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념처경 법문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19강. 심념처2 - 탐욕이 있는 마음, 탐욕이 없는 마음

담마마-마까 2019. 6. 4. 16:06

https://youtu.be/0DYI1xl01WY

19강. 심념처 2- 탐욕이 있는 마음, 탐욕이 없는 마음 (20120114)

 

여기 대념처경에 보면 심념처 수행이 나와있는데 꼴라당 페이지가 세 페이지 그것밖에 없어. 그리고 설명이 거의 없습니다. 심념처 수행하는데 가서 교재들을 봐도 실제적으로 세분화시켜 놓고 설명을 해주지는 않습니다. 탐심이 있는 마음, 탐심이 없는 마음, 이런 식으로 구분해서 설명들을 잘 안 해줍니다.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탐심이 있으면 탐심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탐심이 없으면 탐심이 없다고 알아차리고, 가능합니까?

 

지금 심념처 시간이 지금 벌써 몇 시간 됐죠? 이번 시간부터는 하나씩 조금 쪼개가지고 설명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탐심이 있는 마음은 알아차리기 쉽죠! 여기에서 '사라가(sarāga)'라고 돼있습니다. '사(sa)'가 접두사고 '라가(rāga)'가 '탐심이 있는' 그런 뜻입니다. 탐심을 가지고 있는, 탐심을 지니고 있는 그런 뜻이 '사라가', 그래서 '탐심이 있는 찟따(citta)-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라가(rāga)' 하고, 보통 '탐심'이라 할 때 '로바(lobha)'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보통 '로바(lobha)'라고 할 때는 우리가 일으키는 조그마한 탐내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해당이 되는데, 여기서 수행에서 '라가(rāga)'라고 할 때는 그거하고는 조금 차이가 납니다. 쉽게 말해서 조금 더 강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스님 앞에 컵에 물이 담겨있습니다. 맛있는 물이 하나 있다 칩시다. 그러면 이 물을 가지고 내가 탐심을 일으킨다고 해봅시다. 어떤 상태가 될까? 물이 있는지를 의식을 해야 되겠죠!

그래서 '라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식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의식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걸 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연찮게 요 쟁반을 보다 보니까 요 물이 있는 걸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의식하려고 한 게 아니고 다른 걸 의식하려고 했는데 이게 있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다음에 또 뭐냐면 이걸 탁 보면서 내가 지금 목이 마른 상태기 때문에 목이 마르니까 이걸 먹으면 내가 맛있게 먹겠다 하는 생각으로 인해서 이 물을 보는 순간에 내가 기쁨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또는 이 물을 보는 순간에 나는 지금 현재 목이 그렇게 안 마르다고. 그럼 이것을 보는 순간에 어떻게 해요? 무덤덤하게 반응을 합니다.

기쁨을 일으킬 수도 있고 무덤덤하게 반응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물을 '내가 마셔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마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만약에 내가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 같으면, 이렇게 김이 나고 있습니다. 그럼 이게 뜨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 불어가지고 먹어야 됩니다. 그렇게 먹는 사람이 있고, '후' 안 불고 그냥 먹다가 혀를 왈칵 데일 수가 있습니다.

바르게 견해를 가질 수도 있고, 바르게 견해를 가질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걸 먹는데 즉각적으로 내가 탁 먹을 수도 있고, '내가 좀 있다가 이거 먹어야지' 생각하고 나중에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는 '탐심'이 있습니다. 탐심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쭉 연결돼서 결합된 것들을 보통 '라가'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게 결합이 안 됐을 경우에는 보통 '로바'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로바' 하고 '라가' 하고 이 차이점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을 하면, 태국이나 이런 동남아시아에서 원숭이를 잡을 때 잡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이 뭐냐면 항아리를 이용하는 방법, 또 하나는 동그란 소쿠리에다 이렇게 좀 무거운 소쿠리에다가 나무 꼬챙이를 꽂아놔 놓고 그 안에다 뭘 놓아 놓고 원숭이가 그걸 잡도록 하는 거. 이렇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래서 그걸 탁 잡으면 소쿠리가 탁 내려와서 손이 탁 물리게끔 그렇게 되는 겁니다.

