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집중수행 법문

2025 집중수행 3일차 - 견청정 (20250915. 오덕훈련원)

담마마-마까 2025. 9. 26. 21:50

* 2025 집중수행 3일차 견청정 (20250915. 오덕훈련원)

https://youtu.be/Ly0IxWyz1Lg?si=hk5MF2uqTJni3o25

 

<청법 게송과 청팔계문 게송 독송 이후 7:35초 이후부터 법문이 시작됩니다.>

 

다음에는 그 삼귀의 팔계를 청하는 것을 해야지, 불재일날 청하는 게송을 하면 안됩니다. 불재일은 일주일에 한번 밖에 없거든. '빤짜 실라 앗타'라고 그렇게 하면 됩니다.

 

수행 좀 돼갑니까?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요? (네) 그럼 공부 좀 많이 됐겠네.

조금 공부가 됐는지 하는 걸 어떻게 보통 알 수 있느냐 하면 외부적인 거, 다른 사람의 말이나 그 자극으로 인해서 내가 얼마만큼 반응하는지를 가지고 보통 공부가 돼가고 있다 하는 걸 갖다가 보통 압니다.

 

다른 사람 말이 신경쓰여요? (아니요) 안 쓰이죠? 밖에서 뭔 큰소리가 나도 수행하는데 크게 신경 안 쓰이죠? 쓰여요? (예) 아, 그럼 아직 덜 됐네 공부들이. 신경 안쓰여야 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난다든지, 뭐 말을 하고 싶어하는 하는 것이 있다든지, 이렇게 되도 안되는 거라. 그것도 자극에 반응하는 겁니다. 친구들하고 있으면 얼마나 재밌어? 공부 안 하고 내내 조잘조잘 하는 게 최고 좋지. 잠깐씩 그런 모습들이 보여요. 집중수행 왔는데 되도록이면 말을 안 하는 것이 좋고, 친구하고 포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말없이 그냥 손 꼭 잡고 걸어가. 그래도 되잖아.

 

왜 그러냐 하면 말을 하면 마음은 흩어져버립니다. 그때만 흩어져버리면 괜찮은데 이게 수행에까지 영향을 미치거든. 예를 들면 맛있는 거 탁 먹고 나서 집에 왔는데 내내 그 생각만 하게 되는 거라. 그다음 날 뭐 다른 걸 만들어도 그거하고 자꾸 비교를 하게 되는 거라. 자극적인 것으로 인해서 내가 막 정신없이 그냥 말을 하고 그래서 좋았던 기분은 있는데 그것들이 수행에도 영향을 미칠 수가 있으면 조심하는 게 낫겠지.

 

그리고 외부적인 자극에 금방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감정적인 사람들.

그냥 마음이 평온해져 있으면 참 좋은데 감정이 좀 많이 섞인 사람들은 자극에 굉장히 취약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자극이 밖에서 온 자극이든 아니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극이든 자극이 감정을 건드리거든. 그러면 툭 튀어나오는 거라. 그래서 탐심이 많은 사람들은 조그만 물건 하나 봐도 ‘요거 예쁘다’ ‘내 거 했으면 좋겠다’ 하고 마음이 가버리는 거라. 성냄이 많은 사람들은 금방 그것으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나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감정적인 사람들은 자극에 굉장히 취약합니다. 니도 아까 그랬지. 옆에서 말하니까 깜짝 놀라던데. 그런 타입은 어떤 거냐면 견해를 많이 가지고 있거나, 지식적인 것들을 많이 쌓을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외부적인 자극들에 인해서 반응하는 것들이 큽니다. 공부를 하는 건 좋은데, 근데 공부는 공부를 해야 되는 시기가 있고 해야 되는 때가 있는 거라. 근데 그거 없이 그냥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고 하면 그거는 자극받은 거라. 그러면 금방 반응이 일어난다고. 그거하고 다르면 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마찬가지로 지식적인 것들이 그속에 포함된 것은 견해거든.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자극에 금방 반응합니다. 내하고 조금만 틀려도 그냥 수틀린다고 해버립니다. 그건 좋은 것들은 되지 못하고 하니까 조심하도록 하고.

그리고 또 하나 저 누구 하나 수행하는데 보니까, 이 생각이 많아. 생각이 많은 사람들도 금방 반응을 합니다. 생각이 밖으로 표출되어 나가기 때문에 반응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게 뭐냐면 표출돼 나가는데 좋은 방향으로 표출돼 나가면 좋은데 대부분 그게 좋은 방향으로 표출이 안 돼.

