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제 3장 분명한 알아차림을 위한 수행방법-붓다의 길따라 선원 교재

담마마-마까 2017. 4. 3. 12:43

제 3장 분명한 알아차림을 위한 수행방법

                                 -아짠 빤냐와로(진용) 스님 법문-

 

   차  례

제 3장 분명한 알아차림을 위한 수행방법

1. 고요함에 빠질 때의 마음자세

2. 좌선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

   :물질을  외관적인(모양), 양식적인(상태), 특성적인(본질) 물질로 구분 분석.

    모양,  수축 팽창,  긴장감 떨림 뻣뻣 움직임.. 

3. 경행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

4. 세 가지 특성(락카나)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

    1) 개별적, 고유한 특성: 4대, 촉, 수

    2) 기간, 순차적 특성: 생성, 머뭄, 소멸 (시작, 중간, 끝)

    3) 보편적 특성: 무상, 고, 무아

5.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 괴로운, 즐거운 느낌

6.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

    요니소 마나시까라: 원인과 결과만을 객관적으로 조사 관찰한다는 것.

 (1) 관찰의 장: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생각, 사악한 견해, 올바른 견해,

      올바른 고찰로 3가지 번뇌 격퇴(유신견, 의심, 계금취견), 깨닫는 경지

 (2) 제어의 장: 6근 제어. 주로 탐, 진을 관리

 (3) 실천·수행으로 없어지는 번뇌

     : 의, 식, 주, 약 4가지 함께 의지해야 할 것을 관찰함으로 번뇌 격퇴해야..

 (4) 인내력·주의집중으로 없어지는 번뇌

     : 더위,추위, 공복, 갈증, 통증, 비방, 험담, 모욕..

 (5) 회피함으로 없어지는 번뇌: 맹수 등 위험한 것, 비난받을 환경과 사람 피해야..

 (6) 제거·끊음으로 없어지는 번뇌: 더러워진 생각, 망상

 (7) 수행의 반복으로 없어지는 번뇌 - 칠각지 - 무지를 찢는 실천수행

 `염각지: 사띠. 나를 알아차리는 것

 `택법각지: 지식의 세계로 부터 체험의 세계로. 분석적 능력, 사물의 사실관계, 인과관계,

              수행의 진전상태 스스로 점검,

              *망상을 6가지로 나누어 관찰- 탐 진 치 불탐 불진 불치

   사후 천상에 태어나는 조건

 `정진각지: 계율을 지켜라.

       나를 이기기 위한 중요한 점검법. 성품을 고치기 위해 노력 하는 것.

       슬럼프에 빠졌을 때 엄격하게 정징.

 `희각지: 탈세간의 성취 점검법.

 `경안각지: 고요한 마음에 도달하는 감동의 길

 `정각지: 시간의 경과도 없는 망아의 영역

` 평등각지: 깨달음의 최종 단계

 칠각지의 실천: 칠각지는 순서대로 성취(진행)된다.

  

 

1. 고요함에 빠질 때의 마음자세

 

수행이 진전되면 고요함에 빠질 것 입니다.

고요한 그 상태를 너무 오래도록 보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내가 뭘 알고 있는가 하는 걸 느낌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고요한 상태에서 고요함 그 자체를 느낌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이 느낌을 알면 괜찮은데 그게 아니고 그냥 고요함 그 자체에 빠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요하게 하기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가 나타났거나 보살이 나타났다거나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다 이미지입니다. 이미지라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고 내가 생각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때는 실재하는 몸의 느낌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고요해지면 더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알아차리는 것을 더 많이 빨리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고요해지면 몸 전체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을 어디에 두든지 몸 전체를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몸의 여기도 보고, 저기도 보고, 이렇게 하면서 수행을 하십시오.

마음의 성질은 고요해지면 쉬고 싶어 합니다. 쉬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미지의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양들이 나타나고, 빛도 나타나고, 어떤 형상들도 나타나고, 갖가지 것들이 다 나타납니다.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 빛이나 어떤 색깔이나 모양들, 이런 것들은 다 내가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들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두려워할 일도 아니고 기뻐할 일도 아닙니다.

수행 중에 갖가지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두려운 현상도 나타날 수 있고, 아주 좋은 현상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기뻐하지도 말고, 그냥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고 다시 대상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2. 좌선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

 

먼저 배의 '일어남' 이 나타날 때 '일어남'의 불분명한 처음부터 시작하여

'일어남'이 끝날 때까지 어떻게 관찰하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숨을 들이쉬면 바로 배가 희미하게 부르기 시작합니다.

호흡을 하고 있으면 저쪽에서 계속해서 부르고 있게 됩니다.

여기(몸)에서 호흡이 시작하자마자 저쪽(마음)에서 '일어남'도 시작됩니다.

호흡하고 있으면 그것(알아차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호흡이 끝나면 그것(알아차림)도 일어나기를 끝냅니다.

그래서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릴 때에 《몸 전체에 걸쳐 느끼고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삽바까-야빠디상웨-디: Sabbakāyapaṭisaṃvedi)라고 경전에서는 말합니다.

 

여기서 몸 전체라는 것은 외관적인 몸 전체, 몸 덩어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숨을 쉬는 순간에 희미하게 부르기 시작하는 것부터 불러오는 것이 끝날 때까지 뻣뻣하고 긴장되고 떨리는 물질의 단계들, 이런 것이 연결되어 생겨나는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몸 전체라고 부른 것입니다.

빨리어로 '삽바까-야(sabbakāya)'라는 것은 모든 물질의 모임, 물질 전체를 뜻합니다. 이 삽바(sabba:전체)란 아-디(ādi:처음), 맛자(majjha:중간), 빠리요-사-나(pariyosāna:끝)를 칭합니다.

처음, 중간, 끝이라고 하는 세 부분 모두를 전체라고 일컫습니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하나의 배가 '불러옴'이라는 물질 전체를 나누면 처음과 중간과 끝의 세 부분이 있습니다. 이 세 부분 모두를 "삽바까-야빠띠상웨-디" 몸 전체를 뒤엎어서 인식하고 이해하는 훈련이 있어야 한다.(인식하고 이해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어남'이라고 주시할 때면 천천히 배가 부르기 시작하는 불러옴의 시작부터 이쪽에서 마음으로 짚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대상에 도달해야 합니다. 천천히 부르고 있는 것을 여기서 마음으로 집중해서 '일어남'이라고 붙어 따라가야 합니다. 불러옴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서 주시하는 것도 딱 맞게 동시에 끝나게 되어야 합니다.

 

수행 초기에는 불러오는 물질의 처음, 중간, 끝, 세 부분 모두를 아직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 모두를 보기 위해서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 되는 만큼만 따라 주시하여 느슨하고 약하게 알아차림 한다면, 수행자는 가볍게 대충 수행할 것입니다. 가볍게 대충 수행한다면 그냥 그렇게 수행시간이 끝나게 될 것입니다. 수행이 끝날 때까지, 정해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약하고 느슨하게 수행하다가 수행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깊고 진지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미리 긴장시키고 고무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음을 완전히 대상에 집중해 두어서 불러오는 순간 위에 마음의 집중을 완전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시할 때에는 처음과 중간과 끝, 세 부분 모두를 정면에서 포획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마음으로 주시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다음에는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 초기의 수행자들은 ‘일어남’으로 알아차릴 때, 서서히 희미하게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불러옴이 끝날 때까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야만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이 집중해서 주시한 대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러옴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건 하나를 보십시오. 보면 보이게 됩니다. 보이면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본다'고 하는 것도 대충 봐서는 안 됩니다. 집중해서 마음을 대상에 붙어서 보아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여야만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남'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을 알기 위해 사띠와 지혜로 집중하여 꿰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린 그것이 무엇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데에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보는 것 한 부분과 보이는 것 한 부분으로 두 부분입니다.

이 두 부분 모두가 완전해야 무엇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리라는 것은 그것을 보도록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보이면 보이는 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라는 두 부분이 충족되어야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 대상을 잡고 알아차리지만 그 대상의 상태조차 그것의 본질과 함께 이해할 수 없다면 수행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바르고 정확할 수 있도록, 수행이 의미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렸을 때, 배가 불러오는 시작부터 불러옴의 끝까지 붙어서 따라갈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따라갈 수 있었다면 배의 모양이 보였든지, 불러오는 모습이 보였든지, 아니면 뻣뻣함, 긴장됨, 떨림, 움직임 중 어떤 한 가지가 보였든지 할 것입니다.

 

실질적인 수행의 영역에서는 물질과 관련된 부분은 세 부분이 있습니다.

외관적인 물질과 양식적인 물질과 특성적인 물질이라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배에 마음을 모아보면, 일반적으로 배의 모습, 모양인 외관만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배의 모습을 '외관적인 물질'이라고 부릅니다.

몸 전체도 외관적인 물질입니다. 이 몸 전체의 일부분인 배도 외관적인 물질이라고 부릅니다. 모양이라고도 부릅니다.

'양식적인 물질' 이라는 것은 배의 모습이 어떠한지, 즉 판판한지, 불룩한지, 수축되어 있는지를 말합니다. 이렇게 그것의 상태, 모습을 말합니다.

숨을 들이쉬면 배가 불러오게 됩니다. 즉 불러오는 모습이 생겨나게 됩니다. 숨을 내 쉬면 배가 꺼지며 판판하게 됩니다. 즉 꺼지는 모습, 상태가 생겨나게 됩니다. 빨리어로는 '아-까-라(?k?ra)' 라고 합니다. '아-까-라'라는 것은 상황, 상태, 양식, 모습을 말합니다.

제대로 집중해서 보아도 특성적인 물질이 보이기 전에, 때로는 배의 외관이 보일 수도 있고 부르는 모습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외관과 모습, 상태를 보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이러한 외관과 모습, 상태를 뚫고 배가 불러오는 순간에 분명한 긴장감, 뻣뻣함, 떨림,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특성적 물질'이라고 부릅니다.

배가 불러오는 순간에 '불러옴'이라고 알아차릴 때 긴장감, 뻣뻣함, 떨림, 움직임 중에서 어떤 특성이 두드러졌는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특성을 제대로 주시하면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지금 여기 연필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무엇이 보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연필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 연필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연필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왜 보입니까?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라고 했기 때문에 보았고, 보아서 보이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특성, 우선 그것이 무엇인지 보였습니다.

제대로 집중해서 보면, 이 연필의 색깔은 어떤지, 은색인지, 금색인지, 아니면 흰색인지, 노란색 혹은 빨간색인지 등으로 구분되게 됩니다. 그것의 상태들이 그것의 본질과 함께 스스로 드러나게 됩니다. 보기만 하고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르는 순간에 주 대상을 집중해서 알아차려 무엇을 아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사라짐’도 배가 서서히 꺼지는 것의 처음부터 시작해서 꺼짐의 끝까지 집중하여 따라가야 합니다. 숨을 내쉼과 동시에 배가 꺼지기 시작합니다. 공기를 계속해서 내 보내고 있으면 배도 따라서 서서히 꺼지게 됩니다. 여기서 공기를 내보내는 것도 끝나고 ‘사라짐’도 끝나야 합니다.

 

이렇게 ‘사라짐’으로 불리는 줄어들다가 멎는 특성은 날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공기를 내보내기 시작함과 동시에 배가 따라서 꺼지게 됩니다. 내쉼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짐’도 끝납니다. 그래서 수행자 자신이 '사라짐'으로 알아차림 할 때에 서서히 꺼지기 시작할 때부터 꺼짐이 끝날 때까지 집중하여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배가 꺼지는 순간에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릴 때 긴장감, 고요함, 떨림, 움직임 중에서 어떤 특성이 두드러졌는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특성을 제대로 주시하면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수행입니다.

 


3. 경행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

 

경행할 때에도 발에 마음을 집중하여 '걸어감'으로 알아차립니다.

혹은 '오른발', '왼발' 로 알아차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으로 알아차립니다. 들면 서서히 들리는 것의 시작부터 들림이 끝날 때까지 마음이 대상에 집중하여 붙어서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갈 수 있다면 무엇이 보이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들고 있는 순간에 다리가 보이는지, 들리는 모습이 보이는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특성 한 가지가 보이는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벼움, 무거움, 뻣뻣함, 밀어올림 등 어떻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양의 물질, 상태의 물질, 본질의 물질, 이 세 종류 중에서 어떤 한 가지를 분명히 이해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올림'으로 알아차릴 때면, 걸음을 떼는 시작부터 걸음을 올려놓는 끝까지 집중해서 대상에 붙어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갈 수 있다면 어떠한 특성을 아는지, 즉 다리를 아는지, 가는 모습을 아는지, 그렇지 않으면 가는 순간에 어떤 특성을 아는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뒤에서 미는 것 같은가! 앞에서 당기는 것 같은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내림'으로 알아차릴 때도, 천천히 내려가는 시작부터 땅에 닿아서 멈출 때까지 붙어 따라가며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붙어서 따라가며 알아차림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쭉 따라가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갈 수 있다면 이 대상 위에 마음이 밀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상에 마음이 밀착하면 무엇을 아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리를 아는지, 내리는 모습 상태를 아는지, 무겁고, 가볍고, 부드럽고, 뻣뻣하고, 긴장되는 어떤 한 가지를 아는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외에 굽히고 펴고 기울고 앉고 일어나는 것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행동들을 알아차릴 때에도 대상이 나타난 것, 알아차림 한 것, 들어맞았는지 아닌지, 마음이 관찰 대상위에 도달했는지 아닌지, 도달했다면 어떠한 특성을 알았는지 이러한 것들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4. 세 가지 특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

 

이렇게 수행할 때 수행자들은 세 가지 '락카나(lakkhaṇa)'에 대해서도 이해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락카나(lakkha?a)'란 특성, 특징입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1) 사바-와락카나(sabhāvalakkhaṇa) - 고유한 특성

(2) 상카따락카나(saṅkhatalakkhaṇa) - 순차적 특성

(3) -만냐락카나(sāmaññalakkhaṇa) - 보편적 특성

이 세 가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1) 사바-와락카나(sabhāvalakkhaṇa : 개별적 특성)

이 세 종류 중에서 사바-와락카나란 물질과 정신의 고유한 본질, 각각의 특별한 개별적 특성들을 말합니다.

먼저 네 가지 물질적 요소(四大)를 빨리어로 마하-부-따-(mahābhūtā)라고 합니다. 마하-(mah ā )는 크다, 부-따-(bhūtā)는 생성된, 태어난, 요소, 일어난 일 등을 말합니다. 마하-부-따는 물질의 큰 요소를 말하는데, 네 가지 요소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은 물질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것이며 실재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무엇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봅니다. 바로 이러한 물질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사대가 있고, 나머지 여기서 파생된 것으로 24가지가 있습니다.

 

수행에 있어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이들 중에서 근본물질인 4대 요소에 대한 것입니다.

몸은 물질의 형태를 띠지만 물질이 가지는 성품이 내재합니다. 이것을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즉 몸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 요소(四大)라고 합니다. 몸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아는 것이 몸의 빠라맛타(paramaṭṭha, 궁극적 실재, 성품)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궁극적 실재’라 하여 불변하는 어떤 고정불변한 존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실재하는 것들은 모두 그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라는 보편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빠라맛타의 ‘궁극적 실재’라는 용어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이 4대의 고유한 성품, 즉 개별적 특성(sabhāva-lakkhaṇa)을 지닙니다. 그리고 이들 4대 요소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이들이 여러 양상으로 조합되어 여러 가지 물질을 구성하게 됩니다.

 

마음에도 대상을 취할 수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팟사'(phassa:접촉)에도 마음에 의지하여 마음과 함께 생기며 마음을 꾸며주고 있는 접촉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웨-다나-'(vedanā:느낌)에도 느끼고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물질 요소, 정신 요소들에는 각각의 본질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본질들을 빨리어로 사바-와락카나(sabhāvalakkhaṇa)라고 부릅니다.

 

그 하나하나를 알아보면,

빠타위- 다-뚜(pathavī dhātu : 흙의 요소)

예를 들어서 지금 몸의 뼈 위를 짚게 되면 딱딱한 특성을 알게 됩니다.

살 위를 짚게 되면 부드럽고 물렁한 특성을 알게 됩니다. 이것입니다.

딱딱함과 부드러움, 이것을 '빠타위-다-뚜' 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흙의 요소는 실제적인 흙이 아니라, 그 요소의 독특한 특성을 말합니다. 즉, 딱딱하고 거친 특성입니다. 딱딱하고 부드러운 특성에 근거하여 지탱하는 요소를 흙의 요소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딱딱하고 거친 특성은 흙의 요소에만 존재합니다. 다른 요소들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딱딱함 안에는 항상 부드러움이 함께 있습니다. 딱딱함의 요소는 부드러움의 요소가 있어서 단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부드러움 또한 마찬가지로 부드러움 안에 단단함이 있어서 부드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흙의 요소는 몸이 가지고 있는 단단함, 부드러움, 무거움, 가벼움, 딱딱함 등을 통틀어서 말합니다. 손이나 발, 몸이 어디에 닿았을 때 단단하거나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이 흙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나 바람이 피부에 닿았을 때 강하거나 부드럽거나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도 흙의 성품입니다.

흙의 요소는 물의 요소에 의해서 결합되고, 열의 요소에 의하여 유지되며, 바람의 요소에 의하여 확장됩니다. 이러한 흙의 요소는 다른 3대의 기저(基底)로서 작용함으로써 그들이 존재랄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이것이 흙의 본질, 고유한 특별한 특성입니다.

 

떼-조- 다-뚜(tejo dhātu : 열의 요소)

이와 마찬가지로 열의 요소도 있습니다.

열의 요소에 뜨거운 특성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열도 있고, 차가운 열도 있습니다.

이러한 열의 요소를 '떼-조-다-뚜'라고 부릅니다.

열의 본성은 따뜻함과 늙어감과 소모되는 것과 소화를 돕는 열기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차가움의 성품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따뜻함에는 항상 차가움이 함께 있어서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열의 요소는 소화를 돕는 36.5°C의 열기를 유지합니다. 또한 몸의 바이러스와 싸우는 열기를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체온을 유지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성품이 있습니다. 열의 요소는 숙성의 성품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지고 성장하고 병들고 하는 것이 모두 열의 요소의 영향입니다.

열의 요소는 흙의 요소에 의하여 머물게 되며, 물의 요소에 의하여 결합되고, 바람의 요소에 의하여 확장됩니다. 이러한 열의 요소는 다른 3대의 유지체로서 작용함으로써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이러한 성질은 물질 현상들에만 존재합니다. 이것이 열의 본질, 고유한 특별한 특성입니다.

 

아-뽀- 다-뚜(āpo dhātu : 물의 요소)

흐르는 특성은 '아-뽀-다-뚜'에만 존재합니다.

다른 요소들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흐름이 있으므로 유동성이 있습니다.

물은 축축하고 습기가 있는 습성이 있으며, 흘러서 한곳으로 모이기 때문에 응집성이 있습니다. 물은 물질과 연결하여 결합시켜 엉기게 합니다. 몸의 기관인 물질과 물질을 서로 응집시켜서 결합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시멘트와 같은 접착성이 있습니다. 즉,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의 본질을 보고 '이것이 물의 요소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물의 요소는, 흙의 요소에 의하여 머물게 되며, 불의 요소에 의하여 유지되며, 바람의 요소에 의하여 확장됩니다. 이러한 물의 요소는, 다른 3대의 응집제로서 작용함으로써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와-요- 다-뚜(vāyo dhātu : 바람의 요소)

긴장되고 뻣뻣하고 떨리는 특성은 바람의 요소에만 존재합니다.

바람의 요소는 몸의 움직임으로 가볍게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에너지, 운동, 긴장, 지탱의 요소가 있습니다.

