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제 1장 사띠(알아차림) 숙달법-붓다의 길따라 선원 교재

담마마-마까 2017. 4. 3. 12:41

     제 1장 사띠(알아차림) 숙달법

                                      -아짠 빤냐와로(진용) 스님 법문-

 

 

    

    차  례

제 1장 사띠(알아차림) 숙달법

1.모든 것은 사띠(알아차림)로부터 시작된다.

  : 착하지 않은 마음자리: 탐욕(라가), 성냄(도사), 무지(모하)

    선한 마음자리: 자애(우정), 지혜(빤냐)

2. 사띠 (알아차림)가 숙달된 사람과 서투른 사람의 차이

3. 사띠가 거듭 능숙해지는 수행법?

4. 위빳사나의 실천

 위빳사나라는 것은 잘 본다는 뜻.

 위(vi)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 잡은 물건을 짜임세 있게 상세하게 자른다는 뜻. 즉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

 빳사나-(passan?)라는 것은 보는 것. 잘 관찰 하는 것.

 위빳사나라고 하는 것은 명확히 구별하여 상세하게 관찰하는 것이라는 의미.

위빳사나 수행의 단계적 방법:

   제 1단계는 현상의 구별, 식별

   제 2단계는 제반현상의 관계를 안다.

   제 3단계는 자신의 문제를 발견한다.

   제 4단계는 문제의 해결법을 실천한다.

   마지막 단계는 마음이 자유가 되었다는 실감을 얻는다.
   위빳사나 명상법은 戒. 定. 慧라고 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 집중 위빳사나 수행

 걷는 명상(경행) 수행법

 서서 하는 명상(입선) 수행법

 앉아서 하는 명상(좌선) 수행법

 명칭 하나로 향상의 정도가 결정된다.

 망상이 생길 때의 능숙한 처리법

 누워 하는 명상(와선) 수행법

* 일상생활 속에서의 위빳사나 수행법

 집중력이 단번에 증가하는 식사 시의 수행법

 스트레스의 사회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일상생활 속에서의 위빳사나 수행법

 일상의 경행, 그 중요한 점

 기상시와 취침시 위빳사나 수행하는 법

 싫은 것을 순식간에 없애는 수행 응용법

 

 

  ---망상의 세계로부터 탈피하기---

 

1. 모든 것은 사띠(알아차림)로부터 시작된다.

 

꽤 오래된 일입니다만 태국 수행처에서 명상을 하고 있다가 머리 속에 이런저런 생각들로 가득 차 위빳사나 명상을 도저히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필사적으로 떨쳐버리고 또 떨쳐버리려 해도 떠올랐습니다. 이른바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넘쳐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버려야 되는 것인지 매우 낙담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는 했습니다.

나는 의기소침해지면 곧잘 도량 밖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하루는 도량 밖으로 나가보니 가끔 얘기를 나누는 은사스님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멀리 보였습니다. 바로 그 때 매우 엷은 파란색의 투명한 빛이 몸 전체에 보였습니다. 가까이서 얘기를 하면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멀리 서 보니 엷은 파란 색의 빛이 보였습니다. 그 빛을 보고 나도 노력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사스님이 청정한 마음을 만들어 너도 힘을 내라고 격려해주고 있는 것이다, 의기소침해 있을 때가 아니다 라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힘을 냈습니다. 그래서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슨 신비한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육체보다도 마음, 내면적인 힘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체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체라는 것은 이 지구상의 물질의 아주 적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물질에 밥을 먹여 크게 키운 것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시기가 오면 육체는 점점 쇠약해져서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것을 막을 수 있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로불사한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 500년을 살았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500년은 그만 두고 200년 살았다는 얘기도 없습니다. 신체에는 법칙이 있어서 이 법칙에 따라 생활하면 수명은 상당히 연장됩니다만 그래 보았자 130년, 150년 정도입니다.

보통 우리들은 신체를 혹사시키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130세까지 사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 육체라는 것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육체를 보양하는 데 대단히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나이를 먹든, 병에 걸리든, 망령이 들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든, 죽고 마는 존재인 것입니다.

 

신체의 건강보다 마음의 건강을 생각하십시오.

신체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쓸 데 없는 짓입니다. 몸의 노예가 되어 이것저것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無明, 無知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신이라고 하는 부분이 다른 생명체와는 다릅니다. 모처럼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그 정신을 성장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에 키운 것은 도둑맞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괴로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정신적 기능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도둑맞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에 키운 것은 결코 도둑맞지 않습니다. 손과 발과 목숨은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덕과 성격과 정신적인 것은 누구도 훔쳐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윤회하여 다시 태어나든 아니든 그런 것에 관계없이 정신을 키우는 것이 올바른 삶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정신, 완전한 마음, 청정한 마음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신체만을 부양하는 삶이란 너무나 수준이 낮은 비참한 삶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마음의 기능은 우리들의 신체로부터 매우 넓게 퍼져갑니다. 어떤 사람이 화를 내고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은 곧 눈치를 채게 됩니다. 눈치를 챌 뿐만이 아니라 옆 사람의 분노의 영향이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몇 달 씩 목욕을 하지 않은 매우 불결한 사람이 옆에 있어도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지면 별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매우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의 영향은 조금 떨어지는 정도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방 안에 있는 누군가가 화를 내거나 하면 그 방 안에 있는 전원에게 그 영향이 미치게 됩니다. 그 방을 나와서 전혀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 한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도망쳐도 여전히 영향이 남는 수도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외국으로까지 도망을 쳐도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경우도 간간이 있습니다. 늘 그 성냄의 영향으로 인하여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그토록 강렬한 것입니다.

 

그 영향으로부터 노여 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그 강렬한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겨우 이전의 영향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런 것은 누구라도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듯 마음의 에너지라는 것은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싫다’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그것은 상대에게 전해집니다.

 

하나 더 하고 싶은 얘기는 마음의 에너지는 거대하다는 것입니다.

육체로서의 인간의 신체는 아무리 커도 2미터정도 이지만, 정신적인 신체는 대단히 큽니다. 예를 들면 큰 방 가득히 내 마음의 에너지를 넓힐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매우 크게 자신의 마음의 에너지를 넓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여 있는 장소에는 많은 마음 에너지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서로 겹쳐져 있습니다. 신체는 겹쳐지는 일은 할 수 없지만 마음은 겹쳐지고 겹쳐지고 또 겹쳐져서 서로 관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겹쳐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은 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감출 수는 없습니다. 머리로 생각하면 알수 없지만 뇌세포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면 완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이 알려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싫다거나 죽어버려라 따위와 같은 나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보통 사람은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은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마음끼리는 서로 언제나 부딪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에너지를 내보내고 있으면 같은 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나쁜 에너지가 자신의 정신을 조금씩 조금씩 더럽혀갑니다. 그것은 이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 반대로 어떤 사람이 좋은 에너지를 내보내고 있으면 주위의 사람들도 영향을 받습니다. 마음의 파동은 반드시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은 영향을 받지 않아야지 하고 힘을 모아 봐도 자신을 지키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좋은 에너지 안에만 있으면 문제는 없지만 그렇게 될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당하기 십상입니다. 신체는 옷을 입거나 해서 보호할 수 있습니다만 마음에는 입힐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나쁜 마음의 영향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과 청정한 마음을 만드는 것, 이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나쁜 마음의 파동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게 될까요? 당신의 마음도 크고 상대의 마음도 크게 겹쳐져 있습니다. 만일 당신 마음의 파동이 약하면 당연히 상대 마음의 강한 파동에 침략당하고 맙니다. 약한 마음은 여러 가지 강한 마음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막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를 강한 파동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해지면 자신의 마음을 건강하게 넓혀 갑니다. 예를 들면 숲속에 무서운 곰이랑 뱀이 있다고 치면 우리들은 벌벌 떨면서 걷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서운 동물이 없는 숲에서는 느긋하게 산책을 즐깁니다. 강한 사람의 마음의 끌림에 침략당해서 오들오들 떨고 있으면 사람이 왜소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정신적인 힘을 강하게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면 될까요. 나쁜 마음의 힘을 강하게 해도 당연히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은 결국은 망할 뿐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속이거나 하면 결국 남도 자신도 매우 괴로워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청정한 마음을 강하게 해야만 합니다. 강한 마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마음을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띠를 게을리 하면 마음은 당신을 이렇게 괴롭힙니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파동에는 종류가 다양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자리라고 하는 마음속에 있는 기능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마음이 여러 가지 파동을 내보내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마음자리에 대해서 조금 설명 하겠습니다.

마음의 본질은 어느 경우나 똑 같습니다만 어떠한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이 세상에서 100% 순수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네랄 워터라고 하는 것도 반드시 무언가가 섞여있어서 성분에 따라 각각 미묘하게 맛이 다르며 민감한 사람이라면 맛을 구별해낼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한 가지 한 가지 섞여 있는 것이 다릅니다. 어떤 마음자리가 어느 정도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이 정해지게 됩니다.

같은 물이 커피가 되기도 하고 홍차가 되기도 하고 녹차가 되기도 하고 첨가물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것처럼 마음도 마음자리에 따라 변화합니다.

 

마음자리(심소)에는 좋은 기능을 하는 선한 마음자리와 나쁜 기능을 하는 선하지 못한 마음자리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본적 기능을 하는 마음자리의 세 종류가 있습니다. 선한 마음자리는 25, 악한 마음자리는 14,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마음자리는 13종류로 분류되며 각각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불교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적어도 이 마음자리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공부하여 어떤 식으로 조화를 이루는지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면 관계상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몇 개만 들어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선도 악도 아닌 마음자리는 13종류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언제나 작용하고 있는 마음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늘 13종류의 마음자리 전부가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대개 7종류이상이 항상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기본적 마음의 기능에 착한 기능의 선한 마음자리와 나쁜 기능의 악한 마음자리가 짜 맞추어져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생깁니다.

 

착하지 않은 마음자리 몇 가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탐욕(r?ga : 라-가)이라고 하는 마음자리는 욕심 부리는 기능을 합니다. 욕심 부리는 기능이라는 것은 밖에 있는 것을 자신의 마음으로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어 하는 에너지. 그 마음의 파동은 자기 쪽으로 무언가를 끌기 때문에 아무리 힘을 써도 마음은 넓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작아져 버립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어 여러 가지 생각을 짜내 그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하려고 함부로 언행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것으로 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멀어지고 맙니다. 강인하게 자신의 일방적인 감정으로 대하기 때문에 상대는 기분 나쁜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해 주어도 즐겁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흡수하려고 하는 자연스럽지 못한 힘을 느끼고 반발하여 저항합니다. 그 결과 싫증이 나서 달아나게 됩니다.

탐욕의 마음자리가 강한 사람은 대개 대단한 욕심쟁이에 치사하며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모두가 싫어해 점점 자신의 입지를 작게 합니다. 더더욱 외로운 사람이 되어 결국엔 그 사람이 살아 있는지 어떤지 조차 알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자신을 넓혀가는 것이 불가능하며 거꾸로 자신을 매우 작게 해버리고 마는 에너지 입니다.

 

 다음으로 성냄(dosa: 도-사)에너지. 이것은 상대를 넘어뜨려야지 망가뜨려야지 하는 기능입니다. 강하고 약함은 있지만 좌우지간 상대의 마음에 부닥치는 파동. 그리고 가시 같은 것으로 상대방을 찔러 갑니다. 이 에너지는 상대와 부딪치려고 하는 목적으로 넓혀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넓혀가는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넓혀 가면 당연히 상대도 부딪혀 오기 때문에 거기에서 멈춥니다.

예를 들면 냉전시대에는 서쪽과 동쪽이 서로 핵무기를 만들어 대항했었지만 서로 힘이 부딪혀 균형을 이루는 정도까지만 넓힐 수 있었습니다.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자신의 육체로부터 성냄의 파동을 내보내면 상대로부터도 성냄의 파동이 나와서 서로 부딪치게 됩니다. 만일 상대방이 강하면 자신의 파동은 작아져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크게는 넓혀지지 않습니다.

착하지 않은 마음자리, 좋지 않은 마음의 기능은 모두 14종류 있습니다. 착하지 않은 마음의 파동은 마음의 기능을 작게 합니다.

당신은 마음의 작용을 자신이 조절할 수 있습니까?

 

다음으로 선한 마음자리, 좋은 에너지의 예를 몇 가지 들겠습니다.