수행할 때도 나는 그냥 똑바로 걷는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갈 지(之) 자로 걷고 있어요. 생각이 왔다갔다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거든.

 

그래서 이 세 가지들은 반응하는 것들이 외부적인 자극이든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이 클 수밖에 없으니까, 요것들은 조금씩 고쳐야 돼. 자기 살아가는 성향 자체가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고치는 것이 좋습니다.

생각 많이 하지 말 것. 특히 수행에는 생각 많아서 좋은 게 하나도 없어. 안 하는 게 최고 좋아. 그냥 지금 현재 드러난 것들만 알아차리고 사띠하는 것만 해야지, 거기에 생각이 필요 없어. 생각하지 말 것. 평상시에도 그렇게 하도록 해야 됩니다.

 

두 번째, 자기 견해를 가지려고 하는 것들 되도록이면 줄여라. 충돌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그 견해가 얼마나 오래 가겠어? 잠시 좀 가졌던 것뿐인데 그것 갖고 괜히 싸울 필요가 없잖아. 그냥 냅둬. 그렇게 하는 것이 좋고, 그래서 견해를 가지는 것들도 좀 줄이고.

 

그다음에 가장 안 좋은 것 또 하나, 감정! 몸에서나 마음에서 탐진치가 일어나면은 수행은 일단 중단돼 버립니다. 사띠가 안 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 탐진치가 일어나고 감정적으로 돼가지고 바르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걸 누르고 잠재워야만이 바르게 대응할 수가 있습니다.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바르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감정적으로 돼가지고는 바르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특히 수행하는 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에서 탐진치가 안 일어나야 돼.

특히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탐진치가 일어나는 게 뭐라?

‘내가 이번 일주일 동안 열심히 수행해가지고 뭔가 성취하겠다.’ 그거는 탐심 아니라? 뭐 하러 그런 생각을 해? ‘다른 때 수행하는 거보다도 훨씬 여기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겠다?’ 그건 지 생각이지. 그게 탐심이지 그게 뭐라? 다른 게 아닌데. 그런 마음을 아예 가지지 말아라.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다 보면 좋은 대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냥 그거 대상 보면 될 건데, 지금 수행 문답 시간이 아닌데도 쪼르르 스님한테 와가지고 스님 요거 요래요래 했습니다. 이러는 거라. 자랑하고 싶거든. 그거는 뭐냐면 좋은 것이 나타난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있다는 얘기라. 수행에서 딱 중단돼버린 상태가 됐는데 지는 좋다고 좇아와갖고 문답하고 있어. 참 어리석은 거라 그게. 그냥 그대로 보면 돼. 아까 안 좋은 것들을 밀쳐내고 하는 것들이 없어야 되듯이 좋은 것도 붙잡으면 안 되는 거라.

 

오히려 수행을 하다 보면 그런 붙잡는 것들이 나중에 되면 더 훨씬 많아집니다. 지금은 고통스럽고 하는 것들이 더 훨씬 많아서 밀쳐내려고 하는 것들이 많고, 후반기로 가면 자꾸 붙잡을려고 하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그것도 안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도 내려놓고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은 어떠한 경우인지 붙잡고 밀쳐낸다고 하는 것은 탐진치가 일어났다는 얘깁니다. 탐진치가 일어난 상태에서 수행은 안 되는 거기 때문에 그건 항상 조심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법문 있죠? 오늘은 견청정을 해야 되죠?

근데 어제 심청정 부분을 사실은 다 설명을 한 것은 아닙니다. 나마루빠까지만 됐지, 그 뒤에 두 가지가 더 있는 것은 미처 설명이 안 됐는데, 오늘하고 내일하고 까지에 그것이 해당이 됩니다.

견청정에도 해당이 되고, 그다음에 그 도의청정 의심을 몰아내는 부분에도 해당이 되는 거기 때문에, 다 설명을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법문은 왜 듣죠? 수행하러 와가지고 법문이 여러분들한테 수행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게 여러분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해 주지는 않는 거잖아. 법문은 법문인 것이지, 수행은 누가 해야 돼요? 법문하는 사람이 해야 되는 게 아니고 내가 해야 되는 거잖아. 각자 각자가. 각자 각자가 수행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는데, 그렇게 봤을 때는 법문은 내가 수행하는 데는 크게 도움을 줘야 될 부분은 아닙니다.

근데 이정표 역할을 해나가겠지. 잘못돼 나갈 때는 그걸 떠올려가지고, ‘아, 이게 아니구나’ 하고 바로 잡을 수는 있어야 되는 거라.

그런 이정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법문을 하는 거니까, 너무 거기에 빠져가지고 법문을 듣는 데만 정신이 빠져가지고 수행은 안 한다고 하면 그건 바보 같은 일이라요.

