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념처경 법문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21강. 심념처 4- 위축된 마음, 산만한 마음(20120318)

담마마-마까 2019. 6. 5. 10:26

https://youtu.be/DI_6lzeWD1k

21강. 심념처 4- 위축된 마음, 산만한 마음(20120318)

 

오늘은 대념처경 계속해서 해나가겠습니다.

탐·진·치가 있는 마음과 없는 마음은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다음에 '상킷따 찟따(saṅkhitta citta)'라고 하는 것과 '윅킷따 찟따(vikkhitta citta)'라고 하는 겁니다.

'상킷따(saṅkhitta)' 라고 하면 번역하는 사람마다 조금 다르는데 '상(saṅ)'은 모인다는 뜻이거든요. '킷따(khitta)'는 '산란하고 분산된다'는 뜻인데 산란하고 분산된 게 모이면 통일되는 거죠! 그래서 '통일된 마음'이라고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고, 산란한 마음들이 하나로 모인다는 의미는 '위축되는 마음'이다 하고 표현을 합니다.

 

여기 「상킷따 숫따(Saṅkhitta Sutta)」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경에서는 틀림없이 '상킷따'를 '통일된 마음'으로 얘기를 해놨습니다. '집중된 마음'에 대한 경전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통일된 마음' '집중된 마음'이라고 해야 되는데,

 

여기 「대념처경」에서는 '상킷따(saṅkhitta)'라고 했을 때는 그런 '집중된 마음'이 아니고 '위축된 마음'이라고 표현을 해야 됩니다.

그 반대되는 게 '윅킷따(vikkhitta)'라고 해가지고 '위(vi)' '킷따(khitta)'라고 산란한 것들이 더욱더 벗어나 버린다는 뜻입니다. 산란한 것이 더 벗어나니까 산만해져 버리는 거지. '산만한 마음'이라는 거라.

 

그래서 '위축된 마음이 있으면 위축된 마음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산만한 마음이 있으면 산만한 마음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하고 「대념처경」에서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상킷따(saṅkhitta) 위축된 마음'을 한번 봅시다.

어떤 때 위축됩니까? 스님 앞에 와서 문답하려면 위축되죠! “뭘 얘기해야 될까” 그렇게들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은 실제 내가 수행 문답할 때 뭘 얘기할 거라고 생각했던 게 그걸 다 말을 못하고 가는 경우도 있고 엉뚱한 방향으로 얘기를 하기도 하죠! 그것도 하나의 위축된 마음입니다. 문답할 때는 그렇다고 치고,

수행할 때는 어떤 게 위축된 마음일까? 쉽게 얘기하면 '하기 싫다'는 겁니다. 공부하기 싫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이 뭔가를 원활하게 알아차려나가야 되는데 그 대상을 알아차리고 싶은 마음이 별로 안 일어나는 거라.

 

주부들 그런 얘기 많이 하죠! 저녁밥을 해야 되는데 저녁밥을 하기 싫거든. 그러니까 “야, 우리 뭐 시켜먹자” 아니면 “외식하자” 그렇게 시켜먹자, 외식하자고 말을 하기 전에는 위축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기 싫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마음하고 연결이 되는 거죠. 그런 것들이 다 위축된 마음입니다.

 

그런데 위축된 마음이 더욱더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그냥 만날 잡니다.

뭐 하기 싫으니까 싫은 것들이 계속 진행되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그냥 앉아있는 것도 귀찮으니까 눕게 되고, 누운 것도 편안하니까 그냥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하기 싫으니까 그냥 자는 거라. 그러니까 살만 자꾸 찌게 되는 거지.

 

수행할 때도 앉아서 수행하면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데 알아차리고 싶은 마음이 적으니까 어떻게 돼요? 앉으면 그냥 조부는 거야. 그러니까 자는 것도 어느 정도 수행하다가 깜빡 졸고 이럴 거 같으면 이해가 되는데, 어떤 사람은 앉았다 그러면 그냥 좁니다. 그게 뭐냐면 이 위축된 마음이 계속 쌓이다 보면 아예 게으름 부리는 것이 아니고 졸음으로 바뀌어버리는 형태입니다.

