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빳삿디 삼봇장가(passaddhi-sambojjhaṅga)·경안각지(輕安覺支) (20080410)
칠각지에 대해서 지금 하고 있죠?
칠각지에 대한 대충적인 이해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 이 37조도품을 하는 이유가 뭐냐면 이것이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 그다음에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 하고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고 조금 더 깊이 있게 수행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해야지 단순하게 그냥 이 교재에 대한 것들만 가지고 할 거 같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화요일하고 금요일 날 기초 수행반 하고 있는 것이 여러분들한테 또 이 담마 스쿨을 듣고 있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이번 기초 수행반 세 달 과정은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와 '자나(jhāna)'와의 관계에 대한 것들, 일반적인 출입식념 호흡하고 그로 인해서 얻어지는 선정(jhāna) 단계에 대한 것들을 가지고 하기로 그렇게 했으니까 시간 나시는 분들은 그거 듣고, 화요일 금요일 못 오시는 분들은 인터넷으로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칠각지 하나하나를 구분해서 지금 살피고 있는데 이것은 단계적인 것이죠! 하나 도달하고 나면 그다음 단계에 또 도달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순차적으로 되어 나가는 것들입니다. 설명할 때는 또 따로따로 설명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거는 수행하는데 내가 어느 정도 수행의 진척이 있는지 하는 걸 점검하기 위한 것이고, 만약에 그런 진척이 없는 경우는 내가 어느 부분에서 균형을 잃어버렸는지 하는 걸 점검하는 경우에 이 칠각지 각각이 소중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 부분으로써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번까지 네 번째까지 했습니다.
오늘 다섯 번째 빳삿디 삼봇장가(passaddhi- sambojjhaṅga) 부분입니다. 경안각지(輕安覺支)입니다.
'평온'이라고 하는 것, 그다음에 '평정'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빳삿디'라고 하는 것, 경쾌하고 편안하다는 마음은 어떻게 생기느냐면, 내가 악의라고 하는 것들을 제거했다고 하는 데서 생기고, 또 번뇌라고 하는 것들이 떨어져 나갔구나 하는 것들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이 '빳삿디' 부분입니다. 그런 것으로 인해서 이 경안각지가 사실은 생겨납니다. 어떻게 보면 이 경안각지는 굉장히 큰 각지 중에 하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불안하고 초조하고 또 긴장상태를 유지를 해나갑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걸 수행에 호흡에서 적용해보면 당연히 그럴 거 같으면 호흡이 잘 안 되죠! 호흡을 할 땐 어떻게 합니까? 고요하게 몸과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에서 현상관찰을 해야 만이 그 현상관찰을 바르게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해도 현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차리기는 힘이 드는 판인데,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또 그 현상관찰로 인해서 아, 이것이 부처님이 말한 무상·고·무아구나 하는 것들을 약간이라도 체험하는 어떤 기쁨들이 없는 상태에서는 항상 몸과 마음은 긴장하게 되어있고 불안하게 돼 있습니다.
가끔씩 수행할 때 호흡을 하고 있는데 약간의 떨림을 발견하는 경우 혹시 본 적 있습니까? 수행해나갈 때.
호흡이 떨리는 게 아니고 그걸 관찰하는 마음 자체가 고요하게 안정이 돼 있는 거 보다 약간의 떨림이 있다 하는 걸 눈치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이 경안각지에 해당이 됩니다.
그 현상이 일어나는 것들을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수행을 잘해나가고 있는 상태에서 대상에 면밀하게 관찰이 돼 나가는데, 그 대상 자체를 전체를 확 움켜잡아가지고 요 전체를 다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하게 들 때, 그때 마음에서는 '아, 내가 이제 수행하고 있구나' 하는 그런 기쁨들이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그런 기쁨들도 관찰대상으로써 그걸 또 대상으로 잡아서 관찰해 나갈 거 같으면 그다음에 마음이 어떻게 되냐면 평안해지기는 평안해지는데,
그 평안해지는 걸 탁 놔 버릴 거 같으면 어떨 때는 잠에 떨어져 버리고 어떨 때는 삼매쪽으로 툭 떨어져 버리고. 그런데 그걸 놓지 않고 약간의 떨림이 있다고 느낄 정도가 될 때 수행이 아주 순조롭게 잘 되어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게 보통 이 경안각지에 해당이 됩니다. 통상적으로 선정삼매에 들기 직전의 상태가 이 경안각지를 구별하기가 수월하게 됩니다.
