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초수행21. 법념처2. 다섯 가지 장애-감각적인 욕망 (20080125)
자! 오늘은 법념처 두 번째 시간입니다.
까야(kāya), 웨다다(vedanā), 찟따(citta), 담마(dhamma) 그렇게 해서 사념처입니다.
여기서 법념처 할 때 담마는 어떤 담마입니까? 빠라맛타(paramattha) 담마죠! 궁극적인 실재로서의 현상들을 얘기합니다. 실제 존재하는 현상으로서의 담마를 공부하는 겁니다. 그 실제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래서 그걸 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림 해나가는 것이 이 법념처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법념처에는 다섯 가지 그룹으로 나눠진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장애들, 통상적으로 다섯 가지 장애(五蓋)라고 얘기를 합니다.
수행할 때 통상적으로 어떻게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망상피우고, 졸음오고, 하기 싫어하고, 그다음에 의심가지고,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섯 가지 장애라고 하는데 그 장애도 실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담마죠! 그래서 그것을 수행대상으로 해나가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생각이 많이 일어난다, 수행하는데 망상이 많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을 대상으로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고 이런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 몸과 마음에 대한 것들, 수행은 어차피 이 몸과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이 몸과 마음도 실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빠라맛타 담마 안에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체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마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마음의 작용들 여러 가지 요소들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
예를 들면 자애의 마음이 많이 일어났다, 그러면 그거는 마음의 요소죠? 그 자애의 마음이 일어난 것을 관찰하는 거고, 또 누굴 미워하는 마음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러면 누굴 미워하는 마음들을 알아차리는 거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오온이라 그럽니다.
이 오온(五蘊)을 알아차림이 도구로써 활용해서 알아차리는 것.
그다음에 12처(十二處)라 해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 그리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만나는 밖의 여섯 가지 경계, 이것이 여섯 가지 여섯 가지 해서 열두 가지입니다. 이것을 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마음으로 느껴지게 돼있습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을 어떻게 내가 느낄 것이냐, 어떻게 알아차릴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소리가 들리면 소리라고 하는 밖의 대상, 그것도 하나의 대상입니다, 거기에 마음을 싣는 경우.
그다음 그 소리는 음파를 통해서 귀를 통해 들어옵니다. 그럼 귀에다가 마음을 싣는 경우. 이렇게 각각의 경우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열두 가지라 12처라 그럽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방법도 법념처에 해당이 되고.
그다음에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수행에 도움을 주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칠각지(七覺支)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사띠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럼 사띠-알아차림은 어떻게 알아차리는 것인가?
그다음에 법에 대해서 조사를 해야 된다. 그러면 그 조사하는 것들을 어떻게 조사할 것인가? 하는 그런 것들이 수행의 대상이 되어지기도 하고.
그다음에 사성제(四聖諦). 고·집·멸·도(苦集滅道) 이 네 가지가 수행의 대상입니다.
고통이 일어나면 고통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집착이 일어나면 집착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이런 식으로 알아차리는 것들이 법념처에 해당이 된다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자! 그러면 첫 번째, 수행하는데 일어나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보통 뭐라고 얘기합니까? 감각적인 욕망(kāma-chanda), 악한 마음(byāpāda), 혼침과 게으름(thīna-middha), 그다음에 들뜨고 후회하는 것(uddhacca-kukkucca), 의심하는 것(vicikicchā) 이런 것들을 다섯 가지 장애라고 그럽니다.
이런 것들이 일어나면 수행을 하는데 굉장히 장애를 받습니다. 방해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가 무르익는데 성숙하지 못하게끔 하기 때문에 이것이 일어난다고 해서 배척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수행의 대상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이런 다섯 가지는 통상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만약에 감각적인 욕망(kāma-chanda), 갈애가 많이 일어났다. 갈애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뭘 많이 생각하니까 갈망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수행할 때 어떤 형태로 일어나겠습니까? 망상피우는 겁니다. 망상피우다 보면 뭐 하고 싶다, 뭐 하기 싫다 이런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망상을 피우면 '아! 내가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났구나, 갈애가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악의(byāpāda)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악한 마음, 악의는 통증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악의는 배척하는 거거든. 통증은 어떤 겁니까? 싫은 것들은 멀리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통증이 일어났을 때의 마음을 보면 악한 마음하고 거의 일치합니다. 그래서 내가 통증이 일어나면 이걸 멀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미 '마음에서 악한, 악의가 일어났다' 하고 내가 알아차려나가야 된다 하는 거라.