 

경전에서는 "상킷따'라고 하는 위축된 마음은 티나·밋다(thīna-middha)와 같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티나(thīna)'라고 하는 것은 '게으름'을 얘기합니다. '밋다(middha)'는 '졸음'을 얘기하는 거죠! 그게 위축된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위축된 마음을 잡으려면, 그러니까 분명하게 알아차리려면 '티나·밋다'만 없으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게으르고 졸음에 빠지는 것만 평상시 생활이든, 아니면 수행에서든 그것만 잡으면 되는 거라.

 

그다음에 '윅킷따(vikkhitta) 산만한 마음'이라는 것.

어떨 때 많이 산만해집니까?

나쁜 일 하려고 할 때 산만해집니다. 남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될 때는 막 횡설수설하게 됩니다. 또 내가 무언가를 나쁜 생각을 일으키고 할 때는 마음이 안정이 안 됩니다. 그게 왜 그러냐면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자기는 알거든.

그래서 산만한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마음은 들뜨게 됩니다. 나쁜 일을 자꾸 저지르게 되고, 나쁜 생각들을 많이 하게끔 됩니다. 들뜨기만 합니까?

그래도 일말의 가책은 있어가지고 '아,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데' 하고 생각을 일으키면 어떻게 돼요? 후회하게끔 되는 겁니다. '아, 내가 참 잘못했다'는 생각을 일으키게끔 됩니다. 한 일에 대해서 후회를 일으키든,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후회를 일으키든 그런 후회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들뜨는 마음이 있든지 후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할 거 같으면 마음은 산만해집니다.

 

산만한 마음은 경전에서는 "들뜸과 후회를 산만한 마음이라고 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들뜨지 않고 후회하지 않도록만 할 것 같으면 산만한 마음은 잘 조절해나갈 수가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오늘 얘기할 '위축된 마음'과 '산만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씩 한번 살펴봅시다.

 

아까 '위축된 마음'은 '게으른 것과 졸음'이라고 했습니다.

게으른 것은 정신적인 부분입니다. 졸음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부분이죠.

게을러야 만이 나중에 졸음이 옵니다. 그래서 그 정신적인 부분만 잘 컨트롤하면 적어도 졸음에는 빠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게으른 부분은 또 정신적인 부분을 더욱더 잘 컨트롤할 거 같으면 그런 게으름에 빠지지 않게끔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게을러지지 않으면 더욱더 노력하게 되기 때문에 몸도 당연히 활기가 있어지게 되는 그런 형태를 띱니다.

 

부단하게 이런 장애들을 없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 노력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들을 가지고 노력을 합니다.

마음이 뭔가를 알아차리기 싫어하고, 마음이 둔해지고, 약해지고, 하고 싶어 하지 않고 하는 상태들을 만들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은 더욱더 어두워지고, 더욱더 하기 싫어지게끔 되고, 마찬가지로 몸은 더욱더 무거워지고, 나른해지고, 움직이기 싫어지게 되고, 그리고 자꾸 몸도 아파지게 되고 이렇게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켜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게으름 피우려고 하는 마음을 부처님은 "바이러스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게으름 피우고 싶어 하죠!

누구든지 편안해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이것은 가지고 있습니다.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여기에서 경지라 하면 불환과라고 얘기를 하는데 어쨌든 성인의 경지에, 상당히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누구든지 게으름 피우고 싶은 마음은 가지고 있게끔 됩니다.

매일 수행을 다섯 시간씩 하기로 했는데 오늘은 수행이 잘 안되니까 어떻게 돼요? ‘아, 오늘은 세 시간만 하고 말자’ 하는, 그만 두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게끔 됩니다. 그리고 ‘오늘 아니면 내일 하면 되지’ 하고 마음을 또한 먹게끔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조정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면 지금 내가 해야 될 일이 뭔가 하는 걸 잊어먹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진정 마음을 기울여야 될 것이 뭔가 하는 것들을 자꾸 까먹게 됩니다.

