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념처경 법문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22강. 심념처 5- 위대한 마음(선정에 든 마음) (20120526)

담마마-마까 2021. 5. 2. 12:00

https://youtu.be/pWFVF3pNptY

22강. 심념처 5- 위대한 마음(선정에 든 마음) (20120526)

 

오늘은 대념처경 부분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마음이 수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마학가따 찟따(mahaggata-citta)'라고 '위대한 마음이 있을 때는 위대한 마음이 있는줄 알아라. 위대한 마음이 없을 때는 위대한 마음이 없는줄 알아라.' 그렇게 경전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어떤 게 위대한 마음일까? 주석서에는 '선정에 든 마음' 그래서 "색계 선정과 무색계 선정에 든 마음을 위대한 마음이다." 또 위대하지 않은 마음은 "욕계의 마음을 위대하지 않은 마음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위대한 마음과 위대하지 않은 마음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는 것이 뭐냐면

'고뜨라부(Gotrabhū)'라고 하는 겁니다. '종성(種姓)'이라고 보통 얘기를 하죠.

부처님의 성을 쓴다는 그런 뜻입니다. '성자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자'라는 그러한 뜻으로서 쓰여집니다.

그래서 '고뜨라뷰' 다음에는 위빳사나 수행하시는 분들은 '수다원'에 이르게 되고, 사마타 수행하는 분들은 '초선정'에 들어가지고 그렇게 되죠.

"초선정부터 사선까지 혹은 오선까지를 색계 선정의 마음이다." 그다음에 그 위에 또 "무색계 네 개 선정의 마음이 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정에 들었으면 그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했으니까 선정에 들어도 마음을 알기는 알아야 되네? 마음을 모르고 그냥 나는 선정삼매에 이르렀다 하면서 몽롱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한 시간 동안 기분 좋게 있다가 나오면 그거는 선정 아니지!

어떤 경우든지 선정에 있을 때는 그 선정에 있는 걸 분명하게 자기가 알게 됩니다. 아, 내가 진짜 기분 좋게 있으면서 어떤 어떤 현상들이 어떻게 어떻게 일어났다, 아니면 내가 참 즐거웠는데 그 즐거워하는 동안에 어떤 어떤 현상들이 있었다 하고 분명하게 자기가 알게 되는 거죠.

 

당연히 위빳사나 수행하시는 분들은 마음의 생멸을 보는 거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분명하게 볼 것이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지 않고 사마디 수행하는 분들도 그 마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만이 가능하다 하는 그런 얘깁니다.

보통 우리들이 살아가는 마음은 욕계 마음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욕망을 지니고 있는 마음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스님을 보고 있죠? 그러면 보는 거. 또 스님 소리 들리죠? 그럼 들리는 거, 또 맛보는 거 이런 것들을 욕계의 마음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정 삼매에 들면 안 들리죠? 안 보이죠? 그렇게 됩니까? 그렇게 돼야 됩니다!

삼매에 들어가 가지고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고 하는 다섯 개의 문은 꽉 닫혀버려야 됩니다. 의문(意門), 마음의 문만 열려져 있어서 마음으로 모든 것들을 인식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그 대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마음으로만 인식이 돼야 되는 것이지.

여기 우리 태집님이 여기서 이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러면, '그걸 눈으로 봐가지고 걸어가고 있다 하고 인식하고 있는 상태'를 '나는 선정 삼매에 들었다' 할 거 같으면 그건 거짓말이라 하겠지.

쉽게 말하면 태집님 요기서 걸어가고 있든지 아니면 걸어가고 있지 않든지 관계하지 않고, 내 마음에서 태집님 요기서 요래 요래 걸어가고 있다 하는 걸 인식을 하고 있어야 된다는 거라. 이거 눈으로 보이는 거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그게 쉽게 말하면 색계 선정의 마음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어떤 대상을 만들어야 되죠! 사마디 형성을 하기 위해서! 그 사마디 형성이 되는 대상이 있으면, 네가(연경이) 많이 하고 있지? 원을 가지고. 원을 보고 하는 게 아니죠?