우선 처음으로 慈.이것은 慈悲喜捨의 첫번째 기능으로 자애, 우정입니다. 이 에너지는 공감적이기 때문에 점점 퍼져 갈 수 있습니다. 우정을 넓히기 위해서는 당연히 우정을 느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인류에게 우정을 느껴 우정을 만든다든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정이란 특정한 상대의 정신적 에너지에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넓혀가서 상대의 에너지와 합해지는 것입니다. 공존적인 기능이므로 상대도 자신의 힘이 배가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좌우지간 강해져서 활기차게 됩니다.

활기에 차서 자신의 우정의 에너지를 또 다른 사람에게 퍼지게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서로 활기차게 되어 또 퍼져 가는 식으로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퍼져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점점 뻗어서 모든 생명의 에너지와 연결됩니다.

부처님이 우정 에너지는 한없이 넓힐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도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길러야 할 에너지입니다. 이 에너지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삶 또한 없습니다. 수행은 마음속에 좋은 에너지를 강하게 기르는 것이 커다란 목적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애의 수행에서는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의 행복을 명상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만, 나는 큰 부자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원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이 행복해져서 그 덕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욕심이면 그것은 결코 퍼지지 않는 에너지입니다. 그 돈으로 부모를 보살피고 싶다든가 동료를 도와주고 싶다는 등의 기분이면 조금은 좋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큰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기분으로 수행을 하면 그것은 넓혀질 가능성이 없음은 물론이고 선하지 않은 에너지가 되어 마음을 작게 합니다. 선의 에너지는 자신의 마음을 크게 하여 힘도 세게 해 줍니다.

 

강함에는, 힘이 센 것과 스케일이 큰 것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비심을 넓혀 강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것은 자애 수행을 할 때에 자기와 정말로 친한 친구의 행복을 원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식이든가 친한 친구이든지 마음으로부터 상대의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사람을 고릅니다. 자식이 건강하길 바라는 원에는 강한 기분으로 순수하게 빌 수 있겠지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자식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길 기원하면 그 마음은 선하지 않게 되고 맙니다. 자식이 자신이 하는 말을 잘 듣도록 명상하면 그것은 이제 선하지 않은 에너지가 되어 낭패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자식이 한 사람의 사회인이 되어 건강한 자세로 노력하며 살아가도록 기원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마음의 좋은 파동이 퍼져나가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도 않고 자신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므로 명상의 말은 신경을 써서 골라 주십시오. 불교에서 기본적 문언은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도 좋습니다만 우리들은 아직 그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만드는 것은 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띠만이 마음을 올바르게 길러 갑니다.

다음으로 25종류 있는 선한 마음자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선한 마음자리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그것은 지혜(pann? : 빤냐-)라고 하는 마음자리입니다. 빤냐-라고 하는 것은 발음을 그대로 차용해서 쓴 반야심경의 반야입니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마음의 파동으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이 이 기능입니다. 이것을 넓히면 모든 것을 알 수가 있다고 하는 점에서 불교에서는 一切智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一切智를 갖고 계셨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안다고 하면 대단한 지혜인 것처럼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들어도, 그 구조를 곧 알 수 있는 힘.

위빳사나 수행은 이 지혜의 힘을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사띠의 수행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띠라는 것은 念 이라고 하는 한자를 쓰지만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말하면 ‘알아차림’입니다. 어떤 현상 어떤 마음의 작용도 알아차리는 것.

 

수행에서 알아차림이라고 하면, 선도 악도 아닌 기본적인 마음자리의 하나(manasik?ra: 마나시까-라, 주의, 作意)로 선과도 연결되고 악과도 연결되는, 연결되는 마음자리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애를 명상하면 거기에도 사띠가 들어갑니다. 자애를 어느 정도 크게 넓히는 가에 따라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의 힘도 넓혀집니다.

그런데 알아차린다고 하는 기능은 어떤 동물에도 반드시 다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다 갖고 있는 알아차림이라는 기능을 발판으로 해서 위빳사나 수행은 시작됩니다. 아무런 예비지식도 없는 사람에게 별안간 자비심, 우정이라는 공감의 감정으로부터 명상을 시작하시오라고 해봐도 무슨 일인지 판단도 되지 않으며 공감적인 우정을 지금까지 느낀 경험도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명상이 될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란 기능은 누구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 얘기를 알아차리고 있으므로 이렇게 책을 읽어 나가고 있으며 때로는 메모를 하거나 책에 밑줄을 긋거나 하고 있겠지요. 추울 때는 춥다고 알아차리고 더울 때는 덥다고 알아차린다, 그런 것은 누구나 일상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란 능력이 없으면 생명은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속에 사띠는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명상은, 그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기능을 점점 정밀하고 자세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넓혀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해 가면 이윽고 14개의 선하니 않은 마음자리, 25개의 선한 마음자리 전체의 마음의 기능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서 자신의 마음의 기능의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될수록 마음속의 선한 마음자리는 성장해 갑니다. 선한 마음자리가 성장하면 할수록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는 소멸해 갑니다. 그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가 모두 사라진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에 이르면 이제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는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에 이르면 저절로 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기능과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 의 기능은 전혀 서로 용인될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지혜가 있는 곳에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가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몸 안에 감기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항체가 만들어지면 감기 바이러스가 아무리 몸 안으로 들어와도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지혜가 생기면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는 마음속에서 이제는 생존 할 수 없습니다. 지혜란 매우 강력한 기능입니다.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 중의 하나인 성냄이란 기능도 상당히 강한 기능입니다만 지혜의 힘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합니다.

인간의 분노라고 하는 현상은 그 원인이 되는 불씨가 없으면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거기서 지혜가 있는 경우는 아무리 남에게 바보 취급을 당해도, 욕을 먹어도, 분노의 불씨가 마음속에 없기 때문에 태연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는 14종류로 나뉘어 있습니다만 그것이 한 번에 똑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에도 여러 가지 성질이 있어서 사라지기 쉬운 것과 매우 질겨서 사라지기 어려운 것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질겨서 잘 사라지지 않는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는 無明(moha: 모-하,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기능입니다. 이 기능은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입니다 . 모-하는 빤냐 즉 지혜의 정반대의 습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물의 상태를 보지 않는다는 기능입니다.

 

보통 우리들은 화를 낼 때 상대의 좋은 점은 전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부인은 남편의, 남편은 부인의 나쁜 점만 봅니다. 그리고 모두 상대가 나쁘다고 하며 욕을 늘어놓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어리석음의 기능입니다. 좋은 점을 보지 않으려고 하여 분노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남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때와 욕망을 채워보려는 탐하는 마음이 생긴 경우도, 저 사람은 귀엽다 훌륭하다 라고 하며 좋은 점만 보고 상대의 결점과 부정은 보지조차 않고 지나치려 합니다. 그렇듯이 정확히 보지 않는 것이 無明의 기능입니다.

그에 반해서 지혜는 사물 전체를 정확히 보는 기능입니다. 따라서 지혜와 無明의 기능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기능이 나오면 無明은 사라져 버려 깨달은 사람에게 번뇌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띠 이외에 마음을 고칠 방법은 없습니다.

  어려운 불교용어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그저 막연하게 하는 명상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이론이 있는 수행이라고 하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구체적이며 명확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들은 이 수행법으로 25종류의 선한 마음자리를 기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좋은 마음의 에너지를 기르는 길이라는 설명을 하고 싶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종교라고 말씀하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의 내용은 그야말로 명쾌하며 논리정연 합니다.

 

예를 들면 탐욕이라고 하는 마음자리를 없애기 위해서는 布施(不貪이라고도 합니다)라고 하는 마음자리를 키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선한 마음자리를 키우면 탐욕이라는 선하지 않은 마음자리는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보시는 준다는 뜻이지만 단순히 물건을 누군가에게 준다는 뜻은 아니고 마음에 그런 파동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자리이지요. 내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을 누군가 내게 주었다면 나는 편안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나와 그 사람과의 마음이 연결되어서 크게 되어 갑니다. 그것은 보시라고 하는, 무엇인가를 베푼다고 하는 마음의 파동이 넓혀진 것이 됩니다.

 

그런 에너지를 어떻게 만들면 될까요? 역시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베푸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모두와 나눈다는 생각,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보시입니다. 자신의 것을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인색함은 마음을 작게 하는 나쁜 에너지입니다. 모두 같이 사용하자 하는 기분으로 행동하면 자꾸 보시의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와 같이 선한 마음자리를 실천할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청정한 마음의 파동을 넓혀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값 비싼 식사를 하고 열심히 육체를 걱정해도 육체는 그다지 성장되는 것도 아니고, 영양가 있는 것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그다지 키가 크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미용식을 먹는다고 해서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미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날 때의 외모는 그다지 변하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는 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보다도 마음을 성장시키는 쪽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남에게 무시당하며 사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다시 없이 쓸쓸한 노릇입니다. 그러나 활기차고 깨끗한 파동을 내보내며 살아가면 자신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남에게 호감을 사게 되어 사람과 연결되어 끝없이 넓혀 갈수 있습니다. 내가 청정한 에너지를 내보내고 있으면 상대의 마음도 자연히 청정한 파동으로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

 

 

2. 사띠 (알아차림)가 숙달된 사람과 서투른 사람의 차이

 

물질에 의존하는 사람은 이런 실패를 한다.

보통 일반적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다양한 업적을 세우거나 재산을 모으거나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야말로 열심히 재산을 모으거나 업적을 쌓거나 하며 살고 있습니다.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집이거나 자동차이거나 또는 아이들 같은 자손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어느 것이든 재산이 풍부한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업적이란 일반적으론 일이며 학업적인 성취 등도 포함합니다만 그것은 바꿔 말하면 인간의 사회적 지위를 의미합니다. 좌우지간 인간은 이 두 가지에 관해 그 향상과 발전을 목적으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물질을 모아도 무엇하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빨리어 중에 앗따 히 앗따노-낫티(attā hi attano nātthi)라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자신에게는 자신조차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없는데 더군다나 자신을 도와줄만한, 의지가 될만한 것 따위는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물질은 그만두고 사람이 의지할만한 초월적인 존재도 없습니다.

나에게는 나조차도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의지할 것을 밖에서 찾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그런 진리를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나 자신 속에서 의지할 것을 찾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 이외에 정말로 의지가 되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과 업적, 보석 등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많은 것들은 결국 아무런 의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여간해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급할 때는 돈이 의지가 된다, 친척이 의지가 된다, 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백화점 붕괴사건이나 아파트 붕괴사건을 보십시오. 그렇게 큰 건물이 겨우 수 분만에 붕괴되어 많은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이런 견고한 대지조차도 의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건물을 세워도 그것이 붕괴되는 데는 20초면 충분합니다. 그 건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대체 몇 년이나 걸렸을까요. 오랜 세월 걸려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한 순간에 전부 붕괴된 것입니다. 그런 현실이 눈앞에 있어도 여전히 우리들은 물질이 중요하다 물질이 의지가 된다. 물질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엄청난 지진은 분명히 신의 분노에 틀림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힘을 지닌 신이 존재한다면 또한 일순간에 건물을 만드는 일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육체도 전혀 의지처가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운동을 하고 음식에 신경을 쓰며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있어도 언제 죽어버리는지는 자신도 모릅니다.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세포가 자신에게 반역해 오는 일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DNA 속에는 암이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의 오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세포속에 그런 결함이 있다면 더 이상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신체조차 의지처가 되지 못하므로 사람은 일생을 무엇인가에 의지하려고 하는 발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에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실망의 반복만 될 뿐 마지막에는 좌절감을 맛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무엇에 의지하거나 하지 말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 강한 마음을 만드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의 마음은 대단히 약합니다. 언제나 매우 불안합니다. 사람들은 그 불안으로부터 어떻게든 빠져 나오고 싶어서 물질에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이것저것 물질을 모읍니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을 모아도 결국 내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진실로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질 뿐만이 아니라 사람은 사는 것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대부분 정말로 내 마음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 한 사람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틈엔가 누군가가 정해놓은 삶의 방식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자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때에 정해진 대로 먹을 뿐입니다. 그것을 자유다, 행복하다 라고 말합니다만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자유입니까. 정말로 자유라면 먹는 것 정도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먹어도 좋으련만, 먹는 시간도 먹는 식도 모두 정해진 방식에 따르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은 불안합니다. 정해진 방법으로 먹지 않으면 혼나거나,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며 벌벌 떨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파트가 있고 이것은 내방이다, 내영역이니까 내 마음대로다 라고 말해도 조금 큰소리로 음악이라도 들으면 곧 이웃사람이 불평을 해옵니다.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합니다. 내 것이다, 내 자유다 라는 것이 결국 그 정도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생각과 지식은 내 것이므로 내 맘대로 이겠지 하고 반론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까요? 무엇이든 다 맘대로 생각하고 발언하면 또한 누군가에게 비판 받거나 공격 당하거나 합니다. 발언 내용에 따라서는 사회로부터 추방당해 어디론가 도망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한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내 것이라고 생각해도 그 지식은 매일 감소합니다. 매일 매일 지식을 쌓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다시 없이 위대한 지식인이 되었음에 틀림없는데 전혀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한다고 해도 대동소이하며, 크게 변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 하면 이것 저것 공부하여 머리 속에 쌓아두어도 그와 동시에 지식은 자꾸자꾸 감소돼 갑니다. 그러므로 만일 공부하기를 그만 둔다면 자꾸만 지식이 없어져버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머리는 지식이 점점 빠져 나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은 나 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어 내가 여기에 있다. 이런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라고 하며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열심히 분발해도 여러 가지 고생만 할 뿐 결국 무엇 하나 되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이것은 대단히 잔혹한 사실이며 우리들에게 있어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닙니다. 기분이 좋아질 재미있는 얘기는 대개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머리를 씻고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보십시오,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의지할 수 없는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이 가령 의지가 되었다고 쳐도 그것은 순간적입니다. 물을 마실 때 종이컵이 편리하다고 해서 종이컵을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런 편리한 것들을 모두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면 쓰레기더미 속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또한 전철로 여기저기 갈 수 있으므로 전철이 의지가 된다고 해도 전철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며 어딘가 갈 때에 잠시 쓸모 있는 것으로 끝입니다.

