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집중수행 법문

2025 집중수행 2일차 - 심청정 (20250914. 오덕훈련원)

담마마-마까 2025. 9. 25. 14:57

* 2025 집중수행 2일차 - 심청정 (20250914. 오덕훈련원)

https://youtu.be/FX7CSX-W5h4?si=-QlZmu13MyasrWOx

 

<7:20초 이후부터 법문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하십시요. 합장하고, 오늘 삼귀의 팔계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Buddhaṁ saraṇaṁ gacchāmi. 붓당 사라낭 갓차미

Dhammaṁ saraṇaṁ gacchāmi. 담망 사라낭 갓차미

Saṅghaṁ saraṇaṁ gacchāmi. 상강 사라낭 갓차미

Dutiyampi buddhaṁ saraṇaṁ gacchāmi. 두띠얌삐 붓당 사라낭 갓차미

Dutiyampi dhammaṁ saraṇaṁ gacchāmi. 두띠얌삐 담망 사라낭 갓차미

Dutiyampi saṅghaṁ saraṇaṁ gacchāmi. 두띠얌삐 상강 사라낭 갓차미

Tatiyampi buddhaṁ saraṇaṁ gacchāmi. 따띠얌삐 붓당 사라낭 갓차미

Tatiyampi dhammaṁ saraṇaṁ gacchāmi. 따띠얌삐 담망 사라낭 갓차미

Tatiyampi saṅghaṁ saraṇaṁ gacchāmi. 따띠얌삐 상강 사라낭 갓차미

 

Pāṇātipātā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āmi.

(--띠빠-- -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

살아있는 생명 해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Adinnādānā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āmi.

(아딘나--- -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

주지 않는 물건 가지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Abrahmacariyā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āmi.

(아브라흐마짜리야- -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

모든 성적인 행위를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Musāvādā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āmi.

(무사--- -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

거짓되게 말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Surāmeraya majja pamādaṭṭhānā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āmi.

(수라--라야 맛자 빠마-닷타-- -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

방일의 원인이 되는 술이나 약물들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Vikālabhojanā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āmi.

(위깔-라보-자나- -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

때 아닌 때에 먹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Nacca gīta vādita visūkadassanā mālā gandha vilepana

dhāraṇamaṇḍana vibhūsanaṭṭhānā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āmi.

(낫짜 기-따 와-디따 위수-까닷사나- -- 간다 윌레-빠나

-라나만다나 위부-사낫타-- -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즐기는 장소에 가거나, 꽃이나 향수로

몸을 치장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Uccāsayana mahāsayanā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āmi.

(웃짜-사야나 마하-사야나- -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

넓고 높은 침상 위에서 잠자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스님]

Imāni aṭṭha sikkhāpadāni, ajjekaṁ rattindivaṁ uposatha

sīlavasena sādhukaṁ appamādena rakkhitabbāni.

(이마-니 앗타 식카-빠다-, 앗제-깡 랏띤디왕 우뽀-사타

-라와세-나 사-두깡 압빠마--나 락키땁바-.)

이와 같은 포살일 팔계를 하루 밤 낮 동안

잘 지켜나가 이 여덟 가지 계율 따라 수행해야 합니다.

[대중]

Āma bhante. (-마 반떼-.) 잘 알겠습니다, 스님.

[스님]

Sīlena sugatiṁ yanti, Sīlena bhogasampadā,

(--나 수가띵 얀띠, --나 보-가삼빠다-,)

Sīlena nibbutiṁ yanti, Tasmā sīlaṁ visodhaye.

(--나 닙부띵 얀띠, 따스마- -랑 위소-다예-.)

이와 같은 계를 잘 지킴으로써 행복해지고,

이와 같은 계를 잘 지킴으로써 부유해지며,

이와 같은 계를 잘 지킴으로써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니,

이와 같은 계를 청정히 지켜야 합니다.

[대중]

Āma bhante. (-마 반떼-.) 잘 알겠습니다, 스님.

 

 

편하게 앉으십시요.

 

오늘은 두 번째 시간, 마음의 청정 부분입니다.

마음의 청정은 사마타 수행할 경우에는 삼매에 드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1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에 들었을 때 마음은 그 선정에 따라서 굉장히 청정해집니다. 그런데 그 선정에 들었을 때 일어나는 선지·요소 외에는, 다른 것들이 없습니다.

