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dhamma)와 아비담마(abhidhamma)
붓다의 가르침은 가르치는 방법의 관점에 따라 2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 경전의 말씀 즉, 빨리어로 vohara-desana라 한다.
영어로는 practical teaching(실지<實地>의 가르침)이라고 번역하지만
붓다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실제로 설교하신 ‘가르침’인 것이다.
이것을 담마(dhamma, 法)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빨리어로 paramatta-desana(진실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진리만을 추출해서 가르치는 가르침이다.
이것이 아비담마(abhidhamma) 이다.
아비담마는 붓다의 보통 설법과는 달리 학문적 해석을 하려는 가르침이다.
말하자면 불교의 심리학이다.
담마라는 말에는 한역도 영역도 있지만 아비담마에는 영역은 없고,
한글역이나 한역으로도 그다지 잘 번역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강의에서도 아비담마라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담마(dhamma)의 3가지 의미
붓다의 가르침을 불교에서는 담마(dhamma)라 부르고 있다.
담마는 ‘가르침’, ‘진리’, ‘법(법칙)’이라고도 번역한다.
첫째, 붓다가 설하신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담마라 한다.
둘째, 붓다는 일반적으로 인사 정도는 하시지만 쓸데없는 말씀은 한마디도 하시지 않으시고 의미 있는 것 즉, 진리만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담마를 ‘진리’라고도 번역한다.
‘말하려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의미가 있는 것만을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침묵하고 있어라.’라고 경전에도 설해져 있다.
“붓다가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진리(진실)다”라는 것으로 담마라는 말에 ‘진리<진실>’라는 의미도 들어있다.
셋째, 담마를 '법'이라고 번역한다.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붓다가 계시든 안 계시든, 인간이 있든 없든 전혀 관계없이 우주의 존재 방식이다. 붓다가 만든 특별한 철학이나 설명도 아니다.
설명이란 무언가를 있다는 입장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말해도 어떤 곳에서 또는 어떤 경우에도 다 통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 개의 사물에만 해당되는 제한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과학(학문)은 전부 설명이다. 문법학의 입장, 물리학의 입장에서 각각 무언가를 설명한다. ‘마찰이 크다’를 문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실을 빌려줘’라는 말을 듣고 실이나 과자의 재질을 조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붓다의 진리는 그러한 하나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법칙 그 자체이다.
‘생명과 물질의 세계가 어떤 식으로 생․멸하고 변화해 가는가?’라는 그 구조 자체를 명확히 한 보편적인 진리이다.
이 세상 어떤 경우에도 항상 들어맞는 세상의 참된 모습이라는 의미로서 담마를 ‘법칙․법’이라고도 번역한다.
경전에 사용되는 인도의 고어인 빨리어로는 담마(dhamma)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이고, 진리이고, 보편적 법칙이므로 그때 그 때의 의미로서 이해해야 한다.
아비담마는 개개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분류한 교과서
붓다는 깨달음을 얻으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45년간 여러 장소에서, 여러 상대에게,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45년간 다양하게 설해 오신 가르침을 모두 정리해 보면 그 내용은 결국 어떤 것일까?
학문적으로 에센스만을 뽑아 내어 보면 간단하고 명확히 된다.
그 에센스를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 논리라는 의미로서 아비담마라 한다.
결국 아비담마는 붓다가 설하신 모든 가르침을 정리해 보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학문적 노력의 결과이다. 붓다의 제자들 중에는 학자타입의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유명한 사리뿟다존자는 발군의 지식 소유자로서 붓다로부터 그 지식의 뛰어남을 자주 칭찬 받았다.
붓다의 그러한 직계제자들이 붓다는 무엇을 가르치셨는가를 분석하고 분류해서 다양한 카테고리로 나누어 보았다.
그것이 아비담마이다.
사리뿟다존자가 설하신 경전도 남아있다.
그것은 붓다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신 내용을 명확히 분석하고, 여러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설법한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그 방법이 알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도 그와 같은 경우에는 ‘이것은 사리뿟다존자에게 물어 보라’라고 말씀하셨다.
자신보다도 사리뿟다존자에게 질문할 것을 권하셨다.
아비담마는 불설(佛說)인가?