두 가지 다 그 안에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우리말로 하면 송진, 소나무에서 긁은 송진을 그 안에다가 넣어놓습니다. 그럼 이렇게 한 손을 뻗어가지고 원숭이가 그걸 탁 잡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 송진에 손이 찰카닥 달라붙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할까? 이거 떼어내려고 하겠죠?

떼어내려면 뭘 사용을 해야 돼? 또 옆에 다른 손을 사용을 해야 됩니다. 그럼 이 손도 찰카닥 달라붙어. 그러고 나면 발을 사용을 하거든. 요 발을 사용을 해서 찰카닥 걸리고, 요 발도 사용해서 찰카닥 걸리고, 나중에는 주둥이까지 집어넣습니다. 대부분 송진에 붙어있는 원숭이들을 보면 주둥이까지 이렇게 붙어가지고 있습니다. 주둥이까지 이렇게 붙어가지고 이렇게 잡혀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걸 가져와가지고 훈련을 시켜가지고 원숭이를 사용을 하기도 합니다. 야자나무 열매를 딸 때라든지 아니면 놀이 같은 거 할 때라든지. 이렇게 원숭이를 잡는 건 그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게 뭘까? '탐심'보다는 조금 강하죠! 보통 여러분들이 탐·진·치 할 때의 '로바' 보다는 조금 강하죠!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탐심의 상태가 일어나는 상태.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게 지금 내가 바른 판단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바른 판단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기쁨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또 안 그러면 그냥 무덤덤한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또 내가 이걸 의식하는 경우도 있고,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그 대상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천천히 반응하는 경우도 있고.

 

이런 것들이 연달아서 쭉 있는데 그걸 보통 여덟 가지로써 분류를 해둡니다.

여덟 가지 중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천천히 반응하더라도, 기쁨도 있고, 지금 이게 뜨거운 거를 아니까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고, 이런 식으로 분류를 합니다. 그런 연속선상에 있는 것들을 보통 여기 경전에서 얘기하는 '탐욕을 지니고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탐욕을 지니고 있습니까?

탐욕을 지니고 있으면 지금 스님 소리가 안 들립니다. 왜 그럴까? 아까 탐욕을 지닌다고 하는, '사라가'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결합된 것들을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물이 이렇게 있을 것 같으면 투명하면 이게 잘 보이는데 살짝 위에 이끼가 끼어있어도 그래도 어렴풋이라도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다 이끼도 끼어있고 뭐도 있고 뭐도 있고 그 위에 자꾸 더 덮여버리면 어떻게 돼요? 안보입니다.

 

화가 일어났을 때도 한 놈만 이렇게 있을 거 같으면 화가 일어난 거 자기가 압니다. 그런데 이놈의 화가 일어나는 게 어리석음도 결합이 되고, 그리고 싫어하는 마음도 결합이 되고, 그다음에 증오도 결합이 되고, '나'라고 하는 것도 결합이 되고 할 것 같으면 화가 일어나면 그걸 주체를 못하게 됩니다.

탐욕도 꼭 마찬가집니다. 여러 가지가 결합이 될 것 같으면 탐욕을 지니게 되는 상태가 되면 그걸 통제를 못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런 상태가 있을 때는 스님 법문도 안 들리게 되는 거고. 뭘 하더라도 그걸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게 되는 거라. 만약에 마음이 그런 상태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마음의 상태에서 수행이 되겠어요? 안됩니다. 당연히.

 

그래서 먼저 해야 되는 것이 탐욕이 있다고 분명하게 마음으로 알아차려라.

그래서 탐욕을 제거를 한 후에 수행대상으로, 다른 대상으로 넘어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탐욕이 있는데도 그냥 ‘에이, 뭐 별거 아니네’ 하고 놔둬버리고 지금 수행의 대상, 만약에 경행을 하고 있으면 경행을 하는데 알아차림이 있다든지, 좌선을 하고 있는데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당연히 그거 안 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부처님이 심념처를 할 때에 첫 번째로 '탐욕이 있는 것은 분명히 탐욕이 있다고 알아차리도록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탐욕이 있을 때는 마음이 당연히 맑고 가볍고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에 그런 탐욕들이 많이 생겨날까?