 

그 "선지·요소"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대상을 향해서 내가 바르게 겨냥을 했고(vitakka), 그래서 그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상태에서(vicāra), 그 현상들을 무상·고·무아로 보게 되면은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나게 되고(pīti),

그런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이 잔잔하게 퍼져서 행복감들이 일어나게 되고(sukha), 그리고 마음이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오롯하게 그 대상에 머물러 있게 되고 다른 대상은 다 없는 상태가 된다(ekaggatā). 그럴 것 같으면 그것이 초선정에 든 상태가 됩니다.

 

쉽죠? 너무 수월해. 그렇잖아. 그거 간단한 거잖아. 뭔가 집중해가지고 탁 그것만 알게 될 때 다른 것들은 소리도 안 들리고 안 보이잖아. 무엇에 빠져 놔놓으면. 그런 상태와 같은 거라.

위딱까와 위짜라라그 하나의 대상만 보고 오롯이 매진하고 그것만 딱 아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러면은 그것만 알게 되면은 대부분은 마음에서 되게 기뻐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모르던 사실들을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기쁨 마음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자꾸 어느 정도 진행되다가 보면은 그냥 기쁨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냥 꽉 찬 것처럼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진 마음들이 되는 거고. 그러면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게끔 되는 거라.

 

그런데 그 좋은 것들을 왜 최고 마지막 상수멸이나 아니면 4선정까지 됐으면 좋겠는데 왜 1선정이라 했을까? 너무나 좋은 거잖아. 그런데 그게 항상 여러분이 그렇게 해 있을 수 있어요? 안돼요. 일상생활에서는 그게 안 되는 거거든. 그래서 거기에 푹 빠져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거기에서 나와야 되는 거라. 밥도 먹고 걸어 다니기도 하고 말도 해야 될 거 아니라. 그리 안 하고 그냥 거기에만 빠져있을 순 없기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나와야 되는데,

 

그러면 나오고 나서 1선정하고 비슷하게 그렇게 경험을 해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가장 낮은 단계의 선정이지만. 그럼 위빳사나 수행해가지고 이게 가능하지 않을까? 일선정하고 비슷한 상태가 되지 않을까?

 

지금 스님 소리가 들립니까? (예) 스님 소리 외에 집중하고 있으면 스님 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들립니까? (아니요) 그런데 실제로는 다른 소리가 있거든요. 그런데 집중하고 있으면 스님 소리 외에는 안 들리는 거라. 그러니까 온 마음을 갖다가 그 소리에다가 집중을 하고 있는 거라. 스님 여기 입을 보든지 아니면 내 귀를 보든지 아니면 귀에서 부딪히는 그 파장을 보든지 아니면 그 소리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감성을 보든지, 어쨌든 사람마다 틀릴 수는 있지만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스님의 소리 외에는 안 들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럼 두 가지는 겨냥이 된 거죠.

소리가 있고, 그 소리를 내가 듣고 아는 게 있고,

그게 위딱까(vitakka), 위짜라(vicāra)라는 의미입니다.

그 두 개 외에는 없거든. 딱 맞아떨어지는 거라.

여기 뭐가 있다, 그러면 내가 요걸 맞출려면 이걸 다시 정확하게 들어가지고 정확한 힘으로 요기에다 탁 던져야 되겠지. 그러면 탁 맞잖아. 그럼 던질 때는 어떻게 해야 돼? 다른 거 보면 안 돼. 요것만 봐야 돼. 그리고 정확한 힘을 주어야 되는 거고, 정확한 속도가 있어야 되는 거고, 그래서 거기다가 탁 맞아떨어지면 딱 맞아떨어지잖아.

 

소리가 계속 지속해서 들리는데, 스님의 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안 들리는 상태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이 두 개가 딱 맞아떨어져서 계속 지속해 나가고 있다는 거라.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계속적으로 이어져 있는데, 마음은 계속해서 거기에 붙잡혀 가지고 그냥 거기다가. 그런데 그런 상태가 쭉 이어지면 마음이 평화로워 집니다. 고요해지면서.

그 소리를 분명하게 인식을 했는데 소리로 인해서, 처음에는 그런 마음도 들겠지. 감정적으로 일어나가지고 그냥 ‘아, 내가 이제 부처님 진리를 알겠다’. 하는 그런 마음이 확 일어나기도 하고 뭐 하겠지만, 그거는 어찌 보면 부차적인 거죠. 소리로 인해서 내 마음이 변해가지고 내 마음이 그렇게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지, 소리가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라는 거라.

 

이렇게 돼버리면 이 두 개에서 끝나버려.