그래서 게으름 피우는 것들을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물에 낀 이끼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끼가 끼면 그 물에 얼굴을 들이대서 보면 자기 얼굴이 잘 안 보입니다. 그런데 그 이끼는 그걸 방치해두면 어떻게 돼요? 더욱더 늘어나가지고 그냥 눈 깜짝할 사이에 물 전체가 이끼로 가득 차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걸 청소하기도 힘들 만 아니라 얼굴을 보기는 거의 불가능해져 버립니다.

 

그건 게으름에서 이미 졸음의 상태까지 번져버리게 되는 형태입니다.

졸음이 올 때도 졸음이 온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려나가면 그걸 극복해나가는데, 그걸 알아차리려고 하는 생각을 안 가지니까, 수행하려고 앉으면 그냥 졸게 되는 거라. 이미 습관화돼가지고. 그러니까 게으름의 상태가 이미 그건 졸음의 상태에 도달해버리게 되는 거라. 금방!

 

그러면 보통 보면 마음을 지금 일어난 대상에 마음을 두지 못하면 게을러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배를 관찰을 하고 있는데 배를 관찰하던 마음에서 뭔가 생각이 탁 떠올랐다. 그러면 그 생각을 알아차리면 되는데, 그걸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자기가 그 생각을 자꾸 만들어나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의를 기울이는 게 배를 관찰하는 게 아니고 그 생각으로 인해서, 자기가 만들어나가는 생각들로 주의가 기울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게으름에 빠지게 됩니다.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수행은 참 재미없는 거거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일어남' '사라짐' 해봐야 별로 그거 뭐 재미있다고 모릅니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마음은 재미있는 걸 자꾸 찾으려고 하는 거라. 그러니까 거기에 빠져버리다 보니까 게을러져버리는 거라.

'하기 싫다', '나른하다' 하는 것들이 일어나면 '아, 이것은 내가 게으름을 일으키게 하는데 영양분을 주고 있다'고 자꾸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기 싫어하는 마음을 분명하게 자꾸 알아차리려고 하고, 게을러지려고 하는 마음을 자꾸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돼요? 더욱더 노력해가지고 알아차리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지금 내가 화살이 박혀가지고 당장 고통스럽고 힘든데, 내가 지금 이렇게 게으름 부려가지고 무슨 이익이 있는가 하고 자꾸 떠올려라' 그럽니다.

'-뚜라-낭히 까- 닛다-(Āturānañhi kā niddā)' 그럽니다.

내가 지금 화살을 맞은 환자인데 지금 잠자고 게을러 있을 틈이 어딨는가. 당장 지금 내가 화살을 뽑아야 되는데, 노력해가지고 화살을 뽑아야 되는데, 그리고 번뇌로 항상 고민을 하고 있는데 쓸데없이 시간을 보낼 여가가 어디 있느냐는 거라. 게을러지면 자꾸 그것을 떠올려라 하는 거라. 내가 지금 환자인데 이 병을 치료할 생각을 안 하고 뭐하고 있나 하고 자꾸 떠올려라 하는 거라.

 

그러면서 "이 몸이 부서져가지고 피와 살이 다 말라버리고, 뼛가죽이 다 붙어버리고 하더라도, 내가 여기 이 앉은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깨달음에 이르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자꾸 가지라고 그럽니다. 그런 노력하려는 마음들을 자꾸 일으켜야만이 게으름을 극복할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게으름과 졸음을 쫓는데 도움 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수행했을 때, 또 밥을 먹고 나서 수행했을 때 많이 조불죠? 과식이 원인입니다. 먹은 것이 원인이라서 그 원인으로 인해서 몸에서 소화를 시켜야 되고, 또 잠이 미처 덜 깬 상태이기 때문에, 정신이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게을러져서 졸음이 오게끔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는 좌선을 하는 것보다 경행을 하는 것이 낫고, 밥을 먹고 나서는 바로 좌선을 하는 것보다 경행을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졸음이 오는 원인이 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많이 먹는 것이 원인이다 할 거 같으면 먹는 걸 적게 먹어야 됩니다. 또 내가 지금 이렇게 졸음이 계속 오는 이유가 먹는 것으로 인해서 그렇다 할 거 같으면.

