 만약에 오래도록 지속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은 집중하는 힘이 안 커집니다. 근데 실제로는 그렇게 희미하게 보이고 점점 호흡이 엷어질 거 같으면, 집중하는 힘이 크기만 하면 자기가 이 변하는 것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하는 것인데, 내가 모르고 그냥 한 뭉텅이로 보고 희미하게 변하는 것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건데, 집중하는 힘이 없으니까 그냥 이게 희미하게만 보인다는 거라. 사띠를 놓치는 것도 아니고.

 

만약에 그게 오래되면 딱 스톱을 해요 거기서. 거기서 딱 스톱을 하고, 다시 자연스럽게 호흡을 하고 있는가를 보라고.

그러고 나서 정 안 되면 수를 한번 세봐봐.

집중하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 보통 많이 하는 방법이, 물론 그 시간 동안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고 넷 셋 둘 하나 하고, 다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하고 그다음에 여섯 다섯 넷 셋 이런 식으로.

그래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면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넷, 셋 이런 식으로 하면서 다섯에서 여섯으로 올리고, 일곱으로 올리고, 열까지 딱 올라가도록 해서 아래 위로 반복하도록,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집중하는 힘이 단번에 탁 커집니다. 그러고 나서 호흡을 탁 보라고.

그럼 그전에 호흡이 미세하게 질질 끄는 것들이 오, 이게 변하고 있어. 이게 빠르게 샥 샥 변하는 것이 보이거든. 그래야 되는 거라. 마음이 거기에만 딱 집중만 잘돼 있으면 실제로는 희미한 게 아니고 대상이 엄청 빠른 속도 변합니다.

무상한 성품을 볼 때는 반드시 그렇게 봐야 됩니다.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여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두려움들도 일어나고 ‘아, 이거 뭐 수행이 잘못됐나’ 해가지고 그만두기도 하고 그렇게는 합니다. 그리해도 그렇게 봐야 되는 거라.

 

대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바뀌었느냐 하면 그전에는 물질적인 속도로 봤거든. 물질적인 속도로. 그러니까 이게 마음은 이미 빠르게 막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는데 물질적인 속도로 보니까 물질이 일어나는 것이 느리고 희미해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무상한 성품을 탁 보고 지금 다음 단계 도비도지견청정에 갈려면은 무상 고 무아가 무조건 빠른 속도로 변하고 하는 것들이 보여야 돼요.

 

그래서 마음이 물질의 변화를 보는 마음에서 마음의 변화를 보는 것으로 탁 전환되도록 해야 됩니다. 물론 내가 완전히 전환되지도 않고, 어떤 때는 물질적인 걸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정신적인 것을 보기도 하고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비중이 이제는 정신적인 변화들을 보는 것으로 탁 넘어가져 버리게 됩니다.

그전에는 어떻게 했어요? 물질적인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현상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들이 있으면은, 정신적인 현상을 관찰하는 걸 관찰하지 말고 물질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을 관찰하라고 분명히 얘기를 했습니다. 그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근데 지금은 물질적인 현상들을 분명하게 일어나는 것들이 보이고 그게 많아지면은 이런 물질적인 현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이면 두려움 같은 것, 수행을 그만두고 싶고 마음이 일어나는 것, 이런 것들이 일어납니다.

그때는 이제 이게 관찰 대상이 돼버리는 거라.

 

그럼 그것들이 아까 물질적인 게 빠르게 변하듯이 요것도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여요. 그래서 두려운 것들이 그냥 한 번에 싹 사라져 버리고, 수행을 더 열심히 할려는 마음들이 착 일어나고 그러는 거라.

그렇게 되도록 만들면은 적어도 이제는 마음이 대상을 따라가는 속도가 맞춰지는 거라.

 

그때 이제 일어나는 것이 이 10가지 현상들이라.

그렇게까지는 되겠죠? 그렇게 따라가야 됩니다.