수행하는 여러분들의 입장에서, 수한이 마헤시, 어떤 경우에 그런 마음들이 많이 일어나? (수행자 대답) 예. 맞습니다. 뭔가를 자꾸 하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식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는지 몰라도 그 대상에 대한 경험이 없을 때는 그걸 경험해 보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거의 비슷할 겁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자꾸 강해지면 그게 자꾸 더해지는 거라.

그런 것들을 '아, 내가 지금 탐욕을 지니고 있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나서 탐욕이 없는 상태가 되고 나서 수행대상으로 옮겨라 하는 거라. 마헤시가 얘기했지만 무언가를 얻고자 하고 뭔가를 하고자 할 경우에는 그런 것들이 일어납니다.

 

또 어떤 경우에 생겨날까? 어떤 경우에 또 생겨날까? 얻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고, 내세우고자 할 경우에. 나 자신을 내세우든, 특히 말을 할 경우에 그럴 때가 많습니다. 뭔가를 내가 말을 할 경우에, 또는 나의 생각들을 드러낼 경우에, 대부분이 탐욕을 지니게끔 됩니다.

왜 그럴까? ''라고 하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를 내세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때는 탐욕이 일어나기가 쉽습니다. 이럴 때는 반드시 주의를 해야 됩니다.

 

또 어떤 경우에 탐욕을 지니게 될까? 실천하지 않으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천하려고 하질 않는 거라. 머릿속에서 자꾸 생각만 일으키고, 또 실천은 자꾸 뒤로 미루게 되는 거라. 그럴 때는 탐욕이 일어납니다. 어떤 형태의 탐욕이든 일어나게 됩니다.

남의 것들을 자꾸 보면서 그것에 대해서 판단하려고 하든지, 아니면 남의 잘잘못에 대해서 그것을 자기의 견해로써 풀이를 하려고 한다든지, 실천하는 것이 없으면 자꾸 그렇게 됩니다. 외부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부처님이 그걸 '남의 소를 세는 거와 같다'고 했습니다. 남의 소를 아무리 세어가지고 그걸 정확하게 알고 있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자기 거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데.

 

탐욕을 지닐 때는 크게 이렇게 세 가지 경우에 탐욕을 지니게 됩니다.

주의를 해야 됩니다. 내가 뭔가를 행하려고 할 때 그 시발점에는 탐욕이 있을 수가 있다는 걸 반드시 경계를 해야 됩니다.

 

수행을 처음에 시작할 때도 뭔가 더 잘하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더 뭔가의 경계를 알려고 한다든지 그럴 경우에는 탐욕을 지니게 됩니다.

그때는 반드시 먼저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아, 내가 지금 탐욕이 있는가? 그런 마음이 있는가?

그래서 그 마음을 다스리고 나서 수행 주대상으로 넘어가도록 해야 됩니다.

 

또한 일상적으로 여러분들이 말을 할 때 대부분 사람들은 탐욕을 지니게끔 됩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말을 할 때 굉장히 조심을 해야 됩니다.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말을 어떤 말을 할 것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도록 하십시오. 인식을 하고 나서 내가 말을 뱉을 때 말을 뱉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하십시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미가 있는 말을 하는 건지, 유익한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 속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게끔 말을 하는지, 아니면 화를 내고 있는 상태에서 말을 하는지, 아니면 내 욕심을 부리면서 말을 하는지,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말을 하고 나서도 마음이 개운하고 편안하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한 말들은 거의 대부분이 바른말들을 한 거라.

그래서 말을 하고 나서도 마음의 상태를 분명하게 살펴라는 거라.

대부분은 말을 하고 나면 들떠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말을 할 때 내가 탐욕을 지니고 말을 했다는 거라.

 

그리고 실천하기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아라 하는 거라.

실천되지 않을 경우에는 대부분은 탐욕을 지니게끔 됩니다.

인간의 마음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뭔가를 보면 가지고 싶게 되어있고, 뭔가가 앞에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범부 중생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라.