그리고 좌선을 해서 내가 활기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할 거 같으면 경행을 하는 것으로 해야 됩니다. 자세를 바꾸어주라는 거라.

또는 여기가 선원이기 때문에 고요하고 또 온도도 적당하다, 그러면 적당하고 편하기 때문에 그것에 머물러버린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밖으로 나가야 됩니다. 밖으로 나가서 찬바람을 쐬고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게을러지지 않게 하는데 적절한 것이 뭐냐면,

자꾸 대화를 하는 습관을 가져야 됩니다. 밥을 먹을 때든 아니면 수행이 끝나고 나서 도반들 하고 법에 대해서 자꾸 얘기를 하려고 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필요 없다 해서 자기 혼자 자꾸 하려고 그럽니다. 밥을 먹을 때도 같이 안 먹을려 그러고 수행이 깨진다고. 또 어떨 때는 선원에서 도반들 간에 법담하고 있는데도 ‘아, 그거 별로 유익한 거 아니다’ 해가지고 그걸 자꾸 피하고 이렇게 됩니다. 그거는 오히려 나중에는 장애가 됩니다.

좋은 도반들 하고 같이 어울리도록 하고 적절하게 그런 도반들과 같이 얘기를 하는 것, 이런 것들이 게으름과 졸음에서 벗어나는 그런 하나의 방법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무디따(muditā)' 마음에 기쁨을 자꾸 일으키는 것.

아, 내가 이렇게 시간을 낼 수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좋으냐! 내가 이 자리에서 수행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좋으냐! 또 내가 오늘 좋은 마음을 이만큼 낸 것에 대해서 얼마나 좋으냐! 하는 마음을 자꾸 일으키는 겁니다. 스스로 자신이 기뻐할 수 있는 것들을 자꾸 일으키라는 거라. 그러면 마음은 활기가 있어집니다. 어떤 경우도 침체돼있는 마음들은 활기를 불러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라훌라'에게 부처님이 그럽니다. "희각지, 무디따를 자꾸 계발하라."

아! 내가 지금 행복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있는 것만 해도 고맙고 그리고 기쁨이 있구나 하는 것들을 자꾸 일으켜주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게으름과 졸음들을 방지하려고 할 것 같으면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겨냥을 하려고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일어난 대상에 마음을 분명하게 기울이려고 해야 됩니다.

대상을 자꾸 놓치고 게으름에 빠지고 잠에 자꾸 빠지면 눈을 번쩍 떠서 자꾸 대상을 옮겨줍니다. 눈을 떠서 이쪽 걸 한번 보고 아, 이걸 내가 분명하게 봤다'고 인식을 하고, 그다음에 옆에 걸 보고 '아, 내가 이걸 분명하게 봤다'고 인식을 하고, 그다음에 또 옆에 걸 보고 '분명하게 알았다'고 인식하고.

 

그건 왜그러냐 하면 '위딱까(vitakka)' '윗짜라(vicāra)' 라고 하는,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겨냥하고 그것을 알아차렸다고 인식하는 것. 그것으로 인해서 게으름을 몰아내 주는 거라.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

그래서 몇 가지 대상을 정해 가지고 그 대상을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알아차리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리 할 거 같으면 적어도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거라. 그걸 '위딱까 자낭가(jhānaṅga)'라고 그럽니다. 대상에 대해서 분명한 겨냥으로 인해서 게으름으로 부터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또는 노력하려는 마음들을 점점 더 가지고, 그리고 이 법의 소중함, '아, 이 법은 나에게 행복을 가져오고 나에게 닙바나 열반에 이르게 하는구나' 하는 마음을 가짐으로 인해서 기쁨을 일키도록 하라는 거라.

