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집중수행 법문

집중수행 법문3_수행 독려 및 당부 (20170227.경주)

담마마-마까 2022. 4. 8. 09:00

https://youtu.be/__qcPl1OYrU

* 집중수행 법문3_수행 독려 및 당부 (20170227.경주)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드실 때 했던 말이 뭔지 아는 사람?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 그렇게 얘기하죠.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수행하라. 열심히 노력하라" 그런 뜻입니다.

 

방일한다는 것은 뭘 말하는 걸까? (수행자 : 게으름)

게으름인 줄은 누가 모르나? 어떤 걸 게으름이라고 그래요?

이렇게 보면 됩니다. '빠마다(pamāda)'라고 하는 빨리어 용어를 보면,

"방일(放逸)하지 않는다는 것"의

첫 번째가 뭐냐면 알아차림을 놓쳐버리는 것, 그게 방일한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살아있을 경우에는 깨달음을 이루었건 안 이루었건 알아차림을 놓치지 말아라 하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게으름의 특성이 뭐가 있느냐 하면, 시기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상이 탁 나타났을 때 알아차려야 되죠? 대상이 지나가고 나서 알아차릴려고 하면 안 되죠! 그래서 그것도 시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집중수행할 시기가 됐으니까 여기 와서 집중수행을 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시기를 놓쳐버리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젊었을 때 놀았죠? 사실은 시기들을 많이 놓쳐버린 겁니다.

왜 이게 게으름의 일종에 들어가느냐면 시기를 놓치버리고 나면 점점 힘이 들어집니다. 관찰하는 것도 힘들고, 대상이 일어나더라도 즉시즉시 알아차리는 것이 힘들고, 또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당연히 사라지는 것이 힘듭니다. 늦습니다.

 

수행은 보통 3단계로 진행이 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처음에는 대상을 그냥 알아차리는 것. 대상이 일어났으면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려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어느 정도 성숙해지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그 대상에서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성품을 보게끔 됩니다. 그게 두 번째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보면은 나중에는 그 대상도 사라지고 알아차리는 마음도 사라지고,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그런 열반을 체험하는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게 도와 과에 이르는 단계입니다. 그게 세 번째 단계입니다.

 

수행은 보통 이 3가지 과정들을 겪어서 진행이 돼나가는데, 마지막 세 번째의 열반을 한번 체험했다 해가지고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또 계속적으로 수행을 해나가야 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런데 시기를 놓쳐버리면 이 진행 과정들을 제대로 밟아나갈 수가 없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도 늦고, 대상을 알아차리더라도 무상하게 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들도 힘들고, 그리고 대상을 알아차리면 열반을 체험하는 것들도 힘들어지고. 그런데 지금 현재가 여러분들에게는 그래도 가장 빠른 시기입니다. 가장 빠른 시기입니다.

이런 조건이 될 때 자꾸 수행할려고 해야 되지 조건이 넘어가버리고 나면 수행할려고 해도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마음을 분발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노력할려는 힘들을 조금 더 강하게 내주어야 됩니다.

 

경전에는 물론 노력하는 종류들을 여러 가지로 들어놓았습니다.

내가 사악도에 떨어지면 얼마나 비참할까? 하는 마음도 일으키고, 또 내가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그런 것들을 회상을 해가지고 그 유산을 받아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도록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들을 놓치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들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러한 시기, 대상을 알아차리는 시기들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되고,

 

그다음에 또 게으름의 세 번째는 여러분들이 잘하는 것들입니다. 변명하는 것.

'아이, 이래서 그렇다,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이번에는 잘 못했다, 뭘 어쨌다', 하면서 자꾸 자기 합리화를 시켜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해보면 그게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본인이 압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수행을 해서 적어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상태만 되더라도 그러한 변명하는 마음이 없어져버립니다. 견해가 바로 딱 서기 때문에. 그래서 "사견이 없어진다" 하고 경전에서는 얘기를 합니다.