 

그리고 또 법문을 들을 때 염두에 두어야 될 거는 '상웨가(saṁvega)', 경각심, 경각심을 일으켜야 됩니다. 여러분들 뭐 평생 스님 법문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법문 들을 수 있을 때 귀 딱 열고 들어요.

언제까지 여러분들만을 위해서 법을 설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들을 수 있는 조건이 될 때는 법문을 듣고, 그걸 듣는 것은 이생에서 마지막이라는 거라. 그게 여러분들한테는. 두 번 다시 똑같은 법문을 여러분한테 설할 수도 없고, 그리고 그런 기회들도 자주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딱 일생에 한 번 있는 건데 그걸 왜 마음을 안 열고 그냥 닫아버리고 해?

 

가끔씩은 법문 안 듣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거는 스님은 안 뭐라 합니다. 법을 듣는 것은 그냥 소리로써만 듣고 그래서 ‘소리들림’ ‘소리들림’ 하면서 알아차리면서 수행을 하면 됩니다. 그럴 때는 그 법문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가 되기는 하겠죠. 그래도 자기 수행을 틀림없이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거는 이제 뭐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데, 이제 법문 들으면서 자꾸 잡생각을 하면서 자기의 견해로 가지고 법문을 재단을 하려고 하면 안 된다 하는 거라. 그냥 그대로 들으라는 거라.

 

그리고 법을 들을 때는 아까 얘기했죠. 상웨가 - 경각심을 일으켜야 됩니다. 이 법문도 생애 한 부분인 마지막 법문인 듯이, 여러분들도 지금 지금 하나하나의 찰나의 시간들이 여러분의 마지막 시간들이라. 안 늙고, 병 안 들고, 안 죽을 거 같아요? 그게 무슨 뭐 나이 순이 있어, 뭐가 있어?

근데 그거 안 거치는 존재들은 없다는 거라.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르는데, 법을 들을 때는 법을 들어야 되는 거고, 수행할 때는 수행을 해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법이 필요한 게 그런 경각심을 일으켜서 ‘아, 내가 빨리 수행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만들기 위한 것들이라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한 번 더 얘기합니다. 법문은 법문으로 그쳐야 됩니다.

그것으로 도와 과에 이르를 수는 없다. 수행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다.

아까 수행할 때도 얘기했죠. 자극에 대한 반응 없이 그냥 해나가면 그래도 수행은 잘 굴러가게끔 됩니다. 그 생각을 하고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온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몸과 마음은 뭐로 이루어졌어요? ····식 오온입니다.

몸을 몸인 줄 알고 마음을 마음인 줄 알고 구분할 줄 알아야 되는데, 몸과 마음은 그대로 딱 오온이거든. 오온의 덩어리라.

몸이라고 하는 덩어리, 몸 덩어리는 뭐로 이루어져 있어요? 코도 있고 입도 있고 내장도 있고 뭐도 있고, 이게 한 덩어리로써 우리는 몸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라. 그렇죠? 그런데 구분을 해보면 코를 가지고 내 몸이라고 얘기를 안 합니다. 내 거 중에 일부라고 하지, 그냥 코라고 하지, 이걸 나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리고 이게 나일 거 같으면 요것만 떼가지고 남한테 보여줄 수 있어야 되잖아. “이게 내다”하고 얘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오, 그래” 하고 그 사람 그 코하고 얘기도 할 수 있어야 되지. 이게 그렇게는 안 되잖아. 그래서 이거는 하나의 덩어리로 보일 때 사람들이 보통 ‘어, 너구나’ 하고 얘기를 하는 것뿐인 것이지, 실제로는 이 몸은 그냥 덩어리지, 분해하려면 다 분해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특별한 것들을 내세워가지고 ‘요것 요것이 특정한 나다’ 하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이라.

 

그럼 수·상·행·식은 안 그럴 거 같아요? 그것도 덩어리잖아. 그것도 덩어리입니다.

, 느낌이 있다. 똑같은 느낌이 일어납니까? 안 그렇잖아. 여러 가지 느낌들이 있습니다. 하나의 순간에도 여러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발을 들어올리는데 느낌이 어떨 때는 가벼웁고, 어떨 때는 슉 올리는 느낌이 있고, 어떨 때는 이게 무거워가지고 잡아당기는 느낌이 있고, 똑같이 올리는 건데도 느낌들이 서로 다 다르거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느낌들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어찌 보면은 하나의 덩어리라. 특히나 느낌은 들어올릴 때 한번 일어나는 게 아니거든. 여러 차례 일어납니다. 그런 느낌들이.