바람은 상승하는 바람과 하강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상승하는 바람은 몸의 움직임의 원인이 되는 공기나 공기 같은 것, 또는 이것에 달라붙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재채기, 트림, 하품, 구토, 딸꾹질 등이 있습니다.

하강하는 바람에는 배에서 부는 바람, 창자에서 부는 바람, 팔과 다리를 통해서 부는 바람, 코의 호흡이 되는 들숨과 날숨의 바람이 있습니다. 호흡은 에너지의 요소를 가집니다.

바람의 요소는, 흙의 요소에 의하여 머물게 되고, 물의 요소에 의하여 결합되고, 불의 요소에 의하여 유지됩니다. 이러한 바람의 요소는, 다른 3대의 확장체로 작용함으로써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이러한 본질을 보고 '이것이 바람, 공기의 요소, 와-요-다-뚜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배의 일어남을 관찰할 때, 단단함이 점점 증가하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단단함은 흙의 요소로서의 빠라맛타(궁극적 실체)라 합니다. 또한 배가 일어날 때 안에서 바깥으로 미는 팽창하는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점점 팽창함은 바람의 요소로서의 그것 또한 빠라맛타입니다.

배의 사라짐을 관찰할 때 수축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수축함은 바람의 요소입니다. 수축할 때 점점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있음도 알았을 것입니다. 부드러움은 흙의 요소입니다. 이렇게 수행자는 그러한 담마를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발목에 통증이 일어났을 때, 통증은 개념일 뿐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통증을 이루고 있는 구체적인 존재는 쑤심, 당김, 저림 등이며 이것은 일차적인 빠라맛타입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욱 그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쑤심, 당김, 저림 등을 이루고 있는 근본적인 빠라맛타가 보일 것이고, 그것들이 지닌 있는 그대로의 양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빠라맛타를 통하여 담마를 보게 된 것입니다.

 

수행자들의 마음이 잘 집중되어 있다면, 몸과 마음의 고유한 특성을 먼저 이해하게 되고 나중에 보편적인 특성인 무상(無常; anicca), 고(苦; dukkha), 무아(無我; anatta)를 깨닫습니다.

줄지어 가는 개미떼를 예로 들면, 멀리서 보면 하나의 줄로 보입니다. 점점 가까이가면 움직임을, 더 가까이 가면 4~5마리의 모임을 하나로, 더 가까이가면 한 마리씩의 정확한 움직임을 보게 됩니다. 수행도 이렇게 계속 바르게 관찰하게 되면 특별한 특성들을 깨닫게 됩니다.

 

(2) 상카따락카나 (기간, 순차적 특성)

빨리어로 '웁빠다(uppāda)', '티띠(ṭhiti)', '방가(bhaṅga)'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작되어 생겨나는 것, 소멸을 향하고 있는 것인 잠시 머물고 있는 것, 끝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시작과 중간과 끝을 말합니다.

결국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는 것도 생성과 머묾과 소멸입니다. 

조금 전 이야기한 딱딱한 성질, 부드러운 성질, 뜨거운 성질, 차가운 성질, 뻣뻣한 성질, 조이는 성질, 떨리는 성질, 대상을 아는 성질, 대상과 접촉하는 성질, 느끼는 성질 이렇게 모든 물질과 정신의 현상, 물질과 정신의 법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 생성과 머뭄과 소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물질과 정신의 법들에 존재하는 생성, 머뭄, 소멸이라는 기간적 특성 세 종류를 상카따락카나라고 부릅니다. 조건이 부합되어 생겨나는 물질 성분과 정신 성분들의 생성과 머뭄과 소멸이라는 '짧은 순간순간', 순차적인 세 종류의 기간을 '상카따락카나' 라고 부릅니다.

 

(3) 사-만냐락카나 (보편적 특성)

'사-만냐락카나(sāmaññalakkhaṇa)'란 일반적으로 관련되어지는 보편적 특성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관련되어지는 특성이란 모든 물질 현상과 정신 현상들은 생겨나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 이야기한 딱딱함도 소멸되고, 부드러움도 사라집니다. 뜨거움, 차가움도 사라집니다. 항상 하지 않는 것들뿐입니다. 뻣뻣하고 긴장되는 것, 차가운 것, 녹는 것, 흐르는 것, 끈적거리는 것도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들일 뿐입니다. 보아서 아는 것도 소멸되고, 들어서 아는 것도 소멸됩니다.

보아서 접촉하는 것도 사라지고, 보아서 좋은 것, 좋지 않은 것도 소멸될 것들뿐입니다. 생성되어 나타나서는 소멸되어 사라지는 것들뿐입니다. 생겨나고 나타나서 멈춰 머물러 있는 법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 다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들뿐입니다. 생겨나서는 소멸됩니다. 나타나서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빠알리어로 '사-만냐(sāmañña)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과 관계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과 관련되는 특징을 '사-만냐락카나'라고 부릅니다. 생겨나서 사라지는 항상 하지 않은 '아닛짜사-만냐락카나'(무상의 보편적인 특성)'가 있듯이, 나타나고 사라지면 고통스러운 의지할만한 것이 아닌 '둑카락카나(고통스러운 특성)'도 모든 물질들, 정신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나타나면 사라지는 고통스런 것들이 나라고 할 만한, 내가 마음먹는데로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도 없다는 ‘아낫따락카나(무아의 특성)’도 있습니다.

즉 '아닛짜락카나', '둑카락카나', '아낫따락카나' 3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특성들은 모든 물질 및 정신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만냐락카나',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정리하면,

이 세 가지 특성들 중에서 우리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바-와(sabhāva)'입니다. 수행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의 개별적인 특성들을 알기 위해서 생겨나는 것을 따라 알아차림하는 것입니다.

배에 마음을 두어 봅시다. 그리고 숨을 들이 쉽니다. 자... 배가 불러옵니다. 자 ... 불러옴이 생겨났습니다. 숨을 들이쉬기 전에 배가 불러오는 것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숨을 들이쉬자 일어남이 생겨났습니다.

생겨나는 것을,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남'으로 알아차림합니다. '일어남'은 배가 일어나는 동안에 어릿어릿하게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하여 일어나는 것이 끝날 때까지 따라서 관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숨을 들이 쉴 때 들어가는 것은 공기입니다. 공기라는 것은 뻣뻣함, 긴장됨, 떨림, 움직임입니다. 그것이 공기의 특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생겨나는 동안에 관찰해야 고유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생겨나는 동안에 따라서 관찰하지 않으면 고유의 특성을 알 수 없습니다. 고유의 특성은 고사하고 조금 전 이야기한 배의 모양도 알 수 없고, 부르는 모습도 알 수 없습니다.

외관상의 물질인 모양도 알 수 없고, 양식상의 물질인 형태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고유한 특성으로서의 물질은 더구나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유의 특성의 물질을 알기 위해서 "생겨나는 동안에 관찰해야 고유의 특성을 알 수 있다. " 라는 경구대로 숨을 들이 쉬어서 배가 불러올라오기 시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일어남’ 위에만 제대로 집중하십시오.

"붙어서 따라가라." 라는 말처럼 집중하여 알아차림 하십시오. 주시하여 관찰하십시오.

고유의 특성을 알아차림하는 것이 많아지게 될 때, 이 대상 위에 마음이 일치하게 되는 것이 많아지게 되면 마음의 집중력이 좋아질 것입니다. 마음의 능력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집중력이 좋아지게 되면 배의 외관적 모양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부르는 모습이라고 하는 모양, 상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들을 넘어서서 뻣뻣한 특성, 긴장되는 특성, 떨리는 특성, 움직이는 특성들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배가 꺼지는 동안에도 서서히 꺼지기 시작하는 것부터 끝날 때 까지 "사라짐 위에 집중하십시오. 붙어서 따라 가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집중하여 따라가게 되면, 조금 전 말한 배의 모양이나 형태들을 뛰어 넘게 됩니다.

배가 점차 줄어들면서 멎으며 꺼지게 됩니다. 공기가 들어있는 공을 터트리게 될 때 점차 줄어들어서 꺼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들은 공기의 특성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경행에서도 발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이라는 주 대상들을 알아차릴 때에도 들어올림이 끝날 때까지 집중해서 붙어 따라가십시오. 그러면 어떤 특성 한 가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생겨나는 동안에 관찰해야만 특성을 알 수 있다." 라고 했습니다.

나아가면 나아감의 처음부터 시작하여 나아감이 끝날때까지 제대로 집중하여 붙어 따라가십시오. 내려놓을 때에도 내려놓음의 처음부터 시작하여 내려놓음이 끝날때까지 제대로 집중하여 붙어 따라가십시오.

이렇게 생겨나는 동안에 따라다니며 관찰하면, 이 생겨나는 동안에 존재하는 고유한 특성 한 가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부릴 때, 펼 때, 기울일 때, 눈을 깜빡거릴 때, 눈을 감을 때, 눈을 뜰 때, 앉을 때, 설 때.... 등등 아주 많습니다.

이렇게 생겨나고 있는 순간들을 따라서 알아차림해야 합니다.

 

몸이 딱딱할 때, 부드러울 때, 뜨거울 때, 차가울 때, 뻣뻣할 때, 긴장될 때, 떨릴 때, 뻐근할 때, 아프고 욱신거리고 저릴 때에 제대로 집중하여 따라 알아차림하면 고유한 특성을 제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생겨나는 동안에 알아차림해야 고유한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보는 동안, 듣는 동안, 냄새 맡는 동안, 먹는 동안, 닿는 동안, 굽히는 동안, 펴는 동안, 기울이는 동안, 드는 동안, 가는 동안, 내리는 동안뿐만 아니라, 앉을 때 앉고자 하는 마음, 일어날 때 일어나고자 하는 마음, 등등 이 의도하는 마음들도 생겨나는 동안에 따라서 알아차림하면 그것의 고유한 특성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4) 고유한 특성을 봐야 순차적 특성이 드러난다.

대상을 알아차림 해 봅시다. 집중해서 보십시오. 집중해서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그것의 상황도 보이게 됩니다. 무언가가 드러나는 것이 첫번째 부분, 그 이후에 그것의 상황, 상태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번째 부분입니다. 제대로 집중해서 보십시오.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겨나는 동안에 따라서 알아차림하여 고유의 특성을 알게 되면, 서서히 지혜들이 성숙되어지게 됩니다.

이후에 지혜들이 성숙되어지게 될 때에는 이렇게 드러나게 되는 고유의 특성들이 시작되어 나타나는 것,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 그리고 끝나는 것, 즉 생성과 머뭄, 소멸, 이것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고유한 특성을 봐야 순차적 특성이 드러난다 "라고 합니다.

고유의 특성을 보지 못하면 순차적 특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물질의 고유한 특성, 정신의 고유한 특성을 생겨나는 동안에 따라서 알아차려 볼 수 있어야 그것의 시작되는 것, 계속되고 있는 것, 이후에 끝나게 되는 것, 이 세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5) 순차적 특성이 드러나야 보편적 특성이 보인다.

이렇게 고유한 특성들을 볼 수 있게 되어 그것의 처음과 중간과 끝, 생성과 머뭄과 소멸, 이 세 부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드러나게 되면 관찰되는 대상이 일어나서 사라지는 모습, 항상하지 않은 모습들도 보게 되어 알게 될 것입니다. 의지할 것이 아닌 모습들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 각자의 특성대로 되어 가는 모습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생성과 머뭄과 소멸이라고 하는 순차적 특성 세 가지 중에서 특히 마지막 부분을 아직 보지 못하고 드러나지 않았다면 항상하지 않은 모습, 고통스러운 모습, 그것들 각자의 특성대로 되어가는 모습이라고 하는 모든 물질과 정신들의 보편적 특성들을 아직 보지 못합니다.

 

"순차적 특성이 드러나야 보편적 특성이 드러나도록 따로 할 것은 없습니다. 고유한 특성을 볼 수 있도록 생겨나는 동안 따라서 알아차리십시오. 생겨나는 동안을 관찰하면 고유한 특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항상하지 않은 모습들, 고통스러운 모습들, 그것들 각자의 특성대로 되어가는 모습들을 알게 됩니다.

일어남을 알아차리면 서서히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하여 일어남이 끝날 때까지 저절로 보게 될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면 사라지는 거의 처음부터 시작하여 사라짐의 끝까지 제대로 집중하여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몸 안에 나타나고 있는 것들이 나타나고 알아차리고 사라지고, 나타나고 알아차리고 사라지고... 하는 보편적 특성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겨나고 나타나서 사라지는 것, 태어나서 죽어 끝나 사라지는 것, 죽음의 성분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성분들이란 좋지 않은 성분들입니다. 고통스러운 성분들입니다.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닌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각자의 성질대로 되어가는 모습도 깨끗하고 분명하게 뚜렷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순차적, 기간적 특성이 드러나야 합니다. 순차, 기간이 드러난다는 것은 지혜안에 순차, 기간들이 드러나야 합니다.

생성과 머뭄과 소멸, 알아차림되는 대상의 처음, 중간, 끝이라는 세 부분이지요. 특히 마지막 부분이 드러나야 합니다. 드러나게 되면 항상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그것들 각자의 특성대로라고 하는 것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보편적 특성을 볼 수 있어야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납니다.

보편적 특성을 보게 되면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납니다. '위(VI)' 라는 것은 물질과 정신 현상들의 생성과 머뭄과 소멸이라는 세 부분이 나타나서는 소멸되는 모습, 나타나고 사라지며 고통스러운 모습,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 모습, 즉 그것들 각자의 특성대로 되어지는 모습이지요.

'위빳사나' 란 항상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특성대로라고 하는 상황으로 보는 지혜, 항상하지 않는 모습, 고통스러운 모습, 그것들 각자의 특성대로 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지혜지요.

보편적 특성을 볼 수 있으면 '위빳사나 지혜'가 생긴 것이라 합니다.

 

5.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세 가지 양식의 느낌 (vedanā : 웨-다나-, 감각)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느낌 속에는 세 가지의 바르지 못한 성향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바르지 못한 성향을 제거해야만 수행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느낌 안에 일어나는 세 가지 바르지 못한 성향이란,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lobha : 로-바)의 바르지 못한 성향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괴로운 느낌에는 성냄(dosa : 도-사)의 바르지 못한 성향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중간 느낌에는 무지(moha : 모-하)의 바르지 못한 성향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그것을 잘 통찰하지 않으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는 전 수행 과정 동안 그것을 즐기게 되기 때문에 탐욕이 계속하여 일어납니다.

또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그것을 잘 통찰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느낌이 일어나는 전 수행과정 동안 수행자 고통의 느낌에 반응하기 때문에 성냄, 짜증 등이 계속하여 일어나 결국에는 수행에 대해 의기소침해 질 것입니다.

중간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그것을 잘 통찰하지 않으면 중간 느낌이 일어나는 전 수행 과정 동안 그것이 모호하기 때문에 무지가 반복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듣는 것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생겨나는 요소는 말하는 음파입니다. 이것을 치는 요소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생겨나는 요소는 귀안에 받아들이는 부분, 느낌을 아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받는 요소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물질입니다.

이 두 가지가 치고받을 때 세 번째 아는 의식,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정신입니다. 이것은 열리는 요소, 생기는 요소라고 말합니다.

듣는 과정에는 언제나 이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서 아는 순간에 팟사(phassa : 접촉)가 생겨나고, 이어서 웨-다나-(vedanā : 느낌)가 생겨납니다.

즉, 좋은 느낌, 싫은 느낌, 중간의 느낌, 이런 느낌들이 생겨납니다.

실재 수행을 해보면 좋고 싫은 느낌은 명확한데 중간의 느낌은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명확히 알아차림 하여, 들을 때는 다른 아무것도 없이 앞의 세 가지 요소, 즉 물질과 정신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들음은 한 순간의 들음, 한 순간의 들음의 연속이고, 항상 하지 않고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실제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느낌에는 탐욕이, 싫은 느낌에는 성냄이, 무덤덤한 중간의 느낌에는 어리석음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르지 못한 「탐.진.치」라는 세 가지 성향이 자라지 못하게 알아차려 그 자리에 지혜가 자라게 해야 합니다.

 

(1) 괴로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알아차림 방법

이 세 가지 중에서 수행자는 괴로운 느낌의 현상을 먼저 경험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 있어서 고통의 느낌을 극복하는 것은 초심자가 해야 할 행위 중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것을 잘 이행하면 수행의 50%는 성공한 셈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수행을 시작하여 집중력이 조금 갖추어지면 고통의 현상들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즉 통증, 가려움, 쑤심, 뻐근함, 메스꺼움, 딱딱함, 지루함 등의 고통의 느낌들이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그런 것들이 매우 강할 때 수행자는 그것에 깊이 반응하며 괴로워합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몸은 항상 문젯거리를 안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 문젯거리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몸을 뒤척이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수행을 하려고 몸의 자세를 꼿꼿하게 유지해서 움직이지 않고 마음집중 상태에 있으니, 몸 각 부분의 조직들은 무질서에서 질서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반응을 일으키게 되어, 그것의 결과로 통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통증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수행에 있어서 통증은 가시와 같은 것입니다. 설사 조그마한 가시라도 손에 넣어둔 채 일을 능숙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가시가 몸을 망가트리지는 않지만 마음이 불편하여 일을 지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통증의 관찰을 생략하고 다른 현상의 관찰로 넘어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와 같이 수행자는 고통의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마음 챙김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 되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고통스러운 느낌을 관찰할 때 세 가지 태도 중 어느 하나를 취하게 됩니다.

① 고통스러운 느낌을 그 자신에게서 제거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오직 그 고통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바램으로 관찰하는 자.

② 바로 그 좌선에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투쟁적인 태도로 관찰하는 자.

③ 그 고통의 느낌을 통하여 고통스러운 느낌의 참 성품을 보려는 태도로 관찰하는 자.

 

①의 경우 : 이것은 편안함을 구하려는 것으로, 그 자체가 탐욕입니다. 수행자는 탐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느낌에 대하여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탐욕을 증가시키는 것이 되어서 그의 마음 챙김에는 항상 번뇌가 도사리고 있는 셈이 됩니다. 번뇌가 도사려있는 한 수행자는 법을 보지는 못할 것이며, 수해ㅇ자의 지혜는 향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태도는 수행자가 지녀야 할 적절한 수행의 태도가 아닙니다.

②의 경우 : 투쟁적인 마음속에는 반드시 성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내는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투쟁적인 태도는 번뇌의 상태를 증가시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수행하는 동안 번뇌가 도사려 있는 한 수행자는 법을 보지 못할 것이며, 지혜 또한 향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태도는 수행자가 지녀야 할 적절한 수행의 태도가 아닙니다.

③의 경우 : 고통스러운 느낌의 참 성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 챙김을 하는 태도가 옳은 접근 방법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고통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수행자는 이제 곧 법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담마는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수행자는 참 성품을 보려는 마음으로 고통스러운 느낌을 관찰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느낌의 참 성품을 이해하려고 그것을 관찰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수행자는 이 고통의 느낌에 대하여 의연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사실, 통증은 수행을 방해하는 적이 아니라 수행을 돕는 친구입니다.

실제로 통증은 수행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보조 요인의 역할을 합니다. 통증은 결코 수행의 향상을 방해하는 적이 아니라, 오히려 수행의 향상을 돕는 보조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수행의 실제에 있어서 수행의 가장 큰 장애는 졸음과 망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한 통증이 있는 한, 통증의 강한 느낌으로 인해 졸음과 망상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통증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급류를 거슬러 오르며 수영하는 자와 같아서 목표에 이르지는 못할지언정 대부분 목표를 놓치지는 않습니다.