아비담마는 붓다가 다양한 사람들에게 설하신 방대한 가르침을 항목으로 분류해서 정리한 것이므로 그 안에는 그것을 설하여 주신 상대의 이름도, 설하신 장소의 이름도, 배경이나 상황도 당연히 나오지 않는다. 설한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침의 요점(에센스) 뿐이다.
그렇다면 ‘아비담마는 붓다께서 설하신 가르침(담마)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은 특히 초기불교의 전통이 스리랑카 등에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상좌불교(上座佛敎. theravada)의 세계에서는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상좌불교에서는 ‘붓다의 말씀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그것이 제일의 권위다’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말은 붓다의 말씀에 맞으면 받아들인다.
주석서의 말씀도 붓다의 말씀에 맞으면 받아들인다. 맞지 않은 것은 버린다.
‘붓다의 말씀이야말로 가르침(진리)이다’라고 인정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 즉, 상좌불교에서는 누군가가 어떤 철학이나 과학을 만들어도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
붓다의 가르침에 딱 들어맞으면 그 철학이나 과학도 받아들이고 공부한다는 태도이다.
물론 후에 나온 철학이나 과학을 ‘훌륭하다’라든가, ‘이것이야말로 진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실인가 아닌가의 근거는 붓다의 가르침에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이 같은 사고방식이라면 아비담마는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정리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붓다 자신은 자신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아비담마는 붓다가 설하신 것(불설)은 아니라는 것이 된다.
붓다께서 깨달음으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45년 간 매일 여러 곳을 걸어다니면서 설법하셨고 돌아가시는 그 순간도 최후의 제자가 깨달을 수 있도록 지도하셨다.
붓다께서 살아 계실 때 최후로 깨달음을 얻은 스님으로서 수밧다라는 스님이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돌아가시는 바로 그 순간까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신다.
그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방식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책을 쓰시려고 한다던가, 앞으로 불교라는 종교를 만들려고 전혀 의도하시지 않으셨다.
그럴 틈이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깨달음의 길(道)을 가르치고 이끌어주려 하셨다.
붓다는 그런 성격이셨기 때문에 자신의 가르침을 정리한다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절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비담마는 목적달성과 무관한 것은 제외한다.
아비담마에는 결함이 있다. 완벽한 철학이나 심리학은 아니다.
아비담마의 목적은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그리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나아 가는가라는 그 이치를 나타내는 데 있다.
단지 ‘진실을 정말로 납득하면 어느 정도 마음이 깨끗해지는가?’라는 그것에 목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비담마는 해탈에 필요한 심리학, 해탈에 필요한 철학, 해탈에 필요한 논리로써 속세에 관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당연히 속세의 문제에 대해서는 해답도, 지침도 내지 않는다.
마음의 구조는 누구도 알고 있지 않다.
마음이 작용하는 시스템을 가르치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사업의 번성이나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한 심리학은 아니다.
그러한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저차원이어서 심리학이라 말 할 수 없는 정도다.
불교의 심리학은 보통의 지식인이 어떻게 해서 뛰어난 인간이 되는가, 어떻게 해서 존재라는 실감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공부한다.
존재라는 실감을 뛰어넘기 위해서 필요한, 대단히 어려운 마음의 과정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니까 어차피 인간의 지식으로는 적당하지 않는 심리학이다.
그것을 저자는 아비담마의 결함이라고 말한다.
‘심리학’이라 하면 널리 도움이 되어야 하고, ‘마음분석’이라면 보통인간의 마음분석도 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 제외되었다.
존재를 뛰어 넘기 위한, 구경의 심리학일 뿐이다.
물질의 분석에서도 신물질을 합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설명 따위가 있었으면 좋지만 전부 커트 되었다.
단순한 소립자론만으로 끝난다.
예로 아비담마는 마음으로부터 각가지 물질이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마음을 통제해서 여러 물질을 만들 수 있다면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물질을 만드니까 온통 좋은 것뿐이지만 그러한 탐욕(欲)의 세계는 제외되었다.
가르쳐 주지 않는다.
쓸데없는 인식(감정)을 증진하지 않고 단지 ‘마음에 의해서 물질이 생겨난다.
마음에 의해서 객관적인 세계가 생겨난다.
대개 이런 식으로 태어난다’라고 설명하고, 그곳에서 끝을 낸다.
우리들의 세속적 수준에서 듣고 싶은 무엇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해설에 필요한 것은 언급하고 있다.
아비담마는 수행자를 위해 필요한 논리(심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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