그다음에 혼침과 게으름(thīna-middha)은 대상을 놓쳐버린 거죠! 그러니까 당연히 수행할 때 조는 거라. 졸음의 형태로 일어납니다. '아! 내가 다섯 가지 장애 중에 혼침과 게으름, 뭔가 하기 싫어하고 이런 것들이 일어났다'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다음에 들뜸과 회한(uddhacca-kukkucca) 들뜨고 후회하고 하는 것들은 싫어하는 것으로 일어납니다. 싫어하는 것으로, 싫증으로!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경행하다가 계속 왔다갔다 해야 되는데 싫증을 느끼니까 요쪽으로 또 가는 거라. 또 요리 가고, 또 경행하다가 싫증이 일어나니까 시간이 다 되기도 전에 좌선하러 들어가 버리고, 좌선하다가 싫증이 일어나니까 또 금방 일어나서 또 경행을 하고. 싫증이 안 일어나면 어떻게 돼요? 나태와 게으름이 일어나면 경행시간이 됐는데도 그냥 계속 또 좌선을 할라 그러고, 이렇게들 바뀌어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럴 때는 '들뜸과 회한 후회하는 것이 일어났다' 하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의심(vicikicchā) 의심은 그대로 의심으로 나타나지죠. 이걸 내가 수행해가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갖가지 의심들이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실제 수행에서는 이렇게 망상, 통증, 졸림, 싫증, 의심 이런 것으로써 다섯 가지 장애는 드러나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관찰대상으로 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법념처는 이런 것들이 바로 수행대상 입니다.
그러면 망상이 일어났을 때 망상을 관찰하는 법이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통증이 일어났을 때는 통증을 관찰하는 법이 있어야 되고, 갖가지에 따라서 관찰하는 방법들이 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이 다섯 가지 장애는 근본적으로 보면 탐진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탐진치와 연결되지 않은 다섯 가지 장애는 없습니다.
이런 것이 일어났으면 탐진치로 인해서 윤회하게 된다는 거라. 업을 쌓게 되는 거고. 수행하면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났다 할 거 같으면 '아! 내가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업을 쌓을려고 하고 있구나' 하고 퍼뜩 정신을 차려야 되는 거라. 그거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하면서도 그것을 하고 있다고 하면 안 되는 거지.
매순간 이런 장애들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가? 반드시 탐진치로 반응하지 말아야 된다 하는 거라. 그것을 법념처, 법으로써, 수행 대상으로써 알아차려 나가도록 마음을 자꾸 먹어야 된다 하는 거라.
탐진치로 반응해버릴 거 같으면 거기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결과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수행을 못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리 가다가 요리 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절대 그리 가면 안 되는 거라. 반응을 하면 안 되는 거라. 그대로 그냥 다시 또 돌아오도록 해야 되는 거라. 계속 앉고 싶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되어서 경행할 시간이 되면 반드시 일어나서 경행을 하도록 해야 되는 거고. 더 앉아있고 싶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될거 같으면 다시 경행을 하도록 해야 되고.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지 거기에 반응을 해버릴 거 같으면 이미 탐진치에 물들어버리게 되는 거라.
물론 거기서 좋은 결과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있지만은 그 결과물보다는 또 받는 결과물들이 너무 크다 하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일정하게 내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기 전에는 반드시 정해진 시간, 자기가 정해놓은 시간을 꼭 맞추도록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굉장한 노력과 굉장한 인내가 필요하다.
법념처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들을 해나가야 됩니다. 일상적인 것들하고 반대로 나가야 된다는 생각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그럴려면 굉장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인내가 닙바나로 이끈다! 인내가 닙바나로 이끈다! 하기 싫어도 경행하기 싫어도 경행 시간 되면 반드시 일어나서 경행을 하고, 좌선할 시간 되면 좌선 딱 하고 이런 식으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인내를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어떻게 돼? 그것은 탐진치를 끊는 훈련이 될 뿐아니라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으로 인해서 닙바나에 이르게 된다 하는 그런 얘깁니다.