그런 것들을 대상을 볼 때마다 항상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보이면 '보인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들리고 맛보고 할 때도 분명하게 들린다고 알아차리고 맛본다 하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듣고 그냥 맛보고 할 경우에는 탐욕을 지니게끔 됩니다. 지니게끔 되니까 조금 더 법문이 있기를 바라게 되는 거고, 지니게끔 되니까 좀 더 맛있는 걸 먹으려고 하게 되는 거고, 그러는 거라. 실천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거라. 분명하게 일어난 대상을 알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렇게 아는 것들도 지속해나가질 못하기 때문에, 자꾸 끊어져버리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 부분을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탐욕을 지닌 이런 부분에서 주의할 점들은 반드시 그렇습니다.

 

그런 상태일 때는 반드시 마음으로 '아, 내가 탐욕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탐욕이 있는 상태의 마음도 대상이기 때문에 어떤 대상도 변하게끔 돼있습니다. 탐욕을 지니고 있는 마음이 엷어지든지, 아니면 그게 더 사라져 버리든지 이렇게 변하게 돼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그 대상은 영구하지 않고 딱 고정돼있는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해하겠습니까?

그게 첫 번째 '탐욕이 있을 경우에 탐욕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라' 하고 하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 마음은 '위따라가(vītarāga)' 탐욕이 없는 마음 입니다.

어떨 때 탐욕이 없는 마음이 될까? 아라한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탐·진·치가 없는 상태죠! 탐·진·치가 없는 마음입니다. 당연히 아라한의 마음들은 탐욕이 없는 마음이죠! 그럼 여러분들은 아라한이 아니니까 탐욕이 없는 마음 상태는 안 되겠네! 그렇습니까? 그렇진 않죠!

뭐 할 때 그러면 탐욕이 없는 마음이 됩니까? 마헤시, 공부 좀 하고 왔다고 자꾸 너한테 질문을 한다. 어떤 때입니까? 탐욕이 없는 마음?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으켜 나갈 때.

 

욕심이 많을 때는 뭐 하라고 그럽니까? 자애수행을 한다든지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든지 이렇게 하라고 그러죠! 화가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고.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으켜라'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면 당연히 탐욕이 없는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선한 마음은 여러분들 지속적으로 일으킬 수가 있죠? 좋은 마음 일으키는 거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닙니다.

자기가 이게 선한 마음인지 악한 마음인지 구분 못하는 사람은 없죠! 당연히 선한 마음 일으키면 자기도 좋을 거고 남도 좋을 거고. 악한 마음 일으키면 그 반대일 거고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한 마음이고 어떤 것이 악한 마음인 줄 압니다. 아라한의 마음 상태인 탐욕이 없는 마음의 상태는 그와 같습니다. 항상 선한 마음들이 일으켜지도록 만들어주면 됩니다. 쉽죠이!

 

마음에서 자꾸 자애수행을 하든지, 아니면 지금 내 몸의 상태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든지, 부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한다든지, 그리고 '아, 나는 죽는다' 하는 사실을 알아차리든지 하는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들을 자꾸 만들어나가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집착하는 것들도 없어지고 내 마음이 어떤 것에도 붙잡혀있고 매달려있질 않게끔 되는 겁니다.

이런 상태를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 그럽니다.

탐욕이 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탐욕이 있으면 탐욕이 있는 걸 알고 그걸 버려버리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보통 '뱀이 허물을 벗듯이 버려버린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자! 탐욕이 없는 마음이 어떤 건지는 인제 알았을 건데,

그럼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는 어떤 것이 탐욕이 없는 마음일까?

 

자칫 오해해서 잘못 알 거 같으면 흐리멍텅하게 있는 상태를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을 한 시간 했는데 뭘 했는지도 모르고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렸다. 탐욕이 없는 마음의 상태에서 한 시간이 지나간 겁니까? 그렇진 않죠!

그것은 오히려 탐욕이 없는 마음이 아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마음에 뿌리를 두는 것들입니다. 노력하려고 하는 마음들이 없는 상태,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변한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고 머물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탐욕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설혹 그런 상태에서 한 시간 동안 수행해서 “아! 참 수행 잘했다, 깨끗하게 하고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바르게 수행한 것이 아닙니다.

 

탐욕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경전에서는 뭐라고 했느냐면 '성냄에 뿌리를 두지 않아야 되고, 어리석음에 뿌리를 두지 않아야 된다.'는 겁니다.

성냄에 뿌리를 둔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슬퍼한다든지, 아니면 나쁜 마음인 악의를 가진다든지, 아니면 나를 내세울려고 하고 의식한다든지 남을 의식한다든지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성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들입니다.