 

그다음에 수·, 상이라는 게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발을 들어올렸으면 들어올렸다고 기억을 하는 거라. ‘내가 들어올리고 있네’ 하고 아는 거라. 이게 쉽게 말하면 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들어올릴 때 들어올린다고 알고 있잖아. 근데 들어올리는 거는 각각 다 틀립니다. 올리는 방식도 틀리고.

여러분들 보면 경행할 때 잘못하는 부분 중에 하나가 뭐냐면,

경행을 할 때 발을 이렇게 들어올리잖아. 뒷발 들리고 이렇게, 그러면 뒷발(뒤꿈치) 들고 앞발(앞꿈치)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요렇게(비스듬히)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경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올리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발을 들 때는 완전히 딱 들고, 들고 나서 나아갈려고 해야 돼. 비스듬하게 나아가든 아니면 똑바로 나아가든 그거는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는데,

보통 뒷발 들고 앞발이 채 들리기 전에 요렇게 나아가져 버립니다. 그러면 들어올릴 때의 느낌들을 그대로 이어서 그냥 나아갈 때로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나아갈 때는 들어올릴 때의 느낌하고는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움직임의 느낌이 훨씬 많은데, 그걸 그냥 놓쳐버리게 되는 거라. 들어올릴 때의 느낌때문에. 그래서 들어올릴 때의 느낌으로 그냥 쭉 끌고 나가 버리는 거라.

 

그게 어떤 사람들이 많으냐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불러오고 꺼지고 나서 딱 멈추는 게 보이는 사람들은 그다음부터는 불러오고 할 때 불러오는 첫 부분을 잘 몰라요. 그리고 한참 불러오고 나면 불러온다고 알아. 그게 이게 습관 들어서 그러는 거라. 멈췄는데 멈추고 나서 멈춘 거는 아주 짧은 순간이고, 다시 배가 불러오게 돼있는데, 아니면 꺼지게 돼 있는데, 꺼지는 부분은 내가 멈추는 데다 마음이 딱 묶여져있는 거라. 그 잠깐 동안.

그러니까 실제로는 이미 배가 불러와지고 있고 꺼지고 있는 상태인데도 나는 멈추는 상태인 거라 마음이. 그러니까 ‘멈춤’하고 있는데 이미 배는 불러와진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불러오다가 한참 있다가 이거 불러오는 거를 알게끔 되는 상태가 되는 거라. 이게 이런 조금은 사소한 거지만은 습관이 그렇게 들여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발을 들어 올릴 때 반드시 완전하게 딱 들어올려지고 나서 나아가도록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완전히 들어올려진 걸 알고 나아간다고 알아차려야지, 씨익 그냥 뭐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뭐 그냥 씩 같이 가버리면 안됩니다. 내려놓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내려놓을 때도 가는 것과 동시에 쭉 연착륙 하듯이 이렇게 척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특히 자네, 다 보고 있어요. 그러면 안 돼. 그러면은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려놓는 것들이 같이 인식이 되기 때문에, 나간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디디게 되는 상태가 되지, 요걸 그냥 디디고 누르고 하는 것들은 전혀 몰라.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바로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내려놓을 때 내 앞발이 먼저 닿든 뒷발이 먼저 닿든 아니면 동시에 닿든 그거는 개인 자유입니다. 그건 개인마다 틀립니다.

 

근데 제가 스승한테 배우는 방법도 그랬고, 제가 또 해보니까 발을 디디고 내려놓을 때도 되도록이면 발이 동시에 쭉 닿는 것이 가장 감각을 느끼기에는 좋습니다. 많이 두드러집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조금 더 예민한 사람들은 뒷발보다는 앞발이 먼저 닿는 것이 닿는 포인트를 처음 시작할 때 탁 캐치하기가 쉬워. 그런 건 있고.

그 대신에 뒷발이 이렇게 먼저 닿는 사람들은 감각이 많이 깨어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뒤꿈치 부분에도 그 느낌들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뒷발이 닿을 때는 닿으면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뒷발의 감각이 예민한, 일반 사람들은 예민한 편은 아닙니다. 그러면 닿고 나서 눌려질 때 닿는다고 알아차릴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그냥 동시에 발을 딱 디디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근데 뭐 그거는 어떤 게 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답이 있는 것은 아닌데, 왜 이렇게 하느냐면 그 행위를 하면서 마음이 딱 거기에 찰싹 달라붙어가 일치되어야 되는데, 일치되지 않는 것들이 생길 수가 있기 때문에 그걸 방지하자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수·상 했고 행, 행온은 뭐라? 그냥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하고자 하는 것들,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됩니다. 가고자 하고, 뭐 하고자 하고, 말하고자 하고, 뭘 하고자 하는 것들은 다 여기에 행온에 포함됩니다.