그다음에 기본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은 이 다섯 가지 장애는 지금만 익혀온 것이 아니고 과거 생부터 무수하게 익혀온 습성입니다.
지금 당장 한 생에서만 익혔을 거 같으면 끊기가 쉽겠지. 그런데 과거부터 그리 익혀왔는데 어떡할 거라. 무지로 인해서 그렇게 돼왔는데,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그것을 인정해라 하는 거라. 그거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는 반드시 있다. 없을 거 같으면 윤회를 하지 않았지 왜 이렇게 있느냐는 거라. 그럼 그걸 인정해라는 거라. 화내고 있으면서도 내가 화 안낸다, 욕심 있으면서도 내 욕심 없다 하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없을 수가 없다 하는 거라. 일단은 그것을 인정을 하고 나서, 인정하고 나서 그것을 법념처로 법으로써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 거라.
부처님이 깨달은 것도 그와 마찬가집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그거 찾을라고 안 죽을라고 아무리 노력해보니까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을 인정하고 나서 그것을 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림을 한 것뿐이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이 다섯 가지 장애는 인정을 하고 그것을 알아차릴 대상이다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과거부터 익혀온 습성들이니까 어떻게 돼? 알아차린다 해서 금방 없어지는 거 아니죠? 없어졌다 싶으면 또 나타나게 되고 또 없어졌다 싶으면 또 나타나게 되고,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내 몫은 뭐냐 하면 그거 없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나는 알아차리는 게 내 몫이라. 그런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이걸 하루빨리 다 뿌리 뽑겠다, 다 없애겠다는 생각을 일체 가지지 말아라는 거라. 그냥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냥 즉각즉각 알아차리겠다는 생각을 가지라는 거라.
이런 장애라고 하는 것은 수행자 각자의 노력으로 인해서 없어지지만은 장애가 없어지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수행자의 몫은 아닙니다. 수행자의 몫은 그냥 알아차리는 것뿐이라는 거라. 알아차림만 계속해서 유지해나가야 되는 거라.
그리고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거는 급격하게 다 없애겠다는 마음도 먹지 말고, 또 한번 일어나고 나면 또 안 일어나겠지 하는 생각도 가지지 말아라는 거라.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거라. 장애가 어떤 것이 일어나더라도 싫어하고 좋아하고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을 해나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장애는 수행에서 가장 좋은 대상입니다. 가장 좋은 대상!
몸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해도 이런 장애가 나타나고, 느낌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해도 이런 장애가 나타나고, 마음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해도 이런 장애가 나타납니다. 당연히 법념처는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장애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수행은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알아차림, 그리고 그 대상에 온 마음을 모으는 집중, 이것으로 인해서 발전되어 나간다 하는 것들을 반드시 기억들을 먼저 해야 됩니다.
이제 하나씩 해보겠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 첫 번째, 감각적인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좋다 하는 겁니다. 좋다! 좋다 하는 건 어떻게 일어납니까? 육근과 육경이 접촉해서 좋은 느낌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것이 좋다 하는 거거든. 그런 것이 쉽게 말하면 '좋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꼭 용어가 맞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갈애, 갈망'하면 그 용어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좋다'라고 하는 것으로. 물론 좋다라고 하는 것은 '삐야(piya)'라고 합니다.
갈애·갈망은 '딴하(taṇhā)'라고 그렇게 얘길하고, 그 용어들이 조금씩 다르긴 다른데, 그리하더라도 이 '갈망' '좋다'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사성제를 발견했을 때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 이 갈망이라고 그랬습니다.
어떤 것이 고통입니까? 늙고 병들고 죽으면 윤회하는 것이 고통이라. 만나는 사람 못 만나서 괴롭고 하는 그런 것들, 이것들을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그렇게 하죠! 그런 것들 통칭해서 고통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고통의 여덟 가지는 뭐냐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전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는데 그런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는 것이 이런 '갈망' '좋다'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들 돈 좋아하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다 좋아하죠. 친구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죠. 그리고 내 새끼 이쁘다고 내 새끼 좋아하지 않는 사람 있느냐는 거라. 그런데 어떡하나. 부처님이 이걸 윤회의 원인이라고 했는데. 그럼 안 좋아해야 됩니까?