그걸 택법각지, 정진각지, 그 다음에 기쁨의 각지라고 하는 그런 노력들을, 그런 각지들을 자꾸 일으켜주도록 하라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또 도움이 되는 게 뭐냐면 모든 부처님과 성인들이 따라가는 길, 이 수행으로 인해서 나도 그 길을 간다 하는 생각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내가 지금 바른 길로 가고 있는데 여기서 멈출 수 없지 않으냐 하는 마음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게을러지는 마음들을 일부나마 방어를 해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법의 소중함을 자꾸 알아라 하는 겁니다. 아, 부처님이 남긴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이런 담마이다. 그 담마를 내가 받아 지녀서 그걸 자꾸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지 내가 게을러져가지고 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그런 마음을 자꾸 가지도록 하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참 윤회하는 것들이 한량이 없는데 이 윤회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다음에 졸음이 오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경에는 여러 가지로 해놓았습니다. "마음에 관념을 바꾸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졸음이 오고 할 거 같으면 퍼뜩 정신을 차려가지고 부처님의 경전을 외우라는 거라. '이띠삐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삼붓도' 하든지 다른 어떤 경을 외우든지 경을 외우면서 마음을 자꾸 새롭게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옛날에 내가 그래도 수행 잘했는데 하는 생각을 일으키라는 거라.

아, 내가 그때는 참 잘했는데 내가 지금 이래선 안 되지 하는 마음을 일으키라.

그래도 안 되면 자기 귀를 이렇게 잡아당기라는 거라. 귓불을 잡아당기면 혈액순환도 잘 될 뿐만 아니라 졸음으로부터 일부라도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도 안 되면 눈에 찬물을 끼얹어라.

그래도 안 되면 불빛, 태양이든지 불빛을 바라보면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하면서 자극을 줘라.

그래도 안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가지고 경행을 하라.

경에서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수행자들은 그 방법으로 해도 되고,

수행하는 분들은 "잠이 오는 길"을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한번 잠이 오는 걸 내가 분명하게 내가 그 길을 갖다가 한번 알도록 해보겠다 하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잠이 오는 데는 그 길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눈꺼풀이 닫히는 길부터, 눈을 닫고 감고 있어도 잠이 오면 눈꺼풀이 닫히는 느낌이 듭니다. 마음에 문이 닫히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눈꺼풀이 닫히는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눈꺼풀이 닫히는 길이 하나의 길이구나' 하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 눈꺼풀이 닫힌다’ 하고만 해서 눈꺼풀을 떠야지 하고 마음을 자꾸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면 그다음에는 닫히는 것에서 눈꺼풀이 무거워져 옵니다.

그 무거워져 오는 것에서 눈꺼풀이 따가워져 옵니다.

그 따가워져 오는 것이 지나치면 이제는 내리 누릅니다. 눈꺼풀을 아예 눌러 버립니다.

그러니까 몸 전체가 땅속으로 가라앉는 느낌들이 듭니다.

그러다가 그 경계가 지나치면 이제는 아예 눈에서 고통스럽게 아주 느껴집니다. 아주 아프게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잠에 툭 떨어지게 됩니다.

이게 잠이 오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잠이 오는 길을 내가 분명하게 알겠다 하는 생각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눈꺼풀이 따가워지면 '따가움' '따가움' '따가움' 하면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잠이 옴' 하면서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따가운 걸 분명하게 인식할 거 같으면,

그 따가운 것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만 알 거 같으면,

잠이 확 깨입니다.

꼭 뒤에서 이 머리를 관통을 해서 바람이 확 통해서 지나가듯이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잠이 확 달아나게 됩니다.