 

식온은 인식하는 겁니다. 그냥 아는 겁니다 그 대상을. ‘음, 이거네’ ‘닿았네’ 하고 아는 것, 그것들을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네 가지들도 이렇게 구분해 볼 수가 있는 거라.

가고자 하는 걸 갖다가 상온이라고는 얘기를 안 하잖아. 그렇잖아. 가고자 하는 것은 그냥 행온이지. 그 행온의 고유한 역할인 것이지, 다른 것들이 아니거든. 다른 거하고 섞일 수가 사실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탁 일어났다. 뭔가 이렇게 닿았다, 그러면 대부분 이 4가지가 다 같이 일어나죠. 수·상·행·식이 다 같이 일어나집니다.

 

근데 엄밀하게 보면 그것도 대빵이 있고, 따르는 사람이 있고 그래요. 수·상·행·식 이 마음이라고 하는 4가지도. 뭔가 충동질하는 게 있어야만이 그걸 인식을 할 거 아니라. 그 충동질을 하니까 그걸 볼려고 하는 의도가 생기는 거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느낌들이 일어나는 거고, 그리고 그게 무엇이다 하고 분명히 아는 것들이 있고, 이러는 거라.

그래서 마음의 작용 4가지도 틀림없이 어느 것 하나는 대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충동질하는 것. 그게 뭘까? 행! 그렇게 보면 됩니다. 상카라(saṅkhāra).

 

상카라(saṅkhāra)는 모든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없으면은 여러분들은 굳이 걸을려고 할 필요도 없고, 살 필요도 없어. 그런데 살아가고 있는 것, 그리고 다리가 아프면 편하게 다리를 펼려고 하는 것, 뭐 때가 되면 밥을 먹으려고 하는 것, 전부 다 상카라의 충동으로 인해서 뭔가를 행하는 상태가 됩니다.

사실은 살아 있을 때는 이 상카라가 대장 역할을 사실은 해.

그래서 요놈만 잘 제어를 하면은 굳이 내가 뭐 살아 있어도 생존욕구가 강하게 작동이 안 되도록 할 수도 있고, 뭐 그렇다고 해서 안 산다는 얘기가 아니고. ‘뭐 죽을 때 되면 죽는 거지’ 하는 마음을 가질 수는 있게 되는 거라.

그걸 잘 제어할 수 있는 게 실제적으로는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거라. 아무리 법문을 통하더라도 그걸 제어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수행자 : 스님, 행온이 있으면 식도 일어나는 겁니까?) 그렇죠.

 

그래서 오온은 이렇게 구분이 되는 거라.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그것도 그냥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의 행위도 고정된 것이 없어. 그냥 흐름이라. 변하는 흐름일 뿐이라. 느낌도 변해나가고 있고, 물질적인 그 몸도 변하고 있는 거라. 안 변하는 거 없잖아. 계속적으로 변하면 어떻게 돼?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라. 똑같은 것은. 어디 있어? 똑같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즉각즉각 내가 알아차리는 것은 그거는 이생에서 한 번밖에 없는 것들이라. 요때 요거 알아차리는 거고, 그러고 그건 이미 흘러가 버렸어요. 그리고 나서 똑같은 느낌이라도 다른 느낌들이 알게 되는 것이지, 그것을 집착해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근데 왜 집착하지? 몸에 집착하고, 마음에 집착하고, 지 것도 아니고 그냥 지 성품대로 흘러가는 것뿐인데, 그래서 어느 것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 왜 집착하고 있느냐는 거라.

집착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라. 집착하니까 여러분들이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윤회를 하게끔 되는 거라. 악의 순환 고리는 그것에서 딱 끊을 수가 있는 거라. 그것만 집착만 안 하면 돼. 그게 뭐 어떤 것이든, 수상행식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든 안 되는 것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은 견경청 부분에서는 어렴풋이나마 이해는 할 수 있게끔 되는 것이지, 그게 확연하게 구분돼 가지고 ‘야! 진짜 이렇네’ 이럴 정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거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스님이 설명해 주는 거라고 해서, ‘나는 왜 이거 경험이 안 되지’, 이렇게 하면 안 돼. 대부분은 경험 못 해. 한참 공부하다가 보니까 그런 경험들을 하게도 되는 것이지, 뭐 달랑 일주일 있으면서 그거 경험할 거라고 착각하면 안 되는 거라.

