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37조도품 법문

칠각지- 염각지. 택법각지. 정진각지 (20080306)

담마마-마까 2019. 8. 10. 00:18

https://youtu.be/rYz1R-1JDqc

◈ 칠각지(satta sambojjhanṅga, 일곱 가지 바른 깨달음의 길)

(20080306)

 

오늘 이 시간에는 칠각지 부분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37가지지만 중복된 것들 빼고 나면 14가지 정도 됩니다. '사여의족-짜따로 인디빠다 삿다'라고 하는 것들은 의지, 노력, 마음, 사려 깊음 그다음에 오근 이런 것들은 다 생략을 합니다. 그러나 오근 부분은 뒤에 또 설명이 돼 나갈 겁니다.

 

칠각지(七覺支) 부분 한번 봅시다. 칠각지 경전도 있죠!

마하 목갈라나 존자와 사리뿟따 존자 그리고 부처님 자신 이렇게 세 분의 위대한 성인들이 병이 들었을 때 이 경전을 읽어주고 읊어줌으로 해가지고 그 병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졌다 하는 것이 그 「봇장가 숫따」입니다.

먼저 목갈라나 존자가 병이 들었을 때 부처님이 목갈라나 존자가 있는 곳으로 방문해가지고 물어봅니다. “병이 더 점점 심해지냐, 아니면 점점 더 약해지냐, 참을만하냐, 아니면 도저히 못 참겠느냐?” “부처님, 못 참을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오히려 병이 약해진 게 아니고 점점 더 세집니다. 강해졌습니다.” 하고 얘기했을 때, 부처님이 이 봇장가 숫따 칠각지에 대한 것을 읊어줍니다. 그때 목갈라나 존자가 그 칠각지에 대한 경전을 듣고 집중하고 해서...

 

이 칠각지가 보면 순차적으로 되어나갑니다.

사띠가 이루어져야 만이 그다음 단계에서 법에 대한 조사들도 이루어지고, 법에 대한 조사들이 이루어져야 만이 노력의 힘들도 생겨나가는 거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갈라나 존자가 부처님 말씀 듣고 그렇게 순차적으로 따라가다 보니까 나중에는 평등한 마음까지 이르러 가지고 그로 인해서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환희해서 부처님한테 엎드려 절하게 되고, 또 마찬가지로 사리뿟따 존자가 그렇게 병이 들었을 때도 부처님이 똑같이 그렇게 해서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게 만들어주고.

부처님 자신이, 경전엔 담마라자(dhammarājā, 法王)라고 그럽니다.

부처님 자신이 병이 들었을 때 쭌다 장로에게 이 칠각지를 읊으라 해가지고 부처님 자신도 그렇게 순차적으로 그 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 이 「봇장가 숫따」라고 하는 '일곱 가지 깨달음에 이르는 요인이다' 하고 경전이 있습니다.

 

우리 번역해 놓은 것이 아마 있을 겁니다. 그걸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앞뒤 부분을 빼고 나면 전부 칠각지 일곱가지 부분에 대한 것들입니다.

 

한번 봅시다. 삿따 삼봇장가(satta sambojjhanṅga) 칠각지라는 겁니다.

'삿따(satta)'는 뭡니까? 일곱이죠. '삼(sam)'은 삼봇장가, 삼붓다, 삼빠자나 이렇게 '삼(sam)'이 많이 쓰이죠? '훌륭한' '좋은', '여의하다' 이런 뜻으로써 '삼'이죠. '여러 가지'란 뜻도 되고 '완벽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다음에 '보디(Bodhi)' 보디는 깨달음이죠! 그리고 '보디'라는 게 '깨닫기 위한 바른 노력'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다음에 뒤에 있는 '앙가(aṅga)'는 '사실, 진실, 길, 부분' 이런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말하면 뭐가 됩니까? '깨닫기 위한 바른 노력의 길'이란 뜻입니다. '일곱 가지 깨닫기 위한 바른 노력의 길'이라는 그런 뜻이죠!

 

봇장가는 일곱 가지로 구성이 돼 있습니다. 뭡니까?

사띠-알아차림이 출발점이 돼가지고,

그다음에 법에 대한 조사, 어떻게 보면 법에 대한 조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법이라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 물질과 비물질을 얘기합니다. 그것에 대한 조사, 진리에 대한 조사죠! 진실하고 실재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것이 실재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꿰뚫어 알겠다 하는 것들, 바른 마음가짐으로 인해서 조사·확인해 보는 것들이 법에 대한 조사입니다. 그래서 칠각지 부분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들어가집니다.