위딱까vitakka, 위짜라vicāra 두 개만 있는 데서,

거기서 기쁨이 일어났다 할 것 같으면 그 기쁨까지는 되는데,

이게 몸 전체가 평화롭게 되고 행복감이 있고, 그다음에 여기에만 계속 머무르고 있는 상태가 되지 못하고, 요 세 개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기쁨이 일어난 것으로 인해서 딱 거기에 갇혀버리는 상태라. 그렇게 되면은 일단은 소리도 결국엔 안 들리게 되고, 그 기쁨도 내가 만들어서 여러 가지 현상들로 만들어버리게 되고, 그러면 수행은 끝나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렇게 안 했다고 했을 때,

그냥 그것으로 인해서 아, 진리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저 소리도 들어보니깐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구나. 그걸 내가 귀를 통해서 듣고 있으면 귀에서 들리는 파장이 탁탁 치듯이 하고 있거든. 똑같은 게 아니고,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거라. ‘아, 이게 부처님이 말한 무상이구나’ 하는 것들로 이해를 하게 되는 거라.

 

감성을 통해서 하더라도 꼭 마찬가지인 거라. 어? 여기 느낌이 저 소리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이 일어났는데 그 자리에서 탁 사라지는 거라. 일어난 자리에서 사라지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되는 거라. 그러고 나서 또 다른 게 일어나고 사라지게 되는 거지, 일어난 자리에서 사라지는구나. 쉽게 말하면 마음의 현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생멸만 있는 것이구나. 일어나면 사라지게 돼있고, 일어나면 사라지게 돼있구나 하는 걸 갖다가 알게 되는 거라.

그렇게 되면 몸 전체가 아주 그냥 평온해지고 행복해지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소리 듣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그리하면 당연히 그외에는 다른 건 영향을 못미쳐. 누가 나를 불러도, 아니면 뭔가가 시야에 뭐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보이는데도 나는 전혀 안 보이는 상태가 되는 거라.

 

이 다섯 가지가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 일선정과 마찬가지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대상을 하나 딱 알아차리는 건데 그게 가능해진다는 거라.

그러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할까? 굳이 사마타 수행을 통해가지고 하나의 대상을 오롯이 봄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초선정에 가지 않아도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 초선정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거라.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심청정이라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1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에 들음으로 인해서 심청정이 되는 상태가 있고,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 심청정이 되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정에 일단 들고 나면 어떻게 돼요? 초선정에 들어도 사마타 수행에서 초선정에 들면 거기에 다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 안에 들어버리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롯이 그 대상만 있게 되는 거라. 변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거라.

 

아까 5가지 선지가 일어났다고 했지만, 그 다섯 가지 선지도 안 변하는 상태로서 딱 존재를 하고 있는 거라. 왜? 사마타 수행에서는 변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호흡을 하더라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느낌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들이쉼 한번, 내쉼 한번, 변하지 않는 요것만 있거든. 그러니까 아주 단순해요.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다섯 가지 선정의 상태에 도달해 있으면 그냥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내쉬면 ‘내쉰다’고 분명히 앎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거기에 딱 붙잡혀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나 행복들이 일어나게끔 되는 거라.

 

그러면 거기 있으면은 내가 움직이지도 못해. 걸어가지도 못하고. 그러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죠? 그런데 조금 전에 위빳사나 수행할 때는, 그 소리는 내가 일으킨 게 아니잖아. 밖에서 들어온 것들이라. 그리고 그거는 변하는 대상이라. 스님이 말을 안 해버리면 그 대상이 끝나버리는 거라. 그러면 선정은 딱 끝나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는 초선정의 상태가 계속적으로 대상만 있으면은 대상을 옮겨가면서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상태가 돼버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만약에 그렇게 해가지고 대상을 옮겨가면서 계속적으로 초선정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가능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고 그런 것이 완전하게 아라한까지 도달하는 데 유용한 상태고 그게 가능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를 하지, 왜 선정에 들어가지고 가만히 있다가 거기서는 반벙어리가 돼가지고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퍼뜩 깨어나갖고 또 그다음 이선정으로 가든지 아니면 일상생활을 하든지 이래야 되는데, 왜 그걸 하고 있느냐는 거라.

 

초선정이 물론 좋은 것은 맞습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도. 세상 다 가진 기분이지. 그런데 그게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아야만이 그다음 선정으로 넘어갈 거 아니라. 그런데 좀처럼 일으키기가 힘듭니다. 이것 같이 좋은 게 없는데 왜 이걸 놔두고 다른 걸 할라 할 거라? 안 한다고.

 

그래서 선정을 해본 사람들은 경험하겠지만, 초선정에서 이선정으로 넘어가는 게 하늘만큼 힘들어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건데, 초선정이. 어쨌든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도 선정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선지는 작아집니다.