 

눈꺼풀이 닫혀가지고 무거워서 땅 속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면, '땅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있다는 걸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그렇게 요소요소에 따라서 마음을 분명하게 기울이면 그 졸음을 극복해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씩 수행을 하다가 졸음이 많이 오는 사람들 또 게으른 생각이 많이 오는 사람들은 ‘아, 이 길을 내가 분명하게 오늘은 이번에는 알아차려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적어도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1년 이내에는 그 졸음은 극복을 해나갑니다.

그 정도로 졸음을 극복하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쉽게 생각해가지고 ‘아, 이거 그냥 이렇게 알아차리면 극복하겠지’ 하고 할 거 같으면 거 누구든지 못하겠어? 그런데 일반적으로 내내 수행하는 사람도 마음을 먹고 이 졸음은 내가 반드시 극복을 해야 되겠다. 쓸데없는 시간을 왜 허비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마음을 먹고 그 졸음 오는 길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하더라도 1년이 걸린다는 거라.

그 정도로 우리 습은 나태하고 게으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거라.

그걸 빨리 전환을 시켜줘야 됩니다.

 

그게 처음의 '위축된 마음'입니다.

위축된 마음은 위축된 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윅킷따(vikkhitta) 산만한 마음' 입니다.

아까 산만한 마음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들뜸과 후회'가 산만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웃닷짜(uddhacca)' '꾹꿋짜(kukkucca)' 그럽니다. '들뜨는 마음과 후회하는 마음'입니다.

 

수행할 때 왜 들뜹니까?

대상에 대해서 과도하게 노력을 기울이면 들뜨게 됩니다. 가끔씩 문답하러 오는 사람이, 문답하기 싫어서 오는 사람하고 문답하러 오고 싶어서 오는 사람하고는 분명하게 구분이 됩니다. 오기 싫어서 할 얘기가 없어가지고 겨우 들어와서 문답하는 사람들은 보면 이미 마음이 위축돼있습니다. 그런데 뭔가를 자기가 새로운 걸 발견해가지고 오는 사람은 들떠갖고 옵니다. 들떠버리면 위축된 마음과 똑 마찬가집니다. 그것도 불선한 마음입니다.

 

소나 스님이 그랬죠! 과도하게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발란스를 못 맞추기 때문에 부처님이 그걸 "거문고의 줄과 같이 잘 소리가 날 수 있게끔 맞춰가지고 그렇게 수행을 하라. 느슨하지도 않고 너무 탱탱하지도 않게끔 잘 조절을 하라"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탁발하러 갈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탁발하러 갈 때도 적당한 보폭으로 적당한 걸음걸이로써 평온한 마음으로써 걸어가야만 탁발할 때 경행을 하면서 걸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뭔가 내가 저기 가서 맛있는 걸 받아야지 하는 마음이 앞서면 그냥 걸음도 종종종 걸음을 걷게 되고, 그리고 마음도 흐트러져 버리게 됩니다. 이미 들떠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수행문답을 할 때 뭔가 할 얘기가 많을 거 같으면 들떠버립니다.

평온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 문답뿐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면 마음이 들뜨기 쉽습니다. 그러면 들떠버리면 더욱더 과도한 노력들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수행이 잘 안 돼버립니다. 평상심으로 돌아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불안하고 불안정한 것들로부터 마음을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다시 돌려놓아야만이 들떠있는 마음들을 제거를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후회하는 것들은,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어요.

누가 와서 자기가 후회하는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해요. 친구가 어디를 좀 가자해서 원래 가기로 예약이 돼있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자기가 못 가게 되었대. 그래서 그 친구는 혼자서 차를 타고 어느 지역으로 가는데 가다가 이 친구가 사고를 당해버렸어. 그러니까 꼭 자기 때문에 시간이 늦어져가지고, 출발한 것이 자기 때문인 것 같은 거라. 그 친구가 사고를 당한 것이. 그래서 굉장히 후회가 되는 거라. '아, 내가 그때 그냥 다른 일 안 하고 따라갔으면 저 친구가 제시간에 출발을 했고 그러면 사고도 안 나고 했을 건데' 저 친구가 저렇게 다리를 다치고 한 것이 자기 책임인 거 같은 거라.

