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제 2장 구체적인 수행방법-붓다의 길따라 선원 교재

담마마-마까 2017. 4. 3. 12:42

     제 2장 구체적인 수행 방법

                    -아짠 빤냐와로(진용) 스님 법문-

 

   차 례

제 2장 구체적인 수행방법

 1. 들어가는 말

 2. 10가지 예비수행

 3. 수행의 기본적 설명

  -의미: 마음(名 ; nāma)과 몸(色 ; rūpa)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뜻합니다.

  -목적: 현상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깨닫는 것입니다.

  - 원칙이란 1.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그 무엇이던지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서, 알아차리고, 인식하는 것.  2. 좌선과 경행의 비율은 1 : 1로 균형 유지해야..

 4. 수행의 원칙들 : 1. 슬로모션 2. 실황생중계 3. 감각의 변화를 알아차림

 5. 명칭붙이기

 6. 균형 잡힌 수행을 위한 다섯 가지 원리: 신심, 노력, 알아차림, 마음집중, 지혜의 힘

 7. 절

 8. 알아차림의 요령: '가'라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무릎에 '통증'..

 9. 좌선 수행

   -주의점: 첫째, 자연스런 호흡을 알아차림하며 수행할 것.

       둘째,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지 않게 눈을 살며시 감을 것.

       셋째, 손과 발, 몸을 좌선 시간동안 움직이지 말 것.

       넷째, 허리와 목을 똑바로 유지할 것.

       다섯째, 가장 현저한 하나의 현상만 관찰의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10. 경행 수행

  주의점: 첫째, 시선은 180cm정도 앞을 내려다 볼 것.

     둘째,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지 말 것.

     셋째, 발을 내려놓을 때 발바닥 전체를 자연스럽게 내려놓을 것.

     넷째,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 일정한 거리(대략 20m정도)를 왕복하는 것입니다.
     경행 수행을 좌선하기 전에 1시간정도 하도록 하십시오. 최소한 30분은 해야

 11. 입선 수행: 졸음올 때 .. 5분 ~ 10분 이내 ..

 12. 와선 수행

 13. 음식 먹기

 14. 일상의 알아차림 수행: 생각, 일상동작, 좌선, 행선 이 4가지 열심히 마음챙겨 알아차리고 관찰..

 15. 수행의 점검과정(보고 방법)

 

 

1. 들어가는 말

 

「 수행자들이여, 이 길은

중생들을 청정케 하고 슬픔과 비탄을 넘어

괴로움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며

성스런 길에 이르러 열반을 실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니라.

그 길은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길이니라. (대념처경) 」

 

「 이 길은 유일한 길이며 다른 길은 없느니라. (법구경) 」

 

즉, 알아차림의 길이 열반에 이르는, 고통을 해결하고 마음속 번뇌들을 소멸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알아차림의 길인 위빳사나-는 부처님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깨달음을 체험할 수 있도록 가르치신 실천 방법입니다.

2500여년의 역사를 통해서 테라와다 불교의 장로들에 의해 지켜질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연연히 전해져 온 위빳사나-는 누구라도 간단하게 실천할 수 있는 매우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어떤 좋은 것이라도 알아차림 없이 닦을 수 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자비심을 기르기 위한 바탕인 보시과 너그러움을 닦고자 한다면, 어떻게 이 일이 알아차림 없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베푸는 것을 잊으면, 그 기회는 가 버리고 그 시간도 흘러가 버릴 것이다.

모두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또 어떤 사람이 선정을 닦으려고 할 때 알아차리는 힘이 약하면, 그의 마음은 비몽사몽과 같은 멍청한 상태와 끊임없는 산란함으로 혼란해질 것이다. 이런 사람은 마음의 평온함이나 집중이 없을 것이고, 꿰뚫어 관찰하는 지혜 또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지혜는 강한 알아차림이 있을 때, 그것과 더불어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시, 지계, 선정, 지혜 등을 닦으려면 알아차림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설파하시고, 그 알아차림을 강인하게 하는 방법을 설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알아차림을 확립해주는 이 실천 수행법 따라 마음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꼭 스스로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2. 10가지 예비수행

 

수행을 하기에 앞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10가지 자세를 갖추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① 부끄러운 마음을 가질 것.

② 신체적으로 청정할 것.

③ 언어적으로 청정할 것.

④ 마음이 청정할 것.

⑤ 정돈된 일상생활을 유지할 것.

⑥ 모든 감각기관이 건강할 것.

⑦ 폭식, 폭음을 삼갈 것.

⑧ 수면시간을 줄일 것.

⑨ 올바른 앎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할 것.

⑩ 잡다한 일을 떠나 마음을 어지럽히는 갖가지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조건을 만들 것.

     

3. 수행의 기본적 설명

 

위빳사나-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위빳사나-(Vipassanā))는 두 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복합어입니다.

여기에서 접두사 ‘위(vi)’라는 말은 마음과 몸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無常), 불만족 또는 괴로움(苦), 무아(無我) 또는 에고가 없음을 말합니다. ‘빳사나-(passanā)’라는 말은 바른 이해 또는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마음(; nāma)과 몸(; rūpa)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뜻합니다.

 

  위빳사나- 수행 또는 마음챙김(사띠) 수행을 할 때 그 목적은 현상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주시하여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이 사띠 즉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사띠는 현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주시하여 그 현상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주시하려면 당연히 대상에 집중해야 하고 아울러 깨어있어야 합니다. 나비가 꽃잎위에 앉아 꽃가루만 훔치는 것처럼 대상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도, 나비가 꽃가루를 취하려는 탐욕심조차 없이 순수하게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또한 사띠는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일어나는 순간에 바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생겨난 것을 생겨날 때 바로 본다(부-땅 부-따또- 빳사띠 : bhūtaṁ bhūtato passati)"는 부처님의 말씀은 바로 위빳사나- 수행의 핵심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실제로 대상이 생기는 순간에 관찰하는 것입니다. 즉 알아차림은 일어나는 현상을 어떤 선입견이나 관념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보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만일 생각이 일어난다면 생각을 바로 알아차리고 그 진행과정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인식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이런 위빳사나-의 원칙을 반듯이 기억해야 합니다.

 

위빳사나-의 원칙이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그 무엇이던지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서, 알아차리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흔히 수행이라고 하면 앉아서 하는 좌선을 연상하기 쉬운데 부처님 당시의 수행은 오늘날처럼 한곳에서 계속 정진하기보다 숲 속 등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고 마을로 걸어 다니면서 탁발하는 생활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불교수행도 앉아서 하는 좌선보다는 걸어가면서 하는 경행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마음집중과 알아차림의 효과도 경행이 좌선보다 크고, 경행이 잘될 때 좌선이 잘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명심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수행이 어느 정도 성숙될 때까지는 좌선과 경행의 비중을 반드시 1 : 1로 하여 균형을 유지하여야 합니다.

 

4. 수행의 원칙들

 

알아차림 수행은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단지 알아차림할 뿐 대상에 대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않고 일어난 그대로 평등심으로 주시하여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인위적으로 조정하여 도망치듯이 없애려고도 하지 말고, 붙잡아 반응하고 휘말려 들어 들뜨지도 말고, 그것들에 치우침 없이 그대로 놓아둔 채 단지 알아차림할 뿐입니다.

또한 ‘나’‘나의 것’이라는 개념과 무관하게 모든 일어난 현상을 그대로 알아차림 합니다. 몸과 마음 속에서 지금 일어나고 사라지는 변화를 주시하여 계속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알아차림이 연속하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상화되고 지속적인 수행으로 삶의 질을 개선하고 잘 훈련된 문지기가 되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자! 이제 이런 사띠(알아차림)의 연속인, 위빳사나- 수행을 더 잘할 수 있는 세 가지 원칙을 기억해 두시길 바랍니다.

 

① 슬로 모션

② 실황 생중계

③ 감각의 변화를 알아차림

 

첫 번째는 슬로 모션. 몸을 보통의 스피드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천천히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치 디스크 환자나 달팽이처럼, 수행자가 천천히 행동할 때 순간적으로 지금, 바로 그 수행 대상에 머물러 알아차려 관찰할 수 있고 담마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실황 생중계.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마음으로 확인하는 것. 그것을 중단함 없이 면밀하게 알아차립니다. 마치 나무와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들어 내듯이, 하나의 알아차림과 다음 알아차림, 이 전 사마디와 다음 사마디 사이에 조그마한 틈도 생기지 않고 면밀하게 이어지도록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실천하면 잡념이 사라져 순간순간 집중력이 생겨납니다.

  세 번째는 감각의 변화를 알아차림 하는 것. 손을 들거나 걷거나 앉거나 할 때마다 몸의 감각이 바뀝니다. 생각할 때도 격렬하게 감정이 변해갑니다. 이러한 변화를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고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로 수행하면 알아차림의 힘은 성장할 것이고, 담마를 발견하지 못한 수행자는 담마를 보게 되어 확연히 사물의 실체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삼원칙에 근거해 수행하는 것이 위빳사나- 실천이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알아차림 수행이라고도 합니다. 알아차림을 지닐 때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위빳사나- 지혜는 물질적(육체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이해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나에게 화를 낼 때, 상대방이 화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화에 반응하는 내 마음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화내는 일은 상대방의 일이고, 지금 내가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그 화에 반응하는 내 마음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상대에게 내가 화내는 불선업을 짓지 않고 그에 따른 과보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려 아는 것(지혜)이 반복되면 나의 삶이 조금씩 개선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위빳사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실제로 수행하는 수행자들이란 사실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개념으로만 알고 실제적인 체험수행이 없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보람이 없습니다. 마치 잘 구워진 고구마를 군침만 흘리고 바라보는데 남이 가져다 먹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5. 명칭붙이기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몸과 마음에서 무엇을 어떻게 관찰해야 할지 잘 모르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몸(물질)이 무엇이고, 마음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관찰하여야 하는가! 의문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존재에는 인습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습적인 것이란 예를 들면 ‘사람’‘강’‘집’‘시계’등 여러 가지 존재하는 일반적인 대상에 대해서 개념(paññati : 빤냣띠)지워서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고유한 성질(sabhāva : 사바-와)을 가진 실재가 아니라, 여러 가지 궁극적인 성품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들로 다만 편의상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강’이라고 할 때, 고정불변한 ‘한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제의 ‘한강’과 오늘의 ‘한강’은 똑같지 않습니다. 뚝섬 부근의 ‘한강’과 이촌동 부근의 ‘한강’은 동일한 물을 가진 강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강’이라고 명칭붙여 의사소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강’은 실재하는 것이 아닌, 단지 개념으로만 존재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궁극적인 것은 그 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가집니다. 이것은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존재의 최종적인 단위, 즉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paramaṭṭha : 빠라맛타)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의 요소나 불의 요소, 대상과 접촉하여 일어나는 느낌,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도 등은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그 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지닌 궁극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한역에서는 구경법(究竟法)이라고 말하고 근본불교에서는 담마(Dhamma :法)라고 합니다.

이 빠라맛타는 물질과 정신적인 현상의 실재적인 성품으로 존재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거의 인식하지 않고 개념 즉, 빤냣띠로 관념지어서 봅니다. 그러나 꾸준히 대상을 알아차려 관찰하다 보면 개념을 넘어 궁극적인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빠라맛타도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따라 일어났다 조건 따라 사라진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 ()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잘 관찰하여 완전한 이해와 지혜를 증득하면 열반에 이릅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물질)마음의 작용(心所)마음과 열반을 네 가지 궁극적 실재(빠라맛타)로 보아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개념(빤냣띠)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 빠라맛타의 특징과 역할 등을 분석하여 규명합니다. 우리는 이 궁극적으로 실제하는 어떤 것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위빳사나 수행을 통하여 확인하고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좌선 수행에서 배의 불러오고 꺼짐에 따라 ‘일어남’‘사라짐’하며 알아차림하고, 행선 수행할 때 발의 나아가고 내려놓음에 따라 ‘나아감’‘내려놓음’하며 알아차림 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때 마음이 배 혹은 발의 모양이나 형태라는 관념(빤냣띠)은 무시하고 실제적인 담마(빠라맛타)인 배가 불러올 때 단단함이 증가하는 것이라든지, 발을 들어 올릴 때 부드러운 바람의 요소를 관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개념이나 인습적인 관념(빤냣띠)은 놓아버리고 궁극적으로 실제하는(빠라맛타) 구체적인 물질인 지수화풍 4대요소를 포함하는 18가지 요소와 52가지 마음의 작용과 그에 따라 하나씩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려 최상의 지혜를 얻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빤냣띠와 빠라맛타는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연관되어 있어서 실천적으로 경험하여 이들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기위해서는 빤냣띠를 통해서만 알 수 있음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의 초기단계에서는 명칭이라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대상을 인식할 때 관습적으로 관념을 통해서만 인식해 왔습니다. 여기 한 자루의 연필이 있습니다. 연필이라는 대상이 눈의 망막을 통하여 인식될 때 ‘연필’이라는 언어적 약속 즉, 명칭을 통하여 그것이 연필임을 인식하는 구조로 습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대상이 일어날 때 그 일어나는 현상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 명칭이 필요합니다.