열 가지 현상들을 다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10가지 현상들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그런데 무상으로 보기도 하고, 고로 보기도 하고, 무아로 보기도 하는데 마음의 속도로 그 현상들을 보게 되면 그중에 반드시 하나만 관찰이 되어집니다. 그걸 착각하면 안 됩니다. ‘아, 이게 무상하기 때문에 내가 괴롭구나.’ ‘이게 그렇게 괴롭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고 세 개가 한 번에 샥 같이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거는 물질적인 속도로 할 때 그렇게 사유를 하고 할 때는 그게 가능한데, 정신적인 속도로 할 때는 그냥 무상하면 그냥 무상한 것으로 땡 끊나. 그래서 그냥 무상하구나 하고 뼈저리게만 느끼게끔 되는 거라.

 

그다음에, 그렇게 해서 이제 열 가지 비도의 영역으로 착 넘어왔다고 해봅시다.

 

그렇게 해가지고 빠르게 변하는 게 보이니까 얼마나 좋겠어. 새로운 걸 탁 봤으니까. 편안하게 보여지니까. 그전까지는 되게 괴로웠는데, 이제는 사고도 안 들어가지고 그냥 대상 자체만 보면 휘리리릭 사라지고, 휘리리릭 사라지고 하니까 얼마나 좋아. 보면 그러니까 편안하게 보이게끔 되는 거라. 지가 편하게 보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보여져. 부딪히듯이 보여집니다.

 

그럴 때 맨 처음에 일어나는 것이 '(Obhāsa)'이라는 거라.

뭔가가 눈앞에 환하게 비치듯이 이 대상을 보는 듯이 보여.

어떻게 할까? 빛이 탁 나타났다. 어떻게 해야 돼? 빛이 일어나면. 그걸 대상으로 해야지. 빛이 일어났으면.

 

사마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처음에 그런 빛이 일어나면 그것이 대상이 되면 안됩니다. 오로지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지속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리해도 빛이 한번 일어나면은 그 빛은 자꾸 커지게끔 돼있습니다. 지가 커지든 말든 뭐 색깔이 뭐 어떻게 변하든 말든 그거는 지가 하도록 놔둬버려야 돼. 왜 그러냐 하면 집중하는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은 변하면서 더욱더 뚜렷해지기는 합니다. 그리해도 그게 대상이 되어서는 안 돼. 그냥 호흡을 그냥 주구장창 대상으로 할 것 같으면 나중에 그게 또렷하게 딱 머무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이제 그게 대상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초선정으로 탁 금방 들어가 버려요.

 

그런데 지금은 여러분들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잖아.

위빳사나 수행 1선정에서 이제 2선정으로 넘어가야 돼.

이선정으로 넘어가려면 그런 빛들이 대상이 돼야 됩니다.

그냥 편안하게 빛을 봐. 빛을 보면 빛이 보이면 빛이 이렇게 변하는 것이 있으면 변하는 게 있는 것으로서그냥 보면 돼요. 그래서 ‘아, 이게 빛이 변하는구나’ 하고만 알아차리고 그 빛이 뚜렷해지면 ‘뚜렷해진다’고만 알아차리고.

그러면서 마음은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저것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르렀을까?’ 그런 마음을 내야 되는 거라. 그러면 저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른 것이 아니다 싶은 마음이 탁 들면 빛이 언제 사라졌나 하듯이 그냥 확 없어져 버립니다.

그 빛이라는 경계를 벗어나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사실은 크게 내가 집착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서 기뻐하지만 않으면 빛이 그냥 일어나도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사라지듯이 그렇게 보여집니다. 그래서 빛으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들뜨거나 하는 것들은 안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위빳사나로 보면은 사마타 수행과 마찬가지로 2선정과 같은 상태가 돼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경계가 부딪치더라도 경계에 현혹되지 않고 오롯이 마음은 청정한 상태를 쭉 유지해나가는 거라.

 

위빳사나 1선정에 한번 착 들었는데, 인제는 그 상태가 지속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래서 대상을 무상한 성품으로 그냥 보게끔 되는 거라. 그 어떤 것도 집착하지 않고, 기뻐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았다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고, 저것도 대상이니까 일어났으면 ‘지가 일어났으니까 지가 사라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게끔 되는 거라.

한번 그렇게 빛이 일어났다가 탁 사라지고 나면은 잘 안 일어납니다. 그렇게 봤을 때는.