어쨌든 일상적인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도 긴장되고 또 불안하고 할 것 같으면 일을 잘 못 풀어나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수행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것들이 풀려버려야 만이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기가 쉬워지고 또 수행의 대상을 정확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관찰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관찰하고 있다.
보통 깊이 있게 사띠를 못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냥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한 시간 내내 앉아서 그것만 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있게 관찰이 돼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일어남' '사라짐' 할 때 '일어남'이 일어나면 '일어남' '일어남' '일어남'이 쭉 그렇게 되고, 또 사라짐만 '사라짐' '사라짐' '사라짐'이 쭉 되고, 요거가 조금 더 세분화되어서 볼 수 있게끔 됩니다.
그게 안된다 하더라도 '일어남, 사라짐' 할 때, '일어남'이 일어날 때 똑같이 일어나는 강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팽창하는 느낌이라든지 아니면 '일어남'이라는 것들이 조금 수축하는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있게 됩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됩니까? 수축하고 팽창하는 걸 알 정도가 될 거 같으면 하나의 '일어남'이라고 하더라도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조금 더 깊이 있게 사띠를 해나가게 됩니다.
그때가 될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 이리 힘들구나, 이리 어려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진짜 수행을 해보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전에도 그런 얘기했죠. 내가 망상하지 않고 경행하겠다, 망상을 할 때는 경행하지 않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경행을 해 볼라고 하니까 한 발짝도 발을 올려놓을 수도 없을 정도, 그 정도로 마음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고 있는 거라.
사실은 마음이 그렇게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죽어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이 짧은 하나의 대상에 딱 붙잡아가지고 이 대상 전체를 파악을 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들 거라. 굉장히 힘드는 거라.
그러니까 '일어남, 사라짐' 할 때 아니면 경행할 때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것을 관찰할 때 그 하나 관찰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들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전에는 모르고 그냥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했는데 어느 순간 하다 보니까 요게 인제 굉장히 힘들거든.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조금 더 깊이 있게 관찰할려고 하니까 경행을 할 때도 더 천천히 하게 되고, 안 그러면 내가 이걸 붙잡아가지고 이걸 낚아채질 못하는데, 알지를 못하는데! 그러니까 더 천천히 해지고, 일어남 사라짐 할 때도 온 마음을 모아가지고 그 대상에 일치시킬려고 노력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조금 더 세밀하게 이 현상들이 파악이 되어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 이게 부처님이 말한 무상이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기쁨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기쁨들도 대상으로 파악해가지고 잠잠하게 되고 나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들이 뭐냐 하면 경안각지입니다. 평온해지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아주 경쾌하게 됩니다.
그때는 좌선을 하고 있어도, '일어남' '사라짐' 해도 느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주 가볍기 때문에! 솜털같이 숨이 느껴집니다. 그 정도로 아주 가볍습니다. 경행을 할 때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할 때도 공중에 붕붕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도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경행보다는 속도가 훨씬 느려져 있다는 걸 내가 압니다. 왜? 사띠는 계속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상태에서, 노력의 힘들도 있게 되고, 또 기쁨의 현상들도 잠잠하게 가라앉은 상태에서, 일단은 몸도 마음도 평안하기 때문에, 평안하기 때문에 대상에서 벗어나질 않는 거라.
경행을 할 때 특히 그런 걸 많이 느낍니다. 체중조차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격렬함이라든지 '내가 강하게 요걸 관찰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조차도 사라져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도 대상하고 계속 일치시켜 주는 느낌만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대상하고 완전하게 일치가 되니까 마음이 붕붕붕 떠 있는 듯한 느낌들, 아주 가벼워진 느낌들을 가지게 되는 거라.
