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집중수행 법문

집중수행 법문4_수행향상의 마음가짐과 삶(선우) (20170228.경주)

담마마-마까 2022. 4. 9. 09:00

https://youtu.be/Dabq0ogPUmY

* 집중수행 법문4_수행향상의 마음가짐과 삶(선우) (20170228.경주)

 

··· 이것에서 납득하는 것만 가지고는 불교를 완전하게 안다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해를 했을 때, 반드시 거기에는 실천이 따라야 된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여러분들을 평온함으로 이끌고, 또 지혜가 일어나게끔 하고, 도와 과의 길로 인도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고와 고의 소멸로 이끌어주는 역할들을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런 과정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불교를 공부한다고 할 것 같으면 실천수행을 해야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꼭 수레가 양 바퀴가 있어야만이 잘 굴러가듯이 배우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양 바퀴가 되어야만이 잘 굴러가서 내가 목적하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해보니까 쉬운 것은 아니죠? 수행해보니까.

 

그런데 수행한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요.

 

첫 번째는 그래도 수행하기 직전에 항상 5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계를 잘 지키는 것이 우선이 돼야 된다 하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계가 스스로를 방호하는 역할들을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물론 다섯 가지 계를 받았는데 그걸 다 지키는 것이 원칙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중에 일부만 취합해서 지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걸 경전에서는 뭐라고 비유를 해놓았느냐면 옷에 비유를 했습니다. "옷에 가사가 끝단이 찢어져가지고 나풀대는 것과 같다" "옷에 얼룩이 묻은 것과 같다" 하고 "구멍이 뚫린 것과 같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옷감, 옷은 실제로는 쓸 수가 없는 겁니다. 다른 부분이 완전하더라도 군데군데 결점이 있을 것 같으면 그건 전체적으로 못쓰는 거와 마찬가지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항상 계는 전체를 다 지킬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첫 번째 부분이고,

 

두 번째는 감각기관, 처음에는 힘들기 때문에 그중에 한두 개라도 딱 잡아서 감각기관만 자꾸 스스로 방어하는 역할들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보는 것만 하겠다, 아니면 밥 먹을 때 맛보는 것만 하겠다, 어떤 경우에는 들리는 것만 하겠다, 어떤 경우에는 말하는 것들만 하겠다, 그렇게 하면서 감각기관을 잘 제어하는 훈련들을 자꾸 해나가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는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어떠한 것이든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것들을 뭐하는 건지도 모르고 넘어가지는 않겠다 하는 마음을 먹고, 또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 관찰하든 움직임으로 관찰하든 변화하는 것으로 관찰하든 느낌으로 관찰하든, 그건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관계없습니다.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겠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혹시라도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이 싫은 느낌이 일어나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시간이 지나면 똑같은 거라도 좋은 느낌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느낌들도 각자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사실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러한 것들이 일어났을 때에는 언제든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하고 마음을 먹도록 하고, 그렇게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수행을 쭉 해 오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더 향상되도록 하겠다 하고 마음을 먹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사람들은 조금 더 깊이있게 공부들을 해야 됩니다.

 

법문 들을 때도 법문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그 요점을 이해해서 "그것들이 어떻게 내가 실제 수행에서 쓰일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잘 기억해 놓아야 됩니다.

 

또 깜맛사까따냐나(kammassakatāñāṇa) 라고 해서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내가 행한 모든 것들,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은 반드시 결과를 낳는다" 하는 마음을 먹고, 그래서 선하게 말을 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을 자꾸 가지고, 생각하고 하는 것도 선한 마음을 자꾸 지니도록 해서 선한 결과들이 올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경험을 통해서 알아야 됩니다.