 

근데 다시 또 다르게 수행하다가는 또 그게 일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형태만 조금씩 틀리고.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은 ‘지가 일어났으니까 지가 사라지겠지’ 하는 마음이 점점 강해지는 거라.

그게 이제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다음에 또 수행하면, 그전에는 요런 마음에서 요 빛이 일어났는데 인제는 안 일어나. 그러면서 그건 이제 극복한 상태가 되는 거라.

그게 이제 제 삼선정으로 위빳사나의 제3선정으로 넘어가는 단계가 되는 거라. 실제로는.

 

위빳사나에 1선정이 있고 2선정이 있고 3선정이 있고 4선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대상을 어떻게 관찰하느냐에 따라서 사마타 수행의 1선정과 2선정, 3선정, 4선정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는 것들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게 그 정도의 집중력도 생기고 그것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동일한 현상들이 거기에서도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하고는 틀리게 오로지 대상 하나만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고, 대상 자체가 다르게, 그리고 그 대상 자체를 그냥 편안하게 보면서 변하는 것들로, 무상 고 무아의 성품으로 보게끔 되는 거라. 근데 보게끔 되는데 어떤 식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내가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져 있고 안 단단해져 있고 그 차이 때문에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으로 바뀌어 나간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자, 그렇게 해서 빛은 어느 정도 관찰했다고 칩시다. 그냥 그대로 관찰하면 됩니다. 그걸 가지고 좋아만 안 하면 됩니다. 좋아만 안 하면 그냥 그대로 관찰되어 집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보면. 그냥 마음에서 일어나는 장난이다 생각하면 됩니다.

어찌 보면은 환각 같애요. 환각.

스님이 그 대학 처음에 들어갔을 때 그 위빳사나 수행이라는 걸 그 모르기 전에, 어쨌든 군에 잡혀들어가고 하면서 출가를 하는 계기가 됐는데, 그전에는 뭐 라즈니쉬가 어떻고 뭐 이런 것들을 막 보고 막 정신이 빠져있었거든. 그거 탐구할 때 뭐가 있었나 하면은 관념적으로 뭘 만들어야 돼. 그래서 내가 천상에 올라가는 것을 만들었다가, 천상에서 마차를 타고 막 돌아다니는 것들을 했다가, 그런데 실제로 그게 보여요. 보이면서, 그걸 얘기하면 그 가르치는 분들이 “야! 니 잘했다.” 이러거든.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내가 왜 그 짓을 하고 있었을까?’

만들어내는 환각이라. 만들어내는 환각.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라.

 

여러분들은 적어도 신비체험을 하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이런 열 가지 현상들을 좋아라 하고 따라다니면 그거 딱 스님이 막 뭐를 만들어낸 것과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짓이라. 그래서 비도라는 거라. 비도(非道)!

그것에 끄달려 들어가는 순간은 거기에는 무상 고 무아가 없어. 그럼 위빳사나 수행을 안 하는 상태가 되는 거라. 사띠가 있어도 마찬가지라.

사띠도 그것에 집착하고 그걸 더 하려는 마음이 생기면, 그 집착이 들어가 버리면, 그 사띠(sati) 하는 데서 삼빠자나(sampajāna)는 안 일어나져. 사띠만 계속 연속되잖아. 대상이. 사띠만 연속하면 자기는 청정하고 잘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가 됐는 거라. 그런데 삼빠자나가 있어가지고 그게 변하는 것들을 알고 그것들이 완전하게 이해가 돼야 되는데, 뭐 그냥 알고만 있는 거라.

 

쉽게 말하면 차가 이렇게 휙 지나가면, 삼빠자나가 있으면 차 번호가 처음부터 해가지고 끝까지를 완전하게 착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사띠만 쭉 있으면 이게 차가 빠르기 때문에 앞번호는 모르고 그중에 한두 개만 탁 압니다. 그럼 계속적으로 그런 게 있으면 그것만 쭉 쭉 쭉 쭉 알고 있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러면 이거는 완전하게 그 번호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인은 사띠는 안 끊어져 있으니까 계속적으로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해버리게 되는 거라. 그게 뭐냐면 사띠에 집착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게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사띠도 이 10가지 비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그래서 그러는 거라. 그거는 이 빛이 일어나는 것 말고 한참 뒤에 일어나기는 합니다. 아직은 사띠가 그냥 제대로 작동을 하고 있어.

