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37조도품 법문

칠각지- 희각지 (20080313)

담마마-마까 2019. 8. 10. 23:20

https://youtu.be/Jl8pMi2sX04

(4) 삐띠 삼봇장가(piti-sambojjhaṅga)·희각지(喜覺支)(20080313)

 

지난 시간에 사띠하고 담마위짜야 하고 위리야까지 했습니다.

사띠는 여러분들이 다들 잘 알고 있으니까, 어떤 현상이든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일어난 현상을 지금 즉시 알아차리는 것. 알아차리는데 그냥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그 현상이 무상하다는 속성, 그리고 불만족이라는 속성, 그 현상에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속성, 이 세 가지를 명확하게 알아차려야 된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다 보면 법에 대한 조사가 되어나갑니다. 확인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법에 대한 조사들을 해나갑니다. 그로 인해서 노력의 힘들도 더욱더 커지게 됩니다. 법에 대한 조사로 인해서 더욱더 노력해서 이것을 완전하게 끊어버리겠다, 번뇌를 끊어버리고 집착하는 것들을 끊어버리겠다 하는 그런 마음들이 강하게 일어난다는 얘기까지 했습니다.

 

자! 그러면은 만약에 사띠가 잘 안 되는 사람들은 법에 대한 조사를 어떻게 할 거라? 이거는 순환관계이기 때문에 한쪽을 키워주면 다른 한쪽도 자연스럽게 올라가지게 되어있습니다. 이 칠각지가 꼭 공통적인 겁니다.

법에 대한 조사가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 때는 우선 스스로가 법에 대한 조사들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부처님의 진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굉장히 다행입니다. 다른 나라에 태어났다든지, 아니면 이 시대가 아니고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고 할 거 같으면 부처님의 진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인 것이고, 또 그런 시대 중에서도 여기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 와서 법문을 듣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 오지 않았을 거 같으면 또 그런 진리를 체험하고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잘 없습니다. 가르침이 실천되고 있는, 가르침을 들을 수 있고, 내가 직접적으로 확인을 할 수 있는 그런 장소에 있다는 것만 해도 큰일입니다.

 

어쨌든 그런 것으로 인해서 내가 아, 이 길만이 오직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이 바른 견해다 하는 그런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큰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이거 해라 하면 이게 바른 견해고, 누가 저거 해라 하면 저게 바른 견해다 해서 그냥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올곧이 아, 이 길만이 꼭 가야 되는 길이다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그런 견해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뭐냐 면 여러분들이 지금 육근(六根)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겁니다.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냄새도 맡을 수 있고 하는 이런 육근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겁니다. 그거 얼마나 유리한 거라? 이런 생각으로 인해가지고 노력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걸 뭐라 그럽니까? 담마에 대한 조사, 법에 대한 조사.

 

수행이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법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거 같으면 법에 대해서 이해하고 스스로 조사하는 이런 방법으로써 노력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속이게 되고 또 더 나쁜 결과들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몇 번 설명을 했었지만 '세리와'라고 하는 요즘 말로 하면 고물상이 누가 금인 줄 모르고 팔려고 가져온 그릇을 속여가지고 “이건 금그릇이 아니다” 해가지고,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강냉이 한 주박도 안 주려고 마음을 먹은 거라.

다시 돌아오면 그건 어차피 자기 차지겠지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사이 다른 고물상이 와서 그 금그릇을 받아갑니다. 오래된 그릇이라 녹이 슬어 있으니까 그것이 금인 줄 몰랐던 거라. 주인도 몰랐고.

그런데 고물상이 보니까 그것은 금이거든. 앞에 고물상 '세리와'는 이빨로 확인해 보니까 금인 줄 알았는데도 그 금 값어치를 갖다가 치러주기 싫으니까 그걸 그냥 거짓말을 했는데, 뒤에 온 고물상은 확인해 보니 금이니까 “아, 이거는 강냉이, 밥상을 한 그릇 줄 수 있는 게 아니고, 내 여기 좌판에 있는 거하고 여기 있는 전체를 다 줘도 모자랍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 모녀들은 “금인 줄 몰랐으니까 그냥 이거만 주시오”하고 가져갑니다. 나중에 세리와가 와서 “그 그릇 내놔라. 내가 좀 더 쳐주겠다.” 했지만 이미 팔리고 없다는 거라. 몇 번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했던 부분입니다.