실제 수행을 해보면 걷고자 하는 의도가 일어나야만이 걸어가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 같으면, 그것도 원인·결과로써 깜맛사까따에 해당이 됩니다. 이것이 일어남으로 해서 저것이 일어났기 때문에 원인·결과로써 업과 업의 결과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렇게 쭉 해나가면 내가 수행을 잘하면 당연히 도를 얻을 것이고, 도가 원인이 돼서 그 과에 드는 결과가 일어나는 거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하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도 자기 자신이 그것들에 대한 책임자이지, 다른 어떤 것들도 책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실제 경험을 통해서 그것들을 이해를 자꾸 해야 됩니다. 그것들에 대한 확신이 탁 들게 되면은 조금 더 흔들리지 않게끔 됩니다.

 

예를 들면은 성냄이 일어났다, 그러면 '그 성냄은 내가 그 대상을 밀쳐낼려고 하는 것이 원인이 돼서 나에게는 성냄이 일어났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 성냄도 밀어낼려고 하는 마음들을 없애버리고 나면 성냄도 사라지는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성냄이 일어날 때,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그게 성내는 것인지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나중에 경험을 통해서 자꾸 수행을 하다가 보면, 수행이 예리해지면 성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뭔가를 대상을 밀어낼려고 한다, 거부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먼저 압니다. 그것이 일어나니까 그다음에는 대상에 따라서 그게 성냄이 되기도 하고 미움이 되기도 하고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것을 깜맛사까따냐나 라고 합니다.

그 어떤 것들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있어가지고 내가 성을 내고 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면 그다음에는 수행을 할 때 명칭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성이났다' 하고 명칭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성이 났다 할 것 같으면 누가 성이 난 거에요? 내가 성이 난 겁니다. 은연중에 동사형으로 될 거 같으면 거기에는 주어가 있는 것으로 반드시 착각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명칭을 붙이더라도 수행이 무르익은 사람은 수행을 지도하는 스승이 직접 지도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면 자기 스스로 거기에 합당한 명칭을 붙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성냄'이라고만 알아차립니다.

 

또 성냄이 바뀌어서 따갑게 되면 '따갑다' 하고 알아차리는 게 아니라 '따가움'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단지 그때에 그 현상이 일어났고, 그러고 나서 그게 사라지고 나서, 또 다른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물질적인 현상도 그와 같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하고 분명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고 하는 착각으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는 역할들을 해주게 됩니다.

 

실제로 성자의 도에 드는 것은 맨 처음에 이루어지는 것이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들이 먼저 벗겨져나갑니다.

유신견이 벗겨지면 뒤를 돌아보면 나머지들, 업에 대한 의심이나, 법에 대한 의심이나, 부처님에 대한 의심이나, 스승에 대한 의심이나, 이런 것들은 말끔히 사라지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어느 것들에도 내가 속박돼가지고 있는 것들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반야심경을 하는 데 가서는 반야심경을 나도 따라합니다. 그냥 나는 독송하고 있는 거라.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를 그냥 들으면서 '들음'으로만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나에게는 그것이 초기불교의 경전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법이 없는 거라.

그게 뭐냐면 나라고 하는 것들,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들이 탁 떨어지고 나면 나머지 들도 전부 그렇게 떨어져왔구나 하고 떨어졌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수행이 향상이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첫 번째가 그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물질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그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다 하고 자꾸 받아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원인·결과로써 존재하는 것뿐 인 것이지, 원인이 없으면 일어날 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던데 "걸을려고 의도를 냈는데 걸음이 안 걸어지더라" 하는 거라. 걸을려고 하는 의도가 일어난 것은 있었지만 그것도 의도가 사라지고 나서 걸을려고 하는 마음이 안 생기니까 그게 안 걸어지는 겁니다.

마음은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른 마음들이 일어나고 그 자리에 대체하게 됩니다. 꼭 이 자리를 계속적으로 다른 것들이 차지하면서 그것들을 이용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면밀해지면 그런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아, 내가 걸을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같으면 당연히 걸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는 이걸 할려고 하는데 이게 왜 안됩니까?" 이런 변명들은 스스로 하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러한 것들이 어느 정도 향상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내 마음이 어느 정도까지 깨끗해져 있는가?

