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집중수행 법문

집중수행 법문2_수행장애 문답 (20170225.경주)

담마마-마까 2022. 4. 7. 09:00

https://youtu.be/B8904dfMHmI

* 집중수행 법문2_수행장애 문답 (20170225.경주)

 

수행을 하는데 뭐가 최고 방해가 되던가요?

오전에 하는 거는 전체 질의응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있는 그대로 수행을 하시면 됩니다.

 

뭐가 가장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요? (혼침이요)

언제 혼침이 오던가요? (좌선할 때요)

언제 좌선할 때? 아침에, 밤에? (아침에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안 들었죠? (네)

 

Q. 수행자 질문 : 졸리는 것보다는 배의 움직임에 선명하게 집중이 잘 안 되고요, 꼭 졸리는 건 아닌데 잠에 빠진 듯이 선명하게 집중이 잘 안됩니다.

 

A. 스님 답변 : 혼침이 오는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오는 혼침들은 대부분 보면 몸이 피곤하기 때문에 그렇게 혼침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잠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2가지로 얘기합니다.

첫 번째는 육체적인 피곤함으로 인해서 오는 잠,

그다음 하나는 정신적인 게으름으로 인해서 오는 잠.

2가지를 얘기합니다.

 

첫 번째 것은 어떤 경우든 문제가 되지 않는데,

두 번째 정신적인 게으름으로 인해서 오는 잠, 이게 문제가 됩니다.

대부분 아침에 오는 것은 특히 이런 집중수행처에 와서 아침에 오는 잠은 대부분 보면 그전에 잠을 충분히 못 자서 그러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오늘 저녁에 자고 나서 내일 아침에 경험을 해보면 오늘 아침의 경험하고는 또 달라져 있는 걸 발견할 겁니다. 왜 그러냐면 잠을 잘 때 푹 자는 습관이 들어서 몸의 피곤을 어느 정도 상쇄할 정도가 될 거 같으면 아침에 졸음이 덜합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알아차림이 강해서, 그 알아차리는 힘이 강하면 잠 시간이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피곤을 몰아내줍니다. 그래서 아침 첫 번째 새벽예불 마치고 나서 하는 수행에서는 졸음이 잘 안 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렇지 못하는 경우에는 첫 번째에 해당이 된다고 보면 됩니다. 몸이 피곤해가지고, 그래서 오는 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것 말고도 잠은, 여기 교재에 써놨을 겁니다.

 

만약에 몸의 피곤으로 오는 잠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몰아내는 것을 경전에는 여러 가지로 써놓은 게 있습니다. 목갈라나 존자의 예를 들어서 경전에 설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 광명상 같은 걸 해서, 그리고 부처님을 떠올리고 그다음에 부처님의 공덕을 떠올리고. 이렇게 함으로 인해서 마음에서 환희심을 일으키게끔 만드는 거거든요. 일으켜가지고 잠을 몰아내고 다시 수행대상에 집중하게끔 하고, 그렇게 해도 안 되면 나중에는 눈을 비비기도 하고 정 안되면 경행까지 하도록 하고, 이런 방법들을 동원을 합니다.

 

크게 보면 그렇습니다.

'광명상' 이라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잠을 몰아내는 것이 있습니다. 게으름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래서 그런 '붓다눗사띠'를 하든지 '알로까산냐'를 하든지 아니면 '멧따바와나'를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몸에서 밝은 기운을 내도록 하는 방법을 써가지고 잠을 몰아내는 방법이 있고,

 

두 번째 방법이 뭐냐면 '마라나눗사띠'라고 해가지고,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죽음은 항상 내 곁에 다가와 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렇게 게으름 부릴 시간이 없다는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래서 죽음은 언제든지 내 곁에 와있다. 항상 죽음은 내 곁에 와있기 때문에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하는 경각심을 일으키게 해가지고 그렇게 해가지고 잠을 몰아내도록 하는 그런 방법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잠의 예를 들어봅시다. 잠이 옵니다.

잠이 오는데 그걸 잠이 온다고 해가지고 '잠' '잠' '잠이옴' '잠이옴' 하고 관찰할 거 같으면 대부분은 보면 그냥 잠에 푹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그게 인제 초보자들이 그렇게 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잠이 온다'고 하면서 알아차리면서 잠이 온다고 하는데 이게 잠이 올 때의 느낌을 관찰합니다.

그러다가 눈꺼풀이 무거우면 '잠이 온다'고 알아차리다가 다시 대상을 전환을 합니다. '눈꺼풀이 무거움' '눈꺼풀이 무거움' 하면서 알아차립니다. 그다음에 좀 있으면 눈꺼풀이 따가우면 '따가움' '따가움' 하면서 알아차립니다. 그러다가 좀 있다가 '쑤심' '쑤심' 하면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잠이 오는 길이 있습니다.