 

그와 마찬가집니다. 노력을 일으키지 않으면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아, 내가 이 시대에 살고 있어서 진정으로 고맙고 행복하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지금 이때만이 내가 사악처를 벗어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이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스스로를 속여 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지금 현재 되는 대로 그냥 살아가야지 하는 마음들을 일으키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오직 지금 이때만이 부처님 법을 들을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고, 견해를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고, 또 육근이 청정해가지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때만이 오직 단 한 번 내가 이 윤회의 고리를 끊고, 또 사악처에 떨어지는 일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상태다 하는 마음들을 일으켜야 된다는 거라. 그게 뭐냐면 법에 대한 조사들이다 하는 거라.

그렇게 해서 노력을 일으키고 나서는,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희각지(喜覺支), 삐띠 삼봇장가(piti-sambojjhaṅga) 입니다.

기쁨입니다. 삐띠(piti)라고 하는 것은. 자꾸자꾸 노력하려고 하는 힘이 강해지면, 그냥 순수하게 자꾸 정진하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집니다. 그렇게 되니까 길을 걸어갈 때든, 좌선하고 앉아있을 때든, 일상생활을 하고 할 때든 이 사띠, 관찰하는 힘들이 계속 더 생겨나고 더욱더 밀밀해지게 되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번뇌가 더 이상 나에게 침투할 여력들이 점점 더 없어지는 거라. 그러니까 대상과 내가 자꾸 일치가 되니까, 일치되므로 인해서 아, 이것이구나, 이것이 진리구나 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는 거라.

그 기쁨이 뭐냐 하면 삐띠 입니다.

 

그 삐띠는 맛있는 거 먹었을 때, 탁 입에 넣었을 때 일어나는 기쁨이라든지 이런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로 인해서 오는 기쁨이라든지 이런 것이 아닌 진짜 스스로 환희심이 일어나서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그거는 뭐냐면 세간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수행으로 인해서 더욱더 집중하는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체험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기쁨이 일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아, 이것이 바른 것이구나, 이것이 진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구나 하는 확신이 더욱더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대한 확신을 굳혀주도록 만들어주는 게 이 삐띠입니다. 대부분 이 삐띠를 체험을 거의 대부분 해봅니다. 이 삐띠를 체험해 보지 않으면 이 길을 올곧게 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나중에 다섯 가지 삐띠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면 아, 나도 그런 체험들을 했구나 하는 사실을 압니다.

 

밑에 삐띠 삼봇장가 한번 봅시다. 희각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기쁨이라는 것은 욕망이나 번뇌를 떠나버리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고, 그런 욕망이나 번뇌를 내 스스로 노력해서 탁 멈추고 나니까 '이리 좋구나' 하는 걸 체험했을 때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기쁨을 느끼는 경우하고는 조금 다르죠!

 

그렇지 않고 수행에서 기쁨을 직접 체험으로 일어난 것이 아닐 경우에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지금 점심 공양을 하고 났으니까 되게 졸릴 거라 말입니다. 그럼 잠이 옵니다. 그러면 나태하고 게을러지는 마음이 자꾸 일어나집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라. 그럴 때나 아니면 누가 나에게 상처를 줬다든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우울해지고 의기소침해지고 하는 그런 것들도 일어나진다는 거라.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아, 이게 아니다. 이래선 안 된다’ 하고 정신 바짝 차리죠! 어떤 사람은 세수를 하기도 할 거고 그렇게 할 겁니다.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게 전환시켜주므로 인해서 그 상태를 벗어나는 겁니다.

 

삐띠라는 게 마찬가집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번뇌, 가지고 있는 욕망이라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때 일어나는 것이 이 삐띠입니다.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져 있을 때나 아니면 나태하고 게을러졌을 때 일으킬 수 있는 게 이 삐띠입니다.