 

“이런 마음이 드는데 스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그러는 거라.

그 친구를 다치게 하려는 마음이 있었느냐? 없었거든. 그 친구가 사고 나기를 바랐는가? 그것도 없었다고.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친구가 지금 다리를 다쳐가지고 반신불구가 돼있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네가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죄책감 때문에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봉사활동을 하라. 그렇게 장애를 가지고 있는 분들한테 가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아라. 일정 부분을 그렇게 하라. 그렇게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은 와가지고 그럽니다. “아, 스님 인제는 내가 그 후회하는 마음을 극복했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나도 모르게 저지른 것들에 대해서 참회하려는 마음이 생기면 후회하려는 마음은 없어져 버립니다. 아, 내가 이렇게 정상적으로 태어난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거냐.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거고.

후회하는 마음은 어떤 경우든지 도움이 안 됩니다. 화살을 한번 맞았으면 그만인데, 그걸 후회할 것 같으면 두 번 맞고 세 번 맞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더욱더 마음은 편협되게끔 되고, 또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자꾸 하게끔 됩니다.

열심히 공부했으면 내가 지금 대학 들어가서 또 직장생활 잘할 건데, 그런데 나는 열심히 공부 안 해서 지금 요렇게 돼있다, 그것도 후회거든요.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도 후회입니다. 그런데 후회한다고 해가지고 문제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됩니다. 단지 아, 내가 그때 열심히 공부해야 될 거를 안 한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참회해야 되는 걸. 진정으로 참회할 거 같으면 그 후회로부터 벗어나게끔 됩니다.

그럼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이 뭔가 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게끔 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들뜸과 후회는 마음이 혼란 돼있는 상태로 바뀌어버리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마음이 혼란되어 버릴 것 같으면 분명하게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더욱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들을 증폭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후회하고 들뜨고 하는 것들을 반드시 바로 알아차려서 잡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 후회하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경전에서는 들뜨고 후회하는 것들을 '물에 물결이 이는 거와 같다'라고 그럽니다.

그럼 얼굴은 찌그러져 보여 버립니다. 정확하게 그것을 볼 수는 없게 된다는 겁니다. 우선 마음이 들뜨고 할 거 같으면 평온한 마음을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서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만들어줘야 됩니다. 들뜨는 마음이 있다면 들뜨는 마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들뜨는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육체적인 반응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면은 그 육체적인 반응을 고요하게 하면 마음도 안정되게 됩니다.

 

들뜨고 후회하는 것을 없애려면, 평소에 없애려고 할 거 같으면

"자주 부처님 말씀을 배워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경전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도반 간의 대화를 통해서든지 자꾸 배우려고 해야 됩니다. 바른 것들을 자꾸. '바훗수따(bahussuta)' 그렇게 얘기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익혀라' 그게 몸에 자꾸 익어져야만이 들뜨는 해로움을 압니다. 그리고 후회는 필요 없는 것이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 배우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필요한 것이 뭐냐면

, 부처님 법 그리고 내가 잘 생활하는 것 이런 것들이 얼마만큼 나에게 이익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들을 이해하려고 해야 됩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고 베풀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면 내가 어떤 마음이 되는가. 내가 마음이 얼마나 행복해지고 마음이 얼마나 고요해지는가. 부처님 말씀대로 따라가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없으니까 내 마음이 얼마나 넓어지는가. 얼마나 남을 이해하고 포용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들을 알게 되면, 그렇게 들뜨지 않고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과 도덕적인 계율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꾸 이해하도록 노력하라는 거라.