견해가 딱 바로 서가지고 내가 지금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분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변명거리가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자신이 아는 거라. 그런데 게으름 피우는 사람들은 자꾸 변명을 하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게으름의 네 번째가 뭐냐면 똑 학생들 벼락치기 하듯이, 여러분들도 아마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집에서는 내내 놀다가 여기 와서 벼락치기 공부하는 사람들, 벼락치기 수행하는 사람들,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은 벼락치기 해가지고 크게 성과를 낼 수는 없습니다. 몸에는 익힐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사후에 익혀가지고 집에 가면 한 일주일 갈까? 일주일 가면 그건 잘 간다고 봐야 되겠죠.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거라. 그래서 벼락치기 할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라.

 

우리가 태국에서 공부하고 할 때 그런 모습을 자주 봅니다.

매일 놀다가 시험 때가 되면 공부하는 애들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때는 그 학생이 성적이 잘 나올 때가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그것도 다 까먹어버립니다. 그래서 나중에 전체를 모아가지고 치면 그 부분은 또 몰라요.

그리고 또 결정적인 것은 뭐냐면 그렇게 벼락치기 해서 며칠 밤을 세워가지고 공부를 할 것 같으면 머리가 맑아져야 되는데 오히려 더 힘든 상황이 되는 거라. 계속 졸음이 오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시험을 망치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집중적인 수행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집중적인 수행만으로써 모든 걸 해결할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전체가 수행과 연관이 되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인제 부처님이 마지막 가시면서 여러분들에게 간곡하게 요청했던 부분입니다.

"게으름 부리지 마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4가지는 항상 명심했다가 '아, 내가 지금 게으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들을 잘 판단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왜 이 얘기를 했느냐면 어제 우리 저기 청주에 있는 처사 어제 탁 게으름을 부리고,

 

, 게으름에서 하나 빼먹은 게 뭐냐면, 게으름의 가장 큰 특성이 뭐냐면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뭔가를 했으면 반드시 결과가 나와야 되는데 결과가 안 나오는 거라. 수행했으면 뭔가 진척이 있어야 되고, 마음이 맑아졌다든지, 아니면 지혜를 개발을 했다든지, 아니면 도와 과에 이르렀다든지, 뭐가 있어야 되는데 그 결과가 없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게 가장 큰 게으름입니다. 그리고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도 않고.

 

그런 것들은 조심을 해야 된다는 마음이 들고,

그리고 보통 여기에 보면 60대 70대들이 많습니다. 인제는 점점 더 힘들어질겁니다. 수행하는 것들이.

빨리빨리 돌아갈 것 같으면 수행의 속도도 빠를 뿐 아니라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도 느리게 알아차려지지 않습니다. 빨리빨리 알아차려지는데, 나이가 들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굉장히 늦습니다. 알아차리기는 알아차리는데.

그런 것들은 잘 명심을 하고 그래도 조금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먹기 바랍니다.

 

아까 수행에는 3가지 단계를 거친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 그것을 움직임을 알아차리든, 아니면 느낌으로 알아차리든, 그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변하는 속성으로 보게 됩니다.

움직임 전체를 알아차릴 때는 그 움직임 전체가 앞에 것과 뒤에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느낌을 볼 때도 느낌들이 일어나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그 각각의 느낌들도 변하는 것으로써 보게 됩니다.

그렇게 쭉 진행을 해나가다 보면 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을 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저번 시간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동안은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지만, 그 변하는 것들이 물질적인 것이 훨씬 많습니다. 정신적인 것은 그렇게 많이 변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인해서 앞에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과 뒤에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다르다는 정도만 알지, 그 마음 자체가 급속도로 빨리 변한다는 사실은 모릅니다.

그대신에 물질적인 현상은 굉장히 빨리 변하고 있는 것들이 보입니다. 실제 배를 관찰하면 배가 불러오고 할 때 물질적으로 변하는 것이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어제 인터뷰하는데 어떤 분이 변하는 양태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그거는 물질적인 것들이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마음이 그것에 따라서 어떻게 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잘 모르는 거라. 그걸 알아차리는 것만 알고 있는 것뿐이지.

그래서 처음 초기단계는 물질이 훨씬 빨리 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비담마 공부해 본 사람들은 알죠? 마음이 훨씬 빠르죠? 그런데 그렇게 빠른 것들은 보질 못합니다.

그렇지만 수행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원인·결과에 대한 것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고 하면은 그때부터는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춰나가게 됩니다. 마음도 빨리 변하고 하는 것들이 보여집니다.