그 잠이 오는 길을 따라서 그전에는 명칭을 붙일 때 '잠이옴'이라고 하는, 쉽게 말하면 '빤냣띠'를 써가지고 관찰을 하다가, 이제는 그 '빤냣띠'를 실재하는 것인 '빠라맛타'로 전환을 하게 됩니다. 쑤심이라든지 통증이라든지 무거움이라든지 하는 이런 것들은 실재하는 현상들이 됩니다. 그럼 그 실재하는 현상들을 관찰대상으로 해서 잠을 관찰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 내가 눈이 확 떠질지 모릅니다. 실제로 눈이 떠지는 것이 아니고 잠이 확 몰아져나갑니다. 이 방법을 동원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이 방법까지 동원해가지고 나중에는 굉장히 무거워서 내가 땅으로 가라앉는 느낌, 땅으로 완전히 파묻히는 느낌까지 도달하고 나서까지도 관찰이 안 되어나간다, 그러면 대부분은 보면 그때는 잠에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 대부분 눈꺼풀을 중심으로 해서 눈꺼풀이 따갑고, 무겁고, 쑤시고, 아프고 하는 감각을 관찰하는 것이 가장 빨리 잠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것들을 관찰하더라도 만약에 '따가움'이면 따가움만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따가움이 변해가는 것'들을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따가움' 하면 '따가움' 하면서 그것만 계속 관찰을 해나가겠다고 그러면 따가움이 조금 더 심해진다든지 아니면 따가움이 점점 더 엷어진다든지 이런 것들이 보여야 됩니다. 그게 보이지 않으면 그다음에 따가움 다음에는 그다음으로 쑤심으로 온다든지 이렇게, 그게 전환이 되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다음 단계로, 쉽게 말하면 좀 더 잠에 더 떨어지는 단계로 가기 전에 '따가움'이면 그것의 감각의 변화를 관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잠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걸 실제 수행에서는 그렇게 하는데, 그걸 경전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무상··무아에 대해서 관찰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관찰할 거 같으면 어떻게 관찰해야 될지를 모릅니다. 그거는 실제 응용에서는 그렇게 관찰하도록 하면 됩니다.

변하는 것들에서 무상한 성품으로 보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렇게 변하는 것들이 굉장히 빠르게 변하는 것들이 두려움으로 느껴지고, 괴로움으로 느껴지고 불만족으로 느껴지도록, 관찰해야 되는 거고, 그렇게 감각이 변하는 것들이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일어났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무아의 성품이다 하는 것들로써 알아차리게 되는 거고. 그렇게 알아차릴 때가 가장 잠이 오는 것들을 몰아내기가 쉽습니다.

그런 방법을 동원하면 조금 더 빨리 잠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Q. 수행자 질문 : 집에서 혼자 할 때는 그런 식으로 해서 잠을 떼고 있는데, 어제 배의 움직임에만 바로바로 돌아오고,

집에서 할 때는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생각이 떠오르는 거 바라보고, 마음이 어디에 가있는지 주로 그거를 보고 하니까, 졸린 때도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바라보고 하니까 졸림 같은 것이 잘 없고 그랬는데,

그런데 어제는 (집중수행에서는) 그런 거 다 무시하고 바로 배의 움직임에만 돌아오라고 하시길래 그렇게 해봤어요.

생각이 떠올라도 그냥 얼른 다시 배로 돌아오고 졸린 것 같은데도 계속 배를 볼려고 하다보니까 평상시 하던 거랑 달라서 그런지 계속 배에 한번 돌아왔다가 조금 있으면 다시 또 흐리멍텅 해지고 그렇게 헤매다가 다시 또 돌아왔다가 흐리멍텅 해지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고 있고,

다리 통증도 집에서는 통증이나 느낌으로 계속 바라보면 통증때문에 별로 끄달리지를 않는데 그냥 통증을 무시하고 계속 배를 바라볼려고 그러니까,

오히려 복부 움직임도 집중이 잘 안되고 자꾸 통증쪽으로 귀찮아서 풀고 싶다는 이런 생각이 자꾸 들고 그러더라구요.

 

A. 스님 답변 : 그거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걸 극복해내야 됩니다.

왜 그렇게 얘기를 했느냐 하면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는 훈련들을 계속 해나가다 보면 다른 대상이 나타나면 다른 대상이 나타나는 걸 금방 알고 그것을 사라지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또 원래의 대상으로 돌아갔을 때의 방식이 달라져버립니다.