모든 물질은 그것만의 가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의지하는 것을 그만두고 물질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나 더,

우리들은 풍족하게 되면 될수록 고민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값비싼 것이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행복한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그러면 방이 20개나 되는 크나 큰 저택에 산다고 쳐봅시다. 훌륭하다, 멋지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는 큰 일입니다. 청소랑, 전기료랑, 정원 손질이랑, 집 관리, 등 더할 나위 없는 수고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집안에 고가의 장식품이 있으면 또한 청소에 더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100원이나 200원짜리가 부셔지면 대수롭지 않지만 수십만원 하는 것을 부수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스트레스가 됩니다. 만일 몇 억원 하는 예술품을 깨뜨렸다면 이제는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깨트리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풍족하게 되면 될수록 그 풍족함의 크기에 비례해서 고통도 큰 것입니다. 게다가 부자유스럽게 됩니다. 잠시 여행을 할 때도 경비회사에 집 관리를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에 도둑이 들었다고 하면 그때는 여행 운운할 때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불안과 고통의 씨앗입니다.

그런 비참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인간은 값 비싼 것을 갖고 싶다, 모으고 싶다며 원합니다. 이는 쥐와 흡사합니다. 쥐는 언제나 입 속에 무언가를 씹고 있습니다. 특별히 아무것도 씹고 있지 않을 때도 입을 조물조물 움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들 인간도 그다지 대단한 생물이 아닙니다. 쥐와 같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대해서 좀 생각을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꼭 호사스러운 생활은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이 좋다든가 하는 따위의 얘기는 더욱 아닙니다. 풍족함에 의한 행복은 고통과 형제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인지 이것들을 전제로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주십시오 하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이외의 곳에 있다는 것에 주목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우롱당하고 있을 뿐인 자신.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게 되어 마음이 강하게 되면 모든 문제의 해결방법이 발견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주의를 기울여서 보면 우리들 마음이 매우 더럽혀져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물건이 더러워지면 쓸모없게 됩니다. 옷도 더러워지면 입을 수 없고 쇠도 녹 쓸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든 더러워지면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도 때가 묻으면 깨끗이 해야 합니다.

 

  이 세계에는 물질적 에너지와 정신적 에너지가 있습니다. 물질은 시공간에 제약되어 있지만 정신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마음도 물질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는 물질을 통해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본래 마음은 시공간과 관계가 없는 에너지입니다. 마음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마음도 신체에 의해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의해 우리들 신체는 완전히 지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우선 마음을 다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라는 말을 들으면 의문스럽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좀 관찰해봅시다. 신체를 움직일 때 팔을 굽히든지 걷든지 우선 마음에서 팔을 굽히고 싶다, 걷고 싶다고 생각하여 거기서부터 신체가 움직이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마음의 명령으로 몸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음에 역행하는 동작을 신체에 시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일어서는 단순한 동작조차도 자신의 마음이 일어서고 싶다고 생각하면 아무 일 없이 일어서지만 누군가가 무리하게 일으켜 세우려고 하면 전혀 일어서지지 않습니다. 실신상태의 사람을 일으켜 세우려면 기둥에 둘둘 묶어 두지 않으면 넘어져 버립니다.

 

마음이 얼마나 이 신체라고 하는 물질을 지배하고 있나 하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우리들이 하는 어떤 동작도 마음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촛불에 손을 대면 뜨겁다고 생각하며 곧 뺍니다. 그 때도 먼저 마음이 움직여서 그것에 의해 손을 확 빼는 것입니다 .

기분도 마음에게 지배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즐거워지면 신체도 즐거워져서 가벼워집니다. 경쾌하게 되어 춤을 추기도 합니다. 마음이 슬퍼지면 신체도 무거워집니다. 신체는 슬프지 않은 데도 무거워져서 움직임이 둔해 지게 됩니다.

 

신체를 가다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청결히 한다고 해도 너무 씻어서 완벽하게 청결하게 해버리면 병에 걸립니다. 운동을 너무 많이 하거나 식사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 역시 병에 걸립니다. 또 아무리 버텨도 신체는 반드시 노화됩니다. 우리들은 육체의 노화를 막을 수 없습니다. 신체를 컨트롤해서 상태를 좋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상태를 고치기 위해서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첩경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신체를 먼저 기분 좋게 하고나서 마음을 즐겁게 하려고 합니다.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등등 갖가지 일을 해서 마음을 즐겁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처럼 춤을 추러가도 무리를 하면 녹초가 되어 기진맥진해 집니다. 맛있는 식사라도 과식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잠시 즐거워져도 마음은 곧 원래 상태로 돌아가 버려 오히려 피곤하거나 고통스러워져 버리는 일이 곧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면적인 일로 마음을 청결히 하기에는 오래갈 수도 없고 그렇게 잘 되지도 않습니다. 마음을 다스려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마음이 경쾌하고 즐거워지면 신체는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을 청정히 하십시오, 마음을 세탁 하십시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세탁인 것이죠. 그러나 마음은 물체가 아니므로 세탁기에 넣어 빨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마음을 세탁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은 어떻게 해서 더럽혀 지는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도대체 마음은 왜 더럽혀 지는 것일까요. 실은 마음은 마음 자체의 기능에 의해 더럽혀 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더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눈으로 무언가를 보았을 때, 귀로 무언가를 들었을 때, 코로 무언가 냄새를 맡았을 때, 혀로 식사를 맛보고 있을 때, 신체가 무언가에 접촉했을 때,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 더럽혀 지는 것입니다. 즉 眼耳鼻舌身意라고 하는 여섯 개의 감각을 매개로 하여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언제나 목이 말라 물을 얻고자 하는 그대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마음에 안전고리라고도 할 수 있는 밸브를 잠가 놓읍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안전 밸브를 잠그는 방법이 위빠사나 명상법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사띠(알아차림)를 작동시키는 것,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그것 자체는 좋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보는 것에 의해 마음이 더럽혀지는 경우가 생길 때입니다.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간단한 밸브를 잠가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띠입니다.

 

사띠는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합니다.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은 眼耳鼻舌身意라고 하는 여섯 개의 채널로부터의 정보에 의해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밸브를 잠가두는 방법입니다. 마음을 더럽힐 만한 정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의 중요성을 잘 모르겠지만 알아차리기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무언가를 보고 있을 때에도 명확히 주목해서 보고 있으면 마음은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듣고 있을 때와 맛을 보고 있을 때, 만지고 있을 때, 생각하고 있을 때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확실히 알아차리면 마음은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그 만큼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을까 하는 방법을 위빳사나 명상법에서는 철저히 가르칩니다.

확실히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 보통 사람들은 밸브를 잠그지 않고 무엇이든 무방비로 보거나 듣거나 하며 마음을 자꾸 더럽히고, 마음을 혼란시켜 문제와 고민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보아야 되는지, 무엇을 들어야 되는지, 무엇을 먹어야 되는지, 정말이지 모릅니다. 모르는 대로 이것저것을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 무엇을 보아도 마음에 차지 않아 더욱 더 보고 싶어집니다. 무엇을 들어도 성에 차지 않아 더욱 더 듣고 싶어집니다. 먹는 것도 만지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목이 마른 상태입니다. 목이 마르면 매우 괴롭겠지요. 그래서 무언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이것저것 찾아 헤맵니다. 무엇을 찾아 헤매는가 하면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혀로 맛볼 수 있는 것, 육체로 느낄 수 있는 것,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등을 찾아 헤맵니다. 나는 그렇지 않아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결국 그런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음악을 듣고 싶다고 하며 콘서트에 갑니다. 그것은 소리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눈으로도 연주하는 사람을 보고 싶고, 더욱이 춤추는 모습도 보고 싶어 하고, 이것저것 감각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토록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느끼고 싶어 하는가 하면 마음이 메마르기 때문입니다. 메마른 마음을 해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열심히 찾아 헤매어 보아도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것을 계속 찾아 헤매게 되고 그럴 때마다 만족감은 없습니다. 정말로 만족할 수 있다면 더 보고 싶어 하거나 듣고 싶어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거나 할 필요는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물 두 세잔만 마시면 충분히 만족하여 더 이상 마실 필요가 없어집니다. 목마름이 해소된 후에는 또 다른 음료수를 찾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위 속에 물과 주스를 가득 넣어두고 출렁거리며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을 마셔 목마름이 풀리면 일단 그 때는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냄새 맡는 것, 혀로 맛보는 것, 몸으로 느끼는 것, 생각하거나 하는 대상, 그것들을 추구하며 죽을 때까지 찾아 헤매 입니다. 죽을 때도 아직 죽고 싶지 않다, 아직 더 살고 싶다 하며 만족감을 얻지 못합니다. 아직 목마른 상태가 해소 되지 않은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일일까요?

 

목마른 상태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그것은 진실로 추구하고 있는 것을 아직 손에 넣지 못했다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목은 마른 데 정말로 만족할 만한 물을 마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족할 만한 물을 일생 찾아 헤매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일 때는 무엇을 먹어도, 약을 먹어도, 춤을 추어도, 다른 사람과 상담을 해도, 오히려 괴로워 질 뿐 편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을 한 잔 마시면 훨씬 편해집니다.

 

그러므로 태어났을 때부터 늘 해오고 있는 삶의 방식, 눈에 보이는것, 귀에 들리는것, 몸으로 느끼는것, 등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 생각을 바꿔주십시오.

 

긁어모으는 지식은 쓸 데 없다.

여러분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습니다만 실은 읽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진실로 읽는다고 하는 것은 책의 활자와 일체가 되어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읽는 일에 집중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눈으로는 활자를 쫓아가며 머리 속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니 집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활자를 쫓아가면서 문득 문득 무언가 다른 일을 생각하거나 하고 있겠지요. 다른 일을 생각한 순간에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책의 내용은 마음 속으로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졸리거나 피로해집니다. 모처럼 무언가를 얻고자 하여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읽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만족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갈증 상태는 해소되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글은 그렇게 몇 번 씩 읽지 않아도 됩니다. 진리는 하나이므로 정말로 이해했다면 한번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진실로 읽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몇 번을 읽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진실로는 읽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있지 않습니다. 미술관에 간다고 쳐도 일부러 그림을 보는 것이니까 그림만을 보면 되는 데, 이것은 몇 년에 그려졌다든지 이 그림의 제목은, 작자는, 운운하면서 그림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팜플렛을 보며 그림과 대조를 해보고 이것은 이것이다 이것은 이것이다 하고 그저 확인하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림을 꼼꼼히 보고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제목이나 연대 등 부수적인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런 사람은 다음에 또 유명한 전람회가 열리면 마치 의무감에 쫓기듯이 그 미술관에 갑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림을 보느냐 하면 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띠를 하고 있지 않은, 밸브를 잠그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어도 신체에 밸브를 잠그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볼 때는 보는 것에만 집중하여 대상과 일체가 되면 됩니다만 소리가 들리거나 어딘가가 가렵거나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하여 마음은 여기 저기 옮겨 다닙니다. 감각이 컨트롤 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다양한 정보가 들어와서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마음은 대단히 혼란 상태에 빠집니다. 마음이 혼란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은 더러워져 갈 뿐 무엇 하나 할 수 없습니다.