또는 나에게 떨어져나간 번뇌들은 뭐가 있는가? 하는 것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여러분들 마음 한번 가만히 보십시요.

얼마 정도 깨끗해져 있어요? 얼마 정도까지 이렇게 향상돼있습니까?

또는 "이것은 나에게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번뇌다" 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거라.

수행을 하면 할수록 그런 것들이 자꾸 눈에 보여져야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알아야 됩니다.

"스님!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습니까?" "나는 열심히 하는데 스님은 왜 내보고 수다원이 됐다고 소리를 안 합니까?" 이런 소리는 안 한다는 거라. 말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평가 받을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본인 스스로 알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잘 돌아볼 수 있는 상태에 이릅니다.

가끔씩 그런 사람들은 느낌을 관찰할 때도 그럽니다. 그것이 괴로운 느낌이든 아니면 그것이 즐거운 느낌이든 그것들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다 하고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즐거운 느낌도 가만히 보니까 나중에는 괴로워지게 돼있는 거고, 괴로운 느낌도 즐거운 느낌으로 바뀌고 하는 것들이 보이기 때문에, 그때는 즐겁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 그것이 즐거운 느낌이라고 따라가지도 않고, 괴로운 느낌이라고 밀어버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단지 느낌을 그냥 그대로 현상으로써 관찰을 하게 됩니다.

 

그거는 실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나만 왜 괴로운가?" 하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은 태어났으면 괴로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만 특히 괴롭고 나만 더 비참하다는 생각조차도 일으키질 않게 됩니다.

견해가 확실하게 정립이 된 사람들은 그와 같이 됩니다.

그래서 이때까지 내가 착각을 하면서 살았구나 하는 마음들을 강하게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냥 이러한 것들은 객관적인 것들이지, 이것을 내가 주관적으로 생각해서 '아, 이것은 차가움이라고 알고 있었구나' 하고 주관화시키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은 어떠한 대상을 만나더라도 고요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음이 조금 더 청정해져 있는가? 또는 번뇌들이 떨어져나갔는가? 하는 것들을 스스로 확인을 해볼 수가 있게 됩니다.

지금 한번 돌아보십시요.

 

수행에서 가장 대표적인 장애가 다섯 가지들이 있습니다.

그것 중에 여러분들한테 떨어져나갔다고 판단되는 것들이 과연 뭐가 있느냐는 거라.

''라고 하는 견해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을 돌아볼 수가 있습니다.

나에게 악의가 있는가? 나에게 감각적인 욕망이 있는가? 나에게 법에 대한 의심이 있는가?

이런 것들을 돌아보고 '아, 이것이 떨어졌구나' 만약에 떨어진 것이 없으면 '아, 나는 조금 더 수행을 더 열심히 해야만이 내가 도와 과에 이르겠구나' 하고 판단을 해서 조금 더 열심히 할려고 하게 됩니다.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요인,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깨끗하고 청정해지지 못한 부분에 대한 이해들을 분명하게 하게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대상을 알아차리면 그 대상은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어느 순간 탁 멈춰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굉장히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볼 수 있게끔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관찰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다른 데로 벗어나질 않습니다. 오로지 그 대상만 분명하게 알아차리게끔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 열반의 상태에 이르르면은 이렇게 내가 일상적인 생활을 하더라도 전혀 번뇌 없이, 그리고 장애없이 내가 살아갈 수 있구나, 그리고 더욱 더 열심히 살게 되는구나" 하는 그런 확신들을 자꾸 가지게끔 됩니다.

 

대상을 만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들이 없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그러한 상태에 도달을 했는가 하는 거라.

수행을 통해서 이번 집중수행뿐 아니라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쭉 해왔던 것들이 그러한 것들을 얻어오고 있느냐는 거라.

단 찰나라거나 아니면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그러한 체험들을 했느냐는 거라.