원을 보고 나서 눈을 딱 감습니다.

보지 않고 마음속에서 그 흰색 원을 그대로 내가 마음으로서만 인식을 하게끔 됩니다.

마음에서 인식을 한 상태에서 인식된 그 원이 점점 더 크게 보이기도 하고 뚜렷하게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이게 색깔이 변하기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 작용들을 합니다. 그럼 그걸 그대로 아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이 원하고 내 하고 가 딱 일치가 됐을 때, 이때가 초선정에 들게 되는 그런 상태가 되는거죠.

 

어쨌든 선정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보고 시작을 하더라도 그렇게 대상을 만들었더라도 보면 안 되는 거라. 들리는 것을 시작으로 대상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들리면 안 되는 거고, 냄새 맡는 거도 마찬가지고 접촉도 마찬가지고.

안이비설신을 딱 막아버린 상태에서 수행은 시작이 되게끔 됩니다. 그렇죠! 이해가 됩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정 수행, 사마디 수행은 올바르게 해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선정 수행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예를 들어서 경행을 이렇게 하면서 선정 수행을 한다.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죠! 왜 가능하지 않아요? 걸어가려면 뭔가 보아야 걸어갈 거 아냐! 그러면은 보면서 선정 수행을 한다는 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걸어가지 않고 딱 멈춰 서서 수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걸을 수가 없기때문에. 걸어가 가지고는 선정 수행을 할 수 없기때문에.

 

그 대신에 선정 삼매에 이르기 위해서 사마디(samādhi)를, 집중력을 좀 더 강하게 해 줄수는 있죠!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이 집중하는 힘들을 키워주기 위해서 어떻게 해요? 걷더라도 그냥 일상적으로 걷는 게 아니고 눈을 감고 걷습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은, 의문(意門)은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력이 강해지는 거라. 눈을 감고 걸어가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이때까지 상태와 거꾸로 돌려버리는 반대의 작용.

수행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고 행하고 있는 것의 반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걸어갈 때는 앞으로 걸어가게 돼있는 건데 앞으로 걸어 안 가고 뒤로 거꾸로 걸어가는 거라. 뒤쪽으로. 눈이 뒤쪽에 달려있지 않으니까. 그럼 어떻게 돼요? 집중력은 훨씬 더 강해지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이 집중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들을 동원하기도 하는 겁니다.

 

결국 선정 삼매에 이르기 위해서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고 하는 문은 꽉 닫아버려야 만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그런 조건을 만들어야 돼.

여기 와서도 소리가 안 들리는 조건을 만들고, 또 수행을 할 때는 보이지 않는 조건을 만들고, 냄새가 없는 조건을 만들고, 그래서 수행처에는 향 같은걸 안 피웁니다.

이런 어떤 조건들을 만드는 거라. 집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 딱 한 시간 동안에 내가 방해를 받지 않는 조건을 만들어서 방문 딱 걸어 잠그고, 딱 앉아가지고 눈 감고 내가 수행을 하게 되는 거라.

이 다섯 가지를 잘 닫고 수행을 하면 사마디(samādhi)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다섯 가지를 닫을려고 할 거 같으면,

그 다섯 가지를 가지고 우리는 보통 뭘 합니까?

보는 거 가지고 뭐 봤다 할 거 같으면, 그냥 ‘어, 누가 보이네’ 이렇게만 인식하질 않죠! 뭐 해요?

오늘 꽃이 왔으니까 여기 꽃이 보이죠. 꽃이라고만 인식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예쁘네’ 합니다. 그렇죠! 그 얘기는 뭡니까? 구별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쁘니 추접으니 뭐 어쩌니 저쩌니 이미 구별을 하고 있어.