 

근데 문제가 뭐냐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게 '지혜(ñāṇa)'라고 하는 거라.

하나의 대상에 딱 집중을 하게끔 됩니다. 지혜는 일어나야 되죠? (네)

지금 보면 요 지혜도 일어났다가, 그다음 지혜가 일어났다가, 지금 세 번째 지혜 일어났다가, 그다음에 지금 하고 있는 지금 네 번째 지혜가 일어나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겁니다. 요걸 탁 극복해야 네 번째 지혜가 일어나지는데.

지혜는 일어나져야 되는데, 지혜를 지혜라고 알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쉽게 말하면 무상한 것들이 착 일어났다. 그 무상한 것들을 ‘아, 무상하구나’ 알고 있으면 그건 지혜가 일어난 거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쩌라고? 그래서.

지혜가 그때가 장애가 딱 돼버리는 거라. 지혜가 일어났으면 그 단계의 지혜가 일어났으면 그다음 단계의 지혜가 있는데, 왜 거기서 그냥 지혜가 일어났다 하고 그냥 머무르고 있느냐는 거라.

그냥 그 지혜가 일어났으면 그냥 놔주라는 거라. 놔주고, ‘어, 이것도 장애구나’ 하고 생각하고 놔줘 버리면 그냥 무상한 성품이 보이는 것이 다르게 보여지는 거라. 그전에는 빠르게 변하는 것들로 보이다가, 그다음에는 이게 또 다른 성품으로서 이렇게 또 보여집니다. 그럼 그냥 그대로 따라가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그 지혜는 자기가 계속적으로 수행해 나가야 되는 도(道)의 영역에 속해 버리게 되는데, 대부분 지혜가 일어나면은 그것들을 알면은 ‘아, 이거구나’ 하고 탁 머뭅니다.

수행은 거기에서 머물면 그다음 단계로 못 넘어갑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도 1선정이나 2선정이나 3선정에 들었다. 어떻게 해서 그다음 선정으로 넘어가져요? ‘아, 이거 불완전하구나.’ ‘아, 이거 가지고 내 안 돼’ 하는 마음이 강하게 탁 일어나야 거기로부터 빠져나옵니다. 그래서 다음 선정을 할 수가 있는 근거가 되는데, 그렇지 않고 ‘아, 이거 너무 좋아’ ‘평생 여기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탁 생겨버리면 만날 거기에 있는 거라.

그래서 물론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원하는 때 그 선정에 들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누가 부르면은 내가 일어나야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부르는 소리에만 반응해가지고 그 선정에서 탁 깨어나기도 하고, 그건 자유롭게 될지는 몰라도, 그게 좋은데 어떻게 할 거라? 그다음 단계로 못 넘어갑니다.

 

마찬가지라. 위빳사나에서도 지혜가 일어났으면 그 지혜가 좋다고 하고 있으면 그다음 단계로 못 넘어가지는 거라. 이왕 수행한 거 그냥 좀 완전히 좀 올라가려고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이지, 그냥 그거 좋다고 그냥 머물러 있고 ‘아, 이것으로 인해서 이제 잡념 생기는 것이 안 일어난다. 이러면 됐어 그냥’.

자면 잡념 안 생깁니다. 그냥 자 그러면. 그러니까 거기에서 머물려고 자꾸 생각하면 안되는 거라.

그래서 이 지혜라고 하는 냐나ñāṇa가 빛이 일어나고 나서는 반드시 그런 현상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것도 빨리 극복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일어나는 게 '삐띠(pīti)'라는 기쁨입니다.

이게 사람들을 엄청 괴롭히는 거라. 엄청 괴롭혀. 왜 그러냐 하면 다른 것들은 크게 자극을 하는 게 아니거든. 크게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고, 몸을 자극하는 것이 아닌데, 이 기쁨이 갑작스럽게 일어나면은 그걸 관찰해야 될 거 아니라. 관찰하면 점점더 커지고 나도 주체가 안 되는 상태가 되고, 그런데도 마음은 너무 좋아. 그래서 이게 극복이 잘 안되는 현상들입니다.

