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위빳사나[기초수행반]

기초수행22. 법념처3. 오장애_감각적인 욕망_집착 (20080215)

담마마-마까 2020. 1. 9. 00:44

https://youtu.be/Dga_qeNDgEs

* 기초수행22. 법념처3. 오장애_감각적인 욕망_집착 (20080215)

 

법념처에 대한 얘기를 지금 계속하고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행복 하고, 부처님이 가르치신 행복하고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부분인데 정반대에 있다고 보시면 맞습니다.

그럴려면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것들을 머릿속에서 좀 바꿔야 된다 하는 겁니다. 좋아하는 것들 계속하고, 싫은 것들 안 할려고 하는 이런 기본적인 패턴들이 바뀌지 않으면 부처님이 생각하는 행복은 여러분들한테 다가오지 않는다 하는 얘기하고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법념처 첫 번째 중에서도 첫 번째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살아가는 데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싫은 일들도 같이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만약에 좋아하는 일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사는 인생에는 누구든지 문제가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저번 시간까지 좋아하는 것들은 일단은 불행을 부르게 되어있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왜? 변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은 보면 나쁜 것들을 좋아한다는 거라. 나쁜 것들을. 집착하는 것들이고, 또 몸에 안 좋고 또 마음에도 안 좋은 것들을 좋아하게 되어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불행을 가져오게 돼 있다, 나쁘게 되게 돼 있다 하는 얘기를 했고.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은 이성적이진 않다는 거라. 거의 본능적인 것이다, 그냥 적당하게 좋아할려고 하진 않게 돼있다는 겁니다. 좋아하면 빠져들어가게 돼있고, 적당하게 즐긴다 하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 하는 거라. 그래서 좋아하는 것들은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이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감각적인 욕망 부분 계속하겠습니다.

 

감각적인 욕망은 또 하나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집착하게 된다 하는 겁니다.

집착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감각적인 욕망, 좋아한다고 하는 것들은 집착을 하게 돼있습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내 가족들 누구를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또 이런 꽃나무를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다들 집착하게 돼있다 하는 겁니다.

집착하면 문제가 뭐냐 하면 의존하게 된다는 거라. 거기에! 그래서 내 자식이 잘못되면 분노가 솟아나되는 거고.

이 좋아하는 것의 세 번째 패턴이 뭐냐 하면 푹 빠져버린다 하는 겁니다. 의존하게 된다 하는 겁니다. 집착으로 인해서 의존하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인 욕망, 좋아한다고 하는 것에는 반드시 순간적인 쾌락은 일으킵니다. 그런데 하나의 더 다른 면은 뭐냐 하면 사람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들, 그리고 이성적인 것들, 그런 행복들을 오히려 퇴보시키는 역할들을 한다 하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약이나 폭력 같은 거 이런 것들은 나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만 집착 안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진 않습니다. 음악을 좋아한다든지 아니면 여행을 좋아한다든지 아니면 사회활동을 좋아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다 포함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도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의존증을 가져오게끔 됩니다. 사회활동 하다보면 안 하면 허전해. 그리고 그것에 매이기 때문에, 푹 빠지기 때문에 다른 일들에 대한 장애들도 가져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도 그게 그렇다고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도 완전하게 문제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부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좋아하고 갈망한다고 하는 것은 한계점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계가 있으면 자기가 적당하게 조정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참 좋은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보통 보면 의존하게 되면 문제가 뭐냐 하면 서로를 속박하게 됩니다.

구속하게 된다 하는 겁니다. 구속하게 되니까 만약에 떨어져버릴 것 같으면 고뇌하게 된다는 거라. 번뇌하게 된다는 거라. 그런 경우들 많이 있습니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거 때문에 결혼해서도 간섭할려고 하고, 그러니까 애는 더욱더 엄마를 의존하게 되고 결국 결혼해도 마마보이가 되고 이런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 감각적인 욕망들에 포함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보면 어머니의 좋아하는 것하고 아버지의 좋아하는 것하고 좀 다릅니다. 어머니의 좋아하는 것은 '삐야(Piya)'라고 그러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은 '뻬마(pema)'라고 부처님이 용어를 적어놓았는데 그거는 좀 있다가 설명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사회는 좋아하는 일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싫어하는 일도 해야 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만 하면 되겠지. 좋아하는 일만 하는데 뭐가 문제냐 하겠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꿈같은 얘깁니다. 꿈을 꾸는 거하고 마찬가지라는 얘깁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좋다고, 싫다고 하는 부분을 떠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참 안되죠? 좋은 일은 의존하기 때문에, 집착하기 때문에 안 되고, 싫은 것들은 또 배척하고 이러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러면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뭐냐 하면 '좋다고, 싫다고 하는 것을 느끼는 곳에 문제가 있다'하고 부처님은 판단을 하신 겁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면 불행하게 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의존하게 되고, 그래서 자유가 없어지고 그래서 괴로움이 따르고, 싫은 일을 해도 좋아하는 일을 해도 결국에는 근심, 고뇌가 따르게 되어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걸 우선에 받아들여야 됩니다.

