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위빳사나 수행과 알아차림

관념(빤냐띠)과 실재(빠라마타)의 차이

담마마-마까 2013. 5. 9. 14:15



다음은 위빠사나 수행의 중요한 개념인 빤냐띠와 빠라마타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아주 객관적으로,

마치 남의 일처럼, 영화 보듯이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현재의 오온인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데도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몸과 마음의 형태, 모양, 이름, 관념적인 생각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몸과 마음을 이 순간 마음이 느끼고 있는 실재를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전자는 사마타(선정)수행의 대상이 되고 후자는 위빠사나(통찰)수행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전자는 세간법(속제)이고,  후자는 출세간법(진제)입니다.

둘 다 법이기는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 말하는 법은 후자인 실재를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후자의 법에는 반드시 그 법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법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순간의 오온이 알아차릴 대상인 법이 되며, 빠라마타이며, 진제가 됩니다.

이 순간의 오온에는 고유한 특성과 또 무상, 고, 무아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궁극적 진리인 법이 됩니다.


 이 관념과 실재의 구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한 수행자가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앉아서

관념적인 대상을 잡으면 즉시 알아차림을 놓치고 관념(망상)으로 빠집니다.

 그러나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는 것은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알아차림을 하면서 지금 어떤 대상을 잡고 있는지 볼 때 구분이 확연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래에 이론적으로 관념과 실재에 대한 설명은 하겠지만 참고로 하시고,  

실제 수행 속에서 감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 빤냐띠(pannatti. 관념)와 빠라마타(paramattha. 실재) **


지금부터 빤냐띠(관념)와 빠라마타(실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빤냐띠와 빠라마타를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럴 필요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으로 궁극적 진리를 통찰하려면 빤냐띠와 빠라마타에 대하여 개념적으로라도 알고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빠라마타를 수행의 대상으로 잡을 수 있게 되고 법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대상은 실재(빠라마타)이기 때문입니다.

대상에 몰입해서 선정 상태로 들어가는 사마타 수행은 빤냐띠(관념)를 수행 대상으로 하지만,

대상을 객관화해서 대상의 성품을 보는 지혜수행은 빠라마타(실재하는 성품)가 대상이 됩니다.


* 빤냐띠 ( pannatti, 관념적 진리 )에 대하여...


 일상적인 관용어 개념의 세계를 빤냐띠, 관념적 진리, 일명 속제 (俗諦)라고 합니다.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붙여진 개념들

(이름, 명칭, 숫자, 나이, 여성, 남성, 부처님 말씀, 어떤 사람, 언어, 신체기관의 명칭, 지금 여기에 올리는 글 등등 )이 빤냐띠입니다.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세간에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적 명칭, 개념, 관념을 빤냐띠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념(빤냐띠)에는 그 자체의 고유한 특성이 없습니다 .

그냥 명칭일 뿐, 그 명칭이 갖는 고유한 특성이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고유한 특성을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인식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실재가 아닙니다.

불교의 실재는 인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알아차림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그래서 빤냐띠는 설정된 개념일 뿐으로 실재가 아닙니다.

즉 법이 아닙니다.

 또한 한번 정해진 관념(빤냐띠)이나 명칭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에서 관념 또는 모양, 명칭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면 변화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산란하지 않아 한 대상에 몰입하는 깊은 집중(근본삼매)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집중을 통해 마음에 탐진치가 올라오지 않는 선정상태를 얻기 위한

사마타 수행에서는 개념, 관념, 표상, 모양을 수행대상으로 정하여 그 대상에 집중(몰입)합니다.

청정도론에 보면 40가지 사마타 수행의 주제가 나와 있습니다. 

이런 표상(까시나)를 대상으로 집중을 한 결과 마음에 고요함, 번뇌가 없는 선정을 얻게 됩니다.

 

다음은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되는 빠라마타에 대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 빠라마타 ( paramattha,궁극적 진리, 실재하는 성품 )에 대하여.....

 대상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성품’을 빠라마타라고 한다.

빠라마타는 자연적인 것, 근본법, 최승의 법. 즉 궁극적 진리를 말한다.

일명 진제(眞諦)라고 한다.

불교에서 실재하는 것은 현재 인식하고 있는 것만 실재라고 알아차림에서 설명한바 있다.

대상(색)을 인식한다는 것은 마음(식)과 마음의 작용(수상행)이다.


궁극적 진리 (빠라마타 담마)에는 네 가지 가 있다.

1) 마음(識)

2) 마음의 작용( 受 想 行)

3) 물질 (色 - 지수화풍)

4) 열반 (닙바나는 원인 결과가 없는 무위법의 진리)

  

 1.2.3.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유위법의 진리다.

