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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진행 상황을 알고 싶어 하는 이유(20260516. 프린트물 법문)

담마마-마까 2026. 5. 17. 08:52

수행의 진행 상황을 알고 싶어 하는 이유(20260516)

 

자기 평가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숨어 있는 자아의 착각

 

자신을 평가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계속 있어서, 수행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타인에게 평가받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곤란한 문제입니다. “내 수행이 어디까지 진전되었는가?”라는 말을 바꿔서, “<>라는 마음이 어디까지 줄어들었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수행 진척도를 아무리 물어봐도 타인이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주도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인 라는 인식, 즉 자아의식을 불교는 착각이다라고 지적합니다. 자아란 착각입니다. , ‘란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있다라는 것을 실감하며, 생생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그 감각, 즉 착각을 어디까지 줄일 수 있었는지가 수행의 성과가 됩니다. 어디까지 올바르게 알아차렸는지, 지혜가 있는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자각은 본인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더러움이 얼마나 씻겨 나갔는가.

 

다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더러움이 어느 정도 씻겨 나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략적인 판단이겠지만, 더러움이 씻겨 나갔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더러워져 있었는지 알고, 그 더러움이 줄어들었다는 자각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 더러움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스스로는 나는 정말 친절한 성격이다라고 생각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격렬한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마음속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겉으로는 상냥한 모습을 보이면서, “너를 위해 해주고 있는데!”라고 화를 내는 경우 등이 그렇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아이에게 화내지 마세요라고 조언하면, 거의 틀림없이 역으로 화를 내곤 합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이건 내 마음의 더러움이다라고 스스로 판단해 버리는 문제도 있습니다. 마음의 더러움이 어디까지 씻겨 나갔는지 관찰하더라도, 그것이 각자의 자기 판단이라고 생각하면 거기서 자만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깨닫지 못한 미세한 마음의 더러움을 놓치게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전한 방법이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명확히 하신 10가지 마음의 더러움

 

마음의 더러움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명확히 마음의 더러움이란 무엇인가라고 설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항목에 자신의 마음 상태를 대조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 지도자들도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오하분결=유신견·의심·계금취·감각적 욕망·성냄, 오상분결=색계욕·무색계욕·아만·들뜸·무명)입니다. 그 항목에 자신의 마음 상태를 대입해 보면, 현재 상황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명한 이치입니다.

 

우리 지도자들이 여러분의 수행이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 확답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에게 묻지 않아도, 수행이 진전되어 결과를 내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진지하게 수행을 계속하며 결과를 내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수행 성과가 궁금하다'라는 문제는 별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복된 수행이 완벽하다면, "atthi kayoti(이것이 몸이다)"라는 느낌이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갑자기 일상생활에서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먹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할 겁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신체적, 정신적 활동들은 마치 자동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진행되며, 이 모든 것을 하는 나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깊은 위빳사나의 시작입니다.

 

당신도 그런 상황인가요? 당신의 육체가 내부에 별개의 자아가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나요? - 만약 그랬다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잘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수행 진도나 성과가 궁금하다라는 것은 의심이라는 번뇌의 작용입니다. 스스로는 자신을 알지 못해 이걸로 괜찮은가?” 하고 의심과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류과까지 나아가면 그 의심도 사라집니다. 예류과의 마음 상태는 어떻게 되는지, 어떤 번뇌가 사라지는지, 어떤 번뇌가 남아 있는지, 그 부분은 각자 조사하고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로 삼아 두고, 반복적으로 자기 관찰 수행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 관찰력을 기른다.

 

대체로 수행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대충 대충이고, 흔들거리며, 미지근한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쉽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기본으로 돌아가, 기본을 충실히 지키며, 깨달음의 능력을 높여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위빳사나 수행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수행에 애를 먹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초기 단계에서 가졌던 의심, 즉 마음이 어떻게 더러워지고 맑아지는가 하는 의문이 사라지게 되고, 수행의 결과가 자명한 이치로서, 자각된 것으로서 스스로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일단, 지금 단계에서는 내가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가?’라고 자신에게 솔직하게 확인해 보면 될 것입니다. 그것도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스님에게 물어본다고 해도 정확히 대답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계속 힘내세요라고 격려해 드리는 것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어쨌든, 위빳사나 수행이라는 것은 지침대로 실천하면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드러난 지혜가 쇠퇴하거나 퇴보할 일은 없습니다. 실천한 만큼 마음은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에고나 자아의 강함과 비교하면 나아졌는지 알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깨달음이 늘어난 만큼 마음은 성장해 갑니다. 그 결과 망상이 줄어들고, 고통이 사라지며, 현상의 기복에 직면해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위빳사나에서의 진보는 여러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즉 사띠의 명확성, 자극에 대한 반응, 그리고 윤리적 안정(),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무상··무아)입니다.

 

지혜가 성숙하는 과정에는 일정한 단계가 있다.

 

자신의 노력과 선업의 과보에 따라서 거쳐야 할 단계를 빨리 거칠 수도 있지만, 누구나 일정한 단계의 지혜를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최고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지혜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에 대해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다음 단계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누구나 지혜를 얻으면 만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고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높은 단계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도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 윤회를 끊으려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가리지 않고 번뇌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해탈로 가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좋아하면 머물게 되고 머물면 가라앉습니다. 또한 싫다고 내치면 휘말려 버려 풍랑에 떠내려갑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사띠입니다. 좋은 것이나 싫어하는 것이나 그것은 단지 사띠할 대상에 속합니다.

 

사띠는 강할수록 좋고, 아무리 강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사띠는 들뜨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수행 대상을 잘 아는 특성(Apilāpanalakkhaṇā)’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잘 알아서 유지하게 하는 특성(upaggaṇhanalakkhaṇā)’이 있습니다.

, 사띠의 대상인지, 그것이 유익한지, 도움이 되는지, 지금 여기서 일어난 대상인지,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지, 붙잡거나 밀어내는 것이 아닌지, 무상··무아의 성품이 드러나는지를 잘 알아 계속해서 사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할 일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보고 사띠하는 일뿐입니다.

 

답을 알았다는 자만은 나를 눈멀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