안 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냥 들으시면 됩니다.

그 대신에 언젠가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은 ‘아, 그게 참 맞구나’ ‘부처님 가르침이 맞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고, 그 가르침 따라 계속적으로 수행을 하려는 마음들이 생기면 됩니다.

 

어쨌든 집착하는 것만 없도록 자꾸 만들면 됩니다. 일상생활 할 때도 그렇게 자꾸 만들면 됩니다. 집착 안 하면 돼. 지금 현재 아무것도 내 앞에서 딱 멈추고 있는 게 없는데, 내가 그걸 집착하고 있는 거라. 생각도 멈춘 게 없고, 다른 사람 생각은 더더구나 더 바뀌고 있는데, 나는 옛날에 그 생각을 잡고 있는 거라. 모든 것들은 다 그렇게 흘러가게끔 됩니다.

 

변화되고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온이라고 하는 것도 그와 같이 어느 것 하나도 머물러 있는 것도 없고, 다 분해되게끔 돼있고, 구별이 되게끔 됩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은 수행의 시작은 그것들을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는 것으로 인해서 분명하게 구분해 나가게 되는 것, 이게 수행의 시작점입니다.

물질적인 게 있다. 물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안 거잖아. 알고 나서는 어떻게 해요? 이 물질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과 다른 것이다 하고 구분을 한다는 거라. 그게 수행의 시작점이라. 그것들을 인식하고 구분을 할 수가 없으면 수행 안 돼. 이해됐죠?

 

그럼 견청정이 이렇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견해가 생기는 것만 얘기할까? 아니겠지. 또 뭐가 있을까? 뭐라 그러노? 송송송송. 똑똑히 얘기해 봐.

(수행자 : 제가 이해하는 거는 견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선입견, 고정관념 그런 것들이 변하는 것을 얘기... )

맞아요. 그것도 맞아요. 그것도 견해입니다. 근데 견해는 보통 62개니 뭐 어떻고 그 경전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한데,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얘기하면 '상견, 단견, 유신견'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상견, 단견은 여러분들이 알죠? 알고 있잖아.

'상견'은 여러분들이 뭔가 윤회하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 근데 여기 한국 스님도 있지만, 한국 스님들 이게 안 바뀝니다. 내가 아무리 얘기해 줘도, 무아에 대해 얘기해줘도 아, 그래도 뭔가 있대. 뭔가 불멸하는 뭔가가 있어서 내가 존재를 하는 거라고, 가정을 두고 얘기를 하는데 뭔 말이 통해? 안 돼. 그래서 한국 스님들한테는 상견을 바꾸려고 하는 생각 자체를 이제는 안 일으켜.

근데 여러분들은 상견은 없는 건 알잖아. (예) 단견도 마찬가지라.

 

이 '단견'은 특히 학자들한테, 학자들한테 단견 바꾸려는 생각을 안 일으켜. 그 사람들은 윤회 없다 생각하니까. 그래서 내가 아무리 좋은 일 해도 좋은 결과, 다음생에 언제 받을 줄 알아서 내가 어떻게 하는데? 이렇게 하는데 뭐라 할 거라? 그걸 갖다가. 안 바뀌어요 그것도.

그래서 아휴, 그래 니는 그냥 그거 공부하는 거나 잘 닦아 가지고 마 그렇게 살다가 가시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근데 어쨌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지만 '단견'도 벗어나야 되는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상견 단견을 없애는 것이 '깜맛사까따냐나딧티'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견해입니다. '업의 법칙', 내가 지은 행위는 내가 받는 것이고, 그것을 갖다가 감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금방 한번 생각해 봐. 내가 성냄이 확 일어났다. 그럼 누가 먼저 영향을 받아? 내가 먼저 영향을 받아. 내가 아파 죽겠는데. 내가 자애의 마음을 탁 일으켰다. 자애가 저 사람한테 펼쳐지든 안 펼쳐지든 그런 둘째 문제고, 자애로 인해서 내가 기분 좋은데, 내가 즉시 영향을 받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깜맛사까따냐나(kammassakatā ñāṇa)'라고 하는 겁니다. 업과 업의 법칙은 분명해서 선한 것은 선한 결과를 낳고 악한 것은 악한 결과를 낳는다. 그거는 꼭 굳이 뭐 다음 생까지 안 하더라도 여러분들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그게 가장 기본적인 견해입니다. 그거는 이런 법문이나 책을 통해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으로 해서 넘어 가집니다.