쉽게 말하면 대상이 점점 더 깊어지고 좁아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하나만 그냥 딱 묶여 있는 상태에서 그 속에서 사띠만 있게 되고, 그 속에서 기쁨만 있게 되고, 행복감만 있게 되고, 이렇게 자꾸 바뀌어져 나가는 거라. 아까 같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필요 없어져 버리게 되는 거라. 그때가 되면.

 

그 대상이 문제가 아니고, 이제는 쉽게 말하면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고 마음의 대상으로 바뀌어져버린 상태가 돼버리게 되기 때문에, 마음의 대상은 하나만 있어도 되거든. 하나만 있어도. 기쁨이 있으면 기쁨이 있다고만 알아차리고 있으면 충분히 선정에 들어있는 상태가 되는 거라. 한세상 즐기다가 나오기도 해.

그런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게 번뇌가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거라. 탁 깨어나서 일상생활 해보니까 누가 나를 뭐라 하면 금방 성내는 게 금방 또 일어나게 되고, 욕심부리는 것도 금방 있게 되고 그러는 거라.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들이라.

 

그래서 칠청정을 설명할 때는 위빳사나 수행에서의 1선정을 설명을 하게 됩니다. 심청정을.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은 선정은 어디까지 간다고? 초선정 이상 가면 안 돼.

초선정 이상 가면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놓쳐버리게 되는 거라. 대상을 놓아버리고 움직이지 않아야만 초선정 이상 갈 수가 있게끔 돼.

그런데 왜 그거 안 해도 충분하고, 그렇게 해봐도 그게 해탈하고는 전혀 무관하고, 번뇌를 소멸시켜주는 거하고도 관계가 없는데, 왜 그걸 해야 되는데? 차라리 대상을 보면서 초선정 상태로 계속 있게 되면은 수행할 때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가능해지는 거고, 그러면서 마음은 점점 더 번뇌로부터 멀어지게끔 되는 거고,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가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바와나bhāvanā'라는 것은 어떤 의미냐면 '계속 그런 상태를 훈련해가지고 쌓아간다'는 뜻입니다.

 

밥 먹는 것을 계속 훈련하면은 처음엔 힘들지만 나중에는 수월하게 해지게 되는 거죠. 일상생활 할 때 초선정과 마찬가지 상태가 되는 상태를 경험을 해봤으면, 만약에 걸어가면서 그 상태가 됐다. 그러면 계속 훈련하면 될 거 아니라 그렇게. 그럼 언제든지 걸어갈 때는 초선정과 같은 상태가 되어 있는 상태가 돼는데, 그러면 번뇌하고도 관계 없어지는 거고, 그게 오히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인데 왜 그 길을 갖다 자꾸 안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 프린터물 나가는 심청정 부분은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심청정의 상태에 어떻게 도달을 할까? 어떻게 하면 돼요?

딱 하나,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만 할 수 있는 능력만 생기면 심청정은 생깁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구분 가능해요? 어떻게 구분해요?

(수행자 : 알아차림 하면 되어지지 않나요?)

배가 불러오고 있으면 불러온다고 알고, 배가 꺼질 때는 꺼진다고 알고, 그거는 당연히 아는 건데, 그게 어떻게 분리돼 있는 거라고 알 수 있어요?

 

(수행자 : 의도가 일어나고 몸이 움직이는 ... ) 땡! 넘어갔습니다.

그건 나중에 몸과 마음에 대한 관찰을 넘어서서 원인·결과 부분에 들어가져야만이 가능해집니다. 이거는 지금 전혀 관계없는 겁니다. ‘이게 몸이구나, 이게 마음이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는 거는?

(수행자 :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는 몸이 하는 거고 루빠가 하고, 그다음에 그걸 알아차리는 거는 정신이 하는 거니까,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는 것)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누가 그걸 몰라요? 내가 ‘이게 다른 거네’ 하는 걸 어떻게 아느냐는 거라. 물질적인 현상이 물론 호흡을 하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고 있어요. 뭐 내가 관찰하든 안하든 지혼자 하고 있고, 내가 관찰하면 그것도 하고 있는 줄 알아.

 

그런데 이게 물질적인 현상이고,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라는 걸 아는 걸 어떻게 증명하느냐는 거라. 증명을 해야 될 거 아니라.

증명을 했다는 것은 내가 분명하게 이 현상에 대해서 이해를 했다는 얘기잖아.

 

(수행자 : 육근으로 들어오는 거를 육경에 부딪혀서 마음이 아는 거. 그래서 각각의 식으로 변형되는 거를 아는 게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그만해요.