 

수행의 격언 중에 《인내가 닙바-나(nibbāna : 열반)로 인도한다.》는 명언이 있습니다. 수행자는 결코 "이번 한 시간을 어찌 버티며 수행하나! 또 다리의 통증으로 괴로워해야 하나!"라고 하며 미리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냉정한 태도로, "그것 자체의 성품으로 인하여 '느낌'은 통증과 고통을 일으킨다. 나의 의무는 그것을 알아차려서 그것의 참 성품을 보는 것이다"라고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합니다. 통증이 일어나면 통증이 일어났음을 즉각 포착하여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괴로운 느낌이 더욱 강하게 되었을 때, 수행자는 무의식적으로 마음도 몸도 다 긴장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미 긴장 속에 있게 된 한참 후에야 자신이 긴장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긴장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즉시 그것을 주시하십시오.

먼저 몸의 긴장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조사해 보십시오. 마음 또한 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긴장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 이완하려는 의도가 일어나면서 몸의 이완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을 고통스러운 느낌 위에 갖다 놓습니다.

다음에는 느낌이 실제로 있는 곳을 찾습니다.

 

만약 무릎이라면,

피부의 깊은 층에 있는가! 살 속에 있는가! 뼈 속에 있는가!

수행자는 꿰뚫어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느낌의 정도를 가늠하며 '통증, 통증' 혹은 '쑤심, 쑤심'하며,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하여 알아차림 합니다. '통증' '통증'하며 알아차림 할 때 통증을 싫어해서 그것이 빨리 사라져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통증 그 자체를 들여다보도록 해야 합니다. 때로는 명칭을 놓아버리고 그냥 통증 그 자체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명칭은 관념을 만들어 실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상당한 정도의 사마-디 (samādhi : 마음 집중)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느낌의 참 성품을 알아내기 위한 기초입니다.

 

수행자는 건성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그리고 서둘러서 알아차림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느낌이 변화하는 성품을 알기 위해서 꿰뚫어 보듯이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확고하게 알아차림을 할 때, 그 연속적인 알아차림을 위해 과도한 노력을 해서는 안 됩니다. 통증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과도할 때는 통증 그 자체를 알아차림 하는 것보다는 격렬한 노력 그 자체만 앞서서 마침내는 그것이 화냄을 동반하기 때문에 마음 챙김이 전혀 진행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면 통증 그 자체에 미치지 못한 채 무기력에 빠지고 통증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고통스런 느낌은 변화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매번 변화하는 고통의 정도와 위치 및 양식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의 사마-디(samādhi : 마음집중)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너 댓 번의 알아차림 후 통증의 정도가 더욱 강렬해 짐을 발견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시해보면 그 통증은 최고의 절정에 도달한 후 서서히 감소하게 됩니다.

이때 수행자의 마음이 대상을 향하는 긴밀함도 다소 풀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수행자는 마음을 놓으면 안 됩니다. 계속하여 꿰뚫어보는 관찰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통증의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는 과정을 보아야 합니다.

통증은 상승하기 시작한 후 최고의 절정에 달했다가 다시 서서히 감소하여 드디어 그 통증의 느낌이 사라진다는 것을 너 댓 번의 알아차림으로 경험한 것은 통증에 대한 성품을 보았음을 의미합니다.

수행자가 꾸준히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사마-디가 모아지면, 통증에 대한 단 한 번의 알아차림으로 통증은 상승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윽고 최절정에 도달한 후, 단 한 번의 알아차림으로 그 통증은 두드러지게 감소하거나 혹은 장소를 이동해 버리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 통증의 현상 자체가 장소를 이동한 것이 아니라, 앞서 일어났던 통증의 현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른 통증의 현상이 다른 장소에 새로이 일어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느낌에 대한 성품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행자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사마-디가 성장되었을 때, 통증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이게 됨과 동시에 통증이 순간적으로 일어남에 따라 알아차림도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통증이 순간적으로 사라짐에 따라 알아차림도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이제 수행자는 통증 그 자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그것을 아는 마음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무상(anicca : 아닛짜)을 본 것입니다. 그것을 분명히 이해한 것이 통증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혜입니다.

 

수행자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혜(Udayabbaya ñāṇa : 우다얍바야 냐-나)'를 증득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둑카웨-다나 (dukkha vedanā : 고통의 느낌)를 극복하는 시작입니다. 이것으로 고통의 느낌 속에 머물러 있는 탐욕, 성냄을 제거하는 일은 끝난 것입니다.

수행자는 그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것에 대해서 어떤 것도 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들은 그들의 인연으로, 즉 조건들에 의해서 일어날 뿐, 수행자의 의지로서 그것을 조절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무아 (anatta, 아낫따, 조절할 수 없음)를 본 것입니다.

수행자가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를 완전히 보았을 때 고통의 느낌 속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진(성냄)'은 제거됩니다.

 

(2)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알아차림 방법

수행자가 열심히 정진하여 고통의 느낌들을 잘 극복하여 더욱 정진해 나아가면 수행자의 사마-디가 성장되어 고통스런 느낌들의 현상들은 사라지고 기쁨, 즐거움, 고요함 등의 현상들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몸과 마음이 쾌적해지고, 유연해지며,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작용시키기에 적절해질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1시간 좌선 동안 두세 번 자세도 움직이거나 움직이고 싶었었는데, 이제는 1시간 좌선이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두세 시간 계속 앉아있을 것 같고 실제로 앉아 보고도 할 것입니다.

수행자는 몸과 마음이 잘 숙달되어 있으므로 감각 대상이 일어나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저절로 작용하는 것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하기가 매우 쉬워질 것입니다. 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몸과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감각과 상태를 얻게 됩니다. 전에는 좌선 속에서나 일상생활 속에서 그와 같은 기쁨과 편안함 그리고 평화스러움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위빳사나-의 삐-띠(pīti, 기쁨, 환희)로 인하여 수행자는 즐거운 느낌 (sukha vedanā : 수카 웨-다나), 즉 몸과 마음의 평안함을 즐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 즐거운 느낌에 마냥 머물러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즐거운 느낌 속에 머물고 있는 탐욕을 제거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고통스러운 느낌처럼 즐거운 느낌에 대한 참 성품을 알아차리게 될 때까지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육체적인 편안함이 뚜렷하면 꿰뚫어 보듯이 주의 깊게 육체적인 편안함과 정신적인 편안함을 각각 알아차림하며 관찰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지혜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였을 때, 그 편안함 들도 영원하지 않고 일어나서 사라지는 현상의 연속임을 보아 알게 될 것입니다.

편안한 감각이 일어난 후 그것이 사라지고, 그 후에 다른 편안한 감각이 일어났다가 또 사라지는 현상들의 연속을 보게 됩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더욱 성숙되면 그것들이 일어나서 사라지는 속도가 증가하여 점점 빨라짐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너무나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지므로 수행자에게는 그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침내 일어나는 것은 잘 보이지 않고 계속하여 너무나 빨리 사라지는 것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Bhaṅga ñāṇa : 방가 냐-나). 그 존재들이 너무나 허망하게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엄청난 고통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것들을 고통으로 보므로 이제 수행자는 즐거운 느낌 속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탐욕을 제거하는 일을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하지 말고, 분명하게 그 감각을 알아차려서 면밀히 관찰해야만 합니다.

 

한 가지 더 위빳사나- 수행에서 대부분 수행자들이 사마-디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수행의 실제에 있어서 수행자가 사마디, 즉 집중을 키우려고 주력하면 지나친 긴장을 가져와 오히려 역반응이 올 것입니다. 수행자는 단지 정확한 사띠(sati, 알아차림)를 하려고 주력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고 연이어 진행되면 사마-디는 자연스럽게 찾아들 것입니다. 사마-디는‘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찾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정확한 ‘사띠’를 하려고 주력하십시오. 사실 ‘사띠’는 위빳사나- 수행에 있어서 모든 것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며, 우리의 일상 삶에 있어서도 대단한 공덕을 보장하여 줍니다.

 

6.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

 

우선, 번뇌의 기능을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번뇌의 기본적인 기능은 사람의 행복, 평온함을 부수는 일입니다. 또한 번뇌는 괴로움을 늘리는 일을 합니다.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번뇌가 사람의 행위에 맞추어 아군으로 위장해 오는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번뇌가 공격해오는 방법입니다. 우리 편 인줄 알기 때문에 번뇌에 쉽게 져버립니다.

그러나 번뇌 자체의 역할은 정해져 있습니다. 기대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언가 행하기 위해서는 의지나 용기 등 어떠한 형태의 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2, 3개월이나 청소를 하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 자기 방을 방문한다고 하면 정리 정돈하고 청소도 합니다. 그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욕구가 용기가 되어 청소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언제라도 번뇌가 우리의 아군이 되어 위장해 옵니다. 또 사람들은 잘 살고 싶다고 희망합니다. 잘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희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미래를 꿈꾸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욕구라고 하는 감정 자체는 사람을 풍요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 욕망이라는 번뇌로 인하여 화를 내고, 게을러지고, 어리석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잘 사는 것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멀리 가게 합니다.

이런 것이 번뇌의 기능입니다.

 

중부 경전 2번째의 모든 번뇌의 경(Sabbāsava sutta)에 “나는 단지 알아차리는 것, 시작과 끝을 보는 것만으로 번뇌는 멸한다고 말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라고 말한다.”는 구절은 여러 다른 견해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문제는 “이것이 진실이다.”고 부처님이 단언하실 때 쓰는 표현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고 괴로움을 일으키게 하는 번뇌와 대결하는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 명확히 아는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번뇌와 대결할 때의 키워드는 바로 이 yoniso manasikāra입니다.

요-니소-(yoniso)는 ‘원인으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사물을 원인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철저하게 분석하고, 철저하게 검증한다는 말입니다.

마나시까-라(manasikāra)는 고찰, 생각하는 것,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니소- 마나시까-라란 원인과 결과만을 객관적으로 조사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을 차례대로 설명하겠습니다.

(1) āsavā dassanā pahātabba 관찰하는 것, 알아차리는 것, 이해하는 것으로 없어지는 번뇌.

(2) āsavā saṃvarā pahātabbā 방어·제어하는 것으로 없어지는 번뇌.

(3) āsavā paṭisevanā pahātabbā 실천·수행으로 없어지는 번뇌.

(4) āsavā adhivāsanā pahātabba 인내력·주의집중으로 없어지는 번뇌.

(5) āsavā parivajjanā pahātabbā 회피함으로 없애는 번뇌.

(6) āsavā vinodanā pahātabbā 제거·끊음으로 없애는 번뇌.

(7) āsavā bhāvanā pahātabbā 수행의 반복으로 없애는 번뇌.

이와 같이 번뇌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7가지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번뇌를 다스리는 것이 간단하지 않은 만큼 방법도 다양하게 동원해야 합니다.

 

(1) dassana(닷사나) 관찰의 장

"교육이나 예의범절을 받지 않은 사람은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을 생각하고, 고찰해야 할 것은 고찰하지 않는다. 속세의 사람들은 훈련을 받고 있지 않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잘 훈련되지 않았으므로 별것도 아닌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번뇌가 일어나서 망상해선 안 되는 것을 망상하고, 일어난 번뇌가 점점 강해져서 성장하고 팽창해 나갑니다. 일어난 번뇌가 더욱 강해지는 것은 좋지 않는데 망상하면 아래와 같은 것이 일어납니다.

 

「망상의 결과」일어나는 올바르지 않은 생각.

첫째. kāmāsava(까마사와) : 오욕락(색·성·향·미·촉)에 대한 집착. 육체, 쾌락, 이러한 것에 의존합니다.

둘째. bhavāsava(바와사와) : 살아 나가는 것에 대한 집착. 영원한 극락정토, 천국 등에 의존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불한다고 하는 사고와  사람이 죽으면 극락정토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셋째. avijjāsava(아윗자-사와) : 무명·존재의 실체를 모르게 되어 짐. 쓸모없는 것을 망상하는 것이 철학자가 관념에 빠진 것과 같음.

생각이 올바르지 않은 경우 이상의 3가지에 속하는 수많은 번뇌가 일어납니다.

 

「과거에 대한 생각」

一 내가 과거에 존재했는가? 

二 내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는가? 

三 과거에 나는 어떤 존재였는가? 어떤 형태로 어떤 것으로 있었는지 생각한다. 실질적인 일. 

四 과거에 어떻게 있었는가? 과거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살았는지 생각한다. 기능적인 일.

五 과거에 어떻게 되었는가? 만약 나에게 과거가 있었다면 그 과거에서 어떤 상태로 다시 태어났는가 생각한다.

 

「미래에 대한 생각」

六 내가 미래에 존재하는가?

七 내가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가?

八 미래에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 천국이나 극락의 상태가 되는가 아니면 다른 상태로 되는가 생각한다.

九 미래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약 내가 죽고 나서 천국에 간다면 어떤 신체를 지니게 되고, 어떤 즐거움이 있는 것인가 생각한다. 많은 종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금지하고 있습니다.

十 미래에 어떠한 상태가 되는 것인가? 극락이나 천국, 파라다이스에서 어떻게 있다가 죽고나서 어떻게 되는지 생각한다.

 

「현재에 대한 생각」

十一 지금 내가 존재하는가?

十二 지금 내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것은 철학자가 아니면 생각하지 않는다.

十三 나의 존재는 지금「무엇인가」생각한다.

十四 나의 존재는 어떠한 살아가고 있는가?

十五 지금 자신의 존재는 죽어서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무지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항목이 15가지가 있습니다.

불교는 그것들은 생각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그것은 어리석다고 합니다. 어째서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지 무슨 증거가 있는 것인가?

 

 사악한 견해 

공부를 잘하여 감격하면 뇌의 화학물질이 바뀝니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무엇인가 자극이 들어가면 뇌가 반응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러나 설령 화학물질을 주사했다고 해도 인격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격이 나쁜 사람들,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을 주사 한방으로 영구적으로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 죽을 때까지 주사하지 않는다면 의학적으로 인격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현상을 일으킬 뿐입니다.

 

역으로 마음을 증장시키면 원인을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머릿속으로 번뇌가 들끓어 나쁜 물질이 많이 일어나 신체는 망가지고 심장이 나빠지기도 합니다. 그 경우 마음을 고치면 뇌가 엔드로핀 등의 예쁜 물질을 만들어 냅니다. 그로인해 신체도 나아집니다.

대부분 현재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고정된 자아·자신을 시간의 축으로 두어 망상합니다. 이런 생각의 회전에 종점은 없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망상입니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가 있다」라고 하는 사람에게 「나는 어제 아내와 싸움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싸우지 않고 아내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질문하면 대답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불교에 물어 봐야 합니다. 어떠한 질문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불교는 대답합니다. 철학자·사상가뿐만 아니라 생명은 우선 자신의 존재를 신경씁니다. 그 항목을 생각하는 것은 철학자만이 아니라, 원시시대·석기시대의 사람들도 생각합니다. 거기로부터 모든 마음의 더러움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생각을 거듭해보니 역시 최초로 인간을 만든 것은 신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종착점이 없기 때문에 신은 누가 만들었을까 생각해보니 「신이 신을 만들었다」라고 생각해 보기도 하고, 자신은 「신의 아들이다」라고 생각해 보기도 하고, 「나는 신이다」라고 생각도 해봅니다. 이렇게 되면 번뇌에 물든 환자가 됩니다.

또한 나는 확실히 자아·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자아·영혼 등이 존재할 리가 없다. 이것은 불교의 무아가 아닙니다. 다만 유·무의 반대일 뿐입니다. 어느 쪽이든 허무주의적인 입장입니다.

이와 같은 이상의 15항목은 생각해서는 안 되는 망상. 망상으로 저속해지는 「사악한 견해」라고 합니다.

 

「자아」로 「자아」를 확인한다고 하면 조금 까다롭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느 철학자나 사악한 견해자는 그렇게들 생각합니다.

즉 「자아」로 「자아가 아닌 것」을 발견한다는 논리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 이것은 자아가 아닙니다. 산, 이것도 자아가 아닙니다. 강, 이것도 자아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여 나는 그것들이 「자아」가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나에게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아」가 아닌 것을 곧바로 압니다. 나에게 「자아가 있다」그러므로 나는 「자아는 있는 것, 자아는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영원불멸의 실체가 있기 때문에, 영원불멸의 실체를 인식한다. 이것은 사악한 견해입니다.

다시 말해 사악한 견해자는 이렇게 비유를 듭니다.

생선구이의 일부를 입에 넣고 씹었다. 거기서 무엇인가가 걸린다. 그것이 뼈라고 발견한다. 어떻게 발견했는가! 부드러운 살코기 덕분에 씹을 수 없는 딱딱한 뼈를 발견했다. 또 다른 예로 뼈가 붙어있는 닭꼬치를 입에 넣었다. 반대로 뼈는 씹을 수 없기 때문에 입 안에서 뼈가 아닌 것을 선택해 먹는다.

 

뼈가 「자아」라고 하면, 뼈에 의지해 뼈가 아닌 것인 「자아가 아닌 것」을 발견한다.

「자아」로 「자아가 아닌 것」을 발견한다. 이른바 「차이」로 발견한다.

긴지, 짧은가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비교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서 긴 것, 짧은 것을 발견한 것이 된다.

그처럼 자아·영혼을 발견한다는 논리입니다. 모두 사악한 견해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인도에는 「비자아」로 「자아」를 인식한다는 종교가 여럿 있는데 우파니샤드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5 종류(유신견· 변집견· 사견· 견취견· 계금취견)의 사악한 견해는 저속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5종류는 말하자면 자아·영혼·실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로인해 집착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느끼는·선악 행위를 하는·선악 행위의 과보를 받는·

「나」 「실체」가 상주한다, 영원하다, 불멸이다, 불변인 「자아」가 윤회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인도 힌두교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힌두교·바라문교 성전 어디에라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부처님 시대의 베다 조금 뒤에 생겨난 우파니샤드의 시대에 나타난 사악한 견해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영혼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보이거나·들리거나·느끼거나 하는 다양한 일을 느낀다. 그것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선악을 하고 있다. 선악을 하고 있는 것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행위에 의해서 나는 고락의 결과를 받고 있다. 선악의 결과로서 불행하게 되거나 행복하게 되거나 하는데 그것은 영혼이 그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영혼은 영원하고, 불멸이며, 죽어도 윤회한다고 하는 생각. 현재의 힌두교도 이것입니다. 이것이 사악한 견해입니다. 사고를 잘못한 사람은 이와 같이 「사악한 견해」라고 하는 사막에서 방황합니다.

「사악한 견해」라고 하는 집착이 있는 한 해탈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경전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만큼 주의해야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러한 사악한 견해로 저속해지면 물도 없는 사막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디를 바라봐도 사막이고, 태양은 바로 위에서 불타고 있어서, 어디로 가도 도중에 죽는다. 해탈할 수 없다. 이 사악한 견해가 있는 한 여러분은 끝입니다.」

그러니까「자아」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극단적인 사악한 견해로 인과 법칙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견해

여기서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사는 것은 「둑카-근심, 불만족」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관찰한다. 사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에 관찰하십시오.

사는 것은 「근심」이라고 있는 그대로 본다. 이러한 원인으로 「근심」이 생기는 것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관찰한다.

아! 이와 같이 괴로움이 일어나고, 이런 일을 했으니까 이와 같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원인을 찾아본다. 그것이 올바른 견해입니다.

부처님은 구체적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움이 되겠지요. 이와 같이 「근심」이 소멸하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관찰한다. 「근심이 소멸하는 길」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관찰한다는 것은 팔정도입니다. 여러분은 팔정도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정견·정어라든지···

무엇으로 그러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역시 바른 관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말을 하세요. 올바른 행위를 해 주세요. 올바른 생각을 해 주세요···그런 것의 조건은 바른 관찰, 바른 견해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은 없어집니다.