 

그러다가 수행의 첫 단계가 무르익어 갈 정도가 되면 무상·고·무아에 대한 것이 확 드러나집니다.

그때가 되면은 물질보다도 정신이 빨리 빠르게 변하고 있고, 더 훨씬 빠르다는 것이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으면 무상한 것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대신에 그걸 한 번 봤다 해서, 무상한 것을 완전하게 한 번 봤다 해서 놀고 있으면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되냐 하면 그렇지는 않거든. 다시 또 떨어진다는 거라.

그러면 다시 또 처음부터 고생고생해서 또 그것까지 가야 돼.

그래서 여러분이 혹시라도 무상·고·무아에 대한 것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해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러냐면 무상·고·무아에 대한 것을 이해를 하기 시작을 할 것 같으면 빠르게 변하는 것들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두렵고 괴롭게 느껴지거든. 두렵고 괴롭게 느껴지는 것들이 지나고 나면 인제는 마음이 굉장히 고요해지면서 그것들이 굉장히 깨끗해진다는 겁니다. 대상을 저절로 알아차려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들이 그냥 자기의 성품따라 무상을 보는 사람들은 무상한 것으로 보이고, 어떤 사람들은 고의 성품으로 보이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대부분은 '아, 이제 수행이 끝났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그것은 인제 겨우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본 정도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중단을 해버리면 다시 또 떨어져버린다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인제 첫 단추를 끼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속 해나가야 됩니다.

 

언제까지 해야 될까 그걸? 무상·고·무아를 보는 게 도와 과에 이르기 전까지 언제까지 해야 될까?

성품들이 변하는 것들이 고정될 때까지는 해야 됩니다. 어떠한 대상을 만나더라도 마음은 항상 고요한 상태를 유지될 수 있는 것, 대상을 보더라도 그게 무상한 성품으로 보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거라.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은 자극에 대한 반응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탁 외부적인 자극이나 아니면 안에서 일어나는 자극이 탁 일어날 것 같으면 그때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고 '아, 이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렀다' 하고 알게 됩니다.

그런데 보통 성자들은 보면 그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없습니다. 어떠한 자극이 있더라도 그냥 고요한 상태를 유지해나갑니다. 누가 비난하더라도 아니면 누가 욕을 하더라도 설혹 팔다리가 짤리는 한이 있더라도, 죽음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은 고요한 상태를 유지를 해나갑니다.

 

사실은 이 상태가 되야만이 원래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법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 상카루뻭카냐나에 도달한 사람에게 "너 인제 법을 설할래?" 하고 스승들이 물어봅니다.

"예. 인제 법을 좀 설하면서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 거 같으면 그때야 인제 '아짜리야'라는 자격을 주게 됩니다. '스승'이라는 칭호를.

그렇지 않고 "아닙니다. 스님. 나는 인제 겨우 그 상태에 이르렀으니까 나는 조금 더 공부할랍니다." 할 거 같으면 더 공부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일체 소임을 주지 않고. 그때가 되면 탁발나가고 그다음에 공양청 있고 하는 것까지도 오히려 안 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것조차도 전부 다 빼줘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 탁발해와가지고 그 스님을 먹여살려주고 그렇게 합니다. 상가가 참 좋은 게 그런 부분들을 참 잘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상카루뻭카냐나라고 하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의 마음의 상태에 대한 걸 얘기를 할 테니까 적어도 그까지는 도달하도록, 여러분들이 법을 설할 자격을 갖추든, 아니면 법을 지닌 자 담마다로가 돼 있든, 그것은 그 차후의 일입니다.

적어도 법을 알고 법을 지닌 자가 돼야만이 부처님 제자가 됐다 하고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잘 한번 들어보십시요.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에 이르렀을 때의 마음의 상태]

 