어쨌든 그것을 왜 윤회의 원인이라고 했을까 하는 거라. 항상 좋으면 괜찮은데 이놈이 좋지만은 않으니까 문제인 거라. 돈도 아무리 좋아도 돈이 억만금 지체 못할 정도로 있으면 싫습니다. 내 새끼 아무리 좋아도 지가 미운 짓 하면 싫어지게 돼있다는 거라. 변하기 때문에!
그런데 '좋다' 하는 건 뭡니까? 좋다 하고 집착하고 갈망하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변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이 갈애, 좋다 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로써 '아! 이것이 윤회의 원인이 되는구나' 하고 얘기를 해놓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무상하다고 아는 사람들은 보통 보면 그리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죠. 무상한 줄 알 거 같으면. 그러면 이 감각적인 욕망 감각적인 갈애 갈망 이런 것들을 없앨려고 할 거 같으면 무상함을 보면 됩니다. 그 대상에서 아! 무상하구나 하는 것들을 갖다가 알면 당연히 감각적인 욕망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게끔 된다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한번 얘기해봅시다.
밥을 먹는데 아주 맛있는 음식을 해가지고 누구에게 "맛만 봐라" 하면서 혀에다가 살짝 대줬어요. 살짝 혀를 대보니까 아주 맛있거든. 그러고 나서 음식 가져가버렸어. 점심때 됐는데 그거는 주지 않고 맛만 보여준 거야. 일반적으로 어떤 마음이 듭니까? '아! 먹고 싶다'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런 경우가 하나 있고,
또 맛난 음식을 잔뜩 가져와가지고 먹으라고 줍니다. "니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럼 인제 그 사람은 실컷 먹습니다. 실컷 먹으니까 어떻게 돼? 그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원하고 하는 것들은 안 생겨납니다. 그런데 앞에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맛만 보여주고 말았으니까 원하는 마음들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무상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갈망이 생겨난다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얘기하는 무상하고 지금 부처님이 말한 무상은 다릅니다. 부처님이 말한 무상은 뭐냐 하면 '변하는 속성들'을 무상이라 그럽니다.
누가 갑자기 죽었다. "아! 무상하다" 이걸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거는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안 그러면 뭐 친구하고 애인하고 헤어졌다 급작스럽게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죠? 점진적으로 일어나지는 것들입니다. 그 죽은 사람도 급작스럽게 죽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보면 점진적으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단지 몰랐던 것뿐입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무상이라 하는 것은 변하는 속성들을 얘기합니다. 순간순간 끊임없이 일어나는 변화, 이런 것이 무상입니다.
그런데 이 무상인 걸 모르기 때문에 원하게 된다 하는 거라. 변한다고 알 것 같으면 아무리 내가 음식 맛을 보여주더라도 음식 맛은 이미 변해서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럼 없어진 것을 알 거 같으면 적어도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진 않는데, 아! 요놈이 것이 변한다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아! 그거 맛있다' 하는 생각을 자꾸 굴리니까 어떻게 돼? 좋아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무상한 걸 알 것 같으면 적어도 갈애는 어느 정도는 물리쳐나가 줄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갈애는 통상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고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들로 인해서,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들,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들 그것을 보통 '감각적인 갈망'이라고 그럽니다. 그걸 '까마 딴하(kāma-taṇhā, 慾愛, 욕애)' 그렇게 얘기하죠. 여기서 보통 얘기하는, 1번 찹터에서 얘기하는 게 여기에 거의 다 해당이 됩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죽고 싶지 않다.' '죽는 것이 두렵다'하는 겁니다. 한 번도 죽어보지 않은 사람이 죽는 것이 두렵다고 하는 것이거든. 말이 좀 어폐가 있을 진 몰라도 사실을 보면 윤회해 왔기 때문에, 끊임없이 옛날부터 죽어오고 또 태어나고 죽어오고 태어났기 때문에! 일단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어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지금 현재 생에서 내가 직접 죽어보지도 않아도 죽는 것이 두렵다는 걸 아는 거라. 그거는 뭡니까? 살고 싶다는 거라.