 

그다음에 노력, 환희 그다음에 마음의 고요함, 그다음에 일념 집중, 평등 이런 것들을 칠각지·삼봇장가 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인은 우리를 깨닫게 해주고 좀 더 높은 수행의 단계에 도달하게끔 해줍니다. 그로 인해서 완전하게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끔 해주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왜 37조도품에 이것을 포함시켰느냐 하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서른일곱 가지 도와주는 부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서 설명을 하게 됩니다. 사실은 칠각지를 할 거면 앞에 부분에 나온 것들은 거의 다 이 요소에 포함이 됩니다. 앞에 나온 네 가지 노력들도 다 이 부분에 포함이 되고, 그다음에 오근, 오력이라고 하는 것들, 그다음에 사여의족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여기에 포함이 됩니다. 그리고 네 가지 수행대상 이런 것들도 다 포함이 됩니다.

 

칠각지만 제대로 알고 있고, 그대로 따라서 수행을 해나갈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조건은 다 갖추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갖춰야 될 조건이고, 갖춰야 할 요인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중에 하나라도 없을 거 같으면 이루어지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목표에 도달하려고 할 것 같으면 갖춰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붕 위에 올라가려고 하더라도 기단을 먼저 밟고 일층을 다시 또 밟고 그다음에 이층으로 또 밟고 해서 층계층계 해가지고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밑에 기단이 없으면 1층을 올라갈 수가 없고, 1층이 없으면 2층으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칠각지도 이와 마찬가집니다.

 

일곱 가지 봇장가에는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사띠에도 이것이 포함돼 있어야 되고 법에 대한 조사에도 이게 포함이 되어야 되고 다른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게 뭡니까? 항상 진지해야 된다는 겁니다. 항상 간절하게 따라갈려고 하는 그런 것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아따삐(ātāpī)'라고 그럽니다. 진지하게 집중할려고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또 공통적으로 있어야 되는 것이 뭐냐면, 맨 첫 번째 나오는 '사띠(sati)' 부분입니다. 사띠가 없으면 어떤 것도 이뤄질 수 없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뭘 할 수 있겠느냐는 거라.

그다음에 또 필요한 것들이 뭐냐면 '삼빠자나(sampajāna)'라고 합니다. 사띠와 비슷한 개념인데 연결해주는 것들. 몸과 마음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변해가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필요하고.

 

또 뭐냐면 대상에 대해서 고정돼 가지고 집중하고 관찰하는 것들입니다. '식카띠(Sikkhati)'라고 그러는데 보통 여러분들은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라고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식카띠' 하고 '요니소 마나시까라' 하고는 비슷한 개념입니다. 대상에 대해서 집중해서 관찰하도록 마음을 대상에 고정시켜 주는 그런 기능들이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또 필요한 것들이 뭐냐 하면 확신들을 가지도록 하는 것,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확신들, '삿다(saddhā)'라고 그러죠!

그다음에 노력의 힘 '위리야(viriya)' 이런 것들이 균형이 잡혀야 만이 하나하나의 각지들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신심'과 '노력'은 균형을 맞춰야 됩니다.

어느 것 하나가 강해지면 어그러져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사띠'하고 '삼빠자나'는 항상 일어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다가 '아따삐'라고 하는 진지함이 겸해져야 만이 되고,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관찰하고 집중하는 힘 '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하는 것들이 겸해져야 됩니다.

이런 것들 여섯 가지 부분들은 칠각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여기 이 부분은 명확하게 이해를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각각의 봇장가는 관찰할 대상이 몇 가집니까?

까야(kāya), 웨다나(vedanā), 찟따(citta), 담마(dhamma) 네 가지죠!

이 네 가지 대상을 보다 더 강하게 해줍니다. 봇장가가. 그 네 가지 대상의 자연적인 성품이 드러나게끔 해주는 역할들을 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해줍니다.

 

(1) 사띠 삼봇장가(sati-sambojjhaṅga). 염각지(念覺支)입니다.

 

첫 번째 사띠 부분 한번 봅시다.

사띠 삼봇장가(sati-sambojjhaṅga) 염각지(念覺支) 입니다.