이런 것들을 뭐라고 하느냐면 경안각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경안각지에 이르게 되면 굉장히 평온해질 뿐 아니라 고요해지고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다음 단계에서 일어나지는 겁니다.
수행을 해나갈 때 사실은 이런 경쾌함을 맛보지 않으면 수행을 바르게 하고 있구나 하고 못 느끼게 됩니다. 그냥 단순하게 대상에 붙잡혀있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데, 이 경안각지가 일어날 때가 될 거 같으면 대상에 내가 붙잡혀있는 게 아니고 대상 하고 같이 움직이고 있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꼬옥 그 대상 하고 붙어있구나 하는 것을 갖다가 아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고 나면 계발되는 게 뭐냐면 사마디 삼봇장가라고 하는 겁니다.
(6) 사마디 삼봇장가(samadhi-sambojjhaṅga)·정각지(定覺支)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 사마디 삼봇장가를 잘 이해를 해야 되는데, 보통 사마디-삼매라고 할 거 같으면 그냥 대상에 집중해가지고 삼매에 푹 빠지는 것들을 얘기를 합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사마디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마디라는 것은 그거 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밑에도 적어놨지만,
가끔씩 앉아서 대상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뭘 했는지도 모르게 한 시간 두 시간 훅 지나가버리고 나서 “아, 스님 제가 언제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게 훅 지나갔는데, 내가 삼매에 빠진 것 같습니다.” 하고 얘기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잠에 떨어졌든지 대상을 놓쳐버리고 나서 아무것도 없이 무기상태로써 지냈다는 생각은 안 하고 그걸 사마디·삼매에 빠졌다고 합니다. 왜? 고요하니까.
대상은 아무것도 없는데,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살아있긴 살아있는데 무의식 상태에서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가끔씩 기억을 잃어버렸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그 부분을 전혀 기억을 못 하죠? 분명히 뭔가를 하고 있었지만. 꼭 그와 마찬가지로 했으면서도 그걸 삼매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죠!
그것도 아닐 뿐 아니라 이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집중력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고요하게 붙잡혀있는 것이 아니라 힘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사마디 상태에서는, 사마디 밑에 보면 우뻭카라고 하는 거,
우뻭카하고 사마디 하고는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어떤 차이가 있느냐면,
우뻭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평등하고 침착한 상태가 되면, 사마디 같은 경우에는 약간의 떨림이 있게 돼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여기도 적어놨지만,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힘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미세한 떨림이 있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멍한 느낌으로 있는 거 하고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어떤 것이든 대상에 대해서 꿰뚫듯이 전체를 파악할려고 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파악을 하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그 파악이 끝나는 걸 마음을 전환시켜주지 않을 것 같으면 계속 거기 붙잡혀있다는 거라. 그렇게 되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일어남' '사라짐' 하는 상태에서 사마디에 들었다, '일어남' 하면서 일어나는 데에다가 딱 집중을 하고 있을 거 같으면 '일어남'에서 딱 멈춰버립니다. 그대로 멈춰버립니다.
그런데 내가 삼매, 사마디에서 깨어나야 만이 그다음에 '멈춤'이 있고 '사라짐'이 있게 돼 있는 거지,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일어남'에서 그냥 그대로 딱 멈춰버린 상태가 됩니다. 이런 것들이 뭐냐 하면 사마디 입니다.
사마디에 있더라도 의식은 있기 때문에 마음에 약간의 떨림은 항상 있게 돼 있습니다. 그게 밑에 우뻭카 하고의 차이입니다. 교재 한번 보십시오.
여섯 번째, '잡념이 없어진 상태가 이 사마디이다'하고 얘기해놨습니다.
대상에 집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이 순수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잡념이 있을 거 같으면 마음이 순수해지지 않습니다. 잡념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전부 없어진 상태에서 대상을 바라보게 될 때 그때만이 사마디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대상을 관찰할 때도 꼭 이와 마찬가지로 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망상·번뇌라고 하는 것들을 딱 가두어 버려야 됩니다.