그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자꾸 수행을 통해서 지가 경험해 보려고들 안 하고, 병들이 뭐냐면 자꾸 경전이나 뭔가로 인해가지고 이걸 갖다가 유추해 보려고 하는 거라. 아니 경험해 봤으면 알 거 아니라 금방. 안 해봤어? 경험을?

(수행자 : 물질적인 현상은 4대 성품으로 구분이 가능하고)

물론 맞아요. 사대성품, 그런데 그 물질적인 4대 성품들은 빨리 변해요, 안 변해요? (수행자 : 빨리 변하죠) 속도가 틀립니다. 여러분들. 마음이 바뀌는 속도하고 물질이 바뀌는 속도가 틀립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두 개가 바뀌는 속도가 틀리다고 할 것 같으면 이거 왜 구분을 못해? 간단하잖아. 마음이 있으면 마음이 있다는 것들을 갖다가 내가 마음이 뭘 하고 있는지를 갖다가 보면 될 거 아니라.

(수행자 : 보고 있는데...)

그럼 보고 있는 걸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거라. (수행자 : 마음이 알죠)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갖다가 뭔가가 나라는 제3자가 그걸 관찰하듯이 알게끔 됐을 때 , 마음이 따로 있구나하는 것들을 알게 되는 거라. 그리고 그 마음이 물질적인 현상을 관찰하고 있구나하고 알게 되는 거라. 그걸 얘기하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분명히 구분해서 알게 됐다는 현상이라. 그걸 안 하면 소용이 없어.

그냥 뭐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면, 불러오고 꺼지는 건 물질적인 현상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다? 그걸 아무리 하고 있어 봐야, 실제 '나마루빠냐나(nāmarūpañāṇa)'에는 안 이르는 상태가 되는 거라. 개념적으로만 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 내가 체험하는 상태가 아니게끔 되는 거라.

 

그게 지금 얘기를 하는 건데, 아침에 일어났죠?

아침에 일어날 때 어떤 마음이 먼저 생겨나든가요? 뭔가 어떤 마음이 싹 일어나면서 마음이 착 이제 깨어났다는 걸 알게 돼. 그거 경험을 본 사람이 있어요? 아니 지금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알았다는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는 거는 말이 안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깨어날 때 깨어나면서 뭔가 통로를 통해서 의식이 샥 이렇게 깨어나는 것이 보여져야 돼. 그러면서 의식이 탁 깨어나지고 나면 마음이 호흡에 가있다면 호흡이 숨을 들이쉬는지 내쉬는지를 볼 수가 있어야 되는 거라. 그래야 내가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 현상을 완전히 분리해서 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고 증명할 수 있을 거 아니라.

 

그런데 그게 안 되는데 지금, 일어날 때 눈 비비고 숨을 어떻게 쉬는지도 모르고 그냥 퍼뜩 일어났다. 그런 사람한테 어떻게 첫 번째 현상에 도달했다고 얘기를 할 수가 있느냐는 거라.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진짜 부지런히 해야 됩니다. 잠잘 때부터 시작해가지고 잠자고 일어나는 첫 순간부터 해가지고 마지막 잠에 들 때까지는 진짜 죽어라 하고 노력해가지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했을 때, 그때야만이 이제 비로소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구분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를 수가 있습니다.

하루 정도는 적어도 그렇게 열심히 해야 됩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예)

 

소리가 들어오죠? 다시 정신적인 현상은 어떻게 느껴져요? 소리 들린다고 알아차리고 있죠? 어떻게 들립니까? 들리는 것이? (수행자 : 탁탁 치면서)

그렇지. 치듯이 느껴지든지, 아니면 소리가 계속적으로 있으면 소리가 빨려들어 오듯이 느껴져야 될 거 아니라. 그게 정신적인 현상들입니다. 물질적인 소리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알고 있는 거라. 물질적인 현상이 치고 있지만, 치고 있는 것들이 내 귀를 통해서 빨려 들어가듯이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 탁 와야만이, 그 빨려 들어온다는 것은 실제 소리가 빨려 들어오는 게 아니고, 그렇게 내가 마음으로 느낀다는 거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분명히 보여지게 될 때,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구분이 되어지게 되는 거라.

 

그러면 다시 하나 물어볼게요.