 

예를 들어 장사를 해 돈을 벌고 싶으면 올바른 견해로, 올바른 사유로, 올바른 말로, 올바른 행위로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4개의 사고를 해야만 이치에 맞는 사고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왜 사성제를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면,「둑카-근심, 불만족, 괴로움」은 사실입니다. 진리입니다. 따라서 보편적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시대에라도 올바른 진리입니다. 사실에 근거해 어떤 분이 생각해도 도달하는 결론입니다. 누가 조사해도 이 대답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은 근심이다. 갈애·집착에 의해 괴로움이 태어난다. 갈애로부터 멀어지면 지혜가 방문한다.’

정견·정사·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 부처님의 8가지 진리,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올바른 고찰의 결과 격퇴하는 3개의 번뇌             

올바르지 않은 고찰로 여러 가지 함정에 빠져 저속해지므로 「사악한 견해」라고 합니다.

그럼 올바른 관찰을 하면 어떤 결과가 있는가하면 아래의 3가지 번뇌는 완전하게 격퇴됩니다.

sakkāya-diṭṭhi (유신견)이 사라집니다.

실체로서 변함없는 「자신」이라고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그 번뇌는 무섭습니다. 이것이 공격당해 떨어뜨려집니다.

②vicikicch ā (의심)이 사라집니다.  

시간·존재라고 하는 의문을 풀어 시간·존재란 무엇인가를 분명히 이해합니다. 세상에서는 이 「시간과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여 착각을 하는데 시간과 존재는 없습니다. 사물은 원인에 의해 변화해 나갈 뿐입니다.

그래서 인과 법칙을 알 수 있어 의심이 없어집니다.

시간과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 변화해 나가는 일시적인 현상인 것을 이해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올바르다고 압니다. 올바른 관찰로.

sīlabbata-parāmāsa (계금취견)이 사라집니다.

의식·의례 등이 무의미하고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무슨 의식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상의 3가지 번뇌를 격퇴하여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한 것을 「안다」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다만 들었을 뿐·기억한 것 만이므로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숙제·연구·탐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사실을 발견해 이해하면 납득하고 경험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도 스스로 이해해 올바르다고 납득하면 그것은 깨달음이 됩니다. 화학, 과학에 실험이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실험하여 납득하면 「아, 과연 그렇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그처럼 부처님의 진리·무상의 진리를 각각 실험하고 확인하여 납득하시기 바랍니다. 납득하면 3가지 번뇌가 사라집니다.

 

 깨닫는 경지

이상 말한 3가지 번뇌는 4부류 성인의 깨달음의 과정의 제1단계에서 끊어지고 없어지는 번뇌입니다.

1510가지가 넘는 수많은 번뇌 가운데 3가지만 없어지는 것이 무슨 의미이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번뇌의 기본적인 카테고리에서 1가지가 없어지면 상당히 많은 번뇌가 없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공포」가 없어진다고 하면, 재산이 없어지는·병이 드는·동물에 습격당하는 등의 공포도 함께 없어집니다. 이와 같이 많은 공포가 없어져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성자의 일원이며 「예류과」라고 말합니다.

진리를 관찰하는 공부만으로도 이런 경지에 이릅니다. 명상하지 않아도.

 

이 제1단계 성인의 경지에 이르면 길어도 인간계에 7번 윤회하는 것으로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보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가 없는 삶의 방법을 살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도 겨우 7회인데 「예류과」에 이르면 인간계에 잘 태어나질 않습니다. 이 세상에 데한 호기심이 거의 없기에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따금 인간으로 태어나도 이해 능력이 뛰어난 굉장한 인물이 됩니다.

이와 같이 진리를 관찰하여 이해하는 것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savara(상와라) 제어의 장

번뇌라는 것으로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을 불교는 과학적이고 심리학적으로 정밀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savara는 제어에 의해 퇴치되는 번뇌. 방어, 보호한다고 하는 기능인데 나는 일단 제어라는 말을 사용하겠습니다.

「 제어에 의해 퇴치하는 번뇌는 무엇인가! 비구는 바른 관찰에 의해 안근을 제어한다. 안근을 제어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번뇌의 해로움을 알아, 이 번뇌가 일어날 때 안근을 제어하면 일어나지 않느니라.」

부처님은 눈을 제어하라고 하십니다. 제어하지 않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번뇌가, 제어하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눈을 관리하지 않으면 눈을 통해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번뇌에 대해 앞 문장에서 빨리어로 2개의 단어가 나왔는데,

vighāta(위가-)라고 하는 번뇌. ‘고뇌, 정말로 자기를 파괴한다고 하는 번입니다. pariḷāha(빠릴라-)라고 하는 번뇌. ‘번뇌의 열, 고민하는 처지가 되는 번뇌입니다.

단순한 눈으로 인해 우리는 자기 파괴가 됩니다. 혹은 이제 회복할 수가 없을 정도로 고민하는 처지가 됩니다. 원인은 눈입니다.

이 경전(sabbasavara sutta)에서는 6가지 뿌리의 제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여섯 뿌리라고 하면, 안근·이근·비근·설근·신근·의(법)근이라는 불교의 여섯 가지 근본의 하나입니다.

이 경우의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한 사물, 감정, 개념 등의 일을 말합니다.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6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이 구멍으로부터 6 종류의 정보가 비집고 들어옵니다.

 

6뿌리, 빨리어로 뿌리는 indriya(인드리야)라고 말합니다. 의미는 작업장, 활동장소입니다. 한자로는 근(根)이라고 합니다.

생명이 살아간다는 활동은 이 6개의 인드리야로 되어있습니다.

눈이라고 하는 작업장, 귀라고 하는 작업장, 몸이라고 하는 작업장(피부의 감각) 등이 있어 그 쪽에서 「살아 있다」라는 일을 합니다.

나라든지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이와 같은 6개의 작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개 1개를 보면 각각 다른 작업장으로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번뇌가 일어납니다.

이런 번뇌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종교와 비교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살아 있는 생명·존재라고 하는 기능을 신비적인 개념을 버려버리고 구체적인 기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라고 하는 개념은 어떤 종교에서도 있습니다. 크리스트교 등의 신을 신앙하는 종교에서는 「원죄」라고 말하면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 종교에서는 「죄」란 무엇인가하면 악마의 유혹, 제삼자의 활약이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설명은 구체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만 태어났을 뿐인데 태어나자마자 「이놈은 선천적으로 죄인이다」라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다른 분들은 믿을지 모르겠지만 신이 만들고 창조한 인간이 처음부터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이므로, 무엇 때문에 신은 죄로 오염된 것들을 자꾸 만들어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잘못 만들어 죄를 지은 실패한 것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다음부터는 실패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은 것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인간도 할 수 있는 것을 신은 하질 못하는 것인가요?

믿음이 있는 분들은 이런 것을 신앙할지 모르겠지만 불교에서는 논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교가 다른 점은 뭐든지 구체적으로 보고, 해부해 보고, 분석해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분석해 보면 산다는 것은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작업장이 6개가 있는데 이 6개의 일하는 것을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작업장 쪽에서 「죄」가 일어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즉 눈으로 여러 가지를 보면 욕구나 분노가 일어나 머리가 혼란하다든지, 다만 귀로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아니면 눈으로 보았을 뿐인데 화를 내어 살인까지 하여 죄를 짓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누군가 고의적으로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려 우리는 거기에 동조하여 머리로 생각해보고 역시 전쟁은 해야 한다고 전쟁을 찬성했을 경우는 직접 참가하지 않아도 살인의 죄에 오염되고 맙니다. 또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속인 사람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보고 기쁘게 생각하면 사람이 살해당하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가령 합법적으로 사형당해도 살인은 잔인하기 때문에 그 죄가 기뻐한 이쪽으로도 들어옵니다. 자신과는 관계없는데 다만 소식을 들었을 뿐인데 그 죄인은 나쁜 녀석이라고 생각하면 죄가 생깁니다.

가끔 재판관에게는 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데이터를 조사하여 이 경우는 유죄이기에 사형을 선고했다고 해도 그 선고에 감정이 비집고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청하는 우리는 제발이라고 말하면 귀를 통해 죄를 범하거나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구체적으로 안·이·비·설 등을 지키지 않는 것만으로 내면적으로 더러워지고 혼란해져 정신적으로 병이 생기게 되니까 이 6가지 문을 제어해 주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5가지 들어가는 정보는 뜻으로 들어가 마음을 더럽히고 혼란시킵니다. 안·이·비 등에서 들어가는 5종류의 정보를 마음(뜻)으로 받습니다. 눈에서는 보았을 뿐, 아무것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이 프린트물을 본 것만으로는 문자를 읽을 수 없습니다. 문자가 되는 것은 마음속에서 문자를 합성해야 합니다. 한층 더 식에서 의미 있어 집니다. 다음에 그 의미로부터 여러 가지 감정까지 만듭니다. 욕구를 만드는 일도, 분노를 만드는 일도, 혼란스러운 일도 이렇게 간단합니다. 찰라 간에 단순한 빛을 본 것만으로 형태로서 눈은 받아들입니다.

 

뜻에 들어가면 해석하고 의미를 붙여서 감정으로 처리합니다. 그리고 벌써 마음은 병들어 버립니다.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어 정보가 없어도 우리 머릿속에서 빙빙 사고를 회전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눈으로 아름다운 것이든 추악한 것이든 무엇인가를 보면 반응하게 됩니다. 그것이 번뇌입니다. 마음은 더러워졌습니다. 집에 돌아가고 나서도 그 아름답거나 추악한 것에 생각이 붙들려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정보는 끝나고 없는데도 마음만은 마음대로 움직여 당사자를 곤란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순식간에 사람이 전철에 치여 죽었다고 합시다.

극히 순간의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하루 종일 두려워하고 마음은 혼란스러워 불면증이 됩니다. 전철을 볼 때마다 무서워서 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러한 정신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은 많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그 정보가 오는 것입니까! 의식이 그 개념을 고정시켜서 돌립니다. 돌려 번뇌를 만듭니다. 그래서 굳이 나쁜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뜻 중에서 개념이 회전하니까 또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이렇게 살아 있으면 마음은 항상 더러워집니다. 감각이 있으니까 항상 번뇌가 일어납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추천하는 것은 안·이·비·설·신·의를 꼭 지켜라는 것입니다. 지킨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여도 다만 보일 뿐으로, 욕구를 만들거나 화내거나 하면 안 됩니다. 안은 더러워지지 않게 하겠어 라고 제어해야 합니다.

 

바른 관찰에 의해 6뿌리를 제어하면 지금 순간에 마음은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지금 죄를 범하지 않고, 지금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면 올바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 우선 지금 마음을 더러움에 물들지 않게, 지금 화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장래라는 것은 구체성과 실효성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일생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 이렇게 말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 현재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 만큼만 기억해 둡니다.

「지금」이라고 하는 것이 일생이 됩니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면 스트레스입니다. 지옥을 본 적도 없는데 무서워집니다. 올바르게 마음을 훈련하는 경우는 그러한 스트레스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성을 가지고 마음을 밝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필요한 일을 생각하지 말고, 마음 편하고 밝은 기분으로, 우선 「지금 만」이라고 살아가면 무지도 줄어들어 갑니다. 지금의 순간에 마음을 제어하는 방법입니다.

실제 번뇌를 퇴치하려고 해 보면 지극히 간단합니다. 번뇌는 탐·진·치의 3개 카테고리로 나눕니다.

대개 제어하는 경우는 탐·진을 관리합니다. 주로 욕구와 분노입니다.

 

(3) āsavā paṭisevanā pahātabbā「실천·수행」으로 없어지는 번뇌

실천하고 따라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그것을 사용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럼 사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① 「衣」

의복입니다. 사용하지 않는 것은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출가자에 대한 의복인 가사를 사용하는 법칙입니다.

의미는 수행자는 지체없이 바른 생각으로 관찰을 해 옷을 사용해야 합니다.

다만 더위나 추위를 막기 위해서, 파리·모기·비바람과 태양열, 곤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더위와 추위를 비롯하여 별로 춥지 않아도 오한이 나거나 신체의 상태가 나빠지거나 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입니다. 또 숲에서 수행할 때 곤충이나 뱀 등의 접촉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기도 하고, 음부 등의 신체를 드러내고 있으면 좋지 않기에 가리고 수행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렇게 심플한 사고로 의복을 입습니다.

그런 의복이 사람의 마음을 더럽힙니다.

부처님의 의복착용 목적 설명과 여러분의 옷에 대한 생각을 비교해 보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더러워져 있는가를.

인간은 왜 옷을 입는 것인가! 옷의 기본적인 기능을 관찰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니까 색깔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되고, 사이즈에 맞게 입어야하고 게다가 메이커를 입지 않으면 큰일나는 것처럼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옷으로부터도 마음이 더러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옷의 기본적인 기능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출가자의 경우는 기본만으로 충분하지만, 재가자들은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 좀 더 넓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모임에 갈 때 여러 가지 화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악세서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옷을 잘 차려입고 그 자리에 참석합니다. 그렇게 해야 기분도 좋고 마음이 편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허세를 부려 다른 사람들보다 잘 보여야지라고 생각하며 정신적으로 괴로움당하고 있는 것은 생각하질 않습니다.

 

② 「食」

음식으로부터도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음식을 먹는 경우는 맛을 즐기기 위해서나 배부르게 먹어 포만감에 취하기 위해 먹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피부미용을 위해서나 보기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해 먹어서도 안 되고, 몸을 살찌워 멋지게 보이게 하기 위해 먹어서도 안 됩니다. 스포츠를 하고 있는 남성의 경우는 근육 증강을 위해서 음식을 먹고, 여성의 경우는 그야말로 다이어트를 위해 음식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건강을 해치지 않기 위해, 수행을 계속하기 위해 이 음식을 먹어 공복감이라는 오래된 느낌을 없애고, 과식이라는 새로운 괴로움을 만들지 않으면서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 편하고 어떤 잘못도 없는 삶의 방식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자가 먹을 때의 마음가짐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따라서 실천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인간은 음식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 음식으로 번뇌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먹는 것도 인간의 마음을 더럽힙니다. 괴로움을 만듭니다. 음식을 위해서 살인도 불사하고 전쟁까지 합니다. 다만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식사의 기본적인 원래 기능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③ 「住」

악마의 유혹으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복·음식·주거, 그러한 곳부터 번뇌가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지체없이 바른 생각으로 관찰을 해 거주처를 사용해야 합니다.

다만 더위나 추위를 막기 위해서, 파리·모기·비바람과 태양열, 곤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계절의 변화로부터 일어나는 위험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고요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거주처를 사용해야 합니다.

명상 수행하는데 좌와구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거주처가 필요한 것입니다. 거주처도 사람의 마음을 더럽혀 괴로움을 만들므로 기본적인 기능을 이해해 사용합니다. 거주처로 인한 번뇌로 마음이 더러워져 괴로워지면 살아가기 힘들게 됩니다.

바른 관찰로 거주처의 기본적인 기능을 이해하여 그렇게 사용을 해야 번뇌에 물들지 않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④ 「藥」

잘 관찰하여 약 등을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병이 나타났다면 부득이할때만 약을 사용합니다. 그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의사가 병이라고 진단하여 스스로도 그것은 자제할 수 없는 상태, 그 때는 약을 사용합니다. 질병으로부터 오는 고통스런 느낌을 벗어나려고 하면서 성내는 해로움을 일으킵니다. 그럴 때 약을 사용해서 건강을 되찾아 진심 등으로부터 벗어나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며 약을 사용하고 그 외에는 멀리해야 합니다. 다만 나타난 병,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목적으론 약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약에 의해도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신체의 건강까지 약해집니다. 병으로 쓰러지거나 신체의 상태가 나빠지거나 하면 정신적으로도 약해집니다. 그래서 좀처럼 집중하기도 힘들고 알아차림도 약해서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 때에 한해서 치료를 하고 병을 고칩니다. 병이 들어도 치료하지 않고 참으며 고행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병이 들면 치료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치가 아니라 인간은 병이 듦과 동시에 정신도 병들게 됩니다. 그런 상태로 수행을 계속하기 어렵기 때문에 빨리 치료를 해서 병을 고쳐야 합니다. 병이 들어도 밝게 있을 수 있는 것은 꽤 수행이 무르익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하고 싶다고 하는 생각도 사람의 마음을 더럽힙니다.

문제는 인간은 병이 걸리지 않고 언제까지나 건강하고 아프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욕구입니다. 이것 또한 큰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불필요한 의학, 불필요한 치료도 있습니다. 신체를 무리하게 발달시키거나 불필요한 체력을 기르거나 하는 의료도 있습니다. 올림픽 등에서 문제가 되는 성장 호르몬을 과용해서 신체를 튼튼하게 하는 것들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은 건강도 해치고 신체기능도 저하됩니다. 그것은 번뇌의 시발점이고 고통의 원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필요하지 않은 의료가 많고 필요한 의료는 적습니다.

 

이 4가지를 끊어도 번뇌는 일어납니다.

먹는 것으로부터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음식을 끊어도 또 번뇌는 일어납니다. 옷을 입으면 격식에 맞게 갖추어 입고 싶어서 마음이 오염되므로 옷을 입지 않아도 번뇌는 일어납니다. 거주처는 필요하지 않다고 거절해 버리고 공터에서 생활해도 번뇌는 일어납니다. 약으로부터 번뇌가 일어난다고 병이 들어도 약은 사용하지 않아도 번뇌는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4가지 의·식·주·약은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교 용어로 「빳짜웩카나, 四俱, 네 가지 함께 의지해야할 것들을 관찰함」이라고 말합니다.

인도에 쟈이나교가 있는데 단식을 많이 합니다. 수행에 들어가면 1주일에 한번 혹은 2주일에 한번만 먹습니다. 먹지 않고 있는 것은 좋지만 공복감은 있습니다. 신체가 나른해지면 의식도 몽롱해집니다. 단식의 결과 일어설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게 된 그것은 분명하게 번뇌입니다. 쟈이나교의 스님들은 또한 옷을 입지 않는 알몸입니다. 그들의 성전에는 욕구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쓰여 있습니다. 옷을 가지면 자신에게 무엇인가 소지품이 있게 되므로 소지품이 있는 것은 집착이니 옷마저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른 진리와 같이 들리겠지요. 그러나 인도의 한 여름과 겨울을 옷도 없이 지낸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괴로울 것입니다. 당연히 괴로움을 맛보겠지요. 따라서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부처님은 이 4가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번뇌 없이 살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적절히 이치에 맞는 생각으로 이 4가지를 받아들여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의·식·주·약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텔레비젼이 필요하다든가 이것저것 말할지 모르지만, 결국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이 4가지 밖에 없습니다. 텔레비젼이 없다고, 컴퓨터가 없다고, 휴대폰이 없다고 죽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휴대폰 그런 것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필요하지 않은데 필요로 하니까 병이 듭니다. 학생들의 휴대폰을 빼앗아 버리면 모두 안절부절못합니다. 그 정도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병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이 4가지입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해하면 우리는 절제를 압니다. 절제를 알면 인생은 손쉽게 고생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압니다.

사기 전에 이것을 사면 나는 편할까! 편리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상의 도구는 쓸데없습니다. 편한가 편리한가, 이것이 기준입니다.

또한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가 아닌가! 수행하는데 없으면 안 되는 것인지, 그로인해 수행생활이 편리하게 되는지를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도덕적으로 바른 길인가, 타락하는 길인가! 가끔 도덕을 무시하기도 하지만 ,불교에서는 도덕적이지 않으면 멈추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격의 향상이 있는가! 없는가! 무엇을 어떤 몸과 마음을 개발시켜도 동시에 자신의 인격이 향상되는지, 그렇지 않은가를 생각합니다.

번뇌가 증가하는가! 줄어드는가! 마음에 있는 번뇌, 나쁜 감정이 증가하는 것은 해선 안 됩니다. 줄어드는 것이라면 해도 괜찮습니다.