 

그리고 계율, 오계는 반드시 수지하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부처님 제자는 기본적으로 오계를 지켜야 됩니다. '오계, 이것은 강제적으로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야 되는 것이다' 하고 판단을 하고 그것을 자꾸 받아 지니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마음이 생기고 벗어나려는 행동을 할 거 같으면 ‘어, 아니지’ 하고 다시 빨리 돌아와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뭐냐면 도반들 간의 대화도 좋고, 그다음에 조금 더 경험이 있는 사람들, 같은 도반이라도 오래도록 수행했고 그런 사람들에게 조언을 자꾸 구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법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게끔 하고 그것에 대해서 나누려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거는 뭐냐면 받아들일 줄 아는 것.

어떠한 상태가 돼도 내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가놓으면 절대 어울리질 못합니다. 그리고 그 견해들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밥을 먹자 할 거 같으면 밥을 먹으려고 마음을 먹어서 같이 먹고, 우리 청소하자 할 거 같으면 그거 받아들여서 청소하면서 수행을 하면 됩니다. ‘나는 수행해야 된다’ 하고 마음을 먹어버리면 청소하는 것이 귀찮아지고 방해가 돼버립니다.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들뜨지를 않습니다.

 

들뜨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들뜹니다. 후회하는 것도 좋아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후회하게 되는겁니다.

그리고 들뜨고 후회하는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대상을 자꾸 옮기면 안 됩니다. 하나의 대상에, 수행이 되든 안 되든 그 대상에 계속 마음이 머물도록 해야 됩니다. 아까 하고는 정반대죠? 대상을 자꾸 옮기지 말고!

 

들뜨고 할 거 같으면 대상이 자꾸 나타나집니다.

뭔가 생각이 금방 일어났다 사라지고 또 아픈 것이 이쪽에서 금방 아팠다가 또 요 쪽에도 금방 아팠다가, 자꾸 산란해집니다. 그럴 거 같으면, 그게 크게 영향을 못 미칠 거 같으면 무시해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앉아있을 경우에는 배 아니면 코 둘 중에 하나를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하나의 대상에 지속적으로 마음을 기울이면 들뜨는 것은 일단은 방지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편안한 마음을 자꾸 가지려고 노력을 해야됩니다. 그래서 산란해지는 마음들을 가라앉히도록 해야됩니다.

그럴 때는 경행보다는 좌선을 더욱더 해야 됩니다. 산란하다 할 거 같으면 경행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산란한 걸 갖다가 더욱더 부채질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부러 염불을 하고 부처님에 대해서 회상을 하고 이런 것들이 조금은 도움은 줄지 몰라도 그것도 실제로는 도움을 못 줍니다. 오히려 나중에는 더 산란한 걸 습관화 만들게 됩니다. 딱 중지하고 좌선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딱 중지하고 하나의 대상, 부처님이면 부처님에 대해서 쭉 그 하나의 단어를 계속적으로 염하면서 알아차릴려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하나의 대상에 머물러야 만이 산란하고 후회하는 것들을 방어할 수가 있습니다.

 

이게 지금 두 가지 마음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나태하고 졸음이 온다. 수행은 재미없는 겁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재미없는 것들을 내가 몸에 익혀야 만이 나태하고 습관적으로 졸음이 오고하는 것들을 방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딱 시간이 정해진 것은 그 시간을 반드시 채우려고 자꾸 노력하고 수행에서 마음이 도망가지 않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들뜨고 후회하는 것들도 마찬가집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십시오.

수행대상을 놓쳤으면 놓쳤다고 알아차리고 나서 그냥 놔둬버리십시오.

그러고 나서 또 다른 대상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하나의 대상에 자꾸 머물려고 하고, 그리고 ‘아, 내가 잘못했다’, ‘수행 또 놓쳤다’ 이거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후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도 들뜨고 후회하는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에 마음이 분명하게 머물도록, 그리고 그 하나의 대상에 계속적으로 머물도록 노력을 하면 들뜨고 후회하는 것들을 방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게 부처님이 얘기한 수행 방법입니다.

 

마음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 마음을 분명하게 알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위축된 마음이 있으면 위축된 마음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산만한 마음이 있으면 산만한 마음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게 대념처경 심념처에 네 번째 항목으로 나온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