가만히 수행하고 있는데, 어느 때 대상을 잘 관찰하고 있는데 등골이 서늘하듯이 느낌이 있어요. 그것도 이 기쁨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 삐띠라고 하는 것들은 잘 조절해야 됩니다.

 

그거 극복하는 법을 가르쳐 줄게요. 삐띠가 일어나는 것도 어쨌든 지혜가 일어난 거죠. 그래서 지혜는 건드리면 안 돼. 지혜는 건드리면 안 되는데, 아까 그 삐띠가 일어난 것들 기쁨들을 관찰하니까, 기쁨이 막 바뀌죠. 그거 왜 바뀌는지 알아요?

집중하는 힘에 인해서 다른 현상으로 바뀌어버리는 거라. 집중하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삐띠들은 더 강하게 일어나고 더 다른 방향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럼 뭘 조절해야 돼요? 집중하는 힘을 조절하면 삐띠는 극복이 되어집니다.

좀 떨어져서 한번 보라고. 기쁨이 일어나면.

 

집중을 갖다가 조금 떨어트려서 본다고 마음을 먹고 ‘음, 그래. 나는 네가 일어나더라도 내가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고 막 춤을 추고 안 할 거야’ 하고 딱 마음을 먹고 떨어뜨려서 그 기쁨을 보라고. 그러면 그 기쁨이 일어난 것이 혼자서 막 하다가도 스르르르르 사라집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집중하는 것들 하고 노력하는 것들이 발란스가 탁 맞아 떨어지면 그 기쁨은 샥 사라집니다. 근데 이 밸런스 잡기가 참 힘듭니다. 대부분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도 자꾸 해야 돼.

그래서 기억을 해야 돼. '기쁨의 현상은 지혜와 집중력이 일어나서 일어난 것이다' 하고 마음을 딱 먹어야 돼. 근데 이 지혜는 가만히 놔줘버리면 돼. 지금 상태의 지혜이기 때문에. 단지 집중하는 힘을 갖다가 내가 조절해야 되겠다 마음을 먹고 떨어트리라는 거라. 기쁨을 갖다가. 그리하면은 기쁨을 극복을 해나갑니다.

 

대부분 극복이 안 되는 게 ‘아, 나 인제 여기 도달했다’ 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거라. 뭐 그거 일어난 거 가지고 뭘 도달했다고 마음을 그렇게 먹으려고 해싸. 그렇게 마음 먹지 말고, 그냥 이것도 편안하게 봐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집중하는 강도를 조절을 하도록 하라는 거라.

 

집중하는 거 한번 강도 조절해 볼까요? 어떻게 조절해요?

평상시 때 한번 훈련해 봐요. 집중하는 거.

여기에 손이 있다. 손 두 개를 눈을 감고 요렇게 한번 부딪혀봐봐요. 가까이 다가올 때 느낌이 있어요? 딱 닿기 전에. 느낌이 있고 나서 탁 닿으면 닿는다고 알고, 떼면 살짝 떼면서 오는 느낌들이 있으면 그 느낌들을 한번 보라고.

그래서 살포시 닿을 때 느낌들이 다르다고 분명히 알게 되고, 그리고 그것들을 뗄 때 느낌들이 다르다고 알게 되고, 어떨 때는 이거 붙일 때 그 느낌들이 일어나는 것이 뭐 그냥 방울이 파바바바박 일어나듯이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그 느낌들이 그렇게 보이면 그렇게 그냥 보고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나서 딱 닿으면 닿인다고 탁 알아차리면서 그때 일어나는 느낌들이 또 다르게 느껴집니다. 쏙쏙쏙쏙 쑤시듯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것들을 알도록 자꾸 훈련을 하면 돼요. 그게 훈련이 됐다.

그러면 발바닥도 마찬가지라. 발을 가만히 선 상태에서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가면서, 발을 들어올릴 때 어떤 느낌들이 일어나는지? 그래서 살짝 들 때 어떤 느낌이 또 일어나는지. 엄청 힘듭니다. 내가 니 보고 해봐라 했지. 그거 집중하는 힘을 키우고 그 느낌들을 집착하지 않기 위한 것들이라.