마음이, 지금 소리가 있어요. 그럼 그 소리로 인해가지고 내가 그 소리를 분명하게 인식을 했어. 그러면 뭐가 먼저라? 소리가 먼저라, 아니면 그걸 인식하는 정신적인 현상이 먼저라? 소리가 먼저지! 소리가 없는데 어떻게 내가 알 거라? 그런데 아주 순차적이지만 거의 동시에 일어나다시피 하는 거라. 소리가 원인이 돼서 내가 그걸 인식하는 마음이 있게끔 되는 거라. 그것까지는 가능하겠죠. (예)

그게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상태가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소리가 있더라도 그걸 인식하는 마음이 없으면 소리는 내하고는 관계없어. 물질적인 현상하고 정신적인 현상은 이렇게 구분이 되어버리는 거라. 그런데 소리가 있어가지고 그게 원인이라서 내가 듣는 마음이 탁 생겼다. 그러면 결과가 되는 거라. 그래서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을 분명하게 알게끔 되면, 그다음으로 연이어 되는 것이 원인 · 결과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끔 되는 거라.

그럼 수행은 조금 더 진척이 있게끔 되는 거라.

 

그런데 단지 차이가 뭐냐?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을 분명히 구분한 상태가 되면 더 공부하려고 그럽니다. 더 열심히, 쉽게 말하면 더 수행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이 구분이 안 되면은 자꾸 비교를 하게 됩니다. 남은 어떻게 수행하고 있나, 저 사람은 왜 이렇게 걷지? 왜 이 정도의 속도로 걷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수행 잘하고 있는지 없는지 보는 것 같이 보이고.

쉽게 말하면 나에 대해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자꾸 생겨 나온다 할 것 같으면은, 수행을 하는 데서, 그러면 지금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을 구분을 안 하고, 딴짓하고 있다는 얘기라.

 

그런데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 현상을 보는 것과 동시에 이제 그것이 필요 없어져.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보이든지, 그게 뭐가 중요한데? 내가 지금 이 현상을 보기도 바빠 죽겠는데.

왜? 그 현상은 계속적으로 바뀌고 있거든. 호흡도 조금 전에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분명히 구분했는데, 그게 겨우 있는 시간이 3.4초밖에 안 돼. 그다음에는 또 다른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거라. 그것 쫓아가기도 바빠. 이걸 구분해서 보기에도. 호흡 하나 하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언제 그걸 신경 쓸 시간이 있어요?

 

공부를 안 하면 자꾸 그렇게 바뀌어 버린다는 거라. 공부를 해나가고 직접적으로 실제 공부를 하면은 그거에 신경 안 써요. 안 쓰고 지금 현상들을 갖다가 분명하게 보는 것들로 전환이 돼버리는 거라.

쉽게 말하면 견해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별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그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데 하찮지 않게끔 자꾸 여겨지게끔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이게 이제 원인·결과를 탁 아는 상태가 됐거든. 그럼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위빳사나를 통해서 지혜가 열린다고 하는 것은 그때마다 마음이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 되고 바뀌어져 나간다는 뜻입니다. 바뀌지 않는 지혜가 어디 있어? 안 바뀔 것 같으면 뭐 하러 그렇게 해? 이 수행을 계속할 거라? 그래서 원인 결과를 탁 아는 상태가 되면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거지. 나쁜 짓 못해. 나쁜 짓을. 나쁜 짓 하면은 나쁜 결과가 분명히 있을 거 아니라. 누가 나쁜 짓 하려고 할 거라? 누가 나쁜 말을 하고 나쁜 마음을 품고 할 거라? 그게 다른 데 가나? 지가 한 건 지가 받는데? 그럼 좋은 일만 자꾸 하려고 하는 거라. 좋은 말만 하려고 하고.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하고 충돌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어져 버리게 되는 거라. 의심하는 것들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거라. ‘이 길을 계속 가도 되겠다하는 마음이 딱 들게끔 되는 거라. 그러면 그냥 가면 되는 거라. 그때는.

 

요 두 개 단계까지만 딱 가는데 얼마 정도 시간이 걸릴까?

하루? 가능해요? 이틀? 가능해야 됩니다. 그리 안 하면 이 이후에 설명하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무조건 오늘은 수행하면서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구분한다. 요걸 딱 떼어가지고 내가 ‘아, 이게 스님이 얘기한 분리된 느낌이구나’ 하는 걸 느껴보라는 거라.
그거는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알겠죠?

 

그래서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하고 나면, 그다음에 위빳사나 수행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포인트, 예를 들어 볼게요. 물질적인 현상, 여러분 몸은 물질로 이루어졌죠? 호흡도 물질일까요? 호흡도 물질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지금 호흡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 몸을 통해서 호흡을 하고 있어요. 이 몸도 물질적인 거고, 호흡도 물질적인 겁니다. 쉽게 말하면 내 몸이 있는 상태에서 호흡을 하고 있다는 건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얘깁니다. 이 몸이 살아있다는 얘깁니다.