 

물은 조용히 흐르고 있으면 매우 쓸모가 있지만 홍수나 탁류와 같이 폭력적인 물은 쓸모 있기는커녕 재해의 씨앗입니다. 불도 적당히 컨트롤 되는 불은 훌륭한 역할을 하지만 컨트롤 되지 않는 불은 큰 불이 되어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전기, 가스 등 에너지라고 불리는 것들도 모두 같은 현상인 것을 경험상 다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도 제대로 컨트롤 되어 있지 않으면 고통 고난의 씨앗이 됩니다. 그것을 일반인들은 마음에 정보가 들어올 수 있는 만큼 들어오면 좋지 않느냐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보거나 듣거나 해서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얻었다고 기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그 사람에게 도대체 그 정보의 진짜 의미, 마음을 다스리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 지를 물어보면 잘 모릅니다. 이 글을 그런 식으로 하여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 지금까지의 내용을 질문해도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차분히 진정하여 마음을 컨트롤해서 확실히 정보를 정리해 주십시오. 이것은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 이것은 육체를 통해서 들어 온 정보, 하고 명확히 알고 있으십시오.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확실히 통일되고 정화되어 힘이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게 되어 갑니다.

 

사띠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집중력도 점차 퇴보한다.

지금 이 글을 암기 하십시오 라고 내가 말해도 여러분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밸브를 잠가 사띠를 작동시켜보면 흥미롭게도 모두 그대로 머리 속에 암기됩니다. 3,40쪽 정도는 완전히 외울 수 있습니다.

학생시절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노트를 안가지고 가서 필기를 하지 못하고 좌우지간 열심히 강의만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열심히 들으면 별로 수고하지 않고도 깨끗이 머리 속에 남습니다. 주의 깊게 듣고 그 자리에서 암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을 쓰면 공부도 대단히 재미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강의를 듣는 것에 집중을 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철저하게 안전대책으로 감각에 밸브를 잠급니다. 밸브를 잠근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도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무리하게 말을 걸려고 하여 나를 쿡쿡 찌른다면 나는 그 사람이 귀찮게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밸브를 잠근 때의 나에게는 그 사람의 존재 따위는 아예 의식에 없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듣고 있다, 오직 그것 뿐입니다. 그런 때에는 세상이 새하얗게 되어 강의하는 소리 이외의 소리는 전연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들으면 강의의 내용은 그대로 완벽한 모양으로 암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밸브를 잠가 사띠의 상태가 된 결과일 때의 알기 쉬운 한 예를 든 것 뿐입니다.

 

  좌우지간 정말로 잘 들으면 완전히 암기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잘 보면 완전히 암기할 수 있습니다. 맛도 정말로 잘 맛보면 곧 세밀하게 암기됩니다. 프랑스 요리의 장인이 되는 데는 10년간 갈고 닦지 않으면 안 된다고들 합니다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1개월 정도 본격적으로 집중해서 공부하면 일류 요리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거기까지 착실하고 진지하게 공부하는 사람이 없을 뿐 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오랜 기간 걸립니다만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은 입수하는 정보를 확실히 제어할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머리 속에 그저 정보가 제멋대로 들어오도록 방치하고 있을 뿐 입니다. 즉 누구도 확실히 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단지 바보처럼 이곳에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우리들의 상태를 재미있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죽어 있습니다. 사띠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만이 살아 죽지 않습니다.”

 

좋다 싫다 판단하지 말고 알아차림 하라.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偈文 속에는 압빠마-다(APPAM?DA)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빨리어의 단어가 있습니다. 보통 不放逸(불방일)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정확히는 확실히 사물을 알고 있는 상태, 사띠가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유언을 빨리어에서 직역하면 사띠를 가지고 노력하라. 자신을 알아차리는 일에 일생 정진하여 목적한 바를 이루어라 라고 하는 뜻이 됩니다. 우리말로 방일되지 않게 하며 게을리하지 말고 정진하라고 번역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뉴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여러분도 이 압빠마-다 = 사띠가 있는 상태라는 말을 기억해 두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사띠의 실천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빨리 경전을 살펴보면 어느 것을 보아도 사띠의 실천 방법이 씌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이 사띠의 실천, 알아차림의 실천이라고 하는 것이 그다지 잘 전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좌우지간 우리들은 보거나 듣거나 할때 전혀 제어하지 않고 마음이 그 정보에 휩쓸리는 대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살아 있지 않다, 즉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지금의 상태는 죽어 있는 것과 같으니 알아차려라, 스스로 살아 있어라, 스스로 확실히 컨트롤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위빳사나의 실천은 그것을 위한 방법입니다.

다만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제대로 정확히 확인한다. 귀를 통해 들어오는 소리도 명확히 확인한다. 신체에 접촉하는 것도 명확히 확인해 둔다. 그런 식으로 해야 비로소 사람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사회의 자극과 정보에 춤추면서 표류하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살아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보니까 보고, 모두가 들으니까 듣고, 모두가 맛있다고 하니까 맛있다고 하는 부화뇌동형의 인간이 많습니다.

 

태국 쌀이 맛이 없다고 소문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태국 쌀은 맛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먹어 보았느냐고 물어 보면, 먹어 본 적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남들의 얘기에 휩쓸려 있는 것뿐입니다.

사띠한다, 알아차린다고 하는 일은 예를 들면 무언가를 보고 나는 장미를 보고 있다, 모네의 그림을 보고 있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은 망상입니다.

그런 식이 아니라 다만, 보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듣고 있을 때에도 이것은 노래다, 고양이 소리다, 전철 소리다, 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리, 소리하고 확인합니다. 먹고 있을 때에도 비프 스테이크든 국수이든 혹은 맛있든 맛이 없든, 단지 맛을 보고 있다, 맛을 보고 있다라고 자신의 상태를 확인합니다. 쓴 맛이든 단 맛이든 그런 것은 어찌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맛을 보고 있다고 하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 가지 가치판단을 하지 말고 사실만을 알아차리도록 해가는 것입니다.

 

사띠가 없는 사람은 좋은 것에는 집착하고 나쁜 일은 잊어버리려 합니다. 그리고 좋은 일만을 기억하고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든지 인생은 즐겁다 라고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은 아닙니다.

생활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하루 24시간 매 분마다 즐거웠는지 괴로웠는지를 평가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하루 중 즐거운 것은 아주 적은 순간이고 거의 대부분은 괴로운 일뿐이라는 현실을 잘 알게 되겠지요.

 

통증이나 괴로움은 착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림 하라.

그럼에도 인간은 괴로운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잠시 친구와 만나 즐거웠던 일만을 끈질기게 기억하고 있으며, 아 오늘은 즐거웠다라고 믿어 버립니다. 한 달 동안 쭉 일 때문에 고생을 하며 잔업을 하거나 상사에게 야단을 맞거나 험한 꼴을 당했어도 봉급날이 되면 그 고생을 다 잊어버리고 맙니다.

 

정말로 정확하고 구체적이며 합리적인 인생을 알고 싶다면 하루만이라도 매 분마다 진실로 즐거웠는지 즐겁지 않았는지 살펴보십시오. 잘되면 즐겁다, 실패하면 싫다, 지금은 기분이 좋다, 지금은 짜증난다, 라고 명확히 관찰해 보면 틀림없이 싫은 일, 괴로운 일 쪽이 많습니다.

 

부처님은 즐거움이라는 것은 보일락 말락 아주 희미하게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라는 생물은 아주 작은 즐거움일지라도 그것이 희미하게나마 즐거웠다면 산과 같이 큰 괴로움은 잊어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즐겁다고 착각하고 있어도 마음은 오랫동안 괴로워하고 있으므로 역시 고민과 문제가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괴로워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사띠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띠를 실천하여 한 순간 한 순간 확실히 살아 있게 되면 괴로움이 하나하나 사라져 갑니다. 부처님께서 四念處經에서 말씀하신 대로 괴로움도 슬픔도 소멸되어 갑니다.

 

예를 들면 신체의 어딘가가 심하게 아플 때, 사람들은 매우 괴롭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오직 단순하게 순간의 통증만을 관찰하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것에 관해 여러 가지 망상을 하면 통증은 아주 크게 되어 버립니다. 정확히 있는 그대로 통증으로 보면 별 일이 아닌 것을 과장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사띠를 실천하면 할수록 정말로 행복하게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대단히 잘 되어 갑니다. 모든 것이 제대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확신이라고 할까 자신감이 여간 큰 것이 아닙니다. 사띠가 없는 사람들은 혼란 상태 속에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우왕좌왕 살고 있습니다. 사띠를 해서 확실히 살고 있는 사람은 침착하게 전체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빠릅니다.

 

  일하는 것이 느린 사람들은 자신은 느긋한 사람이라거나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며 자신을 미화하지만 사실은 그 일에 확실히 마음이 몰입해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 사람을 잘 관찰 하고 있으면 반드시 일하면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거나 정신이 흩어지고 산만해서 망상의 유희를 즐기고 있거나 하고 있습니다. 일이 건성인 상태입니다.

만일 사띠를 하고 있어 사물이 확실히 보인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잘 압니다. 실패해도 이것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명확히 압니다. 그래서 다음의 목적을 향하여 거듭 거듭 전진합니다.

 

사띠를 하면 당신의 마음은 이렇게 변한다.

마음이 혼란한 사람들이 토론을 한다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으면 상대의 얘기를 듣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멋대로 얘기 하고 싶은 것을 떠벌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토론은 그저 혼란에 휩싸일 뿐이고 결론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런 때에 사띠를 하면서 조용히 얘기를 들어 봐 주십시오. 전체 모습이 곧 잡힙니다. 이 사람은 제멋대로 감정적으로 지껄이고 있다, 이 사람은 제 멋대로 이렇게 지껄이고 있다, 이야기가 이렇게 해서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실로 재미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하면 좋은지 곧 답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위빳사나의 지혜가 있으면 사물이 명확하게 잘 보입니다.

 

  현대사회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모두들 스스로 어떻게 해야 좋은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증상인 사람은 이런 음식은 위에 좋다라고 영양사가 말하면 까닭도 없이 믿어버리고는 당장 가게에 가서 대량으로 사가지고 와서 쌓아 두고 매일 그 음식을 먹습니다. 이런 사람은 권위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 정보라는 단지 그것만으로 믿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유행과 정보에 휘말려서 저기 가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물건으로 눈을 옮겨 이쪽으로 와서 보기도 하며 여기 저기 어디를 가도 이것저것 속고 맙니다.

 

이러한 현대 사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위빳사나를 실천하는 길 이외에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 매우 침착하게 사물을 보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속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무아의 경지에서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삶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즐겁고 흥에 겨워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것이 진짜 행복입니다.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행복했다든가 맛있는 요리를 배불리 먹었다던가 하는 찰나적인 즐거움으로는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감각에 휘둘리지 말고 맛있는 식사다, 아름다운 음악이다, 저 사람은 미인이다 등등 조용하고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만으로 침착하게 알아차림 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평소 사띠를 하고 있지 않나요? 전혀 알아차림을 작동시키고 있지 않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듣고 있는 순간, 다시 말해 사띠를 작동시키고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의 일로 곧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다른 일이 걱정이 되거나 하게 됩니다. 순간적으로만 듣고 있어 다음 순간은 생각하는 상태가 되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끊어졌다 이어졌다 합니다. 듣고 있다고 해도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상태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듣고 있을 때에는 자신이 지금 여기에 앉아 있다고 하는 의식조차 없습니다. 대상과 일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수행이 진전되어 사띠를 확실히 할 수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단번에 대상과 일체가 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무언가를 듣고 있을 때, 듣고 있는 소리와 그 내용과 자신이 정확히 일체가 됩니다. 자신이 대상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로 듣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띠라고 하는 에너지는 훈련을 하면 자연히 나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나올 때까지 여러 가지 실천을 통하여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훈련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진짜 사띠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한자 연습과 마찬가지입니다. 한자를 모르는 아이들이 문자를 배워 연습하여 글씨를 쓸 수 있게 되면 마음대로 글자를 씁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연습하지 않아도 쓱쓱 글씨를 마음대로 씁니다. 그것과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것, 다음은 이것, 그것다음은 이것, 하는 식으로 확인하면서 천천히 글씨를 썼을 것입니다. 써놓은 글씨도지 저분해서 읽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연습을 한 덕택에 어른이 되면 능숙하게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띠가 거듭 능숙해지는 수행법

 

뇌파를 베타파로부터 알파파로 바꾼다.