그래서 그 느낌들이 일어나면 그것들을 분명하게 보고 다시 또 그대로, 발을 가지 말고 그대로 그냥 다시 또 내리면서 그 느낌들을 보라는 거라. 손끝과 마찬가지로 그 느낌의 변화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보면은 기쁨이 탁 일어났다 그러면 요게 기쁨의 강도가 어떤 상태다 하는 것들을 자기가 압니다. 그게 아주 센 거다 할 것 같으면은 집중하는 힘을 갖다가 마찬가지로 아주 센 집중하는 힘을 갖다 거기다가 대비를 시켜주어야 돼. 그래서 물방을이 파바바바박 튀듯이 그 기쁨들을 보게끔 되는 거라. 그러면 그 기쁨을 딱 기쁨이 변하는 것을 잡아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 기쁨이 탁 사라져버리게 되는 거라.

집중하는 법들을 강도를 자기가 조절할 수가 있으면은 기쁨은 잡기가 쉬워집니다.

그래서 자꾸 평상시 때 손을 맞닿는 것들이나 발을 땅에서 들어올려고 내리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집중하면서 집착하지 않고 그것들이 변하는 모습들을 자꾸 보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수행은 얼마만큼 집중하는 힘이 있느냐에 따라서 사띠가 강해지고 안 하고 합니다. 그거는 100%라. 그래서 집중하는 거 없이 사띠만으로 뭔가 도와 과에 이르겠다, 그럴 수는 있어요. 이론적으로는. 근데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의 집중력들은 반드시 키울 필요성이 있다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도록 그렇게 하면 됩니다.

기쁨은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고 일어나는 것이 기쁨이 그렇게 탁 사라지고 나면 편안합니다.

수카라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기 전에 '빳삿디(passaddhi)'라고 하는 경안. 아주 가벼워. 그러니까 대상을 보면 대상이 아주 가볍습니다. 걸어갈 때도 꼭 어디 구름 위에 뜬 것처럼 뒤뚱뒤뚱 걷듯이 걷는 것처럼 보여. 아주 몸이 가벼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게 이제 경안이라고 하는 현상들이 일어나서 그래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몸이 뒤뚱뒤뚱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잘 걸어가고 있는데 지는 그렇게 느끼는 거라.

그리고 대상을 보면 꼭 솜털이 파르르르 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지듯이 보입니다. 그리해도 어쨌든 마음에서는 ‘아, 이것도 수행에서는 방해가 된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경안이라고 하는 빳삿디가 탁 일어나면은 어떤 경우도 마음에서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완전히 극복된 것처럼 보여버립니다. 그래서 뭘 봐도 아주 가볍고 편안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할 때도 그냥 너무 좋습니다. 그런 상태가 된 것처럼 착각을 해버립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도와 과에 이른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고를 완전히 극복을 했고, 그것들을 완전히 철견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거라.

 

다른 상태에서 고를 보는 것들이 다른 형태로서 보여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 것들을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현재 보이는 것이 아주 가볍고 편안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일어난 대상이다 하고 마음을 먹고 그냥 변하는 것을 봐버리라고. 가볍게 봐버리면 그 편한 것도 어쨌든 언젠가는 싹 사라집니다. 그러면은 그런 편안한 것들이 일어나더라도 그냥 대상으로서만 보게끔 됩니다. 그러면 바르게 부처님이 말한 도의 길로 갈 수 있게끔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 편안함이 일어나더라도 편안함에 머물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수행이 안 될 때 편안함이 일어나면은 그냥 게으름이 일어나고 졸음이 일어나는데, 지금 편안함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냥 거기 머물러 버립니다. 마음은 오히려 더 활기 있게 되고 더 좋은 상태인데, 그거 계속 있을려고 그럽니다. 그러면 외부적인 자극이 있어도, 누가 뭐라 하든 간에 내 마음은 편안하거든. 그냥 그 소리도 스치듯이 사르르르 와서 사르르르 사라져요. 그런데 뭐 거기에 신경 쓸 이유가 없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거기서 계속 머무니까 ‘아, 이거 내가 어떤 상태에 이르른 거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절대 아니니까. 그냥 그렇구나 하고 그 상태 편안한 거를 보려고 해야 됩니다. 현상은 현상일 뿐입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딱 관찰하면 그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보입니다.