사띠를 통상적으로 뭐라고 합니까? 위빳사나라고 그러죠! 위빳사나 하면 보통 사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띠는 지나침이 없습니다. 사띠 자체는. 보통 알아차린다고 얘기를 하는데 뭘 알아차리는 겁니까? 내가 남자인 걸 알아차리고 내가 걸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이걸 얘기합니까? 물론 그것도 하나의 알아차림입니다.

그런데 사띠는 그런 의미보다는 그 알아차리는 것이 사물의 특성들이 드러나는 알아차림이 돼야 됩니다.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것들이 명확하게 알아차려져야 만이 그걸 알아차림이라고 그럽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띠,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앞에서 얘기한 아따삐, 사띠, 삼빠자나, 요니소마나시까라 그다음에 삿다, 위리야 라고 하는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냥 알아차리고 있다, 그런데 진지하게 알아차릴려고 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돼요? 겉만 알아차리는 거라. 왼발 오른발 하는 거 알아차리고. 그리고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띠가 없으니까 어떻게 돼요?

 

사띠는 하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연속돼나가니까 연속돼나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배를 관찰할 때도 그냥 자동적으로 명칭을 붙여서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는 거라. 변해가는 걸 모르기 때문에. 삼빠자나가 없는 거라. 대상에 대해서 고정되게 집중하고 관찰하는 것들은 당연히 그게 없는 거라. 그러니까 대상이 변하는 걸 모르는 거라. 그러니까 요니소마나시까라가 없는 거라. 사띠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니까 사띠를 함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냐 없냐 하는 의심이 들어. 당연히 믿음·삿다가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노력할려는 마음은 점점 더 없어지니까 '일어남' '사라짐' 하다가 그냥 꼬빡 잠들어버리게 되는 거라.

 

사띠 하나에도 이렇게 이 여섯 가지가 공통적으로 다 갖춰줘 있어야 되는 거라. 그것이 갖춰지지 않으면 그걸 사띠(sati)라고 얘기 안한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편하게 그냥 얘기하는 “알아차려라이!” 그럼 “난 알아차리고 있다!” 하면서 성질 버럭버럭 내고 있다, 그럼 어땋게 돼요? 그건 사띠가 아니죠! 그거는 그냥 아는 겁니다.

 

사띠가 있을려고 할 거 같으면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나지지 않는 것은 그건 사띠가 아닙니다.

특성이 반드시 드러나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이 항상 깨어있어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걸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사띠입니다.

그런데 그 알아차림은 한순간에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니고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집중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파악하는 것들을 사띠라고 얘기합니다. 파악해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변한다! 변하니까 만족스럽지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하고 변하는 것에 내 것이라 할 만한 것들은 없다 하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드러나지게 되고 확인하게 되는 그런 상태를 얘기합니다.

 

보통 우리가 '너는 외도다.' 하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뭘 외도라고 그럽니까?

불교적인 것을 안 하고 있는 사람들을 외도라고 그러죠! 그런데 실제로는 외도가 뭐냐 하면 '도의 밖(外道)'입니다.

도(道)는 뭘 얘기합니까? 수행에서 도는 몸과 마음을 얘기합니다.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다른 걸 대상으로 하는 것은 전부 외도입니다. 자기의 몸과 마음이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이지, 남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한다, 아니면 뭐 어떤 명칭을 대상으로 한다, 자기의 몸과 마음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이런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럴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자기의 몸과 마음이 아니게 됩니다. 그걸 외도라고 그럽니다.

 

사띠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의 몸과 마음이 대상이 돼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외도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자기의 몸과 마음에서 반드시 삼법인과 사성제가 드러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밑에 예를 들어놨습니다. 어떤 것이 사띠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배가 아플 때 '아픔' '아픔' 하고 알아차릴 때, 그냥 만약에 배가 '아픔' '아픔' 하면서 아픔의 현상만 알게 된다. 그럴 거 같으면 그것은 명확하게 사띠를 하지 않은 겁니다. 첫 번째에는 해당이 됩니다. 대상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아픔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린 것, 그것은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알아차린 대상이 왜 이 아픔이 있었는가, 그리고 아픔이 어떻게 변해가는가 하는 것을 모를 거 같으면 한순간은 사띠 했을지 몰라도 사띠를 이어가지 못한 상태라는 거라. 그러니까 '아픔' '아픔' 하고 치부를 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그 아픔이 명확하게 어떤 아픔인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속이 메스꺼운 건지 아니면 왼쪽에 있는 배 쪽이 콕콕 바늘로 찌르는 그런 아픔인지 뭔지를 명확하게 모른다는 거라.