위빳사나 명상법은 진실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방법, 사물을 새로운 각도로 보는 방법입니다.

우리들은 망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망상으로부터 떨어져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여 몸에 익힐까 하는 실천법이 위빳사나 수행법입니다. 위빳사나에도 다양한 실천법이 있습니다.

 

사실 위빳사나 수행방법은 각자 각자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이 좋지만 이런 글에서는 짜임새있게 상세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일반적인 방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위빳사나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이 위빳사나 수행법을 실천하는 전제조건이 되는 사마타라고 불리는 수행법에 관해서 좀 설명해 두겠습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수행이라고 하면 사마타 수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마타(samatha)는 진정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마타 수행법이란 정신적으로 진정하기 위한 수행법, 마음을 조용하게 가라앉게 만드는 수행법입니다.

 

사마타 명상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요가를 알고 있겠지요. 요가에는 체조 요가와 명상 요가의 두 종류가 있으며 양 쪽 다 사마타 명상입니다. 체조 요가도 여러 가지 체조를 해서 마음을 침착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여러 가지 사마타 명상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것은 염불입니다. 청량한 목소리를 가지고 명확히 정해진 방법으로 염불을 외우면 마음이 가라 앉아 매우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미타불이나 석가모니불 하면서 명호를 외우는 稱名(칭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칭명을 듣고 있으면 상쾌한 기분이 되어 감사하다고 느낍니다. 그런 명상은 모두 사마타 수행법에 포함됩니다.

종교에 관계없이 가령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음악을 듣거나 하는 수가 있습니다. 명상 음악이라고 하는 CD도 있습니다. 나도 시험 삼아 들어본 즉 내 경우는 마음이 가라앉기는커녕 다소 혼란되어 버렸지만 그 CD를 듣고 마음이 가라앉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일종의 사마타 명상입니다. 즉 마음이 가라 앉아 깊이 통일되기만 하면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염불이 가장 좋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요가가 자기에게 맞는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것보다는 춤이 좋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통일성, 침착함이 생기는 것이 중요하며 자신에게 맞는 방법이면 됩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뇌에 알파파라고 하는 뇌파가 나옵니다. 베타파가 나오고 있을 때는 이것저것 쓸 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파파가 나오고 있을 때는 마음이 느긋하게 진정되어 있지만 이 알파파를 내보내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만일에 의학적으로 연구되어 알파파가 많이 나오는 방법을 발견하면 그 방법도 사마타 수행법의 한 방법이 됩니다.

 

마음이 그저 가라앉기만 하면 안된다.

사람은 왜 마음이 가라앉기를 원하는가 하면, 마음이 침착한 상태에서는 여러 일들이 매끄럽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집중하여 공부하거나, 어려운 일을 하거나, 작곡을 하거나, 예술품을 만들거나, 이것들 모두는 우선 마음의 통일이 필요합니다. 운동선수에게도 집중력, 마음의 통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요. 마음이 가라 앉아 있지 않으면 자신의 진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가라앉은 마음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주제입니다.

가라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무엇인가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이 가라앉아 공부가 잘 된다든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 잘 풀렸다던가, 하는 무언가 좋은 결과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고맙다고 하게 됩니다. 가라앉아 있는 것 뿐 이라면, 수면제라도 먹고 숙면하고 있으면 누구든지 가라앉게 됩니다.

 

사마타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우 필요한 수행입니다. 사마타는 무엇을 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조건을 다듬어서 거기서부터 위빳사나의 실천 단계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4. 위빳사나의 실천

 

위빳사나라는 것은 잘 본다는 뜻입니다.

위(vi)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 잡은 물건을 짜임세 있게 상세하게 자른다는 뜻입니다. 즉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 빳사나-(passan?)라는 것은 보는 것. 잘 관찰 하는 것. 그러므로 위빳사나라고 하는 것은 명확히 구별하여 상세하게 관찰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위빳사나의 대표적인 수행법에 좌선과 행선이 있는데 그것은 선(禪)을 해서 자신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는 잘 보는 것이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명상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온갖 것이 다 위빳사나가 됩니다.

예를 들면 불교를 공부하는 것도 혹은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부딪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물을 보는 것도 일종의 위빳사나 실천입니다. 특히 부처님께서 손수 가르치신 경전의 내용 등을 명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위빳사나의 효력은 잘 듣습니다. 좌우지간 사물을 명확히 구별하여 상세히 보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위빳사나 수행법은 다섯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 할 수 있습니다.

1. 먼저 사물을 분석한다. 갈갈이 찢어서 식별한다. 즉 사물을 나누고 나누고 또 나누어서 가능한 한 짜임새 있고 상세하게 나누어서 따로 따로 본다.

2. 그 다음에는 서로의 관계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 찢어 놓은 것 들 끼리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발견한다.

3. 세 번째로는 마음의 문제를 집어내는 것입니다. 위빳사나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를 고치는 방법이므로 자신의 문제는 무엇인지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 또는 괴로움의 원인, 존재의 문제를 발견한다.

4. 그 다음에 발견한 문제를 해결한다. 자신이 발견한 자신의 문제를 소멸시킨다.

5. 그렇게 하면 마지막으로 자신의 괴로움이 사라졌다고 하는 실감이 생깁니다. 즉 문제가 없어져서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자유가 된다. 그것이 해탈입니다. 그런 단계로 위빳사나 수행법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제 1단계는 현상의 구별, 식별

제 2단계는 제반현상의 관계를 안다.

제 3단계는 자신의 문제를 발견한다.

제 4단계는 문제의 해결법을 실천한다.

마지막 단계는 마음이 자유가 되었다는 실감을 얻는다. 라는 것이다.

  이 위빳사나의 단계와 같은 것을 부처님께서 별도의 경전에서 완벽히 설명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苦集滅道 이른바 사성제입니다. 위빳사나는 사성제의 실천법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사성제는 훌륭한 가르침이지만 이론이 지나치게 완벽하여 범인으로서는 기댈 엄두를 못 냅니다. 감당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우리들의 손에 닿을 만큼이라도 실천하기 쉽게 고안해 낸 방법이 위빳사나입니다.

 

우선 최초의 규칙을 지킬 것

그러면 위빳사나의 실천은 어떻게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앞서 말한 설명에서 우선 사물을 분석하여 식별하고 관계성을 발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분들이 위빳사나를 실천할 때에는 분석하거나 관계성을 찾거나 하는 그런 일은 일절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사물을 명확히 분석하거나 관련짓거나 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격적으로 출가하여 아주 오랜 동안 수행한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잘 본다, 확실히 확인한다고 하는 것만 실천하십시오. 군더더기 해석은 붙이지 않는다. 다만 잘 본다, 확실히 확인한다, 라는 정도에서 마무리해 두겠습니다. 해석하고, 의의를 달고, 의미를 붙이고, 저렇지는 않나 이렇지는 않나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되지도 않는 이유를 달거나 사물에 의미를 붙이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도 해석하거나 이유를 생각해 보거나 하는 일을 좋아하죠? 그러므로 이런 글 같은 것을 읽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자신을 두면 왠일인지 무언가를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즐거워합니다. 어리석게요.

 

위빳사나 명상법은 戒. 定. 慧라고 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우선 최초에는 戒, 계율을 지키는 일입니다. 계는 빨리어로 실-라(s?la)라고 합니다. 최초의 단계가 계라고 말하면 계는 싫으므로 위빳사나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계라고 들으면 여러분은 대개 싫어하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힘든 것을 지키라는 것은 아닙니다.

계의 정의는 세상의 현명한 사람들에게 비난 받지 않을 생활방식을 취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에게는 무슨 소리를 들어도 좋습니다. 진실된 사람에게 비난 받지 않을 행위를 할 것. 그러므로 계는 특별히 불교의 세계에 국한 된 것은 아니고 인간 사회 공통의 보편적인 규칙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와 같이 당연한 것을 지키면 될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나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그런 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오늘까지 영원히 이어지고 있는 보편적인 규칙이겠지요. 그것을 지킬 뿐입니다.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면 계라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1)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은 하지 않는다.

(2) 정해진 계율을 지킨다. 성서의 계율을 지켜도 좋고 불교의 계율을 지켜도 좋다. 진실된 계율이라면 어느 것을 지켜도 상관없습니다.

(3) 자신의 마음과 생활방식을 혼란시키는 행위를 피한다. 말하는 것도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행위에 들어갑니다.

이정도의 것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연히 지키고 있겠지요. 문서로 써 놓으면 왠일인지 어렵다는 인상을 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불교에는 5계라고 하는 계율이 있습니다. 살생을 하지 않는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 사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술이나 마약을 하지 않는다. 의 다섯 계입니다. 이 다섯 개 정도를 지키면 충분합니다. 그것만으로 앞서 말한 세 개 모두 갖추어집니다.

어딘가에서 명상수행을 해보려고 수행 그룹에 참가했다고 하면 거기서는 당연히 그 정도의 계율은 지켜지고 있을 터이므로 특별히 계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제 1단계인 계의 단계입니다.

 

다음으로 定으로 갑시다. 이것은 앞서 말한 사마타 명상입니다.

마음의 통일, 집중에는 사마타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위빳사나를 하는 사람은 하루에 30분 정도, 무언가 마음을 통일하는 훈련을 하면 도움이 됩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30분 정도 하면 충분합니다. 어떤 식으로 하는지 마음의 안정을 가져오면 됩니다.

아니면 30분 정도 어딘가에 앉아서 호흡을 합니다. 들여 마시고 내쉬고 할 뿐으로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을 것과 여유 있는 기분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30분 정도 조용히 앉아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들이마시고, 내쉴때, 일어남, 사라짐, 이라고 하며 호흡해 주십시오.

 

마지막 실천은 혜, 지혜의 실천입니다. 이것이 실은 위빳사나 실천입니다.

그 위빳사나 명상법에는 두 가지 종류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집중적 실천법.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천법. 그 두 가지입니다.

매일 어떤 일정한 시간에 집중적 위빳사나 수행법을 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일상적 위빳사나 수행법을 합니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보통 8시간 잔다고 치면 나머지 16시간은 깨어 있는 것이 됩니다. 그 16시간 중에서 한 시간을 집중적 위빳사나 수행을 한다면 나머지 15시간은 보통의 생활을 해나가면서 일상적 위빳사나 수행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24시간 체제로 위빳사나를 실천하지 않으면 중도에 하차하게 되므로 좋은 결과를 여간해서 얻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면 집중 위빳사나 수행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집중 위빳사나 수행이라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하나하나 명확히 보고 머리 속으로 자신의 행위를 하나하나 확실히 확인하는 것입니다. 집중 위빳사나의 방법은 네 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行住座臥라는 분류법입니다.

행은 보행 즉 걷는 수행을 말하고, 주는 서있는 수행법, 좌는 앉는 수행을 말합니다. 또 와는 누워서 행하는 수행입니다.

 

* 집중 위빳사나 수행

 

걷는 명상(경행) 수행법

 

경행은 자신이 걷고 있는 행위를 상세하고 꼼꼼히 하나하나 알아차리면서 행합니다.

우선 걷는다라고 알아차립니다. 자신이 오른쪽 다리부터 걷기 시작한다면 오른쪽 다리의 움직임에 의식을 두어 ‘들어올림’‘나아감’‘내려놓음’이라고 명칭을 붙여서 자신이 걷는 다리의 감각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반드시 명칭을 붙여서 확인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망상과 혼란을 피해 집중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다리를 들어 올리고 있다면 ‘들어올림’이라고 명칭을 붙이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숙달에는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약속입니다. 명칭을 붙여 확인한다고 해도 소리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손은 뒤나 앞으로 서로 살며시 잡고 있는 것이 좋겠지요. 한 걸음의 거리는 그다지 크게 띠지 않도록 자연스런 걸음이면 됩니다. 한 걸음 걷는 것이 종료되면 다음의 한 걸음으로 옮겨갑니다. 주의할 점은 오른쪽 다리를 내리는 것과 왼쪽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을 연속하지 않도록 하는 것 즉, 오른 쪽 다리를 내리는 것과 동시에 왼쪽 다리의 뒤꿈치를 들어 올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오른쪽 발바닥이 확실히 지면에 닿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왼쪽 다리를 들어 올리도록 해야 합니다.