 

그전에는 쉽게 말하면 배를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거를 쭉 관찰했을 것 같으면, 이제는 그다음에 원래의 주대상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렇게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고 '들이쉬고 멈춰지고 내쉬고 멈춰지고'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마만큼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서 하는 훈련들을 해나가면 빨리 무상··무아의 성품들을 관찰하기가 수월해기 때문에 어제는 그런 방법들을 강제로라도 동원해봐라 하고 얘기했습니다. 물론 이런 방법들을 안 해봤기 때문에 힘들어 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긴장해가지고 막 할라다보니까 틀림없이 수행도 잘 안되고 잠도 설치는 경우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평상시 수행할 때 그렇게 하는 것들도 좋습니다. 스님이 실제로 해보니까 여러 가지 통증들이나 졸음이나 뭐든 간에 그냥 무시해버리고 놔둬버리고 나서, 그냥 주대상 하나만 해서 이것만 계속적으로 알아차리는데, 그 노력의 힘만 계속적으로 배가시켜주면.

대부분은 보면 집중하는 힘하고 노력하는 힘하고 어떤 게 크냐면 집중하는 힘이 훨씬 더 큽니다. 노력하는 힘이 절대 크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노력하는 힘들이 부족해가지고 이것들을 끝까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끝까지 보여질려면 이 노력하는 힘들을 계속적으로 집중하는 데다 불어넣어줘야 만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들, 동남아시아에는 더더구나 더 어렵고, 한국 사람들도 보통 노력하는 힘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데도 실제로는 보면 집중하는 힘보다 노력하는 힘들이 훨씬 더 적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경우든지 이게 균형을 맞춰주지 않으면 정확하게 실제 일어난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힘들어져버립니다.

그래서 그러기 위해서 강제적으로라도 노력하는 힘들을 키우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달아날려고 하는 마음을 잡아오는 노력, 그다음에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노력, 이런 것들을 계속적으로 불어넣어주라는 거라. 그것들을 해줄 거 같으면 어느 정도 나중에는 집중하는 힘과 노력하는 힘이 자연스럽게 되면서 발란스가 맞춰집니다. 계속적으로 해나가면.

 

그러다 보면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그전에는 의식적으로 관찰을 해야만이 알 수 있데 되었는데, 이제는 그냥 자연스럽게 보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크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이미 노력의 힘이 어느 단계에 이르르고 나면, 집중하는 힘과 노력하는 힘이 균형이 맞춰지고 나면 자연스럽게 알아차리는 것들이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경험상으로 그렇게 되어왔기 때문에 집중수행할 때는 그렇게 해봐라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Q. 수행자 질문 : 경행할 때에 (돌기 전에) 멈춤한 다음에 서있을 때 호흡을 바라보는 것 하고, 호흡을 경행에서 멈춤한 다음에 일어남 사라짐 하는 호흡을 잠깐 바라보고 한 뒤에 움직이는 것하고, 좌선할 때의 호흡의 일어남 사라짐 하고 차이가 조금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스님 : 어떤 차이가 있던가요?

수행자 : 경행하면서 멈춤했을 때 서있을 때의 호흡은 좀 가볍다고 해야 되나요.

스님 : 경행할 때 언제 호흡을 관찰했는가요?

수행자 : 경행할 때 멈춤 다음에 일어남 사라짐 호흡을 2~3번 관찰하고 다시 발을 옮기면서 턴하는 것들에서, 서있을 때 호흡 관찰했을 때는 배의 움직임이 좀 얕으면서 그러던데, 앉아있을 때는 서있을 때의 호흡보다는 약간 더 움직임이 강하다고 해야 될지 그래서 혹시 강제로 호흡을 길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A. 스님 답변 : 예. 맞습니다. 그래서 경행을 하고 나서 멈추고 나서는 '서있음'을 알아차리고 '호흡을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자연스러운 호흡을 자신이 알기 위한 방법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이 어떤 건지 아세요? 1분에 보통 몇번 정도 할 것 같애요?

1분에 보통 16번 17번 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한 번으로 했을 때. 그런데 대부분 여러분들이 앉아서 수행을 할 때는 대부분 15번이 안 넘습니다. 그마만큼 인위적으로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긴장이 되고 들뜨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데 되게 피곤해지고 들뜨고 하는 것들은 보통 보면 이 들뜸이 원인이라서 그렇습니다. 들뜸은 호흡이 자연스럽지 못할 때 들뜸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 호흡이 자연스러울 경우에는 들뜸은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뭐냐면 서있을 때!