가두어 버리고, 망상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때의 마음, 그 깨끗한 마음을 대상에다가 딱 고정시키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가끔씩 그런 경우들 있죠?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이 이 사마디 부분은 쉽게 체험들을 합니다. 하나의 대상에 푹 집중하고 있을 때 누가 퍼뜩 깨워주지 않으면 거기에 그냥 빠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행자 질문 : 깜짝 놀래는건...) 그 대상에서 탁 깨어날 때 그러는 거지.
(수행자 질문 : 깜짝 놀래는건...) 좌선할 때요? 그거는 그냥 잠에 떨어진 거지. 잠이 아니라도 무기도 잠과 마찬가집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대상을 놓친 상태에서 그대로 그냥 머물러 있는 겁니다. 그때는 보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는 마음의 떨림이라든지 대상을 꼭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
그걸 잘못 착각하면 그런 상태가 계속 지속되면 '진공묘유의 상태에 있었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현상, 하나의 대상을 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내가 의도를 하든 의도를 하지 않든 간에.
그런데 마음은 그 대상에서 떠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아까, 있었는데 깜짝 놀랬다 할 거 같으면 마음은 이미 그 대상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딴데 가 있는 상태에서 여기에다가 앉아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다른 외부적인 충격으로 인해서 깜짝 놀라게 되는 거라. 마음은 그 대상에 없거든.
그런데 사마디 상태에서는 절대 깜짝 놀랄 수가 없습니다. 항상 마음이 그 대상에 같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거든. 그렇죠. 완전하게 몰입이 되는 거라. 그렇게 되기 때문에 외부적인 충격에 대해서도 놀라지도 않고 누가 내 팔을 비틀고 아니면 부러트려도 내가 대상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그거 자체를 모릅니다. 그런데 대상에 마음이 달라붙어 있지 않을 거 같으면 깜짝 놀라게 되는 거라.
태국 같은 경우에는 삼매에 빠졌는가 안 빠졌는가 구분하는 것을, 대부분 향이 강한 향을 먼저 코에 닿지 않게 가까이 대어 봅니다. 냄새가 아주 강하거든요. 마음이 대상에 달라붙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거기서 깜짝 놀랍니다. 그 냄새 때문에, 갑자기 그렇게 들이마실 것 같으면.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돼요? 거기에 전혀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팔을 이렇게 들어가지고 딱 놔놓거든. 대부분 이렇게 그대로 놔두고 있을 거 같으면 한 십 분 정도 있을 거 같으면 이게 떨립니다.
그런데 삼매에 빠진 사람은 전혀 움직임이 없습니다. 거꾸로 해 놓아도 그대로 될 정도로. 이게 툭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올라가면 올라간 그대로, 비틀어 놔놓으면 비틀어 놔놓은 상태 그대로 그렇게 있습니다.
요렇게 해가지고 요게 삼매에 들었구나, 안 들었구나, 하는 걸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왜그러냐 하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일어남' 하는 상태에서 사마디에 탁 빠졌을 거 같으면 '일어남' 상태에서 그대로 그냥 멈춰버립니다. '사라짐'이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갈 거 같으면 호흡마저도 딱 끊어져 버리게 됩니다.
(수행자 질문)
그거는 의도적으로 내가 숨을 멈춘 상태고, 멈춘 상태에서는 내가 아무리 길어봐야 1분 이상 넘어가지를 못하거든. 그런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에 탁 일치를 시키면 마음으로 인해서 대상하고 같이 멈춰버리는 거라. 자기가 대상에 붙어있기 때문에 거기서 멈춰버리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이거는 시간에 관계없이 얼마든지 멈춘 상태로 이어져 나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시간도 잊을 뿐 아니라 그 속에서는 불안감 같은 것들이 전혀 없게 됩니다. 그 대상에서 깨어나더라도 깜짝깜짝 놀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바로 대상을 옮겨갑니다. 그래서 '일어남' 상태에서 멈췄다, 사마디에 들었다, 그다음에 다시 또 깨어나고 나서 '멈춘' 상태에서 또 사마디에 들 수가 있고, 또 '사라짐' 상태에서 사마디에 들 수가 있고 그건 자유롭게 조정을 하게 됩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사마디에 드는 시간까지도 스스로가 조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마디에 들었을 때 어떤 상태에서 내가 깨어날 것이다 하는 것도 조절을 하게 되고. 이렇게 자유롭게 삼매에 드는 것도 가능할 뿐 아니라 삼매에서 깨어나는 것도 가능하고, 대상을 옮기는 것도 마음대로 조정을 해나갈 수 있게 되는 상태에까지 되는 겁니다.