첫 번째는 감각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감각대상 그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가?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될려면 어느 정도까지 도달해야 될 거 같애요? 그 감각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구분할 수 있어야 되는 거고, 그것이 또 빠르게 변한다는 것을 알고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그것을 알 수가 있어야 되는 거고, 그러고 나서 그 대상들에 대해서 그렇게 빠르게 변하고 하기 때문에 그것이 두렵고 위험하다 하는 사실까지도 알아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렇게 위험하고 두려운 대상들이 어느덧 사라지는 상태가 돼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고요한 마음의 상태가 돼있을 때, 이때가 쉽게 말하면 감각대상들에 대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냥 누가 툭 찌른다 해가지고 '나는 반응 안 한다' 해가지고 그걸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그런 상태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아침에 공양했죠? 김치 먹을 때 김치맛을 아는 사람? 죽을 먹을 때 죽 맛을 아는 사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 겁니다. 김치 맛하고 죽 맛하고 같이 섞어가지고 먹는다고 하더라도 김치맛하고 죽맛하고 구분해낼 수 있는 상태가 돼야 됩니다.

스님은 항상 밥을 섞어가지고 먹습니다. 요만한 대접을 달라 해가지고 거기다가 요렇게 섞어먹어요. 그리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첫 번째 목적은 그 음식에 대해서 맛이 좋고 싫은 것들을 안 일으키기 위해서 일부러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을 했어요. 스님들은 전부 다 바리때에다 넣어서 그렇게 해서 먹습니다.

어느 정도 훈련이 되고 나니까 인제는 따로따로 먹어도 그것에 따라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맛없는 거 안 먹고 이런 것들이 없어져요. 그래서 거의 동일하게, 반찬을 동일하게 놔놔도 요거 한번 젓가락 갔으면 그다음엔 저거 한번 젓가락 가지 어떤 것에 편중되고 하는 게 없어져버립니다. 처음에는 밥을 비벼먹는 게 그게 다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한참 진행되다 보니까 수행이 무르익으니까 그 속에서 그것만 알게 되는 거라. 기쁨이 있으면 기쁨으로만 알게 되는 것, 슬픔이 있을 때는 슬픔으로만 알게 되는 것, 그런데 그게 정신적인 기쁨이나 슬픔이나 괴로움으로 번지지는 않는 거라. 단지 그것만 알게 되는 거라. 코로 냄새맡으면 코로 냄새맡는 것만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지, 마음은 그것으로 인해서 요동치고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것들을 분명하게 분간할 수 있는 상태가 돼야 됩니다.

 

게 두 번째, 정신적인 균형이라는 건데, 정신적인 균형을 취하기에 가장 좋은게 그래도 밥을 먹을 때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먹는 게 참 도움을 많이 주더라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적어도 정신적인 균형을 많이 잡도록 해야 됩니다. 정신적인 균형은 그것을 그것으로만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보통 상카루뻭카냐나를 얘기하면 이것을 얘기하는데,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있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아까는 정신적인 것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균형이 맞게끔 균형이 잡혀있다는 얘깁니다. 이것은 그런 정신적인 부분이 아니라 마음! 마음이 항상 시소와 같이 가운데 딱 고정돼있는 상태, 그걸 마음이 부처님이 얘기하는 중도에 와있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중도가 이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저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얘기하는 건데, 실제적으로 '중도'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려가지고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고 항상 고요한 상태에 딱 되어있는 상태, 그걸 중도라고 사실은 얘길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원래 설한 그 뜻은. 그런 것이지 그냥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버리고 편안하게 있는 상태를 중도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면 이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지혜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대부분 연속하지 않고 한 번 하고 그쳐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또 그 밑으로 떨어져버립니다.

그런데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항상 유지돼있을 거 같으면 더 밑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설혹 가끔씩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금방 그 상태로 다시 복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가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첫 단계부터 해가지고 이 여섯 번째 단계까지 계속적으로 쭉 일어나게 됩니다. 단계를 밟아가지고. 그게 굉장히 속도가 빨라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인제는 마음이 스스로 지혜가 확립된 단계로 딱 유지가 되게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그 단계를 밟아오면서도 그거에 대해서 동요하는 마음들은 일어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는 일은 없어져버린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생각하는 것이 굉장히 간단명료하게 간결하게 딱 정립이 돼버립니다. 쓸데없이 행동하고 말을 하고 하는 것도 없을 뿐 아니라 마음 자체도 아주 간결하게 딱 유지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필요 없는 것들은 아예 하지 않는 겁니다. 수행에 도움 되는 것들만 하게 되는 것이지 도움이 안 되고 하는 것들은 아예 행하고 말하고 하는 것도 안 할 뿐 아니라, 마음도 아예 간결하게 딱 정립이 돼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들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수행하러 왔으면 수행을 해야 되죠?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간결하게 돼있지 않으면 마하보디 선원에서 다른 것들을 막 보게 됩니다. '아, 저기에 새로운 것이 있네, 뭐 어쩌네..' 마음이 수행대상으로부터 이미 떠나버린 상태가 되는 거라. 물론 보면서 그것들을 알아차릴 수는 있겠지만 마음은 자꾸 방황할 수 있는 조건들이 만들어진다는 거라.