10가지 현상은 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 편안한 거 다음에는 이제는 '수카(sukha)'라고 하는 평화로움이 와지고 그렇게 쭉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수카 다음에 일어나는 게 '아디목카(adhimokkha)'라고 확신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인제 착각을 해버립니다. ‘아 나는 불·법·승에 대해서 한치의 의심도 안 해. 이 수행법에 대해서 한치의 의심도 안 해. 그냥 이 길로 가면 돼.’ 그래서 나는 쉽게 말하면 나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이 길로만 가면 된다 하고 마음 먹고 도비도지견청정을 뛰어넘었다고 착각을 해버리게 됩니다.

 

근데 왜 부처님이 그런 확신을 삿다(saddhā)가 아니고 여기 아디목카(adhimokkha)라고 했을까? 아디목카는 뭔 의미라요?

그 확신이 있는 건 좋은데 그 확신을 다른 데도 다 적용을 하려고 하니까 문젠 거라. 이거 안한다. “그거 아니야. 틀렸어.” “수행을 그리하면 안 돼.” “내가 경험 해봤어.” 그게 왜 그렇게 필요할까? 그게. 하게 사람마다 다 틀린데. 그게 쉽게 말하면 아디목카라고 하는 거라.

아디목카와 삿다는 반드시 구분을 해야 됩니다.

“오직 불·법·승만이 믿음의 대상이 되고 이 수행법만이 최고다.” 맞지. 자기한테는 그게 맞지. 근데 그걸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는데? 그게 맞다고 해야 돼? “그게 맞으니까 니는 따라와” 지가 뭔데 그렇게 하는데? 그거는 아니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그런 확신이 들더라도 그것도 하나의 대상이다 하고 생각을 하고 관찰을 해야 됩니다. 그런 확신들이 일어났을 때는 ‘아, 이게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수다원에 이르렀는가?’만 생각을 딱 해보십시요.

수다원에 이르렀으면 쉽게 말하면 그런 견해가 없습니다. 유신견이 떨어져버렸기 때문에. 그런데 나는 그것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면 이거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거라. 아직 수다원에는 안 이르렀고, 내가 삿다가 아니라 아디목카에 빠졌구나 하고 생각을 해보십시요.

 

그래서 마음을 조금더 부드럽게 만들고, 맞기는 맞는 거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극복하도록 하고. 그냥 "추측이다"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추측. 아직 내가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것도 완전하게 확신을 가진 게 아니고, 지금의 상태에서는 그것조차도 추측이다는 거라. 이 수행법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이 길 외에는 없다. 그것도 추측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왜? 아직은 수다원에 안 이르렀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하게 확신하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거라. 그래서 그 부분은 여러분들이 잘 조절을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걸 안 하면, 사실은 이거는 생겨나야, 일어나야 되는 것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수다원이 되면 그런 확신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 그래서 흔들리지 않게끔 돼. 그래서 그건 필요악과 같은 건데, 여기에 빠져버리면 안 돼.

 

음. 이슬람들은 이슬람 원리주의 한번 봐봐. 그것이 최고고 그것만 하게 되는 거고.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을 죽여야 되는데? 그거 말이 안 맞잖아. 내가 그런 확신이 든 것으로서 인해서 왜 내 마음은 오히려 더 경직되고, 왜 자꾸 아군과 적군을 자꾸 왜 구별하게 되는데? 오히려 더 반대가 돼야 되는데, 왜 그렇게 되느냐는 거라. 그게 아직은 수다원에 안 이르렀고 지금은 여기 아디목카의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는 거라. 그걸 빨리 극복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 뒤에 다 있습니다. 어쨌든 다 마음을 아직은 내가 수행을 더 하고 무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들을 볼려고 해야 돼. 생각이 안 일어나는 상태까지에는 이르러야 됩니다.

생각이 안 일어나고 그냥 변하는 것만 주구장창 보이는 상태까지 돼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현상이 일어날 때는 어떤 거냐 하면,

모든 현상들이 빠르게 변하는 것처럼 보여.

그다음에 두 번째는 대상들이 희미해지고 어떨 때는 부분적으로 이렇게 막 사라지고 해체되는 것처럼 보여.