또한 마음이 알아차리고 있는 대상에서 조금만 느슨해지면 마음은 어김없이 방황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동물과 같아서 항상 자극적인 어떤 것을 향하려 합니다. 그 빠르기가 빛보다 빠르기 때문에 마음은 불건전한 성향에 쉽게 유혹 당합니다. 이런 이유로 「명칭」이 수행의 대상에 정확히 다가가게 하여 대상에 밀착하게 하며 분명한 알아차림을 도와주고 마음챙김하는 대상에서 이탈하지 않고 집중하는 것을 도와주기 때문에 초심자는 반드시 명칭을 붙여가며 알아차림할 것을 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수행의 목적은 빤냣띠(개념, 관념, 사량분별 등)를 놓아버리고 실재하는 그대로의 성품인 빠라맛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칭」을 붙이면 그 명칭의 언어적인 개념으로 말미암아 실재 존재하는 그대로의 성품을 보는 것이 방해받을 것입니다.

실제로 수행할 때, 일어난 현상을 분명하게 겨냥하여 알아차림하지 않고 명칭만 붙이며 건성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명칭을 붙이면 개념화되어 버리고, 그렇다고 명칭을 붙이지 않으면 마음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가려해서 알아차리는 대상이 희미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초심자는 명칭을 붙이며 마음챙김하여 알아차리는 힘을 키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 후 알아차리는 힘이 상당히 커져서 수행력에 제법 힘이 붙으면 반드시 명칭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대신에 단지 대상을 알아차리기만 합니다. 생각하거나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주 밀착해서 대상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잡아야 합니다.

단지 일어나는 현상을 마음챙김하는 동안 알아차림이 분명하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알아차림’이라는 명칭을 한 두 번 마음속으로 되 뇌이며 마음챙김하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분명해졌으면 명칭을 놓아버리고 알아차림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 바른 공부방법입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관찰하는 매 경우마다 그 현상에 대한 담마를 이해하여 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현상 내면에 숨어있는 담마를 의식적으로 탐험하듯이 찾아내려고 하면 결코 담마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찾아내려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한 관념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 관념 지어진 것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분명한 것은 담마는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드러나 있는 것을 봄으로써 그 현상의 성품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써서 담마를 찾아내려고 하지 말고 단지 그냥 그 대상을 알아차림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인연이 성숙되면 그 담마는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여 알아차림만을 계속해야 합니다.

 

6. 균형잡힌 수행을 위한 다섯가지 원리

 

  불행하게도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수행자는 보통 불안정한 행동과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방 지루해하고, 안절부절못하며, 건성으로 관념적인 알아차림을 하고, 빛이나 색깔 같은 것에 집착하며, 고요함에 안주하려 하고, 쉽게 법을 의심하고, 통증 등 불쾌한 감각을 싫어하여 두려워하고, 막상 담마가 드러나려는 순간이 올 때는 알아차리는 마음을 풀어버리고, 결국 해이해져 수행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수행자’란 생각으로 자만에 빠지기도 합니다.

수행은 진실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판단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주의를 기울려 정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균형 잡힌 힘으로 수행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수행을 도와주는 37가지 요인들 중 가장 기본이 되는 다섯가지 원리, 힘이라는 인드리야(indriya)입니다. 

 

그 다섯은,

신심의 힘(saddhā-indriya : 삿다- 인드리야)

노력의 힘(viriya-indriya : 위리야 인드리야)

알아차림의 힘(sati-indriya : 사띠 인드리야)

마음집중의 힘(samādhi-indriya : 사마-디 인드리야)

지혜의 힘(paññā-indriya : 빤냐- 인드리야)

 

신심의 힘(saddhā-indriya : 삿다- 인드리야)

삿다-는 다섯 가지 인드리야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삿다-는 ‘어떤 것’을 믿어 그것에 대해서 흔들림 없는 확신이 서는 것을 말합니다. 첫 번째로 그 ‘어떤 것’은 삼보인 붓다, 담마, 상가와 업(kamma : 깜마), 그리고 업의 결과vipāka : 위빠-까)에 대한 믿음입니다. 두 번째로 그 ‘어떤 것’을 믿음으로 인해 마음이 분명해지고 평온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붓다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시어 모든 의 번뇌에서 벗어난 분입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우리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그분께 예경 드리면 우리의 마음도 분명하고 평온해집니다.

담마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누구든지 조사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담마를 실천하여 분명하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함을 체험하고 담마에 대한 확신이 섭니다.

상가는 부처님의 뒤를 이어 담마를 깨치려는 성스러운 제자들이며 그분들의 공덕을 믿는 것입니다. 그 상가 역시 도와 과에 들은 성자들이라 합장 공경할 대상임을 알고 그 상가가 부처님의 담마를 설하시는 것에 따라 수행하여 분명하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체험해 상가에 대한 확신이 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히 생겨났다 우연히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원인 따라 짓고(업), 그 지은 조건 따라 결과를 낳는다(업보)는 사실을 받아들여 그 연기의 법칙을 체험해서 확신하게 될 때 우리는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균형잡힌 위빳사나 수행을 위한 원리 중에서 이런 신심의 힘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신심은 경전공부와 보시, 지계 등으로 공덕행을 닦는 것과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더욱 향상되어 갈 것입니다.

 

② 노력의 힘(viriya-indriya : 위리야 인드리야)

노력이란 수행을 행하는 에너지이며 수행을 밀고 나가는 힘입니다.

믿음의 힘이 기초되어 노력의 힘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대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마음집중하여 그것의 참 성품을 관찰함으로써 듫끊는 마음이 평온하게 가라앉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어떠한 대상을 만나더라도 항상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언젠가는 도와 과를 증득할 것이라는 서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확신과 서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노력의 힘은 강화됩니다.

 

③ 알아차림의 힘(sati-indriya : 사띠 인드리야)

알아차림의 힘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진행과정을 방심하지 않고 주의를 기우려서 알아차리는 힘입니다. 노력의 힘이 강하면 알아차림의 힘이 향상될 것이고 알아차림의 힘이 좋아지면 대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을 알아차려서 그것에 마음을 챙기게 됩니다.

 

④ 마음집중의 힘(samādhi-indriya : 사마-디 인드리야)

일어나는 현상에 마음이 집중되어 일념삼매가 되는 힘을 말합니다. 알아차림의 힘이 강하게 되면 이 마음집중의 힘이 향상됩니다. 수행자가 대상이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릴 때, 그는 감각대상을 알아차리는 순간을 인식하고 그 순간에 감각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이와 같이 알아차리는 감각대상의 현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의 작용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것을 찰라 삼매(khaṇika samādhi : 카니까 사마-)라고 합니다.

이런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삼매는 곧 마음집중의 힘이 향상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빈틈없이 면밀히 이어져 진행되면 항상 마음집중의 상태에서 현상을 관찰하게 되어 마침내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현상의 참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⑤ 지혜의 힘(paññā-indriya : 빤냐- 인드리야)

존재의 참 성품, 즉 무상?고?무아?연기 등의 담마를 확연하게 보아 이해하는 것을 지혜의 힘이라고 합니다. 마음집중의 힘이 향상되면 담마를 보게되어 지혜의 힘이 성숙되는 것입니다.

 

⑥이런 다섯 가지 힘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 먼저 신심의 힘과 지혜의 힘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 향상되어야 합니다.

신심만 성숙되고 지혜가 빈약하면 맹목적인 삿된 수행자가 됩니다. 형식적인 것에 매달리며 의식에만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잘못된 길로 이끄는 교리나 이론에 빠져버리는 수행자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경우를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는 신앙에서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불교 안에서도 부처님을 신격화 시켜놓고 신앙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행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또한 신심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지혜를 목적으로 지식만을 이해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면 필경 오만과 자만, 그리고 편견이 슬그머니 자리 잡게 될 것이고, 수행의 과정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려고 하면 그 분석적인 알음알이로 인해 마음집중이 방해받게 되어 알아차림도 약화되어 깨어지게 됩니다. 또한 믿음의 힘도 줄어들게 됩니다. 오직 깨달음을 체험하고 난 후라야 자신의 경험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 또한 노력의 힘과 마음집중의 힘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 향상되어야 합니다. 노력의 힘만 강하고 마음집중의 힘이 약하면 수행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할 수 없어 항상 들뜸(uddhacca : 웃닷짜)이 있습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너무 열성적이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반해 집중력이 약하여 마음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마음은 산만해지고 들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힘들이지 말고 일어나는 현상을 주의깊게 알아차리면서 노력을 조금 줄입니다. 그렇게 하면 점차로 마음집중이 쉬워지고 노력도 안정되고 확고해져 강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마음집중의 힘만 강하고 노력의 힘이 약하면 활력이 떨어져 나태와 게으름(kosajja : 꼬-삿자)에 떨어질 것입니다. 수행을 오래도록하면 마음집중이 아주 강해져서 알아차리는 마음이, 별 노력도 없이 대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럴 때 충분한 노력을 가하지 않으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점차 둔해지고 무거워지다가 혼침이나 졸음에 떨어지게 됩니다. 더구나 허리가 펴져있질 않고 힘없이 좌선할 경우에 많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는 마음집중과 노력 사이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행수행을 더 오랫동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수행자만이 노력을 능가하는 마음집중을 경험하므로 노력과 마음집중을 균형 있게 성장시켜야 합니다.

노력의 힘을 받쳐주는 수행은 행선이며, 마음집중의 힘을 받쳐주는 수행은 좌선입니다. 따라서 별도의 수행지도가 있기 전 까지는 좌선과 행선에 같은 시간을 분배하여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 그러나 알아차림의 힘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습니다. 알아차림은믿음노력지혜의 힘이 강하여 들뜸에 빠지는 것을 지켜주고, 마음집중의 힘이 강하여 게으름에 빠지는 것 또한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알아차림은 모든 경우에 요구됩니다. 마음은 알아차림에 의지해 있고 알아차림은 감각기관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며 알아차림이 없으면 마음이 노력하는 것도, 조절하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행위에 알아차림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그리하여 알아차림이 끊어짐없이 지속적으로 순일하게 이어지게 되면 깊은 마음집중이 생겨나게 됩니다.

마음집중이 깊어질때 꿰뚫어보는 지혜가 자연스럽게 펼쳐지며 몸과 마음의 과정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위빳사나의 바탕이고 삼매의 전제라고 합니다. 항상 알아차림의 힘은 지속적이고, 강하고, 한결같고 끊어짐이 없어야 합니다.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들이 강하지만 균형 잡혀있지 않으면, 수행자가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얻어 번뇌의 소멸이라는 깨달음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런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을 예리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몸이나 건강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인내심 있게 수행해야 합니다.

  알아차림하는 대상은 무엇이라도 상관없지만 편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절하는 법」 「앉는 법」「걷는 법」 「서는 법」「눕는 법」「밥 먹는 법」「일상 생활하는 법」이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수행하는 방법을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7. 절 

 

절은 수행의 도구입니다. 경행 수행으로 마음에 활기를 불어 넣어줘야 할 시간이 없거나, 바로 좌선 수행으로 들어갈 때 이와 같이 합니다.

 

(1) 합장

무릎을 꿇고 양손을 가지런히 펴서 손바닥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상태에서

① (오른손) 돌림. 돌림. 돌림

② (오른손) 올림. 올림. 올림

③ (오른손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④ (왼손) 돌림. 돌림. 돌림.