 

보통 통상적으로 수행에서 이 삐띠를 일으킬 수 있으면 참 좋은데 그게 안 될 땐 어떻게 합니까? 삼보회상을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회상하고, 법에 대해서 회상하고, 상가에 대해서 회상하고, 그래서 경전 독송을 쭉 하다 보면, 몇 분만 이렇게 집중해서 쭉 읽다 보면 아!! 하고 환희심들이 일어납니다. 언제 내가 의기소침했고 언제 내가 잠이 올라고 했는가를 잊어버릴 정도로 금방 '아! 이게 참 고맙구나, 기쁘구나.' 하는 것을 일으킨다는 거라. 그래서 스스로 만족을 하게 된다는 거라.

 

안 그러면 일상적으로는 스승이나 부모에 대해서 회상하라 그럽니다.

그래도 스님 만난 게 인연이 돼갖고 그래도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릴 수 있구나. 참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감사하다. 내 부모가 이렇게까지 날 낳아주고 길러준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하는 그런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고. 그래서 삼보에 대해서 회상을 하고, 스승과 부모님에 대해서 회상함으로 인해서

 

일반적으로 떨어지는 힘들, 노력의 힘들도 떨어지고, 법에 대한 조사들도 떨어지고, 사띠도 떨어지고, 그로 인해서 우울해지고 의기소침해지고 나약해지면서 나태와 게으름이 올 때는 삼보와 스승과 부모님에 대해서 회상하라. 그럴 거 같으면 기쁨이 일어나지고 감사함을 알게 되고 만족을 일으킨다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얼마 전까지 가졌던 나태나 우울함이나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그것을 딱 멈춰버리게 되거든. 탁 돌아보니까 '아, 이것이 기쁨의 현상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수행으로 일어나면 참 좋은데 안 될 때는 이 방법을 쓰라는 거라.

어쨌든 간에 여기서 말하는 기쁨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기쁨은 아니죠? 틀림없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속적인 기쁨하고는 정반대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기쁘다, 애가 잘 커 줘서 기쁘다, 아니면 명예가 높아져서 기쁘다 하는 그런 것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또 그런 것들은 변해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아지면 기쁘지만 작아지면 기쁨은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실망감으로 변해버린다는 거라.

그런 것을 부처님은 기쁨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라.

 

법에 대해서 일어나는 기쁨만이 회상하면 회상할수록 그 기쁨은 자꾸자꾸 증가하는 것이고, 그 기쁨은 오래도록 내 주위에 머물러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법에서 기쁨을 일으켜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걸 세속적이고 세간적인 것이 아닌 출세간적인 것이다 하는 겁니다. 출세간적인 것이라 해서 출가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것이 '다니야'라고 하는 목동하고 대화하는 「숫따니빠따」에 나옵니다. 「숫따니빠따」 앞부분입니다. 아마 열여섯 번째인가 그럴 겁니다. 그렇게 나와 있는 게송인데 '다니야' 하고의 게송에서 나와 있습니다.

그 밑에 한번 봅시다.

인도 같은 데는 우기철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강을 비교해보면 됩니다.

우기철에 비가 많이 오면 강 수위는 이만큼 높아져 있죠! 그렇지 않고 일반적일 때는 쭉 내려가 있습니다. 인도 같은 경우에는 우기철이 한 네 달 정도 되고, 그러니까 물이 높아져 있는 때는 한 네 달 정도 되고, 물이 줄어있는 때는 나머지 한 팔 개월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보통 강을 중심으로 해서 마을이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은 이것이 높아지고 낮아지고 하는 것은 알지만은 언제 높아지고 언제 낮아질지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비가 어떨 때는 갑자기 확 오기 때문에. 그런데 이 동물들은 참 잘 압니다. 명확하게 압니다. 우리나라에도 무슨 천재지변이 일어날 거 같으면 동물들이 먼저 반응하죠!