 다시 말하면 오온(五蘊)은 '나'라는 관념이 의미하는 실재(實在. 빠라마타)다.

즉 나의 성품, 궁극적 진리이다.

위빠사나가 성품(빠라마타)을 수행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대상들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관념(빤냐띠)은 변화가 없어 수행 대상으로 선택하면 깊은 집중(몰입)을 하기 쉽다.

그러나 실재하는 성품(빠라마타)은 모두 느낌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런데 이 느낌은 매순간 변화한다.

즉 생멸하는 오온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하면 계속되는 변화를 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한 대상이 소멸되고, 다음 대상이 생성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한 대상에 깊게 집중할 수 없다.

그래서 찰나마다 올라오는 대상과 그 대상을 아는 마음으로 찰나집중을 하게 된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집중은 깊은 집중(근본삼매)이 아니고, 찰나 집중으로 무상을 통찰 하는 집중이다. 

곧이어 苦와 무아의 삼법인을 통찰할 수 있다.

 찰나 집중으로 오온에서 무상, 고, 무아를 볼 수 있을 때,

오온에 대한 집착을 끊고 무위법의 진리인 열반도 체험하게 된다.

러므로 수행자는 우선 자신의 오온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해서

대상(법)의 고유한 특성과 조건적 특성과 일반적 특성을 보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발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의 고유한 특성과 마음의 고유한 특성과 마음의 작용(심소)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리고,

이런 것들이 조건에 의해 생성 소멸하고 있다는 조건적 특성을 알아차리고,

이런 것들이 모두 다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일반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게 된다.


  그러니까 수행자가 처음부터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몸에 마음을 기울여 몸의 움직임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힘이 쌓여가야,  

마음이나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고,

이렇게  알아차림의 힘이 축적되면서, 무상의 법을 볼 수 있는 힘이 조금씩 익어간다고 알아야 한다. 

오온이 무상, 고, 무아라고 사유하는 것은 위빠사나의 지혜(통찰지)가 아니다.


 사실 관념(빤냐띠. 모양, 개념)과 실재(빠라마타. 고유한 특성. 느낌. 알아차릴 대상)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양(관념) 안에 그 대상의 고유한 특성이 느낌으로 일어나 그 느낌을 통해 실재를 알 수 있다.


 수행을 시작 하는 단계에서는 모양(빤냐띠)이 잘 잡힌다.

수행자가 계속 모양인 빤냐띠에 알아차림으로 집중하다 보면 점차 느낌인 빠라마타가 잡힌다. 

점차 빠라마타가 크게 보이고 빤냐띠(모양)는 작아져  인식 대상이 되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느낌만이 크게 인식된다.


 그래서 좌선이나 경행을 할 때 먼저 잘 잡을 수 있는 대상의 모양에 마음을 기울였다가,

집중이 되면 점차 마음을 모양에서 느낌 쪽으로 기울이면

대상의 실재하는 고유한 특성(빠라마타)을 주제로 알아차리게 된다.

그래서 빠라마타에 집중하면 빤냐띠는 사라지고 오직 실재하는 성품만 남는다.


 그래서 신념처에서 호흡을 볼 때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모양을 주 대상으로 보는 것은

마음을 수행 주제에 집중하기 위한 과정이고,

마음이 대상에 잘 집중 되면 모양보다 수축 팽창의 느낌을 보아야

성품(빠라마타)의 변화를 보는 위빠사나 수행이 된다.


 몸을 알아차릴 때 경행에서 발의 움직이는 모양을 대상으로 하면 빤냐띠를 보는 것이며,

발의 움직임에서 실재하는 느낌을 보면 빠라마타 “실재하는 성품”을 보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손을 합장하고 있으면서

지금 손바닥을 마주대고 있다고 모양을 보면 빤냐띠(개념, 명칭)를 본 것이지만,

손바닥에서 나타나는 실재하는 느낌들을 알아차리면

빠라마타(실재, 고유한 특성인 법)를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음식으로 고추를 먹으면서 고추다, 맵다는 개념을 떠올리면 명칭(빤냐띠)을 대상으로 보는 것이며,

고추의 ‘매운 맛’을 혀에서 직접 느끼면서 매운 맛의 변화를 알아차리면

고추의 고유한 특성인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호흡을 볼 때도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모양을 알아차리거나

 "일어남, 꺼짐"하면서 명칭을 붙이면 모양(빤냐띠)을 보는 것으로 마음 집중을 위한 사마타 수행이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호흡의 모양을 보다가 마음이 잘 집중되어 호흡의 밀고 당기는 느낌으로,

호흡의 고유한 특성이 나타날 때,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면 위빠사나 수행으로 전환 된 것이다.