 

만약에 속이 메스꺼운 것을 알았다, 그러면 속이 메스꺼운 것도 '메스꺼움' '메스꺼움' 하고 알아차리겠죠. '메스꺼움' '메스꺼움' 하다 보니까 그 메스꺼움이 변하는 것들을 알게 된다는 거라. 그걸 변하는 것들을 알게 되고 그 변하는 것이 다시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들도 알게 됩니다. 아, 이렇게 일어나는 현상은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고 변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아는 거라.

이런 것들을 '사띠'라고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는 사띠나 아따삐나 삼빠자나나 또 삿다나 위리야나 그다음에 요니소마나시까라'이런 것들이 다 그 사띠 속에 포함이 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사띠는 분명하게 하고 있지만은 그 사띠가 연속되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연속되지 않은 사띠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띠를 하도록 해주는 것이 봇장가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2) 담마 위짜야 삼봇장가(dhammavicaya-sambojjhaṅga).

 

그다음에 두 번째 법에 대한 조사, 담마 위짜야(dhammavicaya), 택법각지(擇法覺支) 입니다.

법에 대해서 조사·확인하고 구별하는 것들입니다.

마음이 항상 깨어있어서 법에 대해서 조사·확인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 항상 깨어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조금 더 냉철해지고 지혜로워집니다. 이게 부처님이 말한 진리인가 하는 것들을 조사 확인해 보려고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그걸 택법(擇法)이라고 합니다.

법에 대해서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다는 거라. 그래서 이게 바른길이 아니다 할 거 같으면 버려버린다는 거라. 이게 맞는 길이다 할 거 같으면 선택하게 되고.

 

사띠를 계속하다 보니까 내가 어느 순간 사띠가 잘되다가 집중력이 너무 강해져서 묘하게 빠져버린다. 물론 거기서 희열도 있고 기쁨도 있지만 사물의 특성들이 드러나지를 않는다, 그럴 것 같으면 스스로 내가 판단해보라는 거라. '아, 이것은 내가 삼매에 빠지는 것이지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스스로 그 진리에 대해서 자기가 조사 확인해 보는 거라.

그래서 고요한 것도 사띠에는 방해가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퍼뜩 버려버리고 돌아오게 되는 거라. 이걸 택법이라고 그럽니다.

어떤 것이 수행에 이익이 되고, 어떤 것이 수행에 장애가 되는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택하게 됩니다. 스스로 택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띠가 없으면 절대 될 수가 없습니다.

 

피상적으로 아함경은 맞고 법화경은 틀리다 그래서 아함경은 공부하고 법화경은 공부 안하고 이렇게는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함경을 알고 법화경을 모르는 거하고, 법화경을 알고 아함경을 모르는 거하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런 것을 택법이라고 안 합니다.

 

수행에서 이익이 있고 계속적으로 해나가야 되는 것이 뭐고, 어떤 것이 아닌가 하는 것들을 택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뭐라 그럽니까?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죠! 당연히 의심해보고 의심되는 것에 대해서 조사·확인해 보고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 어떤 결과물이 나타나지 않으면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 이건 올바르지 않은가보다' 해서 버려버리는 거죠. 이걸 법에 대한 조사·확인이라 그럽니다.

 

꼭 마찬가지로 법에 대한 조사·확인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사띠가 항상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아따삐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명확한 앎들인 '삼빠자나'라고 하는 게 있어야 되고, 또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집중하고 고찰하고 관찰하는 요니소마나시까라 라는 것들도 있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렇게 법에 대해서 맞는지 안 맞는지 택해보니까 '아, 이것이 맞구나' 해서 의심이 사라져버리고, 확신을 가지게 되는 삿다가 있어야 되는 거고, '아, 이걸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이 반드시 있겠구나' 하고 더욱더 노력하게 되는 위리야도 있게 되고,

이런 식으로 '법에 대한 조사' '담마 위짜야'에도 이 여섯 가지가 반드시 포함돼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법에 대한 조사는 선행조건이 뭡니까? 기본적으로 사띠입니다.