서있을 때는 앉아있을 때보다도 당연히 배에 부담이 덜합니다. 그러면 호흡하는 것들이 가볍게 알아차려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행을 하고 나서 멈췄을 때 서있을 때는 반드시 그것들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호흡에 대한 것들을 조금씩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뭔가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Q. 수행자 질문 : (소리 없음)

A. 스님 답변 : 서있을 때 호흡이 들이쉴 때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고 나서 '멈추는 것'을 아는 상태가 될 거 같으면, 그리고 멈추고 나서 다시 배가 꺼질 때 사라지는 것들이 보인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그 사람은 움직임의 상태를 분명하게 파악을 했다는 뜻입니다. 좌선 때 그게 가능하던가요?

 

그런데 그 멈춤은 아주 가볍게 찰나적으로 다가와집니다.

그런데 대부분 앉아있을 때 멈춤을 볼려고 할 것 같으면 굉장히 무겁게 다가와집니다. 인위적으로 되고 있다는 얘기라. 그마만큼 앉아있을 때 자연스럽게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씩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앉아있을 때도 호흡을 하더라도 지금 내가 호흡을 관찰하는 마음들이 고요한 마음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항상 생각을 해야 됩니다.

 

가장 완벽하게 고요한 마음이 되어있는 상태여야 만이 그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그런 가장 완벽하게 가볍고 고요한 상태는 집중하는 힘과 그리고 집중하는 힘으로 인해서 어느 정도 사마디가 형성돼서 고요한 상태가 만들어져 있지 않으면은 호흡이 자연스럽게 되지 못한다는 거라. 그러면 인위적으로라도 자꾸 마음을 한 10분 이라도 호흡을 관찰했다 그러면, 잠깐이라도 멈추고 내가 그때의 마음을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 내가 지금 긴장돼있는 것이 없는가?'

'마음이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가?'

명칭을 붙이는 걸 명칭을 떼고 호흡을 하는 걸 한번 자연스럽게 보고, 그러고 나서 다시 또 명칭을 붙여가지고 호흡하는 걸 보고,

이런 식으로 자꾸 반복을 해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런 상태 없이 그냥 호흡하는 것을 계속적으로 관찰한다 할 것 같으면 대부분은 보면 들떠버립니다. 대상하고 실제 마음하고 가 분리될 뿐 아니라, 몸도 마음도 긴장이 되고 들뜨고 또 무거워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러한 것들은 집중하는 데도 방해요인이 될 뿐 아니라 마음이 고요하게 될 때도 방해요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좌선할 때 멈춘다는 걸 아는 상태는 가볍게 그냥 찰나적으로 '탁칵' 다가와지게 되는 상태가 될 때가 그게 맞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고 만약에 호흡을 하고 있는데 '멈추는 것이 길다', 그러면 그것은 인위적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태국의 아짠통 스님 같은 경우에는 '일어남' '사라짐' 하고 나서 멈추는 상태에서 '닿음'을 관찰하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 '닿음'을 하는데 보통은 호흡을 '일어남' '사라짐' 하고 나서 다시 일어날 때 '닿음'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어남' '사라짐' 하고 나서 '닿아있는 것'을 그 찰나 간에 탁 멈출 때 관찰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호흡은 정상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해야 됩니다.

이게 나중에 조금 더 발달되면 일어나고 나서 멈출 때 첫 번째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찰나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다음에 호흡이 사라지고 나서 멈출 때 다시 닿아있는 '입'을 알아차리고, 다시 일어나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다음에 다시 닿아있는 3번을 알아차리고 이런 식으로 진행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마만큼 앉아있을 때 호흡이 멈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주 찰나 간에 아주 가볍게 와닿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손이 이렇게 닿아있는 걸 찰나 간에 탁 닿아있다고 한번 알아차려보십시요. 그렇게 가볍게 탁 와닿아야 됩니다. 멈췄다는 것은 그렇게 알아차려지는 겁니다. 그게 바른 겁니다.

그래서 앉아있을 때보다도 경행했을 때 멈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조금 더 그것에 가깝게 됩니다. 그런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만약에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상태에서 멈추는 걸 경행에서 알았다고 할 것 같으면 경행에서는 호흡을 조금 더 길게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경행을 하는 것보다는 지금 호흡의 상태에서 발란스가 맞기 때문에, 호흡에서 계속적으로 그것들을 관찰을 해나가면서 그다음 단계가 진행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단지 금물해야 되는 것은 '이 다음에 뭐가 나오지?' 하고 바라지 말고 '그냥 그대로 나는 그 상태를 관찰할 뿐이다' 하고 마음먹고 관찰을 해나가면 됩니다. 호흡만 그대로 조금 더 길게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좌선을 할 때 앉아있는 것이 들뜨거나 무거운 사람들은 좌선하는 자세를 조금 바꾸어주십시요.