그것만 합니까? 그거까지만 하면 그래도 괜찮지. ‘아이, 저거 우리 집에 가갈까?’ 요 생각까지도 하게 됩니다. 욕심을 내게끔 되죠. 더러운 걸 보면 ‘아이, 저거 버려버려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할 거고. 그 보이는 것은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들리는 것은 그렇게 또 인식을 안 합니까? 냄새 맡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이비설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겁니다. 접촉되는 것도 꼭 마찬가지고. 욕계 세상은 그렇게 사는 세상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다섯 가지 문을 꽉 닫으려고 할 것 같으면 안 보인다고 해가지고 안 보이는 것만 있어야 되는 게 아니고, 그러한 마음의 작용을 끊어버려야 된다는 얘기라. 그래야만 색계 선정의 마음으로 넘어갈 거 아니라.

 

그래서 색계 선정으로 넘어가고 더 넘어서 무색계선정으로 넘어가려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게 뭘 해야 되겠어요?

'욕망' '까마 찬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욕망을 가지는 걸 딱 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끊어낼 수 있어요? 안 끊어지죠! 사마디 수행해도 이게 안 끊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안 끊어지면? 억눌러놔 놓을 수밖에 없어요.

쉽게 말하면 아무리 미운 놈이라 하더라도 내가 안 보면 안 미워. 안 보도록 만들어. 그건 눌러두는 거와 마찬가지라. 그런데 언젠가는 그 미운 놈이 내가 보면 미운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억눌러 놔 있었는데 다시 튀어나오게 되어있어. 그게 사마디(samādhi)의 한계라.

 

아무리 내가 삼매수행을 해서 삼매를 자유자재로 뭐 어쩌고 저쩌고 한다 하더라도 한계가 그런 것들이라. '까마'를 완전히 끊어낼 수는 없는 거라. 억눌려 놓는 거지.

그럼 어쨌든 간에 평상시에 행동할 때도 욕망이 잘 일어나지 않는 조건을 만들어야 되는 거라. 아예 안보든지 보더라도 이게 안 일어날 수 있도록 눌러줘야 돼. 어, 내가 이런 마음먹으면 안 되지 하고 자꾸 마음을 먹든지 뭔 수단을 쓰든지 간에 그렇게 만들어라는 거라.

 

그게 인제 첫 번째입니다. 욕심부리는 것 하지 않도록 하라.

그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욕심부리는 거 이거 별로 중요한 부분 아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가지고 내가 조금 이익이 있을지는 몰라도 내 수행하는 데는 전혀 도움 안 된다 하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되는 거라.

'내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데는 이게 독약과 마찬가지다' 그 생각을 자꾸 해야만이 이게 어쨌든 억눌러질 거 아니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성내는 것.

보통 일상적으로 짜증내고 하는 이런 거는 그것도 성내는 부분에 해당이 되는데, 그래도 그거는 좀 봐준다고 치자. 그런데 갑자기 버러럭 성을 내는 것. 좀 뭐라 할까 강도가 강한 것 이런 것. 자기 의견하고 안 맞을 경우라든지 이럴 거 같으면 그 사람의 입장에 대한 생각은 전혀 안 합니다. 그냥 먼저 지르고부터 봅니다.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견해에 매여버릴 거 같으면 급격하게 성내는 것들이 자꾸 버릇이 돼버립니다. 이걸 주의해야 되는 거라.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부정한 것들 불의한 것들을 보면 성이 나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자기가 얼마든지 삭힐 수가 있는 것들인데, 그걸로 인해서 말로써 튀어나오고 이런 거 잘 안 합니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탁 일어나는 것들은 자기도 뭔 말 한지도 모르고 퍽 튀어나옵니다. 자기도 뭘 했는지도 모르고 뭘 해나가고 있어. 이걸 줄여야 되는 거라.

사마디를 형성하려고 할 것 같으면 성내는 것들을 자꾸 줄여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싫어하는 마음을 자꾸 가지게 되면 급격하게 성내는 것들은 일어나게 됩니다. 감정의 폭을 되도록이면 이렇게 줄이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죠? 그리하더라도 줄이고 억눌러놔야 됩니다. 무슨 뭐 내가 위대한 마음이라는 사마디를 형성하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수밖에 없는데 어떡할 거라. 억눌러라.