⑤ (왼손) 올림. 올림. 올림

⑥ (왼손 가슴에) 닿음. (양손이) 닿음. 닿음 (합장한 모습이 됩니다)

⑦ (두 손) 올림. 올림. 올림

⑧ (이마에) 닿음. 닿음. 닿음 (합장한 엄지손가락이 이마에 닿음)

⑨ (두 손) 내림. 내림. 내림

⑩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2) 부처님 예찬 독송

합장한 채 부처님 예찬을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으로 독송합니다.

 

나모 - 땃사 바가와또 - 아라하또 - 삼마 - 삼붓닷사. (3번)

(그 분 존귀하신 분, 번뇌로부터 떠나신 분,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분께 귀의합니다.)

 

이띠삐 소 - 따타 - 가또 - 아라항 삼마 - 삼붓도-

윗자 - 짜라나삼빤노 - 수가또 - 로 - 까위두 -

아눗따로-뿌리사담마사-라티 삿타-데-와마눗사-낭 붓도-바가와-띠.

(그 분, 부처님은 진리를 가르침에 능숙하신 분,

모든 번뇌로부터 떠나신 분,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분,

지혜와 덕행을 함께 갖추신 분,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분,

세상의 모든 일을 잘 아시는 분, 위없는 스승,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분, 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입니다.)

 

(3) 부처님 공경

합장한 상태에서 경전 독송이 끝난 후 공경의 예를 표하는 절을 시작합니다.

①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② (오른손) 내림. 내림. 내림

③ (오른손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④ (오른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⑤ (왼손) 내림. 내림. 내림

⑥ (왼손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⑦ (왼손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⑧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⑨ (바닥에) 머리 닿음. 닿음. 닿음 

 

(4) 부처님께 참회 게송 독송

그 상태 (몸을 오체투지한 상태)로 참회 게송을 독송합니다.

 

까-예-나 와-짜-야 와 쩨-따사-와-

붓데- 꾸깜망 빠까땅 마야-양

붓도- 빠띡간하뚜 앗짜얀땅

깔란따레- 상하리뚱 와 붓데-

(몸에 의해서나, 말에 의해서나, 마음으로 인해서,

부처님께 어긋나게 제가 지은 크고 작은 나쁜 행위들

부처님을 의지하여 그 모든 허물의 용서를 빕니다.

이후로 부처님을 본받아 조심스레 행하겠나이다.) 

 

(5) 부처님께 경배

몸을 바닥에 구부린 상태에서 알아차리면서 서서히 꿇어앉은 자세로

돌아옵니다.

① (몸을) 일으킴. 일으킴. 일으킴

② (오른손) 돌림. 돌림. 돌림

③ (오른손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④ (오른손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⑤ (왼손) 돌림. 돌림. 돌림

⑥ (왼손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⑦ (왼손 가슴에) 닿음. (양손바닥이) 닿음. 닿음

⑧ (두 손 머리위로) 올림. 올림. 올림

⑨ (이마에) 닿음. 닿음. 닿음 (합장한 엄지손가락이 이마에 닿음)

⑩ (두 손 아래로) 내림. 내림. 내림

⑪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6) 담마 예찬 독송

합장한 채 담마 예찬을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으로 독송합니다.

 

스왁카-또 바가와따- 담모-

산딧티꼬- 아깔리꼬- 에- 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띠.

(담마는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위없는 진리,

즉시 확인할 수 있고, 결과는 곧바로 나타나니,

지체없이 와서 확인해 보라 초청하시었으니,

이는 마음으로 인도되는 진리, 지혜로운 이 스스로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7) 담마 공경

합장한 상태에서 경전 독송이 끝난 후 공경의 예를 표하는 절을 시작합니다.

①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② (오른손) 내림. 내림. 내림

③ (오른손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④ (오른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⑤ (왼손) 내림. 내림. 내림

⑥ (왼손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⑦ (왼손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⑧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⑨ (바닥에) 머리 닿음. 닿음. 닿음

       

(8) 담마에 참회 게송 독송

그 상태 (몸을 오체투지한 상태)로 참회 게송을 독송합니다.

 

까-예-나 와-짜-야 와 쩨-따사-와-

담메- 꾸깜망 빠까땅 마야-양

담모- 빠띡간하뚜 앗짜얀땅

깔란따레- 상와리뚱 와 담메-

(몸에 의해서나, 말에 의해서나, 마음으로 인해서,

담마에 어긋나게 제가 지은 크고 작은 나쁜 행위들

담마를 의지하여 그 모든 허물의 용서를 빕니다.

이후로 담마를 본받아 조심스레 행하겠나이다.)

       

(9) 담마에 경배

몸을 바닥에 구부린 상태에서 알아차리면서 서서히 꿇어앉은 자세로

돌아옵니다.

① (몸을) 일으킴. 일으킴. 일으킴

② (오른손) 돌림. 돌림. 돌림

③ (오른손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④ (오른손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⑤ (왼손) 돌림. 돌림. 돌림

⑥ (왼손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⑦ (왼손 가슴에) 닿음. (양손바닥이) 닿음. 닿음

⑧ (두 손 머리위로) 올림. 올림. 올림

⑨ (이마에) 닿음. 닿음. 닿음 (합장한 엄지손가락이 이마에 닿음)

⑩ (두 손 아래로) 내림. 내림. 내림

⑪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10) 상가 예찬 독송

합장한 채 상가 예찬을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으로 독송합니다.

 

수빠띠빤노- 바가와또- 사- 와까상고-

우주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냐-야빠띠빤노- 바가와또- 사- 와까상고-

사-미-찌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야디당 짯따-리 뿌리사유가-니 앗타 뿌리사뿍갈라-

에-사 바가와또-사-와까상고-

아-후네이요- 빠-후네이요- 닥키네이요- 안잘리- 까라니-요-

아눗따랑 뿐냑켓땅 로-깟사-띠.

(진실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들인 상가,

정확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들인 상가,

올바르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들인 상가,

여법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들인 상가,

이분들이야말로 네 쌍의 대장부이며 여덟 무리의 성자들입니다.

이분들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들인 상가이니,

응당 공양 올리 가치있는 분들, 환영할 가치있는 분들,

시주 올릴 가치있는 분들, 합장 공경할 가치있는 분들이며,

이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복을 심는 대상입니다.)

 

(11) 상가 공경

합장한 상태에서 경전 독송이 끝난 후 공경의 예를 표하는 절을 시작합니다.

①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② (오른손) 내림. 내림. 내림

③ (오른손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④ (오른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⑤ (왼손) 내림. 내림. 내림

⑥ (왼손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⑦ (왼손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⑧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⑨ (바닥에) 머리 닿음. 닿음. 닿음

     

(12) 상가에 참회 게송 독송

그 상태 (몸을 오체투지한 상태)로 참회 게송을 독송합니다.

 

까-예-나 와-짜-야 와 쩨-따사-와-

상게- 꾸깜망 빠까땅 마야-양

상고- 빠띡간하뚜 앗짜얀땅

깔란따레- 상와리뚱 와 담메-

(몸에 의해서나, 말에 의해서나, 마음으로 인해서,

상가에 어긋나게 제가 지은 크고 작은 나쁜 행위들

상가를 의지하여 그 모든 허물의 용서를 빕니다.

이후로 상가를 본받아 조심스레 행하겠나이다.)

 

(13) 상가에 경배

몸을 바닥에 구부린 상태에서 알아차리면서 서서히 꿇어앉은 자세로

돌아옵니다.

① (몸을) 일으킴. 일으킴. 일으킴

② (오른손) 돌림. 돌림. 돌림

③ (오른손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④ (오른손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⑤ (왼손) 돌림. 돌림. 돌림

⑥ (왼손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⑦ (왼손 가슴에) 닿음. (양손바닥이) 닿음. 닿음

⑧ (두 손 머리위로) 올림. 올림. 올림

⑨ (이마에) 닿음. 닿음. 닿음 (합장한 엄지손가락이 이마에 닿음)

⑩ (두 손 아래로) 내림. 내림. 내림

⑪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14) 좌선 자세

천천히 합장을 풀고 좌선할 수 있게 앉습니다.

① (오른손) 내림. 내림. 내림

② (오른손 무릎위에) 닿음. 닿음

③ (오른손바닥을) 덮음. 덮음. 덮음

④ (왼손) 내림. 내림. 내림

⑤ (왼손 무릎위에) 닿음. 닿음. 닿음

⑥ (왼손손바닥을) 덮음. 덮음. 덮음 

(그런 후 아주 천천히 좌선 자세를 취합니다. 이때에도 다리의 구부림, 손의 닿음, 허리를 폄, 등등 모든 동작을 천천히 알아차리면서 행해야 합니다. )

     

(15) 자애 방출 게송 염송

좌선자세로 앉아 마음을 안정하고 자애 게송 등을 암송합니다.

 

< 자애 방출 게송 >

아항 수키또-호-미 내가 행복하기를!

닛둑코-호-미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아웨-로-호-미 사악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아바야-빳조-호-미 슬픔과 번민 등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아니-고-호-미 아픔과 질병 등 육체적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기를!

 

8. 알아차림의 요령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차려서 마음집중하여 관찰합니다. 이것은 모든 수행의 대상에 대한 관찰에 적용됩니다.

 

‘가’라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① ‘가’라는 현상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립니다.

② ‘가’‘가’라고 「명칭」을 마음속으로 붙이며 그 현상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③ ‘가’의 현상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그 현상이 사라질 때까지 관찰합니다.

④ ‘가’의 현상을 관찰하는 동안 ‘가’의 실재적인 성품인 ‘나’를 알게 되면 그 현상을 알아차립니다.

⑤ ‘가’의 실재적인 현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 나’라고 「명칭」을 붙이며 그 현상에 집중합니다.

⑥ ‘나’의 현상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그 현상이 사라질 때까지 관찰합니다.

⑦ ‘나’가 실재적인 현상이며 고유한 성품임을 이해합니다.

⑧ 그 현상을 이해하고 나면 주 관찰대상인 배의 ‘일어남’‘사라짐’현상관찰로 즉시 돌아옵니다.

이와 같이‘가’의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관찰하는 동안(①~③) 그 관찰을 통해 관찰의 순간마다 반드시 그 현상‘가’의 실재적인 성품인 ‘나’가 드러나서 그것을 이해(④~⑧)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성숙되면 언젠가는 자연적인 실재하는 담마의 참 성품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통의 경우에는 ①⇒②⇒③⇒⑧의 순서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무릎에 ‘통증’이라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① 무릎에 통증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립니다.

② ‘통증’‘통증’이라고 「명칭」을 붙이며 그 통증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③ 그 통증이 변화하는 과정을 관찰합니다.

대개 알아차림 하면 통증이 증가하다가, 지속하다가, 그리고는 서서히 사라집니다.

수행자의 관찰이 면밀히 진행된다면 통증이란 실재하는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빤냣띠)이며, 사실적으로 실재하는 것(빠라맛타)은 ‘열’혹은‘쑤심’ 혹은‘저림’ 혹은 ‘땡김’이라는 현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자가 알고 이해하게 되는 담마 중의 하나입니다.

 

통증의 내용이 만약 ‘쑤심’이라고 알았다면, ‘통증’에서‘쑤심’으로 명칭을 바꿔서 관찰해야 합니다.

④ 실재하는 현상으로 쑤심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⑤ ‘쑤심’‘쑤심’이라고 명칭을 붙이며 그 쑤심의 현상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⑥ 그 쑤심이 변화하는 과정을 관찰합니다.

쑤심이 처음에는 약하게 진행되다가 점점 강해졌고, 열이 발생하였고, 한참 후 서서히 약해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쑤심이 일어난 그 부위가 뻐근하였는데 쑤심이 사라짐에 따라 점차 뻐근함도 사라졌다,는 사실을 실제로 확연하게 알았다.

⑦ 그래서 쑤심이 실재적인 현상이며 고유한 성품임을 이해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수행관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이렇게 하여 쑤심의 통증이 사라지면 즉시,

⑧ 배의 ‘일어남’‘사라짐’현상관찰로 돌아옵니다.