 

지금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듣고 있는 순간에 오로지 그 법문만 들릴 수가 있게끔 되느냐는 거라. 그 소리가 분명히 들려서 그것이 나의 인식에 그대로 탁 박혀있게 되고, 그다음 소리가 들려서 나의 인식에 또 탁 박히게 되고, 그래서 가슴에 고정돼 듯이 탁 고정되어서, 그것들에 대해서 10년이 지나더라도 다시 되돌아보면은 그대로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 그 의미들을 이해하고 파악을 해낼 수가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분은 그 소리를 들을 때 이미 열반을 체험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어떠한 때라도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알아차림을 놓치는 순간에 설혹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다, 아니면 일래과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번뇌들이 탁 들어옵니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스님도 1년에 한차례씩은 그래도 꼭 태국에 갑니다. 가면 스님들은 참회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소하게 저지른 것들 이러한 것들은 가서 참회를 하게 됩니다. 그걸 안 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 그걸 안 하고 그걸 숨기고 있을 수 있는 조건이 안되면 어쨌든 가서 그런 것들을 참회를 해야 되는 거라.

감추고 숨길려고 하는 것들이 없어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을 거 같으면 분명히 마음속에는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또 하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님을 통해서 듣든지 아니면 책을 통해서 읽든지 그걸 읽고 들으면서 마음에서 기쁨들이 일어나느냐는 거라.

법은 그사람에게 마음으로부터 희열을 일으키게 해서, 법으로 인도해서 법을 실천하게끔 만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식으로 그 법을 들어버릴 것 같으면 핵심은 이건데 자기가 이해하는 것은 그게 아니고 딴 것들이 돼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핵심으로 인해서 법에 대한 기쁨들이 확 일어나서 아, 내가 좀 더 선한 마음을 가져야 되고, 좀 더 수행을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켜야 되는데, 그러한 것들이 핵심이 쏙 빠져버리게 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법을 들으면서 ', 내가 이 법을 들으면서 법의 기쁨에 젖어야 되겠다'하는 마음들을 강하게 내야 됩니다.

적어도 수행을 많이 하다 보면은 그것들이 익숙해집니다. 특히 태국이나 이런 데서는 일주일에 법문이 보통 한 네댓 차례가 있게 됩니다. 일주일에 한번 재가자들은 포살일로 돼있기 때문에 포살일 전날 저녁에 법문이 한번 있고, 포살일 아침에 한번 있고, 오후에 한번 있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그것이 3번입니다.

또 스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들이 있고, 그리고 수행지도하기 위해서 수행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자기들 그룹에게 하는 것들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한사람이 일주일에 한 다섯 번을 다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스님들이 번갈아 가면서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법을 잘 설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고 또 내용이 약간 틀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재가자들은 그걸 그냥 그대로 듣습니다.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고, '아,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고 판단되는 것도 있지만, 그걸 들으면서 그것조차도 그속에서 '아, 이런 법이라도 설할 수 있는 이 조건이 되는 것들이 기쁘다' 하면서 법의 기쁨을 누리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가끔씩 보면은 스님이 아니고 다른 스님들이 한다든지 아니면 또 다른 것들을 할 거 같으면 아예 귀를 닫아버립니다.

법은 그럴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은 어떠한 경우든지 내 스스로 그것들을 알아차림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그 핵심만 읽어내면은 그 법으로 인해서 기쁨들은 일어나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걸 놓치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나가다 보면은 적어도 수행은 잘 무르익어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하더라도 마음의 불안감은 항상 있게 됩니다.

이러다가 내가 아직 수행을 완성 못하고 죽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내가 이런 좋은 조건이 될 때 법을 듣고 수행을 할 수 있는데, 그런 조건이 안돼버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그런 불안감들은 항상 있게 됩니다.