 

경행할 때 처음에는 발을 들고 내릴 때 ‘들어올림’‘내려놓음’이라고 2단계로 나누어 알아차리십시오. 이렇게 2단계로 구분하여 5분 정도 한 다음 마음이 가라앉은 단계에서 3단계로 들어올림’‘나아감’‘내려놓음’이라고 3단계로 구분하여 알아차리면 좋겠지요.

집중이 한층 잘 되어져서 다리의 움직임을 확연하게 알아차리게 되면 6단계로 나누어 갑니다. 즉, ‘뒤꿈치 들어올림’‘앞꿈치 들어올림’‘나아감’‘내려놓음’‘닿음’‘누름’으로 더욱 세밀하게 알아차려 갑니다.

더 더욱 마음이 움직이는 발에 집중되어 예리해질 때는 발을 들어 올릴 때는, ‘들어 올림’‘발바닥 떨어짐’‘올라감’이라고 구분하고 발을 옮길 때는, ‘나아감’‘나아감’‘나아감’이라고 구분하고 발을 내릴 때는, ‘내려놓음’‘닿음’‘누름’이라고 9단계로 나누어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수행자 마음의 가라앉음 정도에 따라 다르게 구분하여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너무 느리게 걸어 알아차림이 흩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에 따라 걷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경행만으로도 위빳사나 수행법의 알아차림, 사띠를 향상시키는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예를 들어 매일 한시간 위빳사나 집중 수행을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20분에서 30분은 먼저 경행을 하도록 하십시오.

 

 서서 하는 명상(입선) 수행법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들은 서있는 시간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서 있으면 신체도 건강해지기 때문에 스님은 입선을 자주 합니다. 하루에 한시간 집중수행을 한다고 결심했다면 5분 정도 입선을 합니다. 그 경우에도 양 손은 앞이나 뒤로 부드럽게 마주잡고 안정감이 있도록 어깨 넓이 정도 다리를 벌리고 섭니다.

서있으면서 발바닥이 지면에 닿아있는 감각을 먼저 느끼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속으로 ‘서있음’‘서있음’이라고 명칭을 붙입니다.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정말로 간단합니다. 서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이것만큼 간단한 것은 없습니다. 단지 서서 발바닥으로 아 과연 서 있구나라고 느끼며 그것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런 후 마음이 안정되어 알아차림의 힘이 강해지면 호흡을 알아차리십시오. 배가 불러오고 꺼질 때 ‘일어남’‘사라짐’하며 호흡의 들이쉬고 내쉼을 알아차리십시오.

만약 경행을 하다가 돌아서기 위해 멈추어 섰을 때나, 돌아서고 나서 멈추어 있을 때도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합니다. ‘서있음’‘서있음’하며 서있는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 다시 호흡의 들이쉬고 내쉼을 ‘일어남’‘사라짐’하며 알아차리고, 다시 서있음’‘서있음’하며 서있는 상태를 확인하도록 해야 합니다.

 

앉아서 하는 명상(좌선) 수행법

 

앉을 때에는 우선 앉을려고 하는 의도를 먼저 알아차림한 후,

그 때 가능하다면 눈을 감고 천천히 신체의 움직임을 따라 앉아가는 다리의 감각을 알아차림하면서, 다리가 ‘굽혀짐’‘굽혀짐’ 앉음’‘앉음’이라고 천천히 행하면 한층 알아차림이 선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방석에 엉덩이가 닿을 때는 ‘닿음’‘닿음’, 완전히 앉고서는 ‘닿음’‘닿음’, 왼쪽다리를 꼴 때는 ‘왼쪽 다리를 꼼’ ‘왼쪽 다리를 꼼’, 오른쪽다리를 꼴 때는 ‘오른쪽 다리를 꼼’ ‘오른쪽 다리를 꼼’이라고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움직입니다. 다리는 자신에게 무리가 없는 형태로 꼬고 앉는 것이 좋습니다. 의자에 앉아도 됩니다.

그러고 나서 등줄기와 머리를 똑바로 한다 라고 알아차리며 똑바로 폅니다.

 

자신의 행위에 붙이는 명칭은 가능한 한 정확하고 간결한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양손을 어깨에 부담을 주지 않는 형태로 ‘오른쪽 손을 놓음’ ‘왼쪽 손을 놓음’하며 놓습니다. 느긋한 형태가 좋습니다. 엄지 손가락은 붙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엄지가 서로 닿아있으면 맥박 뛰는 소리로 인해 장애가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2, 3회 정도 들이 쉬고, 내 쉬고 하며 천천히 숨을 호흡합니다.

 

이렇듯 앉아서 천천히 호흡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 사마디(samadhi=집중, 통일력)가 상당히 나옵니다. 2회 내지 3회 그런 식으로 호흡을 할 때는 명칭을 붙이지 말고 자연스럽게 호흡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그렇게 호흡하는 감각, 이른바 배의 팽창 축소를 관찰하도록 하십시오. 배의 팽창 축소를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배꼽 주위를 따라서 손을 대어 보십시오. 숨을 들이 쉴 때는 배의 팽창을, 숨을 내 쉴 때는 배가 수축되는 것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팽창과 수축을 이해했다면 손을 무릎 위에 되돌려 놓고 자연스럽게 호흡해 주십시오. 그 호흡에 맞추어서 배가 부풀어 오를 때 ‘일어남’이라고, 수축되어 갈 때 ‘사라짐’이라고 해 주십시오.

앞에 나온 경행에서는 다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하나하나에 명칭을 붙여 알아차림 하는 것이므로 망상이 쉽게 생기기 않지만, 이 좌선수행에서는 몸의 움직임이 정지한 상태이기 때문에 마음은 곧 무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에는 그 행동에 마음도 따라 가지만, 그런 행동이 없을 때에는 마음은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곧 독자적 작동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즉시‘망상’‘망상’ ‘생각함’‘생각함’하면서 마음으로부터 망상이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리도록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 초심자 단계에서는 배에 집중하는 것이 여간해서 잘 되지 않습니다. 호흡하여 배의 팽창 수축을 관찰하고 싶어도 곧 이 망상이 생깁니다. 그러나 배에 집중할 수 없다고 하여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빳사나에서는 지금 마음이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는 현상을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곧 망상이 생겨도 ‘망상’‘망상’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30분의 수행 중 모든 것이 망상이라고 쳐도 그 망상 전부를 명칭붙여 알아차림 했으면 훌륭하게 위빳사나 수행을 한 것입니다.

 

명칭 하나로 향상의 정도가 결정된다.

 


통증과 저림, 추위와 더위등도 그것을 느꼈을 때, 곧바로 ‘통증’‘통증’‘저림’‘저림’등으로 모든 것을 명칭붙이며 알아차립니다. 싫다든가, 편하다든가, 즐겁다든가, 기분이 좋다든가, 무섭다, 등의 감정도 모두 그 자리에서 명칭 붙여 알아차리십시오. 좌우지간 무엇이 나타나든, 어떤 감정이 떠오르든, 마음에 와 닿은 모든 대상을 명칭붙여 알아차릴 뿐입니다.

사마타 명상처럼 하나의 대상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장 많이 느끼고 있는 대상을 명칭 붙여 알아차림 합니다.

 

명상을 시작해 얼마 되지 않는 사람 중에는 여러 가지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복부에 전혀 집중을 할 수 없다.”“집중하려고 해도 곧 마음이 산만해 져 버려 무언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등등. 좋습니다. 마음이 산만해져도,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해도, 그 마음이 따르고 있는 대상을 한 발 빨리 알아차려 그것을 명칭붙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면 드디어 마음은 가라 앉아 자연히 복부의 팽창 수축을 관찰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갑니다.

배의 팽창 수축에 오로지 집중할 수 없어도, 나타나는 대상마다 명칭 붙여 알아차리면 위빳사나 수행은 향상되어 가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리해서 복부의 팽창 수축을 관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음은 언제 어떤 경우에라도 반드시 무언가 자극을 얻기 위하여 대상을 구하기 때문에 앉아있을 경우 가장 관찰하기 쉬운 대상이 말하자면 배의 팽창 수축이므로 ‘일어남’‘사라짐’이라고 명칭붙여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현상을 알아차리는 사띠야말로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앉아있는 경우 곤란한 일이 졸음입니다.

졸고 있으면 수행은 되지 않으므로 졸음만은 피해야 합니다. 졸음이 찾아오면 ‘졸음’‘졸음’하고 명칭 붙여 강하게 알아차려야합니다. 그래서 졸음이 가라앉으면 좋겠지만, 졸음이라는 것은 끈질겨서 그 정도의 명칭만으로는 여간해서 퇴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꺼풀 내려옴’‘눈꺼풀 내려옴’‘무거움’‘무거움’‘아픔’‘아픔’‘통증’‘통증’하며 졸음이 오는 길을 따라 명칭붙이며 강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졸음이 물러가지 않으면 신체를 움직여서 졸음을 쫓습니다.

 

졸음이 쏟아질 때는 대개 신체가 앞으로 기울고, 목이 굽어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세를 고칠려고 함’하며 알아차린 후, 천천히 등뼈와 목이 똑바로 되도록 바로 잡아 주면서 ‘허리 폄’‘허리 폄’‘목 폄’‘목 폄’하며 알아차립니다.

그것으로 졸음은 떨어져 나갈 것이므로 그 후에 다시 배의 팽창 수축으로 되돌아갑니다.

또 다리가 아프거나 저려오는 것도 오래 앉아 있을 경우 자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 경우 ‘통증’‘통증’하며 관찰합니다. 통증을 쭉 관찰해 가면 통증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통증은 싫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기 쉬우므로 그것도 관찰하여 ‘싫어함’‘싫어함’하며 알아차려 갑니다. 통증이라고 하는 현상은 대상으로서는 꽤 강한 부류에 속하지만, 관찰 대상으로서는 수행을 진보시키기에 적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증을 관찰하는 경우 주의할 것은 그 통증을 어디까지나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신체의 통증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통증과 저림을 관찰해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앞의 졸음과 같이 신체의 자세를 고칩니다. 이 경우는 다리를 바꿔 꼬고 앉는다든지 하는 동작이 필요하기 때문에 천천히 하나하나의 동작을 명칭붙여 알아차림하며 다리를 바꿔 앉아야 합니다.

가려움이 나타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려움이 나타나면 우선 ‘가려움’‘가려움’ 하며 가려움을 관찰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려움이 신경 쓰이지 않게 되면 다음의 현상을 관찰합니다. 가려움이 진정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긁고자 함’‘긁고자 함’‘손을 올림’‘손을 올림’ 피부에‘닿음’‘닳음’ ‘긁음’‘긁음’하며 명칭붙여 관찰합니다. 긁어서 기분이 좋아지면 ‘기분 좋음’‘기분 좋음’하며 관찰합니다.

 

소리나 목소리가 들릴 경우도 ‘소리’‘소리’라든가 ‘들림’‘들림’합니다.

만일 가려움과 소리와 통증이 동시에 현상으로 나타날 경우도 마음이라고 하는 메커니즘은 하나의 대상밖에 취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결코 동시라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마음의 변화는 빛의 속도보다 몇 배나 빠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동시에 몇 개의 현상을 취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 뿐 입니다.

 

이런 때에는 일단 관찰하는 것을 그만두고 마음을 개방합니다. 그 위에서 지금 현재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대상을 알아차림 하면 됩니다. 혹은 대상을 순차적으로 관찰합니다.

 

망상이 생길 때의 능숙한 처리법

 


또 자신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쉬지 않고 무언가 대상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상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단지 멍하니 있던가, 망상의 한 가운데에 있든가 혹은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수행경험이 충분한 숙련자라면 관찰하는 대상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때는 신체 혹은 마음의 미미한 움직임이라도 선택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명상이 향상되어 좌선 수행하고 있으면 점점 집중력이 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한층 한 순간 한 순간의 알아차림을 철저히 해나가면 사마타명상과 같은 삼매(사마디)상태로 되어 갑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에 따라서는 돌연 명상 중에 빛이 나타나거나, 망상이 보이거나 합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흔치 않은 대상을 따르고 싶어 하지만, 이것도 망상이므로 구애받지 말고 빛이 나타났다면 ‘빛’‘빛’하고, 다른 현상이 나타나도 ‘망상’‘망상’하며 명칭 붙여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현상과 대상이 자신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오직 현상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때로는 보살이나 부처님이 마치 살아계신 듯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단지 내 마음이 마음대로 만들어 낸 망상에 지니지 않으므로 ‘보고 있음’‘보고 있음’하며 망상이 사라 질 때까지 관찰하십시오.