  뻐근함, 단단함은 地(흙)와 水(응집성)의 요소입니다. 열의 발생은 火(열기)의 요소입니다. 쑤심은 風의 요소입니다.

수행자는 쑤심이 일어나는 부위가 ‘나’의 몸이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요소들의 작용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존재일 뿐임을 알 수 있게 되는 한 것이 됩니다. 또한 쑤심이라는 존재가 그곳에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변화를 이루면서 결국에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수행자는 아직은 거칠지만 ‘무상’이라는 성품의 단면을 경험한 셈이 됩니다. 담마란 오묘하고 애매모호한 초월적인 ‘그 무엇’이 결코 아님을 안 것입니다.

    

9. 좌선 수행


  이제 좌선 수행의 방법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좌선 수행할 때 주의할 점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연스런 호흡을 알아차림하며 수행할 것.

둘째,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지 않게 눈을 살며시 감을 것.

셋째, 손과 발, 몸을 좌선 시간동안 움직이지 말 것.

넷째, 허리와 목을 똑바로 유지할 것.

다섯째, 가장 현저한 하나의 현상만 관찰의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란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있는 물질 현상들과 정신 현상들을 사실대로 바르게 알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물질 현상이란 지금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몸 전체가 물질의 집합, 물질 현상들입니다.

정신 현상이란 알고 있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물질과 정신 현상들은 사물을 볼 때마다 분명하게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물질과 정신 현상들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볼 때 마다 '‘봄’‘'봄’'으로 주시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주시하고 알아차린다는 것은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지혜로 집중해서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 꿰뚫는 것을 말합니다. 소리가 귀에 들릴 때마다 역시 '‘소리 들림’‘'소리 들림’'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코에서 냄새를 맡을 때에도 '‘냄새 맡음’‘'냄새 맡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혀에서 맛을 알 때에도 '‘맛을 앎'’‘'맛을 앎’'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에 닿을 때에도 '‘닿음'’'‘닿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상상하고 생각하고 계획할 때마다 역시 '‘상상함’‘생각함’‘계획함’등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수행 초기에는 볼 때마다, 들을 때 마다, 닿을 때 마다, 알 때마다,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알기 쉬운 주 대상부터 시작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숨 쉴 때, 배 안에서 불러오고 꺼지면서, 뻣뻣하고 긴장되고 움직이고 수축하고 하는 것이 생겨나는데 이런 배의 움직임을 관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숨 쉴 때 알 수 있는 와-요-다-뚜 (vāyodhātu : 바람의 요소) 로 불리는 물질 현상입니다.

수행자가 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바람의 요소의 개별적 특성인 움직임, 동작, 떨림 또는 지탱해주는 힘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때는 반드시 배의 움직임을 관찰해야지, 호흡을 따라가며 전 과정을 관찰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이것부터 시작하여 주시해야 합니다.

이것을 주시할 수 있도록 우선 배에 마음을 집중해서 보고 있어야 합니다.

숨을 들이 쉴 때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숨을 내 쉴 때 배가 꺼져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불러오는 것을 ‘일어남’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꺼져가는 것은 ‘사라짐’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즉‘일어남’‘사라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배의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명칭 자체는 위빳사나- 수행이 아닙니다. 하지만 명칭은 대상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는데 도움이 됩니다. 위빳사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일인데, 이 알아차림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명칭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대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고정하여 보고 있는 것만으로 아직 배의 움직임이 분명치 않다면 배에 손을 대고 보십시오. 숨 쉬는 것은 고치지 마십시오.

호흡을 느리게 하기 위해서 숨을 참지도 말고, 호흡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도 마십시오. 강하게도 호흡하지 마십시오. 숨 쉬는 것을 고치면 쉽게 지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 숨 쉬는 대로 자연스럽게 숨을 쉬어야 합니다. 숨 쉬는 것이 잘못되면 다시 원래대로 두십시오. 

이렇게 보통으로 숨 쉬고 있으면서 배가 불러오는 것을 ‘일어남’으로 알아차리고, 배가 꺼져가는 것을 ‘사라짐’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일어남’‘사라짐’이렇게 명칭을 붙이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치 않습니다.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릴 때, 일어남의 시작부터 일어남의 끝까지, 배가 불러오는 것을 눈으로 보듯이 확실히 알도록 해야 합니다.

‘사라짐’으로 알아차릴 때에도 사라짐의 시작부터 사라짐의 끝까지, 배가 꺼져가는 것을 눈으로 보듯이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일어남’으로 알아차릴 때, 배가 불러오는 것과 그것을 아는 것이 딱 붙도록 해야 합니다. 돌을 던졌을 때 표적에 '탁' 하고 맞는 것처럼, 저쪽에서 나타나는 관찰대상과 이쪽에서 주시하는 마음이 동시에 정확하게 들어맞을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라짐’으로 알아차림 할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사라짐'과 알아차림 하는 것이 정확하게 들어맞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알아차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이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 두 가지만을 알아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일어남’‘사라짐’‘일어남’‘사라짐’ 이렇게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단지 있는 그대로 바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항상 주 대상에 가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주 대상을 하나 두는가 하면, 마음이 항상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안 그러면 알아차릴 대상을 놓쳤을 때 그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기 때문에 주 대상을 두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주 대상에 마음이 항상 가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는 또 다른 망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다른데 가 있을 때는 괴롭거나 속상할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처음 마음을 둔 곳에 마음이 계속해서 붙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잠깐 있으면 금방 달아나 버립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마음이 한 곳에 붙어 있기를 바라지 말고, 또한 마음이 고요해지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마음이 고요해 질 수가 없습니다. 아마 고요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일면 진땀이 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좌선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만약 망상을 하면 망상하는 줄 알면 됩니다. 그냥 단순하게 아는 것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꾸 알도록 하는 것, 그것만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망상할 때마다 내가 안다면 그것이 바로 알아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망상하는 줄을 모르면 망상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망상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망상에 계속 빠져 있지 않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망상에 빠져도 망상을 문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리가 시끄러워도 소리를 문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소리가 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어떤 때,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에게 한 시간 동안 망상을 얼마나 했느냐고 질문을 하면 한 번도 안 했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하루 이틀 뒤에는 한 시간에 두세 번 망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오 일이 지난 뒤에는 한 시간 내내 망상을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처음에 수행을 시작할 때는 망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망상은 수행할 때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현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고 과거나 미래로 가서 지난 일을 생각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일을 생각하는 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 없이, 생각으로 하는 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배의 ‘일어남’‘사라짐’으로 알아차리고 있자면 마음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빠져나가는 마음도 따라가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빠져나감’‘빠져나감’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이렇게 한 두 번 쯤 알아차리면 더 이상 빠져나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배로 돌아와서 ‘일어남’‘사라짐’‘일어남’‘사라짐’으로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마음이 어떤 장소에 도달하게 되면 ‘도달함’‘도달함’으로 알아차리십시오.

그것이 끝나면 배의‘일어남’‘사라짐’으로 돌아와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상상 속에서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되었을 때에도‘만남’‘만남’으로 알아차리십시오. 그러고 나서 배의‘일어남’‘사라짐’으로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상상 속에서 어떤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까지 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생각도 ‘말함’‘말함’으로 주시하십시오.

 

핵심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상상이나 계획들이 생겨날 때마다 그것을 따라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알아차리는 방법은, 상상하면‘상상함’이라고 알아차리고, 생각하면‘생각함’이라고 알아차리십시오.

계획하면‘계획함’으로, 알면‘앎’으로, 떠올리면‘떠올림’으로 알아차리십시오.

마음속에서 행복하다고 여겨지면‘행복함’‘행복함’이라고 알아차리십시오.

지루할 때도‘지루함’‘지루함’이라고 알아차리고, 기쁠 때에는‘기쁨’‘기쁨’이라고 알아차리십시오. 실망할 때에도‘실망함’‘실망함’이라고 알아차리십시오.

 

이와 같이 생각들이 생겨날 때마다 주시하여 알고 있는 것을 찟따-누빳사나- (cittānupassanā : 마음을 반복하여 관찰함) 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마음이 생겨날 때마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마음을 사람 또는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상상하고 있는 것이 '나'다, 내가 생각하고 있다, 내가 계획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다." 고 여깁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나」라는 자아가 정말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실제로는 「나」,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이 마음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찰나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마음을 자기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 주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들이 생겨날 때마다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마음은 알아차리기만 하면 쉽게 사라집니다. ‘계획함’‘계획함’이라고 한 두 번 쯤 알아차리면 없어집니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배의‘일어남’‘사라짐’‘일어남’‘사라짐’으로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오랫동안 앉아있으면 몸속에서 뻐근함, 뜨거움도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들도 따라가 알아차려야 합니다. 뻐근하면 뻐근함을 확실히 알기 위해 마음으로 집중하여‘뻐근함’‘뻐근함’으로 알아차리십시오.

뜨거울 때에도‘뜨거움’‘뜨거움’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아플 때에도‘아픔’‘아픔’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지칠 때에도‘지침’‘지침’으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졸음이 오면‘졸림’‘졸림’하고 알아차립니다. 졸음은 수행자의 아주 가까운 친구입니다. 이러한 뻐근함, 뜨거움, 아픔, 쑤심, 욱신거림, 지치고 힘듦, 불편함은 모두 둑카웨다나- (dukkhavedanā : 고통스러운 느낌)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웨다나-누빳사나- (vedanānupassanā : 느낌을 반복하여 관찰함) 라고 합니다.

  이 느낌들이 생겨날 때마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뻐근함, 뜨거움, 아픔, 쑤심, 욱신거림 등을 「나」 라고 여기게 됩니다.

“내가 뻐근하다,” “내가 뜨겁다,” “내가 아프다,” 이렇게 「나」, 「존재」라고 여깁니다. “예전에는 내가 좋은 상태에 있었는데 지금은 불편해졌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을 「나」라는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좋지 않은 경험들과 자꾸 만나면 좋지 않은 느낌들이 하나씩 하나씩 새로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전구에 새로운 전력이 계속 공급될 때, 전구의 빛이 끊이지 않고 밝혀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안의 좋지 않은 경험들과 새로 접촉할 때마다 좋지 않은 느낌들이 하나씩 하나씩 연속하여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뻐근하면‘뻐근함’ 뜨거우면‘뜨거움’ 아프면‘아픔’이라고 이렇게 집중하여 알아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알아차림의 초기에는 뻐근함, 뜨거움, 아픔과 같은 것들이 점점 더 뻐근해지고 뜨거워지고 아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세를 바꾸고 싶은 마음들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도‘자세를 바꾸고 싶음’‘자세를 바꾸고 싶음’이라고 알아차리고, ‘뻐근함’‘뜨거움’으로 돌아가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인내하면 닙바-나에 도달한다.”(참으면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내하면 닙바-나에 도달한다.”는 말은 다른 어느 곳보다 여기 수행하는 곳에서 더 유용합니다.

수행한다면 인내해야만 합니다. 통증은 인내심을 가지고 관찰해야 합니다.

통증이 심해진다고 곧바로 몸을 움직이거나 자세를 바꾸면 안 됩니다.

 

단지 일념집중 수행의 멧따-(mettā : 자애)수행을 시작할 때는 자세를 바꾸어도 좋습니다. 멧따- 수행을 하는 동안 통증이 일어나면 마음에서 멧따-의 느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통증이 일어난다고 자세를 바꾸면 나쁜 버릇이 됩니다. 나쁘다는 말은 수행에 나쁘다는 말입니다. 통증 때문에 자세를 바꾸면 조금만 불편함을 느껴도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바꾸게 되고 집중이 깨지고 맙니다. 뻐근함, 뜨거움을 인내하지 않고 자주 움직여서 자세를 바꾼다면 사마-디(samādhi : 집중)가 생길 수 없습니다.

사마-디(집중)가 생기지 않으면 빤냐-(paññā : 지혜)도 생기지 않습니다.