 

그런 불안감이 있을 때 부처님이 뭐라고 했느냐면 선우(善友), "선우를 찾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수행을 하다가나 아니면 일상생활에서 그런 불안감이 자꾸 든다고 할 것 같으면 선우들을 자꾸 찾을려고 해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하고 같이 있는 동료들은 대부분 '도반'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도반은 선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선우(善友)는 첫 번째는 부처님이 선우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완벽하게 설해놨고, 또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 길대로만 따라갈 거 같으면 나는 언젠가는 고통의 소멸에 이르기 때문에, 해탈에 이르기 때문에 그 부처님을 선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우라는 개념은 그와 같습니다. "나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사람들을 선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금은 부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그러면 경전을 근거해서 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실제로 경전은 지식적으로는 많은 것들을 얻게끔 해주지만은, 수행에서는 크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수행 초기에는 얻을 만한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수행이 어느 정도 무르익고 나서는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이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수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 도와 과에 이르게 될 것 같으면, 그것은 글로써나 말로써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걸 '초인법'이라고 그럽니다. '웃따라마눗사담마'라고 해서, 생명을 초월한 그런 현상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은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기록해놓은 경전들은 실제 수행에서는 크게 유용한 부분은 아닙니다.

 

그럼 누굴 찾아야 되느냐면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수행을 잘한 스승들을 찾아가야 됩니다. 스승을 자꾸 따르도록 만드는 삶이 오히려 수행에서 또는 살아가는데 불안감이 일어날 때 그것을 해소해 줄 수 있고, 좀 더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스승이 될 수가 있습니다. 각각의 개인들이. 그래서 내가 과연 그런 선우가 될 조건이 되는가? 하는 것들을 잘 돌아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선우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은

 

첫 번째가, 스님은 보통 지도하는 게 마하시 방법이 거의 주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응용해가지고 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념처 수행들이나 아니면 법념처 수행을 한다고 해가지고 그것들을 탓하고 여기서 수행하기 힘들다 하고 배척하는 법은 없습니다. 스님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다른 스승들도 수행법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수행법에 대한 것들을 존중을 해줍니다. 그래서 어떤 수행을 하든지 그것을 지도할 수 있게끔 돼나가야 됩니다.

 

만약에 내가 다른 수행법은 모르겠고 이 수행법만 지도할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나는 이 수행법만 알고 있고 이렇게 지도합니다" 하고 분명하게 선언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르게 수행하시는 분들은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하는 것은 관계없지만 다른 스승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분명하게 얘기를 해주게 된다는 겁니다.

 

언젠가 한국 스님하고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는 미얀마의 우 빤디따 스님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우 빤디따 스님하고 토론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국 스님은 "한국의 수행법이 최고다, 다른 것은 다 미천한 것이고 틀렸다" 하고 얘길하는데, 우 빤디따 스님에게 한국의 수행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니까 뭐라고 대답하느냐면, "나는 그 수행법을 모른다. 그러니 내가 그것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단지 내가 하고 있는 수행에 대해서 얘길 하라고 할 것 같으면 나는 얘기를 해주겠다." 하고 얘기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안 하고, "아니다. 한국의 수행법은 틀렸다. 그것은 불교수행법에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하고 말을 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겁니다. 경전에 근거를 해버리게 되면!

 

그런데 수행으로 어느 정도 라고 하는 착각이 떨어져나가 버리게 될 것 같으면 그렇게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모르면 모른다고 얘기를 하고, 그러고 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표피적으로 봐가지고는 우빤디따 스님이 참 모르는 것도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마음이 넓은 상태라는 거라. 그리고 훨씬 더 수행이 잘 돼있다는 거라. 그런 스승을 찾아가라는 거라. 그걸 "가르침에 대한 태도에 대한 유연성"이라고 그럽니다.

 

선우가 되는 자격을 갖출 때 맨 처음에 유념해야 되는 것이 바로 그런 "마음의 유연성"들입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품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 어디에도 나의 견해라든지 나를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러니 애초부터 논쟁을 할 수 있는 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비구스님들의 계율에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리 법에 대해서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1시간 이상을 얘기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수행을 잘한 사람들이라도 수행에 대해서 담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알아차림을 놓쳐버리게 된다는 거라. 놓쳐버리면 당연히 생겨나는 것이 '나'라고 하는 견해들입니다. 그러면 논쟁이 돼버리는 거라.