이 딜레마를 풀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바뀌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번에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바라문이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다가 자루 속에 넣었는데, 그때 마침 코브라가 그 자루 속에 들어갔는데, 그걸 메고 가다 보니까 누가 "멈추면 당신이 죽고 멈추지 않고 집에 돌아가면 집에 있는 아내가 죽는다" 하고 얘기를 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걸어갈 것이냐 아니면 집에 가지 말아야 될 것이냐 이 딜레마에 빠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현명한 바라문이었기 때문에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내가 아까 도시락을 꺼내먹고 나서, 뭔가 나에게도 문제가 없고 아내에게도 문제가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도시락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 도시락을 살며시 끌러서 이렇게 살펴보니까 코브라가 들어있거든. 그래서 인제 문제해결을 했다고.

그런 줄을 모르고 내가 앉아서 다시 또 남아있는 걸 먹을라고 조심하지 않고 끄집어냈다가는 내가 물려서 죽는 것이고, 그 도시락을 집에 가져가서 아내에게 주면 아내는 그걸 또 끌러가지고 씻기 위해서 하다가는 아내가 죽게 된다는 거라.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문제도 꼭 그와 마찬가지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런 딜레마에 빠진다는 거라. 그런 딜레마에 빠지는 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문제 해결점이 있는 것이지 외부적인 것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 하면 좋고 싫고 하는 것을 판단 기준으로 하지 말아라.

뭘 판단 기준으로 해야 되느냐? 이것을 해가지고 행복하게 되는 것인가?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좋고 싫음을 떠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좋은 부분도 해야 되고 싫은 부분도 해야 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나? 필요한 것이냐? 내가 진정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거 하기 위해서, 그 필요에 의해서 여기 위빳사나 수행하러 온 거 아닙니까?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수행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하기 때문에 집에서 편안하게 좋은 것들 다 놔두고 여기 와서 불편하더라도 한다는 거라.

왜? 그렇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 사람은 진지해집니다. 열심히 노력하게 돼있다는 거라. 무책임하게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로 인해서 스트레스도 받지 않게 되고. 그러면 그 일을 하고 나면 '아! 내가 참 행복하구나. 내가 참 바른 것을 했구나.' 하는 생각으로 충만해지게 됩니다.

그게 이런 좋고 싫음을 떠나는,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좋아하는 것이 있고 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싫은 것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항상 사람의 마음은 번뇌로 더러워지게 돼있습니다. 번뇌로 더러워지면 마음이 속박됩니다.

좋고 싫은 것들을 필요로써 바꾸어버리고 나면 그런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방돼버린다는 거라. 필요에 의해서 행복해지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보통 여러분들이 욕심을 가지고 좋아하는 대상은 뭐가 있습니까?

사람, 아니면 동물이나 이런 생물들 그런 것들이 처음 존재를 합니다. 특히 가족 같은 경우는 더 그렇죠. 그다음에 뭐가 있습니까? 물건들이 있습니다. 물건들! 그것만 있는 건 아니죠? 생각! 나하고 생각이 맞는 사람들 하고 대화를 할려고 그러고.

이렇게 생각이나 사고 이런 것들이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상입니다. 사람이나 생물들, 그리고 물건들, 그리고 생각이나 사고, 관념들이나 이런 것들도 포함이 됩니다.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라 하더라도 누구든지 다 똑같은 것은 아니죠?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저 사람도 이 사람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내가 이 물건을 좋아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이 물건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생각이 똑같다고 해도 나는 생각이 똑같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그 생각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하는 거라. 보편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들은.

 

주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개인의 마음의 문제이지 이런 존재하는 세계의 문제는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그마만큼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번뇌에 물들 수밖에 없다 하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부처님이 뭐라 했느냐 하면 "그 대상으로부터 먼저 몸을 빼라. 그러고 나서 의존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도록 마음을 증장시켜라"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자! 연경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면 그 대상으로부터 몸을 빼야 되는 거라. 내가 연경이를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그 대상으로부터 일단 빠져나오라는 거라. 저것을 객관적으로 보라 하는 거라.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주관적으로 볼 거 같으면 좋아하고 싫어하고 해서 빠져들어 가게 돼있다는 거라. 객관적으로 보고 나면 어떻게 돼요?