지혜가 생기지 않으면 도와 과, 닙바-나(열반)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내하며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에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은 주로 몸 안의 둑카웨다나-(고통스러운 느낌)들을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는 수행자들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한 번의 좌선시간동안 손을 놓은 위치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뻐근함, 뜨거움, 아픔, 견디기 어려운 것들이 생겨날 때, 갑자기 알아차림을 깨고 움직이거나 자세를 바꾸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뻐근함’‘뻐근함’, ‘뜨거움’‘뜨거움’등으로 인내하여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인내하여 알아차리고 있으면 웬만한 느낌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마-디(집중)와 빤냐-(지혜)의 힘이 좋을 때에는 매우 큰 느낌들조차도 사라져 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라질 때에는 배의 ‘일어남’‘사라짐’으로 다시 주시해 나가면 됩니다.

꽤 오랫동안 확고하게 알아차려도 사라지지 않고 그다지 편안하지 않다면 자세를 고쳐야합니다. 그러나 자세를 고치고자 하는 마음부터 시작해서‘고치려 함’‘고치려 함’으로 알아차리십시오. 팔이 올라가면‘올라감’‘올라감’으로 알아차리고, 움직이면‘움직임’‘움직임’으로 알아차리십시오.

물론 천천히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천천히 움직여가는 것을 따라가면서‘올라감’‘올라감’‘움직임’‘움직임’‘닿음’‘닿음’으로 이렇게 순서대로 알아차려가야 합니다. 몸이 기울어지면‘기울어짐’으로 알아차리고, 다리가 올라가면‘올라감’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움직이면‘움직임’으로 알아차리고, 내리면 ‘내림’‘내림’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자세를 고치는 것이 끝나 차분히 정지되었다면 배의‘일어남’‘사라짐’‘일어남’‘사라짐’으로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사이에 멈추고 쉬어서는 안됩니다.

 

앞의 알아차림과 그 뒤의 알아차림이 연결되도록 해야 합니다.

앞의 사마-디(집중)와 뒤의 사마-디, 앞의 빤냐-(지혜)와 뒤의 빤냐-가 하나로 연결되어 가야만 사띠, 사마-디, 빤냐-들이 한 단계 한 단계 점점 높아지고 성숙되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차츰 성숙되어져서 힘이 완전히 채워졌을 때에야 비로소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불을 지피는 사람처럼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냥이 나오기 전의 먼 옛날에는 나무끼리 비벼서 불을 피워야 했습니다. 이렇게 불을 피울 때 불을 피우는 사람은 불이 붙을 때까지 계속하여 쉬지 않고 비벼대야 합니다. 나무가 뜨거워질수록 점점 더 힘주어 비벼야 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비벼대어 아주 뜨거운 것보다도 더 뜨거워지게 되면 불이 붙습니다. 그때에야 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앞의 알아차림과 뒤의 알아차림, 앞의 사마-디와 뒤의 사마-디가 끊이지 않고 연결되도록, 알아차림이 하나로 쭉 이어지도록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따라서 뻐근함, 뜨거움 들을 알아차려 그것이 사라지면 멈춰있지 마십시오. 배의‘일어남’‘사라짐’‘일어남’‘사라짐’으로 바로 이어지도록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고 있다가 다시 어딘가 가려워지면 이것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려운 곳에 마음을 집중하여‘가려움’‘가려움’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이것 역시 견디기 어려운 둑카웨다나-(고통스러운 느낌)입니다.

가려움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면, 이 마음도‘없애고 싶음’‘없애고 싶음’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손으로 긁어서 없애면 안 됩니다. 없애고 싶은 마음을 알아차린 후에 다시 ‘가려움’‘가려움’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확고하게 알아차림하고 있자면 가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려움이 사라지면 배의‘일어남’‘사라짐’으로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가려움이 사라지지 않을 경우에는 가려움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없애고자 하는 마음부터 시작하여 알아차려 가야 합니다.

‘없애고자 함’‘없애고자 함’으로 알아차리십시오. 팔이 올라가면‘올라감’‘올라감’으로 알아차리고, 움직이면‘움직임’‘움직임’으로 알아차리고, 가려운 곳에 닿으면‘닿음’‘닿음’으로 알아차리십시오. 긁을 때는 밀고 당길 때마다‘없앰’‘없앰’‘긁음’‘긁음’으로 알아차리십시오. 팔을 내릴 때는‘내림’‘내림’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어떤 장소에 손이 닿게 되면 ‘닿음’‘닿음’으로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배의‘일어남’‘사라짐’으로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몸의 동작들을 바꿀 때마다 모두 이와 같습니다. 어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바꿀 때마다 바꾸고자 하는 마음부터 시작해서 빈틈없이 꼼꼼히 알아차려나가야 합니다.

  앉은 곳에서 일어나겠다고 생각하면 그 마음을‘일어나려 함’‘일어나려함’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팔다리의 자세를 바꿀 때마다‘올라감’‘올라감’‘움직임’‘폄’‘닿음’‘짚음’등으로 순서대로 알아차리면서 바꾸어야 합니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면‘기울어짐’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일어설 때에는 몸이 점점 가벼워지면서 차츰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을 집중하여‘일어섬’‘일어섬’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역시 천천히 일어나야 합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힘이 있어도 언제나 힘없는 환자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보통의 건강하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걸어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갑자기 아주 빠르게 움직입니다. 매우 부산하게 움직입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들은 일어설 때 아주 부드럽고 섬세하게 움직입니다. 허리가 아플까봐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힘을 모아서 천천히 일으킵니다.

수행할 때에도 이렇게 힘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뭐든지 천천히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천천히 자세를 바꿔야 사띠, 사마-디, 빤냐-가 잘 의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 초기에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알아차림을 훈련해야 합니다.

‘일어섬’‘일어섬’으로 알아차림하며 환자처럼 천천히 일어서야 합니다.

정말로 환자와 같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눈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귀가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수행 중에는 오직 알아차림 하나만이 자신의 할 일입니다.

그 이외의 보이는 것들, 들리는 것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Attāhi attano nātho.(앗따-히 앗따노- 나-토-)”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수행처로 삼아서 마음챙김을 지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간직하고 지키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신기하고 이상한 것들이 보여도, 보이지 않는 듯 알아차림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무리 신기하고 이상한 것들이 들려도, 들리지 않는 듯 알아차림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몸의 동작을 바꿀 때에도 건강하지 않은 사람, 힘없는 사람들처럼 천천히 부드럽게 바꾸어야 합니다. 팔을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이고, 구부리고, 펴고, 머리를 숙이고, 젖히고, 이 모든 것들을 조용하고 섬세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배의 불러오고 꺼지는 감각이 매우 불분명하여 도저히 주 관찰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는 경우나 혼침, 망상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분명히 알아차림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주 관찰대상을 배의 ‘일어남’‘사라짐’에서 ‘앉음’하나를 더 보태어 ‘일어남’‘사라짐’‘앉음’을 주 관찰대상으로 하여 알아차립니다.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00닿음’을 하나 더 보태어 ‘일어남’‘사라짐’‘앉음’‘00닿음’을 주 관찰대상으로 하여 알아차립니다.

 

  여기서 ‘앉음’은 머리에서 바닥에 닿은 대퇴부까지 내려오며, 현저한 느낌의 감각들을 알아차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앉아 있는 몸의 형태나 모양을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앉음의 형상은 그대가 만들어 놓은 개념, 빤냣띠일 뿐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있는 사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태가 뚜렷하게 보이는 데도 굳이 보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애쓰지도 마십시오. 형태가 매우 뚜렷하면 그것이 뚜렷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집중을 조금 진행하면 그 형태들은 계속해서 변하여 갈 것입니다. 그것이 고정된 형태를 지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것은 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머리에서 대퇴부까지 내려오면서 어떤 감각들이 현저하게 있는가를 느끼도록 노력하십시오. 위빳사나 수행은 현저한 현상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의 사마-디가 향상되면 자연적으로 형태는 나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형태가 남아있으면 아직 그대의 사마-디가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또한 ‘닿음’은 눈꺼풀이 서로 닿아 있는 감각, 입술이 맞닿아 있는 감각, 양손이 맞닿아 있는 감각, 엉덩이가 바닥에 닿은 감각, 발목의 복숭아 뼈가 바닥에 닿아 있는 감각, 등을 하나씩 알아차림 합니다. 대개는 거기에 약간의 단단함이나 딱딱함, 뜨거움, 부드러움, 뻣뻣함, 뜰림, 등의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몸의 네 가지 요소입니다. 이런 요소들을 관찰의 대상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관찰하여서 마음집중이 오랫동안 잘 이루어지면 ‘앉음’‘닿음’은 놓아버리고 원래의 주 관찰 대상인 배의 ‘일어남’‘사라짐’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계속해 나가면 됩니다.

 

  집중과 알아차림이 강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상이 일어난 바로 그 때에 마음이 그 곳에 있어야 합니다. 마치 번개가 치기 전에 하늘을 봐도 볼 수 없고, 번개가 치고 나서 하늘을 보면 천둥소리만 들을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과 마음 안에 있는 담마는 관찰하는 동안 순간적으로 조건 지워 졌다가 재빨리 사라져 버립니다. 또한 동일한 상황으로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담마를 경험했다고 해서 똑같은 담마를 경험하려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래서 「지금」「여기서」「바로 그것」을 알아차려야만 담마를 볼 수 있습니다.

 

  좌선이나 와선 수행에서 주 관찰 대상은 배의 ‘일어남’‘사라짐’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주로 하는 관찰 대상이므로 위빳사나 수행에서 진전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여기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배가 팽창할 때 배가 팽창하는 모습이나 형태의 상이 나타나는데 수행자들이 그것을 대상으로 관찰하고 있는 경향을 흔히 봅니다. ‘상’은 자기가 만든 관념입니다. 이것은 관찰의 대상이 아닙니다.

배의 ‘일어남’의 실재는 배가 부풀어 오르는 팽창하는 감각, 팽창감입니다. 숨을 들이 쉬면 배의 안쪽에서 바깥으로 밀어내는 힘이 감지될 것입니다. 그 팽창하는 힘의 느낌이 관찰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팽창력이 수축되는 느낌, 팽창력이 점점 소멸되는 느낌이 ‘사라짐’이며 그것이 관찰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배의 ‘일어남’‘사라짐’을 관찰할 때, 배가 일어나는 모습이나 배가 사라지는 모습을 대상으로 하지 말고, 배의 ‘일어남’은 배가 “팽창하는 느낌”을, 배의‘사라짐’은 배가 “수축되는 느낌”을 대상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10. 경행 수행

 

  경행 수행할 때 주의할 점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시선은 180cm정도 앞을 내려다 볼 것.

둘째,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지 말 것.

셋째, 발을 내려놓을 때 발바닥 전체를 자연스럽게 내려놓을 것.

넷째,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 일정한 거리(대략 20m정도)를 왕복하는 것입니다.

 

 경행을 할 때는 일단 마음이 몸에 가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켜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알아차리도록 해야 합니다. 대상이 아주 선명하게 잘 느껴지는 것은 적절한 알아차림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간에, 계단 올라갈 때나 내려갈 때도 항상 알아차리도록 해야 합니다. 

* 자, 손을 바닥에 대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차갑고 딱딱하고 여러 가지 느낌이 있음을 알아차리겠습니까? 그리고 팔목과 팔에도 느낌이 있습니다.

지금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마음이 가는 곳에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입니다. 

* 자 다시 알아차리면서 손을 위로 천천히 들어 올려 보십시오.

조금 높게 들어 올려 보십시오. 이제 손을 천천히 내려 보십시오.

이렇게 들어 올릴 때 들어 올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릴 때 내리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 자! 들어 올릴 때는 가볍고 내릴 때는 무겁습니까?

경행을 할 때도 이와 같습니다. 발을 들어 올릴 때는 가볍고 내릴 때는 무겁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닿았을 때는 차갑거나 단단한 느낌이 있습니다.

경행을 할 때는 바로 이런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움직일 때는 마음이 움직이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람의 요소가 일어나면서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이때 있는 것이라고는 움직이려는 의도와 움직임만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움직임을 아는 것이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때 가볍고 무겁고 단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도와 움직임과 이것을 아는 마음만 있지 내가 움직이거나 내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런 현상만 있을 뿐입니다.

앉은 자세에서 일어설 때에는 ‘일어섬’‘일어섬’으로 알아차리며 천천히 일어서야 합니다. 허리를 펴고 서게 되었을 때는 ‘서있음’‘서있음’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여기저기를 둘러보게 되었다면‘봄’‘보임’으로 알아차리십시오.