대부분 그래서 몸이 불편한 동작에서는 사마디에 들지 말아라 하고 그럽니다. 수행을 지도할 때. 대부분 앉아있을 때 사마디에 들라 하고 얘기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만약에 경행을 하다가 발을 들어 올린 상태에서 사마디에 들었다 할 거 같으면 자기 자신은 움직이지 않지만 만약에 바람이 많이 불게 되면 넘어가게 돼있는 겁니다. 그럼 몸을 다칠 수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삼매에 들 상태가 될 거 같으면 무조건 좌선으로 앉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하라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물론 경행 상태에서도 사마디에 들 수가 있고, 또 서있는 상태에서도 사마디에 들 수가 있지만은 가장 용이한 방법은 좌선에 인해서 사마디에 드는 것이 가장 용이합니다. 다음 상태를 위해서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7) 우뻭카 삼봇장가(upekkha-sambojjhaṅga)·평등각지(平等覺支)
자! 그다음에 밑에 '우뻭카 삼봇장가(upekkha-sambojjhaṅga)' '평등'
이거는 뭐냐 하면 마음이 산란해져 있는 마음이나 그런 기능들을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그런 상태를 얘기합니다.
'침착함'이라고 하는 건데 일상적인 침착함 하고는 다릅니다. 모든 것이 갖춰진 상태에서의 침착함이기 때문에 대상을 바라볼 때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수행이 잘됐든 안 됐든 아니면 일상생활에서 슬픔이 있든 괴로움이 있든 뭐 얻은 게 있든지 잃어버린 게 있든지 그런데에 휘말리지 않고 그런 것에 초연해져 있는 그런 상태, 침착한 상태 그것을 얘기합니다.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과거의 부처님이나 아라한들의 마음과 자기의 지금의 마음하고 하등의 차이, 차별이 없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우뻭카라고 하는 것이.
우뻭카에 도달할 거 같으면 그 즉시 바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간단하게 얘기할 거 같으면 어떤 것에도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그게 우뻭카 라고 그럽니다. 왜? 감정을 생기게 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좌우되지 않고.
예를 들어서 무상이라는 현상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수행하고 있는데 무상의 현상을 본다, '아, 무상하구나' 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세상 자체는 무상(無常)이고 고(苦)고 무아(無我)다 하는 사실을 알고 그것이 꿈과 같은 것이다 하는 것들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도 얽매이지 않게 되는 거라. 극도로 냉정해져 있는 그런 상태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마디 하고 이 우뻭카의 차이는 뭐냐면, 사마디에 든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고요하다는 느낌은 못 받습니다. 참 기분은 좋다 하는 것은 있는데 그렇게 고요하다는 느낌은 적다는 거라. 그런데 우뻭카라고 하는 것은 그것조차도 버려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평등하고 고요한 상태입니다. 그게 사마디 하고 우뻭카 하고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미세한 거 같지만 이 상태에 도달하는 데는 참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사마디는 체험들을 많이 하고 하는데 우뻭카 상태에 도달하기에는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굉장히 힘이 들고 그리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게 마지막 우뻭카 상태에서는 바로 깨달음의 상태로 넘어가져 버리게 됩니다. 여기서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만약에 사마디 상태에서 사마디가 깨졌다 할 거 같으면 다시 또 사마디 상태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깨진 상태에서 다시 또 들려면.
그런데 이 우뻭카 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없다 하는 거라.