 

얼마 전에 쓰나미가 있을 때도 스리랑카 같은 데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잔잔한 바다인데도 그쪽에 있던 원숭이나 쥐들이 전부 육지 쪽으로 다 이동을 했다고 그럽니다.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조금 있다가 바로 그냥 쓰나미가 닥쳤다고 그럽니다. 그 진동을 이미 자기들은 알고 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강가에 있는 게들을 보면 그렇다고 합니다. 게는 구멍을 여러 개 뚫어놓지 않습니까? 우기철이 될 때가 되면 비가 오기 전이라도 밑에 있는 구멍들을 게가 스스로 다 막는다고 그럽니다. 거기에 물이 차니까. 건기가 되면 밑에만 뚫어놓고 위에는 전부 또 막아버린다고 합니다. 이걸 잘 보는 사람들은 그걸 보고 이제 비가 올 것이다, 안 올 것이다 판단들을 하기도 한다고 그럽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비가 오든 안 오든 간에 그것을 대비해 두는 것들을 항상 이렇게 해둡니다. 그러니까 지붕 있는 집을 만들어두고, 소가 있으면 소 외양간도 지어놔 놓고, 저기 저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온다 할 거 같으면 미리 소를 외양간에다 집어놓는 형태들을 띱니다.

 

이 다니야도 마찬가집니다. 저기 저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올 거 같으니까 소를 일층에 있는 외양간에다 다 집어넣어 버리고 이 송아지들에게 젖을 다 먹여버렸다는 거라. 왜? 어미 소는 아침에 젖을 짜기 때문에 밤에 어미 소 옆에 송아지를 붙여놓으면 밤새 이 송아지가 젖을 다 빨아먹어 버린다는 거라. 그럼 그다음날 아침에 짤 젖이 없어지니까 밤에는 항상 분리해 놓습니다. 어미 소 옆에 송아지는 항상 따라다니는데 잘 때는 반드시 이렇게 떼어놓는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젖을 안 먹이고 떼어놔 놓으면 밤새도록 울어 싸서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자기 전에는 반드시 젖을 먹이고 나서 송아지를 재우는 게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니야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소는 외양간에 다 넣어놨고, 어린 송아지들은 젖 다 먹여놨고, 그리고 송아지들은 젖을 먹여놔도 자주자주 배가 고프니까 이 목도리를 하지 않으면 어미 소 옆으로 가버립니다. 어미 소는 안 매어놓는데 새끼소 송아지들은 전부 다 목을 매어놓습니다. 말뚝에다가. 그러니까 말뚝에다 그것들을 다 매어놓고, 그러니까 인제 비 와도 난 전혀 관계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오라는 거라. 아무리 와도 관계없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소 없죠! 당연히 송아지도 없고. 그러니까 밤에 송아지가 어미 소한테 가서 젖 먹을 염려도 없어지는 거고,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 거라. 비가 오든 안 오든 간에 그게 뭐 걱정할 거리냐, 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런 걱정조차도 없다는 거라. 목동은 준비를 해야 되지만, 왜? 있는 사람은 준비를 해야 된다는 거라. 돈이 백만 원이 있을 거 같으면 백만 원을 잘 보관하려고 준비들을 해야 되는데 백만 원조차 없는 사람은 아예 보관할 생각조차도 안 한다는 거라.

 

그 윤회에 대해서 비유한 속담이 태국에 있는데,

어미 소는 죽을 때까지 젖만 짜야 돼. 젖소는 자꾸 젖을 짜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송아지는 계속 어미만 찾는다는 거라. 맞는 얘기거든. 송아지는 어미만 찾는거라. 다른 거는 안 찾아요. 아무리 소가 많아도 지 어미소만 찾는 거라.

아까 암소는 죽을 때까지 계속 젖을 짜듯이, 사람이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두려움에 휩싸여 살 수밖에 없다는 거라. 두려움을 벗어난 거 같으면 또 다른 두려움이 일어나고 또 벗어난 거 같으면 또 다른 두려움이 일어나고 죽을 때까지 그런다는 거라.

그리고 또 송아지가 어미 소를 찾듯이,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모태만 찾게 된다는 거라. 윤회할 짓만 골라서 한다는 거라. 그럼 윤회를 안 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송아지가 어미 소를 찾지 않듯이 소 자체가 없으면 돼. 윤회하지 않으려면 어리석은 짓 자체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 그런데 어리석은 짓을 해놔 놓고 어리석은 과보를 안 받을려고 할 거 같으면 더 좋은 일들을 자꾸 해야 되는 거고 이렇게 피해 나가야 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은 소도 없고 송아지도 없고 맬 것도 없고 젖 먹어가지고 아침에 젖을 못 짤 염려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게 비 오는 거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집이 있으면 창도 달아야 되고, 지붕 점검도 해야 되고, 해가지고 비에 대한 걱정들을 덜 하는데 집조차 없는 사람들은 그럴 걱정이 전혀 없다는 거라.