평화를 가져오는 길인가! 아닌가! 이것은 대중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화하게 되는지 혼란스럽게 되는지 판단하고,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지 더러워지는지를 판단해야합니다.

이런 기준이 있으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이용함에 방해가 되지 않아 잘 관찰하고 판단하여 번뇌에 물드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āsavā adhivāsanā pahātabbā 「인내력·주의집중」으로 없어지는 번뇌

이것은 인내력, 참는 것으로 퇴치하는 번뇌입니다. 참는 편이 좋습니다.

참지 않으면 번뇌가 일어납니다.

무엇을 참을 것인가! 더위·추위·공복·목의 갈증 등을 참습니다.

예를 들어 눈이 많이 내려 전신주가 부러져 정전이 되었을 때, 아무리 추워도 수리하는 사람들이 악전고투하며 복구할 때까지 참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파리·모기·파충류 등의 방해를 참는 것입니다. 숲에서 생활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신체에 닿거나 물거나하여 신체에 격심한 고통이 있어도 어쩔 수 없으면 참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수행할 때 조금만 다리가 아파도 움직이든지, 조금만 몸이 피곤해지면 수행을 멈추어버립니다.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아침 일찍은 일어날 수 없어 수행할 수 없다, 식사 후는 밥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참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또 참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방, 온갖 험담 등에도 참아야 합니다. 특히 수행자의 경우는 비방이나 모욕,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어리석은 자들로부터 비난받아 왔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태연해야 합니다. 세상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비방·중상·매도 등은 어떤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비난받으면 이것을 인내하지 않고 「받는다」라는 싫은 기분이 됩니다.

신체가 아픈 것만으로도, 이것저것 고민하거나 하면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번뇌가 일어납니다. 심약해지는 것입니다. 추워도, 더워도, 아픔도 그런 것에는 굴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고통, 비방, 중상에 참을 수 없는 것은 위험합니다. 거기에 따라 사람이 낙담하거나 격분하여 죄를 짓게 됩니다.

코란을 화장실에 흘렸다고 해서 이슬람 국가에서 대단한 뉴스가 된일이 있습니다. 바미얀의 불상에 폭탄을 설치하여 파괴해도 별로 큰 소란 일으키지 않는데 말입니다. 불교도는 바미얀 대불은 고고학적 인류의 유산이므로 지키는 편이 좋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열반은 해탈의 의미입니다. 태국의 술집 이름에 열반이라고 있습니다. 여자가 춤추고, 나쁜 행위들을 하기도 합니다. 불교를 비방하기 위해 술집 이름에 「열반」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또 부처님의 모습을 여성의 속옷에 인쇄하여 판 경우도 있었습니다. 불교는 그런 일로 곤란해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일은 무수히 많습니다.

불교는 성전책을 화장실에 떨어뜨린 것만으로 살해하지는 않습니다.

비방을「견딜 수 없다」라고 말하면 마음은 혼란에 빠집니다. 번뇌가 일어납니다. 부처님은 인류의 심리학적인 성격을 파악하여 고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 이 인내의 장입니다.

이성을 가지고 참아야 하는 것은 참는다. 그 뿐입니다.

 

(5) āsavā parivajjanā pahātabbā 「회피함」으로 없어지는 번뇌

회피하는 것으로 퇴치하는 번뇌인데 회피하고 피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즉 피하는 것으로 자기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흉폭한 코끼리나 맹수, 뱀 등은 피해야 합니다.

생명과 신체에 위험한 일을 피한다고 하면 알기 쉽습니다.

부주의로 이러한 것을 만나면 고통 받고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습니다. 사고를 당하면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다음에는 고민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요리하다가 부주의로 화상을 입었다고 합시다. 불쾌한 기분이 됩니다. 그 순간에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위험은 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머니의 부주의로 아이가 도로로 달려 나가 차에 치이면 괴로워하고 번뇌에 휩싸입니다.

부주의인 행위로부터 마음에 들어가는 번뇌는 피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개조심」팻말을 보고도 개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손을 물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한 바보 같은 일에 대해 괴로워합니다.

신체를 다쳤으니 아파서 괴롭고, 바보 같은 행동을 한 자신이 미워 괴롭습니다. 번뇌가 일어나 마음은 더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피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인 가르침입니다.

「위험」을 피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지고 번뇌가 일어납니다.

「회피함」의 두 번째는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함께 수행하는 수행자가 나쁜 부류라고 평가받으면 같이 앉지 않는 것입니다. 이 「앉는다」라고 하는 의미는 함께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디에 앉아서 수행해도 되지만 사람들이 술을 마시거나 노름하는 곳에서 수행을 하면 다른 수행자들은 그것을 비난 합니다. 자신은 술을 마신 것은 아니고 노름한 것도 아니지만.

수행을 할 때 그러한 곳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걸터앉는다는 것은 그 그룹과 사이좋게 지낸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나쁜 친구들과 앉지 않고, 생활하지 않고, 교제하지 않아야 합니다.

즉 자신이 나쁜 일을 하고 있지 않아도 그러한 환경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비난받을 환경과 사람을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판·비난되는 일을 한없이 받으면 결국 기분이 나빠집니다. 초조해집니다.

나는 아무것도 나쁜 짓은 하지 않는데, 나쁜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 뿐인데, 나 자신은 악에 물들지 않는데도 거듭된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생각하게 되고 번뇌는 자꾸만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비난 되지 않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한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6) āsavā vinodanāpahātabbā 「제거·끊음」으로 없애는 번뇌

제거하는 것으로 퇴치하는 번뇌입니다.

무엇을 제거하는가하면 더러워진 생각을 제거합니다. 세상의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나 이 세상 탓으로 내가 나빠졌기 때문에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더러워진 생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제거하는 번뇌란 무엇입니까? 바른 관찰에 의해 마음에 일어난 애욕의 생각을 방치하지 않고 제거하여 끊어버림으로써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합니다.

마음에는 모든 더러움의 생각이 비집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마음은 더러워지기 때문에 빨리 제거해야 하고 찰라의 순간도 놓아두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수행을 할 때는 어떤 욕구의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퇴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거해야할 것으로 1번째는 욕구의 생각, 2번째는 분노의 생각, 3번째는 해를 주는 생각, 4번째는 그 외의 나쁜 생각. 이러한 4종류가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뿐일 때는 곧바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분노」와「해코지 하고 싶다」라는 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닮지 않았습니다. 양쪽 모두 「분노」지만 해코지 하고 싶은 기분은 스스로 분노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나, 신을 위해서 정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전쟁을 하고 사람을 죽입니다.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나라도 아닌데 말입니다. 당당히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코지 해주고 싶다」는 기분인 것입니다. 결국은 테러리스트도 정의고 민주국가도 정의입니다. 엄밀히 보면 이것은 「분노」이지만 해를 주고 싶다고 하는 기분은 어딘지 모르게 나와 남을 속입니다. 종교를 위해서, 신앙을 위해서, 국민의 자유를 위해서라는 속임수로 결과적으로는 생명에 해를 줍니다. 입으로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해를 주는 생각도 미묘하게 분노와는 다릅니다.

 

또 「그외의 나쁜 생각」도 있습니다. 제거해야만 합니다.

생각이나 망상은 마음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에 의해 마음이 더러워지고 불만족과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는 일도 하게 됩니다.

망상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할 때 마음대로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라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괴로워집니다. 그것이 번뇌입니다. 그래서 죄까지 범합니다. 생각의 관리가 중요합니다.

수행을 가르칠 때 자주하는 말이 있습니다. 「망상, 개념은 오물이라고 생각해라」라고. 분명히 자신의 망상, 사고 개념이 오물이라고 생각하면 퇴치할 수 있습니다. 오물을 안고 있는 모습을 좋아할 리는 없기 때문에.

 

(7) āsavā bhāvanā pahātabbā 「수행의 반복」으로 없애는 번뇌

수행의 반복으로 퇴치하는 번뇌입니다.

bh?van?란 명상, 수행이라고 하는 의미와는 다르지만 통상적인 용어가 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 「바-와나-」라고 하는 의미에서는 자신의 인격이나 이해 능력을 향상시킨다, 무지를 찢어버리고 지혜를 계발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와나-란 진화이고 발전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점점 향상시켜 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단순한 명상이 아닙니다. 보다 나은 인격을 향상시키는 것이기에 수행은 출가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무지를 찢는 실천수행」

 

ㅇ 七覺支로 수행은 단번에 진전된다.

 

七覺支는 빨리어로(satta sambojjhaṅgā)라고 합니다. 보짜라는 것은 깨달음, 앙가는 부분. 즉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7개의 부분이 있으며, 그 일곱 개를 완성하면 깨달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통의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해가면 일상적으로는 마음이 깨끗해져서 분별력 있는 성격이 되는 등 그것 나름의 이익이 많습니다만 부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탈 세속적인 수준내지는 초월적 깨달음의 경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보통의 수행법으로는 마음이 좀처럼 진전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들 마음은 언제나 욕심에 쌓여 쾌락을 쫓기 때문입니다. 쾌락이라고 해도 이런 경우는 자극으로 해석해야 하지만 그러한 자극을 사람은 누구나 늘 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눈, 코, 귀, 입, 신체로부터 다양한 자극을 받는 것뿐인데 그 자극으로부터 다시 마음속에도 자극을 만들고 있은 것입니다. 이 자극이 들어오면 마음은 의식이라는 파동을 만듭니다. 그것을 우리는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육체 중에서 마음의 작용이 정지해 버리면 그것은 죽는다는 것이 됩니다. 인간이 간단히 죽지 않는 것은 마음이 한 순간도 정지하지 않고 부단히 파동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물결로, 파동으로 진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진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마음에 외부로부터의 어떤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가 두절되면 마음의 작용 또한 멈춰버립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무언가에 의해 마음은 자극 받습니다. 그 자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다시 우리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무언가 들은 것만으로도, 본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귀를 통해 무언가 들어도 같은 식으로 자극의 물결이 계속되어 갑니다. 그런 흐름은 여간해서 멈춰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눈이랑 귀는 활동하고 있지 않은 시간이 별로 없으므로 그렇습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 뜨고 있는 동안은 보이는 것이고, 보는 동안은 자극이 멈추어 지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이런 상태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도 않고 혹은 먹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인간에게는 간혹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 입니다. 그 때 마음은 자극이 멈추어서 고요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음은 결코 고요하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제외한 5감의 기능이 가령 멈추었다고 해도 마음에는 망상이란 망상은 다 생깁니다. 망상이 생겨서 머릿속은 그 망상의 자극으로 파동이 꽉 차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강한 자극을 추구하는 사람은 무서운 망상을 하며,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그 나름대로 조용한 망상을 하거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 마음은 언제 어떤 경우든 누구도 그 기능을 정지시킬 수 없습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자극의 파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ㅇ 인간은 이 방법으로 진화한다.

마음에는 이러한 기능이 깔려있으므로 예를 들어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해도 자극을 받고 있는 이 순환으로부터 탈출하기란 대단히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물고기가 물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서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그 물고기가 물속으로부터 탈출하여 육상에서 생활하려 든다면 이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일이 됩니다.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 되고 맙니다. 물고기가 땅에서 생활할 수 있으려면 물고기가 성장하고 또 성장하고 성장한 결과 진화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물고기가 물고기로 있는 한은 땅에서의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들 인간도 보통의 생명으로 6감을 자극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므로 그것을 해가면서 해탈을 체험하기란 물고기의 진화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인간을 진화시키는 것입니다. 매우 빠르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위빳사나의 지혜가 생겨나게 되면 인간은 인간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엄격한 수련 과정이 있겠지만 그 시련을 뛰어 넘으면 세상의 일반적 상식이라든지 결정이라든지 그런 것들의 무의미함을 잘 알게 되어 거기에서부터 점차 탈 세속적인 경지의 마음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대략 말하자면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메커니즘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메키니즘이지만 여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앞서 위빳사나를 해도 어렵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실은 이런 얘기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할 때 스스로 꼭 진화해보자는 의욕도 없이 구태의연하게 새로운 견해나 사고도 전혀 없이 그저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그것은 진화가 없는 자신이 갖고 있는 대로의 개념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들어 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측면에서 사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불교의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해서 위빳사나 수행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의 가르침 없이 수행을 하면 같은 윤회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저 단순히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결과도 없는가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을 하면 하는 만큼 그 사람의 마음은 성장하여 훌륭한 성격으로 변화해 가며 인생의 일반적 괴로움 등은 수행을 모르는 사람에 비교하여 훨씬 쉽게 소멸되어 갑니다. 위빳사나 수행법에는 그런 이점이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해탈을 진짜 목적으로 하여 마음의 진짜 성장을 원하여 수행을 실천한다면 역시 法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편이 우리들 윤회 속에 있는 생명으로서 생명의 진화의 방법, 윤회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진화 과정을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이 칠각지가 있습니다.

일곱 개가 갖추어지면 위빳사나는 각 단계 단계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갑니다. 그렇다면 칠각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위빳사나를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하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칠각지는 이해해도 좋고 이해하지 못해도 특별히 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도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 칠각지에 대한 설명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진전되어 있는지 혹은 그다지 진전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어디에서 균형을 잃어 버렸는지 등을 점검하려고 할 경우에 이 칠각지는 매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마음대로 생각하여 점검해 보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교정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칠각지라는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① 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구나!---念覺支

첫번째로 염각지라고 하여 빨리어로는 (sati sambojjhaga)입니다. 삼봇장가 의 삼봇자라는 것은 반야심경에도 삼막삼보리라고 하는 말이 자주 나오듯이 이른바 정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깨닫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깨닫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사띠입니다. 念이라고 불리는 알아차림을 이르는 말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우선 알아차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다 알고 있겠지만 사띠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은 실천하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띠를 실천해도 아직 부족하다, 아직 부족하다 하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단지 알아차리는 일 뿐이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알아차리면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일 처음에 念을 시작할 때는 간단히 걷는 것, 앉는 것, 먹는 것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대충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왼발을 들어올림, 내려놓음 이라든가 오른 발을 들어올림, 내려놓음 이라든가 간단한 신체의 움직임을 알아차려 갑니다. 앉아 있음 이라든가 누워 있음 이라든가 먹고 있음 라든가 생각하고 있음 등 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현재의 상태를 우선 어림잡아 가능한 한 관찰해 갑니다.

 

그것이 사띠이며 첫번째 覺支입니다. 그리고 나서 서서히 명확하게, 보다 정확하게, 보다 정밀하고 세밀하게 사띠를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걷는 것부터 말하면 예를 들어 왼발이라고 말할 때, 왼발에 의식을 완전히 가지고 가 왼발을 의식합니다. 그 다음에 들어올림이라고 명칭을 붙이며 듭니다. 들어 올릴 때는 들어 올리는 동작을 완전히 인식합니다. 나아감이라고 말하고 나아가는 일을 완전히 인식합니다. 내려놓음이라고 내릴 때도 인식합니다. 그 다음에 닿음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리고 나서 오른발이라고 명칭을 붙이고 의식을 완전히 오른발로 가지고 갑니다. 따라서 그런 경우는 신체의 각 부분에 의식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수행은 흔히 보통의 수행을 몇 달 간 했다는 사람이라도 종래의 방법은 우선 잊어버리고 정해진 시간, 정해진 수행 시간을 짜서 천천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도 매우 엄밀히. 처음 부분이 잘 안 되는 사람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여간 왼발에 대해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왼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인 것입니다.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몰라도 좋습니다. 머리가 어디에 있느냐고 누가 물으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상관없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다른 일들은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느낌입니다. 왼발만을 의식하여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번에는 오른발을 명확히 의식하여 오른발하고 명칭을 붙이며 오른발로 의식 에너지를 가지고 옵니다. 그렇게 해 나가는 동안에 점차 스스로 이해하게 됩니다. 속을 들여다보듯 알게 됩니다. 의식이라는 엄청난 에너지가 오른발로 가는 감각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 때 들어올림이라고 하며 들어 올립니다. 들어 올릴 때도 대단히 의식합니다. 들어 올리고나서 나아감, 내려놓음이라고 의식하면서 나아가고 내려놓음을 의식합니다.

 

이것은 힘든 일입니다. 한쪽 발을 움직이는 동작은 상당히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힘든 일인 줄을 모르고 있다면 아직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기 힘들다고 느낄 만큼 이 수행법은 까다롭고 벅찬 일이라고 깨닫게 되면 의식을 발에 확실히 매어 두려고 상당히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충 하고 있으면 간단하다, 단순하구나라고 생각하여 그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이라는 식으로 해 버립니다.

 

거기까지 가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성격이 바르게 바뀌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직 세속적인 단계의 가치입니다. 장사가 잘 된다든가 여러 가지 새로운 영감이 떠오른다든가 신체의 건강이 좋아졌다던가 인간관계가 좋아졌다던가 등 여러 가지 득이 되는 일이 나타나지만 그러한 것은 다만 세속적인 이익이며 그런 면을 불교에서는 그렇게 달가운 이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어버리면 그런 것은 모두 끝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돈을 모았어도 죽을 때는 모두 이 세상에 두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세속적인 이익이며 세속적 이익을 뛰어 넘는 이익을 목표로 하는 경우는 꼼꼼히 매우 힘든 일을 해야만 합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근육이 힘들다는 것이 아닙니다. 근육은 그다지 힘들지 않습니다. 근육을 피로하게 하는 수행은 방법 자체가 틀린 것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근육이 피로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② 지식의 세계로부터 체험의 세계로--- 택법각지

제대로 해나가고 있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택법각지라는 두 번째 단계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빨리어로 말하면 (dhammvicaya sambojjhaga)입니다.

대체로 첫 번째가 잘 되어 가면 두 번째가 나타나는 그런 시스템입니다.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른 누구의 가르침보다도 대단히 뛰어난 것은 바로 그런 점입니다. 일부러 누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 길로 나아가도록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법칙이므로 그렇습니다. 법칙이란 누가 말하던 말하지 않던 상관없이 법칙 그대로만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택법각지란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은 사띠를 가지고 현상을 확인하지요. 팽창이라는 현상, 수축이라는 현상, 걷는다는 현상, 앉는다는 현상, 본다는 것, 듣는다는 것, 신체의 움직임, 마음의 움직임, 그것은 모두 여러 가지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보고 있다면,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은 눈을 뜨고 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으며, 빛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며, 보고 싶다는 기분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며, 보이는 대상이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이고 있다는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의 원인이라도 사라지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상이 사라지면 보이지 않으며, 눈을 감아 버리면 보이지 않으며, 그 때는 보고 있다는 의식도, 본 것에 의해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띠를 가지고 그런 다양한 원인에 의해 생긴 현상, 온갖 현상을 확인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듯 언제나 물리도록 확인하고 또 확인해 가다 보면 그때까지는 온통 사띠 뿐으로 여유는커녕 걷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던 자신의 마음에 어떤 여유가 생깁니다. 사실은 만일 정성스럽게 사띠를 가지고 걸으려고 하면 걷지도 못하게 될 만큼 까다롭습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될 정도로, 사띠를 해서 명칭을 붙여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잘 견디면 사띠를 숙달되게 할 수 있게 되며 그 때 여유도 나옵니다. 그러면 쉽게 팽창 수축이라는 일어남, 사라짐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발의 움직임을 올림, 옮김, 내림과 동시에 신체의 움직임도 쉽게 확인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시점부터는 현상을 보다 명확히 봅니다. 이 택법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확인해 온 그 현상을 이번에는 보다 명확히 보는 것이 됩니다. 이른바 분석해서 보는 것입니다.

 

분석이라고 말해도 일부러 분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해 둡니다. 분석에 신경이 쓰이면 또 망상의 세계로 빠지고 지금까지 자신이 공부해 왔던 지식으로 해보려고 하므로. 그런 것은 현실이 아니고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이므로 알기 쉽게 말하면 허구의 세계인 것입니다.