갈 때에는 발걸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처음에는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 걷도록 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항상 걸을 때마다 알아차리면서 걸어야 합니다.

손이 움직이면 손이 움직이는 것, 고개가 움직이면 고개가 움직이는 것, 발이 움직이면 발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무릎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려도 되고, 엉덩이뼈가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려도 됩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주 대상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경행을 할 때는 주 대상이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발이 아닌 다른 대상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알아차린 뒤에 다시 마땅한 대상이 없을 때는 가장 움직임이 큰 발로 돌아오면 됩니다.

 

움직일 때는 처음에는 발에다 마음을 붙여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오른발을 움직일 때는 오른발을 알아차리고, 왼발을 움직일 때는 왼발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차츰 발목, 종아리, 무릎 등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걸을 때 처음에는 발이 바닥에 '닿음'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그런 뒤에 차츰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오른발, 왼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다리를 내려놓을 때까지의 점차적인 움직임들을 순서대로 알아가야 합니다.

빨리 걸을 때나 멀리 갈 때에는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이렇게 한 걸음에 한 가지씩 알아차려나가면 됩니다.

천천히 걸을 때, 경행을 할 때에는 오른발 ‘들어올림’‘내려놓음’, 왼발‘들어올림’‘내려놓음’이렇게 한 걸음에 두 단계로 나누어 알아차리며 걸어야 합니다.

다리가 들어 올리는 것을 '들어올림'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들어 올리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려놓는 것을 '내려놓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점점 무거워지며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두 단계로 나누어 알아차리는 것도 이틀쯤 지나면 쉬워질 것입니다.

이렇게 집중력이 생겨 쉬워지게 되면 세 단계로 나누어 알아 차려야 합니다.

‘들어올림’‘나아감’‘내려놓음’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누어 알아차림 하면서 걸어야 합니다.

집중이 한층 잘 되어져서 다리의 움직임을 확연하게 알아차리게 되면 여섯 단계로 나누어 경행하십시오.

즉, ‘뒤꿈치 들어올림’‘앞꿈치 들어올림’‘나아감’‘내려놓음’‘닿음’‘누름’으로 더욱 세밀하게 알아차려 나가야 합니다.

더 더욱 마음이 움직이는 발에 집중되어 예리해질 때 아홉 단계로 나누어 알아차림 하면서 걸어야 합니다.

발을 들어 올릴 때는, ‘들어 올림’‘발바닥 떨어짐’‘올라감’이라고 구분하고

발을 옮길 때는 ‘나아감’‘나아감’‘나아감’이라고 구분하고, 발을 내릴 때는 ‘내려놓음’‘닿음’‘누름’이라고 9단계로 나누어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방향을 돌릴 때는, 서 있는 자세를 ‘서있음’ 하고 4-5번 알아차리고, 돌려고 하는 의도를 관찰하면서 ‘돌고자 함’ ‘돌고자 함’ 하고 알아차린 후, ‘돎’ ‘돎’ 하면서 180도로 도는 동작을 알아차립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너무 느리게 걸어 알아차림이 흩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행자 마음의 가라앉음 정도에 따라 다르게 구분하여 걷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처음에는 움직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차츰 움직임의 느낌을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다음 단계로 느낌을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다음 단계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법의 성품인 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손은 한정된 공간에서 할 때는 앞으로 모으거나 뒷짐을 지거나 자연스럽게 하십시오. 다만 걸을 때 손을 흔들고 걷지는 마십시오. 우선 마음이 한 걸음, 한걸음 걷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 있으면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걸을 때는 항상 발에다 마음을 두고 느낌을 알아차리면서 걸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걸으면서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경행을 할 때는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도 알아차리고, 마음으로 의도가 일어나는 것, 그리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다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이쪽 발에 가면 이쪽이 움직이는 것을 알고, 저쪽 발에 가면 저쪽 발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오른발, 왼발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마음을 기울여야만 알 수 있지,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의 핵심이 바로 마음이 일을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경행을 할 때는 자신의 행동을 억제해서 억지로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하면서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행동을 억제하면 긴장하게 되고 하루 종일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 너무나 피곤해서 지치게 됩니다. 마음이 긴장했다 싶으면 일단 먼저 긴장한 마음을 풀어줘야 합니다. 마음이 긴장하면 몸도 긴장하게 됩니다. 또한 몸이 피곤하면 마음도 풀어져서 알아차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을 하는 마음은 절대 긴장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차분하고 평화로우며 편안하고 자유로워야 합니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알아차리는 것 단 한 가지 뿐 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알아차려야 합니다. 완전하게 매 순간 알아차림을 지속하십시오.

 

다시 말해 지금 수행 초기에는 한 단계나 두 단계로 나누어 알아차리면 충분합니다. 빨리 걸어갈 때에 ‘오른발’‘왼발’이렇게 한 가지씩 알아차리고 천천히 갈 때는 ‘들어올림’‘내려놓음’ 이렇게 두 단계로 나누어 알아차리십시오.

이렇게 걷다가, 앉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앉고자 함’‘앉고자 함’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앉을 때에는 몸이 점점 무거워지며 내려갑니다.

이것에 집중하여 ‘앉음’‘앉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앉았을 때에도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들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모든 움직임이 끝나 정지되었다면 배의 ‘일어남’‘사라짐’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고 있을 때 뻐근함, 뜨거움 들이 생겨나면 이것들도 따라다니며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것이 끝나면 배의 ‘일어남’‘사라짐’으로 돌아가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고 있다가 졸리면 ‘졸림’‘졸림’으로 알아차립니다. 

이처럼 경행 수행을 좌선하기 전에 1시간정도 하도록 하십시오. 최소한 30분은 해야 합니다.

 

11. 입선 수행

 

좌선 수행 중 집중력이 약해지면서 졸음이 밀려 올 때 졸음을 쫓는 한가지 방법이 입선 수행입니다. 또한 경행 수행에서 일정한 거리를 경행한 후 걸음을 멈추어 섰을 때나 방향을 돌린 후 나아가기 전에 하는 것이 입선 수행입니다.

  가능한 한 천천히 손의 움직임,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림 하면서 서 주십시오. 고개를 바르게 하고 목과 팔, 어깨의 긴장을 빼며 손은 앞이나 뒤로 마주 잡습니다. 두 발은 가지런히 약간 사이를 두고(어깨넓이의 반 정도) 서 있으면서, 눈은 반쯤 뜨고, 마음을 다리로 향하여 서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서있는 동작 자체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래로 내려가며 ‘서있음’하고 알아차리며 가장 강하게 일어나는 느낌을 마음 집중하여 관찰합니다. 혹은 발바닥에서 머리 위까지 위로 올라가며 ‘서있음’하고 알아차리며 가장 강하게 일어나는 느낌을 마음 집중하여 관찰합니다.

 

이때 서 있는 몸의 형태나 모양을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현저한 느낌의 감각들을 알아차림 하면 됩니다. 그 서있는 형상은 그대가 만들어 놓은 개념일 뿐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있는 사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만약 감각을 관찰할 수 없고 그 대신 서있는 형태가 매우 뚜렷하면, 일부러 외면하지 말고 그 서있는 형태를 단순하게‘서 있음’‘서 있음’하며 알아차림을 계속하십시오. 그 뚜렷한 형태도 알아차리며 집중을 조금 진행하면 그 형태들은 계속해서 변하여 갈 것입니다. 그것이 고정된 형태를 지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것은 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려오면서 혹은 발끝에서 머리까지 올라가면서 어떤 감각들이 현저하게 있는가를 느끼도록 노력하십시오.

 

위빳사나 수행은 현저한 현상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의 사마-디가 향상되면 자연적으로 서있는 형태는 나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형태가 남아있으면 아직 사마-디가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그래도 마음이 대상에 붙어있지 못하거나 몸이 흔들거리면 ‘방황하고 있음’하고 알아차리거나,‘흔들림’하며 알아차린 후에,‘닿음’하나를 추가해 주십시오. ‘닿음’은 발바닥이 바닥에 닿아 있는 감각을 알아차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개는 거기에 딱딱함, 뜨거움, 쑤심 등의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느낌들을 관찰의 대상으로 하면 됩니다. ‘서있음’‘닿음’‘서있음’‘닿음’하며 알아차림을 계속하십시오.

  그래도 졸음이 물러가지 않든지, 몸의 모양이나 형태가 드러나면 배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어남’‘사라짐’을 추가해 주십시오.

그래서 ‘일어남’‘사라짐’‘서있음’‘닿음’하며 알아차림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마음의 활력을 불어넣어 노력의 힘을 배가 시켜 줄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관찰하여서 마음집중이 오랫동안 잘 이루어지면, 형태가 드러나지 않고 감각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서있음’‘닿음’은 놓아버리고 원래의 주 관찰 대상인 배의 ‘일어남’‘사라짐’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계속해 나가면 됩니다.

 

이런 입선 수행은 5분이나 10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오랫동안 서있게 되면 힘이 들고 피곤해져 정신이 몽롱해지고 쓰러질 염려도 있습니다. 또한 다리나 발목 등에 부담이 되어 통증을 일으키게 되니 무리한 긴 시간의 정진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차, 버스, 택시정류장 등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 괜히 서성거리며 좌우를 살피는 불안한 모습을 보일 필요 없이 자신의 서있음과 몸이 접촉되는 부분을 관찰해 알아차림 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태도는 조용해져 마치 큰 바위가 흙 속에 묻힌 듯 할 것입니다.

입선 수행을 자주하면 모든 일에 이처럼 의지가 곧고 안정되며 침착하고 조용한 모습을 갖출 수가 있습니다.

 

12. 와선 수행

 

눕기 전에 움직이는 모든 동작들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팔을 올리면 ‘올림’‘올림’으로 알아차리고, 움직이면 ‘움직임’‘움직임’으로 알아차리고, 짚으면 ‘짚음’‘짚음’으로 알아차리십시오. 몸이 기울면 ‘기욺’‘기욺’으로 알아차리고, 다리를 뻗으면 ‘뻗음’‘뻗음’으로 알아차리십시오. 기울여서 누울 때에는 ‘누움’‘누움’으로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누워야 합니다.

이렇게 눕는 것을 주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동안에도 특별한 법이 생겨 날 수 있습니다. 사마-디와 지혜의 힘이 강할 때면 언제라도 특별한 법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팔을 한 번 굽힘과 폄 안에서 조차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아난존자가 아라한이 된 것은 이렇게 눕는 동안이었습니다.

아난존자는 제 1차 상가 결집이 열리기 전날, 하룻밤 만에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맹렬하게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밤새 경행을 하면서 까-야가따-사띠 (kāyagatāsati : 몸의 행위를 반복하여 관찰하는 수행)를 발전시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경행 수행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오른발’‘왼발’, ‘들어올림’‘나아감’‘내려놓음’, 이런 종류의 알아차림입니다.

가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정신적 현상과 앞으로 움직여 가는 물질 현상들이 한 부분씩 한 부분씩 생성되고 소멸되어져 가는 것들을 주시하다 보니 아침 동틀 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아라한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아난존자는 경행을 너무 많이 해서 위리야(viriya : 노력, 용기)가 지나치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마-디와 위리야가 균형을 이루도록 잠시 누워서 수행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난존자는 침대위에 앉은 자세에서 눕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눕는 동안에 ‘누움’‘누움’하며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알아차림을 통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눕기 전에 아난존자는 단지 수다원 이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동안에 그는 이 수다원에서 사다함의 도와 과에 도달했습니다.