대부분 보면 자세가 경직돼있거나 아니면 몸이 구부러져있거나 이럴 때 그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럴 때는 다시 몸을 관찰을 쭉 해보십시요.

몸이 바른가? 몸에 긴장돼있는 것이 없는가? 하는 것들을 다시 한번 더 어깨부터 해가지고 쭉 몸 전체를 하나씩 하나씩 관찰하면서 긴장된 것을 싹 풀고 나서, 마음이 대상을 관찰할 마음이 돼있는가?를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들어가도록 해주는 것이 수행하는데는 좀 더 용이한 겁니다.

 

Q, 수행자 질문 : 호흡을 할 때 명칭을 붙일 때 어떻게 어느 시기에 명칭을 붙여야 되는지 그걸 한번 생각을 해봤는데, 호흡이 일어남과 동시에 일어남 사라짐 명칭을 붙이는 것이 효과적인지, 호흡이 일어나서 진행하는 것을 따라가면서 알고 나서 명칭을 붙여야 되는 건지, 명칭을 어떻게 붙이는 것이 효과적인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님 : 지금 현재 명칭을 어떻게 붙이고 있는데요?

수행자 : 저는요 호흡을 하면서 명칭을 붙이다 보니까 인위적이 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호흡이 진행하는 상태를 보고 따라가면서 명칭을 붙여보니까 그 호흡하는 것이 확실히 눈에 보이는 듯이 보이는 그런 것이 있더라고예.

스님 : 어제 설명을 그부분은 「수행의 기본적인 이해」 부분에서 했던 거 같은데. 요거 아직 안 읽어봤는가요?

수행자 : 읽어보지는 안했지요.

 

A. 스님 답변 : 여기 기본적인 것들을 할 때 7페이지에 보면 좌선수행할 때 바른 자세로 앉는다 1번, 두 번째가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린다가 2번, 그다음에 세 번째가 몸을 직접 알아차려 내려간다가 세 번째, 네 번째가 현재를 알아차린다, 이게 끝나야만이 그다음에 다섯 번째 몸의 호흡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돼있습니다.

 

이 얘기는 뭐냐면 몸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호흡하고 있는지를 명칭을 붙이기 전에 알아야 호흡 명칭을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럼 먼저 명칭 붙이지 말고 호흡 하고 있는지 안 하는지를 먼저 봐야 됩니다. 자연스럽게 호흡을 하고 있는 상태가 보이면 그때사 명칭을 붙이는데, 보통은 명칭이 실제의 길이보다도 대부분 깁니다.

그러면 실제의 길이보다도 명칭을 좀더 짧게 붙인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이게 정확하게 명칭하고 실재하는 것하고 맞아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왜 그러냐면 대부분은 '일어남' 하고 일어나는 시작부터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조금 더 길게 명칭을 붙입니다. 그래서 앞에 포인트만큼 대부분 놓치기 때문에 '일어남' 하고 명칭을 붙일 때는 앞에 부분을 놓쳤다는 감안을 하고 실제보다는 조금 짧게 붙인다고 생각을 하십시요.

 

예를 들어봅시다. 호흡에서 이게 '일어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현재 내가 자연스럽게 호흡에서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들이쉬고 있는 데다가 '일어남'이라고 하는 명칭을 붙여야 되겠다 마음을 먹었다, 그러면 처음의 요만큼 호흡이 들어가고 나서 보통 명칭이 들어가진다는 거라. 그러면은 짧게 한번 붙여보라고. '일어남'

그러고 나서 뒤에 호흡이 더 불러오는 것이 있다 할 거 같으면 조금 더 '일어남'이라는 것을 조금 더 길게 하고,

만약에 명칭을 붙이는 것이 뒤에 하고 딱 맞아떨어진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명칭이 지금 맞는 겁니다. 지금 현재의 그 속도가. 그렇게 보면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보면 실제하는 것보다도 명칭을 조금 더 짧게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명칭을 붙여야만이 대부분 일치해있게 됩니다.

 

그대신에 반드시 명칭에서 해야 되는 것은 처음에 명칭을 바로 붙일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나서, 그러고 나서 호흡을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고 나서, 그다음에 명칭을 붙이라는 거라.

