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기 싫은 마음에 대한 대처법(20260321)
· 하기 싫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기 싫고 귀찮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기꺼이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은 자아를 강화하고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더 가혹하게 말하면, 자신을 불행에 빠뜨리는 일이라 해도 기꺼이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을 읽기보다, 음악을 듣고 싶습니다. 설사 책을 읽는다 해도, 공부나 일에 도움 되는 지식서 보다, 재미있고 자극적인 소설이나 만화를 읽고 싶어 합니다. 몸에 좋은 음식을 택하기보다, 맛이 진하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합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인생은 그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불행해지는 일은 기꺼이 하려 하고, 행복해지는 일은 협박해서라도 억지로 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항상 행복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은 귀신이나 악마처럼 보입니다. 학교 선생은 학생들에게는 그야말로 끔찍한 ‘귀신’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예의범절을 엄격히 가르치려 하는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는 가장 나쁘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마처럼 보입니다. 가능하다면 사라지기를 바라고, 심지어 복수하고 싶다고까지 생각할 정도입니다. 세상은 그런 식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려 해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 「이대로 괜찮은가?」라고 자문해 보라
그 자리에서 『그럼 나는 고통받고 싶다는 말인가?』라고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무지한 채로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감정의 노예로 살아도 괜찮은가?』라고 하여 자신의 자존심을 자극해 보십시오. 수행하기 싫다는 마음은 예를 들면 놀고 싶다거나 TV를 보고 싶다는 욕구일 것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 성장의 길이다.
유인등의 빛으로 다가가는 벌레들처럼, 왜 스스로 파괴로 향하려 하는가요? 우리도 그런 식으로 살아도 괜찮겠습니까? 벌레들에게는 빛을 향해 가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스르거나 저항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감정과 욕구를 참아내어 일부러 본능에 거스르는 일이야말로 훌륭한 능력을 만들어 내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맛있어 보이는 것을 보면 무턱대고 먹어버리는 사람과, 맛있어 보이는 것을 보고도 침착하게 생각해서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해 스스로를 단속하는 사람, 어느 쪽이 더 현명할까요? 답은 어느 정도 감정을 통제한 사람이 더 현명합니다.
화를 내자마자 상대를 때리는 사람과, 화가 나도 ‘됐어’ 하고 바로 진정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현명할까요? 화가 나면 화로 응수하는 것이 법칙이고 그것이 보통입니다. 이 일반적인 흐름을 조금 거슬러 보는 것에서 진짜 힘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면 먼저 솔직하게 ‘하기 싫다’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그럼 이 감정의 변화를 지켜보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번뇌와의 싸움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 자신의 ‘숙제’로 삼아 임한다.
또 하나, 여러분은 흔히 ‘보상’을 줍니다. 아이에게 숙제를 하면 만화를 사 준다거나 해서 아이는 만화를 갖고 싶어 숙제를 하는 것이지요. 동물을 잡고 싶으면 덫을 놓고 먹이를 두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배가 고파도 먹이를 보고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끼면 ‘이건 위험하다’ 하고 그냥 지나칩니다. 그런 동물은 영리할 것입니다. 먹이를 보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달려들어 버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보상을 보여 주거나 살짝 흔들어 보이는 것은 바보의 짓입니다.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위빳사나 수행을 지도할 때 굳이 당근을 매달아 주지 않습니다. 결코 사탕발림하듯이 칭찬하거나 부추기지 않습니다. 당근을 매달아 봐야 그런 사람은 두세 걸음 나아가서 “그래, 그만두자” 하고 끝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화를 원하거나 보상을 바라서 숙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할 과제’로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고맙고 바람직합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직합니다.
예를 들어 만화라는 보상을 받으려고 숙제를 한다고 하자. 만화 정도의 보상은 괜찮다 치더라도, 숙제를 시키기 위해 보상이 점점 커져만 간다면 매우 위험합니다. 또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아이에게 보상을 주어 어떻게든 힘들게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고 하자. 보상 요구가 점점 커지면 결국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방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게 하지 말고 스스로 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 행복해지는 길은 누구도 걷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행복해지는 길을 포기하면 괜찮을까요?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길은 엄격합니다. 제대로 일하고 제대로 공부하려면 많이 힘듭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그대로는 안 된다고 자존심을 가지고 노력해 보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잘된 경험을 하면 거기서 ‘의욕’이 생깁니다. 그래도 여전히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 악마의 역할을 하는 자신의 마음
경전에 ‘악마’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신교에서 말하는 악마와 같은 느낌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방해꾼은 밖에서 들어온다”는 식입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데, 악마가 방해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에게 있어 악마란 성스러운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인데,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타인은 당신을 혼침수면(惛沈睡眠)에 빠뜨릴 수 없습니다. 타인은 식후에 오는 권태감을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한여름의 무더위, 한겨울의 혹한 등 외부에서 닥치는 조건도 있지만, 그에 대해 졸음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도와 과를 얻으려는 사람은 강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존재욕도,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그 밖의 번뇌들도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망상과 사고로 영양을 공급하며 키워낸 것입니다. 해탈에 이르려면 자신과 싸워야만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있는 가장 어려운 싸움이기에, 자비로우신 부처님께서 완벽한 수행 방법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도(道)는 완벽하게 설파되어 있습니다. 실천해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입니다.