그냥 그대로 똑같이. 모든 것들을 버려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삼매라는 것들도 버린 상태고, 감정이라는 것들도 다 버려져 있는 상태인데, 단지 차이가 뭐냐면 이 우뻭카에는 앞에서 배운 것들 여섯 가지가 전부 다 있습니다.
사띠도 있고, 택법각지도 있고, 정진도 있고, 기쁨도 있고, 경안도 있고, 그리고 우뻭카도 있고, 사마디도 있고, 이런 것들이 전체가 다 갖추어진 상태, 그렇기 때문에 바로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쨌든 이 칠각지는 항상 유의해야 되는 것은
수행에서의 진지함이라고 하는 '아따삐'가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항상 마음을 집중하는 사띠, 일상적으로 여러분들이 말하는 사띠가 아닙니다. 명확하게 전체를 다 보려고 하는 '사띠'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고 알아차리는 그 사띠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띠'라고 하는 것은 '정밀하고 세밀하게 전체를 다 꿰뚫듯이 알아야 되는 사띠'를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무섭다고 느낄 정도가 되어야 됩니다. 대상을 관찰하는 게. 왜?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관찰하는 게 무섭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관찰하는 시간만큼은 명확하게 했다는 거라. 그러한 명확하게 아는 사띠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한 사띠들이 항상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냐 하면 예를 들어서 경전에도 그렇죠! 경전에 부처님이 수행을 하고 있는 때 천둥벼락이 쳤는데, 다른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천둥벼락이 쳤는데 부처님 괜찮습니까?" "난 괜찮다." "천둥벼락 치는 걸 몰랐습니까?" "난 몰랐다." 사띠로써 수행을 하고 그런 상태를 사띠라고 얘기합니다.
경행을 할 때 왼발 들어올렸다 할 거 같으면 왼발 들어올리는데 마음이 전부 다 가있기 때문에 오른발 자체가 있는지조차도 모른다는 거라. 만약에 거기서 지금 눈이 어딨습니까? 눈이 어딨는지 몰라야 되는 거라. 머리가 어딨습니까? 머리가 어딨는지조차도 모르는 상태가 되는 거라. 이런 것들이 왼발 들어올리는데 사띠가 완전하게 돼 있는 상태라고 얘기하는 거라. 그러한 사띠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처음엔 잘 안 되죠? 그리해도 자꾸 수행의 대상에 대해서 집중을 하다 보면 그렇게 돼 나갑니다.
그 대신에 수행을 해나갈 때 피곤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전력해야 되는 것이지 몸을 전력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할 거 같으면 차라리 고행을 하지 뭐 하러 수행을 해. 고행하고 수행은 분명히 다른 거거든. 몸이 긴장을 하도록 하면 안 되는 거라. 몸의 근육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힘들게 해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몸을 편안한 상태에서 마음을 그 순간만이라도 전심전력으로 집중해, 그걸 뭐라 하느냐면 '아따삐' 그 아따삐가 반드시 있어야만이 사띠 해나가는데 용이해집니다.
그런 사띠가 있고 사띠가 있은 상태에서는 대상은 항상 변합니다. 그 대상 따라서 사띠를 항상 지속적으로 연결을 시켜줘야 됩니다.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대상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들 '삼빠자나'라고 그러죠. 삼빠자나도 있게 되고.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고 관찰하는 힘 '요니소마나시까라', '식카띠'라 그러죠?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고 관찰하는 힘들.
그것으로 인해서 더욱더 내가 '확신'이 들게 되고, 더욱더 '노력'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확신과 노력이 균형을 맞춰져버릴 거 같으면 무상·고·무아가 대상에서 그 특성들로써 드러나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 현상들로 됩니다.
어쨌든 이 사띠는 간단한 말로 노력에 인해서 일어나지는 거고 가능해지는 겁니다. 자꾸 대상을 명확하게, 한번을 하더라도 명확하게 파악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해지게 됩니다. 이게 칠각지의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칠각지를 이렇게 할 거 같으면 잘 이해하기가 힘이 들죠!
다음 시간에 칠각지와 아나빠나사띠의 관계에 대한 것들을 가지고 조금 더 깊이 있게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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