저 대상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쟤한테 지금 필요한 게 뭔가 하는 것들만 생각을 해주면 되는 거라. 그럼 얘가 지금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을 충족시켜주면 내가 좋아하지 않더라도 나는 행복하다는 거라.

대상으로부터 몸을 빠져나오고 나서 그다음에 그 빠져나온 상태에서 충족시켜주도록 하라는 거라. 의존하지 않도록, 자꾸 행복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수행에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걸 '마음을 증장시켜라' 하는 거라.

그 대상,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더라도 마음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대상에 마음을 일치시켜줌으로 인해서 그 대상에서 얻어지는 행복들을 가질 거 같으면 그 대상을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더라도 거기서 충분히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는 거라.

 

어떤 대상이든지 감각적인 대상이 일단 일어나면 이와 같이 바라봐야 됩니다.

그 감각적인 대상을 배척하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끌어 붙잡으려고 할 거 같으면 일단은 안 됩니다. 거기서 일단 몸을 빠져나와야 됩니다. 대상으로부터 몸을 빠져나오고 나서 거기에 의존하지 않도록 됐을 때, 그 대상에 대해서 변해가는 속성을 알 거 같으면 필요성은 충족됩니다.

아! 저리 변해가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대상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이미 바뀌었기 때문에 행복감들을 느끼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 대상을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이 일어나고 행복감들이 일어나게 된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에게 누가 죽었다 할 거 같으면 굉장히 슬플 겁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가 죽은 것에 대해서는 그리 슬퍼하지를 않습니다. 그거는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내 아이를 좋아하는 것으로 인해서! 다른 아이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슬프지 않은 겁니다. 슬픈 것까지는 좋은데 보통 보면 그것이 여러분들을 더욱더 괴롭히게 된다는 겁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끄달려 들어가면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하게 돼있다 하는 겁니다. 그 감정을 그런 느낌들을 일단 없애버리고 나면 마음은 평온해진다 하는 겁니다.

 

위사카 부인에게 수닷타라고 하는 손자가 있습니다. 딸의 아이죠! 딸의 사내아이인데 사내아이가 갑자기 죽어버렸어요. 위사카는 여러분들도 알겠지만 불교신도 중에 여자로서는 가장 최상으로 치는 신도입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죽은 것에 대해서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었거든. 그마만큼 아이를 사랑했으니까.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그 아이를 사랑했느냐?" "사랑했습니다. 손자를"

"그럼 그 아이가 두 명이었을 거 같으면 더 사랑했겠느냐? 그 사랑하는 행복이 두배로 늘어났겠느냐?" "그렇겠죠."

"그럼 네 명이었을 거 같으면, 네 배로 늘어나면? 열 명이었을 거 같으면, 열 배로 늘어나면?"

 

그런데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을 해보라는 거라. 한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슬픔은 하나라고 할 거 같으면, 그럼 두 사람이 죽으면 슬픔은 두 배가 되고, 열 사람이 죽으면 슬픔은 열 배가 되어야 될 수밖에 없다 합니다.

자식에 대한 애착, 애착으로 인해서 사람이 지혜로워지는 것들을 방해한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열 사람이, 나하고 관계없는 사람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슬퍼하진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내 열 사람이라고 할 거 같으면 열 배의 슬픔을 느낀다 하는 거라. 그거는 뭡니까? 그마만큼 애착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여자가 좋아하는 것들을 '삐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집착하게 돼있다는 거라. '삐야(piya)'라고 하는 것은 거의 '갈망, 집착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뻬마'라고 합니다. '뻬마(pema)'는 뭐냐하면 '상냥하다'는 겁니다. 엄마 같은 경우에는 과도하게 애에게 집착하게 되는데,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같은 사랑이라 하더라도 겨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정도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조금 다르죠? 그리하더라도 집착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집착하는 것은! 아버지가 딸이 죽었다 해가지고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려면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났을 때 그 대상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노력을 하라. 그러고 나서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대상은 바뀝니다. 왜? 존재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변하는 현상을 바라볼 거 같으면 거기서 충분히 행복들을 느끼게 돼있다 하는 겁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하고 다음 시간에는 감각적인 욕망을 이때까지는 개인적인 문제로써 한정을 했는데, 인간관계에서의 문제로 폭넓게 한 시간 더하고 감각적인 욕망은 마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