아내하고 자식들이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 아내가 온순한 아내이고 아이들이 말 잘 듣도록 만드는 것이 최상인데, 그것조차도 없는 거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거라. 없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이 더 크다는 거라.

 

다니야는 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을 얘기하는데, 부처님은 반대로 없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을 얘기를 하는 겁니다. 사실은 있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은 그게 줄어들면 감퇴하는데, 없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은 사라지지 않는 거다 하는 거라.

 

그래서 그걸 밑에 비유를 또 하나 들어놨습니다. 야생의 길 잃고 다친 동물이나 새들을 잘 치료해주고 나서 다시 야생으로 돌려보냈을 때 완전히 떠나버리고 없지만 그 새나 그 동물을 생각하면 기쁘거든. 아, 내가 참 잘했구나 하는 만족감도 일어나는 거고, 그런 기쁨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없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은 오히려 더 크다는 거라.

 

그런데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완전하게 번뇌를 없애버렸다, 거기서 오는 기쁨들은 어떻게 됩니까? 굉장히 클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수행에서 얻어지는 기쁨은 세속적인 기쁨하고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거라.

수행에서 얻어지는 기쁨들은 기쁨의 종류를 다섯 가지로 분류해 놨습니다.

점점 더 증가합니다. 점점 더 증가합니다.

 

보통 우리가 세속적으로 알고 있는 기쁨은 감각을 자극해서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까마(kāma)'라고 그러죠.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해서 얻어지는 기쁨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입니다. 오온. 이 오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몸에 대한 집착이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당신 나이보다 젊어 보이네" 하면 기뻐하는 거라. 몸에 대해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칸다(khandha)'라 그러죠.

 

그다음에 번뇌가 오염되어 있는데, 오염된 번뇌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 그걸 '낄레사(kilesa)'라고 그럽니다. 생각을 막 굴려가지고 아, 이래하면 되지 하고 해가지고 탁 결론을 내고 나서 일어나는 기쁨들,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자기는 문제 다 풀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생각을 끊임없이 굴려가지고 오염된 번뇌라. 오염된 번뇌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기쁨을 탁 얻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건 깨지고 나면 아무것도 없죠?

특히 수행에서 그런 얘기 많이 합니다. 누가, “파랑새가 보입니까? 예, 파랑새가 보입니다. 파랑새가 날아갑니까? 예, 날아갑니다.” 오만 기쁨 다 누립니다. 박이 탁 깨지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수행이라고 착각들을 하고 있는 거라. 번뇌로 오염시키고 있으면서. 그걸 '낄레사'라고 합니다. 그건 세속적인 기쁨이지 수행 쪽이 아니라는 거라.

 

그다음에 뭐냐 하면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라고 그럽니다. 오온이 있다고 하는, 실체한다고 하는 것에 대한 집착.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실체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세속적인 기쁨들을 누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 아들 참 잘났소. 공부 참 잘합니다 하면 막 기뻐하는 거라. 실체의 내 아들에 대한 것, 또 실체의 나에 대한 것. 오온의 실체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 '까마, 칸다, 낄레사, 아비상카라'라고 하는 이런 것들은 '세속적인 기쁨'이라.

세속적인 기쁨들은 결국에는 괴로움과 연결된다 하는 거라. 아무리 감각적인 쾌락이 있어도 그건 항상 있을 수 없고, 넘어가게 돼 있는 거고, 바뀌게 돼 있는 거고, 또 결과는 더 무겁게 받게 돼 있는 거고, 이 모든 게 그런 식으로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열반으로 이끄는 기쁨들을 스스로 자꾸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걸 '순수한 기쁨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기쁨을 수행에서는 다섯 가지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재산이 없어진다든지 아니면 부모나 친척이 돌아가신다든지 하면서 흘리는 눈물은 굉장히 뜨겁습니다. 번뇌가 있기 때문에 뜨거운 거라. 원하는데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갈망들이 있기 때문에 뜨겁다는 거라. 그런데 진리에 대해서 흘리는 눈물은 시원합니다.

