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연기(paṭiccasamuppadā)
● 연기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12연기는 윤회가 발생하는 구조와 소멸하는 구조를 설명한 방법입니다.
윤회의 원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명(無名)과 갈애(愛)입니다.
무명은 과거의 원인이고, 갈애는 미래의 원인이 됩니다. 다시 말해 무명으로 인하여 태어났고, 태어난 후에 갈애를 일으킴으로써 미래에 다시 태어날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태어난 것은 전적으로 무명 때문입니다. 이 무명은 자신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이미 결정 되어졌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과 성향도 전적으로 과거의 원인인 무명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미래의 원인이 되는 갈애는 자신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갈애를 강화하여 집착함으로써 미래의 태어남의 원인을 제공할 수도 있고, 갈애를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태어나지 않는 원인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수행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연기를 모르면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여 혼란과 의심이 생깁니다.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죽습니다. 네 부류의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의 다섯 가지 족쇄(보는 즐거움, 듣는 즐거움, 냄새 맡는 즐거움, 맛보는 즐거움, 촉감의 즐거움)’을 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 특히 자아와 감각기관에 대한 집착이 가득 찬 사람입니다.
세 번째, 악업에 빠진 사람입니다.
네 번째, ‘원인으로 인해 결과가 생기고 원인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라는 연기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맞으려면,
첫 번째, 감각적 즐거움이나 자식들과 재산이 무상, 고, 무아임을 완전하게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 오온을 나의 것으로 보지 않고 무상, 고, 무아로 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 부지런히 위빳사나 수행을 지속하여 열반을 얻거나, 적어도 수다원(sugati)을 얻어야 합니다.
네 번째, 적어도 죽어가는 순간에 고통스러운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온전히 지켜보며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그 기회가 덧없이 흘러가 버리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연기는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12 연기의 각 요소는 이미 ‘조건 지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다음에 따라오는 요소를 ‘조건 짓는’ 역할도 합니다.
12 연기의 각 요소는 단계마다 앞선 원인에 의해 조건 지어지고, 동시에 그다음에 따라오는 결과의 선행하는 원인이 됩니다.
12 연기는 과거의 원인, 과거 행위의 결과로 나타난 현재, 미래의 원인이 되는 업을 생성시키는 현재, 결과로 따라오는 미래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즉, 윤회의 수레바퀴를 계속 굴러가게 하는 12가지 연결 고리들이 연기입니다.
그 연기의 고리에서 빠져나오려면, 접촉이 사라질 때 느낌도 사라진다(Phassa Nirodha – Vedana Nirodha)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12 연기에서 무명부터 수(느낌)까지는 보통 사람과 부처님, 아라한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아라한은 그다음 단계인 애(갈애) 단계로 넘어가지 않고 수(느낌) 단계에서 멈춥니다. 즉,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의 사띠 수행을 통해 도와 과를 이루고 연기를 완전히 안 사람은, 느낌이 강렬하게 일어날 때, 이 느낌이 접촉을 원인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은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지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이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느낌을 소멸을 위해 우리는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립니다. 또한 느낌은 바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에 사띠가 있으면, 느낌이 ‘나의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으면, 죽음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의 고통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일어날 때는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지속하여 주시하는 위빳사나의 알아차림을 하여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그 상태를 계속 주시하면 나중에 이러한 느낌이 사라지는 때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연기를 배운 수행자는 느낌의 일어남과 뒤이어 따라오는 갈애 사이에 연기의 탈출구가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바르게 주시하여 알아차리면 갈애는 일어날 수가 없고, 갈애가 없으면 집착 또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도 소멸한다’라는 연기의 법칙입니다.
이때 갈애는 일어나지 않지만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갈애의 소멸은 사띠로 그 느낌이 그 순간 소멸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의 시작을 뜻합니다.
느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 연속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새로운 느낌이 일어나는 것과 그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주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엔 오로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을 뿐입니다.
느낌을 알아차릴수록 느낌은 점점 더 희미해집니다. 왜냐하면 사띠가 새로운 느낌의 일어남에 점점 더 가까이 붙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라짐’의 흐름으로 바뀌면 이 상태에 대해 철저하게 넌더리가 나서 완전한 소멸에 이릅니다.
사띠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지속해서 주시하고 있으면 결국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는 느낌 자체를 몹시 싫어하고 혐오하는 단계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완전한 소멸로 이끕니다.
느낌이 소멸하면 그것과 함께 오온 또한 소멸합니다. 오온이 있었던 자리에 대신 열반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현상이 없는 단계 즉 열반이라는 결과가 옵니다.
이처럼 갈애의 소멸은 집착의 소멸을 낳고, 집착의 소멸은 업 생성의 소멸을 낳고, 업 생성 소멸은 생의 소멸을 낳고, 생의 소멸은 노사의 소멸을 낳고, 또한 모든 번뇌의 다발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원인이 소멸하면 결과도 소멸하는 연기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윤회의 고리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연기가 소멸했습니다.”
경전에서는 특별히 ‘연기의 방법은 12연기다’라는 식으로 정해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설명하였기에 12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는 예도 있고, 10가지가 있는 예도 있으며, 8이나 6밖에 없는 예도 있습니다.
이생에서 초점을 맞춰야 할 대상은 욕망의 소멸이며, 이는 집착을 막고 무명의 소멸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때때로 무명에서 시작되는 12연기를 설명하지 않고, 욕망에서 시작되는 몇몇 연기만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때그때에 따라 항목이 증감하고 있습니다.