몸도 물질적인 거고, 호흡도 물질적인 거고, 단지 내가 호흡을 대상으로 해서 관찰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몸의 다른 걸 대상으로 할 것 같으면 그 물질적인 것이 대상이 돼버립니다. 일단 그 두 가지는 기억을 하도록 하십시오.

 

그런데 호흡하고 있다는 건 뭐로 알아요? 사띠하고 있는 거라. 호흡하고 있네,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고 있네, 내쉬면 내쉰다고 알고 있네, 그걸 알고 있잖아요. 그거는 마음으로 아는 거라. 마음이 일단 하나 있어요.

 

그런데 마음이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고 내쉬면 내쉰다고 아는데, 어떨 때는 호흡을 들이쉬는 게 아니고 내쉬고 있는데 들이쉬고 있다고 알아차리기도 해. 엇박자가 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다는 얘기라.

그리고 호흡을 들이쉬고 이미 끝나고 나서 내쉬는데 난 아직도 들이쉬고 있는 상태가 돼. 그거는 왜 그래? 그거는 쉽게 말하면 마음을 내가 마음이 있어가지고 마음으로 물질적인 현상을 관찰하고 있는데, 내가 또 의도적으로 마음을 갖다가 또 다른 마음을 내가지고 만든 거거든. 마음도 두 개가 있게 되는 거라.

 

관찰하고 있는 마음이 하나 있는데, 관찰하고 있는 마음을 내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걸 내 마음대로 또 할 수 있는 마음이 또 하나 생겨나 버리는 거라.

화가 일어났다. 화가 일어난 거는 일어난 걸 뭐로 가지고 알아요? 마음으로 알잖아. 그런데 화가 일어난 걸 갖다가 나는 ‘화가 일어났어’ 하고 아는 거는 또 마음으로 알고 있는 거라.

그런데 그 화를 갖다가 나는 멈출 생각이 없어. 계속 화를 내고 싶어. 그러면 화가 일어났다고 아는 마음이 또 하나 있는데, 멈추고 싶지 않고 내가 계속 끌고 나가고 싶은 마음은 또 하나 다른 마음이 또 하나 있는 거라. 그런데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거든. 화도 일어나 있고 그 멈추고 싶지 않은 마음도 또 하나가 또 따로 있는 거라.

 

수행해서 육체적인 현상도 구분을 분명하게 할 수가 있고, 정신적인 현상도 분명하게 구분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걸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생겨나야 되는 거라. 가능하겠어요?

 

그래서 “마음도 '마음'이 있고 '마음의 요소'가 있다”고 부처님이 얘기를 하는 거라.

마음만, 하나만 있을 것 같으면 얼마나 수월하겠어요? 지 마음대로 “가만히 있어라” 할 것 같으면 가만히 있게 되고, “저리 가” 할 것 같으면 저리 가게 되고. 그런데 그렇게 되는 마음은 없다는 거라. 왜? 마음에는 또 다른 조건으로 인해서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나갈 수 있기 때문에.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마음이 항상 쌍으로 일어난다." 기억하십시요.

 

그래서 그 쌍으로 일어날 때의 그 현상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죽은 나를 이렇게 빙의에서 위에서 딱 내려보듯이 ‘어, 저건 나네’ 하고 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대상은 알아차리고 있는데.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저기 하나 있는데, 그 알아차리는 마음을 내가 여기 밖에서 보고 있다는 거라. ‘어, 쟤가 알아차리고 있네’ 그런 상태는 경험을 해보라는 거라.

그게 바로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구분이 되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것까지만 일단 하면은 여러분들은 조금 더 수행하는데 좀 수월해질 겁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집 지을 때 벽에다가 그 진흙을 이겨가지고 착착 붙여 놓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숙련되지 않을 때는 붙이면 떨어져요 자꾸. 그런데 나중에 숙련이 되다 보면 적당한 힘과 그리고 만드는 것들이 적당해질 것 같으면 탁 붙이면 가서 착 달라붙습니다. 안 떨어져요.