그래서 아예 그 조건들을 만들지 않게끔 됩니다.

 

요즘은 밥을 해먹을 때 벼 껍질을 벗겨가지고 도정을 해가지고 그렇게 해서 7분도, 5분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몸에 좋은 것이 본인이 만약에 7분도가 몸에 좋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이 7분도를 항상 유지해있어야 됩니다. 5분도가 좋다면 5분도가 유지가 돼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그냥 벼이삭만 벗겨내고 그냥 그거 자체를 다 먹는 생식하는 것이 자신에게 맞다고 하면 그 상태를 유지가 돼있어야 됩니다. 마음이 간결하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그런 의미를 지닙니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들에 대한 것들이 딱 확립이 돼서 그 방식대로만 살아가게 됩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이 뭐냐 하면 마음은 설정한 대상 외에는 다른 데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설정한 대상에만 마음이 가 있는 거지 다른 데로는 가 있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수행대상에 마음이 가 있을 거 같으면 그 수행대상에만 마음이 가 있는 거지 다른 데는 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대상에 가 있을 동안에 누군가가 고함을 지른다고 하더라도 그 소리는 안 들립니다.

 

이런 조건들이 전체가 다 갖추어졌을 때 그때만이 인제는 "아, 나는 법을 지닌 자가 됐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중에 한두 개라도 빠질 거 같으면 그 조건이 아직은 성립이 안 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가야만이 수행했다는 의미를 찾아볼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할 수 있겠죠?

 

그런데 처음에 수행을 시작해서 대상을 알아차리다 보면 이 상태에까지 이르는 데는, 물론 사람마다의 근기가 다르겠지만 참 많은 시간이 걸려야 됩니다. 대부분을 보면. 그렇지만 그게 결코 멀리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적어도 여기까지는 수행을 했으면 도달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먹고 거기에 이르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자! 그러기 위해서 수행을 좀 더 쉽게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인제는 여러분들에게 내일 오전에 한 번, 그리고 오후 1시 회향할 때만 간단하게 "수고했어" 하는 얘기밖에 할 시간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실천을 해야 되는 것」은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됩니다.

 

먼저 일상생활 하면서 먼저 마음이 항상 깨끗하도록 자꾸 만들어라는 거라.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하게 만들려고 자꾸 노력을 하라는 거라. 그게 첫 번째 단계입니다.

말을 하는 것이든 그다음에 행동하는 것이든 또 생각하는 것이든 그런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것들이 계속적으로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말하는데 아, 내가 괜한 쓸데없는 말을 했다, 아니면 말을 실수했다, 또는 행동하고 나서 후회한다든지, 아니면 마음먹은 것들이 '아, 내가 왜 이런 불선한 마음을 먹을까' 이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꾸 방어를 해나가야 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맑은 상태가 돼있지 않으면 우선은 수행대상을 알아차리는 데는 힘이 든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가질려면 감각기관들을 잘 방어를 해야 됩니다.