· 위빠사나는 언제나 정진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불교 용어에 ‘정진한다’라는 말이 있고, 해탈에 이를 때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마음이 해탈에 이를 만큼 가까워지면, 현상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하면 몹시 두려워집니다. 정신 상태는 시시각각 변합니다. 그 자리에서 정진이 끊어지면 모든 것이 멈추고 마음은 해탈에 이르지 못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언제나 ‘정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저절로 쉽고 자동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거나, 다른 사람의 힘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 하나도 타력으로 성취될 수 없습니다. 정진하십시오.
위빳사나 수행 중 '하기 싫은 마음(게으름, 저항, 지루함)'이 드는 것은 수행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장애(Nivaraṇa)입니다.
· 수행이 하기 싫을 때는 하기 싫은 것이 사띠할 법이다.
법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입니다. 이때 수행자는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간단하게 해결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늘 수행을 그만두고 맙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나타난 대상을 법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자는 대상을 단순하게 보아야 합니다. 알아차리는(사띠하는) 것이 단순하게 보는 것입니다. 복잡한 것은 학문이고 수행은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수행이 필요해서 시작했어도 그간 살아온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어 인내하기가 어렵습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반드시 여러 가지 장애가 나타나는데 하기 싫은 것도 장애입니다. 이 장애는 손님으로 찾아온 것이라서 손님에게는 알맞은 대접이 필요합니다. 이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수행을 계속할 수도 있고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신념이 무너지지 않아 장애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노력할 수 없어 수행을 지속하기 힘듭니다. 알아차리는 힘이 적고 장애의 힘이 클 때는 확신에 찬 믿음만이 수행을 지속할 수 있게 합니다.
알아차림(사띠)과 함께 필요한 것이 분명한 앎(삼빠자나)을 하는 것입니다.
첫째, 지금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 이익인가, 아니면 수행을 그만 두는 것이 이익인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둘째, 지금 수행을 할 때인가, 아니면 수행을 그만둘 때인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셋째, 지금 필요한 대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필요하지 않은 대상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넷째, 지금 어리석음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어리석지 않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네 가지 앎에 비추어보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지 알 수 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사띠)이 지속되도록 하여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 분명한 앎(삼빠자나)입니다.
다음으로 수행이 하기 싫을 때는,
① 먼저 ‘지금 수행을 하기 싫어하네’라고 저항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하기 싫어하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린 뒤에,
② 다시 수행을 하기 싫어하는 마음 그 자체를 위빳사나의 대상으로 삼아 알아차립니다.
③ 그런 뒤에 수행을 하기 싫은 마음이 일으킨 가슴의 느낌(가슴이 답답함, 몸이 무거움 등)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거친 느낌, 중간 느낌, 미세한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Anicca)'함을 계속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느낌이 고요해지면 가슴에 있는 맥박이나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④ 그러면 하기 싫은 마음이 사라지고 다시 배를 관찰하는 수행을 시작하면 됩니다.
하기 싫은 마음이 가져오는 결과는 수행을 그만두거나 아니면 무료하게 앉아있는 것입니다. 수행이 하기 싫을 때는 탐욕과 성냄이 지배하는 순간이고 무료하게 앉아있을 때는 어리석음이 지배하는 순간입니다. 무료하게 앉아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이 무기에 빠진 것입니다. 무기가 바로 나태함과 혼침이며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무료하게 앉아있을 때는 ‘지금 무료하게 앉아있네’하고 이 상태를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가슴으로 가거나 호흡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 중에 나타난 장애를 짜증을 내거나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방법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무런 걸림이 없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면 반드시 반작용이 생깁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고요한 마음이 생겨 통찰지혜가 일어납니다.
하기 싫은 마음 또한 수행의 일부입니다. 그 마음과 싸우지 말고, 그 마음이 일어나는 과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깜마님이 필사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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