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출가 수행자의 삶의 방식(260531 담마와나선원 붓다의날 봉축법회_프린트물 법문)

담마마-마까 2026. 5. 31. 19:39

260531 담마와나선원 붓다의날 봉축법회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 프린트물

 

출가 수행자의 삶의 방식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꽃에 머물며 꿀만 따는 꿀벌처럼 다른 민폐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더럽히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가르쳤습니다.

 

벌들은 꿀을 채취하기 위해 여러 꽃을 돌아다닙니다. 벌이 꿀을 꽃에서 채취할 때는 함께 꽃가루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 수분해 주는 서로 끈끈한 관계가 있으므로 '가져가세요'라는 식으로 꽃도 벌에게 꿀을 내줍니다. 그들은 서로를 전혀 해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꿀벌과 꽃의 관계에 비유하여, 해탈을 향해 걷는 수행자가 갖추어야 할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출가자는 마을에서 탁발하며 생활해도 그곳에서 어떤 마음도 더럽히지 않고, '아, 탁발하러 가면 맛있는 것을 받을까'라는 욕심을 내지도 않습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 출가 계율

 

출가 수행자는 계율(vinaya)에 기초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출가 계율은 1) 수행 생활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것. 2) 출가자는 세속 사람들에게 불신을 갖게 하거나 폐를 끼치는 것은 삼가는 것이라는 두 가지 점에 주의하는 것입니다.

 

그게 계율의 두 기둥입니다. 자기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재가자를 실망하게 하거나 불신을 사게 하지 않도록 사회와의 관계에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자신을 경책하고 조심스럽게 살 것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출가한 사람들이 재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세속과의 관계로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다.

 

마을에 탁발하러 갈 때 출가자들의 마음가짐으로는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눈에 들어오거나, 귀에 소리로 듣거나, 냄새라든지, 마을의 소란스러운 분위기 등, 수행하고는 동떨어진 세상의 소란이라는 것이 오감을 통해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해 마음이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수행 중일 때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기 위해 열심히 자신을 단련하고 노력할 겁니다. 그리하여 수행 완성자, 이른바 성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모든 세속의 소란에 마음이 움직여 유혹당하는 일이 없습니다. 벌이 꽃에서 꿀만 따듯 세속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더러워지는 법이 없는 삶의 방식이 완성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출가자의 이상, 즉 수행의 완성까지 이 꿀벌의 비유처럼 자연스럽게 그저 꽃을 거치고, 꽃에 도움도 되고, 내 마음도 더러워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도 꿀(수행의 완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출가자의 삶의 방식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도와 과에 이르도록 노력하십시오.

 

보통의 수행자는 수행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에 들어가서도 마음을 더럽히지 않도록, 스스로 열심히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와 과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수행자가 수행을 끝내면, 꿀벌들이 꽃들을 돌아다니며 꽃들에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꿀을 따는 것처럼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아힝사(비폭력)의 가르침

 

일반적인 사람들은 열심히 비폭력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짜증이 나거나 '때려주고 싶다'라고 생각해도 꾹꾹 참고 비폭력을 실천하려고 하는데, 성자들은 그게 '평범한 삶의 방식'입니다. '비폭력을 실천하고 있다'라는 것은 그것이 완전히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어떻게 비폭력을 실천하는가!

몸(kāya)·말(vācā)·뜻(mano), 다시 말해 생각, 감정, 다양한 언어 표현, 그리고 신체로 다양한 행동을 하는 것을 통제함으로써 비폭력을 실천합니다.

 

현대에는 SNS를 통한 언어폭력이 큰 문제가 되고 있고, 여전히 물리적 폭력도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저항하지 않는 시민들의 머리 위로 폭탄을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그런 구체적인 말이나 물리적 폭력의 배경에는 다른 사람을, 다른 생명을 미워하고 공격하겠다는 위해(vihiṃsā 위힝사)의 사고, '쟤들은 죽여도 돼!'라든가 '공격해도 돼'라는 폭력 긍정의 사고,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도에 의한 폭력입니다.