자기 걸 내세울려고 그러고 남의 것에 대해서 비판할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계율적으로 아예 수행이 됐든 안 됐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논쟁을 일정 시간 이상은 하지 말아라. 그것을 넘어가면 죄가 된다"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그런 법에 대한 '유연성'들은 반드시 여러분들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한다고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지금 수승한 법을 하고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나는 이걸 지금 이 시기에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걸 하고 있는 이유들을, 목적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거 같으면 항상 다른 것과 대립을 할려고 한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마음이 요동쳐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 가지 조건들로 인해서 마음이 요동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수행을 좀 했다고 하면은 다른 사람들 하고는 그래도 좀 다른 부분들은 있어야 될 거 아니라? 똑같이 좋아가지고 헤벌레 하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싫은 감정을 그냥 여과없이 드러내고, 그것은 마음에 물결이 많기 때문에 그대로 밖으로 표출되는 겁니다.

동요하지 않고 있는 마음들이 얼마만큼 자신에게 충족감을 주는지를 자꾸 경험을 통해서 알아야 됩니다. 그것으로도 꽉 차있는 상태인데, 구태여 그것에 대해서 물결을 일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어떠한 대상에도 끄달리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 그게 두 번째에 해당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생활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생활을 하는 것이 그냥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부유롭게 살고 또는 가난하게 살고 하는 것들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활한다고 하는 것들은 뭐냐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 상태에 대해서 만족하고 사는 것, 그것들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든지 불만족 없이 살아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렇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방식은 조금씩 바꾸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만족하게 사는 자들은 설혹 가난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밝게 삽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유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마음에 불안감이 있게 되고, 또 남을 의심하고 하는 것들이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은 바른 생활이 되지를 못하게 됩니다.

적어도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들은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남에 대해서 그렇게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고 그리고 비판만 할려고 하는 그런 성향들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마음은 이미 법에 대한 기쁨으로 이미 충만돼있기 때문에, 비식거릴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불만이나 불평하고 비판들을 하고 하는 것들은 그 결점이 보일 때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그런 결점이 안 보이는 걸 어떡할 거라.

설혹 그 결점은 보이는 것은 그냥 그때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만 아는 것뿐입니다. 그것도 당연히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것이 결점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러할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어떤 것인가? 법으로 어떻게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기쁨으로써 충만되어 있도록 자꾸 유지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보통 선우들이 갖추는 조건일 뿐 아니라, 여러분들도 수행을 통해서 그러한 것들을 자꾸 갖추어 나가야 됩니다.

적어도 부처님을 따르는 바른 제자가 돼서 그것에 따라서 도와 과를 이루었다, 아니면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한다 할 거 같으면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따라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생활을 또 해나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한 자들을 따라서 나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곁에는 그러한 스승들은 많이 있습니다.

스님도 스승이 몇 분 되느냐면, 스승이 많이 있습니다. 나에게 계를 내려준 스승도 있고, 처음으로 이 법을 가르쳐준 스승도 있고, 좀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준 스승도 있고, 또 일상생활에서 나를 잘 보살펴준 스승들도 있고, 스승이 굉장히 많습니다.

 

스승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곁에 그러한 사람들이 자꾸 많도록 만들어야 될 뿐 아니라, 내 자신도 그와 같은 스승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부처님 법을 만난 것들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게 되고, 그것들에 대해서 내가 법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법을 지닌 자'들이 될 수가 있다 는 겁니다.

 

오늘은 몇시간 후면 회향을 해야 됩니다.

회향을 하고 가더라도 '수행해서 내가 빨리 도와 과에 이르러야지' 하는 마음들을 버리지 말고 시간 날 때마다 자꾸 수행들을 하고, 또 부족한 것들이 있으면 스승에게 묻고, 또 법문을 듣고 하면서 그것들을 충족할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 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간단하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