기뻐서 눈물을 흘릴 때 이게 '뜨거우냐, 시원하냐' 그걸 가지고 보통 판단을 많이 합니다. 그 눈물 흘리는 게 뜨겁다고 할 거 같으면 아, 이거는 세속적인 기쁨이구나 하고 보통 판단하고, 그리고 시원하고 또 그게 맑게 보인다 할 거 같으면 아, 그거는 진리에 대해서 흘린 눈물이구나 하고 판단들을 많이 합니다.

 

수행을 하다가 어떨 때는 눈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몸에 막 경련이 일어나기도 하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왜? 대상에 일치되는 것으로 인해서! 그래서 그런 흥분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 흘리는 눈물이라든지 흥분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기쁨의 첫 번째입니다. 그걸 보통 '쿳디까 삐띠(khuddikā pīti)'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떨 때 부르르 떨기도 하죠?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통상적으로 많이 경험해 보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그래도 또 집중을 하고 알아차림을 계속해나가면 그 뒤에 나타나는 게 뭡니까? 아주 투명하게 되는 빛이 느껴집니다. 밝은 빛이 확 이렇게 나타납니다. 혹은 부처님이든 아니면 어떤 대상이든, 그리고 이 주위 전체가 환하게 밝아오는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도 스님이 경험했는데, 이 앞에 바닷물을 보면 고기 비늘 같은 거 있잖아. 그 고기비늘 같은 게 사사사사삭 이렇게 일어나는, 빛이 반짝대는 게 아니고, 그거 말고 물고기 비늘 같은 이런 것들이 강하게 굉장히 자극을 해옵니다. 그것을 보면 굉장히 긴장감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그거 하나씩 쭉 다 보여요. 그런 것들도 기쁨입니다. 환하게 밝아지는 거와 꼭 마찬가지로.

그걸 '카니까 삐띠(khaṇikā pīti)' 보통 많이 일어나는 겁니다.

수행에서 마지막 집중이 굉장히 강해지면 일어납니다. 보통 여기서 대부분 끝나버립니다. 여기서. ‘아! 좋은 거 봤다’ 그래버리면 대부분 여기서 끝나버립니다.

 

그래도 계속적으로 집중하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몸이 뜹니다.

몸이 막 진동을 하게 됩니다. 어떨 때는 막 주체를 못합니다. 꼭 아까 같은 빛이나 번개 같은 것들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찌리리리릿' 하고 훑고 내려갔다가 안 그러면 바깥에서 다시 위로 찌르르륵 올라오고 막 이럽니다. 온몸이 전율 하듯이 합니다. 안 그러면 특정한 부위가 막 흔들리기도 하고 그럽니다.

이런 기쁨의 종류들로 바뀌어나가는데 기쁨의 종류가 처음부터 해가지고 점점 더 쎄어지는 겁니다. 그걸 보통 '옥깐띠까 삐띠(okkantikā pīti)'라고 합니다. 몸 전체를 기쁨이 확 감쌌다고 느낄 정도가 돼버립니다.

 

그러다가 그래도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가면 인제는 몸을 주체를 못합니다.

몸을 갖다가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몸이 막 들썩들썩들썩 해나갑니다. 그걸 인제 '웁베가 삐띠(ubbegā pīti)'라고 합니다. 들썩들썩 해오면. 인제는 그때는 몸이 콘트롤이 안 됩니다. 내가 아무리 경행을 할려고 해도, 아니면 좌선을 지속할려고 해도 안 될 정도가 됩니다. 실제로 그런 것들이 많이 보입니다.

어떤 경우냐 하면 태국에서도 많이 있던 건데, 어느 스님이 있다가 갑자기 저쪽으로 훅하고 가서 떨어지는 거라.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법문하는 스님이나 다른 스님들도 뭔고 해서 이렇게 보면 조금 전의 '웁베가 삐띠'라.