 

그에 반하여 성자들, 혹은 성자가 되고자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자기제어(saṃvuta), 즉 자신의 마음과 말과 몸의 행위를 제어하여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수행 완성자의 경우는 애초에 마음에 위해가 일어나지 않고, 말로 다른 생명을 공격하지 않으며, 심지어 몸으로 다른 생명을 해치지도 않습니다.

 

더불어 불사에 이른 성자에게 근심 걱정이나 불안함이 없습니다.

자아의 착각에서 완전히 해방된 성자에게는 자기 자신을 어쩌자는 걱정은 전혀 없습니다. 걱정 없이 그냥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 성자가 있는 것의 행복.

 

완전한 마음의 편안함에 도달한 사람만이 아힝사(비폭력)를 온전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다른 생명을 일절 해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다른 생명의 행복을 위해 살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더불어 아힝사(비폭력)를 완성한 사람과 함께라면 우리는 완전히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으로부터 뭔가 이상한 일을 당하는 일도 없고, 오히려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해주어 안심할 수 있는 관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완전히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이 아무리 불신하고 있다고 해도 그 성자로부터 싫은 반응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결국, 성자라는 인격자가 있음으로써,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 그곳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마음의 평화에 도달해야만 다른 생명에게도 안심을 줄 수 있습니다. 출가자는 아힝사의 형태로 주변 생명에게 더할 나위 없는 편안함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출가자는 언제나 다른 생명들을 자비희사로 대하여야 합니다.

 

● 안과 밖의 오온에 집착하지 않는다.

 

성자에게 모든 현상은 오온의 흐름일 뿐입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은 흐름일 뿐이기에 집착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연의 흐름, 업의 흐름, 오온의 흐름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도 흐르고, 자기 밖의 세계(인식기관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외부의 세계)도 오온의 흐름일 뿐입니다. 그 두 가지의 다섯 가지 흐름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이라는 안쪽의 오온과 안이비설신의로 알려진 대상(색성향미촉법), 즉 바깥의 오온, 그것들에 대해 일반인의 경우는 집착이 되고 맙니다. 내외부의 다섯 개의 구름에 단단히 달라붙어, 그것들을 실체로 보고, 그것들에 매달리고, 그 집착으로부터 다양한 고통이 계속 발생합니다. 반면에 성자의 경우에는 오직 안쪽과 바깥쪽에서 오온이라는 흐름이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볼 뿐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일체 집착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무관심한 태도로 보는 것입니다.

 

● 선과 악을 분명히 알고 선으로 살아간다.

 

성자는 선과 악을 분명히 알고 있어 악을 끊고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선인지 악인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어 악은 말할 것도 없이 행하지 않으며, 애초에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선한 일이라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실천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방식이 된 존재가 바로 성자입니다.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고 깨달은 성자의 마음에서는 집착이 사라져 버립니다. 집착이 사라지면, 선행도 악행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저 행위 그 자체만 남게 됩니다.

 

● '내 것'이라는 관념에 굴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 집, 내 가족, 내 재산이라는 식으로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슬퍼합니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도 그것은 점점 변화해 가고, 자신에게서 떨어져 버리고, '내 것'이라고 쌓아 놓아도 전혀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탄식과 슬픔이 생길 뿐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죽음에 의해 잃어버립니다. 출가자는 현명하게 이 이치를 알고 내 것이라는 관념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나의 가족, 나의 재산, 나의 몸, 나의 아이디어 등 '나의, 나의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언제든 그곳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관념의 굴레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죽음'에 의해 사라지는 환상들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생각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것'이라는 관념에 얽매어 있는 사람은 '이건 아까워, 내 거니까 남에게 주고 싶지 않아'라고 집착합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근심과 슬픔에 시달립니다. 그러므로 성자들은 소유를 버리고 안온을 봅니다. 즉 소유물과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내 것'이라는 관념, 생각 자체를 아예 버리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는 관념을 버리고 사는 성자들은(munayo Munayo), 안온을 본다(khemadassino Kemadasino), 즉 열반이라는 궁극의 편안함에 이릅니다.

 

 

# "Tasmā munayo pariggahaṃ, hitvā acariṃsu khemadassino." (Snp.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