그것만 명심을 하면 될 겁니다. 그리고 명칭은 실제보다도 조금만 짧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명칭이 끝나고 나서 그 실재하는 현상이 끝나는가 안 나는가를 잘 판단을 하라는 거라. 호흡이 완전히 끝나야만이 '일어남'하는 것이 끝나지는 상태가 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명칭을 붙이는 걸 조금 더 길게 하든지 짧게 하든지 자기 스스로 조절을 해야 됩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성냥개비를 가지고 실제 호흡하는 것을 1분 동안 가장 편안할 때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한번 할 때마다) 성냥개비를 요렇게 하나씩 떨어뜨렸어요. 그럼 1분에 이 성냥개비가 몇개가 되는지를 세어보고 그다음에 호흡을 하면서 명칭을 붙이면서 성냥개비를 요렇게 떨어뜨려봅니다. 그럼 요개 몇개인지를 보고 이게 합이 맞아야만이, 1분 동안 하는 것이 맞아야만이 지금 명칭 붙이는 것이 정확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게 정확하지 않는다면 명칭 붙이는 것을 조금 더 짧게 하든 길게 하든 바꿔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판단하면 됩니다.

 

그리고 명칭이 정확해지게 될 거 같으면 집중하는 힘은 약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들뜨는 것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장애요인 중에 웃닷짜라고 하는 들뜨고 그리고 망상이 조금씩 많이 일어나지고 그리고 수행하는 것들을 안 하고 다른 것을 할려는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자꾸 갈팡질팡 하는 마음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없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명칭하고 실제하는 것만 정확하게 일치만 시켜줘도 그거는 잡아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한지 아닌지를 갖다가 그것들이 없이 한시간 동안 수행할 거 같으면 편안하게 수행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판단을 하면 어느 정도 좀 정확해질 겁니다.

됐습니까? (예)

 

자! 또 없어요? 또 수행에서 장애가 되는 것들은?

 

수행에 장애되는 것들에서

가장 많이 되는 망상 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수행의 기본적인 이해」 부분에서 아까 했던 부분하고 좀 겹치는 부분인데,

25페이지,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현재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 앎과 같이 결합해서 일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사띠''삼빠자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사띠'하고 '삼빠자나'는?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어요? 어떤 게 사띠고 어떤 게 삼빠자나라?

(수행자 대답 : 사띠가 이어지는 상태가 삼빠자나)

예.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현재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럼 쉽게 말하면 삼빠자나는 내가 수행을 계속하면 나에게 이익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수행을 계속했는데 나에게 이익이 없다. 그러면 사띠가 계속 끊어졌든지, 삼빠자나와 연결이 돼있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게 수행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경전 상에는 삼빠자나에 대한 것을

자신의 행위에 이익이 있는가?

자신의 이 행위가 시기적절한가?

대상이 적절한가? 수행주제를 지니고 있는가?

대상을 보는 것이 무상··무아로 보고 있는가?

이렇게 4가지로 보는 것이 삼빠자나라고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쉽게 이해가 안 될 겁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수행을 하고 나서 수행이 끝났는데 '아, 내가 현상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경험을 했다' 이럴 거 같으면 그때 당시에는 사띠와 삼빠자나가 같이 있었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1시간 동안 수행을 열심히 했기는 했는데 그냥 '일어남' '사라짐'만 있었지 다른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럼 그냥 사띠만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돼버립니다.

그마만큼 사띠와 삼빠자나가 같이 수행에서 일어나도록 하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수행하는데 들뜸도 없이 계속적으로 대상에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가고 그 대상이 변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끔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처음에 수행을 할 때도 얘기했지만 움직임의 전체를 분명하게 알려고 노력을 하라.

그리고 그 움직임의 전체를 분명하게 알고 나면 그 움직임이 변하는 것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시작과 중간과 끝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고, 멈추는 것을 알고,

그러고 나서 그 움직임이 다시 느낌으로 전환돼가지고 그 느낌이 있는 것을 알고, 그 느낌이 변하는 것을 알고.

그렇게 바뀌어져야만이 이게 나중에 수행이 끝나고 나도 아, 내가 뭔가 체험한 것들이 있게끔 된다는 겁니다.

 

아까 졸음에 비유를 할 거 같으면, 졸음이 왔으면 '졸음' '졸음'하고 알아차립니다. 졸음이 오고 있으니까 '졸음' '졸음'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그 '졸음' '졸음' 하고 있는 그 마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졸음' '졸음' '졸음' 하면서 그래서 끝까지 따라가는 거라. 그건 '움직임'을 따라가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움직임만으로 계속 '졸음' '졸음' '졸음' 할 것 같으면, 계속 따라갈 것 같으면 졸음은 오지 않고 그것만 있을 것 같이 생각하는데, 대부분은 '움직임'을 보면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그다음 상황으로 넘어가지지 않으면 졸음에 완전히 떨어져버리든지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관찰이 어느 정도 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졸음이 올 때 지금 현재 눈꺼풀의 '느낌'을 자꾸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쑤심이라든지 통증이라든지 아니면 바늘로 찌르는 거라든지 이런 것들을 보라는 거라.