몸속에 위가 있다고 말해도 의사가 그렇게 말하므로 믿고 있을 뿐 스스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은 배탈이 나면 배가 아프다는 정도는 알고 있지만 결국 그 때도 위가 아픈지 위의 근육이 아픈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말하면 배가 아프다 라든가 위의 근육이 마비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일부러 분석을 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사띠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무언지 모르게 분석적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별안간 아아! 과연 이런 것이구나! 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명상하고 있는데 소리가 귀에 들립니다. 신경이 쓰이는 경우는 소리, 소리, 라고 확인해 갑니다. 간혹 소리에 대하여 스스로 마음에 파동을 만들어 버립니다. 소리를 듣고 무언가를 판단해 버리므로 반드시 거기에는 마음의 진동이 일어납니다. 저것은 새소리라든가 저것은 분노의 소리라든가 저것은 뭐라고 사람이 지껄이고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것에 의해 여러 가지 망상이 생길 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명이 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식으로 소리를 듣고 있는 경우, 좌선 하고 있을 때 사띠가 배의 팽창과 수축에 따라 일어남, 사라짐을 잘 하여 통일되어 있으면 그 때에 같은 소리가 다음에 나타나도, 스스로 희미하게 소리라는 것을 막연히 알 수는 있어도 마음은 거기까지 가지 않습니다. 귀에 들어 온 것은 들어 온 것이지만 결국 듣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이 자신이 일어남, 사라짐으로 몰입해 있습니다.

그 때 순간적으로 사물의 사실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아! 과연 들으려고 의식을 기울이면 들린다 라고. 즉 들으려고 하는 의식이 있으면 들립니다. 들으려고 하는 의식이 있으므로 비로소 들리며, 듣게 되면 들은 대로 분노 질투 욕심 따위의 이런 저런 감정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 들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소리가 거기에 있든 없든 특별히 마음에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파동이 생기지 않습니다.

 

ㅇ 당신을 움직이고 있는 의식의 정체

경행의 경우도 역시 우리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기계적인 오토매틱 시스템으로, 자동적으로 우리들 인간은 단지 다리를 움직여서 걷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히 의식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는 경우는 올림이라는 의식이 작용하지 않으면 다리를 들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보통 사람은 절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쉽게 무의식적으로 걷고 있다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무의식적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한발 한 발 올리고 싶다! 라는 의식이 있어서 다리가 올라갑니다. 정성스럽고 신중하게 다리에 의식을 불어 넣었으나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왼발을 내림이라고 말해도 간혹 머리가 멍해져서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일이냐 하면 마음이 피로해 있을 수도 있고 왼발에 의식이 가 있지 않은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가 있지 않기 때문에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지혜라는 기능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발을 의식하지 않아도 들어 올릴 수 있잖아? 라고 그들에게서는 우선 말이 튀어 나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의 세계이며 이론을 가지고 하는 설명이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이지 지혜는 아닙니다. 말이 튀어 나오면 이제 끝입니다. 말로서 그런 지혜가 튀어나오면 이제는 그저 개념일 뿐이므로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체험에서 나옵니다. 아니 오른발이 올라가지 않잖아? 라고, 그래서 걷지 못하는 것이라고 알아차리게 됩니다. 거기서 오른발을 올림이라고 의식이 가면 쉽게 오른발이 가벼워지며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럴 때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때 그 사람에게는 오른발 올림이라는 기능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가에 대한 흐름이 분석적으로 보이게 되며, 의식과 신체의 움직임의 관계가 보이게 됩니다. 이것도 하나의 인과관계입니다. 이것은 수행이 물 흐르듯이 잘 진행될 때에 한합니다. 어딘가의 벽에 부딪쳐 정지해 있을 때는 그런 것을 모릅니다.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의 명상이 대단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 그런 일을 언뜻 언뜻 알아차리게 됩니다. 다리가 올라가는 것만 해도, 과연 의식이 있어 다리가 움직인다, 의식이 없다면 걷는다는 현상은 거기에 없다고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으로 알게 되면 세상의 사물에 대해서도 상당히 마음이 변화합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 하자면 사람이 화가 났을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일반인의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그 화내는 장면은 원인이 있으므로 당연하지 않느냐고 생각하겠지요. 그 사람은 화낼 만 하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사람은 제 맘대로 화내고 싶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의식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말했다, 그것을 다른 사람이 들었다, 들은 사람이 그에 대해 화를 냈다고 쳐봅시다. 같은 그 사람이지만 화를 낼 수도 있고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명랑하게 웃을 수도 있는 테고.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어떤 사람이 내게 당신은 정말로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고 칩시다. 거기에서 나라면 벌컥 화를 내는 일도 가능하며, 아 그렇습니까? 라고 그 말을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 싱글싱글 웃을 수도 있어 다양하게 자신의 의식으로 컨트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고 세상에서는 말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 따위의 일들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본인의 의식에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욕망이라는 기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화내고 싶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고 싶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사회 구조가 엄청나게 복잡하게 되어 까다롭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인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의식의 기능, 마음의 기능이 명확히 보이게 됩니다. 그것도 택법각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택법각지라고 하는 지혜는 사띠를 실천하면 반드시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택법각지에 매달려 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매달려 본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 알아차리는 것에 있어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라고 질문 해도 이것은 다양해서 언제나 개인차가 있기 마련입니다. 지금 내가 말한 지혜는 모두에게 있어 다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각 개인이 알아차리는 일, 그 알아차림의 내용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변합니다. 그것을 나는 어떤 한 예로서의 알아차림으로 설명했습니다. 일어나는 일로, 사물을 보는 일로, 걷는 일로,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각각 다른 일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르다는 것, 그것을 불설에서는 여기저기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소리가 귀에 들어와서 자신이 화를 냈습니다. 역시 그 사람의 소리가 들어와서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귀에 들린다, 그 때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같은 소리에 대해 화를 내기도 하고 화를 내지 않기도 하고 하는 것이 되지요. 예를 들면 당신 바보군요 라고 하면 화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것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억양에 따라 듣는 사람이 화를 내느냐, 즐거워지느냐, 짜증이 나느냐 하는 그 감성의 물결의 성질은 변합니다. 불가사의한 세상입니다. 진실의 세계라는 것은.

 

그러므로 일반 사회에서는 당신은 비방 당했으므로 화내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상식의 세계입니다. 비방 당했다고 하는 것에도 각각의 해석이 있어 예를 들면 바보로군요 라고 말하자마자 비방 당했다고 해석합니다. 비방 당했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그것을 그러나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바보라고 한다 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 면을 이해하는 견해와 생각이 달라집니다.

 

화를 낼까, 기분 좋아질까, 우울해질까, 명랑해질까, 낙심할까 그 모든 것이 본인 마음 내키는 대로의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책임으로 그런 것이 보이게 됩니다. 그것도 인과관계인데 그 인과관계를 발견합니다. 그것도 택법각지입니다.

 

ㅇ 의식은 거대한 에너지라는 증거

다른 하나는 나마 루빠의 구별이 보이게 됩니다. 그것도 택법각지입니다. 라마 루빠라는 것은 마음의 기능과 물질적인 기능입니다. 나마라는 것은 정신적 에너지의 파동, 루빠는 물질적인 에너지의 파동. 그런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것은 마음이 고요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사띠를 잘 실천하여 고요한 사람만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마 루빠의 관계를 알 수 있느냐 하면 예를 들면 발이라고 말했을 때 발이라는 것은 루빠, 물질의 결정체입니다. 물질의 덩어리는 스스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물질의 덩어리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다른 물질적 에너지를 투입하던가, 마음 에너지를 투입하던가 둘 중 하나의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기에서 아! 내가 다리를 들고 싶으니까 다리를 들고 옮기고 내린다 라고. 그리고 발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 있고 그로 인해 이렇게 무거운 다리가 움직이고 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다리를 저울로 달아보면 꽤 무겁습니다. 달아 본 적은 없지만 한 쪽 다리의 무게가 가령 10kg으로 쳐도 10kg이나 되는 무거운 것일지라도 의식만 들어가면 간단히 움직일 수 있은 것입니다. 손을 올리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손을 올리려고 생각했으면 5kg정도 나가는 무거운 손이 간단히 올라갑니다. 예를 들면 마음이 고요하지 않은 상태에서 손을 올리는 경우와 고요한 상태에서 올리는 경우, 그 마음 상태에 따라서 손을 올리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고요한 사람의 경우는 재빨리 손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대개 이 신체의 움직임의 경우 매우 품위 있는 동작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고요합니다. 책을 두는 일만 해도 커피를 한 잔 마시는 일만 해도, 무슨 일이 있든 매우 우아하게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은 상당히 마음이 고요합니다. 예를 들면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것은 무엇이든 매우 공손하게 행동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성격이 아닌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거칠고 폭력적인 생활방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부모의 교육이 그다지 좋지 않을 경우, 아이는 먹는 법, 걷는 법, 구두를 싣는 법과 벗는 법 등 모든 것을 적당히 해치우는 데 그것은 마음이 극히 거칠고 폭력적으로 되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것은 잘 보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손을 올린다 라고 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손을 올립니다. 그러므로 손을 올리는 방법을 보아도 그 사람의 마음은 어느 정도의 단계인지 어떤 상태의 마음인지 보이게 됩니다. 위빳사나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이내 압니다. 아! 이 사람은 이런 마음상태다 라고.

 

거기에서 손을 올린다고 명칭을 붙이면 마음으로 손을 올라가게 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내린다고 하는 경우는 보통 사람이 손을 내린다고 하면 곧 이것은 지구의 인력으로 인하여 아래로 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법칙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거짓입니다. 만약 물리적 법칙에 의하여 손을 내린다고 하면 손이 탁하고 떨어져야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손이 그렇게 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올린 손은 한 번도 탁하고 떨어진 일이 없습니다. 손을 내릴 때에도 명확히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제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의식이 이 지구의 인력에 역행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히 상태를 조절해서 조심스럽게 상처를 입지 않도록 손을 내리는 동작을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ㅇ 당신은 나마와 루빠에 의해 살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기절했습니다. 사람이 서 있다가 갑자기 혹은 뜨거운 욕탕에 들어갔다가 일어서려고 했더니 현기증이 나서 쓰러졌습니다. 왜 넘어졌는가 하면 현기증이 나서 서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이 신체가 서 있다는 것 자체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입선의 필요성은 그럴 때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들 인간은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선을 시키는 것입니다. 서있음, 서있음이라고. 입선의 의미는 당신은 서 있다는 의식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 라는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 입니다. 만일 서 있는 사람이 졸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의식이 자고 싶다, 자고 싶다 라고 말하고 그럼 잡시다 라고 하고 잡니다. 그렇게 하면 일어섭시다, 일어섭시다 라는 에너지 쪽은 없어져 버리겠지요. 서서 내내 자는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은 물리적 법칙으로 일으켜 세우지는 못합니다. 마음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전철 안에서 피곤해서 반쯤 잠이 든 때도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으면 서 있지 못합니다. 다리가 있으므로 물리적으로는 서 있을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서 있지 못합니다.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두발로 서 있다는 간단한 행위에 조차 두 종류의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작용. 다른 하나는 마음의 작용. 그런 나마와 루빠의 작용이 점차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걷고, 서 있고, 일을 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누구라도 피곤해져서 어딘가에 앉고 싶어지게 마련입니다. 의식이 일어섭시다, 걸읍시다, 이것 하자 저것 하자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자체도 다소간 쉬고 싶어집니다.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경우는 몸을 움직여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 쪽도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 있어서는 심신이 함께 쉴 수 없습니다.

이 서있다, 서있다 라는 에너지는 계속해서 쉬지 않고 작용하고 있지 않으면 인간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앉아서 쉬고 있는 상태는 분명히 물리적 에너지입니다. 예를 들면 잠이 들어서 마음의 의식이 앉고 싶다고 느끼지 못해도 의자에 앉을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의자에는 앉아 있지만 사람은 자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이면 신체로 가는 에너지는 상당히 적어지기 때문에 마음은 얼마간은 쉴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앉은 순간에 의식은 곧장 다른 곳에서 작용하여 다른 망상 같은 것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 순간도 틈이 없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좀 쉬어보려고 하면 곧 망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앉으면 신체로 가는 에너지는 얼마간은 막을 수 있습니다. 어째서 쉴 때는 모두들 눕는 것일까요? 어째서 잠 잘 때는 한 쪽 발로 서서 자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면 쉴 수가 없습니다. 누우면 몸을 움직이려고 가는 의식 에너지가 그 때는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병이 나면 모두 눕습니다. 졸리면 다들 눕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신체로 가는 의식에너지는 그 만큼 멈추게 됩니다. 멈추어서 마음만 스스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신체라는 물질을 쉬게 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빳사나에서는 행주좌와라고 하여 행은 걷는 것, 주는 본래는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선다는 뜻입니다. 서는 것, 걷는 것, 앉는 것, 눕는 것이라는 네 개의 작용에 있어서는 명확히 사띠를 실천하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네 개를 확실히 사띠해 가면 드디어 신체라는 물질의 작용과 마음이라는 정신적 작용의 파동은 언젠가 명확히 따로 따로 구별이 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앉고 싶다는 기분이 없으면 앉을 수 없고, 서고 싶다는 기분이 없으면 설 수 없고, 눕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누울 수 없으며, 눕자마자 과연 마음의 파동은 신체에는 가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한다 라는 나마와 루빠 두개가 따로 따로 보이게 됩니다.

 

ㅇ 수행의 진전 상태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놀라움

입선과 달리 앉아서 수행을 하면 엄청난 망상이 나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딘가에 앉아서 그냥 멍하니 있으면 이것저것 망상이 나옵니다. 그 정도의 얘기는 모두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나치게 여러 가지 쓸데없는 개념이 머리에 떠오르고, 망상이 떠오르고, 화가 나기 때문에 곤란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두 달리거나 걷거나 무언가를 합니다. 신체를 움직이고 있으면 마음은 신체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작용시키는 쪽으로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쪽이 바빠서 마음에는 망상할 틈도 없어지고 맙니다. 그 만큼 망상은 대부분 잘라낼 수 있습니다.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하고 있으면 망상만 나올 뿐입니다.

 

그렇듯이 마음과 몸의 작용 두개가 각각 확실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택법각지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알게 되는 것이 하나하나의 현상이 각각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지혜가 곧 다시 생겨나게 됩니다. 보통 우리들의 행동은 하나하나의 현상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어떤 연계를 갖고 인식되지만, 그것이 하나하나 독립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되어 갑니다.

소리가 들어와서 의식을 합니다. 소리가 들어와 의식을 할 때 예를 들면 갑자기 얼굴이 가려워졌습니다. 가려움증을 의식하는 그 의식과 소리를 듣고 의식하는 그 의식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 방금 전의 현상과 지금의 현상은 다른 것이 아닐까 하며 강렬한 차이가 보여 집니다. 실은 그것은 거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앉아 있어 다리가 아픕니다. 아파와도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가려워도 그럴까요? 생리적으로 말해 가려움증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은 아닙니다. 조금 가렵기만 해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한편 통증인 경우는 격렬한 통증이어도 참으려고 마음먹으면 상당부분 참을 수 있습니다. 이 통증과 가려움은 서로 전후해서 일어나는 두개의 현상이지만 현저히 다릅니다.

 

앉아 있었더니 몹시 졸립니다. 거기서 졸음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신체를 본 즉, 졸린 마음과 신체의 상태가 각각 보입니다. 그런데 졸음을 쫓으려고 발을 바꾸거나 혹은 소리가 갑자기 귀로 들어 왔다든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변화라도 일어나면 곧 마음은 눈뜨게 됩니다. 그 눈 뜬 순간 졸음이 어딘가로 확 날아가 버린 상태, 졸음이 없는 순간의 신체의 상태를 봐 둡시다. 졸음이 사라진 순간 신체의 나른함, 딱딱함이 순식간에 모두 날아가 버립니다. 시간 같은 것은 걸리지 않습니다. 지금 신체가 나른하고 졸리기 때문에 10분 정도 걸려서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해서 졸음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변합니다. 너무 졸려서 머리를 흔들면서 졸음을 쫓으려고 한 사람이 순간적으로 눈이 떠집니다, 신체도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활동적이 됩니다. 가볍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앞의 현상과 지금의 현상의 차이가 아! 대단히 격렬한 차이가 있구나! 라고 알게 됩니다. 이전의 신체와 지금의 신체는 엄청난 차가 있다는 것이 보이게 됩니다. 혹은 앉아 있어도 기분이 그다지 안 나는 경우, 좌선을 그만두고 서서 입선을 합니다. 혹은 경행을 합니다. 경행을 하면 그 때의 신체의 상태, 마음의 상태, 좌선 시의 신체의 상태, 마음의 상태, 그리고 지금 서 있을 때의 마음의 상태를 보면 전혀 별개가 아닌가, 즉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순간 그 순간에 다른 물질이 있고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 가게 됩니다. 하나하나의 현상은 앞의 현상과는 관계없는 새로운 것이라는 것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지혜가 나타나면 그것도 택법각지입니다.

 

ㅇ 당신은 여기까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는가?

이 택법각지의 경우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그 사람의 능력에 달렸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흥미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각자 많은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4세기경에 씌어진 淸淨道論 등에는 그런 것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씌어 있는 것을 읽어보면 이것은 몇백년 지나도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수행으로는 깨달을 턱이 없다고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릴 필요 또한 없습니다. 무엇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택법각지입니다. 淸淨道論에 씌어 있는 것은 택법각지의 설명으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격적으로 올바르게 수행할 사람에게 필요한 각서입니다.

 

그러면 본격적이 아니라고 해도 택법각지로 진전되지 않는 사람의 경우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른바 사띠는 하지만 그것이 흐지부지한 상태로 오늘은 힘을 내보지만 내일은 게으름 피게 되고 다음 주가 되면 하루 종일 끝까지 망상을 하는 식의 빈둥거리면서 제 멋대로 수행하고 있는 사람인 경우 누가 생각해보아도 그다지 사띠를 잘 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겠지요.

사실은 24시간 체제를 설정해 놓고 가능한 한 시간을 정해서 끝까지 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루는 끝까지 잘 해내고 하루는 적당히 하는 등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사람은 진지한 태도가 아닙니다. 진지하지 못하면 위빳사나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세상일이라는 것이 장난삼아 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펄쩍 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수술마저도 시시덕거리며 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일이라는 것은 노는 기분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굉장한 정신력으로 힘을 짜내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정확히 얘기해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놀이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일이 그렇게 어렵다면 우리들은 일 같은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비행기 조종사라는 직업은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워 보이겠지만 조종사 자신에게는 충분히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정도 일은 이제는 졸면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쳐도 조금이라도 비행기의 각도가 틀리면 비행기가 추락하여 모두 죽게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 사람은 훈련을 받고 있겠지요. 그러므로 비행기의 이착륙도 콧노래를 부르면서 얘기하면서도 비행기를 제대로 이착륙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동안에는 대단히 여유가 있으며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어려운 수술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생명이 걸린 문제니 힘들겠구나 하고 걱정하지만 의사는 전혀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환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도려내고 저기도 절단하고 이제 끝났다 하는 식으로 여유 있는 마음으로 수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병이 낫느냐 낫지 않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얘기입니다.