수행도 그와 같습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딱 구분이 되어지면, 요 진흙을 갖다가 잡아가지고 저 벽에다가 탁 갖다가 붙이는 게 보입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으로 물질적인 현상이 요렇게 싹 날아가 가지고 저기에 딱 붙는 게 착 보여. 그리고 저 벽은 마음입니다. 그걸 갖다가 착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어 갖고 저걸 착 달라붙는 게 보여.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탁 날아와가지고 찰싹 달라붙고, 또 탁 날아가가지고 찰싹 달라붙고 하는 것들이 보여지는 때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이 구분이 되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되는 게 대부분 그렇게 할 것 같으면 , 내가 어떤 마음을 관찰해야 되지?’ 하는 마음이 생겨버립니다. 저 벽이라고 하는 마음을 관찰해야 되는지, 아니면 벽에 와서 물질적인 현상에 와서 싹 날아와서 탁 부딪히는 것을 보는 마음에 와서 탁 인식하는 걸 갖다 보는 이 마음을 관찰해야 될지 헷갈려버리게 됩니다.

 

어떤 거 관찰해야 돼요? (수행자 : 인식하는 것을 보는 마음) 땡!

아무거나 보십시요.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 가장 뚜렷한 것만 보면 됩니다.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데, 헷갈리는 순간 이게 깨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마음이 보이면 ‘대상이 와서 탁 달라붙네’ 하고 알 것 같으면 ‘달라붙는다고’만 알아차리면 돼. 그런 마음이 일어난 것들이 보이면 그 마음이 일어난 것, 보이는 그 마음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귀를 통해서 소리가 들어옵니다. 그러면 마음을 어디다 둬야 돼요? 귀에 두고 있다. 그러면 귀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관찰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대상이 되어야 될까요? 아니면 귀라고 하는 그 소리를 듣는 기관이 대상이 돼야 될까? 아니면 그 소리가 부딪쳐가지고 마음을 울리는 이 감성 물질이 대상이 돼야 걸까? 어떤 게 대상이라? (수행자 : ...) 땡!

세 가지 중에 아무거나 다 대상입니다. 하나만, 그대신에 보입니다. 하나만. 이 세 가지가 다 보일 방법은 없습니다. 파장이 있으면 파장이 대상이 되는 거라.

 

(수행자 : 그런데 그런 순간에서 순간들이 지나면은 대상이 바뀔 수도 있죠?)

당연히 바뀌죠. 그거는 찰나찰나 바뀝니다. 아니면 그 소리가 파장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소리가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그 마음이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시시때때로 바뀌는데, 어쨌든 지금 현재 일어난 것은 하나밖에 없어. 그때 마음이면 마음이 대상이 되는 거고, 이게 계속 있으면 좋은데 요놈이 또 안 되고, 그럴 때는 파장이 또 대상이 되는 거고.

 

다 맞는데 어느 것 하나만 딱 대상이 됩니다. 조금 전에 벽에 부딪치는 물질적인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인 현상이 될지 아니면 그걸 부딪치는 마음이 될지, 아니면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마음이 될지,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서?

그런데 헷갈려버리면은 자꾸 하나만 하려고 그럽니다. 하나만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사띠는 깨져버리게 되는 거라. 다른 거 다 놓쳐버리게 되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수행자 : 스님, 이건 조금 조작하는 것 같은 건데 그 당시에 지금 들어오는 현상만을 계속하면)

그렇죠. 가장 강하게 내한테 와닿는 최고 대장만 내가 알아차린다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럴려면은 마음이 일단 좀 평온한 상태로 고요하고 가벼워져 있어야 돼. 그래야만이 금방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탁 잡아채가지고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마음이 무거워져 있고 하면 수행을 못합니다.

오전에 되게 무거웠지? 힘들어 죽겠지? 수행할려는 마음이 없어서 그러는 거라. 맞지? 안 하고 싶었지?

 

수행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생활패턴이 바뀌고 하더라도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사띠 놓쳐갖고 어쩔려고 그러는데? 어떻게 할려고 그래? 그 사이에 여러분들한테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냥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띠 한 번 놓친 것 그거 뭐 ‘좀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면 수행은 진척이 없습니다. 그거 하나 놓친 것으로 인해서 난 큰 위험성에 도달했다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대상은 언제 나한테 다가와질지 모릅니다.

어떠한 현상이 나한테 올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사띠 한번 놓쳤다고? 그거는 아니라는 거라.

사띠는 여러분들의 생명줄과 마찬가지라. 생명줄은 잠깐이라도 놓쳐버리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거라. 사띠를 놓친다는 것은 그와 같다고 마음을 먹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아무리 생활패턴이 바뀌고 하더라도 내가 적어도 사띠를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만 있을 것 같으면 그냥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자꾸 앞서게 되면은 자꾸 사띠를 놓치게 돼. 그런 마음들을 조금은 덜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하기 바랍니다.

 

오늘은 뭘 하라고?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반드시 구분하라.

오늘 인터뷰 할 사람들 있죠? 와서 보고해야 돼 그거를.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심청정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