 

다른 예를 들면, 1시간 동안 좌선하고 있으면 다리에 통증이 있습니다.

다리에 통증이 있으면 대부분은 이걸 명칭을 붙여서 '통증' '통증' '통증'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알아차리니까 이 통증이 사라지던가요? 사띠의 힘이 강하면 '통증' '통증' 할 거 같으면 통증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칭을 붙여가지고 이 통증이 사라지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언제 사라질까?

'통증 이거 별거 아니네' 하는 것들을 내가 알아야만이 통증이 사라집니다.

많이 경험해본 사람은 명칭만 붙여도, 통증 그거 있어봐야 다리가 마비되는 것도 아니고 별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통증' 할 거 같으면 그냥 통증이 싹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마음이 고요해져버리기 때문에 통증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져버린다는 거라. 그럼 다시 수행주제로 대상으로 돌아와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통증' '통증'만 해가지고는 이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라. 그럼 대부분은 이걸 통증이 올 때의 느낌들을 보는 거라.

마음을 관찰하는 사람들은 이걸 볼 때, '이 통증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봅니다. 살갗에 있는 건지, 아니면 조금 더 깊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근육 쪽에 있는 건지, 어느 부위에서 통증이 있는지를 포인트를 잡을려고 합니다. 심념처 수행하는 분들은.

그렇게 봤을 때 그 부위를 분명하게 집어내고 나서, 그 부위에서 이 통증이 변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야만이 이 통증이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하는 사람들은 부위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살갗이 있습니다. 살갗에 손을 이렇게 쭉 한번 대보면 느낌들이 있습니다. 강하게 일어나는 데가 있죠?

심념처는 강하게 일어나는 데가 어딘지를 찾아서 그 강하게 일어나는 것들에서 변하고 있는 것들을 봅니다.

수념처는 실제로는 이렇게 해보면 강하게 일어나는 데가 있지만 다른 데들도 사실은 느낌은 다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데나 한속에 마음을 한 포인트를 잡고 그것들을 그냥 관찰하면 됩니다. '요 부위에서 어떤 느낌들이 있는가?' 하는 것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통증이 있을 때, 여기 다리가 구부러져 있는데 여기다, 그러면 여기를 마음을 딱 두고 한번 보는 거라. 구부러져 있는 상태에서 어떤 느낌들이 있는가? 하는 걸 보는 거라. 지금 어떤 느낌들이 있어요? 여러분 다리에서. 그 느낌들이 있죠? 그 느낌들을 알아차려 보는 거라. 그 느낌들을 명칭을 부여해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느낌들은 대부분은 보면 이 느낌이 변하게 됩니다. 다른 데로 가든지 아니면 그 느낌의 강도가 변하게끔 됩니다. 그것들을 그대로 봐버리게 됩니다.

 

그래야만이 수행이 끝나고 나더라도 ', 이 통증은 무시해도 괜찮은 것이다.', 아니면 '다음에는 통증이 일어났을 때 요렇게 관찰할 것 같으면 관찰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끔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이게 사띠와 삼빠자나가 같이 일어나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인제 하루 정도 수행을 지속해봤으니까, 반드시 사띠만 있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인제 알아차림에서 분명한 앎까지도 있도록, 쉽게 말하면 그것이 변하는 속성까지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상태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호흡도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이 동일한 것이 아니고 변하고 있구나 하는 것들을 알 수 있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발도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는 것이 동일한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다 하는 것들을 알 수 있게끔 해야 됩니다. 그게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현재는 어쨌든 관찰하고 있는 것이 다른 것으로써 알 수 있게끔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들이쉬는 숨을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면, 그냥 '일어남'이 아니고 '일어남'이 변하고 있는 것으로 볼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포인트가 어떤 사람은 일어나는 것이 파도치듯이 일어나는 것이 툭툭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풍선이 뽈록뽈록뽈록 올라오듯이 그렇게 일어나는 것들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풍선에 바람이 쑤욱 빠지듯이 하는 식으로 일어나는 것들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도가 철썩철썩철썩 치듯이 강하게 뭔가 때리는 느낌이 오면서 여러 개 오는 것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그것들을 경험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걸 경험할 것이다' 마음을 먹고 그것을 관찰해가지고는 안됩니다.