스님이 왜 사띠를 강조하느냐 하면 사띠가 안되면 다른 것이 다 안되는 거라. 그래서 사띠로 인해서 이끌어주는 것이 택법각지 담마위짜야 삼봇장가 입니다.

 

(3) 위리야 삼봇장가(viriya-sambojjhaṅga)·정진각지(精進覺支) 입니다.

 

그다음에 법에 대한 조사·확인이 있고 나면 더욱더 노력하게 됩니다.

'아, 이것이구나. 내가 새로운 길을 알았구나.'라는 확신들을 가지기 때문에 위리야, '위리야 삼봇장가·정진각지'가 생긴다고 얘기합니다.

 

그냥 무작정 정진하는 것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고행을 정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고행은 정진이 아닙니다. 고행으로 인해서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런 고행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택법각지에서 떨어져나가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위리야라고 하는 것은 바른 위리야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행하고 정진하고는 그래서 다른 부분입니다. 법에 대한 조사·확인이 된 수행자는 즉시 노력을 기울여서 정진해나간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 노력이 추진력이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면 나중에 사띠도 떨어져 나가고 담마위짜야도 떨어져 나가고 나더라도 남아있는 것이 이 위리야는 남아있습니다.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사띠가 잘 계발되어 나가서 사물의 특성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법에 대해서 조사 확인해서 법에 대한 확신이, 진리에 대한 확신이 서면, 내가 이것을 더욱더 실천을 해가지고 결과를 끝까지 보겠다 하는 의욕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의욕으로 인해서 내 생명이 여기서 끝나더라도 여기서 결과물을,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고 각오를 가지게 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피부와 힘줄이 다 말라버리고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하는 거라. 그런 게 뭐냐면 바로 이 위리야 라는 거라. 왜? 아, 인제 이 길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르겠다 하는 확신을 가졌거든.

 

수행을 하다 보면 장애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하다가 보면 피곤하기도 하고, 잠에 떨어지기도 하고, 망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장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애들이 있더라도 그 장애물들을 헤쳐나가려고 할 것 같으면 이런 힘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런 힘은 반드시 법에 대해 조사·확인해 보고서 확신이 서야만이 이런 힘들이 탄력을 받는다는 거라.

 

그런데 그런 법에 대한 조사·확인이 안 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불뚝 성질로 노력은 하겠지만 어떤 장애가 나타나면 금방 꺽여 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피곤하면 ‘아! 조금만 쉬어야 되겠다’ 하고, 안 그러면 지루하고 이러면 금방 잠에 툭 떨어져버리는 거라. 안 그러면 한 시간 좌선을 생각하고 탁 앉았지만 뭔가 또 다른 일이 생겨가지고 좇아나가야 되는 거라.

 

장애를 돌파해 나가려고 할 거 같으면 이런 위리야가 있어야 됩니다.

그냥 노력을 할려고 하지 말고, 어쨌든 '아, 이게 바른 것이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도록 해야 되는 거라. 그 확신은 어디서 옵니까? 알아차림입니다. 명확하게 알아차려서 그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 사물의 특성이 탁 드러났을 때 그때야 만이 법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되고, 그 확신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게 위리야·노력입니다.

 

그렇게 위리야·노력이 있어야 만이 그때부터 이제는 몸이 반응을 합니다.

'아! 이게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내가 이 세상에서 겪었던 기쁨이라든지 행복이라든지 비교가 안 되는구나' 하는 것들을 몸이 스스로 알아차리는 거라. 그래서 몸과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나게 되고. 또 그것도 하나의 대상이다 해서 몸과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더 집중하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고.

 

그런 집중으로 인해서 평온한 상태를 다시 만들어서 어떤 것이든 똑같이 평등하게 보는 그런 힘들이 생겨나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발달해나가게 됩니다.

이게 칠각지인데 다음 시간에 칠각지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잠깐하고, 뒤에 부분을 해나가겠습니다.

 

왜 칠각지를 하느냐 하면 기본적으로 스님이 사띠, 담마위짜야, 위리야, 삐띠 뭐 어쩌고 하는 이걸, 여러분들이 그 개념을 이해하라는 게 아닙니다.

 

이 칠각지가 필요한 건 뭐냐면

아나빠나 사띠,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호흡하고 칠각지하고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건지,

그리고 선정으로 인해서 칠각지를 계발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또 위빳사나로 인해서 칠각지를 계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사마디하고 위빳사나 하고를 명확하게 구분을 하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칠각지가 중요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