'살고 싶다는 욕망' 그걸 보통 죽음에 대한 공포감으로 인해서 살고 싶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와 딴하 (bhava taṇhā, 有愛, 유애)'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 지지리 못살 거 같으면 그것을 벗어나고 싶다 하는 거라. 이 상황을 어떤 상황이든지 바꾸고 싶다는 거라. 그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상황을 안 바꾸고 싶습니까? 돈 아무리 많은 사람들 봐봐. 돈 더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 상황을 바꾸고 싶어하는 거라. 그렇게 바꾸고 싶어 하는 것들이라.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그렇다고 죽음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위바와 딴하(vibhava taṇhā, 無有愛, 무유애)'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런 것들 세 가지가 딴하(갈애)에 해당이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 어느 바라문이 있었는데 그분은 불교도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이 그 주변에서 살면서 이 농부 바라문한테 가서 자근자근 얘기도 하고 그랬거든. 자기는 불교도가 아니라도 부처님이 참 좋단 말이라. 그래서 농사철이 되어서 부처님한테 그럽니다. "부처님! 내 이번에 농사짓거든 처음 나오는 쌀을 내가 부처님한테 올리겠습니다." 부처님이 아무 얘기도 안 하는 거라.
그 농부는 그런 갑다. 내가 마음에 부처님한테 올리고 싶으니까 그래야지 하고 있다가, 그해 뭐가 어찌 잘못 돼가지고 흉년이 들어가지고 그냥 쌀을 수확하지 못할 상황이 돼버린 거라. 요즘 같으면 태풍이 불어갖고 쌀이 싹 다 자빠져버렸다는 거라. 그러니까 되게 실망을 한 거라. 아! 이걸 올해 수확해가지고 첫 곡식을 부처님한테 공양 올릴라고 했는데, 첫 곡식은 둘째 치고 하나도 수확을 못 한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갑니다.
"부처님! 내가 전에 이러기로 했는데 참 미안합니다."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뭐 때문에 그리 근심하고 있는가?" 뭐 때문에 그렇게 근심을 하느냐는 거라. 부처님에게 그것을 올리겠다는 갈망 때문에 근심하는 거라. 그 갈망이 해결이 안 된 거니까. 그런데 현실은 어떻게 됐어요? 그러한 갈망을 일으켰을 때 하고 그리고 시간은 한참 지나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농부는 거기에 붙잡혀 있는 거라.
붙잡혀 있으니까 어떻게 돼? 무상을 모르니까 그 갈망으로 인해서 근심이 생겨버린다는 거라. 그 근심만 생겨납니까? 근심으로 인해서 해결이 안 되면 어떻게 돼요? 두려움이 일어나는 거라. '아! 부처님한테 꾸지람 들으면 어떻게 할까?' 그로 인해서 내가 약속을 못 지켰으니까 내가 나쁜 과보 받으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이 일어나는 거라.
갈애로 인해서 근심이 일어나고 두려움이 일어난다는 거라. 니가 만약에 현명하다고 할 거 같으면, 그 갈애 버려버릴 거 같으면 근심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는 거라. 그럴 걸 왜 그 갈애를 붙잡고 있느냐는 거라. 모든 것은 무상하다. 모든 것은 변하게 되어있다. 변하는 것은 변하는 그대로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두려움도 없고 근심도 없다는 거라.
감각적인 욕망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감각적인 욕망이 계속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무상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집니다.
그러면 감각적인 욕망은 수행할 때 어떤 형태로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망상으로 일어난다고 했죠!
그러면 내가 망상을 관찰할 때 어떻게 관찰해야 됩니까?
무상하게 관찰해나가야 됩니다. 망상이 일어났으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갖다가 알 거 같으면 어떻게 돼? 망상을 극복할 뿐아니라 감각적인 욕망도 툭툭 떨어져나가게 돼있다는 거라.
변하는 것들을 갖다가 관찰을 하도록 하라. 그래서 생각이 일어날 경우에 무상 고 무아 다 관찰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중에 많이 치중해야 되는 것이 이 무상이라는 성품들을 많이 치중해서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아직 감각적인 욕망, 갈애 부분을 다 한 것은 아닙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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