 

이른바 의학에서는 사람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수술을 해도 약을 먹어도 몸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자신의 마음으로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족한 물질을 약으로 조제해 준다든가 혹은 부족한 기능을 촉진시킨다든가 심장의 혈관이 좁아져서 위험한 상태이면 인슐린을 좀 주사한다든가 대개 그 정도의 물질을 투여하는 정도 밖에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물질을 부여하면 확실히 신체는 다시 기능하기 시작하지만 혹은 아픈 곳의 해로운 부분을 도려내면 그 후에는 신체가 스스로 치료해가기도 합니다. 고친다는 것은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세포가 본인의 의지에 따라 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병이 나는 것부터가 자신이 병 나고 싶기 때문에 병이 생긴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자신이 병이 생기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데도 병이 생기는 경우는 기관적인 고장입니다. 예를 들면 나이를 먹게 되면 당연히 세포가 모두 노쇠해 가기 때문에 소화기능 등이 나빠집니다. 목의 근육 등이 굳어집니다. 류마티스 같은 것은 의식이 있든 없든 생기는 병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돌을 던져 자신의 머리에 맞았다고 해봅시다. 맞은 머리에 상처를 입습니다. 그런 경우도 자신이 상처를 입고 싶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처나 병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과 늙는 것, 그것은 어찌 해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를 들면 위계양이나 혈압이나 당뇨병 등등은 사실은 그 사람의 마음이 만들고 있는 병입니다. 얘기가 좀 빗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의사라는 직업도 조종사라는 직업도 정밀기계를 다루는 사람도 모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기본만 알고 나면 그 후에는 놀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을 리 없습니다.

 

ㅇ 수행자가 최초의 단계에서 함정에 빠지는 때

그에 비해 어려운 것은 위빳사나의 사띠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어렵습니다.

위빳사나는 편하게는 되지 않습니다. 사띠의 실천은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적당히 제멋대로 하면 당연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어딘가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럭저럭 하고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해버리게 되어 성실하게 하지 않게 되므로 그것이 버릇이 됩니다. 손을 올림 이라든가 왼발 오른발 이라든가 앉음 먹음 이라든가 배의 일어남 사라짐 이라든가 하는 확인은 일단하지만 너무나 습관적으로 하기 때문에 버릇이 되고 버릇이 되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틀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지혜 그 자체가 밝혀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보라는 것이 사라지게 되므로 드디어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나에게 물으러 옵니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에 결국 내 대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다시 한번 진지하고 엄밀하게 사띠를 하십시오. 그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실하게 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묻지 않습니다.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벌써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갑니다.

 

진지하게 하지 않은 사람은 흐지부지 해버린 탓에 긴 시간을 낭비한 꼴이 됩니다.

이런 사람 중에는 의외로 스스로는 진지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일주일, 이주일, 일개월, 개중에는 일년, 이년, 삼년이나 해 온 사람도 있지만 사띠의 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틀에 박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주 간단히 왼발 올림 옮김 내림 이라고 하고는 있습니다. 앉아도 일어남 사라짐, 아 망상하고 있음, 망상하고 있음, 지금 화내고 있음, 다리가 아픔, 저림 이라고 확인하는 것은 누구라도 간단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흐지부지한 사띠를 하고 있으면 거기에서 마음은 앞으로 전혀 진전하지 못하게 되어 그 결과 슬럼프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택법각지에는 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트리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 경우는 강제로 끌어서라도 택법각지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면 역시 우선 제일 좋은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설법을 끝까지 들을 것, 설법을 듣고 자신의 세속적 개념은 모두 부수고 강제로라도 새로운 시야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ㅇ 망상이 생길 때야말로 재기할 기회

그런 사람들은 강제로라도 스님을 믿고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유감스럽지만 불교는 종교가 되어 버립니다. 본래 불교라는 것은 종교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은 제대로 스님을 믿고 제대로 경을 외거나 하고 법문을 많이 들어 여러 가지 자신의 지식의 세계를 바꿔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결코 부처님 탓도 가르치고 있는 스님들 탓도 아닙니다. 본인의 하기 나름이므로. 아무런 법을 듣지 않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나아갑니다. 왜냐면 진리를, 진실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없어도 진실을 깨달을 수 있으므로 특별히 부처님 말씀을 듣지 않아도 같은 진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상이라고 하신 것도 그 말에 관계없이 만일 일체가 무상한 것이라면 올바르게 보이는 사람에게는 무상은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택법각지가 진전되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 걸려 나아가고 있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가 하면 수행 자체, 위빳사나 자체가 슬럼프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아닌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불안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자신은 과연 어딘가 변해 있기는 한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것을 하여 무엇이 되는 것인가, 그 다음에는 무엇이 되는가 라는 기분을 호소하게 됩니다.

더욱이 그런 사람들은 지금 자신은 위빳사나가 잘 되고 있다, 사띠도 잘 되고 있다고 자기 과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없는 자신, 진전을 실감할 수 없는 자신에게 의문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 그 사람은 법을 듣는다, 끝까지 불법승을 믿고 끝까지 해내는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을 일단 슬럼프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둡시다. 그래서 슬럼프에 빠진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슬럼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지 말해보면, 지금까지 해 온 사띠를 더욱 더 철저히 하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왼발 올림 내림 이라고 간단히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중하게 확인하는 소재로 가장 좋은 것은 망상이 나타날 때입니다. 보통 우리들은 망상 자체를 그냥 망상, 망상하고 자르라고 알고 있지만 슬럼프에 빠진 사람은 망상에 대해서 무엇을 망상하고 있는 지를 그 내용까지 분석하는 것입니다. 분석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앉았다고 합시다.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망상하고 있음 망상하고 있음 이라고, 그런 느낌으로 끝날 때까지 물 흐르듯 해갑니다.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발이 아파졌습니다. 거기서 통증 통증 통증하니 통증은 사라졌습니다. 거기서 다시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에 다시 망상이 나타났습니다. 망상 망상이라고 사띠를 합니다. 생각하고 있음 생각하고 있음하며 그것을 명칭붙이고 있을 뿐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까지의 경우는 이 단계에서 정해진 틀에 빠지게 되면 망상이 극도로 강렬하게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다만 반사적으로 습관적으로 사띠를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마음에 자극이 모자랍니다. 마음은 자극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껏 극렬한 기세로 망상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ㅇ 망상은 여섯 개로 나누어 인식해 봅시다.

거기에서 그때는 자신이 무엇을 망상하고 있는지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처럼 다만 망상, 망상 하며 명칭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욕망에 관한 망상이며, 화냄에 관한 망상이며, 이것은 무지에 관한 망상이라고 구분 짓듯이 貪瞋痴(탐진치)로 나누어서 망상을 분석해 봅니다.

 

망상의 종류는 간단히 나눌 수 있습니다. 탐욕에 관한 망상이라는 것은 자신이 좋아 하는 것에 관한 망상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떠오르거나 하면 그런 것은 탐욕에 관한 망상입니다. 싫은 것, 기분 나빠지는 것, 하기 싫은 일을 망상하는 경우는 화냄에 관한 망상입니다. 무엇인지 멍하니 이유도 없는 망상이 나타나는 경우, 이제는 가져 보아도 소용없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는 무지에 관한 망상으로 해서 탐진치로 망상 자체를 나누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위빳사나 자체는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어려워진다는 것은 한 층 더 사띠를 진지하게 행하라는 것이 됩니다. 사띠를 확립하지 않는 한 진정한 택법각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사띠를 진전시키는 방법으로 망상에 대해서 탐진치로 나누어 보는 것은 좋은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망상을 탐진치로 나눌 수 있게 되면 그 다음에는 불탐, 불진, 불치 그 세 개도 넣어서 망상을 여섯 개로 나누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또 명상은 한 층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여섯 개로 상세하게 나누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게 됩니다. 즉 탐욕에 관한 명상인지 혹은 불탐에 관한 명상인지 여간해서는 구별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욕망에 관한 망상은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또 욕망을 멀리하는 불탐의 망상도 기분이 좋습니다. 혹은 아무런 기분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개인차가 있어서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행하는 본인에게 있어서는 꽤나 까다로운 일입니다.

분노에 관한 망상은 보다 알기 쉽습니다. 기분 나빠지기 때문이고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반대의 망상인 불진의 망상, 이른바 사람을 자애하는 기분,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의 기분을 잘 이해해 주며 생명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가령 자신의 적의 일이 망상으로서 생각이 나도, 싫은 사람의 일이 생각나도 저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힘든 인생을 보내고 있으므로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 주길 바라는 기분이 생기면 그것은 불진이라는 분노의 반대의 망상이지요. 그 때도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도 있으며 그다지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주 싫은 사람이 떠오르면 그것은 분노의 망상입니다. 거기서도 나는 오래 동안 수행해 왔으므로 싫은 사람을 싫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마음먹고 곧바로 저 사람이 싫다가 아니라 저 사람도 나름대로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기분으로 바꿀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 부자연스럽습니다. 본래 싫은 사람이므로 생각이 나면 곧바로 분노가 나오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그 감정 쪽이 자연스럽습니다. 분노가 나오지 않는 것은 어느 정도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해나가면 지금의 예처럼 도대체 어느 쪽에 넣어야 좋은지 모르는 분류상의 구별이 불가능해지고 맙니다.

 

그에 대해서 무지의 망상은 이유도 모르는 망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지의 망상이라고 간단히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지의 반대인 지혜의 망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 또한 알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자신의 지혜에 기초를 두고 망상을 하고 있습니까? 지혜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말하자면 냉정하게 사물이 보이는 경우는 지혜의 망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혜의 망상이 생기게 되면 이것은 이제 훌륭히 다음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해도 되겠지요. 여기까지 오면 슬럼프는 탈출했다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슬럼프에 빠지게 되면 탐진치에 덧붙여서 불탐 불진 불치도 넣어서 모든 망상을 분류해봅니다. 그런 사띠를 해봅니다.

 

ㅇ 명상은 재미있다, 기분 좋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

사띠 수행을 편하고 기분 좋게 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좀 걱정이 됩니다. 이른바 좋은 것이란 그렇게 쉽게 획득할 수 없습니다. 쉽게 얻는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동물을 잡으려고 할 때 언제나 쉽게 잡히는 동물은 별 볼일 없는 동물입니다. 바퀴벌레 따위를 잡아도 재미없습니다. 바퀴벌레가 아니더라도 쉽게 잡히는 동물이 있습니다. 동물원에 가서 그런 동물에 접근해서 만져도 전혀 도망가려고 하지 않는 녀석들, 그런 동물은 잡아 보았자 재미없습니다. 역시 요리조리 도망을 다녀서 잡기 어려운 동물을 간신히 잡았을 때 잡았다라고 기뻐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작은 새 같은 것을 잡는 것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개미 따위는 잡아도 전혀 재미 같은 것은 없습니다. 개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로 손 위로 기어오르기도 하므로 개미 한 마리 잡았다 고 기뻐할 아이는 없습니다. 작은 새는 한 마리 잡았다고 매우 기뻐하는 아이들이지만.

 

그러므로 역시 어려운 일이어야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 자체는 상당히 진지하고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고 믿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할 필요도 없지만 말입니다. 겨울인데도 찬바람을 맞으며 밖에서 명상하겠다고 하는 것은 단지 고행일 뿐 명상이 아닙니다. 단식하면서 명상하겠다는 것도 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지 않을 뿐더러 권유하지도 않습니다. 단식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진지하게 사띠를 해서 진지하게 탐진치로 나누어 보거나 불탐 불진 불치로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위빳사나를 하고 있다, 배의 팽창 수축이 잘 보인다, 소리를 들어도 소리는 확실히 확인한다, 통증이 생기면 곧 확인한다, 그런 식으로 죽 해오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질문하면 대답이 없습니다. 그것은 위빳사나 사띠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다른 하나의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예를 들면 배의 팽창으로부터 무엇을 느꼈다고 생각하며, 배의 수축으로부터도 무엇을 느낀 것인가? 또한 몸으로 여러 가지를 느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느끼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일부러 감각을 보게 시키는 방법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팽창한다는 감각은 이런 것이라든가, 다만 보는 것만이 아니라 팽창하는 감각은 즐거운 기분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 기분인가 하는 식으로 즐거운가, 그렇지 않은가로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수축하는 기분은 즐거운 기분인가 괴로운 기분인가 또 저림이나 통증 등은 어떻게 느끼는가, 예를 들면 재채기가 난다고 합시다. 그 재채기하기 전의 기분은 즐거운 기분인가 괴로운 기분인가 재채기를 한 다음에는 어떠한가, 혹은 그 후에 가려움증이 생긴 경우, 가려움증이라는 감각은 어떠한가, 이것들을 불교용어로 말하자면 苦입니까 樂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빨리어로 말하면 둑카(duhkha)입니까, 수카(sukha)입니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식으로 나누어 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리를 꼬고 앉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꼴 때의 감각은 고인지 낙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 기분이 있는지 어쩐지 나누어 봅니다. 그렇듯이 느낌 vedanā(웨다나)의 다양한 분류방법을 취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므로 그것을 시켜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반드시 할 수 없다는 불평이 나옵니다. 그래도 해 주십시오 라고 하면 이번에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게다가 모르는 순번도 정해져 있습니다. 苦라는 것은 알겠는데 예를 들면 다리를 꼬고 앉을 때는 苦도 아니고 樂도 아니고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그렇다면 감각에는 고, 락, 불고불락 이라고 하는 세 개가 있기 때문에 그 셋으로 나누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것을 2, 3주일 해 보았을 때 자 그 총체적 결과는 어떻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느꼈습니까하고 묻는 것입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한 시간 명상하면 한 시간 동안의 감각은 모두 다 보았는가? 한 시간 동안 얼마나 樂을 느꼈는가? 얼마나 苦를 느꼈는가? 그것을 관찰해 주십시오. 따라서 이 위빳사나 수행법은 상당히 힘든 것입니다.

이것은 본격적인 위빳사나의 세계로서 자주 상품이 되는 위빳사나와는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하는 사람 각자마다 지도방법도 다르고 각 개인의 진전 정도도 내용도 다르기 때문에 초심자용이나 기본적인 지도서나 입문적인 교재를 쓰는 것은 가능하지만 본격적인 교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만일 본격적인 교재를 바란다면 그 사람 한 사람만을 위한 교재가 되어 그 사람 이외의 사람에게는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금의 예를 보아도 그 사람은 자신이 한 시간 수행한바 많은 고를 느꼈다고 칩시다. 간혹 락도 느꼈다고 칩시다. 또한 간혹 불고불락을 느꼈다고 하는 경우, 그 예와 같은 체험을 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거의 없거나 아니면 전무하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 사람만의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위빳사나 수행법이라는 것은 본격적으로 하려고 하면 하는 만큼 어렵고 꼼꼼하고 복잡하게 되어 갑니다.

 

ㅇ 수행은 괴로울수록 향상되어 간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으로 여러분은 지금까지 배워 온 위빳사나 수행법과 다른데.. 수행은 본래 좀 더 즐거운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것은 크게 다르다 라며 당혹해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본질을 모른 채 다만 유행을 쫓듯이 자! 명상합시다, 앉아 있으면 꽤 수행이 됩니다, 잘 감각을 관찰해 본다, 관찰해 가면 기분이 좋다라고 아는 척을 하며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초심자가 아니라 상당히 진지하게 위빳사나 수행법에 매달리고 있는 분을 상정하여 얘기를 끌어 나가겠습니다.

 

수행을 즐거운 것,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열중해 있는 사람들이 의의로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행에 집착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야만 하겠지요. 수행을 하도 하고 싶어서 위빳사나를 하자, 명상을 합시다 라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며 자신도 어엿하게 지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본격적인 위빳사나를 모르는 사람이 명상을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명상은 매우 기분이 좋다, 한 시간 앉아 있었을 뿐인데 아주 기분이 좋았다 라고. 

 

본격적인 위빳사나를 모르는 사람이 명상을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수행은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한 시간 앉아 있었을 뿐인데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를 모르는 사람이 해탈을 얻을리 없습니다. 그들은 수행에 의해 즐거움만을 알았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욕구의 수행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꾸짖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므로 화내서도 안 됩니다. 화낼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자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 이 사람은 지독히 욕구에 집착하는구나, 욕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구나 라고 이해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욕구에 빠져 있으므로 불쌍하게도 지혜는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혜가 없는 욕구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또 위빳사나의 방법도 다소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그 사람은 팽창하고 있다는 것에 매우 기분 좋은 감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꾸자꾸 팽창해봐 주십시오. 이른바 호흡을 하여 팽창할 수 있는 데까지 팽창시켜 멈추어 보는 것입니다. 감각이 어떻습니까? 이 경우는 그 감각이 무엇인지 묻지 말고 어쨌든 감각을 관찰해 주십시오 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수축할 때도 할 수 있는 데까지 공기를 빼서 가능한 한 멈추어서 그 감각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수축된 감각은 어떤 감각일까요? 그런 식으로 한 시간 해보십시오 라고 하면 이 사람은 힘들어서 기절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수행은 힘들어서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반드시 말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그 감각이 고라고 압니다. 그것을 기억해 두십시오. 결코 수행은 즐거울 뿐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ㅇ 무상, , 무아를 보는 방법

 

지금 설명한 것은 수행을 하고 있다가 슬럼프에 빠진 경우이지만, 슬럼프에 빠지면 강제적으로라도 법을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무상을 보기를 권합니다.

개개의 현상은 이렇게 변해간다는 무상을 봐 주길 바랍니다. 또는 고를 봐주길 바랍니다. 또는 실체는 없다고 하는 것을 봐 주길 바랍니다. 예를 들어 보인다는 것은 빛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 무언가 보이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알기 쉬운 예로 말하자면 이런 예입니다.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면, 여러 가지가 스크린에 비치고 있습니다. 스크린에 비치고 있는 영화는 그러나 실체는 아닙니다. 그저 빛일 뿐입니다. 우리들이 그 빛의 조합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을 집이다,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단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거기에 영화라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듯이 모든 현상은 실체가 없는 무아입니다. 그저 꿈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으면 됩니다.

 

내가 지금 화가 나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나 지금의 예에 비춰보면 내가 화를 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는 논리는 바보 같은 얘기가 됩니다. 자신이 화를 낸 일에도 같은 곳에 있는 다른 사람은 화내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화나 있다고 말해도 그것은 스크린 상에서 맘대로 화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때에 그렇게 화내지 말고 즐거워하십시오! 라고 말해도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상이므로 자유자재로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맘대로 화내고 있을 뿐이며 스크린 상에서 화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만약 스크린을 걷어버리면 더 이상 영화가 아닌 것처럼 화내고 있는 것은 결코 실체가 아닙니다.

영사기의 렌즈 앞을 손으로 가리면 그것으로 영화가 아닙니다. 단지 손만으로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스크린일지라도 렌즈를 보면 손바닥만한 작은 것입니다. 이것은 손으로 간단히 파손시킬 수 있으며, 그 정도로도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혹은 가위를 가지고 와서 필름을 잘라버리면 그것으로 영화는 끝입니다.

그러므로 화냄도 마찬가지 얘기로 꿈같은 것이며 화를 낼 것인가 아닌가는 스스로 간단히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인간이 변하면 가능합니다. 그것이 무아라는 것입니다. 택법각지의 경우는 그런 식으로 하여 마음을 자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택법각지에 대하여 꽤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그만큼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③ 계율을 지켜라---정진각지

 

다음에 나오는 것은 정진각지인 위리야 삼봇장가(viriya sambojjhaga)입니다. 정진할 것인데 이것도 둘로 나누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위빳사나 수행을 잘하는 사람의 경우, 즉 진지하게 수행하는 사람의 경우는 사띠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언뜻 언뜻 지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택법각지입니다. 문제없음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진합니다.