그거 생각하지 말고 ', 이 숨을 들이쉬고 하는 것들은 변하는 것이다' 하고 먼저 마음을 딱 먹고 수행을 시작하면 됩니다. 그러면은 내가 그 호흡을 그대로 그냥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따라가면 그 호흡이 변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오늘은 그것들에 치중을 해서 수행을 하도록 해서 사띠와 삼빠자나가 같이 하는 수행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해나가면 될 겁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장애가 일어나는 것들은 대부분은 무시하십시요. 대부분 무시하고 그냥 쭉 지금 하고 있는 수행들을 계속적으로 하면서 그 변화들을 본다는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하도록 그렇게 하면 될 겁니다.

 

Q. 수행자 질문 : 해태 혼침이 항상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 같습니다.

혼침이나 잠의 원인에서 육체적인 피곤함과 정신적인 게으름 하고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떤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몸이 피곤해서 그러는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장애들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놓치고 있는 건지 어떻게 구분해서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A. 스님 답변 : 피곤했을 때 만약에 예를 들어서 기쁨의 마음을 한번 일으켜보십시요.

마음에 기쁜 마음을 확 일으켜보면 육체적으로 피곤할 때는 기쁨들이 그렇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보고 기뻐하는 마음, '아, 모든 생명들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좋은가!' 하는 마음들을 일으킬 때 육체적으로 피곤할 때는 그것들이 크게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피곤했을 경우에 기쁨을 느꼈을 경우에는 그것들이 금방 확 일어나는 것들이 보입니다. 그런 차이가 납니다. 정신적인 것들은 마음을 전환을 시켜주면 빨리 마음이 전환돼서 일어납니다. 육체적으로 피곤할 때는 마음을 전환시켜주더라도 그게 금방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차이가 납니다.

 

수행자 : 그러면은 육체적인 것은 이해가 됐구요, 정신적인 혼침하고 해태하고는 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실제적으로 해태는 게으르다는 얘기인데...

스님 : 게으름은 빨리어 티나-밋다를 얘기하는 겁니까?

 

Q. 수행자 : 제가 용어를 잘 모르겠습니다. 게으름에서 오는 것을 해태라고 봤을 때, 아까 정신적인 게으름에서 오는 피곤함이 있다고 그래서 혼침이 발생한다고 그랬는데, 그것하고 해태라는 용어하고 어떤 차이가 좀 있는 건지, 아니면 같은 선상에서 볼 수가 있는 건지요?

 

A. 스님 : 나도 지금 용어만 들어가지고는 해태라는 게 뭘 뜻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티나하고 밋다'하고는 틀립니다. 빨리어 용어를 가지고 설명해줄게요.

티나(thīna)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게으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수행을 하더라도 대충대충 할려고 하게 되고, 그다음에 뭘 하기 싫어하고 하는 것들이 티나에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밋다(middha)라고 하는 것은 '대상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수행을 하고 있다, 1시간 동안 수행을 했는데 1시간 동안 공의 상태로 고요한 상태로써 있게 되고, 하고 나서도 개운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1시간 동안 그게 '빈 공간이 돼버린다' 하고 할 때 이걸 밋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티나하고 밋다하고는 좀 차이가 납니다.

두 가지 다 수행에서는 장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해태라고 하는 것은 아마 티나를 가지고 해태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런 차이가 납니다.

 

수행에서 공을 느끼는 것은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 전 같이 밋다라고 하는 것, 대상을 아예 놓쳐버리고 공의 상태에서 그냥 고요하게 머물러버리고 있는 상태가 되는 것. 하나에 쭉 머물러 있는데 아무 변화없이 그냥 있는 상태를 얘기할 때가 있고,

또 하나의 공이라는 상태는 뭐냐면 수행에서 선정삼매에 이르러서 하나의 대상, 그 선정삼매의 하나의 대상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 2가지의 차이는 뭐냐면 깨어날 때 깨어나고 나서 굉장히 가벼워지는 것이 선정삼매에서 공의 상태에 빠졌을 때 깨어나고 나면 일어나는 현상이고,

그다음에 그냥 대상을 놓쳐가지고 멍한 상태에 있다가 깨어날 것 같으면 그렇게 개운하고 아주 가벼운 상태가 아니고 그냥 멍한 상태가 그대로 그냥 진행이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보면 삼매에 들은 상태가 아닐 것 같으면 그 시간은 그냥 죽은 시간이라고 보시면 맞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 없이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것은 그냥 나는 죽어있는 시간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삼매에 들어도 삼매의 대상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 대상이 변하지 않는 대상이 있다 하는 것뿐인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그 삼매에서 깨어나더라도 아주 가볍고 아주 시원하고 그리고 깨어나면 그걸 분명하게 압니다. 어느 호흡에서 깨어나는지도 알고.

그래서 조절할 수가 있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는 대부분 '밋다'에 빠진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무기와 같은 게으름의 상태, 그걸 "대상을 완전하게 놓쳤을 때 그렇다"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오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