그래서 마음에서 급격한 것이 탁 일어나려고 할 거 같으면 입술을 콱 깨물든지 아니면 자기를 한번 쥐어박든지 뭘 하든지 간에 그 감정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수행을 해나가는데 그런 것들을 다스리지 못 할 거 같으면 위빳사나는 둘째치고 사마디 조차도 할 수가 없는 거라. 그런데 무슨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그것의 생멸을 볼 수 있는 위빳사나를 할 거라!

그러면 이미 꿈 깨야 되는 것들이라. 그걸 억누르지도 못하면서 그것의 성품을 본다? 그건 꿈에서나 가능한 얘기라는 거라. 그래서 평상시에라도 그런 것들을 자꾸 억눌러 놓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게으르지 않는 것.

이건 아마 여러분도 좀 잘할 거라. 좀 게으르지 않는 거는.

어쨌든 오늘 토요법회가 있다면 부처님 오신 날 월요일까지 쉬니까, 좀 쉬면 좋지 해서 오늘은 게으름 좀 피우고 월요일 어차피 올 거니까 안 오면 돼. 이게 게으름이거든. 집에서도 그런 일은 많이 하죠! 게을러지는 것들. 그런데도 꼬박꼬박 온다고 하는 것은 그래도 게으름을 억누르고 있다는 얘기라.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해도 어쨌든 몸을 움직여가지고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하려고 하는 거라.

사마디가 형성되려면 게으름을 이렇게 자꾸 몰아내야 됩니다. 내가 약속한 부분 그리고 해야 될 부분에 대해서는 하기 싫어도 어쨌든 자꾸 하려고 해야 되는 거라. 만들어내야 돼. 안 듣고 싶어도 ‘아, 그러면 안 돼’ 그러면서 자꾸.

 

어떨 때는 힘이 들어가지고 아, 죽을 거 같애. 어제도 새벽 다섯 시 정도 돼서 도착을 했는데, 저 보살님이 여덟시 조금 넘으면 오거든. 그러니까 내가 잘 시간이 별로 없어. 그래서 ‘아, 좀 늦게 왔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게 내 맘대로 늦게 와지나. 그러고 나서 보살님들이 오고 나서 “내가 좀 누워있을게” 하고 나서도 못 누워있는 거라. 누워있기가 민망한 거라. ‘아이고 중이 돼갖고 조금 안 잤다고 해갖고 드러누워 갖고 거 또..’ 몸이 많이 피곤할 경우에는 그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리해도 ‘아, 내가 견딜 때까지는 견뎌보자’ 합니다.

오늘 또 이러고 나면 또 좀 있으면 내가 김해 가야 돼. 김해 가서 김해 그 스님하고 식구들 모여 있는데 가서 내가 얘기를 또 좀 해줘야 돼. 어떨 땐 ‘아이고 부탁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그래요. 어떨 땐 몸이 좀 딸리니까. 그런데도 안 된다 소리를 못하는 거라. 안 된다 소리를. 그러니까 “그럽시다.” 속으로는 ‘에고, 스님 그런 일 좀 안 만들면 얼마나 좋노’ 이러면서도 이미 허락을 했는데 우짤끼라? 그렇다고 해서 내가 또 안 갈 수가 있나. 어쩔 수 없이 또 가야 되는 거라. 게으름을 자꾸 스스로가 방지해야 되는 거라. 약속을 했으면 어쩔 수 없이 가야 되는 거라.

 

여러분들 토요법회가 있으니까, 토요일 날 와서 수행한다 생각하니까 어쨌든 오게 되는 거라. 와서 뭐 얼마나 수행할지는 모르지만은 요만큼 하더라도 어쨌든 자기 자신한테는 이겼다는 거라. 그런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자꾸 만들어져 나가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 나태하고 게으른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우선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억누르게 되는 거라. 내가 현재 삼매를 계발하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먼저 해야 되는 거라.