그다음에 세 번째는 그것들로 인해서 되게 괴롭다 하고 느끼게 돼.

그러고 나서는 그것이 집중이 조금 잘되면은 집중하는 것으로 인해서 생각들도 많아지게 된다는 거라.

그 단계를 딱 넘어서고 나면은,

그다음에 이 10가지 현상들이 보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그럼 열 가지 현상들이 보이고 나면은 대부분은 그 상태에 머물려고 합니다. 그럼 빨리 그 상태에 머물려고 하는 마음들을 갖다가 빨리 전환을 시켜줘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들만 잘하면 적어도 그다음 단계에서 대상들이 빨리 변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그전에는 열심히 그것들을 알아차리려는 노력하는 마음도 있고, 어떨 때는 좀 생각들도 일어나고 산만한 마음들도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좋은 현상들도 일어났다. 그러면 그걸 탁 극복하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마음에는 명료해집니다. 대상이. 아주 그냥 뚜렷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뚜렷해지는 모습에 대해서 일어나는 법에 대한 확신들,

그다음에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행복해지는 상태가 되는 것,

이것들은 이미 앞에 그 10가지 장애들을 극복하고 나면은 탁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이거는 극복한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러면 다음 단계로 탁 성숙하게 됩니다.

 

대상이 아주 명료해질 때까지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을 붙잡지 않고 그 속에 내가 개입되지 않고, 그러면은 대상은 아주 명료하게 보입니다.

그게 빨리 변하든 천천히 변하든 그때는 전혀 신경 안씁니다. 그냥 명료한 상태로 그대로 보게 되니까, 마음을 아주 평온한 상태에서 대상을 볼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그렇게 만들고,

 

그때가 되고 나면은 또 한 번 고비가 또 옵니다. 생멸이 보이기 때문에.

그때는 일어나는 건 안 보이고, 무조건 그냥 보면 이게 없어져버리고 없어져버리고 죽겠어요. 명료해진다고 해가지고 거기서 그냥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또 지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은 지금은 좋은 거 일어난다고 거기 빠져있지 말고, 대상이 명료해질때까지 그냥 열심히 하면 됩니다.

 

하나 더, 이 정도에 이르렀으면은 부처님은 이제는 그 사람은 자기가 선택해서 도와 과에 이르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인제는 나는 도와 과에 착 있어. 보여. 눈에서. 실제로는 한참 멀었는데도 갈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이 탁 들거든.

그런데 전제조건이 또 있어요.

잠 덜자고, 먹는 거 덜 먹고, 노력하는 힘들이 훨씬 지금보다도 더 많이 해야 되고,

그래서 잠 덜자고, 덜 먹고 하는 것들이 한 묶음입니다.

그다음에 하나가 더욱더 노력하는 것들이 한 묶음이고,

 

그리고 대상들에 대해서 지키는 힘들이 생겨나는 거라.

오온을 통해서 육근들이 접해진 것들을 지켜서 그 어떤 것에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힘이 생겨나야 되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려야지, ‘음, 그래’ 뭐 여기에 쏙 쏠려면 안 된다는 뜻이라.

 

그리고 나서 그렇게 되고 나면 자기 상태에 대해서 가장 정직해집니다.

‘아, 내가 아직 요것밖에 아직 못 이뤘구나.’ 자기 상태를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그러면 많이 겸손해집니다. 내가 아직 이것도 안 됐는데 남한테 요래라 저래라 할 여유가 없어져 버리는 거라. 지 것만 하게 돼.

 

그래서 요게 갖추어졌을 때, 요 상태에 이르르면은 인제는 도와 과가 눈에 보인다고 그럽니다. 지가 이제 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는 거라.

 

그마만큼 이 상태는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좀 더 노력해가지고 요 상태에는 이르러야 됩니다. 왜? 이 상태에 이르러야만 다시 떨어지더라도 그걸 끄집어 올리는 시간이 아주 짧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놓지는 않게끔 돼. 이 상태에 못 이르면 여러분 집중하다 집에 간다? 수행 안 합니다.

 

그래서 이 상태에는 이를 수 있도록 자꾸 노력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