 

아무리 집중력이 강해져도 妄想이나 妄像은 생기기 때문에 그 현상을 빨리 알아차리고, 배의 팽창과 수축으로 곧바로 되돌아 갈 수 있게 발전하면, 배의 팽창의 시작, 중간, 끝을 알게 됩니다. 이럴때는 배의‘일어남’‘멈춤’‘사라짐’이라고 명칭붙여 알아차림 합니다.

이렇게 셋으로 나누는 관찰법은 생 주 멸이라고 하는 태어남, 존재, 소멸의 진리를 관찰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 밖에도 사띠의 훈련방법은 몇 개 되지만 이 이상은 스승의 지도하에 가르침을 받으면 좋겠지요.

좌선 수행도 한 시간 앉아 있을 수 있으면 충분하므로 그 후에는 똑같이 한 시간 정도 경행을 해 주십시오.

처음부터 무리하게 좌선수행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좌선, 경행, 입선, 와선의 네 가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능숙하게 조합하는 것입니다.

 

좌선수행을 끝낼 때에도 확실히 명칭 붙여서 끝냅니다. 우선 명상을 ‘끝내고자 함’끝내고자 함’끝내고자 함’이라고 명칭붙이고, 거기부터 또한 천천히 ‘일어남’‘사라짐’을 2회나 3회 더 한 후 ‘눈을 뜸’‘손을 뻗음’‘오른쪽 다리를 폄’‘왼쪽 다리를 폄’‘일어섬’이라고 명칭붙여 하나하나 꼼꼼히 알아차리며 일어섭니다.

그렇게 확실히 끝내 주십시오.

 

누워 하는 명상(와선) 수행법

 


몸이 피로해 있을 때나 병이 났거나 혹은 취침 전에 합니다.

똑바로 누워서 배 위에 손가락을 포개어 살며시 내려놓고 우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어 주십시오. 맨 먼저 오른쪽 다리, 왼쪽 다리 어느 쪽을 먼저 관찰하든 발뒤꿈치가 방바닥에 닿아 있는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렸으면 그 의식을 엉덩이를 향하여 엉덩이가 방바닥에 닿아 있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하나씩 천천히 알아차림 하면서 엉덩이 다음은 무릎, 손등, 어깨, 머리를 차례대로 알아차려 나갑니다.

 

의식이 머리까지 도달하면 다음은 역으로 머리로부터 어깨로 내려가서 차례 차례로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아 있는 상태까지를 알아차립니다. 한바퀴 몸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면 자신이 누워 있는 전체 모습으로 마음을 옮겨서 ‘누워 있음’‘누워 있음’‘누워 있음’이라고 3회 정도 명칭 붙여 알아차림 한 후에 배의 호흡을 관찰합니다.

배의 팽창 수축에 맞추어 ‘일어남’‘사라짐’하며 3분 정도 관찰한 후, 다시 발뒤꿈치로부터 시작하여 마음을 신체의 위쪽으로 향해 알아차려 나갑니다.

도중에 망상이나 가려움이 나타나는 경우는 그것을 알아차림 합니다. 졸음이 찾아오면 ‘졸음’ ‘졸음’‘졸음’하며 알아차려 졸음 같은 것은 날려 버립니다.

 

이것은 잠자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누워서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점을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밤에 그대로 잠들고 싶을 때에는 실제로 졸음에 역행하지 않고 ‘잠이 듬’‘잠이 듬’‘잠이 듬’이라고 관찰하고 그대로 자 버려도 됩니다. 아침까지 푹 잠들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집중수행의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지만 그것을 조합해서 행하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법의 특색입니다.

또한 위빳사나는 이 집중수행법 이외에도 일상 어디에서든 가능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 일상샐활 속에서의 수행

 

집중력이 단번에 증가하는 식사 시의 수행법

이것은 밥 먹는 것을 상세하고 진지하게 천천히 알아차림 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수행방법이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먹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선 먹을 것을 ‘봄’‘봄’‘봄’하며 알아차리면서 명확히 색과 모양을 잘 관찰합니다. 그리고 젓가락을 잡으며‘젓가락 잡음’, ‘옮김’하며 젓가락을 옮기고, ‘잡음’ 하며 먹을 것을 잡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져 옴’‘입에 넣음’‘손내림’‘씹음’‘씹음’‘씹음’‘맛을 봄’‘씹음’‘씹음’‘맛을 봄’‘삼킴’‘삼킴’. 이라고 알아차리면서 먹습니다.

만일 무슨 소리가 귀에 들리면 ‘소리 들림’‘소리 들림’이라고 알아차립니다.

입에 넣은 것을 다 먹고 나면 다시 젓가락을 쥐고, 옮기고, 잡고, 옮기고, 입을 열고, 넣고, 손 제자리로 돌아오고, 씹고, 맛보고, 삼키고.. 라고 알아차림을 계속해 나갑니다. 행위를 모두 명확히 순서대로 알아차려 나갑니다.

 

이것은 대단한 수행이 됩니다. 그리고 이 수행은 매우 어렵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어려움은 한 겨울에 폭포수 아래에서 물을 맞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닙니다. 폭포수로 몸을 때리는 것도 훌륭한 수행방법일지 모르지만, 한번 위빳사나의 방법으로 식사를 해 보십시오. 한번 해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지혜가 생겨나서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한번 확실히 먹어 보십시오. 먹는다고 하는 행위 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 어떤 일이 생기는지, 어떤 기능이 있는지 경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최근 의학계에서도 암 치료에 먹는 수행방법을 채택하였습니다.

먹는 것만으로도 병이 낫고, 신체도 튼튼해지고, 마음도 치료되고, 번뇌도 사라지는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시험 삼아 평소의 식사법, 번뇌에 찌든 망상 투성이의 마음으로 먹고 있다가, 위빳사나의 식사방법을 택해 보십시오.

 

꾸역꾸역 먹는 것을 딱 그만 두고, 소량의 밥을 펌, 옮김, 입을 벌림, 넣음, 숟가락을 뺌, 씹음, 씹음, 맛을 봄, 씹음, 삼킴, 이라고 명칭 붙이면서 천천히 먹어 보십시오. 얼마나 다른 경험을 하게 될지..

평소에는 망상 속에서 먹고 있기 때문에 내가 먹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먹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면서 고기나 생선에 손을 뻗고 있습니다. 손을 뻗고 있다는 것은 그 쪽으로 마음이 가 버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입 속에는 밥이 들어 있는데 그 밥을 명확히 맛볼 생각도 없이 고기 쪽에 마음이 이미 가 있기에, 아직 먹지 않은 고기 맛도 모르고, 밥맛도 모르게 됩니다. 또 고기를 다 먹기도 전에 마음은 다른 반찬 쪽으로 가버려 그 쪽으로 젓가락을 뻗습니다.

식사 중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별 의미도 없는 얘기들을 주고받느라고 그 쪽으로 마음을 뺏기고 맙니다. 명확하고 꼼꼼히 사띠하면서 먹지 않으면 진짜 맛은 알 턱이 없습니다. 알아차림으로 진지하게 먹어 보면 그밖에도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있습니다.

 

위빳사나 법으로 먹을 때는 결코 배불리 먹을 수 없습니다.

평소 먹는 양의 잘해야 반 정도입니다. 소량으로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체력도 확실히 쌓입니다. 예를 들면 현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오직 현미만을 넣고 밥을 지어 먹어도 맛이 있습니다. 위빳사나 법으로 먹으면 반찬 같은 것은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현미에는 필요한 영양소가 다 들어 있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확실하고 정중하게 먹었으므로 뱃속도 대단히 기뻐합니다.

평소의 식사법은 여러 가지 먹을 것을 그다지 씹지도 않고 위로 보내기 때문에 위로 보면 대단한 부담으로 작용하여 피로해지고 그래서 일찍 나이를 먹게 됩니다.

위빳사나 법으로 먹으면 위, 식도, 신장과 내장이란 내장은 대단히 건강하고 튼튼해집니다. 그것이야말로 건강의 뿌리입니다. 암 같은 것에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의 풍요로운 나라들에서는 암 환자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풍요롭게 되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암으로 죽기 위해 풍요롭게 된 것 같은 결과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빳사나 식사법은 불교의 실천뿐 만이 아니라 이런 이익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기적입니다. 더욱이 불교의 진수,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도 열리는 것입니다.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시험해 보아도 손해는 아니겠지요?

 

스트레스의 사회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먹는 것 뿐 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 대개는 남의 얘기를 제대로 듣고 있지 않습니다. 제대로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듣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 의미를 명확히 포착해서 아 이런 얘기를 했구나 하고 확인하고, 그러고 나서 자신의 생각은 이렇다, 라고 말하는 것이 인간이 말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끌벅적 떠들고 있는 것만으로는 원숭이 무리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까마귀의 모임입니다. 까마귀가 모일 때는 여러분처럼 모두 정중하고 조용하고 질서 있게 모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하는가 하면 제 맘대로 향하고 앉아서 시끌시끌 떠들어 대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꼭 그와 같지 않습니까! 사람이 모이면 그저 말을 못해 안달이 납니다.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을 말했는지, 무엇을 듣고 있었는지 오리무중입니다.

 

우리들은 말없이 있는 것, 조용히 있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을 것. 다른 사람에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진다는 것.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내 의견을 내 세우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듣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 그 인간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즉 나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이겨야지 이겨야지 하는 사람은 나만의 사람입니다.

이런 나를 차분히 보면 인간의 때가 묻은 내가 명확히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런 더러운 때가 묻은 나를 갖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길입니다.

 

나를 버리고 인간성을 초월한다. 위빳사나가 말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법을 꼭 실천해보십시오. 위빳사나를 선전할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충분히 자신이 있으므로 다만 실천해 보십시오. 라고만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으므로 속는 셈 치고 한번 경험해 보십시오.

위빳사나 수행법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생존해 계시던 시절부터 있었습니다. 부처님 시대와 현대의 우리들로서는 정보량도 다르고 살아가는 속도도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기본적인 인간의 구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에는 다만 여러 가지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 가지 정보에 의해 우리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결국 욕심이 더 생기고, 분노가 더 일어나고, 혼란스럽게 되고, 그 정도이겠지요.

 

정보가 적으면 욕심도 적고, 분노도 적고, 혼란도 적습니다. 지금은 고속열차가 있으므로 그것을 타고 당장이라도 서울에 가볼 수 있지만, 고속열차가 없다면 서울에 가는 것은 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부산에서 서울에 가든, 가까운 김해에 가든, 어느 장소로 간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똑 같습니다.

우리들은 결국 가는 장소가 멀든, 먼 곳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든, 옛날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변함없습니다.

인도에서는 샤워를 하지만 한국에서는 목욕을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한국풍의 위빳사나 목욕법을 한다, 단지 그것뿐인 것입니다.

기본은 四念處經(사념처경)에 있는 대로입니다.

 

* 일상생활 속에서의 위빳사나 수행법

그러면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사띠를 실천하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집중적으로 끊어짐 없이 상세히 사띠를 실천하는 것은 무리일는지 모릅니다. 익숙해지면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위빳사나 실천은 먼저 자신이 혼자가 되는 시간을 체크하십시오.

 

사람에 따라서 혼자가 되는 시간이 다르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방을 청소하고 있을 때에 30분 정도 혼자가 된다면 그 30분은 위빠사나 실천을 하도록 정합니다. 청소기로 청소를 한다면 자신이 하고 있는 동작을 순서대로 명칭붙이면서 알아차리도록 히십시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재확인하기 위해서는 명칭을 붙일 필요가 있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사띠가 가능해지면 곧 대상과 일체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훈련된 단계로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명칭을 붙이며 대상과 일치시키는 확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명칭으로 확인한다고 하는 것은 도망가려고 하는 마음을 사띠로 묶고, 또 도망가려 하면 또 묶고, 또 도망하려 하면 또 묶는다라고 하는 작업입니다. 명칭을 자주 붙이면 묶는 횟수가 많아져서 어떻게든 마음을 묶는 상태가 됩니다. 이른바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 집중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청소하고 있는 상태를 예로 들어 사띠를 실험해 봅시다.