연기란 원인과 결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상당히 자유롭고 다양한 방법으로 설법하셨습니다.
왜 다양하게 설했는가 하는 것은 결국 듣는 사람의 기질이나 성향 등이 다르기 때문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를 설명하실 때 사용하신 방정식이 있습니다.
Imasmiṃ sati, idaṃ hoti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a uppādā, idaṃ uppajjati. 이것이 생길 때 이것이 생긴다.
(이맛사 웁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다.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이것은 멸할 때, 이것이 멸한다.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인과·연기의 방정식입니다. 그 의미를 설명하겠습니다.
●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우선 제1행은 Imasmiṃ sati(이것이 있을 때), idaṃ hoti(이것이 있다).
수학적으로 하면 ‘A가 있을 때, B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idaṃ(이것)이지만 각각 별개인 것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숫자적으로 말하면 A와 B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있다’라고 해도 좋고, ‘A가 될 때 B가 된다’라는 식으로 ‘된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두 번째 행은 imassa uppādā입니다. 이 uppādā는 ‘생겨난다, 일어난다, 나타난다.’라는 의미이므로 ‘이것이 생겨날 때’가 됩니다. idaṃ uppajjati는 ‘이것이 나타난다. 생겨난다.’이므로 ‘A가 생겨날 때, B가 생겨난다.’입니다.
처음의 두 행으로 생겨남의 방법에 대한 방정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개의 문장이 겹치고 있지 않은가요?’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A가 있을 때, B가 있다.』라고만 말한다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가요? 『A가 생겨날 때, B가 생겨난다.』라고 왜 또 한 번 말하지 않으면 안될까요? 라고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중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A가 ‘있을 때’입니다. ‘A가 있을 때, B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항상 B를 A가 지지하고 있어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인 imassa uppādā는 A가 ‘생겨난다(生)’입니다. 그것 이전에는 A가 ‘없었다’입니다. ‘없었던 A라는 원인이 나타나면, B라는 것도 보이게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첫째 행인 ‘A가 있을 때, B가 있다.’라는 의미는 일반적인 조건, 이 세상을 보는 경우의 견해입니다. ‘분명하게 『이것이 있을 때, 그것도 있다.』 『이것이 성립하고 있을 때, 그것도 성립하고 있다.』’라고 언제나 지지하고 있는 원인·결과에 관한 내용입니다.(예를 들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태양과 지구의 인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력이라는 원인은 끊임없이 필요하다.)
그에 반해서 두 번째의 방정식은 새로운 현상이 나타날 때, 그 새롭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원인과 결과에 기반을 두어서 보는 경우입니다.(100년 전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를 비교해 보면, 대단히 변해있습니다. 옛날에 없었던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 있었던 것들은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원인·결과에 의한 변화입니다. ‘이것이 생겨났기 때문에(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것이(결과로써) 생겨난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항상 서로 지지해서 성립하고 있는 인과관계, 원인에 의해서 원인과 다른 결과가 생겨난다는 연속성을 나타내는 인과관계, 이 두 가지 역시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현상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여기에 있는 현상이 어떤 연유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 현상이 항상 변화하고, 점점 다른 현상이 되어가기 때문에 그 현상이 다른 현상으로 되는 변화 생멸의 구조도 설명해야 합니다. 그 양쪽을 설명하기 위해 겹친 듯이 보이지만 그 점을 세밀하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그리고 두 번째 세트인 3행과 4행은 첫 번째 세트의 반대를 언급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이야말로 겹치고 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겹치고 있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부정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방정식이기 때문에 ‘A가 있을 때, B가 있다. A가 생겨날 때, B가 생겨난다. A가 없을 때, B가 없다. A가 사라질 때, B도 사라진다.’ 이것의 올바름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A가 없을 때는 B도 없다.’라고 발견합니다. B라는 현상의 존재에 A라는 현상이 빠질 수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A가 있을 때 A가 없을 때라는 두 행으로 방정식을 만듭니다.
모든 사물을 관찰하신 부처님께서는 모든 현상은 무상이고. 사라져 가는 것이라고 발견하셨습니다. 사물이 변하고, 사라져 가는 것도 인과법칙에 의한 발견입니다. 그러므로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느냐는 설명만으로 인과법칙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없을 때, 이것도 없다. 이것이 멸할 때, 이것도 멸한다.’라는 방정식도 끼워 넣어서 인과법칙은 4행의 방정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가볍게 원인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회에는 다양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원인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찾았더라도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예도 있습니다. 예로서 ‘학력’이라는 주제를 생각해 봅시다. 아이의 학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결과입니다. 그 결과의 원인을 찾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하는 아이들에게는 놀 틈이 없고, 마음이 자유롭게 발달한 여유가 없다. 그러므로 공부하여도 머리가 좋아지지 않는다.’라는 결론입니다. 원인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놀 시간도 주고, 토요일을 쉬도록 합시다. 만약 그 원인이 올바르다면 토요일을 쉬는 아이들이 학력이 올라가야 합니다. 토요일을 휴일로 하여도 학력이 오르지 않을 때는 ‘여유가 없어서’라는 원인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로부터 다른 원인을 찾을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라는 애매함 속에서 원인을 찾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있을 때와 없을 때라는 두 가지의 상황을 조사한 후 인과법칙을 말씀하셨으므로 그 가르침에는 애매함은 없습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와 같은 상황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이다.’로 끝납니다. 일반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세상은 명확한 인과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苦)을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 12 연기 각론
⓵⓶ 무명(avijjā)에 의한 행(saṅkhārā)
여기서부터는 12 연기를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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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법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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