어리석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관심이 없는 거라. 수행대상에 관심이 없는 거라. 그리고 뭔가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냥 뭐 되는대로 하고 놔둬버려. 그리고 마음이 불안해. 들뜨고. 이런 마음의 상태에 있어서는 절대 탐욕이 없는 마음의 상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거하고 탐욕이 없는 마음의 상태하고 똑같이 보지 말아라는 거라.

 

자칫 착각을 할 것 같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한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거라. 차라리 그럴 바에야 망상 피우면서 그중에 간혹 알아차림을 유지해서 몇 초라도 알아차림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수행하는 것이 훨씬 이익입니다.

가끔씩 스님들 간에 그런 얘기를 합니다. 한 시간 동안 수행하고 나서 한 시간 동안 내 망상 피웠다는 스님이 있고, 한 시간 동안 수행하고 나서 한 시간 동안 내 조불었다고 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누가 이익이 있을까? 망상 피운 스님이 이익이 있습니다. 그마만큼 성냄과 또는 어리석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나쁘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탐욕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자꾸 만들려고 해야 됩니다.

 

자애 수행을 해보십시오. 게을러지는가? 계속 마음속에서는 기쁨이 일어나지고 마음은 계속적으로 가벼워지고 마음은 계속적으로 평화로워지고 고요해집니다. 또는 내가 선한 마음을 내가지고 오늘은 여기 청소를 하겠다, 그래서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내게 되면 청소를 하는 동안 내내 활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뭘 하는지도 압니다. 그리고 기쁩니다. 그런 것들이 탐심이 없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 것들이 뭡니까? 선한 마음들이라는 거라. 선한 마음들을 자꾸 일으키라는 거라.

 

탐심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일으키려면

첫 번째가 불선한 것들을 행하면 안 됩니다. 선하지 않은 것들, 나쁜 말 나쁜 행동 나쁜 마음을 가지는 것 이런 것들은 자꾸 끊을려고 해야 됩니다. 일어나면 그만두고 일어나면 그만두고 해야 됩니다.

두 번째가 선한 마음을 자꾸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선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자꾸 하려고 해야 됩니다. 아, 내가 이것이 선한 일이다 착한 일이다 할 것 같으면 자꾸 하라는 거라. 그중에 하나가 여러분들 수행입니다. 수행도 선한 일들을 하는 겁니다. 그걸 길들이는 겁니다.

선한 일이 어디 수행뿐입니까?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남에게 끊임없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베푸는 것들부터 해서 도덕적인 것들을 잘 확립해서 계율을 잘 지켜나가는 것들, 참 많은 것들이 선한 일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자꾸 행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의존하지 말아라. '오까 아노깡 아깜마' 라고 그럽니다.

'어떠한 상태에도 머무르고 의존하지 말아라' 왜? 그 상태는 어떤 것이든 불완전하니까. 변하니까. 의존할 것 같으면 반드시 거기에는 머물려고 하고 내가 게을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도 의존하려고 하지 말아라. 설혹 내 부모님, 내가 가지고 있는 자동차,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 나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의존하지 말아라는 거라. 마음에 의존해가지고 그것을 집착하지 말아라는 거라.

의존하지 않는 버릇들을 평소에 자꾸 길들여야 됩니다.

 

그다음에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들을 자꾸 방어해야 됩니다. 마음이 참으로 많은 것들로부터 더러워집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거 더러워지지 않기 위해서 눈·코·귀·입 다 닫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살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면 보고 듣고 하는 것들로 인해 가지고 더러워지는데, 그것으로부터 더러워지지 않고 마음을 딱 방어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걸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분명히 알아차리고, 들리면 들리는 대로 알아차리려고 해야지, 그걸 자기 것으로 자꾸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스님 법문도 마찬가집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기억해가지고 다 써먹으려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더러워져 버립니다. 그것 자체를 듣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생각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냥 듣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그대로 남아서 설혹 그중에 아홉 개는 놓쳐버리고 하나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하나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면 열 개를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이익이라.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하게 방어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이런 것들이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탐욕이 있는 마음, 탐욕이 없는 마음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에는 성냄이 있고 없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오.