거기서 다시 계속 위빳사나-를 수행하여 아남함의 도와 과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위빳사나-를 계속 수행하여 아라한의 도와 과에 도달했습니다. 이렇게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 위와 같이 도와 과의 세 단계를 올라가서 아라한이 된 것은 한 순간, 눕는 순간이었습니다. 전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어떠한 순간에라도 수행을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한 아난존자가 아라한이 된 예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느 때이건 노력하여 알아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때라고 생각해서 알아차림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눕는 때에도 진지하고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누운 후에도 팔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것들도 모두 빈틈없이 철저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정지되었다면, 배의 ‘일어남’‘사라짐’, 이것만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밤이 깊어서 잘 시간이 되어도 알아차림을 놓고 잠들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자지 않겠다는 태도로 과감하고 대담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이처럼 수행자는 밤이 깊어서 졸려도 알아차림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하나로 쭉 이어지도록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계속 알아차리다가 잠들도록 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이기면 잠들지 않을 것이고, 졸음이 이기면 잠들 것입니다. 졸리면 ‘졸림’‘졸림’으로 알아차리십시오. 눈이 가물거리면 ‘가물거림’으로, 눈이 무거워지면 ‘무거움’으로, 눈이 따가우면 ‘따가움’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눈이 다시 맑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 때에는 ‘맑음’‘맑음’으로 알아차리고는 배의 ‘일어남’‘사라짐’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알아차리고 있어도 정말 졸리면 잠들게 됩니다. 잠드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쉽습니다. 누워서 알아차리고 있으면 점점 가물가물해지다가 곧 잠들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수행 초기의 수행자들은 누워있는 시간이 많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반대로 좌선과 경행 시간이 많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서 잘 시간이 되었을 때에는 누워서 배의‘일어남’‘사라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고 있으면 저절로 잠들게 될 것입니다. 잠들어 있는 시간은 수행자에게 쉴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수행하는 수행자라면 4시간 이상 자면 안 됩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한밤중의 시간입니다. 4시간 정도 자면 아주 충분합니다. 만약 4시간 정도로는 건강을 위해 충분치 않다면 수행 초기의 수행자들은 5시간, 6시간 정도까지 잘 수 있습니다. 6시간이라면 건강을 위해서 정말 충분합니다.

이렇게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깨어나는 순간부터 시작해 알아차려야 합니다. 도와 과에 도달하기 위해 진지하게 수행하는 수행자는 잠들어 있는 시간에만 쉬어야 합니다. 그 밖의 깨어있는 시간에는 알아차림이 하나로 이어지도록 쉬지 않고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깨어난 마음을 알 수 있다면, ‘깨어남’‘깨어남’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직 알아차릴 수 없다면, 배의 ‘일어남’‘사라짐’부터 시작하여 알아차리면 됩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겠다고 생각하면,‘일어나려고 함’‘일어나려고 함’으로 알아차리십시오. 다리를 움직여야 할 때 이것들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머리를 들어 일어나는 것도 알아차리고, 팔 다리를 움직이는 것들이 있으면 이것들도 모두 알아차리십시오.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고요하게 앉아있다면 배의 ‘일어남’‘사라짐’으로 평소 알아차리던 대로 알아차려 나가면 됩니다.

 

13. 음식먹기

 

  음식을 먹을 때도 알아차리면서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무슨 마음으로 먹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먹을 때는 항상 탐심을 가지고 먹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음식을 먹을 때,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무슨 마음으로 먹는가를 알아차린 뒤에 먹어야 합니다. 만약 탐심이 있다면 먹는 것을 중지하고 다시 그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한 뒤에 다시 ‘지금 무슨 마음으로 먹는 가’를 알아차려서 탐심이 없을 때 식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탐심을 먹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먹을 때 먹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탐심으로 먹는 가’‘성급한 마음으로 먹는 가’아니면 ‘편안한 마음으로 먹는 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꼭 공양하는 시간에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또는 다른 곳에서 음식을 봤을 때, 과자를 먹을 때, 그럴 때마다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먹을 때 ‘성급한 마음이 일어나는 가’‘탐심이 일어나는 가’‘더 먹으려고 하는 가’‘배가 부른데도 많이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가’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알아차리면서 먹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알아차리는 습관은 약하고 탐심은 아주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아차려서 마음이 일단 편안해졌을 때는 탐심도 없고, 성급한 마음도 없고, 들떠 있는 마음도 없고, 긴장하는 마음도 없을 때입니다. 먹는 것은 이때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을 먼저 보고 난 뒤에 이런 마음이 없어지면 그 다음에는 발우나 그릇에 음식을 알맞게 담아야 하고, 밥을 먹을 때는 밥상을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봄’‘보임’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밥상에 팔을 뻗는 것, 닿는 것, 밥을 모으는 것, 가지고 오는 것, 고개를 숙이는 것, 입안에 밥을 넣는 것, 팔을 다시 떨어뜨리는 것, 머리를 다시 세우는 것, 이러한 움직임들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씹을 때는 씹을 때마다 ‘씹음’‘씹음’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씹는 동안에 맛을 아는 것은 ‘앎’‘앎’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즐거워지면 ‘즐거움’으로 알아차리고, 좋다고 생각하게 되어도 ‘좋음’이라고 알아차리십시오. 음식물이 식도 전체를 반복해서 닿으며 내려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닿음’‘닿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은 밥 한 숟가락을 먹을 때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다음 숟가락질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국을 마실 때도 보는 것, 보이는 것, 숟가락을 잡는 것, 팔을 뻗는 것, 푸는 것, 뜨는 것, 가지고 오는 것, 마시는 것, 삼키는 것, 이렇게 알아차려야 할 것들이 매우 많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모두 다 잊지 않고 알아차림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노력하여 자주자주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합니다.

 

성급한 마음이 있으면 알아차릴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자꾸 점검해 주어야 합니다. ‘마음속이 편안한가’‘긴장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자꾸 점검해 봐야 합니다.

공양할 때 젓가락을 들고 이것저것을 집기 위해 망설이면서 탐색하게 되기도 합니다. 음식을 많이 떠서 가져올 때 밥상에 흘리기도 합니다. 또는 몇 번 씹지도 않고 성급하게 삼키거나 아직 씹지도 않았는데 다시 음식을 입에 넣기도 합니다. 또한 남이 먹을 양까지도 자기가 가져다 먹습니다.

  이 모두가 탐심을 가지고 먹는 것입니다. 이처럼 음식을 탐심으로 먹지 말아야 하고, 음식의 모양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닭고기, 돼지고기, 과일 등 음식의 모양이나 이름을 먹어서는 안 되고 음식의 맛을 먹어야 합니다. 닭고기는 관념이고 맛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자들은 실재하는 맛을 먹어야 합니다.

  이 말은 맛을 탐하라는 말이 아니고 음식이 가지고 있는 맛이라는 성품을 알면서 먹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이 자주 ‘음식에 혓바닥을 데이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뜨겁지도 않은데 왜 혓바닥을 데이지 말라고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탐심으로 먹지 말고 성품으로 먹으라는 충고였습니다. 탐심으로 먹으면 돼지고기, 생선 등의 관념에 휩싸여 맛있고 맛없고를 분별하게 됩니다. 그래서 탐욕이란 뜨거움이 생겨나서 마음의 혓바닥을 데이게 되는 것입니다. 닭고기라는 명칭을 먹지 않으므로 해서 탐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음식의 맛을 먹을 때는 맛의 변화에만 주목해야 합니다.

음식에 따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탐심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싫어하는 음식이 있을 때는 바로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이때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을 내도 안 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도 안 됩니다. 단지 일어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알아차리기만 하면 좋거나 싫거나 하는 마음 없이 차분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법을 알아차리면서 먹게 되고, 적당히 알맞게 먹게 될 것입니다.

 

14. 일상의 알아차림 수행


  수행자에게 일상의 알아차림은 매우 중요합니다.

좌선과 경행을 할 때만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외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일상의 알아차림에 속합니다.그날그날의 평범한 일상 중에서 몸과 마음이 하는 모든 일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말을 할 때도 말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말을 해야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해야 합니다. 수행센터에서 수행을 할 때보다, 방 안에 있을 때 일상의 알아차림이 더 중요합니다. 방 안에 있을 때 알아차림을 더 놓치기 쉽기 때문에 방 안에서는 더욱 알아차리도록 해야 합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내 몸이 움직이는 느낌들을 하나하나 보도록 해야 합니다. 이때는 행동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서도 일어날 때의 방법과 마찬가지로 먼저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호흡을 주시하면서 잠을 자야 합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모기장을 걷고 나오는 것, 문을 열고 닫는 것, 화장실에 가는 것, 세면장에서 양치질과 세수를 하는 것, 목욕을 하는 것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옷을 고쳐 입는 것, 침구를 정리하는 것, 문을 닫고 여는 것들은 모두 철저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또한 걷거나 침묵하거나 먹고 마시고 대소변을 볼 때까지도 그 순간순간에 하고 있는 어떤 형태의 것이라도 모두 알아차리면서 해야 합니다.

 

조금 빨리해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 모두 알아차리면 됩니다.

지금 마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것을 계속 알아차려야 합니다.

무엇 하나도 그냥 놓아버려서는 안 됩니다. 몸과 마음을 항상 붙여서 몸과 마음이 하는 일을 다 알아차리면서 해야 합니다. 이런 것 외에 달리 마음집중을 계발하거나 어떤 특별한 수행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단지 알아차리면서 마음을 집중하기만 하면 됩니다.

 

  절에서 수행을 할 때는 성급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급하게 하면 더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아이들을 학교 보내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밥을 지어야 할 일도 없고,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단지 수행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는 것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꼭 빨리 가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알아차리면서 걷는 것이 필요합니다.

 

 수행자는 언제나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꼭 법당에 가서만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행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있는 곳에서 계속 하는 것입니다.

  수행 초기의 사람들에게는 잊어버리는 것과 알아차릴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알아차림 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 건너뛰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후에 사마-디(집중)와 지혜의 힘이 좋아지게 될 때는 모두 다 빈틈없이 알아차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이것저것 너무 광범위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알아차려야 할 핵심 대상들을 잘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약해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이 향상을 이루기 위해 수행자가 열심히 마음챙겨 알아차리고 관찰해야 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도중에도 이 생각들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그 생각을 세심하고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수행은 향상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일상 동작을 자세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상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이 없다면 위빳사나 수행에서 향상은 없습니다. 천천히 세심하게 자신의 일상 동작을 하나하나 의도에서부터 전 과정을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세 번째는 좌선이고, 네 번째가 행선입니다.

 

집중 수행하는 동안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말을 하지 않고 고귀한 침묵을 지키는 것과, 천천히 움직이는 것입니다.

5분 동안 말을 하면, 3일간의 마음집중이 깨지고 맙니다.

 

다시 핵심만 이야기하면,

걸을 때는 걸음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빠르게 걸을 때는, ‘오른발’‘왼발’‘오른발’‘왼발’로 한 걸음에 한 가지씩만 알아차리면 충분합니다.

천천히 걸을 때는, ‘들어올림’‘나아감’‘내려놓음’‘들어올림’‘나아감’‘내려놓음’이렇게 한 걸음에 세 단계로 나누어 알아차리면 됩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배의 ‘일어남’‘사라짐’‘일어남’‘사라짐’ 이 두 가지만 알아차려야 합니다.

누워 있을 때도 특별히 알아차릴 대상이 없으면, 배의 ‘일어남’‘사라짐’을 알아차리다가, 생각들로 인해 마음이 밖으로 빠져나가면 이 마음을 따라가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것이 끝나면 배의 ‘일어남’‘사라짐’을 다시 알아차리십시오.

뻐근함, 뜨거움, 아프고 쑤시는 통증이나 가려움이 있으면 그것도 따라가 알아차리십시오.

그것이 사라지면 배의 ‘일어남’‘사라짐’을 다시 알아차리십시오.

그 사이에 굽히고 펴고 움직이고 고개를 숙이고 젖히고 기울고 똑바르게 펴고 하는 움직임, 행위들이 있으면 이것들도 따라가 알아차리십시오.

그것이 끝난 후에는 배의 ‘일어남’‘사라짐’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 초기에는 마음이 여기저기 달아나서 알아차릴 수 없는 것들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 초기에는 어느 누구도 잊지 않고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이후에 훈련이 많아지게 되면, 마음이 밖으로 나갈 때마다 알아차릴 수 있고, 알고 있게 됩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전혀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됩니다. 알아차려야 하는 대상에만 마음이 딱 붙어서 머물게 됩니다.

저기서 배가 불러오는 것과 여기서 ‘일어남’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딱딱 맞게 됩니다. 알아차릴 때마다 알아차림의 대상과 ‘앎’이 쌍을 이루게 됩니다.

알아차림의 대상인 물질과 알아차려서 아는 마음, 즉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가 짝을 이루게 됩니다.