청소기를 쥠, 코드를 잡아 뺌, 콘센트를 찾음, 콘센트가 보임, 콘센트에 코드 끝을 끼움, 스위치를 넣음, 소리들림, 청소를 시작함, 오른쪽 끝부터 시작함, 청소기를 밈, 청소기를 당김, 밀고,멈추고, 당기고,...라고 명칭 붙여 알아차림으로 청소를 합니다.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속는 셈치고 한번 실험해 보십시오.

30분으로 1년간 얻지 못하는 엄청난 집중력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책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이면 ‘보임’ 책을 모으면‘모음’ 책을 가지런히 하면 ‘정리함’이라고 알아차리면서 정리해 주십시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 주십시오. 명칭을 붙이면 동작이 늦어져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 결과로서 구석에서 구석까지 실로 꼼꼼히 청소를 하게 됩니다.

 

생활 속에서 30분이라도 자신의 시간이 있다면 이렇게 해서 위빳사나 수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일부러 불교를 실천한다, 수행한다, 하며 특별한 것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명확히 알아차리면서 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하면 일도, 수행도, 양쪽 다 할 수 있게 되며 엄청난 집중력도 생기는 등 좋은 일뿐입니다. 청소를 예로 든 것 뿐이고 세탁도 요리도 운전도 그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하나 중요한 것은 사띠 수행을 즐겁게 해야 합니다. 즐겁게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로 무언가 즐거워지는 명칭을 사용하여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소꿉놀이 하듯이 즐겨 주길 바랍니다. 명칭의 선택 여하에 따라 즐거움에 상당한 차이가 생기므로 가능한 한 재미있는 명칭을 골라 주십시오. TV 나 라디오 방송이 재미있으면 즐겁습니다. 싫다고 생각하면서 수행을 해봐야 효과는 별로 없고 수행은 진척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승부의 갈림길이 되는 것입니다. 확실히 수행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즐겁게 했는지 싫증을 내면서 했는지 하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싫으면 훈련을 계속하지 못합니다. 느긋이 즐겁게 해 주십시오. 요리도 무를 쥠, 씻음, 껍질을 벗김, 자름 하면서 즐겁게 알아차림 합니다. 만약 무를 떨어트렸다면 떨어트림, 허리를 구부림, 잡음, 등으로 알아차리며 즐겁게 주어 올립니다. 그런 일을 즐겁게 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대단한 집중력이 붙게 됩니다.

 

TV를 보거니 라디오를 듣거나 할 때에 사띠를 실천하는 것은 어떤가 하고 묻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 경우는 위빳사나 수행이 상당히 진전되어 몸에 밴 사람이 아니고는 무리입니다. 초심자들은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할 때는 위빳사나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TV 따위에는 아무래도 휩쓸려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수행이 진전되어 몸에 배면 TV를 보고 있어도 정확히 그 사물을 보고, 그 뒤쪽을 보고, 그 뒤쪽의 뒤쪽까지 보며 그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일상의 경행, 그 중요한 점

일상적 위빳사나의 수행법 중 중요한 다른 하나는 평소 걸을 때의 사띠가 있습니다. 집중적 명상법에서도 경행을 설명했지만 그것은 확실히 수행을 위해서 시간을 내어 그 시간에 중단 없이 상세하게 관찰하며 걷는 수행입니다.

 

일상적 걷는 수행은 가벼운 기분으로 평소 걸을 때에 언제든지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은 걸을 기회가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대인이라고 걷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지하철 등의 교통기관이 매우 발달해 있지만 정류소에서 자신의 아파트까지 혹은 집에서 슈퍼마켓까지 등등 걷는 일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게 걸을 때에 이 시간은 위빳사나 실천에 사용하도록 정해 놓으십시오.

 

어떤 식으로 하는가 하면, 그저 단순히 발의 움직임에 맞추어서 ‘왼발’‘오른 발’‘왼발’‘오른발’하고 명칭붙이며 걷기만 하면 됩니다. 걸을 때 맞은 편에서 누군가 사람이 오면 사람이 ‘다가옴’‘다가옴’‘왼쪽으로 비킴’ ‘왼발’‘오른발’하며 왼쪽으로 비켜 주십시오. 그 사람이 왼쪽으로 비키면 오른쪽으로 비킴’ ‘왼발’‘오른발’하며 계속 걸어갑니다. 신체의 감각을 맛보면서‘왼발’‘오른발’‘왼발’‘오른발’하고 걸으면 매우 즐겁습니다. 마치 디스코에서 춤추는 것처럼 즐겁습니다. 디스코든 어디든 무엇이든 여러분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을 떠올려 주십시오. 그런 식으로 대단히 즐겁습니다.

 

걸으면 곧 피로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인지 압니까.

그런 사람은 걸으면서 어두운 생각을 합니다. 걸을 때 나라는 사람은 늘 바보 같은 짓만 하고, 어쩌고 저쩌고 투덜투덜 후회하면서 걸으면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매우 피로해집니다. 그러므로 피로한 것입니다. 혹은 걷는 것도 싫어집니다. 그러지 말고 왼발’‘오른발’‘왼발’‘오른발’하고 걸으십시오.

그러나 무언가 주문을 외우듯이 그저 왼발’‘오른발’‘왼발’‘오른발’하는 것은 안 됩니다. 수행은 주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움직임에 대한 명확한 확인이므로 왼발이라고 하면 왼쪽 발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신체도 그에 응해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오른발이라고 하면 확실히 오른쪽 발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신체도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왼발’‘오른발’‘왼발’‘오른발’하며 걸으십시오.

 

그 때 소리가 들린다면 ‘소리들림’‘소리들림’이라고 알아차림 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소리의 종류를 찾지 않도록 하십시오. 쓸데없는 것은 혼란만 될 뿐이므로 어떤 소리이든 들리고 있다고 알아차림만 하면 됩니다. 그편이 자신을 느긋하게 해줍니다. 하나하나 소리를 추적하지 말 것. ‘들리고 있음’ 만으로 끝내십시오.

일전에 그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그런 식으로 걸으면 사람과 부딪치거나 차에 부딪치거나 하는 것은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사띠를 하고 있다가 차에 부딪쳤다는 사람이 있으면 데리고 와 보십시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차에 부딪친다고 하는 것은 사띠가 없기 때문입니다. 혼란되어 마음이 망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차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사고를 당하거나 사고를 일으키거나 하는 사람은 위빳사나를 하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술에 취했거나 사띠가 없는 상태의 사람입니다.

 

사띠를 하니까 천천히 걷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글쎄요. 천천히 걷는 쪽이 꼼꼼히 사띠를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매우 빨리 걸어도 사띠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빨리 걷지 않으면 안 될 때야 말로 나는 철저히 사띠로 걷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피로해져서 걸을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사띠를 하지 않고 걸으면 아무리 빨리 걸어도 망상이 생깁니다. 나는 걸을 때는 왼발’‘오른발’‘왼발’‘오른발’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꼼꼼히 ‘들어올림’‘나아감’‘내려놓음’이라고 알아차림 하지만 빨리 걸어도 사띠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걸을 때에는 언제나 ‘왼발’‘오른발’‘왼발’‘오른발’하고 걸어 주십시오.

 

 


기상시와 취침시 위빳사나 수행하는 법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위빳사나 수행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의 시간과 밤 잠자기 전의 시간에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효과적이며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몇 시간 정도 잡니까? 사실은 8시간 정도 자고 싶은 데 언제나 6시간 밖에 자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수행법을 실천하면 6시간은커녕 더 적은 시간으로도 8시간 잔 이상으로 심신을 충분히 쉬게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하면 6시간 잘 것을 5시간만 자고 나머지 한 시간은 위빳사나 수행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밤 12시에 자서 아침 6시에 일어나는 사람은 5시에 일어나 주십시오. 자명종이라도 이용해서 아침 5시가 되면 얼른 일어납니다.

 

얼른 일어나서 다리를 꼬고 눈은 뜨든 감든 좋을 대로 하여 자세를 바르게 하고 등을 반드시 곧게 펴서 마음과 몸을 가다듬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느긋이 합니다. 이런 모든 동작을 알아차림하고 나서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남’‘사라짐’하면서 배의 호흡을 관찰하도록 하십시오.

그 때 힘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느긋하게 한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수행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체에 휴식이 필요한 것처럼 마음에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필요한 휴식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자는 것이 아닙니다.

잔다고 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뿐이 아니라 잤더니 오히려 피곤해졌다는 경험을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자도 자도 아무리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눈을 뜨면 하품을 하거나 몸을 여기저기 뻗으며 피로를 풀려고 하고 있겠지요.

 

그러므로 아침은 여느 때 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 한 시간을 심신을 가라앉히는 시간, 마음을 통일시키는 시간으로 정해 주십시오. 한 시간이 길다고 생각한다면 처음에는 30분부터 시작해 주십시오.

밤에 자기 전에도 같은 식으로 수행을 하는 것이 아주 좋습니다.

그냥 누워서 자기만 할 때는 좀처럼 곧바로 숙면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곧바로 숙면 할 수 있으면 한 시간을 자도, 2시간을 자도 훌륭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나서 자면 곧 죽은 것 같은 느낌으로 잘 수 있기 때문에 정말로 피로가 잘 풀립니다. 자신이 존재하는지 어쩐지도 모르고 자는 것이 최고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잠들기 전에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남’‘사라짐’하면서 호흡을 관찰하며, 정말로 아주 졸릴 때까지 수행을 하고나서 ‘지금부터 잔다’고 알아차리며 자면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이 몸에 밴 사람은 아무리 신체가 피로해도 얼른 사띠를 하는 것만으로 심신을 확 풀어 줄 수 있습니다. 마치 스위치를 넣으면 전기가 들어오듯이 당장 마음을 가라앉혀 피로를 풀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몸이 피로해서 천근만근이 되었어도 어딘가 앉아서 조금 이라도 수행을 하면 확 피로가 떨어져 나갑니다. 이것은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마치 기적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이란 것은 일부러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이 있는 곳에 가지 않아도 자신이 간단히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기적을 만드는 쪽이 훨씬 즐겁겠지요. 꼭 시험해보십시오.

 

싫은 것을 순식간에 없애는 수행 응용법

마지막으로 하나 더 설명을 하고 위빳사나 수행법 설명을 끝내겠습니다.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무언가 불유쾌한 경험을 하는 일이 있지요? 싫은 일, 사정이 좋지 않은 일, 의롭지 못한 일이 여러 가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회사의 상사가 까다로운 사람으로 잔소리만 해댄다든가 혹은 집에 있어도 마음이 맞지 않는 이웃 여자가 갑자기 와서 듣고 싶지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소문을 얘기하기 시작하면 그런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이 날 것입니다.

 

그곳이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내 뜻에 맞지 않는다, 싫다, 불유쾌하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고 말기 때문에 참담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얼른 사띠를 하십시오. 내 속에 분노가 생기면 ‘분노’‘분노’ 싫어지면 ‘싫어함’‘싫어함’이라고 정확히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싫은 일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비참해진다고 느낄 때, 감정적으로 되어 버리면 반드시 지고 맙니다. 화를 내면 집니다. 그 순간에 얼른 알아차림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 주십시오. 억지로 분노나 불쾌감을 억누를 필요는 없습니다. 싫은 기분을 그대로 알아차림 할 뿐입니다.

 

그 때 어떤 명칭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귀찮음’‘귀찮음’이라고 명칭 붙여 알아차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순간적 감정에 사로잡혀 그것을 알고 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라는 것이 들어가 있는 명칭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떠나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귀찮아져 있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봅니다. 조금 자신으로부터 떨어져서 자신을 보는 느낌으로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일상 생활 속에서 위빳사나 수행법을 행하십시오. 훌륭한 효과가 있을 겁니다.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상적 수행법도 진지하게 하면 집중적 수행법과 동일한 정도의 효과가 있습니다.

집중수행법은 일주일간 진지하게 계속하면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일상적 수행법으로는 한 달 정도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정말로 한 달간 이 수행법을 확실히 실천한다면 인간이 변화합니다. 다음 달이면 여러분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오늘부터 꼭 시작해 주십시오.

그렇게 어려운 것을 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을 보라든가 이런 복장을 하라든가 이것을 먹으시오 라든가 종교적 의식을 하시오 라든가 하는 것은 일절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것 뿐입니다. 바빠서 수행할 시간이 없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띠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사띠만이 모든 것에 승리하는 길입니다.

단지 멍하니 살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사띠가 없는 사람은 죽어 있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어 있는 상태에서 탈출하여 새롭게 태어나십시오.

지금까지 긴 시간 죽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살아 있도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