 

법문을 듣다가 그 기쁨으로 환희심이 일어나고 일어나고 해가지고, 눈물도 처음에는 주르르륵 흘렀다가 그래도 법문을 계속적으로 들으면, 그 법문소리가 그냥 법문으로만 쭈욱 들려버리거든. 그럼 인제 환희심이 자꾸 일어나는 거라. 일어나니까 인제 기쁨이 확 퍼져나가는 거라. 자기 자신에게서. 그래서 온데 자애심이 퍼져나가서 그 기쁨이 감싸갖고 온몸을 돌다가, 그러다가 이게 인제 팽창할 대로 팽창해졌다 싶은 상태에서 그래도 그대로 관찰해나갈 것 같으면 그때는 꼭 폭발하듯이 몸이 붕 떠가지고 저쪽으로 툭 떨어지는 거라. 에어스프링 처럼. 그래가지고 혼난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전에도 그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디빠왕사」라고 하는 스리랑카의 기록에 보면, 어느 만삭이 된 부인이 한 분 있었는데, 저 저쪽에 언덕 위에 살고 있었는데, 저쪽 언덕 아래에서 부처님하고 제자들을 모셔놔 놓고 법회를 열고 있거든. 저녁이니까 불을 호롱불을 켜놔 놓고 있단 말이라. 언덕에서 보면 그게 다 보입니다. 한참 떨어져있는 데도 누가 누군지는 전연 식별 못 하지만. 만삭이니까 당연히 거기 참가를 못 하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다 참가를 하는데 "너는 몸이 만삭이 다됐으니까 오지 말고 집 지키고 있어라." 집에서 가만히 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환희심이 일어나는 거라. 그렇게 좋거든. 그러다가 그게 법에 대해서 지나치게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니까, 그것으로 인해 붕 떠가지고 법회장에 먼저 탁 도착하게 됩니다. 부모님들이 와서 보니까 만삭이 된 딸래미가 먼저 와있거든. “니가 어째 여기 와 있느냐?” “그냥 기뻐가지고 그런 마음을 일으키면서 공중으로 붕 날아왔습니다.” “니가 아라한이냐? 아라한이 공중으로 날아다닌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일반인이 그러지는 못한다.”

 

그때 인제 부처님이 “이건 기쁨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해서 공중으로 붕 떠서 온 것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해줍니다.

그게 거리가 상당히 되었는데도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디빠왕사」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웁베가 삐띠' 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스님도 그리 멀진 않지만 여러 번 그런 경우들을 경험들을 하기도 하고 또 봐 왔습니다.

 

그다음에는 이 기쁨이 온몸 전체에 번져가지고 꼼짝을 못합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에 눈을 뜨고 있으면 눈을 깜빡일 수 있느냐? 눈조차도 깜빡여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몸 전체가 그냥 이 기쁨으로 꽉 들어차 버린 상태라. 그러니까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그걸 '파라나 삐띠(pharaṇā pīti)'라고 그럽니다.

스님도 실제적으로 기쁨이 일어났을 때 뒤로 빵 자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공중부양이 안 되고 뒤로 팍 자빠져 버리대. 어쨌든 꽝 자빠졌는데, 그래도 관찰했는데, 이걸 하나 움직이지를 못하겠는 거라. 거의 한 십분 너머를 움직이지 못했어. 전혀 못합니다. 전혀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내가 용을 쓸려고 하더라도 안돼. 그 기쁨이 잠재되어버려야 가능한 거라.

 

기쁨도 종류별로 이렇게 부처님이 다섯 가지 종류로 얘기했습니다.

어쨌든 기쁨은 점점 증가되게 됩니다. 어떤 것으로 인해서 감퇴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다가 이 기쁨을 평정한 '빳삿디'가 일어나야 만이 기쁨의 현상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일어나는 각지가 빳삿디(passaddhi) - 평정부분입니다.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평정 다음에 사마디(samādhi), 그다음에 우뻭카(upekkhā) 그렇게 칠각지는 돼 있습니다.

칠각지가 끝나고 나서는 칠각지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비교 분석하는 것들을 해나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