감각기관들을 수도꼭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수도꼭지에 콕크를 열면 물이 쪼르르륵 흐릅니다. 내가 조절할 수 있을 거 같으면 적어도 필요한 만큼만 물을 받아가지고 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물은 유용하게 쓰여지는데, 이걸 조절할 줄 모를 것 같으면 그냥 계속 쏟아진다든지 아니면 그것이 수압이 너무 세가지고 틀어놨는데 수압이 쎄가지고 터져버린다든지 할 것 같으면 내가 낭패를 당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감각기관에다가 밸브를 다 하나씩 단다고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눈에도 밸브, 코에도 밸브, 입에도 밸브, 다 밸브를 장착했다고 생각을 하고 그 밸브를 잘 잠그도록 해야됩니다. 나쁜 것들이 나오면 탁 잠가버리고 선한 것들이 나오면 열어주고 해가지고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현재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그 밸브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각기관에 대한 알아차림을 항상 놓치지 않도록만 만들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적어도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항상 깨끗하고 맑은 상태를 유지를 해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도 관계는 없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럴려다 보면 아무래도 본인이 자주 실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밸브를 잠그지 못하는 것들. 탐욕이 많으면 아니면 성냄이 많으면 그 부분은 잘 안 잠겨집니다. 그러면 먼저 마음을 먹기를 요거는 내가 먼저 잠그는 걸 지속적으로 훈련을 해야 되겠다 해서 그것들을 잠그는 훈련들을 지속적으로 자꾸 해나가야 됩니다. 하나가 그렇게 잘 조절이 돼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나머지 부분들도 잘 조절이 돼나갑니다.

 

보통 보면 예를 들어서 성냄이라는 것이 많다 할 것 같으면 성냄에 대해서 잘 조절할 거 같으면 남을 시기·질투한다든지 의심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도 연결고리로써 같이 다 잠겨버리게 됩니다. 많은 번뇌들이 있지만 대부분 하나를 잘 잠그면 그에 따라서 부속적인 것들도 더불어서 잘 잠기게끔 됩니다.

그래서 가장 큰 것들 먼저 잠글려고 해야 되지 그걸 놔둬버리고 쉬운 거부터 자꾸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우선 맑고 깨끗하게 하라 하는 겁니다.

수행에서도 마음이 고요하고 맑고 깨끗해야만이 대상을 즉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두 번째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상태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대상은 그냥 알아차린다고 쉽게 알아차려서 그것들이 지속해나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스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하고 싶어요. 좀 더 많이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그리고 그런 스승들의 말을 듣도록 하고, 그리고 계를 지키는 것들도 자꾸 일상화해야 되는 거고, 그런 것들이 밑바탕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만이 인제는 바른 사고들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크게 내가 다른 것들로 인해서 환희심이 안 일어나고 오히려 부처님 말씀이나 스님의 가르침이나, 아니면 경전을 통해서 환희심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사고하고 생각하고 하는 패턴들을 많이 줄일 수가 있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망상하는 패턴들을 줄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생각하는 것만 일어나지 않게끔 되면 마음은 지가 대상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망상하는 습관들을 자꾸 줄여나가도록 해서 대상을 자꾸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노력을 하라는 겁니다. 그게 인제 두 번째에 해당이 됩니다.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하고 그다음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당연히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나중에는 어떻게 알아차리게 되냐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보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이제는 지혜롭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돼야 됩니다. 그게 인제 세 번째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려야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예 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것들이든 정신적인 것들이든 그거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무시를 해버리고,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나에게 속한 것들도 사실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에 대해서 애닯아 한다든지 아까워한다든지 아니면 집착할려고 하는 것들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사실은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무아에 대한 것들을 자꾸 개발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처음에는 무상한 성품을 알게끔 되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기의 생존욕구조차도 점점 더 엷어져가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나이든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인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진짜 그런 생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할 일을 다 마쳤을 때 인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되는 것이지 할 일이 남아있는데 왜 여한이 없겠어? 할 일이 남아있으면 아직은 생존욕구가 있는 것인데 더 살려고 해야 되지. 진짜 그런 여한이 없도록 자꾸 만들어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인제 부처님이 여러분들에게 설한 불교도의 길이라고 해서 팔정도라는 흐름들입니다.

그것을 수행에 비춰봐가지고 조금 더 쉽게 설명한 거니까, 그 팔정도를 자꾸 따라가는 습관들을 가지고 그리고 그것들을 자꾸 실천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른 질문 있는 사람들 질문하십시요.

 

인제는 좀 게으름 안 부릴 수 있겠어요?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 하는 것들을 잘 판단해야 됩니다. 내가 이것을 관찰할 시기가 돼서 관찰을 해야 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들을 해야 될 것인지 그것들을 잘 판단해가지고 시간을 괜히 헛되게 보낼려고 하지 마라는 겁니다. 수행하러 왔을 때는 그것을 좀 더 짬지게 잘 쓸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