 

그런데 그다음 부분이 조금 전에 얘기했던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견해. 그거는 이해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을 통해서 경험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면은 그렇게 하다 보면은 물질적인 현상이 변하는 게 보이거든. 정신적인 것도 변하는 게 보이거든. ‘아, 이게 참 무상하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 되는 거라. 변하고 있으니까 무상한 거라.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래서 무상··무아에 대한 특성을 분명하게 안다는 견해가 성립되는 것, 그것도 수행을 통해서 가능한 거라.

 

마찬가지로 원인 결과에 대한 이해들을 갖다가 분명하게 하는 견해가 생기는 것도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거라. 마음이 앞서야만이 몸이 움직이는 결과가 나오잖아. 마음이 가고자 안 하는데 지 몸이 지 혼자 갈 수 있나? 못 가잖아. 그게 원인·결과라는 거라. 그것도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견해라는 거라.

 

견해들은 이렇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한 4개 정도를 얘기를 했습니다.

깜맛사까따냐나(kammassakatā ñāṇa),

나마루빠냐나 체다딧티(nāma-rūpa-pariccheda-ñāṇa),

그다음에 헤뚜빳자요 빠릭가하 딧티(paccaya-pariggaha-ñāṇa)라고 하는 거, 쉽게 말하면 원인 결과에 대한 것,

그다음에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라고 하는 세 가지의 특상. 띠락카나(ti-lakkhaṇa)라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견해를 가지는 것,

그렇게 네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요거는 수행을 통해서 쭉 수다원이 되기 전까지는 계속적으로 해나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수다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작은 수다원에 이르는 상태가 되고 나서도 이 4가지는 계속해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을 갖다가 구분하는 지혜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에 원인·결과에 대한 지혜가 안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또는 원인 결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무상·고·무아에 대한 성품들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는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지혜가 생기고 나면은, 앞에 거 두 개는 이미 통달이 돼있는 상태가 돼야 되는데 안 그렇거든 또. 그게 있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수행하면 무상 고 무아가 안 보여. 안 보이고 다시 또 몸과 마음을 구분하는 것부터 또 시작이 되기도 하고 그래. 그래서 쉽게 말하면 요 3개는 사이클이라. 사이클. 어느 정도의 위치까지 딱 수행해서 도달하기 전까지는 계속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사이클입니다.

 

이게 완성되면 심청정의 상태가 되는 거고.

그래서 처음 초선정, 위빳사나 초선정에서 계속적으로 대상을 누릴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거고, 그리하더라도 계속적으로 그게 그것들이 일어나고 머물러 있지를 안 해요. 항상 마음은 또 툭 떨어집니다. 또 툭 떨어져요. 그러면 다시 또 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면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성품까지 봤다고 하자. 수행을 통해서.

그럼 어디까지 올라가면은 적어도 이것에 신경 안 쓰고 계속적으로 수행을 해나갈 수 있을까? 요게 인제 빠르게 변하는 게 보이면 돼. 쉽게 말하면. 물질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이게 아주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여서 도저히 내가 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됐을 때, 그래서 그걸 분명하게 알게 되면은 그다음부터는 수행하면은 이 앞에 부분은 안 해도 돼. 저절로 수행하면 대상 자체가 그렇게 보여.

 

그때까지만 올라가면 수행은 일단 단계를 완전히 한 차원을 딱 넘어서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게 이 견청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적어도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들은 떨어트려야 되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들.

어떻게 해서 떨어트릴까? 여기 스님, 여자, 남자 구분하는 게 유신견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러면 여러분들이 스님을 볼 때 그냥 보이면 보인다고만 알아차리고 있을 것 같으면 유신견에서 벗어나 버린 상태가 되는 거라. 들리면 들린다고만 알아차리면 유신견에서 벗어난 상태가 되는 거라.

 

유신견은 쉽게 말하면 구분하는 상태가 되고, 거기에 구분하는 건 누가 구분해요? 내가 구분하고 있는 거라. 내가 이 사람은 여자고, 이 사람은 남자다 하고 구분하는 거라. 근데 그거는 개념이지 누가 동일하게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그리 안 해줍니다. 이 승복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 있는 스님 보고 '스님'이라고 얘기를 안 합니다. “저기요” 하고 부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간혹 있어요. “뭐 하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물어봅니다. 이상한 복식을 입고 다니니까. 그게 이제 개념인 거라.

 

개념을 지니고 있으면은 자기가 알고 있는 개념하에서만 그것들이 보이게 되는 거라. 그럼 개념을 벗어나버리면 그거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라. 스님으로 보이든 안 보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그것에 맞게끔 행동을 하면 되는 거라. 그게 유신견인데, 그 유신견으로부터는 일단은 벗어나야 돼.