 

이렇게 잘 해나가는 사람의 정진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평소 생각하고 있는 정진과는 다릅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모든 것이 무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화를 낼까 내지 말까 하는 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마와 루빠 밖에 없다, 그것은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다, 지금의 현상과 다음의 현상은 전혀 다르다, 라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고, 말하자면 욕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영화도 사실은 거기에 영화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단지 빛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것을 알고는 있지만 역시 영화는 보고 싶습니다. 보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 보고 싶으며 로맨틱한 기분에도 젖고 싶어집니다. 그런 기분이 듭니다. 그러므로 다만 무상을 알았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무아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대개 이 상좌부불교를 확실히 공부한 사람과 태어날 때부터 불교의 세계에서 제대로 자란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지극히 보통의 상식으로 무상과 무아를 알고 있습니다. 세포 속까지 그것은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깨닫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놀고 싶고 즐거워하거나 욕망 속에 탐닉하기도 합니다. 불교를 잘 알고 있는 사람, 불교를 잘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보통 사람보다 더 놀고 싶어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놀고 있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하고, 자신이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고 잘 알고 있으면서도 놀고 싶어 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바람을 좀 피고 싶어집니다. 외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도 깹니다.

계율을 깨는 것은 좋지 않고 이렇게 해서 좋을 게 없다고 압니다. 무상을 알고 있고 무아를 알고 있어도 역시 마음은 욕망으로 향해 버립니다. 그런 사람이 명상을 해서 가령 사띠도 ok다, 택법각지도 ok다, 라고 한들 거기서 앞으로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절대 못 나아갑니다. 그래서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정진은 일반적인 세속적 정진과는 다릅니다.

나타나는 현상은 모두 변하는 것이며 무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런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은 그런 것을 접촉하여 괴로움을 맛보고 있습니까? 왜 당신은 번번이 윤회를 반복하는 짓을 합니까? 그런 생활을 하면 아무리 무상이다, 무아이다, 라고 아는 체를 해봐도 죽으면 또다시 어딘가에 환생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지겨울 정도로 무상을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싫증이 나서 포기해버릴 때까지 무아를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무상이라는 것, 고라는 것을 끝까지 보겠다는 각오를 해서 억지로라도 쾌락의 세계를 단절시킵니다. 그러면 계율을 지키게 됩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지만 그것을 컨트롤해서 그런 것에 속지 않습니다. 음악을 듣고 싶지만 그만둡니다. 자고 싶지만 자지 않고 버팁니다. 졸면서라도, 철야를 해서라도 좌우지간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싫어질 때까지 노력한다고 하는 그런 혹독한 정진을 말합니다.

 

엄격한 계율의 세계가 형성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설법할 때는 왜 계율이 필요한가 하는 본질적인 면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계율이라는 것은 개개인에 따른 것이므로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만 하는가, 먹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것은 본인에게 달렸기에 그런 것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계율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먹을 것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침에 무엇을 먹든 저녁에 무엇을 먹든 그것은 다만 영양만을 취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음식에 너무나 집착하는 식도락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하루 한 끼만 먹도록 하시오’ 라고 하면 그것은 지옥 같은 고통일 것입니다. 욕망을 끊지 않는 한 그 사람은 내내 괴롭겠지요. 그러므로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계율의 진정한 의미가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적 기능이 이미 말을 듣지 않는 노인이 돌연 ‘나는 지금부터 梵網戒를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좋을 대로 하십시오 라고 답해줄 뿐입니다. 괴로움도 고됨도 없는 것은 수행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계율을 지키고 싶으면 역시 자신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노력하고 극복해서 정신적 고통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ㅇ 나를 이기기 위한 중요한 점검법

하고 싶어 하는 나를 이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계율입니다. 뽐내기 위해서 하는 것,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계율은 그다지 평가받을 수 없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계율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 것보다도 성품을 고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계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님들의 예를 들어보면 매일 탁발만 하고 있다든지 돈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라고 말하며 그 일을 실천하고 있는 스님들은 다만 그것만의 이유로 훌륭한 스님이라고 나는 보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훌륭하다고 하기 때문에 자만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성품이 고쳐져 있는가!

마음이 고요해졌는가!

자아의식에 집착하는 일은 없어졌는가!

엄격한 계에 의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는가! 등 이른바 小欲知足을 배우고 있는가 하는 것을 나는 그 스님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높이 평가할 일입니다.

좌우지간 무상은 알고 있는데 깨달을 수 없는 사람들이 결국은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버텨보고 노력해 봅니다. 그것에 의해 또한 위빳사나는 터무니없는 고행이 되어 버리지만 그 고통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 고통, 자신을 이겨야 하는 고통입니다. 특별히 육체적 고통은 아닙니다. 자신을 이기는 것, 자신을 뛰어넘는 것, 자신에게 지지 않는 것. 그런 수행 방법의 하나로서 계율이라는 것도 포함하여 정진각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상이라는 진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혹은 택법각지가 나타난 사람에게는 정진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생기게 됩니다.

과연 모든 것은 무상인가, 무아인가 라든가 조건 지워진 인간관계에서 생겨 난 것이므로 무상이다, 실체는 없다, 나마와 루빠 이외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식으로 지혜가 생겨난 사람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목적이다. 라는 식으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깨달음에 흥미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흥미가 생기게 되면 목적이 생기게 되어 당연히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노력합니다.

그것은 노력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이나 기분 좋은 취미생활과 같은 것으로 그렇게 되면 재미있어지므로 누구든지 끝까지 노력합니다. 괴로운 일은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진이라는 것은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괴로운 일과는 다릅니다. 자진해서 하고 싶어 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대단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연스럽게 명상한 것으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어 역시 해탈을 하면 멋지겠구나 하는 실감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매우 순조롭게 명상을 해나갑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욕망에의 유혹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사람들은 강제로 계율로라도 여러 가지를 지키면서 철야라도 해서 명상을 하는 등 여러 가지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두개는 둘로 나눈 것 중 첫번째 범주에 들어갑니다.

 

ㅇ 무상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직 깨달을 수 없다.

지금껏 설명한 것은 수행이 잘 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슬럼프에 빠지는 사람들은 지금 사띠를 하여 이것이 탐심인지, 진심인지, 치심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 택법각지를 이해하긴 하는데 그 후에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잘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쨌든 정진하십시오, 하루도 쉬지 말고 수행하십시오, 사람들과 얘기하지 말 것, 웃지 말 것, 그런 것들은 수행에 방해가 되니 철저히 엄격하게 지켜야 합니다. 잠자서는 안 됩니다. 자는 시간은 두세 시간 정도로 하십시오. 이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의 경우는 그처럼 혹독하게 정진해야 할 시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단계에 와 있는 것입니다. 슬럼프에 빠진 것을 사띠로 간신히 뛰어 넘으면 이번에는 택법각지에서 슬럼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택법각지에서 슬럼프를 맞게 되면 그 수행은 엄격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끝까지 혹독하게 대해야 합니다. 좀 웃어도 화를 낼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밥을 먹고 있을 때도 조금이라도 부주의하면 누군가가 곧 지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접시를 어떻게 놓았는지, 신발을 어떻게 벗었는지 모르면 명확하게 사띠하지 않았다고 누군가가 따끔하게 지적해야 합니다.

젓가락 하나라도 명확히 쥐고, 돌리고, 정중하게 다시 놓아 주십시오. 대충 대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도록 매우 까다롭고 엄격하고 귀찮게 대해야 합니다. 설법을 들을 때에도 진지하게 듣지 않을 때는 내 머리가 지금 무얼하고 있나! 당장 생각이란 번뇌를 그만 두고 명확히 사띠를 가지고 들으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다시 명령합니다. 하기 싫어도 그렇게 명령하고 사띠하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창피를 줘야합니다. 못난이! 한심하구나! 심한 창피를 줍니다. 옷 입은 것도 아주 약간이라도 틀렸으면 당장 자신을 지적하십시오. 사띠를 지니고 옷매무새를 고치시오라고. 사사건건 지적합니다. 심한 지적에 자신이 밉고 싫어질 정도가 되어 괴로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정도로 자신을 못 살게 굴어야 합니다. 실은 못 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하는 것이지만 스스로는 못살게 군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새 슬럼프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으로 훌륭한 정진이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꾸중 듣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를 화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됨으로 짜임새있고 상세하게 알아차리게 되며 그것만으로도 정진각지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 정진각지 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떻게 정진각지가 생기는 지를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가 육상 생물이 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고기라는 것은 물속에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 물고기가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육상 생물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윤회 속에 있습니다. 우주를 파괴하든 또는 새로운 우주가 생겨나든 그 속을 빙글빙글 영원히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괴로워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 같은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종교가가 그 윤회의 틀을 뛰어 넘으려고 생각하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연합니다. 윤회의 틀을 뛰어넘는 것이 평범한 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윤회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은 결국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로 무상을 아는 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가 육상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합시다. 아주 좋은 곳이고, 아름답고, 꽃도 피어 있고, 여러 가지 먹을 것도 즐비하다고 알아도 땅위로는 갈 수 없습니다. 무상을 알고 있어도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들이 알고 있지만 진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열반의 상태로는 여간해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노력,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는 것을 정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진이라는 조금만 더 열심히 노력하자 라는 포인트가 필요한 것입니다.

 

④ 탈세간의 성취 점검법 --- 희각지(喜覺支)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면 삐띠 삼봇장가(pīti sambojjhaṅga)인 희각지입니다. 삐띠라는 것은 기쁨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괴로운 정진각지가 끝나면 다음으로 생기는 기쁨을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위빳사나라는 것은 줄곧 괴로움과 갈등뿐이라고 해도 될 만큼 혹독한 단계였습니다. 그것은 실로 자신과의 싸움만으로 버텨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은 엄격하고 정밀한 수행을 요구받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면 자연스럽게 삐띠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삐띠 단계에서는 더 이상 지도자에게 꾸중 듣지 않아도 수행이 짜임새 있고 상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삐띠라는 것은 일반적인 기쁨인 <아 기분 좋다! 아 즐겁다!> 라는 그런 단순한 삐띠가 아닙니다. 들떠서 소란을 피우거나 덩실덩실 춤추거나 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대단히 고요한 삐띠입니다.

 

이른바 진실한 실제를 알아차림으로 무상도 잘 보이며 무아도 보여서 스스로 무상을 뛰어넘으려고 지독하게 노력도 합니다. 그런 알아차림의 순간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세속적인 부분으로부터 자신이 떨어져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탈세간이 이루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세상 사람들의 흐름으로부터, 윤회의 흐름으로부터 지금 떨어져 있다고 하는 실감은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위빳사나를 하면서 자신은 좀처럼 사람들이 하기 쉽지 않은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됩니다. 땅 위에 오르고 싶어 한 물고기는 많이 있겠지만 실제로 땅 위로 올라온 물고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뭍으로 오르고 싶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공부도 하고 실패를 반복한 끝에 파도 사이로 뛰어 올라 순간적이지만 윤회의 틀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탈세간의 체험자가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땅을 보았거나 육상 생활을 조금 맛본 물고기는 그런 경험이 없는 물고기를 향하여 <너희들과 나는 좀 다르다>라는 느낌을 가집니다. 힘들여 파도를 타고 땅으로 갔지만 이제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한계점에서 다시 물로 돌아와 자랑하는 것과 같은 기분입니다.

 

여기까지 온다는 것은 상당히 노력을 했다는 증거로 그렇게 되면 자연히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결코 아만심은 아니지만 알기 쉽게 얘기하자면 물고기가 너희들과 나는 좀 다르다고 하는 식으로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윤회의 세계로부터 조금 멀어졌다고 하는 느낌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체험에 의해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충실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삐띠, 진정한 기쁨입니다. 밥을 먹고 <아 즐거웠다.>라고 말하는 수준이 낮은 차원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밥을 먹으며 즐겁다는 것은 그 순간은 확실히 즐겁고 맛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식사가 끝나면 곧 실증 납니다. 음악을 들어서 즐거워도 듣고 있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음악을 듣고 있으면 즐거운 것은 고사하고 지겨워져서 괴롭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삐띠라는 기쁨, 즐거움은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속세라는 것에서 떨어져 있는, 윤회의 틀로부터 빠져 나왔다는 기쁨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종류의 즐거움, 기쁨입니다.

 

앞서 말한 정진이라는 것은 엄격한 것입니다.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혼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혼란 상태를 끝까지 꼼꼼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엄격합니다. 자신을 다루기 위하여 계율을 지키는 것도 엄격합니다. 그래서 심신에 엄청난 혼란상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루 5번 정도 식사하던 사람이 2번으로 줄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뛰어 넘으면 상당히 고요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정진은 어느 정도 마음에 격렬함이 생기게 됩니다.

 

⑤ 고요한 마음에 도달하는 감동의 길---경안각지

 

정진을 넘어 삐띠가 생기게 되면 <아 잘 해냈다>라고 이번에는 스스로 자기채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도 잘 할 수 있게 되어 이제는 수행이 무르익어가고 있다는 기쁨이 생기게 되면 지금까지 있었던 격렬함은 모두 고요하게 가라 앉아 버립니다. 가라앉는 과정으로 다음에는 경안이라는 각지가 생깁니다. (passaddhi sambojjhaga).

 

경안이라는 단계에 이르면 이제는 편하게 수행을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편한가 하면 심신이 대단히 가벼워집니다. 체중도 느낄 수 없고 매우 기분이 좋고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어쨌든 가벼워지고 고요해집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대개가 고요해집니다. 지금까지의 정진의 단계의 격렬함은 삐띠가 생김으로 해서 사라져 버렸고 그렇게 해서 경안에 이르러서 상당히 고요해지며 여느 때보다 가볍게 수행, 사띠가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를 빳삿디(passaddhi)라고 합니다.

 

 


⑥ 시간의 경과도 없는 망아의 영역---정각지

고요해진 상태에서 사마디라는 마음의 통일이 생겨납니다. 사마디라는 것은 하나의 사물, 하나의 현상을 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정의 각지(samādhi sambojjhaga)라고 합니다.

설명을 말로하기 어려운데 실천하여 체험한 사람 외에는 실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의 일어남 사라짐의 경우 일어남하고 확인하면 내내 일어남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멈추면 멈추었다 라고 잘 알았고, 사라지면 자신도 사라짐과 함께 있음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대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라짐이 멈추고 다시 일어남이 시작되면 일어나고 있다 일어나고 있다라고 압니다. 결코 의식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하며 도망치지 않습니다. 하나의 대상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수행자는 이제 시간을 잊게 됩니다. 한 시간? 벌써 그렇게 지났나? 라는 그런 마음입니다. 불안함이 전혀 없습니다. 몇 시간이라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수행처에서 명상하는 경우, 수행자는 가능한 한 앉아서 하여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든 사마디 상태가 사라질 때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 좌선을 하고 있는 중에 마음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오거나 이것 저것 망상이 생기기 시작하면 자세를 바꿔서 입선이나 경행을 합니다. 그런 과정까지 사마디 상태로 갈 수 있습니다. 그 정도 시간도 없으면 깨달음 또한 생기지 않습니다.

 

⑦ 깨달음의 최종단계---평등각지

다음이 우뻭카 각지인 평등각지입니다(Upekkhā sambojjhaga).

지금까지의 수행에서 실천자는 상당한 단계까지 진일보하였고 그와 더불어 여러 가지 마음의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인격도 변하고 사고방식도 변하며 뛰어난 인간으로 성장하여 있습니다. 거기서 평등각지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평등각지라는 것은 어디에도 감정이 없습니다. 감정이란 것을 생기게 하지 않습니다. 무엇에도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좌우되지 않습니다. 무상이라고 생각해도 아 싫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다 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자신이 수행을 잘 한다고 기뻐하는 일도, 뽐내는 일도 없습니다. 자신이 수행을 잘 하고 있다는 감정도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무상이며 무아이고 꿈과 같은 것이라는 모든 것을 고요한 마음으로 극도로 냉정하게 관찰 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고요한 상태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습니다. 사마디 상태에서는 그렇게까지 고요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지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잘 하고 있다고 기분이 좋아진 순간에 다시 사마디가 깨져서 원래대로 돌아가 버립니다. 즉 수행을 잘 할 수 있게 되면 거기에 다시 붙잡혀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평등한 마음, 사로잡히지 않은 마음, 고요한 마음으로 수행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수행으로 거기까지 균형을 잡아 두지 않으면 깨달음이라는 세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털끝만큼이라도 나는 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거기에는 우뻭카는 없습니다. 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물론 우뻭카는 없으며, 우뻭카에 이르는 데는 지금까지 말해온 것처럼 여러 가지 혼란의 벽, 파도와 같은 이 강렬한 마음의 변화 속에서의 갈등, 싸움, 계율에 의한 자기개혁 등의 과정을 지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친 사람에게만, 그런 엄격하고 괴로운 자기 단련을 거친 사람에게만 최종적인 우뻭카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어도 그 사람에게는 사띠가 늘 있으므로, 택법도 있고, 정진도 있고, 기쁨도 있고, 경안도 있고, 우뻭카도 있습니다. 우뻭카까지 갖춰지면 그 때 순식간에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⑧ 칠각지의 실천

수행에 힘쓰는 사람은 「사띠 각지」를 실천하면 좋습니다. 그 외의 각지는 자연스럽게 나타나옵니다.

지금까지 7가지를 설명하였지만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 이 7가지를 금세기에는 깨달을 수 없겠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1가지만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 외는 천천히 나아갑니다. 사띠를 실천해도 다음 각지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일단 2번째 택법각지를 안내해서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개개별로 「7각지」의 능력이 있어도 균등하게 안 되는 한 마음은 해탈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뿔뿔이 흩어지게 칠각지를 증장시켜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놓아두는 편이 좋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수행하면 됩니다. 이것저것 조사하면서 수행하는 사람은 능숙하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7각지가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처님을 신뢰한다면 그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므로 거짓일 수는 없을 것이며 잘 수행하면 분명하게 나아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뿔뿔이 흩어지게 마음대로 수행하면 망상을 일으키게 되어 능력이 균등하게 안 됩니다.

 

깨달음의 경지는 4개의 단계가 있는데 4번째 단계가 아라한입니다. 최종적인 해탈입니다. 제1 단계인 sotāpatti(예류과)에 이르는 것은 성자의 동참입니다.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에 이르면 이제 성자의 일원입니다.

그리고 번뇌와 대결하는 방법의 제1장 「관찰하고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에 의해서도 「예류과」의 깨달음에 이릅니다.

번뇌와 대결하는 첫 번째 방법은 불타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 바른 견해를 가지고 공부하여 알았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이르면 「예류과」의 깨달음에 이릅니다. 아! 이것이 「진리」구나! 이것 이외에는 다른 진리가 없다. 이렇게 납득하여 「예류과」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수행하지 않아도 깨달음의 첫 단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하지 않아도 마음은 바뀌는 것이니까요. 진리를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으로 제1의 벽인 번뇌의 벽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성자의 길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완전하게 깨닫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면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번째, 3번째, 4번째 성자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뭐 이것도 좋다고 첫 번째에서 멈추었다고 해도 반드시 7생 이내에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승에서 최종적인 해탈을 달성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 7각지의 실천 수행에 의해 번뇌는 완전하고 남김없이 두 번 다시 일어나는 일이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한마디로 말하면「번뇌」란 무지·무명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1510가지의 수많은 번뇌도 한마디로 말하면 「무지」입니다.

지혜가 나타나 진리를 발견하면 무지하고 저속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2+2는 4인 것을 알면 또다시 잊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번뇌는 「무지」이며 그런 무지가 천천히 천천히 사라져 갑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끝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번뇌론입니다.

명확하고 정밀하게 심리학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번뇌를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심플한 방법으로 없앨 수 있습니다.

노력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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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빳사나 입문

붓다의 길따라 선원 교재


위 교재내용은 아짠 빤냐와로(진용) 스님께서 붓다의 길 따라 선원에서 설하신 법문이며, 선원의 홈페이지(www.buddhayana.kr)에 올려져있는 것을 복사한  것입니다.

글의 내용이나 오타 등의 문제가 있다면 저(꾸살라)의 잘못입니다.

 

이 가르침이 실천수행의 바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나를 성취하기를 기원합니다.

 

Sadhu!  Sadhu!  Sadhu!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