 

나태와 게으름에 빠질 때는 가끔씩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 참 내가 뭔가와 접촉한다는 것이 참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하는 것을 자꾸 인식을 해야 됩니다.

어떨 때 가끔씩 그럴 때가 있습니다. 손을 이렇게 잡았는데도 사마디가 형성이 되어있을 때는 이게 굉장히 따갑고 굉장히 아픕니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실제로 그렇거든. 수행을 하다 보면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일상생활에서는 모든 접촉하는 것이 그렇게 고통을 수반하게 됩니다. 그 사실을 자꾸 인식을 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이 고통스러운 것들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거라. 내가 게으름을 부려가지고 이 고통스러운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면은 안 되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후회하는 것.

어쨌든 간에 뭐 기분이 좋을 때는 ‘헤~’ 하고 들떠있다가 뭔가 퍽 저질러 놨는데 ‘아차’ 싶은 것들. 들뜸과 후회는 쌍으로써 일어나지게 됩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이 돼 있지 못하면 항상 들뜨게 됩니다. 들뜬 상태에서 뭔가를 할 거 같으면 분명히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도 자꾸 억눌러야 되는 거라.

 

이런 것들도 욕계의 마음에 사로잡힐 때 일어나집니다.

뭔가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접촉하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누가 나한테 싫은 소리를, 아니면 누가 나한테 좋은 소리를 안 했을 거 같으면 내가 싫어하는 마음도 일어나지도 않고 또 들뜨는 마음도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후회할 일도 안 생길 거라.

그런데 그런 조건들을 만들어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들뜸과 후회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하려면 그런 조건들을 되도록이면 안 만들어야 되는 라.

 

쉽게 말하면 자꾸 친구 만나러 가고, 자꾸 술 먹으러 가고, 이런 조건들을 자꾸 만들다 보면 그거는 사마디 형성하는 반대쪽으로 가고 있으면서 “아, 나는 그리하더라도 수행할 때는 또 열심히 또 수행한다” 그거는 꿈에서나 할까, 안 돼!

조건 자체를 그런 식으로 만들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좋은 도반들을 자꾸 만나려고 해야 되고, 자꾸 법을 들으려고 하고, 책 그런 법문집을 자꾸 읽으려고 하고, 그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아, 내가 수행해야 되겠다'는 쪽으로 일어나서 수행을 자꾸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수행이 부처님이 한 수행과 동일하다 하는 확신을 자꾸 가져야 되는거고.

 

이런 식으로 나아가야만 그게 가능한 것이지 그 반대 방향으로 자꾸 나아가 가지고는 어떻게 사마디를 형성할 거라? 억누를 때는 억누르고, 그리고 억눌리지 않을 때는 그 욕망에 따라서 그냥 행하겠다? 그거는 있을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다음 다섯 번째 의심하는 것. 내가 이래가 될까 말까 이런 것들.

그것도 욕계의 세계에 있을 때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욕계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고 하는 것을 닫아버리라. 그러면 틀림없이 또 그렇게 자꾸 억누르다 보면 색계라고 하는 선정·사마디의 상태와 점점 더 가까이 가게끔 됩니다. 닮아있게끔 됩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합니다.

삼매의 상태를 경험하기 위해서 자아를 잊은 듯이 미친 듯이 춤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그래 놔놓고 “아, 내가 삼매를 경험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요가할 경우에도 똑 마찬가지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거는 사마디의 상태가 아니고, 욕망을 가지고 사마디를 형성하려면 어떤 경우에도 형성이 안 됩니다. '사마디와 닮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욕망을 가지고 사마디를 형성하려면 사마디와 닮은 상태까지는 갈 수 있을진 몰라도 그 이상을 넘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욕망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야만이 사마디에 들어가진다 하는 겁니다.

 

오늘은 조금만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