 

그게 가장 좋은 게 유신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구분해가지고 ‘아, 이것도 무상한 성품이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면은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안 하는 거라. 조금 전에 얘기했죠. 어떤 사람은 "스님"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사람은 "저기요"라고 부른다, 그럼 그 사람 보고 “당신은 왜 스님 보고 저기요라고 불러?” 그것도 견해라는 거라. 유신견에, 자기라고 하는 것에 딱 잡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라. 그 사람이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내가 바뀌는 건 아니잖아.

 

본질은 이건데, 본질은 놔두고 자꾸 껍데기만 잡고 있다는 거라. 이 껍데기가 쉽게 말하면 유신견이라. 껍데기는 '나'라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뭐라고 부르고, 뭐가 되고, 이거는 무엇이다’ 하는 것들을 갖다가 구분 짓고 있다는 거라.

그것만 놓아버리라는 거라. ''라고 하는 것이 딱 개입만 안 되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게 무상한 성품을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변하는데 그게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게 뭐가 있어? 없어. 아무것도 없어. 어느 것 하나도 고정돼 있지 않고 계속적으로 바뀌어나가고 있는데, 안 귀찮아? 그걸 내 것이라고 자꾸 붙잡고 쭉 따라가기에? 지쳐버리게 돼. 그래서 그걸 안 잡게 되는 거라.

 

예를 들어서, 성냄이 확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뭔 말을 해서 성냄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그럼 성냄을 붙잡지만 않고 있을 것 같으면 성냄은 그것도 무상한 성품이기 때문에 사르르 사그라들 수밖에 없어. 생각 한 찰나만 탁 바꿔버리면 샥 사그라들어.

예를 들어 볼까? 확 성내고 있는데 누가 저 옆에서 “누구야” 하고 탁 부르면, 그 소리 탁 듣는 순간에는 성냄이 없어요. 아주 찰나 간에 탁 사라져 버리는 상태라. 수행에서도 마찬가지, 성냄을 탁 보면은 성냄이 착 사그라져.

 

그게 뭐냐면 나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 개입만 탁 안 되면은 성냄은 싹 사그라들어 버립니다. 성냄이든 탐심이든 뭐든 간에 거기에 나라고 하는 것만 개입만 안 시키면, 그것들은 관찰하면 샥 사라집니다. 왜? 다 무상한 성품이기 때문에.

그래서 불교에서 "이 '나'라고 하는 것이 접착제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디에든 탁 달라붙는다는 거라. 달라 붙어가지고 그걸 변하지 않게끔 그냥 붙잡아두는 성질을 가진다는 거라. 일상생활에서도 나를 내세우지마. 나를 내세우는 습관을 자꾸 가지지 않으면은 적어도 수행에서 조금 더 수월해지게 됩니다. 이해하겠죠? (예)

 

견청정은 그렇게 되는데, 가장 좋은 견청정 - 삼마딧티(sammādiṭṭhi)가 되는 건 언제일까? 여러분이 도와 과에 이르렀을 때. 도와 과에 이르렀을 때 얻는 견해, 그것은 완전한 견청정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견청정은 수다원이 돼야 인제 완성을 시킨 첫 단계를 끼운다" 하고 얘기를 하긴 합니다. 그래도 뭐 그때까지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조금 조금씩 익혀나가야 되는 상태라고만 알면 됩니다.

 

수행은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수행하고 하는 것은 그냥 조금 더 시간을 들여 가지고 수행하고자 하는 그런 것들 때문에 여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집에서 다 쫓아내고 혼자 있으면 됩니다. 굳이 여기 안 와도 되고, 법문 듣고 할 이유도 없는 거고.

그런데 여기 왔다는 것은 그냥 죽을 각오로 수행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여기에 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수행 기간 동안에 그래도 내가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는 마음이 들도록은 돼야 됩니다. 그래야 나갈 때 뭐 아무 소득이 없어도 보람은 있을 거 아니라. ‘아, 내가 또 수행을 하겠다’ 하는 마음들이 생기는 거라.

 

그래서 이왕 왔으니까 조금 더 열심히 수행을 하도록 하고, 수행에 방해되는 행위들은 되도록이면 하지 말아라. 그거는 습이 익혀지는 거고 그 행위로 인해서 오래도록 영향을 미치는 거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하지 않고, 수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잘할 수 있죠? (예) 또 해봅시다 이.

아, 밥 때다. 밥 먹고 합시다.

한 시간 좌선하면 고통이 와도 좀 참아 봐. 참고 해봐. 그 괜히 다리 풀어가지고 조금 편안해진다 해가지고 수행 잘 되는 건 아니니까 견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