 염불 수행, 절 수행, 화두 수행들도 관념이나 모양을 잡고 있으면 사마타 수행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느낌들에 마음을 집중하여 느낌의 변화를 잡고 있으면

위빠사나의 통찰지혜를 닦는 수행이 된다.


 세간에서는 빠라마타를 보지 못하고  빤냐띠를 중요시 한다.

그래서 관념을 속제라고 한다.

세간에서는 모양(아름답고 추함, 젊고 늙음)과 명칭(직위, 학벌, 재산, 숫자),

또는 명분에 가치를 두고 모양새(빤냐띠)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수행의 입장에서는 모양(빤냐띠)보다는 성품(빠라마타)을 더 중요시한다.

모양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직 그 안에 실재하는 성품에 가치를 두어 수행 대상으로 삼으면서,

수행자는 모양(빤냐띠. 개념, 관념)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래서 빤냐띠(모양)를 중요시하고,  빠라마타(성품)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지혜 없음(무지)이라고 한다.

 우리의 괴로움의 원인은 대부분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고,

 관념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관념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괴로움을 만드는 관념은 오온을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아는 고정관념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라는 관념적 대상에서 그 안의 실재인 오온의 작용을 볼 수 있는 것은

위빠사나의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다.


 만일 좌선 중에 모기가 수행자를 물었다하자.

이때 나를 물은 것이 모기라는 생각과 함께 모기물린 곳을 알아차리면

생각에 생각을 더하면서 알아차림을 놓치고 화를 내고 걱정을 한다.

알아차림을 놓치고 생각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실재하는 것은  따끔거림 가려움들의 느낌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관찰하면 그냥 그 자리에서 생멸하는 느낌에 연속일 뿐이다.

곧 그 순간이 대상이 가지고 있는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느낌의 변화를 보는 평온한 순간이다.

이 순간에는 모기가 밉지도 않고 후유증이 오래 갈까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린 곳의 느낌이 변화하는 것을 보아 느낌의 무상을 보게 된다.


 또한 나는 지금 나이가 들어 얼굴에 주름이 지고 머리는 하얗고 치아도 부실하다하자.

이 순간 이런 나의 모습을 관념으로 보면, 

나이, 주름, 나(我), 치아, 흰 머리카락 등등이 떠올라 보면 볼수록  슬프고 싫고 한탄스럽고 괴롭다.

계속 생각이 생각을 불러오면서 슬픔 비탄의 고뇌로 빠진다.    


 그러나 지금의 나를 실재인 빠라마타로 알아차려 보자.

색(色)은 지수화풍 4대의 성품 중에서 단단하고 거친 느낌이 일어났다 사라졌고,

수(受)는 슬픈 느낌이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고,

상(想)은 늙어간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졌고,

행(行)은 현재의 오온을 알아차리는 행위가 있고,

식(識) 현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수상행이 일어났다 사라짐을 아는 마음만 있다.

이 경우는 오온의 변화를 보기에 바빠 슬퍼할 겨를이 없다. 

매 순간 새로운 대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온이라는 실재가 변하지 않고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온은 동시에 함께 생멸하므로 이 순간의 이런 색수상행식이 찰나에 일어났다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계속 늙었다 슬프다 할 틈이 없이 새롭게 나타난 가장 강한 대상을 알아차리면 마음은 그냥 평온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바람처럼 스쳐지나갔을 뿐이지 이런 현상이 나의 것이라고 붙잡고 괴로워 할 틈이 없다.


 위빠사나는 현재의 몸을 마음이 분리해서 객관적으로 그 실재하는 성품을 알아차린다.

실재를 보지 못하고 관념으로 대상을 받아들이면 생각이 만들어낸 세속적 관념에 휘둘려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실재를 보면 단지 그런 느낌과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질 뿐으로

마음은 평온하게 현재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지혜가 생긴다.


 수행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대상에서 이것이 관념인지 실재인지 구별할 수 도 없고, 

항상 관념에 빠져 괴롭다.

이렇게 괴로울 때 알아차림에 의해 관념에 빠진 것을 알고 실재로 돌아오는 과정을 수없이 거친다.

이 과정에서 점차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는 힘이 생긴다.

실재는 법으로서 알아차릴 대상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이해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수행은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스스로 바르게 해나가는 힘이 생긴다.

시행착오의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며 거쳐야 할 필수 코스라고 알아야 한다.

그래서 관념에 휘둘릴 때마다 “그런 현상이 있었네!” 하고 객관화해서 집착하지 말고

이 순간의 실재하는 것으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와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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