 

  사람, 중생이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 물질과 이 마음, 이 두 가지만이 짝을 이루어 생겨나고 있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일어남’‘사라짐’으로 알아차림하고 있으면 '일어나는 물질', ‘일어남’으로 아는 마음, '사라져가는 물질', ‘사라짐’으로 아는 마음,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가 짝을 이뤄 맞아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 구분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들 모두가 '알아차려 알아야 하는 물질'과 '알아차려서 아는 마음', 즉 물질과 정신 두 가지뿐이라는 것을 스스로의 지혜로 명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아는 지혜, 즉 나-마루-빠 빠릿체-다 냐-나 (nāmarūpapariccheda ñāṇa) 입니다.

이것이 위빳사나- 지혜의 시작입니다.

 

계속해서 주시하면, 찰나에 나타나서는 찰나에 사라져가는 것을 스스로의 지혜로 보게 될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물질과 정신이 일생동안 항상 고정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어렸을 때의 그 물질이 지금까지 이어져 어른의 몸이 되었다고 여기고, 어렸을 때의 그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어른의 마음이 되었다고 여기곤 합니다. 물질과 정신을 「나」라는 한 사람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고정되어져 있는 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생겨나서 지금 즉시 사라지는 것들뿐입니다. 눈 한 번 깜빡거릴 시간만큼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생겨나서 소멸되고, 생겨나서 소멸되고, 이렇게 빠르게 생성되고 소멸되는 법들뿐입니다. 이것을 시간이 흐르면, 계속적인 알아차림을 통해서 스스로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차림을 계속하면 어릿어릿 거리며 사라져가는 것들뿐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하지 않은 것들뿐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닛짜-누빳사나- 냐-나(aniccānupassanā ñāṇa : 무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여 아는 지혜)입니다.

 

  또한 나타나서 사라지는 것들뿐이기에 고통들뿐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둑카-누빳사나- 냐-나(dukkhānupassanā ñāṇa : 고통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여 아는 지혜)입니다.

몸 안에 견디기 어려운 불편함 들도 많이 경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고통의 덩어리, 고통의 모임일 뿐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도 '둑카-누빳사나- 냐-나'입니다.

 

알아차림의 대상인 물질과 정신들은 아무 것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그것들 각자의 특성대로 생겨나고 소멸되는 현상들뿐입니다.

알아차림을 하면서 이러한 것들만 보게 되기 때문에, 다스리고 통제할 수 없는 법들뿐이며, '사람', '존재', '나', 가 아닌 법칙, 특성들일 뿐이라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아낫따-누빳사나- 냐-나(anattānupassanā ñāṇa : 무아를 지속적으로 관찰하여 아는 지혜)입니다.

 

이러한 아닛짜, 둑카, 아낫따(무상, 고 , 무아)의 지혜들이 잘 완성되어질 때, 알아차림 안에서 닙바-나(열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예전의 부처님과 아라한, 성인들이 닙바-나로 갔던 것도 오직 이 위빳사나-의 길을 통해 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수행할 수행자들은 자신이 부처님과 아라한, 성인들이 지나간 그 사띠빳타-나, 위빳사나-의 큰 길 위에 도달해 있다고 여겨야 합니다.

“도와 과와 닙바-나(열반)의 법을 얻기를 바랍니다.”라고 서원하며 행한 선업 바라밀이 있고, 도와 과와 닙바-나(열반)를 바로 지금 이 생에서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선근공덕이 쌓여서 부처님, 아라한, 모든 성인들이 지나간 사띠빳타-나, 위빳사나-의 큰 길 위에 우리들이 지금 도달해 있다고 여기고 기뻐해야 합니다.

 

  이 큰 길을 따라 차례로 걸어가다 보면, 예전에 부처님과 아라한, 성인들이 알고 본 특별한 선정(집중)과 특별한 지혜들을 스스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었던 마음의 고요함, 사마-디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마-디로 인해 생겨나는 특별한 법, 법의 특별한 맛들, 기쁘고 환희로운 것, 좋은 것들도 많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물질과 정신현상, 무상, 고, 무아라는 특성들도 자기 자신의 지혜로 직접 보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가 완전해질 때, 부처님과 아라한, 성인들이 깨달은 도의 법, 과의 법, 닙바-나의 법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수행하는 기간 동안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 달 안, 20일 안에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드문 경우, 매우 특별한 바라밀을 가진 사람이라면 7일 이내에 경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아라한, 성인들이 깨달은 도와 과와 닙바-나(열반)의 법에 15일, 20일, 한 달 안에 반드시 도달할 것이라고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이러한 도와 과와 닙바-나의 법에 스스로 도달해서, 사악도에 떨어지게 할 수 있는 삭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 : 유신견), 위찌낏차-(vicikicchā : 불법승 삼보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의심)들이 없어지게 되고 사악도의 윤회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상사라(saṁsāra : 윤회) 내내 만나야 할 사악도의 고통에서 머잖아 반드시 해방될 것이라고 믿고 확신하며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

  완전한 노력을 기울여 수행해서 부처님과 아라한, 성인들, 고귀한 이들이 알고 본 닙바-나의 법을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로 빠르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5. 수행의 점검 과정(보고 방법)

 

점검 과정은 아주 간단합니다. 당신은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수행의 핵심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 자신에게 자신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위빳사나가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간결성, 정확성, 정밀도 같은 과학의 세계에서 사용되어지는 기준에 충실하도록 하십시오.

 

우선은, 가장 최근의 하루 동안에 몇 시간의 좌선 수행을 했으며 몇 시간의 경행을 했는지를 보고하십시오. 당신이 이에 관해 매우 진실되고 정직하다면, 그것은 당신 수행이 진지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당신의 수행과정을 묘사하십시오. 각 좌선수행을 모두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각 좌선수행들이 비슷했다면 당신은 공통적인 것들을 묶어서 보고하면 됩니다. 가장 분명했던 좌선을 세부묘사 하도록 하십시오. 수행의 주 대상인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부터 묘사를 시작하십시오. 이것 후에 여섯 감각기관 중에서 일어난 다른 대상을 추가해도 됩니다.

 

좌선수행을 묘사한 후에 경행 수행을 이야기하십시오. 여기에서 당신은 걷는 움직임과 직접 관련된 경험만을 묘사해야만 합니다. 좌선수행을 묘사할 때 포함되었을지도 모르는 대상들은 포함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경행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의 세 단계로 관찰을 한다면 각 부분들과 당신이 그 부분에서 경험한 것들을 포함하도록 하십시오.

 

무엇이 일어났으며, 어떻게 그것을 알았으며, 무슨 현상이 일어났나.

수행의 어느 대상이든지 이러한 대상들에 대하여 세 단계로 당신의 경험을 보고하십시오. 하나, 무엇이 일어났나를 확인하십시오. 둘,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보고하십시오. 그리고 셋, 당신이 본 것, 느낀 것, 이해한 것을 묘사하십시오. 말하자면 당신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무슨 현상이 일어났나를 이야기하십시오.

배의 일어남과 사라지는 움직임인 주 대상을 예로써 들어봅시다. 그러기 위해서 처음으로 할 일은 일어남의 과정이 발생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일어남이 발생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명칭을 붙이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렸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일어남'에서 무슨 현상이 일어났나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남'을 알아차렸을 때 이것은 내가 느낀 감각들 입니다. 이것은 그 때의 감각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리고 나서 좌선 수행동안에 일어나는 다른 대상들과 '사라짐'과정에 대하여 똑같은 세 가지 단계의 묘사를 사용하여 당신은 점검을 계속합니다. 당신은 대상의 일어남을 언급하고, 어떻게 그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나를 묘사하고, 그 대상이 사라지거나 당신의 관심이 다른 어디인가로 가버리거나 하는 등 그 후의 경험을 이야기하십시오.

 

비유를 들어 좀 더 분명히 설명하겠습니다. 내가 당신 앞에 앉아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갑자기 공중으로 손을 들어 올리고, 내가 사과를 쥐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볼 수 있도록 손을 펴 보입니다. 당신은 이 사과에 관심을 쏟습니다. 당신을 그것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과'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나아가 그 사과가 붉고 둥글고 빛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 사과가 보이지 않도록 천천히 손을 오므립니다.

만일 그 사과가 수행의 주 대상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그 사과의 경험을 보고하겠습니까? 당신은 말할 것입니다. "사과가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것을 '사과'라고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붉고 둥글고 그리고 빛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과는 천천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사과에 관련해서 세 가지 단계로 정밀하게 보고를 했을 것입니다.

 

첫째, 사과가 나타났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당신은 주의력을 사과에 쏟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했습니다. 사과를 도구로 수행을 하고 있으므로 당신은 마음속으로 명칭을 붙이려고 특별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셋째, 당신은 사과에 주의력을 지속시켰고, 그것이 알아차림에서 사라져가는 양상과 특성을 식별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 단계 과정은 실제의 위빳사나 수행에서 따라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물론 당신이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경험에 대해 보고하고 관찰한다는 점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가상의 사과를 관찰하는 당신의 의무는 그 사과가 수분이 많다거나 또는 자신이 먹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까지는 확장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행 점검에서 당신은 상상하거나 그려보거나 대상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으로 묘사를 한정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런 형태의 보고는 실제 위빳사나 수행에서 알아차림이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의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이 때문에 점검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 이외에 부가적인 이유를 위해 도움이 됩니다. 수행자들은 이런 종류의 보고를 만들어내도록 요구 받는 것이 그들의 수행에 활기를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가능한 한 뚜렷이 경험에 초점을 맞추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림, 정확성, 인내대상을 무관심하게 되는대로 혹은 알아차림 없이 기계적으로 보는 것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 수행은 당신이 마음챙김 없이 어떤 정신적인 공식을 암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전심전력으로 대상을 보아야만 합니다. 가능한 정확하게 모든 주의력을 그 대상에 쏟으며, 당신은 그 대상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도록 자신의 알아차림을 유지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최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항상 배에 머물러 있을 만큼 잘 훈련되어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음은 산만해집니다. 이때에 산란해지는 마음인 새로운 대상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것을 다뤄야 할까요? 우리는 산만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자, 이제 두 번째 단계는 그것을 '산만함, 산만함'이라고 명칭 붙이는 것입니다. 산만함이 생긴 후에 우리는 얼마나 빨리 그 산만해짐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까? 1초? 2분? 30분? 그리고 그것에 명칭을 붙인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산만해지는 마음이 즉시 사라졌습니까? 아니면 마음은 계속 산만한 채로 남아 있었습니까? 또는 생각의 강도가 줄어들고 결국에는 사라졌습니까? 이전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다 보기 전에 새로운 대상이 일어났습니까? 만일 당신의 마음이 방황하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것 역시 스승에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만일 방황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당신은 다시 배의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은 다시 주 대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지의 여부도 이야기해야 합니다. 보고를 함에 있어서 새로운 대상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남 사라짐의 움직임에 통상 얼마나 오랫동안 머무는지를 이야기하는 것도 좋습니다. 얼마간의 좌선시간이 지난 후에 고통과 아픔, 불쾌한 감각들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가려움이라는 새로운 대상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당신은 그것을 '가려움'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가려움이 더욱 심해집니까? 아니면 그대로입니까? 그것이 변화합니까? 아니면 사라집니까? 긁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새로운 대상이 일어났습니까?

이러한 모든 것들을 가능하면 정확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상상과 보이는 것, 소리와 맛, 열기와 차가움, 긴장, 떨림, 마비, 의식대상의 끊임없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대상이건 간에, 당신은 그것에 똑같이 세 단계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해서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경험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고요한 조사과정입니다. 스승에게 중요한 것은, 당신이 일어나는 어떠한 대상이던지 알아차릴 수 있는지, 그것을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완전하게 관찰하는 인내가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스승에게 정직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대상을 찾을 수 없거나, 알아차릴 수 없고, 또는 명칭을 붙인 후에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이 수행을 불충분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하고 정확한 보고를 통해 스승은 당신의 수행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스승은 당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바로잡아 줄 것입니다. 이러한 점검에 관한 설명이 당신에게 이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완전한 노력을 기울여 수행해서 부처님과 아라한, 성인들, 고귀한 이들이 알고 본 닙바-나의 법을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로 빠르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